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미술Ⅲ, A.예루살렘을 사수하라 - 1부.십자군 전쟁(후기 십자군)

草霧 2013. 3. 24. 14:46

 

 

 

 

중세 미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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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과 이슬람 부흥 그리고 문명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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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야욕이 신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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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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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재 글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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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미술, 1부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편에서는 3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십자군 전쟁 ”, “2부 이슬람의 부흥”, “3부 문명충돌 로 기독교의 광기와 무슬림의 충돌을 통하여, 문명충돌과 미술의 진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참고로, “2. 이슬람의 부흥편은 본 저의 서양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오리엔탈리즘 편)을 참조하세요.

 

1. 십자군 전쟁

2. 이슬람의 부흥

3. 문명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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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십자군 전쟁 (CRUSADE, 1095-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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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콩키스타 (Reconquista, 718-1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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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르몽 교회회의 (Council of Clermont, 1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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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 십자군 (1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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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십자군 원정 (1096-99)

니케아(1097) 도릴라이움(1097) 안티오키아(1097~1098) 마라트 안-누만(1098) 예루살렘(1099) 아스칼론(1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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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국가의 성립 (1098-1291)

아제르 상귀니스(1119) - 몽기사르(1177) - 이나브(1149) - 하틴(1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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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십자군 원정 (1147-49)

리스본 공방전 (1147) - 다마스쿠스 공방전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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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십자군원정(1189-92)

예루살렘의 공방전 (1187) - 아크레 공방전 (1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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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 십자군 (발트 십자군, 1193-1236)

독일 십자군 (1096) - 웬드 십자군 (1147) - 리보니아 십자군(Livländischen Kreuzzug 1198~1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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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십자군원정 (1202-4)

콘스탄티노플 약탈(1203-04) - 라틴 제국(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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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비 십자군 (Albigenses Crusades 알비파 십자군, 1209-29)

도미니코회와 종교재판 (1223 ~1255) - 퀘리부 함락과 종결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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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십자군 [Children's Crusade]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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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차 십자군원정(12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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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러시아 십자군 원정 (1217-83)

1차 프러시아 십자군 (1217~1228) - 2차 프러시아 십자군 (1230~1283) - 프러시아의 정복 (1237~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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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차 십자군원정(1228-40)

예루살렘 탈환(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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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틱 북 십자군 전쟁 (123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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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차 십자군원정(1248-52)

티발 1세 십자군(1239) - 예루살렘 포위 (1244) - 라 포르비에 전투 (Battle of La Forbie,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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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십자군 (1268~1303)

프랑크 - 몽골 연합 (Franco - Mongol alliance1271) - 아크레 공방전 (Siege of Acre, 1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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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기들 십자군 (Shepherds Crusade, 1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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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차 십자군 원정(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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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차 십자군 원정(127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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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고네스 십자군(1284-85, 일명 아라곤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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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십자군(1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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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헝가리 전쟁(1526-52), 니코폴리스 십자군 (1396)

니코폴리스(1396, Bitka pri Nikopol) 바르나 코소보 베오그라드 바슬루이 브레드필드 오트란토 크르바바 평원 모하치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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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르(Tatarlar) 십자군 전쟁 (1398-99)

레그니차 전투(Bitwa pod Legnicą,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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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스파 십자군 (Hussite, 14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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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 십자군 전쟁 (144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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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나 십자군 (Crusade of Varna,1444-48)

바르나 전투(1444) -2차 코소보 전투 (második rigómezei csata,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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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란토 십자군 (1480-81)

오트란토 전투(Battle of Otranto, 148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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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십자군 (1529)

(Vienna) 공방전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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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판토 십자군 (Battle of Lepanto, 1571)

레판토 해전 (Proelium Lepanthinum, 1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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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합스부르크 십자군 (1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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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십자군 (1268~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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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크 - 몽골 연합 (Franco - Mongol alliance1271)

 

 

 

이집트의 맘루크(노예군)가 몽골족을 시리아에서 몰아낸 후 맘루크족 술탄 바이바르스는 십자군을 가혹하게 대했기 때문에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몽골족과 동맹을 맺었다. 1268년 안티오크를 점령하고, 1289년 트리폴리를 점령했고, 1291년에는 아크레 점령했다.

 

 

장의 지원

피우스 2세의 시도

루이 9세 우트르메르로 귀환 (1250)과 몽골 황제 구유크 (Guyuk Khan)에게 사절 파견

루브룩의 윌리엄 (William of Rubruck 1253~1255)

신성로마 제국의 대공위 시대 (1254)

이집트의 혼란

우트르메르의 혼란

이집트와 시리아의 전쟁 (1254)

성 사바스 전쟁 (War of Saint Sabas, 제노바와 베네치아, 1256~1270), 아크레 공방전

비잔티움 제국을 수복(1259)

몽골의 재침공

칭기즈칸, 무슬림 홀로코스트라고도 불린 대량 학살 (1219 1222)

몽골 제국의 서남 아시아 정벌 (1251)_ 원 헌종

이란의 알라무트(Alamut) 포위전 점령(1256), 아사신 파 루큰 알 딘 쿠르샤 (Rukn al - Din Khurshah)의 처형

바그다드 포위전 (Siege of Baghdad, 1258)

이집트 원정

바이바르스 술탄(1260)과 아인 잘루트 전투(Battle of Ain Jault : 1260) 패배

맘루크조의 팔레스타인 침공

 

안티오크 공방전 (Siege of Antioch, 1268)

교황 그레고리오 10 (Gregory X 1271 1276)10차 십자군 계획

합스부르크 왕조의 루돌프 1(Rudolph I of Germany)에게 요청 거절

2차 홈스 전투 (Second Battle of Homes, 1282)

마르카브 (Marqab) 요새 공격(1285)

트리폴리 백작령의 멸망 (1289)

교황 니콜라오 4

아크레 함락 (1291)

최후의 요새 루아드 (Ruad)

일한국의 침공, 3차 홈스 전투 (1299)

교황 보니파시오 8(Boniface VIII 1294 - 1303)

앙리 2세의 역습 (1300)

유럽 십자군의 본토 상륙 계획

아틀릿 요새 (Citadel of Atlit), 토르토사 (Tortosa) 요새 점령(1300)

루아드 함락 (1303)

일한국의 침공, 마지 알 사파 전투 ( Battle of Marj al-Saffar, 1303) 패배

 

 

 

유대인을 학살하는 십자군들 - 유대인 특유의 모자로 이들이 유대인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1250년 프랑스 성경에 실린 삽화로 당시 중세시대에 유대인 학살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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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크레 공방전 (Siege of Acre, 1291)

혹은 아크레 함락(Fall of Acre)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291년에 일어났으며 무슬림에 의해 십자군이 다스리던 도시 아크레가 함락된 결과를 낳았다. 이 도시의 함락은 동지중해(Levant)에서의 십자군 운동의 종결을 뜻했다. 아크레가 함락될때 십자군은 주전력인 예루살렘 왕국의 십자군을 잃었다. 그들은 타르투스(Tartus)의 요새에 머물렀으며 해안가의 침입을 방어하고 루드(Ruad)의 작은 섬으로부터 침략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1302년과

 

1303년 사이에 벌어진 루드 공방전(Siege of Ruad)에서 이 거점을 잃은 뒤 십자군은 더 이상 성지에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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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십자군의 종결을 상징한다. 라틴 왕국은 멸망 후 키프로스 섬에서 지속되었다. 1365년 피에르 1세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를 약탈했다. 그 후, 14세기의 십자군은 예루살렘의 탈환과 성지 탈환을 목표로 하지 않았고, 대신에 유럽으로 쳐들어 오는 오스만 투르크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잇따라 실패하여 함락 이후 500여 년 동안 유럽인들은 맘루크 왕조, 후에는 오스만 제국 때문에 성지로 진출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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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의 주된 전환점은 1187, 중요한 하틴 전투(Battle of the Horns of Hattin)에서 기독교도의 예루살렘(Jerusalem)이 살라딘(Saladin)의 군대에게 패퇴하면서 부터였다. 십자군들의 거점은 북쪽으로 옮겨갔으며 아크레에 머물렀다. 한 예로 몽골군이 1200년대 중반에 침입해왔을 때 잠재적인 동맹자로 봤으나 동시에 이집트의 맘루크 이슬람군대에 대하여도 중립적 위치를 유지했다. 1260년 아크레 남작은 중립적 유지를 위하여, 맘루크군이 그들의 영토를 지나치는 것을 묵인해주어 아인잘루트 전투(Battle of Ain Jalut)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1250년 이집트에서 맘루크 술탄조가 성장으로, 십자군 영토들을 점령하며 십자군을 붕괴시키려고 했다. 아인잘루트 전투 이후 맘루크는 1261년 술탄 바이바르스(Baibars)의 지휘 하에 1265년 카이사레아(caesarea), 하이파(haifa), 그리고 아르수프(Asuf), 갈릴리 함락, 1268년 안티오크(Antioch) 함락되었다. 이러한 위기를 돕기 위해 프랑스의 루이 9세의 실패한 십자군이 1270년 튀니스(Tunis)에 진출한 것이 하나의 예이다. 그리고 제9차 십자군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공작(Edward I 후에 에드워드 1)1271년에서 1272년 동안 십자군 운동을 지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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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그레고리오 10(Pope Gregory X)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십자군 운동은 진전되지 않았다. 라틴의 동방에 대한 공격이 계속되었다. 1276"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앙리 2세는 항복과 동시에 키프로스(Cyprus) 섬으로 도망쳤다. 1278년 라타키아(Lattakia)가 함락되었고 1289년 트리폴리(Tripoli) 역시 함락되었다.

 

 

 

방어를 위한 노력, 프랑코-몽골 동맹(Franco Mongl alliance) 실패

무슬림의 대학살(1290)

키프로스의 왕이자 예루살렘 왕 앙리는 집사 장 드 그라이를 유럽에 파견 그러나 프랑스, 아라곤 등은 시칠리아를 선점, 신성로마제국은 대공위 시대중이였고, 영국왕 에드워드 1세는 내전중이다. 이를 도우기 위하여 시민군이 출항한다. 그러나 그들은 도시의 무슬림들에 대한 학살을 1290년에 자행하였다. 이는 맘루크 술탄 콸라운에게 도시를 공격할 만한 빌미를 제공하였다.

아크레 의회 거부

콸라운은 휴전협정을 파기

맘루크 술탄 콸라운(Qalawun) 1290 사망, 아들 알아시라프 칼릴(Al-Ashraf Khalil)이 지휘

공성전와 함락

시돈, 하파, 베이루트, 타르수스, 아틀릿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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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루크 술탄 콸라운(Qalawun) 1290 사망, 아들 알아시라프 칼릴(Al-Ashraf Khalil), 베네치아 니콜라오 티에폴로와 시민군, 장 드 그라이와 쉴리의 록스, 아라곤의 하이메 2, 키프로스의 왕이자 예루살렘 왕 앙리, 기욤 드 보쥬 <!--[if !supportEmptyParas]--> <!--[endif]--> 

 

아크레 공방전 (1189) - 3차 십자군

아크레 공방전 (1291) - 십자군 최후의 도시가 함락

아크레 공방전 (1799) - 프랑스 혁명 전쟁

아크레 공방전 (1821) - 오스만 제국

아크레 공방전 (1832) - 이집트의 이브라함 파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