맑음의 정신병자/서양미술사

중세미술 연대기

草霧 2013. 4. 6. 00:00

 

 

 

 

중세 미술

 

 

초기 기독교, 비잔틴, 로마네스크, 고딕미술 등 14세기까지 서양의 화가들은 대부분 예수나 성인의 일생과 같은 기독교적인 주제를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종교화를 더욱 성스럽게 표현하기 위해 화가들은 풍부한 색채와 금도금을 이용해 그림을 그렸는데, 오늘날에는 단조롭게 보일지도 모를 이들 그림들이 중세인들에게는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중세 시대는 다른 여러 시대하고는 달리 이질적이고 특색있는 미술을 만들어 전개하였다. 그 특색은 당시의 미술이 모든 의미에 있어 기독교 미술이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중세 이후에 있어서도 기독교 미술은 풍부한 전개를 다 하고 있다.


중세의 예술가들은 신앙과 교리란 틀 안에 있으면서 신의 지배와 교회의 권위 아래서 작품을 제작하였다. 예술적 개성은 종교적 권위의 규범과 제약 아래서만 성립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중세 예술의 대부분은 '무명의 예술가'들의 작품이며, 때로는 집단적인 협동 제작이었다. 그들 위에 있는 것은 교회이며 교리이며 또 민중의 신앙이었다. 이와 같은 기독교 미술로서의 조건이 중세미술과 기타의 여러 성격을 대부분 규정짓는 것이었다 해도 무방하다.

 

(1) 초기 기독교 미술

 

 

"초기 기독교 미술은 설교를 위한 미술로 교리를 기독교 도상으로 간단하게 표현하였다."

 

서양중세의 미술은 기독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리스·로마 미술은 인간 중심의 미술이었으나 중세는 기독교 중심의 미술이었다. 한마디로 기독교는 세상의 중심이었고 민중을 천국으로 이끄는 안내자였다. 교회는 일상생활의 중심이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예술의 중심지였다. 벽화, 조각, 모자이크 등의 중세 미술은 교회건축에 종속되었다.

 

기독교 인들에게 있어서 순간적인 지상의 삶은 부질없는 일이고, 현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인간 내부에 자리한 정신이었고 눈에 보이는 세계는 중요치 않아서 치밀하게 그려 넣지 않았다. 기독교 미술은 철저하게 우상의 숭배와 표현을 금지하였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양식에서는 예수를 비롯한 형상이 그려지지 않았다. 반면 양이나 물고기, 비둘기등 전통적 기독교 관념을 상징화한 도상학이 나타났다. 결국 교회에 예속된 중세 미술은 설명적이었고 장식적이었던 것이다.

 

 

지하 묘굴의 프레스코 벽화로 대표되는 카타콤 미술은 크리스트교 박해 시대의 미술로 초기 기독교 미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벽화들이 당시 회화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는데 기독교의 상징주의에 입각하여 그림의 모티브가 신중하게 선택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AD313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 예배장소가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공공 예배당이 필요해지고 그 필요에 의해 지어진 초기 교회 양식이 바실리카 양식이고 이것이 주된 흐름이 된다. 그리고 바실리카 미술가들은 카타콤브 세대를 참고하여 새로운 미술을 만들어내는데 모자이크 양식이 그것이다.

 

 

 

이 시대의 화가들 역시 사실적인 그림에는 관심이 없었고 필요한 내용의 전달, 즉 설교가 목적이었다.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양치기, 하늘의 연회, 불멸성을 상징하는 수탉, 영혼을 의미하는 비둘기, 희망을 상징하는 닻등이 종종 쓰이고 있으며, 구약성서에 나오는 요나의 이야기 등이 구원의 전형으로서 그려지기도 한다.

 

조각의 경향은 기본적으로 우상 숭배의 오명을 피하기 위해 등신대의 인물상이나 대형 예배당의 제작을 꺼렸던 당시 상황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종교 조각은 반모뉴멘탈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즉 그리스·로마 조각의 공간의 깊숙함이나 당당한 규모가 없어지고 소규모의 형태와 레이스 같은 장식으로 기울어졌다.

 

(2) 비잔틴 미술(5~10C) -도상圖像의 근원   

 

 

"비잔틴 미술은 고대 오리엔트 미술의 장려함이나 엄숙함을 살려내어 기독교 문화를 찬양하는데 이용되었다."

 

비잔틴 미술은 비잔티움(이스탄불)을 중심으로 하여 4세기경부터 12세기경까지 번영하였던 미술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330년 동로마의 비잔틴에 수도를 건설하고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에서 그리스 정교회에 바탕을 둔 크리스트 문화가 꽃을 피웠다.

 

이 미술은 동서 문화를 절충한 기독교 미술로 동방 미술과 서양 헬레니즘 미술을 혼합시킨 것이다. 로마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정한 후 미술의 중심은 점차 동방으로 옮겨졌고 약 1천년에 걸쳐서 서양과 동양 미술이 융합된 문화를 이루었다.

 

비잔틴 건축의 양식은 초기 기독교 시대의 바실리카 형식과 동방의 전통적인 팔각당(원당) 형식의 두 종류가 있다. 이것들은 소아시아 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바실리카 양식에서 집중형 돔형식으로 변화되고 돔 안에는 모자이크 벽화가 그려졌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성 소피아 성당, 모자이크로 유명한 성 비탈레 성당, 성 마르코 성당등이 있다.


그리스도나 성모를 판자 위에 예배의 대상으로 그린 이콘 (휴대 가능한 나무판에 그려진 그림), 즉 성상화가 그려졌는데 템페라나 납화법으로 나무에 그려진 호화로운 이콘들은 작은 모자이크 타일로 대체되면서 더욱 화려해졌다. 특히 황제의 선물로 사용되기 위해 디자인된 이콘들은 값비싼 금속과 애나멜을 사용함으로써 더욱 풍부해졌다.

 

 

비잔틴 미술의 주역은 모자이크였다. 로마의 모자이크는 돌조각으로 제작된 반면 비잔틴의 모자이크는 색유리를 불에 구워 만들었는데 거대한 채색효과를 낸다는 점과 멀리서 볼수록 효과적 이라는 점, 특히 강렬하고 풍부한 색채를 지닌 비잔틴 모자이크의 색유리 파편은 빛을 반사하는 반사경 역할을 하여 보는 사람의 환상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신비적인 분위기는 서유럽 크리스트 미술(로마네스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비잔틴 미술에서 필사본 성서의 세밀화 장식은 건축과 함께 두드러지는 예술적 업적으로 꼽힌다. 암흑시대 수도사들은 성직자이면서 동시에 교사, 예술가였는데 초기 채색사본들은 대개 이들에 의해서 제작되었다. 작품의 주된 목적은 성서의 내용과 그 의미와 느낌을 감동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비잔틴에서는 726년 황제의 성상 금지령이 선포되었다. 성상 금지령은 그리스도와 성인, 성모마리아등을 형상으로 표현하는 것을 금지하는 운동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의 벽화나 원본 조각상을 볼 수 없는 이유도 이 시기에 모두 파괴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의 근거는 '나 이외에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성서의 기록인데, 이는 교리적으로는 성상 남용에 대한 반발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교황 권한의 확장에 대한 왕권 회복 운동이었다. 한편 로마 교회에서는 게르만 족을 크리스트교로 개종시키는데 성상이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이를 반대하였다. 그후, 비잔틴 황제를 수장으로 하는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로마 카톨릭으로 갈라져(1054),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한편 내부의 분열과 게르만족의 계속된 침입에 쇠약해진 서로마 제국은 4세기 후반 멸망하고 로마를 멸망시킨 게르만족은 로마의 옛 땅에 지방왕국을 형성하고 로마문명의 유산을 흡수하고 기독교에 동화된다. 유럽의 중세문화는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성격을 지닌 초기 기독교 미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게르만족의 추상 장식문양에서도 커다란 영향을 입었다.

 

한마디로 중세유럽의 미술가들은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성서의 내용과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고, 현실이란 언제나 덧없고 순간적이라고 생각한 중세 미술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변 치 않는 신의 정신을 마음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일이었다.

 

(3)로마네스크 미술(11~12C) -기독교적 환상세계                

 

 

" 이시기의 미술품들은 위압적이면서 교화적인 내용이 주류를 이루는데 이는 문맹자들에게 성서 역할을 하며 신자들에 정신적 각성을 주기 위함 이었다.

 

로마네스크 미술이란 11~12세기에 걸쳐 서유럽의 크리스트교 사회 전체에 발달했던 미술을 말하는데, 양식적으로는 로마미술로부터 파생된 로마적인 미술을 뜻한다. 이양식은 로마 양식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초기에는 각 지방의 문화가 하나씩 혼합되면서 퍼지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노르웨이의 바이킹, 초기 크리스트교 미술, 비잔틴, 카롤링거, 오토, 심지어는 이슬람 양식들까지 뒤섞이면서 이시기의 일반적인 양식이 된 것이다.

 

이 시기에도 여전히 교회건축은 미술의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는데. 이는 교회가 하느님이 거처하시는 지상의 천국이라고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 건축이 중심이 되어 조각이나 회화는 교회 건물의 종속적 장식물로서 발달하였다.  건축의 특징은 아치형의 석조 천장과 이것을 받쳐주는 창문없는 두꺼운 벽, 그리고 굵은 기둥을 지닌 양식이다. 따라서 내부는 어둡지만 중후하고 신비적인 분위기를 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조각으로서는 교회 출입문 정면이나 좌우에 있는 기둥에 성서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동물을 새긴 것이었다. 창이 작고 벽이 넓은 로마네스크 교회의 실내는 거의 모두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었다.

 

로마네스크 회화는 고유의 도상을 발전시켰다. 여기에는 심원한 신학적 의미를 가지는데 형식적으로는 육체적인 미의 이미지를 추구하지 않고 정신적이고 영원한 미를 추구하였다. 내용적으로는 교훈적인 내용이 주류를 이루는데 로마네스크 벽화는 "무식한자들의 성서"역할을 했다. 벽화로서는 프레스코화.템페라화 등이 발달하였는데 그 힘찬 터치와 대담한 채색법은 현대 미술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또한 조각이나 회화는 모두 인물의 모습이 초현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이시기 양식의 특징이 되고 있다.

 

 

 

이 시기에는 원근법과 명암법등 사물을 묘사하기 위한 양식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 덕택에 중세 미술가들은 형태뿐 아니라 색채에서도 자유로웠다. 그들은 자연의 모방적 색채가 아닌 자기가 원하는 색채를 마음대로 선택해서 칠했다. 자연세계를 모방할 필요가 없는 중세의 미술가들은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는 법을 통하여 작품을 제작했던 것이다.

 

(4) 고딕 미술 (13~14C) -사실주의의 부활       

        

 

 

 "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는 자연적이고 사실적인 힘이 고딕 양식의 핵심이다."

 

고딕이란 게르만족의 하나인 고트족에서 유래되었으나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인들이 '이들이 고전의 문화를 파괴시켰다고 보았기 때문에 야만적'이란 의미로 중세미술 전반을 가르킬 때 사용하였던 용어였다.


건축에서는 첨두형 아치와 공중부벽, 갈빗대 모양으로 휘어진 리브가 서로 교차하며 이루어 내는 궁륭 천장등에 있다. 이 구조는 이때까지 한번도 실현해 보지 못한 높이를 가능하게 하였고, 하늘에 보다 가까이 가려는 인간의 욕구를 반영하여 높은 첨탑을 만들냈다. 또한 이것을 받쳐주는 가늘고 높은 기둥, 크고 높은 아치형 창문등이 특징이다.  단순히 역학적 구조의 기능만 있었던 두꺼운 벽은 창문으로 대치되어 스테인드글라스라는 새로운 장식 미술의 세계를 열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내의 채광에도 큰 역할을 하게 하였다. 대표 건축물로는 노틀담 성당, 샤르트르 성당, 아미엥 성당, 밀라노 성당 등이 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최초로 나타난 시기는 비잔틴 시대였지만 로마네스크 후기부터 고딕에 걸쳐 많이 사용되었다. 리브의 출현으로 얇은 벽체로도 높이 지을 수 있게 된 건축술의 발달은 창문의 크기를 확대시켰고 창으로 들어오는 선은 실내 채광의 기능을 넘어서게 되었다.

 

수직적인 고딕 건축이 보여주는 신앙심과  정신성과는 반대로 미술가들은 인간과 자연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림의 내용은 악의 세력과 싸우는 전투적인 장면이 아니라 내면의 감동적 표현에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로마네스크의 격한 운동감에 비해 고딕 조각은 마치 사실적인 그리스 미술이 부활한 듯 하다. 초기 고딕 조각의 목표는 휴머니즘에 기초한 사실적이고 감각적인 표현에 있었고, 환상적 세계에서 일상의 세계로 눈을 돌린 것이다. 고딕 조각은 매우 사실적인 힘으로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으며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는 이 사실적인 힘이 바로 고딕 사실주의의 핵심이었다. 

 

벽화양식이 퇴화되면서 다시한번 채색 필사본이 중요한 회화의 분야로 등장하는데, 수도원이 아닌 일반 공방에서 이것이 제작되었다. 좀더 자유로운 요건을 가진 작가들은 표본을 베끼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표본을 해석하여 작가의 개성과 감동을 표현하려 노력하였다.

 

이탈리아의 고딕회화는 다른 유럽 회화 양식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중 피렌체 화파의 지오토(1266~1334, 치마부에의 제자)는 원근법에 의한 깊은 공간감과 인체에 중량감을 줌으로써 회화에 시각적실재감을 나타낼 수 있었다. 지오토 이후 이탈리아 미술가들은 중세의 평면적인 회화에서 벗어나 현실을 실감나게 묘사하는 표현기법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고전적 원근법과 훨씬 부드러워진 형태묘사로 생동감이 넘치는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14세기 말경 고딕양식은 국제 양식으로 발전하여 1420년경까지 유럽전역을 지배하였는데 이것을 국제고딕이라고 불렀다. 국제 고딕의 미술가들은 세밀한 관찰력을 토대로 주변세계를 묘사했는데 미술가들은 자연을 직접 관찰하고 그 결과를 그림으로 옮겨 담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묘사력 정도에 만족하지 못하고 원근법이나 명암법 등의 다양한 시각법칙을 탐구하기 시작하여 르네상스의 도래를 예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