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미술 3
십자군 전쟁과 이슬람의 부흥 그리고 문명충돌
Ⅲ. 인간의 야욕이 신을 닮았다.
A.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본 연재 글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1부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편에서는 3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십자군 전쟁 ”, “2부 이슬람의 부흥”, “3부 문명충돌 ”로 기독교의 광기와 무슬림의 충돌을 통하여, 문명충돌과 미술의 진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참고로, “2부. 이슬람의 부흥” 편은 본 저의 서양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3 (오리엔탈리즘 편)을 참조하세요.
1부. 십자군 전쟁 2부. 이슬람의 부흥 3부. 문명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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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십자군 전쟁 (CRUSADE)
십자군 전쟁 [crusade] (1095-1270)
제1차 십자군원정(1096-1099년)
제2차 십자군원정(1147-1148년)
제3차 십자군원정(1189-1192년)
제4차 십자군원정(1202-1204년)
제5차 십자군원정(1217-1221년)
제6차 십자군원정(1228-1240년)
제7차 십자군원정(1248-1252년)
제8, 9차 십지군 원정(1252-1291년)
십자군 전쟁의 배경
첫째, 로마 카톨릭교회의 세력이 정치적으로 황제들과 군주들 사이에서 점점 약화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십자군전쟁을 고안해낸 것이었다.
둘째, 로마 카톨릭교회의 내부적 단결을 보다 더 공고히 하기 위하여 교회의 숙원인 예루살렘 성지회복의 명분으로 십자군전쟁을 주장함으로서 교회 내부에서 교황권의 신장을 노리고 있었다.
셋째, 로마 카톨릭교회가 내적으로 동서로 분열되어 있는 역사적 현실을 감안하여 십자군전쟁을 일으킴으로서 흡수통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으려 했다. 이슬람의 침공을 받을 위험에 처해 있는 동로마제국을 원조한다는 명분으로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은 십자군창설을 주장했었다.
십자군 전쟁의 원인
로마 제국이 AD 476년에 동서로 분열되었다. 동서로 분열된 로마제국은 “서로마제국”과 동로마의 “비잔틴제국”, 이렇게 두 개의 제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교회만은 1054년까지 분열되지 않고 있었으며 동로마제국의 비잔틴교회는 여전히 명목상으로 그대로 서로마 카톨릭교황청의 전통과 통치하에 남아 있었다.
11세기 중엽에 이르러서 서로마제국의 내부사정은 매우 복잡했다. 로마의 세속정권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와 그때 당시 로마 카톨릭교회 교황인 우르바누스 2세 사이에 정치와 교권의 관계의 불화로 인하여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의 권위가 로마에서 뿐만 아니라 서유럽전역에서 실추되고 있었다.
또한 동로마 비잔틴제국의 사정도 역시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에 놓여져 있었다. 비잔틴제국은 기독교의 한 축인데 셀주크 투르크의 이슬람세력이 팽창하면서 비잔틴 기독교제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다급해진 비잔틴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는 로마 카톨릭교황청 우르바누스 2세 교황에게 긴급한 군대의 지원을 요청했다.
동방의 비잔틴 기독교제국으로부터 긴급한 군대의 지원의 요청을 받은 로마교황청의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은 로마와 서유럽에서 실추되고 있는 교황청과 교황의 권위와 위신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십자군전쟁의 시작
부모로부터 토지와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는 봉건 귀족의 차남 기사들에게 있어서 십자군은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매력적이었다. 막대한 전리품이 그들의 눈앞에서 어른거렸을 것이며 특히 이슬람의 땅을 점령하고 또 성지를 탈환하면 전리품으로 땅을 소유하게 된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
가난한 농부들과 빈곤한 민중들이 그들의 무지함이 십자군에 지원하는 동기가 되고 있었다. 그들은 신의 가호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순진한 마음으로 군중심리에 이끌리어 십자군에 동원되고 있었다.
십자군전쟁은 “정의의 전쟁”이며 이교도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이 “신의 지상명령”이기 때문에 사명감에 의하여 십자군에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종교적 사명의식을 가진 무리들이 유럽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십자군으로 나아가 싸우기만 하면 교황이 발행하는 “면죄권”을 받을 수 있었다. 교황이 발행하는 “면죄권”을 받기만하면 이 세상에서 지은 모든 죄를 무조건 용서를 받게 돼 죽어서도 “천국행”이 보장된다고 하는 중세기 기독인들의 공통된 신앙 때문이기도 했다.
십자군 전쟁의 전개
십자군전쟁은 제1차 십자군전쟁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여 제9차 십자군전쟁까지 186년(1096년-1291년) 동안이나 계속 됐다.
클레르몽 교회회의 (Council of Clermont, 1095)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은 그의 고향이 프랑스이기 때문에 프랑스 출신의 교황이었다. 그는 1095년 11월에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긴급종교회의를 소집했다.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이 종교회의를 긴급히 소집한 목적은 오직 십자군을 창설하기 위함이었다.
클레르몽 종교회의에 유럽전역에서 300명의 주요 성직자들이 모였다.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은 연설을 통하여 이슬람의 위협을 받고 있는 동로마 비잔틴제국과 비잔틴교회를 신흥 이교도 이슬람의 위협에서부터 구출해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이교도의 손아귀에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되찾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의 열띤 선언에 성직자들과 군중들은 “신의 뜻대로, God wills it”을 외치면서 열광적으로 화답했다.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은 그가 프랑스 출신 교황인 것을 과시하여 프랑스 전역을 몸소 순회 하면서 십자군창설과 십자군에 동참할 것을 선동했다. 교황이 몸소 직접 돌아다니면서 십자군창설의 시급함을 선동함으로서 예상치 못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때 당시 로마교황청은 돈이 필요할 때마다 “면죄권”을 발행하여 민중들에게 판매하고 있었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약화된 교황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십자군을 창설했는데 그 결과는 엉뚱하게 다른 방향에서 큰 호응을 획득했던 것이다.
레콩키스타 (Reconquista, 718-1492)
군중 십자군 (1096)
AD 1096년에 로마 카톨릭교회의 광신자인 은자 피에르느 “군중십자군”을 창설하면서 십자군전쟁을 최초에 시작한 “군중 십자군”은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성전이라는 명분과는 아무 관계 없이 1년 동안 허무하게 방황하다가 12,000명이 모두 다 전멸을 당하는 비극적인 역사적 기록을 남겨 놓았다.
1차 십자군 원정 (1096-99)
니케아(1097) – 도릴라이움(1097) – 안티오키아(1097~1098) –
마라트 안-누만(1098) – 예루살렘(1099) – 아스칼론(1099)
십자군 국가의 성립 (1098-1291)
레반트 지역
키프로스 섬
그리스 지역
프로이센
예루살렘 왕국(Kingdom of Jerusalem) _ 1차 십자군 원정이 남긴 유산
고드프루아 (성묘의 수호자) ~ 보두앵 1세 ~ 1187년 예루살렘이 살라흐 앗 딘에게 함락
이사벨 1세 ~ 앙리 2세 ~ 1291년 아크레 함락 (맘루쿠 왕조)
멸망 후, 키프로스, 나폴리, 오스트리아, 사보이, 스페인의 군주들이 명의 국왕을 칭하였다.
북쪽의 십자군 국가들 _ 안티오크 공작령 (Principality of Antioch ), 에데사 백작령 (Count of Edessa), 트리폴리 백작령 (Count of Tripoli), 키프로스 왕국
아제르 상귀니스(1119) -몽기사르(1177) - 이나브(1149) - 하틴(1187)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 (1119)
피의 벌판 전투, 사르마다 전투, 발랏 전투로도 알려져 있으며 살레르노의 로제르가 지휘하는 안티오키아 공국이 알레포의 오르토퀴드 왕가의 마르딘의 일가지에게 1119년 7월 28일 궤멸한 사건이다.
안티오키아 공국과 북 시리아와 자지라를 지배하는 이슬람 국가들과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보에몽 2세의 섭정으로써 안티오키아 공국을 다스리던 살레르노의 로제르는 알레포의리드완의 죽음(1113)으로 유발된 유리한 상황을 이용하려 하지 않았다.
에데사 백작 보두앵 2세와 트리폴리 백작 폰스 역시 로제르와 동맹을 맺으려 하지 않았다. 1115년 로제르는 사르민 전투에서 부르스크 빈 부르스크가 지휘하는 셀주크 군의 공격을 격퇴하였다. 1118년 로제르는 아자즈를 함락과 일가지는 1119년 안티오키아 공국을 공격하여 대응했다.
로제르는 안티오키아의 라틴 총대주교 발렌스의 베르나르도와 함께 아르타에서 출진하였다. 베르나르도 총대주교 조언을 무시하고, 예루살렘 왕국의 왕 보두앵과 폰스 지원군의 도착을 기다리지 않았다. 로제르 전사, 학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십자군의 패배는 이 전투로 하여금 라틴어로 "피의 벌판"을 뜻하는 아제르 상귀니스라는 이름을 얻게 하였다.
이 전투는 무슬림이 셀주크 투르크의 도움 없이 십자군을 격퇴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안티오키아 공국은 아타리브, 제르다나, 사르민, 마아라트 알누만과 카프르 타브와 같은 영토들은 급속도로 무슬림에게 함락 당했다.
일가지는 8월 14일 예루살렘의 보두앵 2세와 폰스 백작에게 하브 전투에서 패퇴하였고, 보두앵은 안티오키아의 섭정직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로 인해 안티오키아 공격은 결과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력 하에 편입된다. 이후 1125년에야 아자즈 전투에서 승리함에 따라 시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되찾는다.
알레포의 오르토퀴드 왕가의 마르딘의 일가지, 안티오키아 공국의 살레르노의 로제르, 티오키아의 라틴 총대주교 발렌스의 베르나르도, 생 로의 로베르, 로제르 공, 프레넬의 기, 수도사 고프레이와 피에르, 레나드 멘소에르, 카디(이슬람 재판관) 아부 알파들 이븐 알카시샤브, 카말 아드 딘, 카쉬샤브의 연설과 지하드
아제르 상귀니스라는 라틴어는 성경에서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고 받은 돈으로 산 땅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한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유다는 이 땅에서 자살했으며, 이곳은 아람어로는 아켈데마치, 불가타판에서는 아제르 상귀니스라고 알려져 있다.
몽기사르 전투 (1177)
1177년 11월 25일 팔레스타인 몽기사르에서 벌어진 예루살렘 왕국과 아이유브 왕조의 전투이다. 1177년 십자군 국가인 예루살렘 왕국은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국왕 보두앵 4세는 문둥병에 걸려 후사가 없고 그의 누나 시빌라는 남편 아스칼론의 기욤이 죽었다. 보두앵은 비잔티움 제국의 해군력에 힘입어 이집트를 공략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이집트의 살라흐 앗 딘은 예루살렘 왕국을 공격하기 위해 출병했다. 보두앵은 샤티용의 레날드와 함께 살라흐 앗 딘을 저지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출발하여 아스칼론으로 향했다. 살라흐 앗 딘은 람라, 지라, 아르수프를 차례로 공략한다.
십자군 연합군은 람라 근처의 몽기사르 전투에서 살라흐 앗 딘의 조카 타키 앗 딘의 아들이 전사했고 율법학자 디야 앗 딘이 포로로 붙잡혔다.
살라흐 앗 딘도 거의 붙잡힐 뻔 했고 이집트군은 괴멸했다. 전투의 패배로 1178년 살라흐 앗 딘은 십자군과 휴전 협정을 맺었다.
한편 트리폴리의 레몽 3세와 보에몽 3세는 별도로 시리아의 하림의 공성전(1178)을 전개하였다.
성전 기사단의 기사단장 외드, 국왕 보두앵 4세, 이집트의 살라흐 앗 딘, 샤티용의 레날드, 시빌라, 타키 앗 딘, 디야 앗 딘
이나브 전투 (1149)
아르드 알하팀 전투(Battle of Ard al-Hâtim) 혹은 폰스 무라투스(Fons Muratus)라 불리기도 한다. 이 전투에서 누르 앗 딘(Nur ad-Din) 휘하의 시리아군은 안티오키아의 레몽(Raymond of Antioch)군과 동맹을 맺은 알리 이븐 와파(Ali ibn-Wafa)의 군대를 1149년 6월 29일 격파하였다.
누르 앗 딘은 1146년 아버지 장기(Zengi)가 사망 후, 알레포(Aleppo)의 지배권을 획득하였다. 알레포의 지배권을 확립한 후 안티오키아 공국(Principality of Antioch)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고, 1147년에는 1144년 장기에게 에데사 백작령(County of Edessa)의 수도를 빼앗긴 것에 대한 복수를 위해 조직된 제2차 십자군의 다마스쿠스 공격을 막아내었다. 1149년 안티오키아를 공략하여 이나브의 요새를 공략하였고, 다마스쿠스의 우누르(Unur of Damascus)와 투르크만(Turcomans)족 군대의 지원을 받았다.
레몽 공작(Prince Raymond)은 하샤하신(Hashshashin)의 지도자이자 누르 앗 딘의 적인 알리 이븐 와파와 동맹을 맺었다. 레몽 공작과 그의 동맹 군세는 가용병력을 전부 집결시키기도 전에 이나브의 구원에 나섰고, 포위당했다. 레몽 공작과 이븐 와파 둘 전사하였다. 중요한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는 루트를 포함한 안티오키아 공국의 영토 대부분이 누르 앗 딘에 노출되었다.
이 전투의 영향으로 하림(Harim)과 아파미야(Afamiya)이 함락되었다. 십자군은 하림을 1157년에 탈환하였으나, 1164년에 결국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누르 앗 딘은 이 여세를 몰아 안티오키아 공국를 공략하였으나, 함락하는 데 실패하였다.
이나브에서의 승리 이후에 누르 앗 딘은 이슬람 세계의 영웅이 되었다. 지하드(jihad)를 강화, 종교 학교와 새로운 모스크를 알레포에 설치하였고, 이교도를 추방하였다. 지하드는 전쟁을 지속해야 하는 명분으로 사용된 기독교 십자군의 존재에 영향을 받았다. 1154년 다마스쿠스를 자신의 영역에 포함시켰으며, 계속적으로 십자군 세력을 약화시켰다.
누르 앗 딘(Nur ad-Din), 안티오키아의 레몽(Raymond of Antioch), 하샤하신(Hashshashin)의 알리 이븐 와파(Ali ibn-Wafa), 다마스쿠스의 우누르(Unur of Damascus), 투르크만(Turcomans), 레몽의 미망인 콘스탄스(Constance)와 주교 리모주의 아이메리(Aimery of Limoges), 예루살렘의 보두앵 3세(Baldwin III of Jerusalem)
하틴 전투 (1187)
1187년 7월 4일 예루살렘 왕국의 기독교 십자군 병력과 살라흐 앗 딘이 이끄는 이슬람 아이유브 왕조의 군대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살라흐 앗 딘의 이슬람군은 이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두어 대부분의 십자군를 죽이거나 사로잡았고, 이 전투의 패배로 군사력을 상실한 예루살렘 왕국은 결국 예루살렘을 이슬람에게 내주게 된다.
1186년 예루살렘의 보두앵 4세이 사망하자, 보두앵의 어머니 예루살렘의 시빌라는 남편 뤼지냥의 기를 공동 왕으로 앉혔다. 당시 왕국은 시빌라와 기, 샤티용의 레날드, 성전 기사단의 "궁정파"와 트리폴리의 레몽 3세가 이끄는 "귀족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벨린의 발리앙의 중재로 무마되었다.
한편 이슬람측은 살라딘은 1177년 몽기사르의 패배 후 십자군과 휴전협정을 맺고 이집트와 다마스쿠스에서 힘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레날드는 휴전협정을 위반했다. 기는 레몽과 화해하고 아크레에서 살라흐 앗 딘의 군대와 맞서 싸우려고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1187년 티베리아스가 함락되었다. 기독교 연합군은 티베리아스를 구하기 위해 출발하였는데 이슬람군에 포위공격 당한다. 샤티용의 레날드는 살라딘과의 맹세를 깨버린 벌로 처형했고 예루살렘의 왕 기는 포로로 성십자가와 함께 다마스쿠스로 이송되었다.
이 전투의 패패로 십자군의 주력은 분쇄당했고 아크레, 야파, 시돈, 아스칼론을 점령하고, 티레는 몬페라토의 코라도의 활약으로 점령당하지 않았지만 예루살렘은 여왕 시빌라와 발리앙이 살라흐 앗 딘에 맞서 저항하다가 항복한다.
살라흐 앗 딘, 예루살렘의 시빌라, 뤼지냥의 기, 성전 기사단, 트리폴리의 레몽 3세, 이벨린의 발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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