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미술Ⅲ, A.예루살렘을 사수하라 - 1부.십자군 전쟁( 1차-나 )

草霧 2013. 3. 14. 00:00

 

 

 

 

중세 미술 3

 

십자군 전쟁과 이슬람의 부흥 그리고 문명충돌

 

. 인간의 야욕이 신을 닮았다.

 

A.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본 연재 글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1부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편에서는 3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십자군 전쟁 ”, “2부 이슬람의 부흥”, “3부 문명충돌 로 기독교의 광기와 무슬림의 충돌을 통하여, 문명충돌과 미술의 진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참고로, “2. 이슬람의 부흥편은 본 저의 서양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오리엔탈리즘 편)을 참조하세요.

1. 십자군 전쟁

2. 이슬람의 부흥

3. 문명충돌

 

 

1. 십자군 전쟁 (CRUSADE)

    

십자군 원정 [crusade] (1095~1270)

 

십자군 원정의 배경

 

십자군 원정의 원인

 

십자군전쟁의 시작

 

십자군 전쟁의 전개

 

클레르몽 교회회의 (Council of Clermont, 1095)

 

레콩키스타 (Reconquista, 718~1492)

 

군중 십자군 (1096)

 

1차 십자군 원정(1096-99)

       

 

 

1차 십자군 원정 전투

 

 

 

니케아 도릴라이움 안티오키아 마라트 안-누만 예루살렘 아스칼론

 

 

니케아(Nicaea) 공방전(1097)

  

십자군의 공성전

1차 십자군이 1097514일부터 619일까지 니케아를 포위공격하여 함락시킨 전투를 말한다. 비잔티움 제국은 1077년에 셀주크 투르크에 의해 니케아를 빼앗겼고, 이후 룸 술탄국의 수도가 되었다.

 

킬리지 아르슬란의 패배

1096, 군중 십자군(People's Crusade)은 니케아 도시 주변을 약탈했지만 투르크 군대에 의해 전멸 당했고, 이로 인해 술탄 킬리지 아르슬란 1(Kilij Arslan I)는 제1차 십자군을 그다지 위협적인 존재로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니케아를 떠나고 2년이 지나고서야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십자군의 공성전

킬리지 아르슬란의 패배

비잔티움의 도착과 항복 협상

Boutoumites가 니케아 지도자로 임명

 

타티키오스는 점령한 도시를 제국에 헌납할 것을 지시받았다.   

 

 

 

부용의 고드프루아(Godfrey of Bouillon)는 타란토의 보에몽(Bohemund of Taranto), 보에몽의 조카인 탕크레드(Tancred), 툴루즈의 레몽 4(Raymond IV of Toulouse)와 플랑드르의 로베르 2(Robert II of Flanders), 은자 피에르(Peter the Hermit), 르퓌의 주교 아데마르(Adhemar of Le Puy), 게일의 랄프(Ralph de Gael),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세와 블루아의 스테판(Stephen of Blois),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우스 1(Alexius I), 타티키오스(Tatikios), Boutoumites, 베르망두아의 위그(Hugh of Vermandois), 킬리지 아르슬란 1(1080-1107, I. Kılıç Arslan)

 

 


 

도릴라이움 전투(Battle of Dorylaeum, 1097)

 

109771일 제1차 십자군 운동 중에 일어난 사건으로 셀주크 투르크와 십자군이 아나톨리아에 있는 도릴라이움 근처에서 벌인 전투이다.

 

비잔틴 제국이 십자군의 장기간의 공성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별다른 공치사도 없이 도시를 자신들의 영토로 편입시켰기 때문에 비잔틴에 대한 깊은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십자군은 보급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부대를 두 개로 나누었다. 십자군은 적어도 얼마간 킬리지 아르슬란의 재보를 획득하고 부유해졌다. 셀주크 군은 퇴각하였고, 안티오키아로 향하는 아나톨리아의 진군로에서 적의 저항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킬리지 아르슬란 1(Kilij Arslan I)와 카파도키아의 하산(Hasan of Cappadocia) 그리고 다니슈멘드(Danishmendids)의 가지 이븐 다니슈멘드(Ghazi ibn Danishmend)    

 


 

안티오크(Antioch) 공방전(1097~1098)

 

 

1차 공성전은 십자군이 무슬림 도시에 대해 벌인 공성전으로 10971021일 시작해 109862일 도시가 함락되면서 종료되었다. 2차 공성전은 도시를 점령한 십자군에 대해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무슬림군이 벌인 공성전으로 109867일 시작해 628일 십자군이 성 밖에서 무슬림군을 격파하면서 종료되었다.

 

1차 공방전

1085년 셀주크 왕조가 안티오키아를 비잔티움 제국에게서 빼앗았다. 안티오키아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시대에 비잔티움 축성술로 강화 되었다.

 

야기 시얀은 1097년부터 아나톨리아 반도를 진군한 십자군을 상당히 의식하고, 인근의 무슬림 정권에 도움을 호소했으나 별 수익이 없었다. 그들의 출현을 대비해 그리스와 아르메니아 정교회 사람들을 추방했으나, 시리아 정교회 시민들은 거주를 허락했다.

 

레몽(Raymond IV of Toulouse)은 직접 공격하는 것을 주장했으나 보에몽(Bohemund of Taranto)과 고드프루아(Godfrey of Bouillon)는 오히려 도시에 대한 공성전을 벌이자고 주장했다. 그 때문에 십자군이 즉시 공격하지 않자 야기 시얀은 안도하고 용기를 얻었다.

 

한편 보에몽은 타티키오스는 겁쟁이로써 적 앞에서 도망쳤다고 주장하고, 안티오키아를 비잔티움 제국에게 반환하는 의무는 이제 지킬 필요가 없다고 공언했다. 또한 안티오키아 함락 후 안티오키아를 자신의 영지로 삼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자신도 진영을 떠날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병사들 사이에서는 보에몽을 지지 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0985월말 모술(Mosul)의 케르부가(Kerbogha)에 오르투키드(Ortuqids)의 군세 및 두카크 및 리드완도 합류했다. 그러나 케르부가 군대는 십자군에게 점령된 에데사(Edessa;1098) 공성전 실패로 우회한다.

 

레몽은 분노하고 1097년 콘스탄티노플을 출발할 때 약속한 것처럼 함락한 도시는 모두 황제 알렉시오스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고드프루아, 탕크레드, 로베르 등은 케르부가 군세의 접근이란 불리한 상황이 있었기에 보에몽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케르부가는 안티오키아 함락 이틀 후인 65일에 이르러서야 안티오키아에 도착했다. 그는 공성전으로 바꾸었다.

   

페도르스 바르톨로메오의 성창 조작의혹 

페도르스 바르톨로메오(Peter Bartholomew)는 성 안드레아(St. Andrew)의 환영을 보았고 이 도시에 성창(Holy Lance)이 있다란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발렌스(Valence)의 스페타누스(Stephen)라는 수도사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를 환시했다고 보고했다.

 

연대기작자 아귈레스의 레몽(Raymond of Aguilers), 오랑주 주교 기욤( William, Bishop of Orange)등은 성 베드로 성당 지하를 파기 시작했다. 밑바닥에 흘러내린 흙속에서 창의 앞부분을 발견해냈다.

 

레몽은 이것을 항복하는 것보다 포위를 풀기 위한 최후의 전투에 대비하라는 신의 징표나 다름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십자군 장병의 사기가 높아 졌다.

   

2차 공방전

십자군의 장병은 성창을 내세운 아귈레스의 레몽를 선두로 성문에서 성밖으로 돌격했다. 투르크 연합군은 십자군에게 커다란 피해를 주었다. 전설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십자군은 성 게오르기우스, 성 데미트리오스(St. Demetrius), 성 마우리티우스(St. Maurice)3명의 성인이 그들과 함께 기마로써 진군하는 환영을 보았다고 한다. 이로써 무슬림 연합군은 십자군 앞에 패배했다.

 

평소 공언하던 보에몽은 안티오키아 도시의 영유를 주장하고, 반대하는 아데마르 및 레몽과 대립했다. 알렉시우스 1세는 원군요청 무시에, 보에몽은 알렉시우스 1세는 십자군을 버렸다고 주장하고 황제에 대한 맹세는 모두 무효가 되었다고 토론했다. 보에몽의 군기가 내걸리게 되었다. 함락 후 안티오키아에서는 티푸스(typhus)로 보이는 질병이 만연했다.

 

1099년 안티오키아 공국 선포

이로써 10991월 안티오키아 공국 초대 공작이 된 보에몽을 뒤로 하고, 레몽이 이끄는 십자군은 남쪽으로 진군을 재개했다. 6월 십자군은 예루살렘 공방전을 시작하게 된다.

   

십자군의 도착과 포위

1차 공방전

1230일 지진와 호우

기아와 식인행위

보에몽 책략과 타티키오스(Taticius)의 십자군 이탈

잉글랜드 증원과 안티오키아의 봉쇄

파티마 왕조의 사자의 협상제의

"두자매의 탑" 의 아르메니아인 위병 피루즈(Firouz)의 배신

브루아 백작 스테판(Stephen of Blois)의 이탈

안티오키아 함락

야기 시얀 사망과 도시 약탈

2차 공방전

성창의 발견

케르부가와 은자 피에르의 교섭

안티오키아 전투와 십자군 승리

교황사절 아데마르가 병으로 사망

1099년 안티오키아 공국 선포

야기 시얀의 아들 샴스 앗-다우라(Shams ad-Daulah)

안티오키아 총주교 요한 더 오시트 석방

안티오키아를 탈출해 타르수스(Tarsus)있던 브루아 백작 스테판과 합류

다마스쿠스의 두카크(Duqaq)의 퇴각

예루살렘 정교회 총주교(Orthodox Patriarch of Jerusalem), 시메온

은자 피에르의 탈주

비잔틴움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Alexius I)의 특사, 타티키오스

알레포(Aleppo)의 리드완(Ridwan)의 퇴각

에드거 애셜링(Edgar Atheling)

라 마오메리(La Mahomerie)

탕크레드 성채

"성 파울 문"(Gate of St. Paul)

"개 문"(Gate of the Dog)

"공작 문"(Gate of the Duke)

선교(bridge of boats)

"두자매의 탑"(Tower of the Two Sisters)

"성 게오르기오스 문"(Gate of St. George)

페도르스 바르톨로메오의 성창 조작의혹

 

"안티오키아의 노래"(chanson d'Antioche)

 

고드프루아 드 부용

(Godfrey of Bouillon), 타란트 공 보에몽(Bohemund of Taranto), 툴루즈 백작 레몽 4(Raymond IV of Toulouse), 안티오키아의 정교회 총주교(Orthodox Patriarch of Antioch) 요한 더 오시트(John the Oxite),야기 시얀(Yaghi-Siyan), 아흐메드 이븐 메르완(Ahmed Ibn Merwan), 위그 드 베르망두아와 에노 백작 보두앵(Baldwin of Hainaut)

 

 


 

마라트 안-누만 공방전 (마라 공방전, 1098)

 

현재 시리아의 마라트 안누만이란 도시에서 1098년에 발생하였다. 십자군은 이곳에서 광범위한 카니발니즘을 벌였다.

 

 

 

1098년 안티오키아 공방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보급선을 만들고 방어하는 것에 무능력해서 군대 안에 광범위한 기아와 고유 장비 부족 등이 발생하고 있었다.

 

10987월 레몽 드 생질 군대의 기사였던 레몽 피레의 식량 징발 원정을 떠나 성곽도시 마라를 습격했다.

 

마라 공성전

11월 말쯤 레몽과 보에몽의 십자군이 마라의 공성전을 개시했다. 12월 항복한 무슬림을 십자군에 의해 학살되었다. 십자군은 마라 요새를 파괴한 후 레몽의 설득에 의해 마침내 남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카니발리즘

십자군들은 무슬림 시민의 시체를 먹는 카니발리즘을 벌이기 시작했다.

 

카니발리즘 (식인(食人,cannibal) 'carib')

에크스의 알베르(Albert of Aix )

 


 

예루살렘 공방전 (1099)

 

예루살렘 공방전 (BC 925) - 이집트 파라오 셰숑크 1

예루살렘 공방전 (BC 701) - 아시리아

예루살렘 공방전 (BC 597) -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유다 왕국을 1차 침공

예루살렘 공방전 (BC 587) -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유다 왕국을 재 침입

예루살렘 공방전 (70) - 티투스(Titus)의 유대반란을 진압

예루살렘 공방전 (614) - 로마-페르시아 전쟁의 일부

예루살렘 공방전 (637) - 우마르가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정복

예루살렘 공방전 (1099) - 1차 십자군 원정

예루살렘 공방전 (1187) - 살라딘에 의해 탈환

예루살렘 공방전 (1244) - Khwarezmians이 도시탈환

예루살렘 전투 (1917) - 1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이 함락

예루살렘 공방전 (1948) - 중동전쟁 중

 

 

 

십자군의 예루살렘 대학살 (1099)

 

 

범 서방과 아랍권의 지긋지긋한 피의 대립관계의 시작으로 1099년 제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대학살을 꼽는 게 일반적이다.

 

종교적 불관용성

천년전에 종교적 광신에 빠진 십자군이 당시 관례와 보편적인 규범을 무시하고 정복한 예루살렘에서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한 것이 이슬람과 기독교의 심원한 대립을 잉태했다.

 

    1950년대 출간된 십자군 분야 연구의 바이블, 스티븐 런시맨 교수의 십자군의 역사

 

예루살렘 성곽은 전세계 중세 요새 중 가장 강력한 방어시설 중 하나였다. 로마제국 시기 하드리아누스가 성곽을 개수한 이래 비잔티움제국과 우마이야 왕조, 파티마 왕조에서 지속적으로 성곽을 개보수 했기 때문이다. 십자군 원정 당시 예루살렘은 파티마 왕조의 태수인 이프티카르 웃 다왈라 지휘하의 아랍과 수단군대가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십자군이 예루살렘으로 진군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진군로에 위치한 우물에 독을 풀고 가축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다. 뒤이어 아랍군대는 예루살렘 내에 거주하던 기독교 주민들을 당시 관행대로 성곽 외부로 이주시켰다. 유태인들은 이전처럼 예루살렘 시내에 머무는게 허용됐다.

 

기독교도를 성 밖으로 쫓은 것은 공성전 기간동안 식량 소모를 줄일 수 있고 기독교도들은 무기를 드는게 금지돼 군사적으로 도움도 안될 뿐 아니라 적과 내통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 아예 성 밖으로 쫓아냈지만 관례대로 종교적 관용은 유지됐고 종교를 이유로 한 학살은 없었다. 비록 하킴 칼리프 시대의 기독교 탄압으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기독교도의 숫자가 줄긴 했지만 여전히 정교 성직자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도는 예루살렘 시내에 수 천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예루살렘 공성전

예루살렘 공성전은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 성벽에 도달한 109967일 시작됐다. 하지만 방어군의 준비가 우월해 공략은 실패했다. 식수 부족과 더위로 고전하던 십자군은 십자군 지도자들이 612일 감람산에 올라 만난 한 은자가 한 신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신께서 승리를 주실 것이라는 예언에 힘을 얻어 다시 공격을 가했지만 공성장비 부족으로 또다시 패배했다.

 

이후 식수 부족은 더해졌고 더위와 이슬람 세력 지원군의 움직임 등으로 십자군내에선 균열의 움직임까지 제기됐다. 하지만 이같은 상황은 십자군의 종교적 열정을 더욱 강하게 했고 공격을 계속하게 만들었다. 결국 713-14일 밤에 대대적인 공격이 재개됐고 시온산과 예루살렘 성곽 북쪽의 동쪽 섹터에 대한 십자군의 동시공격이 시작됐다. 성곽 북서쪽에는 위장 공격도 병행됐다.

 

14일 저녁에 레이몽의 군대가 성 밖 해자를 넘어 탑루에 대한 공격을 가했고 다음날 성곽 북쪽 성루는 고드프레이와 그의 동생인 볼로냐의 유스타스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뚫리게 된다. 리톨트와 투르네의 길베르 두명의 플래밍 출신 기사가 로렌지역에서 온 군대의 선봉에 섰고 뒤를 고드프레이가 뒤따랐다.

 

 

교두보가 마련된 뒤 예루살렘 성문이 열렸고 탕크레드가 이끄는 십자군 주력이 예루살렘 시가로 진입했다. 방어막이 무너진 것을 본 무슬림들은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유명한 이슬람 사원으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눕현던 장소에 건설됐으며 북쪽문 근처 바위에는 무함마드가 19개의 금못을 밖았다고 한다.) ’알 악사 모스크가 위치한 사원지구를 최후의 요세로 삼기위해 도망갔다.

 

탕크레드의 십자군의 진입

하지만 방어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탕크레드의 십자군이 그들을 덥쳤고 무슬림들은 서둘러 거액의 몸값을 약속하며 항복을 했다. 알 악사 모스크에서 항복한 무슬림들은 모스크에 탕그레드의 깃발을 걸고 안전을 보장받았다. 나머지 다른 도시 거주자들은 이프티카르가 여전히 레이몽과 교전 중이던 도시 남부섹터로 몰려갔다.

 

하지만 오후가 되자 이프티카르는 자신이 패했다는 것을 알게 됐고 다윗의 탑으로 도피했다. 이곳에서 그는 십자군에게 자신과 자신의 호위병들의 안위를 보장한다면 엄청난 양의 보물을 몸값으로 지불하겠다고 레이몽에게 제의했다. 레이몽은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프티카르는 안전하게 도시를 빠져나가 아스칼론 요세에 있는 무슬림 군대에 합류했다

 

대학살 

하지만 거액의 몸값을 지불한 이프티카르와 소수의 무슬림들만이 예루살렘에서 생명을 보전한 이슬람 교도였다. 악전고투 끝에 승리한 십자군은 성공에 도취돼 이성을 잃었다.

 

십자군은 시내의 모든 가옥과 모스크로 처들어가 만나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데로 죽였다.

 

이 대학살은 오후 내내 그리고 밤새 내내 지속됐고, 심지어 알 악사 모스크의 탕크레드의 깃발 조차 이곳에 피해있던 무슬림들에겐 보호수단이 되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다른 십자군 부대가 모스크로 들이닥쳐 전원을 몰살했기 때문이다. 아귈레의 레이몽이 그날 아침 사원 지구를 방문했을 때는 이미 사원으로 가는 길에 쌓인 시체들과 거기서 흘러나온 피가 그의 무릎까지 찼다고 한다.

 

예루살렘 시내에 거주하던 유태인들도 무리지어 그들의 주요 시나고그로 도피했지만 무슬림들을 도왔다는 이유로 가차없이 처단됐다.

 

유태인들에게도 이슬람교도에게 처럼 자비란 없었으며 유태인들의 모든 건물과 재산은 소각됐다. 십자군들은 더 이상 죽일 무슬림을 발견할 수 없을 때까지 살인행위를 계속했다.

    


 

 아스칼론 전투 (1099)

 

1099812일 일어난 전투로 제1차 십자군의 마지막 행동으로 여겨진다.

 

파티마 왕조는 시리아에 대한 지배권은 양보할 생각이 있었지만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권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고, 예루살렘에 성묘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를 창건하고자 한 십자군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와 협상 결렬

파티마 군이 예루살렘 탈환 계획

고드프루아의 아스칼론(Ascalon)로 행군

아스칼론 전투와 패배, 약탈

고드프루아와 레몽은 서로 아스칼론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

아스칼론은 계속 파티마 왕조의 영역

십자군이 아스칼론 공성전으로 함락 (1153)

예루살렘에 성묘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

 

성묘의 수호자(Defender of the Holy Sepulchre)라는 칭호를 받은 부용의 고드프루아(Godfrey of Bouillon), 예루살렘의 주교(patriarch of Jerusalem)라는 칭호를 받은 코퀘스의 아르누프(Arnulf of Chocques), 은자 피에르(Peter the Hermit), 예루플랑드르의 로베르 2(Robert II of Flanders), 아르누프, 툴루즈의 레몽 4(Raymond IV of Toulouse)와 노르망디의 로베르(Robert of Normandy), 탕크레드(Tancred), 유스타스(Eustace), 아길레라의 레몽(Raymond of Aguilers), 베아른의 가스통 4(Gaston IV of Béarn), 와지르(vizier) 알아프달 샤한샤흐(al-Afdal Shahansha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