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미술Ⅲ, A.예루살렘을 사수하라 - 1부.십자군 전쟁( 9차 십자군 )

草霧 2013. 3. 23. 00:00

 

 

 

 

중세 미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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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과 이슬람의 부흥 그리고 문명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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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야욕이 신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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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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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재 글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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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미술, 1부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편에서는 3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십자군 전쟁 ”, “2부 이슬람의 부흥”, “3부 문명충돌 로 기독교의 광기와 무슬림의 충돌을 통하여, 문명충돌과 미술의 진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참고로, “2. 이슬람의 부흥편은 본 저의 서양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오리엔탈리즘 편)을 참조하세요.

 

1. 십자군 전쟁

2. 이슬람의 부흥

3. 문명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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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십자군 전쟁 (CRUS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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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 [crusade] (1095-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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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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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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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전쟁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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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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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르몽 교회회의 (Council of Clermont, 1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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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콩키스타 (Reconquista, 718-1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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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 십자군 (1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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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십자군 원정 (109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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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1097) 도릴라이움(1097) 안티오키아(1097~1098)

마라트 안-누만(1098) 예루살렘(1099) 아스칼론(1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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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국가의 성립 (1098-1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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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왕국(Kingdom of Jerusa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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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의 십자군 국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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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 상귀니스(1119) - 몽기사르(1177) - 이나브(1149) - 하틴(1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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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십자군 원정 (114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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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 공방전 (1147) - 다마스쿠스 공방전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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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십자군원정(118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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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십자군원정(1202-4)

 

5차 십자군원정(12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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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차 십자군원정(1228-40)

 

7차 십자군원정(124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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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9차 십지군 원정(125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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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차 십자군 원정 (1271 - 1272)

 

 

 

 

루이 9세는 재차 출병하여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공격했다. 이 때 루이 9세의 동생이며 시칠리아의 왕인 샤를이 형을 도와 출병했다.

 

 

 

하지만 루이 9세는 1279년에 튀니스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동생 샤를 왕은 그 후에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와 연합하여 이라크에 머물면서 십자군원정을 계속했으나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드디어 십자군원정은 여기서 186년 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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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9세는 재차 출병하여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공격했다. 이 때 루이 9세의 동생이며 시칠리아의 왕인 샤를이 형을 도와 출병했다. 하지만 루이 9세는 1279년에 튀니스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동생 샤를 왕은 그 후에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와 연합하여 이라크에 머물면서 십자군원정을 계속했으나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드디어 십자군원정은 여기서 186년 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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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드워드 1 세의 참전 (1268)

 

 

 

샤를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와 함께 아크레(1271)에 머물면서 십자군 원정을 계속했으나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에드워드 왕자가 이끄는 병력은 대신 성지로 향하게 되는데 후세에 이를 마지막 십자군이나 혹은 9차 십자군이라고 부른다.

 

 

 

휴전 협상(1272)과 귀국

 

 

웨스트민스터 시편에 수록된 쇠미늘 갑옷으로 무장한 십자군(12세기), 이 갑옷은 말을 타는 데 편리하도록 허리 밑에서부터 절개되어 있으며, 갑옷을 입을 때는 안에 누비옷을 입고 그 위에 다시 겉옷을 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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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맘루크의 바이바르스는 계속 전진하여 트리폴리를 차지하고 1291년에는 팔레스타인에 마지막 남은 십자군 지역인 아크레마저 점령하여 사실상 십자군은 막을 내렸다.

 

 

9차 십자군은 허무하게 이것으로 끝이났다. 에드워드 왕자는 귀국 길에 오르던 중 1272년 헨리 3세의 승하 소식을 듣고 영국으로 귀국, 1274년 에드워드 1세로 즉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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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우스 10(Gregorius , 1210 ~1276)

카를로 1세 또는 앙주의 샤를(Charles d'Anjou, 1226 1285)

에드워드 1(Edward I, 1239 ~ 1307)

맘루크 왕조의 등장(1250)

1250년 알 만수라 전투에서 바이바르스 알 분두크다리 ( al-Malik al-Zahir Rukn al-Din Baibars al-Bunduqdari)

마지막 아이유브조의 투란샤 암살(1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