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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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체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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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정길 → 박종화 가옥 → 영인문학관 →
가나 아트센터 → 김종영 미술관 → 연화정사
광화문에서 상명대학교 방향으로 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부암동 세검정을 지나, 오밀조밀 유럽식 부촌 “평창동”이 눈에 들어온다. 빈틈없이 고급 주택으로 풍광을 이루고, 멀리 인왕산 벽을 만들어 준다.
오래전부터 예술가들이 하나둘 들어와 정착하여 다양한 형태의 미술관과 박물관, 서울옥션 등 새로운 미술을 형성하고 있는 지역이다.
특히, 문인들 자취 따라 걷는 문학 산책로는 박종화 가옥, 영인문학관에 절정을 이루고, 가나 아트센터, 토탈 미술관, 김종영 미술관 등 미술관 순례를 통하며 마음수련하고자 한다.
주택 숲 깊숙이 오솔길을 따라가면 종착역 연화정사에서 바라보는 한 폭의 그림속 풍경이 참 예쁘게 다가온다.
평창동길 구간은 평창동마을과 사자능선이 어우러진 길입니다. 평창동마을은 작가와 예술의 마을이라고도 불리는데, 예로부터 ‘지세적 특징이 사방을 높은 산이 막아 하늘이 작게 보이고, 그 가운데로 계류가 흐른다’ 하여 마음의 번잡함을 잊고자 하는 휴양의 터로 격에 맞는 장소입니다.
하늘과 숲,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람의 손으로 빚어낸 아름다운 마을, 평창동은 가옥들 사이로 보이는 산의 풍경과 잘 어우러져 걷는 내내 볼거리를 제공해 지루하지 않고 평소 산에서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느낌의 경치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사자능선을 따라 상쾌한 산내음을 맡으며 심신을 건강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서울을 대표로 하는 내사산인 북악산과 인왕산, 외사산인 북한산과 관악산을 두루 볼 수 있어 북한산의 조망과 더불어 주변 산의 멋진 경관까지 두 눈에 한 가득 담아 가실 수 있습니다.
가나아트센터·토탈미술관·키미아트 등 유명한 미술관을 한꺼번에 관람할 수 있는 곳으로 ‘평창동 미술의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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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속하는 동이다. 평창동을 기준으로 서쪽은 구기동, 신영동, 남쪽은 부암동, 삼청동, 동쪽은 성북구, 정릉동과 접하고 있고, 북쪽에는 북한산, 그 너머에는 경기도 고양시가 있다. 평창동은 조선시대에 이곳에 선혜청의 평창(平倉)이 있었으므로 해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강원도 평창군과는 관계가 없다.
본디 율목동(栗木洞), 신창(新倉), 월계동(月溪洞), 평창굴장안의 토착마을로 율목동은 밤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 밤의 수확이 많은 동이므로 밤나무골이라 했던 것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평창은 센창이라고도 하며 156번지 일대를 일컫는다. 평창굴은 330번지 일대인데 총융청의 평창이 있어서 붙여졌으며 당초에는 한양굴이라 하였다.
월계동은 월계정(月桂亭)이 있었기 때문에 동네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하는데 월계수로 만든 정자가 있기 때문에 월계동(月桂洞)이라 하던 것이 월계동(月溪洞)으로 바뀌어졌다. 186 ∼ 187번지 일대는 장안이라 하여 평창동 중에서도 가장 큰 토착부락이었다. 도읍을 가리키는 말을 장안이라 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 일대는 한 때 유원지로서 서울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었던 곳이다. 조선 고종 때 편찬된 《육전조례》에는 평창동이 한성부 상평방(常平坊)내의 선헤청계에 속하였다. 조선 후기 서울 북쪽의 방어를 위한 총융청의 군량창고가 있던 평창터가 있다.
평창동내에 군량창고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비가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1914년 4월 1일 경성부제 실시에 따라 평창동은 율목동, 월계동과 함께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평창리가 되었다. 해방 이후, 서울에 편입되지 못하다가 1949년 8월 13일 경기도 은평면 평창리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로 편입돼서, 같은 해 8월 14일 서대문구에 은평출장소를 설치하여 관할 하에 있게 되었다. 1950년 3월 15일, 평창리가 현재의 지명인 평창동으로 바뀌게 되었다.
종로구의 북쪽 끝에 해당되는 평창동은 전체 면적의 65% 이상이 개발제한구역으로 되어 있는 동으로 북한산 줄기가 뻗어 내린 관계로 평지보다는 계곡과 산이 많다. 평창동의 북쪽지방은 표고 200 ~ 714m의 비교적 높은 산지이며 동쪽과 남쪽 사이 급경사의 산지로 형성되어 있다.
동서로 세검정길이 가로지르며, 평창동 동쪽으로 북악터널을 통해 정릉동과 이어진다. 평창동의 시내버스 정거장은 갑을씨티텔 앞, 화정박물관, 외한은행 평창동지점, 평창동 국민은행, 평창동주민센터. 서울예술고등학교, 벽산평창힐스아파트, 일성아파트, 롯데삼성아파트가 있고 시내버스 1020, 1711, 7211, 110, 153가 다닌다. 마을버스는 종로06, 13이 있고 13번은 평창동, 구기동, 홍지동 왕복하고 06번은 평창동 내를 왕복한다.
서울예술고등학교, 가나아트센터, 갤러리세줄, 가인갤러리, 디방, 토탈미술관, 김종영미술관, 키미아트가 있으며, 북한산 기슭에 많은 고급 주택들과 갤러리, 카페가 있는 주택가이다. 근래에 동내에 북한산 둘레길이 만들어져 외부 사람들도 많이 방문한다. 드라마 및 영화, CF의 배경 및 촬영 장소로 애용되고 있다. SBS에서 방영한 시크릿 가든, 49일, 자이언트, 내게 거짓말을 해봐와 MBC에서 방영한 지붕 뚫고 하이킥, 커피프린스 1호점, 개와 늑대의 시간 등의 촬영장소이다.
북한산 둘레길 6코스 : 평창동 마을길
평창동 마을길은 급격한 경사도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지는 4~5코스와 달리 평탄한 길로 이어져 있다. 산자락을 따라 곳곳에 해원사, 법정사, 혜광사, 전심사, 청련사, 연화정사 같은 작은 절들이 숨어 있다. 그 중에서 연화정사에서는 멀리 북한산 능선과 인왕산자락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평창동의 아름다운 집들이 숲과 나무들 사이로 알알이 박혀 있다.
형제봉 입구~연화정사~평창공원~지킴터~해원사~청련사~전심사~탕춘대성암문 입구 (총 5㎞, 2시간30분) 북한산 국립공원사무소 (02)900-8085 ecotour.knps.or.kr
북한산 둘레길 6구간인 ‘평창마을길’ 코스 형제봉 입구~연화정사~평창공원 지킴터~해원사~청련사~전심사~탕춘대성암문 입구다. 모두 5㎞, 2시간30분 정도 걸린다. 험하진 않지만 가파른 오르막이 있어 힘들 수 있다. 문의 북한산 국립공원사무소 (02)900-8085 www.ecotour.knps.or.kr
아트밸리 IN 평창동 공기가 맑고 풍광이 뛰어나 일찍이 예술가들의 작업실과 집이 많아서인지 평창동에는 갤러리나 미술관과 같은 예술공간들이 의외로 많다. 1976년 서양화가 윤명로 화백이 이곳에 터를 잡은 이후 산중턱을 따라 다양한 콘셉트의 화랑, 미술관과 많은 예술인들이 보금자리를 틀고 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예술인 마을이 되었다.
한국 근대조각 1세대 작가인 김종영 선생의 예술혼을 기리고 젊은 작가들을 후원하기 위해 만든 김종영미술관, 문인들의 자취가 살아 숨쉬는 영인문학관, 평창동의 얼굴로 불리는 복합문화전시공간 가나아트센터(영종도 공항 인테리어 설계자인 프랑스의 건축가 장 미셀 빌모트가 설계했다), 20세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양화가 김흥수 화백을 기리는 김흥수미술관, 이어령 교수와 강인숙 교수 부부가 사재를 털어많든 영인문학관……. 평창동은 계속해서 새로운 콘셉트의 기념관과 화랑들이 들어서고 있는 진화하는 예술마을이다.
드라마 IN 평창동 드라마에서 대저택이 보이고 전화벨이 울리면 으레 등장하는 “네, 평창동입니다.”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이곳은 일본 한류팬들에게 필수 답사 코스다.
이병헌 팬들이 자주 가는 곳은 <아름다운 날들>에서 이병헌의 집으로 나왔던 소나무 집인데, 이곳은 <천국의 계단>에선 최지우의 집으로도 나왔다. 이외에도 평창동에서 가장 유명한 집은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등장한 이순재의 저택이다.
이 집은 <마이 프린세스>에선 송승헌의 집으로 나왔던 곳이다. 바로 옆집은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채정안이 살던 유리집이다. 외관만 이곳에서 촬영했는데, 앞으로 튀어나온 외관이 유리로 덮혀 있다.
이 외에도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주인공들의 집으로 나온 평창동의 집들은 유명한 건축가들의 작품이 많고, 실제로 건축가들도 사는 경우가 많아 난개발에 휩싸이지 않고 주변 풍광과 잘 어우러져 있다.
평창동에서 최근 촬영한 드라마 시크릿 가든 (SBS 2011), 49일(SBS 2011), 자이언트(SBS 2010), 내게 거짓말을 해봐(SBS 2011), 천국의 계단 (SBS 2003), 아름다운 날들 (SBS 2001), 최고의 사랑 (MBC 2011), 반짝반짝 빛나는 (MBC 2011), 여인의 향기 (MBC 2011), 마이 프린세스 (MBC 2011), 지붕 뚫고 하이킥(MBC 2010), 커피프린스 1호점(MBC 2007), 개와 늑대의 시간(MBC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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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에서 사신 월탄 박종화(月灘 朴鍾和) 선생님은 역사소설가로 우리나라 문학에 큰 획을 그으신 분입니다.「조선왕조실록」원본을 읽은 최초의 역사소설가로 각종 사료를 섭렵한 후에 소설을 쓰셨는데 지금도 선생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가 많이 방영되고 있습니다.
선생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을 많이 썼는데 내용이 재미있어 독자의 눈을 사로잡기도 하지만 충의(忠義)와 지조(志操)를 으뜸으로 하는 전통 가치관을 작품 속에 녹여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품으로 일제 치하에서 점점 잊혀져가는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를 알리고 계승하는데 한 몫을 했습니다.
선생은 1901년 서울 서소문의 대저택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집안으로 할아버지이신 박태윤님은 고위직 무관벼슬을 지내셨는데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에 사직하고 전주(全州) ‘백지’와 ‘장지’를 사다가 서울에 파는 사업을 벌였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양반, 그것도 벼슬을 한 집안이 상업에 종사 한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종이를 사다 파는 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송욱이라는 사람에게 집터를 빌려주고 돈을 대주어 “신구서림” 이라는 인쇄소를 차리게 한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하드웨어인 종이 판매에서 소프트웨어인 문화콘텐츠로 눈을 돌린 것이지요. 나중에는 한지 대신 양지를 쓴 대량 인쇄물이 쏟아져 나오자 이곳에다 책방까지 겸하게 합니다.
이렇게 할아버지는 시대의 변화를 정확히 읽고는 유학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사랑채에 서당을 열어 한문을 가르쳐 전통을 지키는 한편 뒤채에서는 일본인 교사 두 명을 채용해 일본어와 신학문을 가문의 젊은이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런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난 선생은 같은 시대의 많은 문인들이 불우하게 살다 일찍 죽은 것과 다르게 집안 특히 아버지의 적극 후원 속에 많은 작품을 남기고 천수를 다한 보기 드문 분이었습니다. 또, 많은 문인들이 친일로 명성을 더럽혔을 때 민족문학의 주체성을 고수할 수 있었던 것도 이렇게 집안의 든든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생이 여섯 살 때 집에 있는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때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을사늑약에 반대해 자결을 한 충정공 민영환의 집에 가서 하인의 등에 엎여 피 묻은 열사의 옷과 마루 틈을 비집고 솟아오른 대나무를 본 선생은 훗날 이때 신비함과 성스러움을 체험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랫동안 익힌 한문 실력과 함께 이때의 충격이 후에 걸출한 역사소설을 만든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십년 동안 서당에서 한문을 익히며 집에 붙어 있는 책방인 “신구서림” 에서 허균의「홍길동전」같은 고소설과 이인직의 「혈의 누」같은 신식 소설을 빌려다 읽게 됩니다. 문학에 심취하고 일본어에 익숙하게 되자 진고개 지금의 충무로에 있는 일본서점에서 일역판으로 된 하이네의 시, 톨스토이 소설 같은 서양문학책을 구입해 읽게 됩니다.
그 때가 선생이 열다섯 살 때였는데 관습에 따라 관례를 올리게 됩니다. 관례는 댕기머리를 자르고 어른이 되어 상투를 찌는 행사입니다. 이때부터 서방님 소리를 들으며 어른처럼 대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선생이 관례를 치른 후였습니다. 할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십 년 동안 한문공부를 했으니 앞으로 신식 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일찍이 뒤채에 신식공부방을 만들었던 할아버지는 선생에게 입학을 허락을 하게 됩니다.
다음 해 열여섯이 되는 해 휘문의숙 지금의 휘문고등학교이지요. 소학교를 거치지 않았지만 일본어와 수학을 잘했기 때문에 3등으로 당당하게 합격을 합니다. 선생이 평생을 두고 올곧은 정신과 바른 몸가짐을 가진 것은 할아버지의 엄한 교육도 있었지만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규율이 엄한 휘문을 다니면서 더욱 다져진 것입니다.
여기서 문학활동을 처음 시작하게 된 선생은 홍사용, 정백 같은 친구를 만나게 됩니다. 열일곱에 한살 위인 김창남님과 혼인을 해서 가정을 꾸린 선생은 친구들과 세계문학을 토론하며 작가로서의 길을 준비합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을 뒤흔든 만세소리와 함께 삼일운동이 시작되고 선생도 친구들과 함께 탑골공원에 가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삼일 운동 후 조선 사람의 저력에 놀란 일제는 문화정책으로 회유를 합니다. 신문발행을 허가하고 잡지가 연달아 창간되었습니다.
문학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선생에게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습니다. 1922년 친구들과 함께 낙원동에 “문화사”라는 간판을 달고 문예지 “백조”를 발간했습니다. 나중에 “흑조” 라는 이름의 사상지도 발간할 계획이었으나 결국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순수문예지 “백조” 의 발행으로 이들은 문단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고 활발하게 활동을 시작한 신문과 잡지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이때 비로소 원고료라는 이름으로 작품에 대한 대가를 받았는데 그 전에는 신문사에서 작가의 이름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라고 하면서 원고료를 지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선생은 어떤 활동을 했을까요. 습작 기간을 거쳐 1921년 잡지「장미촌」창간호에 실린 「오뇌의 청춘」「우윳빛 거리」라는 제목의 처녀시작을 발표하고 1923년 「백조」3호에 단편소설 「목 매이는 여자」를 발표합니다. 이 단편소설은 신숙주의 부인을 주인공으로 해서 남편의 변절을 원망하며 목을 맨 부인을 통해 죽음을 통해 충신의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처음 창작한 소설이 역사소설이기에 첫 장편 「금삼의 피」가 탄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선생은 역사소설을 통해 민족의 정신을 일깨우는 위대한 길에 오르게 됩니다. 1946년에는 동국대 교수직에 취임해 수많은 제자들과 문인들을 양성했고 서울신문사 사장도 역임하셨지만 지금은 역사소설가로 더 유명합니다.
선생은 뛰어난 소설가이기도 했지만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또 성품이 바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인정도 많으신 분이었습니다. 대를 이어 집안일을 돌보던 하인이 죽자 이틀 동안 글을 쓰지 않고 애통해 하면서 장례식을 치르고 유족에게 거액의 조위금을 건네주는 따뜻함도 있었고, 갈 곳이 없는 친지들을 집으로 데려와 머물게 했습니다.
술도 잘 마셨다고 합니다. 어느 날은 오후 세시에서 새벽 두시까지 남대문에서 동대문까지 걸어가며 대폿집에 들러 선생과 현진건님은 60잔, 나도향님은 70잔, 염상섭님은 100잔을 마시며 일제의 압박에 분통을 터뜨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선생은 자제력이 강해서 술이 취하면 즉시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탈선이 없었다고 합니다. 부모님에게도 효성이 깊었는데 봉래동 지금 서울역 뒤에 있는 당신 집에서 을지로에 있는 부모님 집까지 매일 아침 걸어가 문안을 드렸고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애통해 하며 아침, 저녁으로 빈소를 찾고 손위 형님을 아버지처럼 모셨다고 합니다.
부인과 자식들에게도 정성을 다해서 부인을 존중했고 「운수 좋은 날」을 쓴 현진건님의 외동딸과 결혼한 외아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갔을 때도 매일 엽서를 보내 안부를 물으니 아드님도 꼼짝없이 매일 답장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는 말이 있지만 선생님의 자식사랑이 대단하지요?
선생은 시대가 유학을 버렸어도 그 뜻을 이렇게 생활 속에서 선비의 정신과 몸가짐으로 실천하신 분이었습니다. 남대문밖 최고 부잣집의 아들로 자랐으면서도 조금도 티를 내지 않고 친일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으며 새로운 사회풍조인 좌익과도 거리를 둔 진정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광주에 내려가서도 맨 먼저 광주학생운동기념탑을 찾았고, 인천 자유공원에 갔을 때 동행한 문인들이 아무런 의식 없이 맥아더 장군의 동상 밑에서 사진을 찍자 외국의 장군 동상 아래에서 어떻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느냐고 나무랐다고 합니다.
문인이라면 흔히 있는 연애담 하나 남기지 않은 꼿꼿한 선생님은 평소에도 솜버선에 한복을 입고 흰 고무신을 신었으며 원고기일을 한번도 여기지 않은 성실함을 보였으며 주위사람들에게는 돈을 뜻하는 한문 ‘전(錢)자에는 창 과(戈)자가 두 개 들어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하면서 물질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충고하셨다고 합니다.
선생은 오직 문학 한 길만 걸었습니다. 선생의 인품과 명성을 이용하려는 정치계에서는 높은 직위를 제안하며 유혹했지만 선생은 집안에 이십 년 동안 단골인 새우젓 장사의 비유를 들어 완곡하게 사양했습니다. 집에 새우젓을 대던 새우젓 장사가 돈을 벌자 다른 사업을 하다가 3년 만에 망한 뒤 다시 단골이 되기를 청했지만 이미 다른 단골이 생겼다고 거절했다는 이 말씀 끝에 ‘새우젓 장사가 새우젓을 팔고 다녔으면 끝까지 새우젓을 팔아야 하듯이 나도 문학을 했으니 분수를 지켜 끝까지 몰두하겠다.’고 당신의 뜻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지금 이 집은 안채, 사랑채, 별채 이렇게 세 동의 한옥 건물인데 한말에 어영대장을 지낸 이봉의의 아들 이기원이 건립했다고 전해집니다. 선생이 1937년 매입해서 주로 사랑채 누마루인 조수루에서 「금삼의 피」「대춘부」「자고가는 저 구름아」「세종대왕」「아랑의 정조」를 창작하셨습니다. 원래 종로구 충신동에 위치했는데 1975년 동대문에서 이화동으로 간순환도로 공사로 헐리게 되자 선생이 지금의 위치로 이전해서 원형을 복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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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에 위치한 문학 박물관이다. 이어령, 강인숙 부부가 설립하였다. 문학 자료의 수집과 보관 및 전시에 가장 큰 역점을 두고 있으며, 누군가가 모으지 않으면 유실될 우리 시대의 문학 자료들을 모아 후세에 전하는 것을 목표로 설립되었습니다.
문학관의 현재 자료 보유수는 약 25,000여점이며 이 자료들 중 대표적인 자료는 문인의 초상화 약 120점, 육필원고 800여점, 문인 서화 및 도자기 자료 150여점, 문인과 화가의 선면화 180여점, 문인의 편지와 엽서 200여점, 문학 작품에 들어갔던 삽화의 원화 300점, 문인의 문방용구 및 애장품이 300여점, 문학사상이나 현대문학을 비롯한 문학잡지가 창간호부터 현재까지 보관되어 있습니다.
특히 5~60년대의 사상계나 문학 예술 등 희귀본 잡지의 원본이 있습니다. 또한 70년대부터의 문학 관련 스크랩과 문인 사진, 또한 저자 사인북이 대부분 초판본으로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문학관의 자료는 현재 전시와 더불어 천천히 정리가 진행되고 있으며 수집도 병행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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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에 개관한 가나아트갤러리는 국내외 3백여 회의 기획전시 및 대규모 국제미술전 참가를 비롯한 미술문화의 발전과 미술 국제화를 위한 노력을 계속해오고 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가나아트갤러리는 미국 및 유럽 등 전 세계 미술 시장에서 세계 최고의 화랑들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어 당당히 인정받고 있다.
지난 20여 년간 수 십 여 차례의 국제아트페어/FIAC 참가(1985), 가나판화공방 개소(1987), 도서출판 가나아트 출범(1988), 파리 가나-보브르/Gana-Beaubourg개관(1995), 가나미술연구소(1996), 아트샵 개관(1997), 파리 국제공동체/cite des arts 참여(1996), 도예공방/양평 개소(1997), 작가 작업장/안성 설치(1997), 가나아트센터 개관(1998), (주)서울경매 출범(1999),(주)가나아트닷컴 출범(1999), 인사아트센터 개관(2000), 가나아뜰리에 개관(2001), 가나아카데미/인사동 설립(2002), 에꼴 드 가나/평창동 개원(2002) 등을 실현함으로써 미술선진화를 선도하고 있다.
가나아트갤러리의 전시는 개인초대전에서 작고거장의 유작전, 주제기획전 등 다양한 형식과 장르를 아우르며, 동서를 가로지르고 고금을 꿰뚫는 폭넓은 시야로 고미술과 현대미술 전시 등 통일성과 다양성을 구현해오고 있다. 한편, 가나아트갤러리는 전시기획 및 아카데미강좌 개설 등과 더불어 전시와 연계한 음악, 무용, 연극, 마임 등 타 장르와의 연계 프로젝트 추진을 통해 보다 다양해진 관람객의 문화향수욕구에 부응하고자 하였다.
가나아트’는 한국 현대미술의 또 다른 이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3년 인사동에 가나화랑을 개관한 이래 리히텐슈타인, 장 드뷔페, 조르주 브라크 등 해외 유명작가들의 작품전시를 통해 세계 현대미술의 흐름을 한 발 앞서 소개해왔을 뿐 아니라 우리 작가들의 작품을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수준 높은 기획으로 한국 미술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데 제몫을 해왔다. 그 결과 미국과 유럽의 세계적 화랑들과 어깨를 견줄 만큼 성장했다.
1998년 개장한 평창동 가나아트센터는 인사동의 인사아트센터와 함께 가나아트를 대표하는 전시문화공간. 세계적 건축가 장 미셸 빌모트가 설계했는데, 한국의 문화적 뿌리를 바탕으로 한 절제되고 부드러운 건축미가 살아 있을 뿐 아니라 다목적 전시가 가능한 기능성과 심미성이 조화를 이룬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2000년엔 독일의 건축전문기관인 타슈(Tasche)가 ‘밀레니엄 건물’로 선정하기도 했다.
2개 층, 3개의 주 전시장으로 구성된 전시 공간은 단아한 내부와 천장매립형의 깔끔한 조명시설을 갖췄다. 또한 고전 건축에 주로 이용된 중정(中庭)을 도입해 고전적 요소와 현대적 미감이 어우러진 매력 있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300석에 달하는 관람석과 최첨단 음향시설을 갖춘 야외공연장에서는 미술 이외에도 클래식과 대중음악 공연, 마임 등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행사가 펼쳐져 복합문화공간이 되고 있다. 또한 레스토랑과 다양한 휴게시설, 아트숍이 있어 시민들의 열린 쉼터가 되어준다.
가나아트센터와 나란히 있는 가나포럼스페이스 역시 빌모트의 설계로 1999년 개관한 후, 리노베이션을 거쳐 2004년 재개관했는데 회화, 입체, 사진, 영상, 설치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전시뿐만 아니라 연극, 기타 공연 등이 열려 이곳을 찾은 관람객에게 다양한 문화체험의 기회를 제공한다.
한편 가나아트는 가나아트센터와 인사아트센터 외에도 프랑스 파리에 가나-보브르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월간 가나아트와 미술 전문서적 출간, 가나미술연구소 운영, 역량 있는 작가들에게 창작 공간 제공 등을 통해 우리나라 미술의 대중화와 선진화를 선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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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영 미술관은 20세기 한국 조각사를 상징하며, 근대 추상미술의 선구자라 불리우는 又誠 김종영 선생님(1915-1982)의 20주기를 맞이하여 2002년 12월 15일에 건립되었다.
평생을 선비와 같이 연구하며 지내신 선생님의 삶과 예술세계를 재조명하고, 후진 양성에 매진하며 초창기 한국 조각계를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한 우성 선생님의 뜻을 기리며 조각 발전을 위해 노력을 충실히 하는 미술관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본 미술관은 김종영 선생님의 작품들을 다각도로 보여주는 상설전시를 기본으로 다양한 자체 기획 전시와 매년 두명의 조각가를 선정하여 진행하는 오늘의 작가전, 우성 김종영조각상 수상자전등 다양한 전시를 기획하고 개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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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정사를 시작으로 둘레길을 따라 해원사·보현산신각·법정사·천제단 터·여산신각·혜광사·청련사·전심사 등 절과 절터를 만날 수 있다. 연화정사는 가기 쉽고 조망이 좋다. 북한산 보현봉에서 뻗어 내리는 사자능선과 그 안에 수북이 들어앉은 평창동 집들이 한눈에 보인다.
날이 좋으면 멀리 인왕산까지 보인다. 절 앞마당엔 멀리서도 눈에 띄는 커다란 돌부처님이 서 있다. 해가 지기 전 길이 멀어 바쁜 마음을 잠시 쉬게 한다. 불상 앞에 서서 평창동 일대를 굽어본다. 올라올 때 그렇게 거대해 보이던 고급 저택들이 작게 내려앉아 있다. 곁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삼라만상이 한 법성체인데 그 무엇을 차별하랴. 시기, 질투, 원망, 미움, 죄의식, 불안, 공포 속에 있더라도 본래는 진리의 부처님 몸 아니던가. 비롯됨도 없고 끝도 또한 없도다. 가도 가도 한이 없는 그 생명에서 그 무엇이 새로 있으랴. 태어남도 죽음도 그대로 나로다.’
http://blog.daum.net/honbul-/74
http://blog.daum.net/gilju518/9186968
연화정사의 돌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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