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미술Ⅲ, A.예루살렘을 사수하라 - 1부.십자군 전쟁(기타 십자군-2 )

草霧 2013. 3. 25. 09:39

 

 

 

 

중세 미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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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과 이슬람 부흥 그리고 문명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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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야욕이 신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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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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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재 글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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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미술, 1부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편에서는 3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십자군 전쟁 ”, “2부 이슬람의 부흥”, “3부 문명충돌 로 기독교의 광기와 무슬림의 충돌을 통하여, 문명충돌과 미술의 진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참고로, “2. 이슬람의 부흥편은 본 저의 서양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오리엔탈리즘 편)을 참조하세요.

 

1. 십자군 전쟁

2. 이슬람의 부흥

3. 문명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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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십자군 전쟁 (CRUSADE, 1095-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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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소개하는 기타 십자군은 교황이 아닌, 황제들에 의하여, 유럽에 침입한 이민족과의 전투로 몽고의 유럽원정 후, 황제의 요청으로 수시로 교황에게 요청한 십자군 전쟁으로 십자군 원정과 별개로 본다. 본 내용은 전체 십자군원정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이 부분을 첨부합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 간의 전쟁으로 특히, 발칸반도을 전장으로 이루워진다. 이후, 19세기 말, 발칸 전쟁으로 계기가 되는 사건들이다.  <주의>

 

레콩키스타 (Reconquista, 718-1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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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르몽 교회회의 (Council of Clermont, 1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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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 십자군 (1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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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십자군 원정 (1096-99)

니케아(1097) 도릴라이움(1097) 안티오키아(1097~1098) 마라트 안-누만(1098) 예루살렘(1099) 아스칼론(1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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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국가의 성립 (1098-1291)

아제르 상귀니스(1119) - 몽기사르(1177) - 이나브(1149) - 하틴(1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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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십자군 원정 (1147-49)

리스본 공방전 (1147) - 다마스쿠스 공방전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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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십자군원정(1189-92)

예루살렘의 공방전 (1187) - 아크레 공방전 (1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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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 십자군 (발트 십자군, 1193-1236)

독일 십자군 (1096) - 웬드 십자군 (1147) - 리보니아 십자군(Livländischen Kreuzzug 1198~1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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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십자군원정 (1202-4)

콘스탄티노플 약탈(1203-04) - 라틴 제국(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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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비 십자군 (Albigenses Crusades 알비파 십자군, 1209-29)

도미니코회와 종교재판 (1223 ~1255) - 퀘리부 함락과 종결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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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십자군 [Children's Crusade]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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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차 십자군원정(12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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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러시아 십자군 원정 (1217-83)

1차 프러시아 십자군 (1217~1228) - 2차 프러시아 십자군 (1230~1283) - 프러시아의 정복 (1237~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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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차 십자군원정(1228-40)

예루살렘 탈환(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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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틱 북 십자군 전쟁 (123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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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차 십자군원정(1248-52)

티발 1세 십자군(1239) - 예루살렘 포위 (1244) - 라 포르비에 전투 (Battle of La Forbie,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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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십자군 (1268~1303)

프랑크 - 몽골 연합 (Franco - Mongol alliance1271) - 아크레 공방전 (Siege of Acre, 1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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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기들 십자군 (Shepherds Crusade, 1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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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차 십자군 원정(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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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차 십자군 원정(127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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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고네스 십자군(1284-85, 일명 아라곤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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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십자군(1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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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헝가리 전쟁(1526-52), 니코폴리스 십자군 (1396)

니코폴리스(1396, Bitka pri Nikopol) 바르나 코소보 베오그라드 바슬루이 브레드필드 오트란토 크르바바 평원 모하치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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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르(Tatarlar) 십자군 전쟁 (1398-99)

레그니차 전투(Bitwa pod Legnicą,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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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스파 십자군 (Hussite, 14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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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 십자군 전쟁 (144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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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나 십자군 (Crusade of Varna,1444-48)

바르나 전투(1444) -2차 코소보 전투 (második rigómezei csata,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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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란토 십자군 (1480-81)

오트란토 전투(Battle of Otranto, 148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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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십자군 (1529)

(Vienna) 공방전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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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판토 십자군 (Battle of Lepanto, 1571)

레판토 해전 (Proelium Lepanthinum, 1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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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합스부르크 십자군 (1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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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십자군 전쟁 - 2

이번에 소개하는 기타 십자군은 교황이 아닌, 황제들에 의하여, 유럽에 침입한 이민족과의 전투로 몽고의 유럽원정 후, 황제의 요청으로 수시로 교황에게 요청한 십자군 전쟁으로 십자군 원정과 별개로 본다. 본 내용은 전체 십자군원정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이 부분을 첨부합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 간의 전쟁으로 특히, 발칸반도을 전장으로 이루워진다. 이후, 19세기 말, 발칸 전쟁으로 계기가 되는 사건들이다.  <주의>

 

오스만-헝가리 전쟁 (1526-1552)

니코폴리스 바르나 코소보 베오그라드 바슬루이 브레드필드

오트란토 크르바바 평원 모하치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

 

 

니코폴리스 십자군 (1396)

 

니코폴리스 전투(1396, Bitka pri Nikopol)

1396925일에 도나우강변의 니코폴리스에서 오스만 제국의 바예지드 1(1389~1402)와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가 이끄는 유럽연합 (헝가리 왕국,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왈라키아, 폴란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왕국, 구 스위스 연합, 튜튼 기사단,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성 요한 기사단) 사이에서 일어난 전투이다.

 

흔히 니코폴리스 십자군이라고 불리며, 중세 최후의 대규모 십자군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결정적 승리로 끝났고, 바예지드 1세는 카이로의 맘루크 왕조 보호 하에 있던 칼리파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술탄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14세기 왕에 의해 개인적으로 일어난 많은 소규모의 십자군이 있었다. 1389년 코소보 전투 승리 이후, 오스만 제국은 발칸 반도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를 계속 침략해, 겨우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과 모레아 일부로 몰아넣었고, 그 후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하여 공성전을 진행하였다. (1390, 1395, 1397, 1400, 1422년 공성전, 1453년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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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3년 불가리아의 군주 이반 시시만은 임시 수도였던 니코폴리스를 오스만 제국에게 공격당해 빼앗겼다. 한편 그의 동생이었던 이반 스라치미르는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되는 대가로 그의 영토 비딘을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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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과 기독교의 대치선은 서서히 헝가리 왕국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헝가리 왕국은 이제 동부 유럽에서 두 종교의 새로운 대치선이 되고 있었고, 공격받을 위협에 처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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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공화국은 모레아의 일부 및 달마티아라 불린 베네치아의 영토를 포함한 발칸반도가 오스만 제국에게 지배당하면 아드리아 해, 이오니아 해, 에게 해에서 베네치아의 영향력이 감소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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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바 공화국은 반면에 만약 도나우강과 보스포루스-다르다넬스 양쪽 해협에 대한 통제권을 오스만 제국이 획득한다면, 카파, 시노페 등의 제노바가 중요 식민지를 다수 보유하고 있는 흑해와 유럽의 교역로을 최종적으로 오스만 제국이 독점하는것을 위험하다고 보고 있었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 갈라타의 요새를 바야지드 1세에게 기습공격을 당했다.

 

1394년 교황 보니파시오 9세는 투르크에 대한 새로운 십자군을 선언했으나, 당시 교회 대분열로 인해 아비뇽과 로마에서 각기 대립 교황이 세워져 교황권이 2개로 나뉜 상태였기에 교황이 십자군을 소집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영국의 리처드 2세와 프랑스의 샤를 6세는 십자군에게 자금 지원하고,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와 프랑스의 협상가가 연합십자군에 관한 절충이 1393년부터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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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폴리스(1397) 공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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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폴리스 공략

 

미르체아의 제안은 왈라키아의 군주가 영광을 독차지하려고 한다고 생각한 다른 십자군들에게 거부당하고, 서유럽인들의 돌격 작전을 입안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완벽하게 격파되었다. 프랑스의 해군 제독 장 드 비엔, 장 드 카루주 전사, 장 드 느베르, 앙게랑 7세 드 쿠시, 그리고 장 르 멩그르와 같은 프랑스의 원수들은 사로잡혔다. 세르비아 중무장 기병대의 돌격을 지휘하여 방어가 취약한 지기스문트의 우익을 포위 공격한다. 지기스문트의 군대는 항복한다. 다른 십자군들이 벌인 절망적인 공격과 지기스문트의 항복을 목격한 왈라키아 군대는 퇴각하여 고향으로 향한다. 지기스문트는 니콜라 고르잔스키와 실리의 헤르만의 도움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아드리아노플 함락

 

지기스문트은 헝가리와 독일의 군대를 지휘하며 중앙을 담당

트란실바니아 군대는 우익

미르체아의 왈라키아 군은 좌익

바예지드 본대는 궁수와 예니체리

오스만군과 세르비아군 좌우

헝가리와 폴란드 연합군은 바르나 전투 패전(1444)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1453), 모레아(1460), 트라페주스 제국(1461 )멸망

교황 보니파시오 9(Bonifacius PP. IX, 1389 - 1404)

리처드 2(Richard II, 1367 ~ 1400)

샤를 6( Charles VI, 1368 ~ 1422)

신성 로마 제국의 헝가리왕 지기스문트 (Sigismund, 1368 ~ 1437)

왈라키아 공국(Ţara Românească1317)의 미르체아 1

오스만 제국의 바예지드 1( I. Bayezid, 1360~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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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왕국,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왈라키아, 폴란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왕국, 구 스위스 연합, 튜튼 기사단,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성 요한 기사단, 바예지드 1, 불가리아의 이반 시시만, 이반 스라치미르, 교황 보니파시오 9, 영국의 리처드 2세와 프랑스의 샤를 6, 지기스문트, 존 오브 곤트, 오를레앙 공 루이, 부르고뉴 공국의 용담공 필리프, 느베르의 장, 부르고뉴 공국, 바이에른의 팔츠와 뉘른베르크, 왈라키아 공국의 미르체아 1, 바이에른인 십자군 기사 요한 스킬트베르거, 세르비아의 스테판 라자레비치

 

 

3,000명에서 ~10,000명에 달하는 십자군 포로가 전투 후 처형되었다. 프랑스 군대가 오스만군 포로를 처형한 라호보 학살에 대한 앙갚음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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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의 술탄 바예지드 1세가 티무르에게 앙카라 전투(1402) 패전으로 오스만 제국에 대공위 시대를 열었고, 미르체아는 이틈을 노려 헝가리와 연합하여 오스만에 대항하는 전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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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 이후에 발칸 반도에 대한 오스만 투르크의 전진을 막기 위해 서유럽에서 구성된 원정은 더 이상 없었다. 르네상스시대가 다가올 때까지였다. 2차 불가리아 제국의 종결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니코폴리스의 승리로 오스만군은 그들에 대항하는 또 다른 유럽 동맹을 조직하려는 움직임을 억제할 수 있었다. 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하여 압박을 계속했고, 발칸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으며, 중부유럽의 거대한 위협이 되었다.

 

1389년 코소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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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스파 십자군 [Hussite, 1420 ~ 1434]

 

 

일명 보헤미안 전사와의 성전으로 후스파는 종교 개혁의 선봉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체코의 종교 지도자 얀 후스의 가르침을 따르던 기독교 운동이다. 사회적 문제들을 촉매제로 하여 체코 전역에 널리 확산되었다. 후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단죄한 콘스탄츠 공의회 이후 후스에게 신변상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서신을 보내 속인 체코 정부는 그를 곧장 체포하여 141576일 처형하였다. 그리고 종교적 정치적 문제를 이유로 후스파를 토벌하기 위한 일련의 전쟁(1420-1434)이 발발하여 토벌에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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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년 그가 죽은 뒤 많은 보헤미아 기사들과 귀족들은 공식 항의서를 발행하고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을 보호했다. 스트리브로의 야코베크(1429 죽음), 타보르파(극단적인 후스파)의 바클라프 코란다, 프라하 개혁당의 얀 첼리프스키가 있었다. 1419년 벤체슬라스가 죽고 루마니아와 헝가리의 왕 지기스문트가 계승했는데, 그는 후스파를 철저히 적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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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프라하를 장악하는 데 실패한 지기스문트는 1420년 후스파에 대해 십자군원정을 선포한 교황 마르티누스 5세의 대칙서를 공포했다. 프라하와 후스파 동맹은 지기스문트를 폐위시키고 십자군의 2차례에 걸친 프라하 공격을 물리쳤다. 1427년 프로코프 홀리가 이끈 후스파는 혁명적인 정치 계획을 단행하기 시작했다.

 

바젤 공의회(1431)와 평화협상(1436, 이글라우 협정)1620년 로마 카톨릭에 흡수통합한다.

 

 

프라하 4개 조항 합의와 후스파 분열

양형영성체파와 가톨릭 세력은 1434년 리파니 전투에서 타보르파 격파

2종류의 성찬식, 교회토지의 사회환원, 얀 로키카나를 대주교로 보헤미아 가톨릭 독립 교회

15세기 중엽 보헤미아에서 형제단운동이 보헤미아 형제단(1467) 조직과 탄압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프로테스탄트는 헤른후트 공동체(모라비아 교회)

후스파가 지은 단순하고 감동적인 찬송가들은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산물이었다. 후스파 전쟁은 바우첸 필사본에 실린 여러 편의 시와 많은 연대기, 그밖의 산문에 반영되어 있다.

보헤미아의 벤체슬라스 왕(바츨라프 4, 1419)

교황 마르티누스 5

양형영성체주의

후스 [Jan Hus (1369-1415)] _ 15세기 체크의 종교개혁자

콘스탄츠 공의회(1414~18)

보헤미아 사제 로키카나 [Jan Rokycana 1390~1471]

모라비아 교회

바젤 공의회 (1431~1449)

신성 로마 제국의 헝가리왕 지기스문트 (Sigismund, 1368 ~ 1437)

교뢍 파울루스 2(Paul , 1417 ~ 1471)

보헤미아(Böhmen)

보헤미아 형제단(Unitas Fratrum)

논문 보헤미아어 철자법 De orthographia Bohemica

페트르 헬치츠키의 급진적인 사회사상과 평화주의 <!--[if !supportEmptyParas]--> <!--[endif]--> 

 

 


 

 

르나 십자군 (Crusade of Varna)

 

 

 

바르나 전투(1444)

1444년 동부 불가리아에 있는 바르나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술탄 무라드 2세 휘하의 오스만 제국군은 브와디스와프 3세와 야노시 후녀디가 지휘하는 폴란드와 헝가리군을 격퇴하였다. 이 전투는 바르나 십자군(Crusade of Varna)의 마지막 전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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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그라드와 트란실바니아에 대한 1440년에서 1442년까지의 술탄의 공략 실패, 1442년에서 1443년까지 벌어진 야노시 후녀디 원정 실패한 후에 오스만 술탄 무라드 2세는 헝가리와 10년간 평화 조약을 맺었다. 아나톨리아의 카라만 토후국과 14448월 평화조약을 맺은 후에, 아들 메헤메드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헝가리는 베네치아, 교황 에우제니오 4세와 협력하여 새로운 십자군을 조직하였다. 이 소식은 무라드 2세을 칸으로복귀하길 청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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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연합군은 헝가리와 폴란드 군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체코, 교황청 기사단, 튜턴 기사단,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불가리아, 왈라키아, 리투아니아, 세르비아 그리고 루테니아(우크라이나)의 군대로 구성되었다. 교황청과 베네치아, 그리고 제노바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봉쇄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교황청 함대와 합류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항해해 내려가 오스만 군을 유럽에서 쫓아낼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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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의 대군이 서쪽으로 진군하여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였던 바르나에 도착했다. 한편, 교황청의 대리인 줄리아노 체사리니 추기경은 퇴각을 주장하였으나, 기독교 군대는 고립되어 있었다. 체사리니는 기독교 함대가 도착할 때까지 후스파의 바겐부르크를 사용해 방어할 것을 제안했다. 사령관들은 지지했으나, 브와디스와프와 후녀디는 방어적인 전술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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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군은 적은 수의 기독교 군대에게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퇴각한 적들을 추격하거나 중부유럽으로 진군할 수 없었다. 많은 유럽인 포로들이 살해되거나 노예로 팔렸다. 그리고 이 패배는 1453년 벌어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의 배경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메메드 2세가 물러나고, 무라드 2세가 복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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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를 표하는 마음에서 불가리아 사람들은 애정을 담아 브와디스와프에게 그가 싸우다가 죽은 도시의 이름을 따서 바르넨치크(Варненчик (Varnenchik, 폴란드: Warneńczyk)라는 이름을 주었다. 크라쿠프(Cracow)에 있는 바벨(Wawel) 성 언덕에 있는 성당에 또 다른 무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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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유럽 침공

술탄 무라드 2(Sultan Murad II)

브와디스와프 3

야노시 후녀디(János Hunyadi)

무라드 2

교황 에우제니오 4

체사리니 전사, 바르 살해

아나톨리아 총독(beylerbey) 카라카 베이 참살

왈라키아 기병대의 약탈과 노략질

음유시인 미하엘 베하임의 한스 메르게스트의 이야기 작곡

브와디스와프의 죽음

라슬로 5

테오토코스 파나기아(Theotokos Panagia) 전설 

 

 

2차 코소보 전투 (második rigómezei csata, 1448)

14481017일에서 1020일 코소보 분지(Kosovo Polje)에서 야노시 후녀디(John Hunyadi)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헝가리 주도 하의 가톨릭연합군과 무라드 2(Murad II)가 지휘하는 오스만 제국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는 예니체리 군단이 술탄 스스로가 전열에서 지휘를 할 경우, 적에 의해 전열이 붕괴하더라도, 궤주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발칸의 기독교 국가들은 이 전투의 패배 이후에 오스만 제국에게 저항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후녀디는 석방된 후, 오스만의 공격에 대하여 성공적으로 헝가리 왕국을 지킬 수 있었다. 스칸데르베그 1468년 사망 후, 알바니아는 오스만에게 함락당하고 만다. 

 

리고메죄(Rigómező; 코소보 평원)

후녀디는 포로로 되고, 헝가리군 전멸

오스만 제국(1299~1922)의 결정적 승리

헝가리 왕국(896~1848)의 야노시 후녀디

알바니아(Shqipëria 1272~1912독립) 의 스칸데르베그(Skanderbeg 1405 ~ 1468)

세르비아의 주라지 브란코비치(Đurađ Branković)

예니체리(janissary, 14c~1826 "새로운 병사")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 2(II. Murat, 1404 - 1451)<!--[if !supportEmptyParas]--> <!--[endif]--> 

 


 

오트란토 십자군 (1480 ~ 1481)

 

오트란토 전투(Battle of Otranto)

1480년과 1481년 남이탈리아의 아풀리아의 오트란토 도시와 요새를 둘러싸고 벌어진 전투로 오스만 제국과 나폴리 왕국 사이에서 일어난 전투이다.

 

로마 교황과 로마 시민을 도시에서 피난시키려는 계획세우고, 로마 교황 식스토 4세는 십자군 소집을 다시 호소했고,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와 헝가리, 프랑스가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그러나 1479년 오스만 제국과 깊은 평화조약을 체결한 베네치아 공화국은 응하지 않았다. 오늘날 800명의 순교자의 유골과 시체는 오트란토 대성당과 나폴리의 포르미에로 산타 카타리나 교회에 납골되어 있다.

 

 

이탈리아-스페인-헝가리 승리

오스만 제국의 게디크 아흐메드 파샤 (Gedik Ahmed Paşa, ?~1482)

나폴리 왕국(Regno di Napoli 1285~1816)의 알폰소 2

아라곤 왕국(Reino de Aragón, 1035~1469)의 프란체스코 라르고

헝가리 왕국, 바라지즈 마기야르

오스만의 공격(1480)으로 이탈리아의 아풀리아 지방에 있던 오트란토 도시 점령

스테파노 아그리코리 대주교

스테파노 펜디네리 주교

프란체스코 라르고 백작

이슬람교로 개종 거부한 시민이 미네르바의 언덕 (순교의 언덕)에서 참수

성 니콜라오 디 카스올레 수도원 파괴

게디크 아흐메드 파샤의 철군

교황 식스토 4(Sixtus PP. IV, 1471 - 1484)

페르디난도 1

알폰소 2

헝가리왕 마티야스 코르비누스

유럽인의 공격 (1481)년 도시 재탈환

1481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메드 2(II. Mehmet, 1432 - 1481)가 서거  <!--[if !supportEmptyParas]--> <!--[endif]-->  

 


 

레판토 십자군 (Battle of Lepanto, 1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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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판토 해전 (Proelium Lepanthinum, 1571)

 

1571107일 베네치아 공화국, 교황령(교황 비오 5), (나폴리와 시칠리아, 사르데냐를 포함한) 스페인 왕국과 제노바 공화국, 사보이 공국, 몰타 기사단 등이 연합한 신성 동맹의 갤리선 함대가 오스만 제국과 벌인 해상 전투로 오스만의 전투용 갤리선 함대를 결정적으로 패배시켰다.

 

107, 오스만 함대와 신성 동맹의 함대가 그리스 서부의 파트라스 만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 이후 신성 동맹은 일시적으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였으며, 로마를 오스만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고, 유럽을 향한 오스만의 팽창을 저지하였다.

 

노를 젓는 전함들만으로 치러진 이 마지막 해상 전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결정적인 전투 가운데 하나로 레판토 전투 이후 세계를 움직이는 추는 다른 쪽으로 흔들리기 시작해, 부유함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해가서,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세계의 패턴을 갖추게 되었다. 더불어 중동과 유럽 사이의 계속된 다툼의 전환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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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국들은 오스만 제국이 자신들의 지중해 해상 무역을 심각하게 위협한다고 판단하였다. 기독교 연합 함대 대 투르크 함대의 전투로 1571년 시칠리아 메시나에서 합류한다. 우르지 알리는 술탄 셀림 2세에게 거대한 몰타 기사단 기를 헌상하였고, 술탄은 이로 인해 우르지 알리에게 검을 뜻하는 카르라는 칭호를 수여하였다. 우르지 알리는 이로 인해 카르 잘리 파샤로 알려지게 되었다. 결정적인 기독교 연합 군대의 우세는 그들의 함선에 실린 총포가 적들보다 확실히 많다는 점에서 기인하였다. 화승총병과 머스킷 총병들을 승선시킨 데 반해서, 오스만군은 복합궁이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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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는 15세기부터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지 않았던 오스만 군에게 궤멸적인 피해를 입혔다. 또한 기독교 세계의 절반에게 레판토 해전은 "기독교의 영원한 적"으로 여겨진 투르크 족의 몰락이라는 염원을 고취시켰다. 서구 역사가들은 이를 기원전 31년의 악티움 해전이래로 가장 결정적인 해전으로 여기고 있다.

 

 

신성 동맹의 불협화음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회복 계획 일환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공격하는 계획 보류. 신성 동맹 (1571)1573년 평화 조약에 서명하면서 동맹은 해산되었다. 오스만 해군의 새로운 함대 그러나 사실상 오스만 군의 "살아있는 전통들이 죽었다는 것"을 상징한다.

 

베네치아은 157183일 피얄레 파샤 휘하의 오스만 투르크 군에 함락된 키프로스에 대한 오스만의 점유를 인정하는 조약 체결 

1574년 오스만 군은 튀니스를 탈환

1579년 페즈 함락은 오스만의 모로코 점령을 완결로, 전 지중해 해안에 대한 오스만의 힘에 따른 종주권이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레판토에서 숙련된 선원들을 잃은 것은 오스만 해군의 전투능력을 약화시켰으며, 크리스트교 함대와의 교전을 최소화했다는 점을 볼 때 확인할 수 있다.

 

신성 동맹은 로사리오 기도를 통해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청하며 하느님에게 승리를 빌었다. 안드레아 도리아는 그의 선실에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받은 과달루페의 성모화 (Virgen de Guadalupe) 복제품을 안치하였다. 교황 비오 5세는 해전의 승리를 기념하려고 107일을 오늘날 가톨릭교회에서 묵주 기도의 성모를 칭송하는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이라는 축일로 제정하였다.

 

 

신성 동맹(1571~1573)의 함대의 베니에르

스페인의 펠리페 2(Felipe II de Habsburgo, 1527 - 1598)

스페인의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 (Don Juan de Austria, 1547 - 1578"유럽의 마지막 기사")

 

베네치아 공화국 (Serenissima Repubblica di Venezia, 697~1797)

교황 비오 5(Sanctus Pius PP. V, 1566 ~ 1572)

스페인 왕국 (Reino de España)

시칠리아 왕국 ( Regno di Sicilia, 1130~1816)

나폴리 왕국 (Regno di Napoli, 1285~1816)

토스카나 대공국 (Magnus Ducatus Tusciae, 1569~1860)

제노바공화국

 

 

몰타 기사단 (Sovrano Militare Ordine Ospedaliero di San Giovanni di Gerusalemme di Rodi e di Malta)

사보이 공국 (Casa di Savoia)

파르마 공국 (Ducato di Parma, 1545~1802)

우르비노 공국

마르칸토니오 콜로나

세바스티아노 베니에르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림 2( II. Selim, 1524~1574)

알렉산드리아의 해적 쿨룩 베이

우르지 알리

오스만 해군의 사령관 무에젠자데 알리 파샤

세바스티아노 베니에르

마르칸토니오 콜로나

안드레아 도리아의 조카손자인 제노바의 지오반니 안드레아 도리아

알바로 데 바잔

바르바리고 전사

무에젠자데 알리 파샤 사망

테르시오(Tercio 1534~1704, 스페인 방진(Spanish square))

베네치아의 팔라초 두칼레 디 베네치아(Palazzo Ducale)에 있는 대표작

살라 델 콜레지오(Sala del Collegio)에 있는 파올로 베로네스(Paolo Veronese)

틴토레토(Tintoretto's1518-1594)의 레판토의 승리(Victory of Lepanto)

살라 델로 스크루티니오(Sala dello Scrutinio)의 안드레아 비센티노(Andrea Vicentino)

마드리드의 프라도박물관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 ~ 1576)의 레판토 전투의 우화(Allegory of the Battle of Lepanto)

영국의 G. K. 체스터턴(Gilbert Keith Chesterton, 1874 - 1936)1911년 출판된 <레판토>라는 시

이탈리아 에밀리오 살가리는 1910년에 출간된 소설 <일 레온 디 다마스코>

스페인의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Saavedra, 1547~ 1616) <돈키호테(Don Quixote de La Mancha)1605>

로사리오의 성모(묵주(rosary), "승리의 성모"1571)

나우파크토스 전투 (레판토 전투), 고대

레판토 해전 (1499), 오스만-베네치아 전쟁, 오스만 제국의 승리

레판토 해전 (1500), 오스만-베네치아 전쟁, 오스만 제국의 승리

레판토 해전 (1571), 신성 동맹-오스만 제국, 신성 동맹의 승리   <!--[if !supportEmptyParas]--> 

 

 


 

오스만-합스부르크 십자군 (1663)

 

 

 

 

 

 

 

오스만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싸운 것으로 빈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이 대패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의 북진이 일시 정지 되었다. 1663년부터 빈, 헝가리 등지에서는 오스만 제국과 신성로마제국의 전쟁이 치열해졌다.

 

 

 

 

신성로마제국의 승리

 


 

빈 십자군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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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nna) 공방전 (1529)

 

 

빈 전투 (1683)

 

1529, 오스만 제국의 술탄 쉴레이만 1세가 지휘하는 오스만 제국군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점령하기 한 첫 번째 시도였다. 이 공성전은 오스만 제국 팽창의 최고점을 뜻했으며, 오스만 제국의 중부 유럽에 대한 확장이 끝남을 상징하였다.

 

비록 1683년의 빈 전투로 끝난다. 1529년의 쉴레이만 대제의 의중은 헝가리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지배관을 재확립하는데 있었으며, 빈을 공격하는 결정은 사실상 임기응변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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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68월 오스만 제국의 술탄 쉴레이만 1세는 헝가리의 러요시 2세의 군대를 모하치 전투에서 격파한다. 이 전투의 결과로 오스만 제국은 남부 헝가리 지역을 장악하고 이 와중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동생 오스트리아 대공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트 1세는 전사한 러요시 2세가 후사가 없어 비어버린 헝가리의 왕위가 자신의 아내 안나 자겔로니카에게 이어진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페르디난트의 선언은 오직 헝가리의 서부에서만 받아들여졌다. 헝가리의 북동부 귀족 야노시 자포여(János Zápolya)는 왕권을 주장하며 페르디난트에게 도전하였고, 오스만의 속국이 되는 대가로 헝가리의 왕으로 인정받았다. 1026일 포조니에서 열린 헝가리 의회에 의해, 페르디난트는 그의 여동생이 러요시 왕의 아내이고, 그가 러요시 왕의 여동생과 결혼했기 때문에 헝가리의 왕으로 선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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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9, 쉴레이만 대제는 헝가리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 페르디난트와 신성로마제국과 페르디난트의 위협으로부터 속국들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집결시킨다. 중부 유럽에 대한 오스만의 팽창이 저지되고, 거의 이론의 여지가 없이 르네상스 세계의 초강대국으로서의 위치가 약화되기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의 결정적 승리

모하치 전투(Schlacht bei Mohács; 1526)

페르디난트 1세의 전역

페르디난트의 세력 확대(1527~28)

오스만 투르크의 반격

이브라힘 파샤

포조니 포격

오스만의 공격과 빈 공성전

아케부스 (arquebus)

야노시 자포여의 괴뢰 왕국

니클라스 그라프 살름

오스만 제국의 술탄 쉴레이만 1

오스트리아 대공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트 1(Ferdinand I, 1503 ~ 1564)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Karl V, 1500 - 1558)

오스트리아의 원수 빌헬름 폰 로겐도르프(Wilhelm von Roggendorf)

파비아 전투(Battle of Pavia, 1525)

 

독일 용병 니클라스 그라프 살름(Niklas Graf Salm)

성 스테판 대성당   <!--[if !supportEmptyParas]--> <!--[end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