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훙장 평전
리훙장은 '동양의 비스마르크'인가 '매국노'인가. 동시대 실권자 리훙장을 말하다
량치차오지음 역자박희성, 문세나 옮김 출판사프리스마| 2013.01.11. 형태 판형 A5 | 페이지 수 311 | ISBN 정가18,000원 중국 근대 대사상가 량치차오가 자신의 정적마저도 끌어안고 공정한 마음으로 써내려간 『리훙장 평전』. 19세기 중국 근대사에서 군사가, 정치가, 외교가로서 40여 년이나 실권을 장악한 인물인 리훙장의 삶을 따라가 보는 책이다. 군사가, 정치가, 외교가로서 리훙장의 잘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청일전쟁의 패배와 외국 열강들과의 굴욕적인 조약 체결 책임을 모두 리훙장 한 사람에게만 돌린다면 정권을 잡고 나라를 망친 다른 중신들의 죄까지 리훙장에게 덮어씌우는 꼴이 될 것이라고 일침을 가한다.
“역사를 쓰는 사람은 반드시 공정한 마음을 가지고 써야 한다!” 자신의 정적마저도 끌어안고 공정한 마음으로 써내려간 중국 근대 대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의 리훙장(李鴻章) 평전
태평천국의 난과 염군의 난을 진압한 군사가, 대학사, 북양대신, 총리아문대신 등을 역임한 한족계 정치가,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중국을 근대화하려 했으나 실패한 양무운동의 선구자, 기울어가는 청나라의 대표로서 외국 열강들을 상대로 굴욕적인 조약들을 체결한 외교가, 리훙장의 삶은 격동의 19세기 근대 중국 역사 그 자체다!
중국 근대 대사상가 량치차오의 눈으로 바라본 격동의 19세기 중국 근대사와 그 역사를 관통한 리훙장의 삶! 리훙장(李鴻章)은 19세기 중국 근대사에서 군사가, 정치가, 외교가로서 40여 년이나 실권을 장악한 인물이다.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과 염군(捻軍)의 난을 진압해 명성을 얻은 군사가, 그것을 바탕으로 만주족 관원 일색인 중앙 정계에 진출해 대학사, 북양대신, 총리아문대신 등 요직을 차지한 몇 안 되는 한족계 정치가,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중국을 근대화하려 했으나 실패한 양무운동의 선구자, 기울어가는 청나라를 대표해 외국 열강들을 상대로 굴욕적인 마관조약(시모노세키조약), 중러밀약, 중러만주조약, 신축조약 등을 체결해야 했던 외교가였다. 19세기 중국 근대사의 거의 모든 일이 그의 손을 거쳤다고 할 정도로 리훙장은 19세기 중국 근대사와 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리훙장의 삶은 격동의 19세기 중국 근대 역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리훙장은 한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리훙장은 19세기 후반 청나라 대신(大臣)으로서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고 대조선 정책을 주도한 인물로, 처음에는 소극적인 불간섭정책을 펴나가다가 임오군란 수습 과정부터 실질적인 간섭정책으로 전환했고, 이후 위안스카이(袁世凱)를 파견하여 조선 정부의 내정 및 외교에 적극적으로 간섭했다. 일본과 톈진조약을 맺고 임오군란과 동학농민운동에 개입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일본과 청일전쟁을 치르고 일본에 패해 그동안 쌓아온 군사적 명성을 하루아침에 잃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 책은 구사상을 배격하고 서양의 신사상을 중국에 소개하여 중국 개화에 공헌한 중국 근대 대사상가이자 개혁가, 문학가인 량치차오(梁啓超)가 직접 쓴 리훙장 평전이다. 량치차오는 동시대 실권자이자 자신의 정적(政敵)이기도 한 리훙장이 1901년에 죽자, 같은 해에 이 책을 썼다. 왜 량치차오는 자신의 정적인 리훙장 평전을 썼는가?
리훙장은 과연 ‘동양의 비스마르크’인가, 매국노인가? 19세기 중국 근대사는 리훙장이라는 인물과 관련이 깊기 때문에 19세기 중국 근대사를 제대로 알려면 리훙장이라는 인물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당시 사람들은 청일전쟁의 패배와 굴욕적인 조약 체결 책임을 모두 리훙장에게 돌리면서 매국노, 한간(漢奸), 부정부패자라고 비난했다. 한편, 1896년 독일을 방문한 리훙장에게 빌헬름 2세는 ‘동양의 비스마르크’라는 수식어를 붙이기까지 했다. 리훙장은 과연 ‘동양의 비스마르크’인가, 매국노인가?
저자 량치차오는 이 책에서 “역사를 쓰는 사람은 반드시 공정한 마음을 가지고 써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기꺼이 자신의 정적마저도 끌어안고 공정한 마음으로 군사가, 정치가, 외교가로서 리훙장의 잘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청일전쟁의 패배와 외국 열강들과의 굴욕적인 조약 체결 책임을 모두 리훙장 한 사람에게만 돌린다면 정권을 잡고 나라를 망친 다른 중신들의 죄까지 리훙장에게 덮어씌우는 꼴이 될 것이라고 일침을 가한다.
리훙장은 중국의 수천 년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19세기 세계사에서도 중요한 인물이다. 저자 량치차오는 이 책에서 리훙장이 살았던 19세기 청나라의 상황과 그 속에서 리훙장이 처한 위치, 외국 열강들이 몰려들고 반란이 끝없이 이어지는 혼란기에 중국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 그리고 군사가, 정치가, 외교가로서 리훙장의 삶을 돌아보고, 리훙장이 “시대가 만든 영웅일 뿐, 시대를 만든 영웅은 아니었다”고 평하면서 리훙장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연민, 리훙장 사후 더 이상 인재가 없는 중국의 현실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다. 특히 유럽 순방 중 비스마르크를 만난 리훙장이 만주족 관원 일색인 청조에서 한족 중신으로서 자신이 느끼는 고뇌와 근심, 분노와 우려를 털어놓으며 조언을 구한 일화를 비롯해서 당시 벌어진 역사적 사건에 대한 량치차오 개인의 솔직한 생각을 담은 부연 설명, 그리고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 리훙장이 과연 어떤 인물인지 설명하기 위해 중국과 중국 밖의 인물 16인(곽광, 제갈량, 곽자의, 왕안석, 진회, 쩡궈판, 쭤쭝탕, 리슈청, 장즈퉁, 위안스카이, 메테르니히, 비스마르크, 글래드스턴, 티에르, 이이 나오스케, 이토 히로부미)과 리훙장을 각각 비교해 설명하고 있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최근 개혁ㆍ개방을 거쳐 경제 강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은 양무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리훙장을 태평천국의 난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중국을 강대국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애국자이자 민족주의 정치가, 이이제이(以夷制夷)로 열강을 견제하려 했던 외교가로 재평가하고 있다. 이 책은 격동의 19세기 중국 근대사와 그 당시 실권자인 리훙장이라는 인물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길잡이가 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중국에 부는 리훙장 재평가의 바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해줄 것이다.
리훙장, 그는 누구인가? 1823년 중국 안후이 성(安徽省) 허페이 현(合肥縣)에서 태어났다. 1844년에 향시(鄕試)에 합격한 후 베이징(北京)으로 올라와 유명한 정치가이자 학자인 쩡궈판(曾國藩)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이후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관료로서의 길을 착실하게 가던 리훙장에게 태평천국의 난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1853년 태평군의 기세가 높아지자, 리훙장은 조정의 명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 의용군인 회군(淮軍)을 조직했고, 안후이 순무(安徽巡无) 푸지(福濟) 휘하에서 활약한다. 이후 자신을 인정해준 쩡궈판의 참모로 들어가 쩡궈판의 상군(湘軍) 및 고든의 상승군(常勝軍)과 연합해 태평군 소탕의 주력 인물로 활약하여 결국 1864년에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했다. 그리고 이어서 발생한 염군(捻軍)의 난을 진압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군사적 성공을 발판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한 리훙장은 스승 쩡궈판과 함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이끌었고, 쩡궈판이 세상을 떠난 뒤 청 정부의 최고 정치가이자 외교가로서 활약했다. 이 양무운동을 바탕으로 리훙장은 북양해군을 창설하여 훈련시켰으나, 1894년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무참하게 패배했다. 전쟁 후 정치 전면에서 물러나게 되나, 외교 면에서는 청 정부를 대신하여 외교 업무를 처리하여 외국 열강들을 상대로 굴욕적인 조약들을 체결하는 당사자가 되었다. 치욕적인 말년을 보낸 리훙장은 청이 맺은 대외조약 중 가장 치욕적인 ‘신축조약(베이징의정서)’을 체결하고 얼마 뒤인 1901년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매국노 vs 애국자… 극단의 평가 받는 '동양의 비.. 독일의 빌헬름 2세는 리훙장(李鴻章·1823~1901)을 가리켜 '동양의 비스마르크'라고 했다. 독일 역사에서 최초로 통일을 이룩했던 정치가에 비견될 만큼 중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는 의미다.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해 명성을 얻은 리훙장은 만주족 관원 일색인 중앙 정계에 진출해 요직을 차지한 한족계 정치가였다. 청나라의 정치 체계를 유지하면서도 군사, 과학 등의 분야에서 서구화를 추진해 외세에 맞서려 했던 그는 쇠락해가는 청나라를 대표해 외국 열강들을 상대로 굴욕적인 조약을 연이어 체결해야 했던 비운의 인물이기도 했다.리훙장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당시 중국인들은 청일전쟁의 패배와 굴욕적인 조약 체결 책임을 그에게 돌리며 매국노라고 비난했다. 세월이 흘러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중국을 강대국으로 만들려 했던 그를 애국자이자 민족주의 정치가로 재평가하고 있다.<리훙장 평전>을 쓴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는 '지은이의 말'에서 "나와는 정적(政敵)이고, 사적인 친분 또한 깊지 않기 때문에 그를 변호해 주고픈 마음이 있을 리 없다"면서도 "이 책 속에는 그를 변호하거나 그를 위해 해명하는 말이 많다"고 적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공정하게 서술하겠다는 의지다.량치차오는 리훙장을 가리켜 "재능은 있었으나 학식이 부족했고, 경험은 있었으나 혈기가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군사만 알고 민정은 몰랐으며, 외교는 알았지만 내정은 몰랐고, 조정은 잘 알아도 국민은 잘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리훙장의 명성도 청일전쟁 패배와 함께 만신창이가 됐다. 모두들 리훙장의 잘못이라고 비난할 때 량치차오는 실패의 원인 중 절반은 그를 방해하는 무리들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저자는 리훙장의 과오을 꼬집으면서도 "오늘날 리훙장 같은 인물을 또다시 찾아보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독자의 판단을 돕기 위해 리훙장이 처했던 위치와 상황을 먼저 이해하라며 당시의 시대상을 설명하고 군사가, 양무운동의 선구자, 외교가로서 공과를 꼼꼼히 살핀다. 리훙장이 역사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제갈량, 왕안석, 비스마르크, 이토 히로부미 등과 비교한 점도 흥미롭다.
매국노 지탄받던 그는 100년 뒤… 프리스마중국 개화기의 군사전략가이자 정치가, 외교가로 40여 년 동안 실권을 장악하며 막강한 권력을 누렸던 리훙장(李鴻章). 서구열강의 정치가와 외교가들은 그를 기꺼이 '동양의 비스마르크'라고 불렀다. 독일의 빌헬름 2세가 독일을 방문한 리훙장에게 붙여준 별명이었다. 미국 18대 대통령 율리시스 그랜트도 중국 방문 시 리훙장을 만나보고 그를 '세계 3대 지도자 중의 한 명'이라고 극찬했다.하지만 독일의 비스마르크와는 달리 그는 시종 굴욕적인 매국(賣國) 조약의 원흉으로 지목되면서 중국 내에서 근 1세기 동안 한간(韓奸·매국노)이라는 혹독한 평가를 받아 왔다. 이런 혹평은 그가 주도했던 양무운동이 결과적으로 청일전쟁의 참패로 이어졌기 때문임은 물론이다.그러나 1990년대 중국이 개혁개방을 기치로 내걸고 나서면서 양무운동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양무운동의 사상적 토대인 '중체서용(中體西用)'의 정신이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이념지표로 세워진 데 따른 것이었다. 리훙장은 다시 조명됐다. 그에 대한 평가는 '나라를 팔아먹은 부패한 매국노'에서 '백척간두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애국자'로 바뀌었다. 침몰을 막은 영웅은 아니었지만, 구멍 난 배 위에서 항해를 하려 무진 애를 썼던 애국자쯤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성쇠나 정치적 상황에 따라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극단을 치닫는다.서구열강과 맺은 대외 조약 중 가장 굴욕적인 것으로 평가받는 베이징의정서를 체결한 직후인 1901년에 리훙장은 사망했고, '평전'의 이름을 단 이 책은 바로 그해에 나왔다. 보통 인물평전이라면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내려진 뒤에 씌어지기 마련이지만, 이 책은 사후 곧바로 출간됐다. 평전을 써낸 이가 정치적 견해를 달리했던, 어쩌면 정적(政適)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인 량치차오(梁啓超)라는 것도 흥미롭다.중국 근대 개화기의 혼란 속을 관통했던 인물들은 사회적 가치의 변모나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평가가 극단을 오가니, 당대에 그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봤던 이의 시선이 오히려 더 정확할 수도 있겠다. 막강한 권력을 누린 인물에 대한 당대의 평전이라면 자칫 미화 일색의 왜곡된 시선이 드러날까 우려되기 마련이지만 이 책은 리훙장과 다른 정치적인 견해로 맞서 왔던 정적이 쓴 것이니 그런 함정은 없다.그렇다고 폄훼의 시선도 없다. 스스로 저자가 이 책 속에서 '역사를 쓰는 사람은 반드시 공정한 마음을 가지고 써야 한다'고 다짐한 것처럼 객관적 시점을 유지하려 애쓰며 잘잘못을 조목조목 짚어낸다. 그러곤 죽은 리훙장이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이 녀석 나를 이해하는구나'라고 미소를 지으며 말할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리훙장은 시대를 만든 영웅? 시대가 만든 영웅! 19세기 중국 근대사의 중요한 장면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리훙장(李鴻章·1823~1901). '태평천국의 난'과 '염군의 난'을 진압하면서 중앙 정계에 진출한 뒤 무려 40여년간 실권을 장악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서양 문물을 수용해 중국을 근대화하려다 실패한 양무운동을 이끌었고 외국 열강과의 굴욕적 조약을 잇따라 체결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런 삶 때문인지 당대 중국인들은 물론, 후대는 청일전쟁과 관련해 우리에게도 친숙한 그에게 매몰찬 평가로 일관해왔다. '외국 열강에 나라를 판 매국노', 한간(漢奸), '부정부패자'….역사와 그 역사를 관통한 인물에 대한 후대의 재평가는 어쩔 수 없는 일. 경제 강국으로 급부상한 중국에서 최근 양무운동에 대한 긍정적인 재고와 함께 리훙장을 다시 보자는 돌풍이 불고있다. 그 평가는 종전과는 판이하다. '태평천국의 난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중국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애국자', '민족주의 정치가', '이이제이(以夷制夷)로 열강을 견제하려 했던 외교가'…. 굴곡 많았던 그의 삶만큼이나 사후의 인물 평도 극단의 변형을 보여 얄궂다.'리훙장 평전'(량치차오 지음, 박희성·문세나 옮김, 프리스마 펴냄)은 최근 중국의 리훙장 재평가 바람에 편승해 출간된 흥미로운 책이다.후대의 평가가 아닌, 당대를 같이 살았던 인물이 리훙장 사망연도인 1901년 서양식 전기문체로 그의 일생을 기록, 서술한 점이 신선하다. 리훙장보다 50세 연하인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는 당대 숱한 정치 논술을 써 파장을 불러일으킨 사상가이자 혁명가, 문학가로 리훙장과는 많은 견해 차를 보였던 인물이다. "시국에 대한 나의 견해를 숨기지 않음은 이 책이 옛 사람들이 아닌, 후손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쓰는 사람은 반드시 공정한 마음을 가지고 써야 한다'는 저자가 내린 리훙장 평가는 일단 "시대가 만든 영웅일 뿐, 시대를 만든 영웅은 아니었다"는 것이다.그러면서도 리훙장의 친구 보다는 오히려 정적에 가까웠던 그가 기록한 리훙장 흔적들은 연민과 두둔에 가깝다. "리훙장이 뛰어난 영웅이 될 수 없었던 것은 배운 것도 없고 재주도 없어 감히 파격적이지 못했기 때문""치욕의 자리가 분명한 각종 조약 체결 자리에 주변의 만류를 물리치고 나간 것은 고생을 피하지 않고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 특히 청일전쟁 패배며 외국 열강들과의 굴욕적인 조약 체결 책임을 리훙장 한 사람에게만 돌린다면 권력을 잡고 나라를 망친 다른 중신들의 죄까지 모두 그에게 뒤집어씌우는 꼴이 될 것이라는 지적은 요즘 세태에 얹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은이의 말> 중에서 중국에는 리훙장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상당히 많다. 나와는 정적(政敵)이고, 사적인 친분 또한 깊지 않기 때문에 그를 변호해주고픈 마음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이 책 속에는 그를 변호하거나 그를 위해 해명하는 말이 많다. 심지어 일반적인 견해와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많다. 이렇게 쓴 까닭은 역사를 쓰는 사람은 반드시 공정한 마음을 가지고 써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쓰는 인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고 많은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저명한 영국 수상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에게 화를 내면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그리라.”고 말했다. 내가 쓴 이 책은 분명히 글래드스턴에게는 꾸지람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리훙장이 이 책을 알게 된다면 지하에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녀석, 나를 이해하는구나.”
<옮긴이의 말> 중에서 과연 리훙장은 서양 열강에 나라를 판 매국노인가, ‘동양의 비스마르크’인가? 역사적 사건이나 역사 속 인물에 대한 해석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라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너무 극단적이다. 격동의 19세기 중국 근대사를 바로 이해하고 그 당시 실권자인 리훙장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내리기 위해서는 우선 그가 어떤 인물인지 제대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리훙장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중국 근대 대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가 이 책에서 자신의 정적(政敵)이었던 리훙장을 비교적 객관적인 눈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제 리훙장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이 책을 통해 낡은 생각은 버리고 새로운 눈으로 리훙장과 다시 마주하길 바란다.
저자 : 량치차오 저자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는 근대 중국의 대사상가이자, 혁명가, 문학가이다. 광둥 성(廣東省)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중국 전통교육을 받았으나, 1890년 상하이(上海)에서 세계 지리서인 『영환지략(瀛環志略)』과 서양 서적을 본 뒤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그해 캉유웨이(康有爲)를 처음 만나 그로부터 육왕심학(陸王心學)과 서학(西學)을 배우고 공양학(公羊學)을 익히는 등 스승 캉유웨이를 통해 개혁 사상과 서양의 근대 지식을 배웠다. 1895년 캉유웨이와 함께 베이징(北京)에 강학회(强學會)를 설립하고, 상하이에 강학회 분회를 설립하여 여러 나라 서적을 번역하고, 계몽적인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여 서양의 신사상을 소개하고 구사상을 배격하며 애국주의를 고취하여 중국 개화에 공헌했다. 그의 수많은 정치 논설들은 늘 사회에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캉유웨이와 함께 광서제(光緖帝)에게 보내는 상서를 함께 작성했으며, 이것이 광서제의 눈에 들어 결국 무술변법(戊戌變法)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서태후(西太后) 등 반개혁 세력의 반동으로 이 혁명은 100일 만에 실패로 돌아간다. 무술변법이 실패한 후, 그는 일본으로 망명하여 언론 활동을 시작한다. 그 역시 캉유웨이처럼 입헌군주제를 지지했으며, 진보당을 만들어 쑨원(孫文)과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중화민국에 합류했다. 이후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을 배신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그에 대한 반대 투쟁을 전개했다. 당시 캉유웨이는 선통제를 복위시켜 입헌군주제 형태로 청나라를 되살리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량치차오는 이를 비판하며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돤치루이(段祺瑞)에게 국제 사회 진입을 위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것을 적극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세력 있는 정치가인 돤치루이와 펑궈장(馮國璋)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실패한 후, 정치계를 떠난다. 1918년 말, 유럽을 방문하여 유럽 사회가 안고 있는 각종 병리 현상을 직접 목격한 뒤 귀국하여 서양 문명이 이미 파산했음을 선언하기도 했다. 1929년 신장병으로 죽을 때까지 학술사업에 몰두했다. 문학, 사학, 철학, 불학(佛學)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음빙실전집(飮氷室全集)』, 『음빙실총서(飮氷室叢書)』, 『청대학술개론(淸代學術槪論)』, 『중국근삼백년학술사(中國近三百年學術史)』, 『선진정치사상사(先秦政治思想史)』, 『중국역사연구법(中國歷史硏究法)』, 『중국문화사(中國文化史)』 등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역자 : 박희성 저자 박희성은 아주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에서 러일전쟁 전후의 국제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러일전쟁 기간 국제관계와 한국」(2012) 등 연구 논문을 썼으며, 『마셜』(2011)과 『드골』(2012)을 옮겼다.
역자 : 문세나 저자 문세나는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학생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전문 번역가로도 활동 중이다.
목차
옮긴이의 말 ┃ 리훙장 다시 읽기 ┃ 4 지은이 소개 ┃ 량치차오는 누구인가? ┃ 8 지은이의 말 ┃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려라” ┃ 12
제1장 서론 ┃ 과연 리훙장에게 모든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간웅인지 호걸인지 논하기 전에 그가 처한 위치와 상황을 먼저 이해하라 ┃ 23 비스마르크와의 만남 ┃ 24 중국 근대사와 뗄 수 없는 중요한 인물 ┃ 26 시대가 만든 영웅인가, 시대를 만든 영웅인가? ┃ 29
제2장 리훙장의 위치 ┃ 리훙장을 위한 변호 근대 중국의 권신 ┃ 35 권신의 네 가지 유형 ┃ 37 중국에서 전제정치가 발달한 중요한 두 가지 원인 ┃ 42 만주족 관원 일색인 청조의 몇 안 되는 한족 중신 ┃ 45
제3장 리훙장 등장 이전의 중국의 상황 ┃ 난세는 영웅을 만든다 밀려드는 열강, 혼란한 정국 ┃ 57 끝없이 이어지는 반란 ┃ 61 태평천국의 난 진압, 군사가로서의 명성 시작 ┃ 64 쩡궈판의 참모가 되다 ┃ 70
제4장 군사가 리훙장 상(上) ┃ 시대의 총아, 태평천국을 평정하다 태평천국의 위세가 절정에 달하다 ┃ 75 상승군의 창설 ┃ 79 쩡궈판의 상군, 안칭을 수복하다 ┃ 81 리훙장, 회군을 조직하다 ┃ 84 상하이 방어 성공, 지휘 통솔 능력을 인정받다 ┃ 86 태평천국의 근거지 난징을 토벌하라 ┃ 88 리훙장의 맞수 리슈청 ┃ 89 상승군 지휘관 버제빈 파면 ┃ 96 쑤저우 성 수복 ┃ 100 장쑤 성 남부의 태평군 평정 ┃ 104 난징 수복, 태평천국을 평정하다 ┃ 109
제5장 군사가 리훙장 하(下) ┃ 치밀한 군사전략으로 염군의 난을 평정하다 염군의 난 ┃ 119 동염군을 섬멸하다 ┃ 122 서염군을 섬멸하다 ┃ 127 그 스승에 그 제자, 장수들을 잘 다스리는 진정한 인재 ┃ 131
제6장 양무운동 시기의 리훙장 ┃ 양무운동의 선구자, 진정한 중국 근대화에 실패하다 양무운동을 주도하다 ┃ 137 강군 양성, 사라져버린 옛 꿈 ┃ 142 리훙장의 실패 원인 ┃ 148
제7장 청일전쟁 시기의 리훙장 ┃ 군사가로서의 명성이 청일전쟁 패배와 함께 사라지다 리훙장의 첫 번째 실책 ┃ 159 리훙장의 두 번째 실책 ┃ 163 리훙장의 세 번째 실책 ┃ 168 청일전쟁의 시작, 풍도해전과 아산전투 ┃ 168 황해해전 패배로 제해권을 상실하다 ┃ 171 평양전투, 청나라 해군에 이어 육군도 패하다 ┃ 175 청일전쟁 패배 이유 ┃ 178 리훙장의 열두 가지 책임 ┃ 183 “일본은 중국이 아니라 리훙장 한 사람과 전쟁을 한 것이다” ┃ 185
제8장 외교가 리훙장 상(上) ┃ 굴욕적인 톈진조약과 마관조약을 체결하다 톈진 교안, 리훙장이 처리한 첫 번째 외교 사건 ┃ 193 외교 처리 능력을 인정받다 ┃ 195 청일전쟁의 도화선 톈진조약을 체결하다 ┃ 199 마관조약 체결, 총상으로 얻은 평화 ┃ 202
제9장 외교가 리훙장 하(下) ┃ 리훙장의 외교 역사는 곧 실패의 역사이다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힘을 빌려 일본에 항거하다 ┃ 219 랴오둥 반도 반환의 대가, 중러밀약 ┃ 222 리훙장의 유럽 순방, 실패로 끝난 수입 관세 인상 계획 ┃ 227 자오저우 교안 사건 ┃ 229 무산된 외국 차관 도입 시도 ┃ 233 중국을 차지하기 위한 열강들의 싸움 ┃ 235
제10장 한직에 있을 때의 리훙장 ┃ 량광 총독 시절의 업적과 과오 황허 치수 사업에 작지만 의미 있는 공헌을 하다 ┃ 245 범죄 현장에서 잡는 즉시 극형에 처하다 ┃ 247 도박을 권장하면서 세금을 거두다 ┃ 247 교활한 천주교 신자들에 맞서다 ┃ 249 “캉유웨이 일당의 기세를 진압하라” ┃ 249
제11장 리훙장의 말년 ┃ 죽기 직전까지 국사를 걱정한 한 시대의 풍운아 의화단 사건, 무술변법의 반작용 ┃ 255 당시 리훙장이 취할 수 있었던 상ㆍ중ㆍ하책 ┃ 259 열강 11개국과 신축조약을 체결하다 ┃ 260 러시아와 중러만주조약을 체결하다 ┃ 264 한 시대의 풍운아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 269
제12장 결론 ┃ 리훙장은 어떤 인물이었나? 리훙장과 곽광 ┃ 277 리훙장과 제갈량 ┃ 278 리훙장과 곽자의 ┃ 279 리훙장과 왕안석 ┃ 280 리훙장과 진회 ┃ 281 리훙장과 쩡궈판 ┃ 282 리훙장과 쭤쭝탕 ┃ 283 리훙장과 리슈청 ┃ 284 리훙장과 장즈퉁 ┃ 285 리훙장과 위안스카이 ┃ 286 리훙장과 메테르니히 ┃ 287 리훙장과 비스마르크 ┃ 288 리훙장과 글래드스턴 ┃ 290 리훙장과 티에르 ┃ 292 리훙장과 이이 나오스케 ┃ 293 리훙장과 이토 히로부미 ┃ 295 리훙장에 대한 일화 ┃ 296 리훙장에 대한 어느 일본인의 평론 ┃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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