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미술 3
십자군 전쟁과 이슬람의 부흥 그리고 문명충돌
Ⅲ. 인간의 야욕이 신을 닮았다.
A.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본 연재 글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1부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편에서는 3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십자군 전쟁 ”, “2부 이슬람의 부흥”, “3부 문명충돌 ”로 기독교의 광기와 무슬림의 충돌을 통하여, 문명충돌과 미술의 진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참고로, “2부. 이슬람의 부흥” 편은 본 저의 서양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3 (오리엔탈리즘 편)을 참조하세요.
1부. 십자군 전쟁 2부. 이슬람의 부흥 3부. 문명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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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십자군 전쟁 (CRUSADE)
십자군 전쟁 [crusade] (1095-1270)
제1차 십자군원정(1096-1099년)
제2차 십자군원정(1147-1148년)
제3차 십자군원정(1189-1192년)
제4차 십자군원정(1202-1204년)
제5차 십자군원정(1217-1221년)
제6차 십자군원정(1228-1240년)
제7차 십자군원정(1248-1252년)
제8, 9차 십지군 원정(1252-1291년)
십자군 전쟁의 배경
첫째, 로마 카톨릭교회의 세력이 정치적으로 황제들과 군주들 사이에서 점점 약화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십자군전쟁을 고안해낸 것이었다.
둘째, 로마 카톨릭교회의 내부적 단결을 보다 더 공고히 하기
위하여 교회의 숙원인 예루살렘 성지회복의 명분으로 십자군전쟁을 주장함으로서 교회 내부에서 교황권의 신장을 노리고 있었다.
셋째, 로마 카톨릭교회가 내적으로 동서로 분열되어 있는 역사적 현실을 감안하여 십자군전쟁을
일으킴으로서 흡수통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으려 했다. 이슬람의 침공을 받을 위험에 처해 있는 동로마제국을 원조한다는 명분으로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은 십자군창설을 주장했던 것이다.
십자군 전쟁의 원인
로마 제국이 AD 476년에 동서로 분열되었다. 동서로 분열된 로마제국은 “서로마제국”과 동로마의 “비잔틴제국”, 이렇게 두 개의 제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교회만은 1054년까지 분열되지 않고 있었으며 동로마제국의 비잔틴교회는 여전히 명목상으로 그대로 서로마
카톨릭교황청의 전통과 통치하에 남아 있었다.
11세기 중엽에 이르러서 서로마제국의 내부사정은 매우 복잡했다. 로마의 세속정권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와 그때 당시 로마 카톨릭교회 교황인 우르바누스 2세 사이에 정치와 교권의 관계의 불화로 인하여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의
권위가 로마에서 뿐만 아니라 서유럽전역에서 실추되고 있었다.
또한 동로마 비잔틴제국의 사정도 역시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에 놓여져 있었다. 비잔틴제국은 기독교의 한 축인데 셀주크 투르크의
이슬람세력이 팽창하면서 비잔틴 기독교제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다급해진 비잔틴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는 로마 카톨릭교황청 우르바누스
2세 교황에게 긴급한 군대의 지원을 요청했다.
동방의 비잔틴 기독교제국으로부터 긴급한 군대의 지원의 요청을 받은 로마교황청의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은 로마와 서유럽에서 실추되고 있는 교황청과 교황의 권위와 위신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십자군전쟁의 시작
부모로부터 토지와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는 봉건 귀족의 차남 기사들에게 있어서 십자군은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매력적이었다.
막대한 전리품이 그들의 눈앞에서 어른거렸을 것이며 특히 이슬람의 땅을 점령하고 또 성지를 탈환하면 전리품으로 땅을 소유하게 된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
가난한 농부들과 빈곤한 민중들이 그들의 무지함이 십자군에 지원하는 동기가 되고 있었다. 그들은 신의 가호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순진한 마음으로 군중심리에 이끌리어 십자군에 동원되고 있었다.
십자군전쟁은 “정의의 전쟁”이며 이교도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이 “신의 지상명령”이기 때문에 사명감에 의하여 십자군에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종교적 사명의식을 가진 무리들이
유럽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십자군으로 나아가 싸우기만 하면 교황이 발행하는 “면죄권”을 받을 수 있었다. 교황이 발행하는
“면죄권”을 받기만하면 이 세상에서 지은 모든 죄를 무조건 용서를 받게 돼 죽어서도 “천국행”이 보장된다고 하는 중세기 기독인들의 공통된 신앙
때문이기도 했다.
십자군 전쟁의 전개
십자군전쟁은 제1차 십자군전쟁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여 제9차 십자군전쟁까지 186년(1096년-1291년) 동안이나 계속 됐다.
클레르몽 교회회의 (Council of Clermont, 1095)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은 그의 고향이 프랑스이기 때문에 프랑스 출신의 교황이었다. 그는 1095년 11월에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긴급종교회의를
소집했다.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이 종교회의를 긴급히 소집한 목적은 오직 십자군을 창설하기 위함이었다.
클레르몽 종교회의에
유럽전역에서 300명의 주요 성직자들이 모였다.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은 연설을 통하여 이슬람의 위협을 받고 있는 동로마 비잔틴제국과 비잔틴교회를
신흥 이교도 이슬람의 위협에서부터 구출해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이교도의 손아귀에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되찾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의 열띤 선언에 성직자들과 군중들은 “신의 뜻대로, God wills it”을
외치면서 열광적으로 화답했다.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은 그가 프랑스 출신 교황인 것을 과시하여 프랑스 전역을 몸소 순회 하면서 십자군창설과
십자군에 동참할 것을 선동했다. 교황이 몸소 직접 돌아다니면서 십자군창설의 시급함을 선동함으로서 예상치 못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때 당시 로마교황청은 돈이 필요할 때마다 “면죄권”을 발행하여 민중들에게 판매하고 있었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약화된 교황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십자군을 창설했는데 그 결과는 엉뚱하게 다른 방향에서 큰 호응을 획득했던 것이다.
레콩키스타 (Reconquista, 718-1492)
군중 십자군 (1096)
AD 1096년에 로마 카톨릭교회의 광신자인 은자 피에르느 “군중십자군”을 창설하면서 십자군전쟁을 최초에 시작한 “군중 십자군”은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성전이라는 명분과는 아무 관계 없이 1년 동안 허무하게 방황하다가 12,000명이 모두 다 전멸을 당하는 비극적인 역사적 기록을 남겨 놓았다.
1차 십자군 원정 (1096-99)
니케아(1097) – 도릴라이움(1097) – 안티오키아(1097~1098) – 마라트 안-누만(1098) – 예루살렘(1099) – 아스칼론(1099)
십자군 국가의 성립 (1098-1291)
레반트 지역
키프로스 섬
그리스 지역
프로이센
예루살렘 왕국(Kingdom of Jerusalem 1099~1291) _ 1차 십자군 원정이 남긴 유산
고드프루아 (성묘의 수호자) ~ 보두앵 1세 ~ 1187년 예루살렘이 살라흐 앗 딘에게 함락
이사벨 1세 ~ 앙리 2세 ~ 1291년 아크레 함락 (맘루쿠 왕조)
멸망 이후에도 키프로스, 나폴리, 오스트리아, 사보이, 스페인의 군주들이 명의 국왕을 칭하였다.
북쪽의 십자군 국가들 _ 안티오크 공작령 (Principality of Antioch ), 에데사 백작령 (Count of Edessa), 트리폴리 백작령 (Count of Tripoli), 키프로스 왕국
10. 북쪽의 십자군 국가들
예루살렘 왕국의 북쪽에는 거의 별도로 창업된 3개의 봉건 영지들이 존재했다. 안티오크 공작령 (Principality of Antioch ), 에데사 백작령 (Count of Edessa), 트리폴리 백작령 (Count of Tripoli)가 그들이다.
이슬람의 분열와 도시국가 형성
예루살렘 왕국을 포함한 십자군 국가들이 성립될 수 있던 가장 중요한 배경은 무슬림들 세력의 극심한 분열 덕분이었다. 십자군 내부 분열도 적지는 않았지만 이슬람 세력권 내의 분열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닐 수준이었다.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와 바그다드의 칼리프는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갈등으로 오랜 반목을 해왔고 셀주크 투르크가 점령했던 지역들에는 수많은 에미르 (Emir) 와 그 비슷한 지역 군주들이 생겨났다. 팔레스타인 지역이 거의 무정부 상태에 이른 덕분이다.
십자군 원정와 무슬림 통일
또한, 주기적인 십자군과 기사단의 존재, 그리고 이탈리아 도시 국가와의 상업, 이후에는 몽골 제국의 등장 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이슬람 세계의 분열로 인해 가능하지 않았던 군사적 도박이 성공하고 이들이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던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주변 이슬람 세력이 통일됨에 따라 이들의 몰락은 피할 수 없었다. 예루살렘 왕국이 새롭게 등장한 아이유브 제국이나 맘루크 조, 그리고 몽골 제국의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십자군 원정 실패와 몰락
점차 이슬람 세력이 통일됨에 따라 장거리 군사 원정이 성공할 가능성은 크게 줄었고 실제로 1차 원정 이후, 군사적으로 성공했다는 표현을 쓸 수 있는 대규모 십자군은 없었다.
그 결과 유럽에서는 이 군사적 도박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급격히 증가했고 결국 서유럽의 유력 군주는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에 참가하는 경우가 점차 줄고 십자군 운동 자체도 위축되었다.
13 세기 후반에는 십자군 운동이나 십자군 잔존 세력이나 모두 몰락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13세기의 알 아딜(1200~1218), 알 카밀(1218~1238), 살리흐 아이유브 (1240~1249)
안티오크 공작령 (Principality of Antioch )
안티오크가 함락되고 보에몽 1세 (Bohemond I) 가 이 도시를 차지하면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야심가인 보에몽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의 아버지 로베르 기스카르가 노렸던 비잔티움 제국이었다.
결국 이 야심을 무리하게 추진하다 보에몽 1세는 더 큰 것을 놓쳤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마지막에 알렉시우스 1 세 콤네누스에게 무리하게 대항했던 것이 화근이 되었을 뿐 아니라 후계자인 보에몽 2세가 너무 어릴 때 사망해서 안티오크 공작령은 시작과 동시에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럴 때 공작령을 지켜낸 것은 후세에 평가가 엇갈리지만 아무튼 보에몽의 조카 탕크레드 (Tancred) 였다. 그러나 그 역시 곧 사망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살레르노의 로게르 (Roger of Salerno) 가 대리 섭정에 자리에 올랐다. 커다란 야심으로 주변과 항상 충돌을 일으킨 초대 안티오크 공작령의 지배자 - 보에몽 1세와 탕크레드 - 들이 비교적 적절한 시기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북부의 십자군 국가 사이는 물론 주변의 다른 세력과의 긴장이 다소 감소할 수 있었다.
만약 탕크레드라도 오래 살았다면 나중에 보두앵 2세 시절 이후 십자군 국가는 내분 상태에 빠졌을 지도 몰랐다. 보두앵 2세는 탕크레드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더 나아가 탕크레드는 주변 영토에 대한 야심이 꽤 있었다. 하지만 적절한 시기에 탕크레드는 로게르로 교체 되었다. 로게르 시대에 안티오크는 트리폴리 및 에데사 백작령, 그리고 예루살렘 왕국과의 관계를 호전시켰지만 1119 년 사르마다 전투 (Battle of Ager Sanguinis, = Battle of the Field of Blood, the Battle of Sarmada ) 에서의 엄청난 패배로 인해 로게르 본인도 사망하고 안티오크 공작령도 위기에 빠졌다.
이 시기 이후로 보두앵 2세가 안티오크의 보에몽 2세의 섭정 대리를 맡았고 안티오크, 트리폴리, 에데사의 3대 북부 십자군 국가는 예루살렘 왕국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된다. 일단 반목을 거듭하던 십자군 1세대가 대부분 세상을 떠나고 현실적으로 주변 무슬림 세력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들이 힘을 합쳤던 것이다.
보두앵 2세는 적에게 포로로 잡히는 등 우여 곡절을 겪으면서도 십자군 국가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은 군주였다. 1125 년의 아자즈 전투 (Battle of Azaz)의 승리 이후 어느 정도 주변의 위기에서 벋어난 왕국은 후계 문제 해결과 내부 결속을 다질 목적으로 일련의 결혼 정책을 추진했다. 보두앵 2세에게는 딸은 넷이 있지만 장성한 아들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중 첫째 멜리장드는 플랜테저넷 왕조의 시조인 풀크 5세와 결혼해 보두앵 3세를 낳았고, 둘째인 앨리스는 보에몽 2세와 결혼 공녀 앨리스를 낳았다. 셋째 딸 오에르디나 (Hodierna) 는 트리폴리의 레몽 2세와 결혼해 북부의 영주들과 예루살렘 왕국은 혈연으로 동맹을 이루게되었다. 이후의 안티오크 공국은 예루살렘 왕국과는 친밀한 관계로 접어들지만 새롭게 친정을 한 젊은 보에몽 2세가 주변 십자군 국가 및 다른 세력들과 충돌을 일으키면서 결국 1130년 사망한 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이후 안티오크 공작령의 지배자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푸아티에의 레몽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1137년 비잔티움 황제 요한네스 2세의 공격을 받은 후 그의 가신이 되었다. 요한네스 2세는 특히 이 일대의 영토를 수복하는데 큰 관심이 있었으나 결국 군사적 성공은 거두지 못했고 덕분에 안티오크는 가신 상태로라도 독립은 유지했다.
에데사 백작령이 함락되고 (1144년), 2차 십자군이 아무런 성과없이 끝났으며 푸아티에의 레몽 역시 이나브 전투에서 사망했으나 (1149년) 나중에 그 아들인 보에몽 3세가 공작의 자리에 오르면서 공작령은 그 후 100 여년간 사소한 문제를 제외하고 보에몽의 혈통에 의해 비교적 순조롭게 계승되었다. 보에몽 3세는 무능한 르노 드 샤티옹 이후 권좌에 올라 1163 년부터 1201 년까지 여러 우여곡적을 겪으면서도 결국 안티오크 공국을 안정시키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 안티오크의 지배자들은 단명하거나 혹은 상속권이 있는 여자와 결혼해서 그다지 지지를 받지 못하는 통치를 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통치자가 없어져 어쩔 수 없이 섭정을 들여야 했던 경우도 많았는데 이는 무모하기까지한 주변 세력과의 전쟁으로 통치자가 전사하거나 사로잡힌 것이 중요한 이유였다.
비록 보에몽 3세 역시 포로로 잡힌 역사가 있으나 그래도 역대 안티오크 공작 중 가장 긴 통치기간 동안 비교적 안전하게 공국을 다스렸다. 또 누레딘의 시대 이후로 중요한 공격 목표가 예루살렘 왕국이 되고 살라딘 이후로는 주로 이집트 쪽에서 공격이 들어왔던 것 역시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이유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13세기에 들어오면서 안티오크 공국은 결국 트리폴리 백작령과 합쳐졌다. 이것은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가 후계자 없이 죽으면서 안티오크 가의 레몽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기 때문이다. 결국 궁극적으로는 북부 십자군 국가가 탄생하는 셈인데 레몽 3세의 대승적 조치로 인해서 안티오크 - 트리폴리가 오래 살아남는 계기가 된다.
후계 계승 문제로 갈등을 겪기는 해도 보에몽 4세 이후에는 안티오크 - 트리폴리는 하나의 통치자에 의해서 지배된다. 이후 13 세기 후반에는 점증하는 맘루크조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티오크는 몽골 제국의 가신이 된다. 이를 주도한 것은 보에몽 6세로 당시에는 매우 현명한 조치였다. 그러나 결국 몽골 세력이 이 지역에서 맘루크조를 이기지는 못했기 때문에 안티오크 공국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보에몽 6 세 시절에 안티오크를 상실한 이후 보에몽 7세의 누이인 루시아 시절에 트리폴리까지 상실하므로써 당대의 풍운아 보에몽에서 부터 시작된 안티오크 공작가는 대략 191년만에 몰락했다.
북부의 십자군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안티오크 공작령은 12세기 전반기 동안 통치자가 자주 변경되고 주변 세력과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이면서 다소 불안했으나 보에몽 3세 이후로는 비교적 안정된 시기를 구축했으며 사실 하틴 전투 이후에는 남쪽의 예루살렘 왕국의 잔재들 보다 더 큰 영토를 유지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맘루크조의 북상에서 독립을 유지하기에는 혼자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몽골 제국 (일한국) 의 속국으로 들어갔으나 불행히 13세기 후반의 맘루크 - 몽골 전쟁에서 결국은 맘루크 쪽으로 승세가 기울면서 이 북쪽의 십자군 국가들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12세기 안티오키아(현재의 터키 남쪽, 시리아 국경 부근의 도시)에 세워진 십자군 국가 가운데 하나이다. 1098년 제1차 십자군 원정 때 서유럽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1268년 이슬람의 맘루크 왕조에 의해 점령당했다.
제1차 십자군 원정 시 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와 에데사의 조슬랭 1세가 안티오키아 공략에 활약했던 남 이탈리아의 노르만인 봉건영주 타란토의 보에몽은 공략중 이 도시의 소유를 공언하여 1098년 안티오키아를 점령한다. 하지만 오랜 공성전에 지친 십자군은 미친 듯이 안티오키아 성내의 무슬림들을 학살하였다. 보에몽은 이미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비잔티움의 황제에게 충성을 서약하였지만 서약을 깨고 다른 십자군 경쟁자를 물리친 후 독자적으로 공작의 지위에 올랐고 이로써 안티오키아 공국이 성립하게 되었다. 십자군의 본래 목적이던 예루살렘 공략에는 참가하지 않고, 안티오키아 공국의 확립에 전념했다.
1144년 에데사 백국이 무너지고 안티오키아 공국은 제2차 십자군 전쟁기간 누르 앗 딘과 전쟁
1149년 비잔티움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의 봉토
제5차 십자군,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의 제6차 십자군, 프랑스의 루이 9세의 제7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지만 안티오키아 공국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1254년 보에몽 6세, 맘루크 왕조의 이슬람과 몽골의 전쟁으로 맘루크의 술탄 바이바르스는 몽골을 격파하고 1268년에 점령하였다.
보에몽 1세 1098–1111
보에몽 6세 1251–1268
에데사 백국 (Count of Edessa)
가장 중요한 북방 십자군 국가였지만 나머지 두 백작령도 간단히 언급할 필요는 있다. 일단 에데사 백작령은 초기에 보두앵 1세가 개척했다. 그는 다시 자신의 사촌뻘인 보두앵 2세에게 이를 물려주고 자신은 국왕자리에 올랐는데, 이후보두앵 2세 역시 자신의 친척인 조슬랭 1세 (Joscelin I, Prince of Galilee, Lord of Turbessel, Count of Edessa ) 백작 자리를 물려주고 왕위에 올랐다. 따라서 에데사 백작령은 초기부터 예루살렘 왕국과는 일체였으며 안티오크 공작령이나 트리폴리 백작령과는 때때로 긴장 상태에 놓였다.
에데사는 1144년 함락되었으며 투베르베실에서 저항하던 조슬랭 2세가 죽은 후 남은 영지는 모두 무슬림들의 손에 넘어갔다. 에데사는 본래가 무슬림의 반격의 거점인 알레포와 가까이 있어 적에게 노출되기 쉬었을 뿐 아니라 당시엔 안티오크 등 주변 십자군 국가와도 유기적으로 협력하기는 커녕 대립했기 때문에 쉽게 멸망하고 말았다.
에데사 (현재의 터키 우르파)의 마을 주변에 세워진 12세기의 십자군 국가중의 하나이다. 제1차 십자군 원정이후 가장 먼저 세워진 십자군 국가이다. 에데사 백국은 바다와 인접하지 않고, 육지에 깊숙이 자리 잡아 다른 십자군 국가와 다르다.
또 다른 십자군 국가와도 멀어서, 그 중 가장 가까운 안티오키아 공국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수도 에데사를 포함한 국토의 절반이 유프라테스 강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다른 십자군 국가보다도 상당히 동쪽에 위치해 있다. 유프라테스 강의 서쪽 부분은 셀주크 투르크 왕조에 대해 전초기지라 할 수 있는 중요한 거점도시 투르베셀(Turbessel)에서 통치하였다.
에데사 백국의 성립(1098)
1098년 제1차 십자군의 지도자중 한 사람인 보두앵 1세 (Baldwin of Boulogne. 1058? ~ 1118)
최초의 십자군 국가, 가장 먼저 사라진 십자군 국가
무슬림과의 전쟁
백국의 몰락(1150)
1144년 장기왕조의 1차 에데사 함락
1150년누르 앗 딘에게 2차 에데사 함락
트리폴리 백작령(Count of Tripoli)
자신도 우트르메르에 영지를 가져야 겠다고 마음먹은 툴루즈 백작 레몽 4세에 의해 개척되었다. 트리폴리 백작 중 가장 걸출한 인재는 레몽 3세였다.
그는 예루살렘 왕국의 섭정등을 맡으며 왕국이 어려운 시절 적지 않은 기여를 했으나 하틴 전투의 재앙을 막지는 못했다. 그래도 후사없이 죽기전 가장 현명한 판단으로 결국 트리폴리 백작령을 안티오크 공작령에 합쳤기에 북부 십자군 국가들이 더 오래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레반트에 건설된 4개의 주요 십자군 국가중에 가장 마지막에 건국된 나라이다. 사피타(Safita), 타르투스(Tartous), 트리폴리등의 중요한 도시를 갖고 있었다.
1102년 제1차 십자군 지도자였던 툴루즈 백(伯) 레몽 생 질이 트리폴리 함락 후.
툴루즈 백작 레몽 (Raymond of Toulouse, 1102–1105)
트리폴리 백작 루시아 (Lucia of Tripoli, 1287–1289)
1289년 맘루크 군에게 함락
키프로스 왕국 ( Βασίλειο της Κύπρου 1192~1489)
본래 1 차 십자군의 결과 생겨난 국가는 아니지만 위치상 십자군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고 더 나아가 말기에는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를 가져가는 국가가 키프로스 왕국이다. 키프로스 왕국은 3차 십자군의 결과 탄생했는데 그 초대 국왕은 뜻밖에도 뤼지냥의 기 였다. 이렇게 생긴 뤼지냥 가문은 1192 년 부터 1489 년까지 키프로스 섬을 지배했으며 이후에는 베네치아에 사실상 합병되었다.
알렉산드리아 십자군 (Alexandrian Crusade)
역대 키프로스 왕은 1291 년 이후에도 자신들이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임을 주장할 때가 있었는데 때때로 이를 위해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1365년에 피에르 1세 (Peter I of Cyprus) 는 구호기사단, 베네치아와 협력해서 알렉산드리아 십자군 (Alexandrian Crusade) 라는 이집트 원정군을 결성한 바 있다.
15세기에 들어와 왕국은 맘루크 및 제노바, 베네치아 세력의 각축장이 되며 결국 베네치아에 합병되는 운명을 맞게 되는데 약소국으로써 어쩔 수 없었던 운명이었고 오히려 300년 가까이 버틴게 더 신기한 경우였다.
키프로스 섬에 세워진 중세의 십자군 국가이다. 1192년에 설립되어 1489년까지 키프로스를 지배했다. 프랑스 출신의 뤼지냥 가문이 지배했다. 원래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였다. 비잔티움의 총독인 이사키오스 콤네노스는 키프로스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반기를 들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1191년 제3차 십자군 원정길에 오른 사자심왕 리처드는 성지로 오는 도중에 이 섬을 점령하고 성전 기사단에게 섬을 팔았다. 이듬해 성전 기사단은 다시 예루살렘 왕위계승에 실패한 뤼지냥의 기에게 이 섬을 양도했고 그 후부터는 뤼지냥 가문의 영토가 되었다. 기의 동생 아모리는 1192년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6세에게 정식으로 키프로스의 왕위의 직함을 부여받았다.
아모리가 죽은 후 왕위는 몇몇 어린 소년왕에게 넘어갔고 예루살렘 함락이후 이곳으로 옮겨온 예루살렘 왕국의 유력 가문인 이벨린 가문의 영향력이 커져 섭정을 맡았다. 키프로스 왕국은 중세기 내내 존재했는데 그 역사는 예루살렘 왕국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원래 키프로스의 주민 대부분은 그리스계였기 때문에 동방 정교회의 영향아래 있었고 라틴교회는 소수였다.
1291년 팔레스타인의 마지막 십자군의 거점인 아크레가 함락되자 키프로스는 지중해와 레반트 무역의 중심지로 이탈리아의 제노바, 베네치아등 무역국가의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들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14세기 경에는 제노바 상인들의 영향력이 점차 강해졌고 아비뇽 유수기에는 프랑스의 편을 들어 프랑스가 이탈리아인들을 몰아내 줄 것을 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1489년 마지막 여왕인 카트린느 코로나로가 베네치아 공화국의 압력으로 섬을 베네치아에게 팔도록 강요당하였고 그 이후에 왕국은 해제되고 베네치아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제3차 십자군 전쟁 키프로스에 세워진 기독교 십자군 왕국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가 키프로스 탈환
뤼지냥의 기 (Guy de Lusignan,1159-1194)
1489년 카트린느 코로나로 (1474-1489)
베네치아 공화국에 키프로스 왕국을 강제 할양
병원기사단 (몰타 기사단, 성 요한의 예루살렘과 로도스와 말타의 주권 군사 병원 기사단, Sovrano Militare Ordine Ospedaliero di San Giovanni di Gerusalemme di Rodi e di Malta)에 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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