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체험 이야기
세검정길 → 이광수 별장 터 → 홍지문 및 탕춘대성 → 석파정 별당 → 석파정 → 안평대군 이용 집터 → 현진건 집터 → 반계 윤웅렬 별장 → '찬란한 유산' 촬영지 → 윤동주 시인의 언덕 → 최규식 경무관 동상 → 창의문 → 환기미술관 → '커피프린스 1호점' 촬영지 → 백사실 계곡 → 세검정 터 → 세검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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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동
서울 도심서 10분 `비밀의 정원‘ 부암동
아주 가까이서 찾은 가장 오래묵은 풍경
종로구에 위치한 부암동은 세련된 삼청동 분위기와 옛날 모습의 촌스러움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가진 동네이다. 부암동은 미술관, 개성있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1960~70년대 방앗간과 이발소와 함께 자리잡고 있다. 본래는 화가, 문인, 교수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예술가들이 느릿느릿 살아가던 동네였으나 최근에 부암동사무소 앞에서부터 ‘커피 프린스 1호점, 최한성의 집’으로 유명해지면서 산모퉁이 카페에 이르는 길 곳곳에 개성 넘치는 카페와 숍이 줄지어 들어서고 있다. 삼청동, 신사동 가로수길과 더불어 감각적인 공간으로 주목받는 곳이다. 산책코스로도 좋으며 관광지 분위기도 나는 다양한 모습을 가진 동네이다.
부암동이 은둔의 아이콘, 비밀스러운 도보 여행지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말부터였다. 청와대 뒷동네라 왠지 접근할 엄두가 나지 않았고, 동네가 워낙 깊고 높아 일반의 시계 밖에 있다는 점 등이 그 이유들이다. 골이 얼마나 깊었으면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도원의 현신으로 부암동을 지목해 별장을 짓고, 책을 읽고 활을 쏘며 심신을 단련하며 살았을까. 그가 꿈에 본 `깎아지른 절벽, 울창한 숲, 굽이진 시내, 자칫 길을 잃을 것 같았던 꼬불꼬불한 길`은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에 그대로 묘사됨은 물론 지금의 부암동주민센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골목골목에 엇비슷하게 존재하고 있다.
행정명이 `안평대군 이용 집터`인 이곳의 옛 이름은 `무계정사`. 한때 흥룡지지(興龍之地). 즉 왕이 탄생할 기운이 서린 곳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그가 계유정란으로 목숨을 잃자 졸지에 모반의 땅이 되었고 몽유도원도 사라졌다. 터 북쪽에 있는 기와집은 훗날 지어진 한옥일 뿐 안평대군과는 무관한 곳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무계정사 앞 공터에 서서 눈을 지긋이 감게 되는 것은 의구한 산천 속에서 사라진 인걸의 스토리를 익히 알고 찾았기 때문이다. 유홍준이 말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고.
부암동 시크릿가든의 절정 백사실계곡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다. 백석동천이란 `풍광이 끝내주는(동천) 백석`이라는 뜻이다. 백석은 백악산(북악산의 또 다른 이름) 일대를 아우르는 지명이다. 백석동천 아래에 남아 있는 집터는 누가 보아도 조선 별서의 흔적이다. 계곡 앞에 연못이 있고, 연못 끝에는 정자 기초석들이 솟아 있어서 조선 선비들의 풍류를 짐작케 한다. 연못 뒤로는 집터가 남아 있는데 최근 `유구보존지역`으로 지정돼 발굴 조사가 끝날 때까지 폐쇄된 상태다. 학자들은 이 집터 주인으로 백사 이항복, 윤두수의 넷째아들 백사 윤훤, 자하 신위 등을 주장하고 있으나 모두 가설일 뿐이다.
백사실계곡의 깊은 멋을 더 즐기고 싶다면 백일붕선원을 지나 세검정에 이르게 되는 계곡길을 걸으면 된다. 지금은 고요한 겨울 정취만 가득하지만 곧 도롱뇽, 개구리, 맹꽁이, 버들치, 가재 등이 서식하는 서울 속 시골 계곡의 깊은 멋에 흠뻑 빠져들게 될 것이다.
중년순례자들의 끝없는 발길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은 서울성곽 3구간으로 창의문와 혜화동 혜화문까지 이어진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무장 간첩들이 청와대 공격을 위해 남파되었을 당시 치열했던 전투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1ㆍ21소나무, 김신조루트, 숙정문 등을 산책할 수 있다. 오전 10시부터 신분증을 지참한 사람에 한해 개방한다.
석파정, 석파정 별채, 세검정과 홍지문 및 탕춘대
석파정은 숙종 때 문신 조정만의 별장 소운암이 있었던 곳인데, 훗날 김흥근(철종 때 영의정)이 그곳에 별장을 지어 `삼계동정자`로 명명했다. 그런데 이곳을 좋아한 흥선대원군이 `팔 것`을 청했으나 거절당하자 `딱 하루만 빌려 달라`고 재청했고, 결국 동의하고 말았는데 흥선은 그 딱 하루를 고종과 함께 머물렀다. 그러자 "임금이 묵은 곳에 신하가 살 수 없다"며 김흥근은 별장을 임금에게 바쳤고, 고종은 다시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내림으로써 별장의 주인은 완전히 바뀌고 이름 또한 석파정으로 개명되었다. 현재 개인 소유로 일반인 출입이 금지되었고 공사 중인 석파문화원 가림막 때문에 접근조차 할 수 없다.
환기미술관, 부암동 예술의 진원지
적잖은 예술가들이 부암동에 둥지를 틀고 있는데 부암동에 예술의 숨결을 불어넣은 것은 바로 환기미술관의 영향이 크다. 환기미술관은 수화 김환기 선생을 기념해 설립된 미술관으로 김환기 선생은 한국 추상미술의 제1세대로서 한국적 서정주의를 바탕으로 세계에 그 이름을 알린 바 있다. 미술관은 1992년 세워졌으며 김환기 선생의 작품을 비롯해 다양한 기획전시, 행사, 교육프로그램 등이 운영 중에 있다.
세검정 쪽에 있던 높이 2m의 부침바위(付岩)에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 부암동이 정겨운 정취를 간직하고 있는 이유는 청와대와 가까운 탓이다. 군사보호구역,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돼 있어 신축 건물이 흔치 않으며 높은 건물도 거의 없다. 인왕산과 북한산 자락에 있어 녹지가 많으며, 무계정사, 대원군별장 등 7개의 문화재가 보전돼 있기도 하다. 최근엔 북악산과 연계한 산책 코스 덕분에 걷기 좋은 명소로 각광받고 있으며, 소규모 카페와 레스토랑, 갤러리들이 곳곳에 들어서서 한적한 나들이를 원하는 이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다.
1 카페·맛집 입문
2 파스타 기행
3 북악산 산행
4 역사유적 탐방
5 드라마 촬영지 탐방
세검정 삼거리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세검정이, 서쪽에는 홍지문과 탕춘대성이 있다. 세검정은 인조반정 때 이귀, 김류 등 쿠데타 주역들이 모여 광해군의 폐위를 논하고 결의를 다지는 의미로 정자 아래 흐르는 물에 칼을 씻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탕춘대성은 북한산성을 보완하기 위해 축조한 성이고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이다.
부암동(付岩洞)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동이다. 부암동은 행정동과 법정동의 이름이 같으며, 행정동으로써는 부암동과 신영동, 홍지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으로는 신영동과 홍지동에 접해있으며, 동쪽으로는 삼청동. 남쪽은 청운동과 옥인동, 그리고 서쪽으로는 홍제동과 접하고 있다. 2001년 현재 면적은 2.27㎢, 인구 1만 3300명이다.(신영동 및 홍지동 포함) 부암동이 정겨운 정취를 간직하고 있는 이유는 청와대와 가까운 탓이다. 군사보호구역,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돼 있어 신축 건물이 흔치 않으며 높은 건물도 거의 없다. 인왕산과 북한산 자락에 있어 녹지가 많으며, 무계정사, 대원군별장 등 7개의 문화재가 보전돼 있기도 하다. 최근엔 북악산과 연계한 산책 코스 덕분에 걷기 좋은 명소로 각광받고 있으며, 소규모 카페와 레스토랑, 갤러리들이 곳곳에 들어서서 한적한 나들이를 원하는 이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다.
도심 속 청정자연을 향유하다, 백사실길
백사실길을 마음먹고 걷자면 일단은 발이 편한 신발에 등산복을 입고 가는 게 적당하니 카페 투어나 갤러리 투어 등은 나중으로 미루는 것이 좋다. 오르막도 있고 짧지 않은 백사실길은 다른 일을 마치고 덤으로 가기에는 만만치 않은 산행 코스이기 때문이다.
백사실길의 유래인 백사실은 ‘오성과 한음’으로 잘 알려진 백사 이항복의 별장이 있던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지금은 백사실길 중간에 정자터와 연못터만 남아있다.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으로 이름난 산모퉁이 카페를 지나 북악산길을 따라가다 보면 백사실길의 초입이 나온다.
백사실길의 입구에서 도보 여행객들을 반기는 것은 ‘도롱뇽 서식 보호’ 안내판. 도롱뇽은 1급수 지표종으로 백사실길 내 백사실 계곡의 맑음을 그대로 보여 준다. 서울에서 몇 안 남은 청정지역이기 때문에 서울시에서는 특별 조례를 만들어 도롱뇽 등 백사실 계곡의 야생 동·식물의 포획 및 채취를 금지할 정도이다. 백사실길을 따라 가면 백석동천이라고 쓰여 있는 암석, 이항복의 별장터를 만날 수 있다.
서울 시내에서 도보여행이라는 것은 무엇을 담아가거나 느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잠시 도심을 떠나 여유를 갖고, 자연과 벗 삼는 게 그 목적일 게다. 그런 점에서 백사실길 여행은 그 자체가 매력적이다.
과거 이 지역에는 높이 약 2m의 바위가 있었는데, 이 바위에는 자신의 나이만큼 돌을 문지르면 손을 떼는 순간 바위에 돌이 붙고, 아들을 얻는다는 전설이 있었다. '부암동'이라는 지명은 이 바위가 '부침바위'(付岩)라고 불렸던 데에서 유래했다.
문화재로는 조선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세운 정자인 무계정사(武溪精舍. 서울시유형문화재 22호)와, 흥선대원군(興宣大阮君)이 집권한 뒤 별장으로 사용한 석파정(石坡亭. 서울시유형문화재 26호)이 있다.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북서울, 북악산
여유를 갖고 천천히 자연을 만끽할 준비가 돼 있다면 가볼 만한 곳이다. 차로 5~10분 정도 걸리는 거리니 걸어서는 1시간은 소요될 것이다. 창의문에서 시작해 정릉의 아리랑고개까지 이어지는 북악스카이웨이 한중간에 북악산 팔각정이 있다. 스카이웨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차로 부암동 여행을 떠났다면 북악산 자락 굽이굽이를 시원한 바람과 함께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다.
반면 부암동 여행은 차로 이동하기 쉽지 않으니 여유있게 걸어가는 것도 추천한다. 도로 옆으로 목재 데크가 설치돼 있어 안전하게 산보를 할 수 있고 중간중간에 쉼터도 조성돼 있다. 팔각정에 오르면 병풍 같은 북한산 아래 서울의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서울에 살면서 빌딩 속에 묻혀 조각하늘을 품고 살았지만 이곳에 오르면 오랜만에 탁트인 시야에 하늘까지도 눈앞에 와 있다. 팔각정에는 테이크 아웃 커피숍, 편의점,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도 있다.
서울 성곽
부암동을 가로지르는 서울 성곽은 부암동 어디서든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서울 성곽은 오랜 시간이 지난데다가 일제 강점기 때 일부 훼손돼 개축된 모습이 보이기도 하지만, 마치 북한산을 매끄럽게 타고 오른 한 마리의 구렁이처럼 이채롭기도 하다. 단순하게 보면 그저 역사 유물 중 하나로 보이겠지만, 여기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보면 더욱 흥미롭다.
원래 서울 성곽은 1394년 조선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고 한양 방위를 위해 쌓은 성이다. 20만명을 동원할 정도로 큰 공사였는데 북악산의 능선을 따라 지어졌다. 당시 태조가 왕권 강화와 체제 정비를 하기 위해서 가장 고민했던 것이 바로 국방이었다. 그래서 성을 쌓으려고 계획했지만 어디에 어떻게 지어야 할지 몰라 큰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어느 날 한양에 큰 눈이 내렸고 그 눈들은 북악산, 인왕산, 남산에 쌓여 마치 하나의 띠 모양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태조는 이에 그 띠를 따라 성을 지었고 이 성곽이 지금의 서울 성곽이 됐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돼 서울이라는 지명의 유래도 전해진다. 눈의 울타리라는 뜻으로 ‘설(雪)울타리’라고 불렸다가 시간이 지나고 지나 서울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창의문은 도심에서 부암동으로 진입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자하문 터널이 개통되기 전에는 부암동으로 넘어오려면 반드시 창의문 언덕을 지났어야 했다. 창의문은 예로부터 북문 혹은 자하문이라고 불렸는데 4대문 안 4소문 중 하나다. 1396년 태조 5년에 축조됐는데, 창의문을 지나 당시 경기도 양주 등 북쪽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해진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인조를 비롯한 의병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을 성공시켰다는 역사도 품고 있다. 교통의 요지라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으니 이 문이 품은 우리네 옛날이야기가 한둘이랴.
창의문 남쪽으로는 창의문 쉼터가 조성돼 있다. 아직은 꽃샘추위로 다소 바람이 차갑지만 꽃피는 봄이 오면 오르막을 오르던 중에 잠시 쉬며 여유를 만끽할 수 있다. 북악스카이웨이 시작점에서도 창의문의 북측면을 볼 수 있다. 보너스로 시작점 북쪽으로 올려다보면 부암동을 한눈에 조망할 수도 있다.
자하문길이 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도로의 북쪽은 세검정길과 이어지고, 남쪽은 자하문터널을 통해 추자로로 이어진다. 자하문터널 위쪽으로 이어지는 창의문길을 이용하면 흔히 '북악스카이웨이'라 불리는 북악산길로 진입할 수 있으며, 또한 경복고등학교 및 청와대 방면으로 갈 수 있다. 자하문길 및 창의문길을 경유하는 버스들을 이용해 서울 각지로 이동할 수 있다. 다만, 부암동을 포함한 인근 지역으로 철도교통은 들어오지 않으며, 주민들이 지하철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버스를 이용해 경복궁역으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중교통으로 접근할 경우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2번출구로 나와 1020번 또는 0212번 버스를 이용해 부암동 주민센터에서 하차하면 된다.
탕춘대성의 관문, 홍지동
탕춘대성(蕩春臺城)의 관문인 홍지문(弘智門)에서 비롯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제정된 동명에 의하면 상평방(常平坊 :城外) 경리청계(經理廳契) 안에 홍지문내동(弘智門內洞), 삼지동(三芝洞), 남문동(南門洞)으로 되었다. 일제하 1914년 4월 1일 경성부 축소계획에 따라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에 편입되었을 때 삼지동, 남문동을 병합시켜 홍지리라 하였고 1936년 4월 1일 경성부 확장실시에 따라 경성부관할로 편입될 때 홍지정(弘智町)으로 되었다가 1946년 10월 1일 일제식동명의 일소에 따라 홍지동으로 되었다.
홍지동은 동명이 유래된 홍지문을 중심으로 마을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왔는데 홍지문 안쪽과 가까운 곳에 형성된 마을을 홍지문내동 혹은 줄여서 내동, 안골이라 하였는데 홍지문 90 ~ 97번지와 103 ~ 104번지 일대가 해당된다. 삼지동(三芝洞)을 혹은 삼지동(三池洞)이라고도 하는데 홍지문 서북쪽으로 67 ~ 70, 76 ~ 80번지 일대로서 비교적 높은 지대인데 소림사(小林寺)라는 절이 있고 절 앞에는 연못이 세개가 있었으므로 삼지동 이라고 불렀다. 연못가에 돌거북이 있었는데 경복궁 중건시 캐내에 석재로 사용했다고 한다.
탕춘대성은 전체 길이 약 4km로 북한산 비봉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천(沙川)의 홍지문에 이르는데 성문(城門)은 홍지문 하나 뿐이나 동북쪽으로 사천을 가로질러 오간수문(五間水門)이 있었으므로 탕춘대성 전체로 볼 때에 남쪽문에 해당되는 홍지문을 남문이라 불렀고 부근의 홍지동 36번지 일대를 남문동이라 하였다.
현재의 홍지동은 북으로 구지동, 동으로는 신영동, 남으로는 부암동과 접하고 있으며 서쪽으로 서대문구 홍제동이 있다. 홍지동 7번지에는 상명여자대학교와 부속초·중·고등학교가 여성교육 전담교육기관으로 서울의 서북부 가장 끝에 위치하고 있다.
대원군 별장(석파정 사랑)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3호
홍지문 및 탕춘대성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3호
이광수 산장 터 등록문화재 87호
손재형 집
왜관(倭館)터
염소초(焰哨초)
소림사(少林寺)
조선 영조 26년(1750)에 5군영(軍營)의 하나인 총융청(摠戎廳)을 신영동 219 - 4번지로 이전하였으므로 동명이 유래되었다. 고종 4년에 편찬된 『육전조례(六典條例)』에서 상평방에 처음 나타나고 갑오개혁 때 상평방내 경리청계에 속한 동명에서 신영동이 기록되어 있다. "상평방 경리청계 : 무계동, 부암동, 백석동, 홍지문내동, 삼지동, 구기동, 응암동, 왕정평, 신영동, 남문동"라고 적혀있다.
신영동의 명칭이 붙여진 유래를 『궁궐지(宮闕志)』와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 찾아보면 조선시대 5군영 중의 하나인 총융청으로 영조 때 북한산성 수비를 담당시키고 그 청사를 창의문 밖으로 이전시켰다고 하였다. 따라서 총융청이 새로 영조되었다 해서 신영동이라고 호칭된 것이다. 원래 총융청은 인조2년(1624)에 사직동 북쪽에 설치되었으나, 헌종 10년에 삼청동으로 청사를 이전시켰다가 영조 때에 신영동으로 다시 이전한 것이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총융청은 북부 진장방(鎭長坊)에 있었는데 영조 때 창의문 밖 연융대(鍊戎臺)에 이전해서 새로 설치했다. 신영의 영사(營舍)는 300년간이나 된다. 인조 때 창설되어 수원, 광주, 양주, 장단, 남양 등의 진 및 5영의 군무를 절제하게 하였고 영조 23년에 경리청을 폐지하고 총융청에 소속시켰다. 정조 때 수원에 영을 설치한 뒤에 수원진에서 군무를 절제하였다 폐지하고 헌종12년(1846)에 총위영(總衛營)이라고 개칭하였다가 3년후인 철종 원년에 다시 본명으로 고쳤으나 고종21년(1884)에 폐지되었다.
또한 탕춘대가 있던 부근의 시냇물이 감돌아가는 신영동 137, 139, 141 ~144번지 일대에는 승목소라는 부락이 있었고, 장의사(藏義寺)계곡은 봄철의 꽃, 여름의 과일, 가을철의 단풍이 어우러진 이곳은 세검정 일대의 수석과 함께 경관을 이루었으므로 시인(詩人), 묵객(墨客)들이 줄지어 찾았던 곳이고 1970년 초까지 각급 학교의 소풍장소로서도 각광을 받았던 곳이다. 문화재로는 연산군 시절 세워진 정자인 세검정(서울시기념물 4호)과 신라시대의 유물인 장의사지 당간지주(보물 235호) 등이 있다.
현재의 신영동은 북쪽으로 구기동, 동쪽으로 평창동, 서쪽으로는 홍지동과 남쪽으로 부암동이 둘러싸고 있으며, 서북부지역 주요간선도로인 진흥로(眞興路)와 세검정길이 신영동의 심장부를 뚫고 지난다.
장의사시당간지주 보물 제235호
세검정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4호
조지서 터 (세검정초등학교북쪽대로변)
총융청 터
장의사지
석부루 터
부군당
연융대바위
차일암
형제바위
조세고개
탕춘대고개
세검정(洗劍亭)쪽 길가에 높이 2m의 부침바위(付岩)가 있었기 때문에 동명이 유래되었다. 부암동은 무계동(武溪洞), 백석동(白石洞), 부암동(付岩洞), 삼계동(三溪洞) 등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북한산과 인왕산 자락에 위치하므로 바위, 계곡 등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무계동은 자하문 밖 서쪽 골짜기에 있었던 마을로 수석(水石)이 맑고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다. 중국의 무릉도원(武陵桃源)에 있는 계곡처럼 생겼다 해서 무계동이 되었는데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쓴 「武溪洞」의 각자(刻字)가 남아 있다. 안평대군이 이곳에서 산정(山亭)을 세워 무계정사(武溪精舍)라 이름을 붙이고, 글을 읊고 활을 쏘는 등 심신을 단련하였다. 무계정사를 짓기 전에는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집터였다. 무계정사는 안평대군의 호를 따서 비해당(匪懈堂)이라고도 불렀는데 여름철에는 특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경치를 즐겼고 기린교(麒麟橋)라는 다리도 있었다.
백석동은 부암동 115 및 115 - 1번지에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기 때문에 붙여졌으며 백석실(白石室)이라고도 하는데 흰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었다. 부암동은 부암동 134번지에 있었던 부침바위에서 유래된 동이며, 삼계동은 무계동 아래 부암동 318번지 일대를 말하며, 석파정(石坡亭)의 암벽에 「三溪洞」이라는 3글자가 새겨져 있다. 삼계동에는 조선말 이문대신(里門大臣)으로 알려진 김홍근(金興根)의 별장인 삼계동정자가 있었는데 후에 흥선대원군이 석파정(石坡亭)으로 고쳐 불렀으며 그 후 세습되어 이희, 이준, 이우의 별장으로 사용되다 6.25동란 후 천주교 주관의 콜롬비아 고아원에서 사용했었으나 지금은 개인 소유이다.
부암동은 1975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7816호 구관할구역이 변경됨에 따라 서대문구 부암동에서 종로구 부암동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부암동은 행정동과 법정동이 일치하여 1970년 5월 18일 부암동사무소가 설치되어 부암동, 홍지동, 신영동을 관할하고 있다.
현재의 부암동은 북쪽으로 평창동, 신영동과 서쪽으로는 홍지동, 서대문구 홍제동, 동쪽으로 성북구 성북동, 삼청동, 남쪽으로 삼청동, 옥인동이 둘러싸여 있다. 또한 효자동에서 세검정 삼거리까지의 가로는 자하문(紫霞門)길인데 1986년 8월 20일 준공 개통된 청운터널로 인하여 당초 궁정동 철궁에서 세검정 삼거리까지의 자하문길을 가운데 터널 북쪽 진입로에서 궁정동까지는 창의문(彰義門)길로 하고, 새로 개통된 이 길을 자하문길로 하였다.
무계정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2호
석파정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호
부암동 윤응렬 가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2호
동제당
능금나무터
조석고개
현진건 집터
부침바위
달바위
지병바위
차일바위
백석동천 명승 제36호
메주가마골
도덕굴
몇 년 사이에 서울에서 가장 뜬 동네는 단연 부암동이다. 마을이 가진 빈티지풍의 오롯한 풍광은 알음알음 입소문을 타고 젊은층을 사로잡았다. 달리 말해 유년의 추억이 서린 마을이고 시간이 살짝 빗겨지나간 마을이다. 어지간해서는 2층을 넘지 않는 집들과 굽이치듯 넘나드는 골목과 그 모든 것을 끌어안듯 사방을 두른 북악산과 인왕산, 삼각산의 풍광은 가히 축복에 가깝다. 재미난 건 그 같은 풍경을 만든 것이 그린벨트라는 사실이다.
부암동은 그린벨트 지역으로 군사 보호 구역으로 묶여 있었다. 부동산 투자 가치로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그러다 보니 단순히 집을 갖고 싶은 사람이 아닌 살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들여 사람 사는 마을로 자리 잡았다. 그 한적한 풍경을 찾아 미술관이 들어섰고, 크고 작은 카페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던 환기미술관에 이어 근래에는 '호기심에 대한 책임감 갤러리' 같은 여러 갤러리들이 생겼다. 이미 오래전부터 클럽 에스프레소가 있었으며, 근래에는 드라마<커피 프린스 1호점>의 바람을 타고 산모퉁이 카페가 들어섰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카페들이 젊은이들을 불러세운다. 예스런 풍경과 새로운 풍경이 조화를 이뤄가는 명품 빈티지 마을, 부암동의 변신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1. 환기미술관
한국 추상 미술의 선구자 고 수화(樹話) 김환기 화백의 예술을 보존, 연구, 전시하는 미술관
2. 호기심에 대한 책임감 갤러리
부암동 초입의 삼거리에 자리한 갤러리다. 바깥으로 커다란 통유리 하나가 있고 그 너머 9.9제곱미터 남짓한 공간에 작품 서너 점이 고작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무인 갤러리다. 대성이용원 옆의 카페에서 관리 아닌 관리를 한다. 갤러리 이름도 재미나다. 호기심에 대한 책임감이다. 젊고 창의적인 작가들의 전시가 많은 편이다. 부암동에 새로운 관심을 끌어낸 첫 발단(!)으로 호기심에 대한 책임감 갤러리를 꼽는 경우가 많다.
3.카페 산모퉁이
백사실계곡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다. 북악산 자락 바로 아래다. 드라마 <커피 프린스 1호점>에서 최한성(이선균 분)의 집으로 나온 장소다. 원래는 목인박물관 관장의 개인 주택이었으나 드라마 방영 후에는 카페로 개방하고 있다. 드라마 촬영지라는 말을 듣고 찾은 사람들도, 드라마의 흔적보다는 카페가 갖는 풍광에 마음을 빼앗긴다. 북악산과 서울 성곽을 아우르는 전망은, 서울에 있는 카페 가운데 손가락에 꼽힐 정도다.(홈페이지 www.sanmotoonge.co.kr, 02-391-4737)
4.백사실계곡
아는 사람만 안다는 서울의 청정 계곡이다. 도롱뇽이 산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백사(白沙) 이항복의 별장 터가 있어 붙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깊은 숲을 따라 이어지는 오솔길과 걸음을 막아서는 크고 작은 계곡의 정취는 이곳이 과연 서울인가를 의심하게 한다. 버들치, 도롱뇽 등의 서식지인 만큼 계곡에 발을 담그지는 말고 그저 풍광만 탐할 것을 권한다. 카페 산모퉁이와 군부대를 지나면 계곡 입구가 나온다.
5.북악산
경복궁과 청와대를 품고 있는 한양의 주산(主山)으로, 서울 성곽이 산을 둘러싸고 호위한다.
세검정로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동 48번지(홍은사거리)에서 세검삼거리를 거쳐 종로구 평창동 산6-2번지(북악터널)에 이르는 폭 25m, 길이 5,200m에 이르는 4차선 도로이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폐위가 논하여 질 때, 이곳 계곡에서 칼을 씼었다는 정자가 바로 세검정이다. 세검정길은 이러한 정자로 붙여진 이름으로 1972년 11월 26일 서울특별시 공고 제268호에 의해 한양천도 578주년 기념일을 맞아 59개 가로명을 제정할 때 세검로(洗劍路)의 일부였다.
1981년 10월 22일 세검로는 홍제동 294-2번지 홍은육교에서 성북구 정릉동 16번지 길음교에 이르는 폭 20~30m, 길이 8,750m의 대로3류 58호로 정해졌다. 이후 1984년 11월 7일 서울특별시 공고 제673호에 의해 지역성을 감안하여 북악터널을 기준으로 세검정길과 정릉길로 세분되기 이전의 세검로는 홍제동 294-2번지 홍은초등학교에서 북악터널을 지나 길음교에 이르는 폭 25~30m, 길이 8,750m 구간이었다.
세검정길과 정릉길로 구분되면서 북악터널에서 홍제동을 거쳐 홍은동사거리에 이르는 4,900m 구간은 세검정길로 처음 이름 붙여졌으며, 북악터널에서 월암교에 이르는 4,350m 구간은 정릉길로 이름 붙여졌다. 그 후 세검정길은 5,200m로 연장되었다. 이 길은 서울 서북지역에서 도심을 경유하지 않고 동북지역으로 갈 수 있는 지름길 구실을 한다. 2010년 4월 22일에 도로명 주소 사업으로 인해 세검정로로 이름이 바뀌었다.
상명대학교(祥明大學校, Sangmyung University)
서울특별시와 충청남도 천안시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사립 종합대학교이다. 1937년 상명여자고등기예학원 설립을 시작으로 1965년 상명여자사범대학이 개교하였으며 1985년 천안캠퍼스를 개설하였다. 1987년에는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였다. 그리고 1996년에 남녀 공학으로 전환하여 상명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서울캠퍼스에는 인문사회과학대학·사범대학·경영대학·자연과학대학·소프트웨어대학·예체능대학·음악대학 7개의 단과대학이 있으며, 천안캠퍼스에는 디자인대학·예술대학·어문대학·산업대학·공과대학 5개의 단과대학이 있다. 대학원은 대학원·교육대학원·예술디자인대학원·복지상담대학원·경영대학원이 있다. 서울캠퍼스는 IT중심캠퍼스로, 천안캠퍼스는 IT에 기반한 디자인·예술 중심캠퍼스로 발전해 나갈 계획이다. 약칭으로 Sangmyung University의 이니셜인 SMU를 사용한다.
이광수 별장 터
http://www.dspress.org/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3478
이 춘원 이광수가 1934년부터 1939년까지 별장을 지어 머물렀던 곳이라고 한다. 당시 조선일보 부사장이었던 이광수는 세검정 일대의 풍경이 좋은 이곳에 한옥 별장을 지었다. 당시의 집은 남아 있지 않으며, 지금 남아 있는 한옥은 1970년경 새로 지은 집이라고 한다. 이광수는 이곳에 머물면서 여러 작품들을 발표하는 한편, 불교에 심취하였다고 하는데, 1937년 독립운동 단체 수양동우회와 관련되어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뒤 이곳에서 휴양하기도 하였단다. 당시 조선일보 부사장이었던 이광수는 세검정 일대의 풍경이 좋은 이곳에 한옥 별장을 지었다. 원래의 가옥은 ㄷ자 형태의 개량한옥으로 당시 유명했던 건축업자 정세권이 지었다고 한다. 위 그의 일대기를 보면, 그의 일생에 변곡점을 겪는 시기와 일치한다. 한국 근대문학사의 선구적인 작가로서 평가받고 있는 이광수 선생이 살던 별장의 터이다. 현재의 건물은 당시 실제 거주 가옥이 아니고 신축된 건물이며, 당시 향나무, 우물은 존재하고 있다.
원래의 가옥은 ㄷ자 형태의 개량 한옥이었다. 당시의 집은 남아 있지않고 우물과 향나무 그리고 감나무만 남아 대 문호 춘원의 삶의 흔적을 추측하게 할뿐이다. 지금의 한옥은 1970년대 새로 지은 것이다. 홍지동 상명대학교 초입 왼쪽 좁은 골목으로 올라가면 찾을수 있다
이광수(李光洙, 일본식 이름: 香山光郞 가야마 미쓰로,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 1950년 10월 25일)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소설가이자 작가, 시인, 문학평론가, 페미니즘 운동가, 언론인이었으며, 사상가, 기자, 번역가, 자유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에 참여, 신한청년당,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와 독립신문 등을 맡기도 했었다. 유교적 봉건 도덕, 윤리관을 비판하였고, 여성 해방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언론 활동으로는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또한 번역가로도 활동하여 영미권의 작품을 한글로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이후 일본 유학 중에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하였고,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망명, 1919년 도쿄(東京)의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독립신문을 발행했다. 1921년 귀국 후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의 언론에 칼럼과 장·단편 소설, 시 등을 발표하였다.
안창호, 윤치호, 김성수 등의 감화를 받아 민족 개조론과 실력 양성론을 제창하였으며, 1922년 흥사단의 전위조직인 수양동맹회를 조직하고, 안창호를 도와 흥사단 국내 조직과 수양동우회에 적극 참여하였다. 수양동우회 사건을 계기로 변절한 이후에는 대표적인 친일파로 규탄받았다. 일제 강점기 후반에는 민족성, 인간성의 개조를 주장하였고 한때 나치즘 등에도 공감하기도 했다. 그는 안창호, 윤치호의 사상적 계승자이기도 했다.
1939년 12월 이후에는 자발적으로 창씨개명에 동참할 것을 권고하여 지탄을 받기도 했다. 해방 이후 백범일지의 교정, 윤문과 안창호의 일대기 집필을 주관하였다. 1949년 반민특위에 기소되었으나 석방되었고, 1950년 6월 한국 전쟁때 서울에 있다가 북한 인민군에게 납북되었다. 순한글체 소설을 쓰는 등 소설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였다. 소설가로는 구한 말과 일제 강점기 시대 동안 '만인의 연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청소년 남녀의 우상이었고, 최남선,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다. 자는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고주(孤舟)·외배·올보리·장백산인(長白山人)이며, 필명으로 춘원생, 경서학인(京西學人), 노아자닷뫼당백, Y생, 장백, 장백산인 등을 썼다. 본관은 전주이다.
http://www.visitseoul.net/kr/article/article.do?_method=view&m=0004003002002&p=03&art_id=772&lang=kr
홍지문 및 탕춘대성(弘智門 및 蕩春臺城)은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33호로 지정되어 있는 문화재이다.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으로 조선 숙종 41년(1715)에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을 보완하기 위해 세웠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21년 홍수로 오간대 수문과 같이 허물어진 것을 1977년에 복원한 것이다. 한북문이라고도 부른다. 탕춘대성은 숙종 44년(1718)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성한 것으로, 명칭은 세검정 부근에 있던 탕춘대(蕩春臺)에서 따왔다고 한다.
홍지문과 탕춘대성은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하여 쌓은 것이다. 홍지문은 한성(漢城)의 북쪽에 있는 문이므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하였으나, 숙종이 친필로 '弘智門'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여 달면서부터 이것이 공식적인 명칭이 되었다.
홍지문은 숙종 41년(1715)에 건축되어 1921년까지 탕춘대성문으로 그 역할을 다하였으나 1921년 홍수로 붕괴되어 50여년간 방치되어 왔다. 이에 서울특별시에서 1977년 탕춘대성과 함께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하였다.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다. 화강암으로 중앙부에 월단(月團, 아치)이 꾸며지고, 그 위에 단층 문루가 세워져 있다. 석축 윗 부분 둘레는 여장(女牆)이 있고, 문루는 평면이 40㎡로 우진각 지붕이다. 홍지문 북쪽으로 홍제천(모래내, 사천)을 가로질러 홍지문과 같이 설치하였던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도 1921년에 홍수로 유실되었으나 1977년 홍지문 복원 때 길이 26. 72m, 폭 6.8m, 높이 5.23m, 수구 폭 3.76m, 수구 높이 2.78m의 5간의 홍예교(虹霓橋)로 복원하였다.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사천을 지나 북한산 서남쪽의 비봉 아래까지 연결하여 축성한 산성이다. 이 산성의 명칭을 탕춘대성이라고 한 것은 현재 세검정이 있는 동쪽 약 100여m 되는 산봉우리에 탕춘대(蕩春臺)가 있었던 것에서 연유한 것이며, 한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성(西城)이라고 하였다. 왜란과 호란 속에서 서울이 함락되며 갖은 고초를 겪은 조선왕조는 전쟁이 끝난 후 국방은 물론 유사시에는 수도를 방위하기 위한 온갖 노력을 경주하였다. 효종(1649∼1659 재위), 현종(1659∼1674 재위)을 거쳐 숙종 때에 이르러서는 수도방위에 더욱 치중하였다. 숙종은 재위 30년(1704) 3월부터 도성 수축공사를 시작하였고 이 공사는 6년 후인 숙종 36년(1710)까지 계속되었다.
도성 수축공사를 끝낸 숙종은 왕 37년(1711)에는 북한산성을 축성하였고 다시 탕춘대성을 축조하게 되었다. 이 탕춘대성을 축조하자는 논의는 이미 숙종 28년(1702)에 신완(申琬)이 제의하였다. 그 후 탕춘대성은 숙종 44년(1718) 윤8월 26일부터 축성하기 시작하여 10월 6일까지 40일간 성 전체의 약 반을 축성하고 일단 중지하였다가 다음해 2월부터 다시 축성하여 약 40일 후에 완성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탕춘대성 전체의 길이는 약 4km였음도 알 수 있다. 성내에 연무장(鍊武場)으로 탕춘대 터(오늘날 세검정초등학교)에 연융대(鍊戎臺)를 설치하는 한편, 비상시를 대비하여 선혜청(宣惠廳) 창고와 군량창고인 상·하 평창(平倉)을 설치하였다. 그 후 탕춘대성의 축성과 함께 그 성안을 총융청(摠戎廳) 기지로 삼고, 군영도 배치하였다.
탕춘대성은 축성을 담당했던 관아나 또는 축성역, 축성 방법, 축성 경비 등에 관해서는 일체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다른 성의 축조와 마찬가지로 군문(軍門)에서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존하는 탕춘대성은 도성이나 북한산성과 같이 주 성벽과 여장(女墻)을 쌓았으며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성구(城口)를 뚫어 놓았다.
탕춘대성의 출입문
숭례문이나 흥인지문처럼 도성의 중심에 있는 성문과 달리 홍지문은 서울의 북쪽, 지금의 상명대학교 부근에 자리해 있다. 조선 숙종 41년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해 설립한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이다. 지문은 한성의 북쪽에 있는 문이란 뜻으로 한북문이라고도 한다. 숙종이 친필로 홍지문이라는 편액을 써 문루에 달면서 공식 명칭이 되었다. 1921년 홍수로 인해 붕괴되었던 홍지문을 1977년 도성복원위원회에 의해 복원되었다. 이때 홍지문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로 새겨졌다. 홍지문은 홍예(무지개) 형태의 육축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 각지붕을 한 단층 문루가 있다. 문루의 좌우에는 옆문을 만들고 전돌로 담장을 둘렀다. 또한 문의 앞뒤에도 홍예 모양의 쇠붙이 장식을 씌운 문을 마련했으며 안쪽으로 성에 오를 수 있는 계단을 두었다.
수도 방위를 위해 설립한 도성
홍지문과 연결된 나지막한 성곽을 시작으로 탕춘대성이 시작된다. 세월은 흘렀지만 산으로 오르는 도성의 모습은 흘러간 시간의 무게를 아스라이 간직하고 있다.탕춘대성은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성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수도 방위를 위해 건립했다. 인왕산 정상의 서울 성곽에서 홍지문을 거쳐 북한산 비봉 아래 수리봉까지 4km에 걸쳐 이어져 있다. 이 산성의 명칭은 세검정 부근에 있던 연산군의 놀이터였던 탕춘대에서 따왔다고 전해진다.
탕춘대성은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을 경계로 두 지형으로 나뉜다. 홍제천을 중심으로 남서쪽은 인왕산의 서울 성곽에서 북쪽으로 갈라져 나온 산줄기를 따라 축조되었다. 북동쪽은 북한산 국립공원 탕춘대 능선을 따라 비봉을 향해 뻗어 있다. 능선길은 경사가 완만하고 쉽게 오를 수 있는 오솔길로 가벼운 산책 겸 등산을 즐길 수 있다. 더불어 역사 탐방 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세검정 상명대학교와 구기터널, 홍은동에서 시작하는 것이 성곽에 접근하기 수월하다. 산성의 명칭은 세검정 부근에 있던 연산군의 놀이터 탕춘대에서 따왔다고 전한다.
1715년 서울의 도성과 북한산성의 방어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세워졌다. 한성의 북쪽에 있는 문이란 뜻으로 한북문이라고도 한다. 1999년 성문의 단청과 문비, 문루 좌우 협문을 보수하고 숙종이 친필로 홍지문이라는 편액을 써 문루에 달면서 공식명칭이 되었다. 홍예 형태의 육축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을 한 단층 문루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양옆에 있으며, 홍지문과 홍예교 그리고 먼발치의 상명대학교가 보인다. 탕춘대성의 일부를 이루는 홍예교는 원래 오간대수문로 불렸다. 서울 성곽은 인왕산 정상에서 홍지문을 거쳐 북한산 수리봉까지 4km에 걸쳐 이어진다.
홍지문은 조선 숙종 41년(1715)에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의 방어시설을 보완하기 위하여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 및 서성(西城)과 함께 건립한 문루로서 일명 한북문(漢北門) 이라고도 한다. 문안의 신영동, 구기동 일대는 삼국시대 이후 국방의 요새지로 중시되어 왔으며 선혜청 창고, 상.하 평창, 군량미 창고 등이 있었다. 1921년 7월에 문루가 붕괴되고 같은 해 8월에 오간대수문이 홍수로 허물어져 흔적만 남아있던 것을 서성과 함께 1977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탕춘대성(蕩春臺城)
인왕산의 정상 밑에서부터 홍제천을 건너 구기동의 북한산 비봉 밑으로 이어지는 탕춘대성은 조선 태조 5년(1396)에 축성된 서울성곽을 보완하기 위해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 이후 수도 방위를 위하여 1719년에 완성한 성곽으로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해 쌓은 것이다.1715년(숙종 41)에 서울의 도성과 북한산성의 방어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홍지문(弘智門), 오간수문(五間水門),탕춘대성(蕩春臺城)을 건립하였다.
홍지문은 서울의 북서쪽 방어를 위한 탕춘대성의 출입문으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하며 홍지문에 연결된 탕춘대성은 서쪽에 있어서 서성(西城)이라고도한다. 원래 탕춘대성이 있는 세검정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한산주(漢山州)로서 군사상 중요한지역이었다. 탕춘대성은 인왕산 정상의 서울 성곽에서부터 홍지문을 거쳐 수리봉까지 이어진 4km 정도이다. 현재는 주택의 난립으로 인하여 무심코 지나칠 수 밖에 없는 외진곳에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중요한 의미의 성곽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석파정(石坡亭)은 조선시대에 세워진 정자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제국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별장으로 사용하였다. 이 정자의 이름의 유래는 정자 앞의 산이 모두 바위여서 흥선대원군이 석파(石坡)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1974년 1월 15일에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 되었다.
조선 후기 별장 건물로, 고종 (재위 1863~1907)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사용하였다. 원래 이름은 삼계동 정자로 조선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홍근이 지었는데,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자신의 별장으로 이용하였다. 한국전쟁 후에는 고아원, 병원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현재는 개인이 소유하고 있다. 정자 앞 뒷 산이 모두 바위여서 ‘석파(石坡)’란 이름이 붙여졌으며, 뜰 안의 소나무와 바위산, 시냇물이 어우러진 주위 풍경이 뛰어나다.
“삼계동 정자가 석파정이 되기까지”
원래 석파정은 삼계동이란 이름으로 김홍근의 별장이였다. 그러나 대원군은 늘 이 별장을 가지고 싶어했고, 자신에게 팔기를 권유했으나 김홍근은 거절하였다. 그러자 대원군은 아들인 고종을 데리고 방문해 하룻밤을 묵었다. 당시 임금이 하루라도 묵은 곳은 일반 백성이 소유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김홍근은 대원군에게 별장을 내어주었고, 대원군은 석파정이란 이름으로 바꾸고 자주 애용하였다고 한다.
조선 고종(재위 1863∼1907)의 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원래는 김흥근의 소유였던 것을 고종 즉위 후 대원군이 사용하였다. 한국전쟁 후 고아원·병원 등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개인소유 건물이다. 정자의 앞산이 모두 바위라 대원군이 ‘석파정(石坡亭)’이라 이름지었으며 삼계동 정자라 하기도 한다. 커다란 바위와 바위산에서 흐르는 시냇물, 뜰에 서 있는 소나무를 배경으로 한 석파정은 매우 아름답다.
대원군별장은 말 그대로 조선시대의 인물 흥선대원군이 거주하던 곳이다. 원래 창의문 밖 종로구 부암동 산 16-1번지에 있었던 건물이었으나 1958년에 서예가 소전(素筌) 손재형이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125로 옮겼다. 2009년 3월 현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어 있다.
흥선대원군의 별장 석파정의 부속 사랑채를 옮겨 꾸민 한정식 집. 수라상에 올리던 궁중음식이 고풍스러운 그릇에 담겨 나온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년 음력 11월 16일 ~ 1898년 음력 2월 2일)
조선 말기의 왕족이자 정치가, 화가이며 대한제국의 황족, 추존왕이다. 이름은 이하응(李昰應)이다. 부인은 여흥부대부인 민씨이다. 남연군(원래는 인평대군의 6대손이나 후에 양자 입적)과 군부인 민씨의 넷째 아들이며, 고종 황제(高宗皇帝)의 친아버지이다. 1863년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었으며, 안으로는 유교의 위민정치를 내세워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과단성 있게 추진하였고[1]:343, 밖으로는 개항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의 침략적 자세에 대하여 척왜강경정책으로 대응하였다. 또한 서원을 철폐하여 양반·기득권 토호들의 민폐와 노론의 일당독재를 타도하고 남인과 북인을 채용하였으며, 동학과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1864년 1월부터 1873년 11월까지 조선의 국정을 이끌었다. 직접 며느리 명성황후를 간택[주해 1]하였으나, 도리어 명성황후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된다. 1873년 11월 명성황후와 유학자 및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등에 의해 축출된 이후 명성황후와 권력투쟁을 벌였다. 일본인과 결탁하여 며느리 명성황후의 암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유길준에 따르면 대원군은 명성황후를 제거해 달라고 일본 공사관에 수시로 부탁했다고 한다.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 및 고종을 폐출하고 흥친왕, 이재선 등을 조선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손자 영선군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여러 번 정변을 기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을미사변의 조선인 주요 협력자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쇄국정책과 천주교도 대량 학살, 학우조비선의 실패, 무리한 경복궁 중건 과정, 일본에 명성황후의 제거를 청탁한 점 등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성 출신으로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해동거사(海東居士)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907년 10월 1일 대원왕(大院王)으로 추봉되었고, 헌의(獻懿)를 시호로 받아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이 되었다.
안평대군 이용 집터
안평대군 이용 집터(安平大君李瑢家址) 또는 무계정사지(武溪精舍址)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2호다. 무계정사는 조선 세종 29년(1447년, 추정)에 만들어진 세종의 셋째 왕자인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별장이다. 창의문(彰義門) 밖 무계동(武溪洞)에 있었으며, 무이정사(武夷精舍)라고도 하였습니다.
세종 29년(1447) 4월 20일 안평대군이 꿈에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노닐었던 도원(桃源)을 당대 최고의 화가인 안견(安堅)에게 그리게 하여 완성된 작품이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인데, 그림에 나타난 장소를 찾아 이곳에 당도하여 여기가 꿈 속에서 본 무릉도원과 같은 곳이라 하고 정자를 세워 글을 읊고 활을 쏘며 심신을 단련하였다고 합니다.
무계정사지는 조선 세종(재위 1418∼1450)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사용하던 정자인 ‘무계정사’가 있던 터이다. 안평대군은 무계정사에 1만 권의 책을 갖추고 용산 강가에는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선비들과 함께 시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대군이 역모로 몰려서 사약을 받고 죽은 단종 1년(1453) 이후에는 이곳도 폐허가 되어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한편 이곳에는 커다란 바위면에 안평대군이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무계동(武溪洞)’이란 글씨가 큰 현판 모양으로 새겨져 있어 이곳이 ‘무계정사’가 있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2003년 12월 5일 서울시유형문화재 제22호 무계정사에서 무계정사지로 명칭변경 된다.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년 음력 9월 19일 ~ 1453년 음력 10월 18일)
조선 전기의 왕족이자 서화가, 작가이다. 이름은 용(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 낭우거사(琅玗居士), 매죽헌(梅竹軒)이며, 세종과 소헌왕후의 셋째 아들이다. 문종·세조의 친동생이자 금성대군의 형이었다. 육종영의 한 사람이다. 세 때 아들없이 죽은 삼촌 성녕대군의 양자로 입양되었으며 친형 수양대군과 갈등하다가 1453년 김종서, 황보인 등과 함께 정변을 기도했다는 이유로 계유정난으로 사형당했고 후에 복권되었다. 시호는 장소(章昭)이다.
우리나라 현대문학의 리얼리즘 기초에 큰 기여를 한 빙허(憑虛) 현진건(1900~1943)이 살았던 곳입니다. 1936년 동아일보에서 사회부장으로 근무하던 중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에 관련되어 옥고를 치른 그는 이듬해 동아일보를 사직하였습니다.
그는 출옥 후 이 집에서 생계를 위해 닭을 쳤었으며, 그러다가 그는 친구의 꼬임에 빠져 미두를 하다가 재산을 탕진하면서 술과 가난 속에 빠지게 됩니다. 현진건(1900-1943)은 「운수좋은 날」, 「빈처」, 「술 권하는 사회」 등 우리나라 근대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근대문학 초기 단편소설의 양식을 개척하고 사실주의 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소설가 입니다. 그의 작품은 자전적 소설과 민족적 현실 및 하층민에 대한 소설, 역사소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는 친일문학에 가담하지 않은 채 끝내 친일 작가가 되기를 거부하며 빈곤한 생활을 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오다 이곳에서 제기동으로 이사 한 후,1943년 장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현진건(玄鎭健, 1900년 8월 9일 ~ 1943년 4월 25일)
일제 강점기 조선(朝鮮)의 소설가 겸 언론인이다. 본관은 연주(延州) 현씨이고 호는 빙허(憑虛)이다. 「운수 좋은 날」, 「술 권하는 사회」 등 20편의 단편소설과 7편의 중·장편소설을 남겼다. 일제 지배하의 민족의 수난적 운명에 대한 객관적인 현실 묘사를 지향한 리얼리즘의 선구자로 꼽힌다.
반계 윤웅렬 별장(磻溪尹雄烈別莊)은 대한제국 시기에 법부대신과 군부대신을 지낸 반계 윤웅렬이 당시 도성 내에 유행하던 성홍열을 피해 지내기 위해 도성 밖 경승지로 첫 손에 꼽히던 창의문 밖 부암동에 조성한 별장이다.
1905년 6월에 착수, 1906년 3월 이전에 2층의 벽돌조 양풍 양식으로 건립되었다. 1911년 윤웅렬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 셋째 아들인 윤치창이 상속받아 안채 등 한옥 건물을 추가로 조성하여 오늘날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
이 집은 경사진 언덕 위에 석축을 쌓고 약간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동향〔庚坐甲向〕하여 자리잡았는데, 넓은 정원을 지나면 전면 높은 석축 위에 행랑채가 있고, 그 안에 사랑채와 안채가 각각 왼쪽과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대문간이 있는 행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一'자형 평면으로, 1칸 대문간 좌우로 각각 방 2칸이 있다. 막돌쌓기 기단 위에 사다리꼴 모양의 주춧돌을 놓아 사각기둥을 세웠으며, 가구(架構)는 3량이고,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으로 보이는 사랑채는 'ㄷ'자형 평면을 하였는데, 한옥 뒷부분에 자리한 2층 붉은 벽돌 건물이 이 별서 건물군(建物群) 가운데 가장 먼저 지어진 것이다.
안채는 사랑채 북쪽에 위치하였는데, 대문간을 들어와 오른쪽으로 꺾여 안마당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안채는 전형적인 서울·경기지방의 'ㄱ'자형 평면을 바탕으로 하여 'ㄷ'자형 평면에 가깝게 구성되었다. 회첨골을 이룬 곳에 2칸 크기의 안방이 위치하였고, 안방 왼쪽으로 정면 2칸 크기의 대청과 1칸 건넌방이 차례로 있다. 안방에서 앞으로 꺾여 나온 곳에는 각각 1칸 크기의 부엌과 찬방이 차례로 자리잡았다. 대청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전면에는 세살덧문을 달았고 그 안에 유리분합문을 달았다.
대청ㆍ안방ㆍ부엌ㆍ찬방 앞에는 'ㄱ'자로 이어지며 좁은 널마루를 깐 쪽마루가 놓였다. 건넌방 앞에는 세살덧문을 단 누마루 반 칸이 앞으로 돌출되었고, 이 곳에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다. 건넌방 앞에 누마루를 둔 것은 대한제국시기 전통가옥의 변천 과정을 보여준다.
높은 터 위에 행랑대문채가 있고 그 안에 사랑채와 안채가 있는 집이다. 대문채는 一자형으로 오른쪽 둘째 칸은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고, 사랑채는 방과 방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쪽에는 툇마루를 달았다. 안채는 행랑대문채의 동북쪽에 자리하고 있고,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건넌방과 안방이 배치되어 있다. 안방의 남쪽에 부엌과 방이 있으며, 사랑채와 안채의 옆면 뒷쪽에는 정원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내칸을 두었다.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안채와 정원이 잘 꾸며져 있으며, 전통 한옥건물에서 조금씩 현대화해가는 초기 과정의 특색을 보이고 있는 집이다. ※ 지정명칭을 "부암동윤응렬대감가"에서 "반계윤웅렬별서"로 변경한다.
http://heritage.daum.net/heritage/26644.daum#intro
윤웅렬(尹雄烈, 1840년 음력 4월 17일 ~ 1911년 양력 9월 22일)
조선 말기의 무신, 군인이며 개화파 정치인, 대한제국의 계몽운동가이다. 무과에 급제한 후 제2차 수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1882년부터 교련병대 창군을 지도하였다. 1884년 갑신 정변에 가담하였으나 정변의 실패를 예상하였다. 갑신 정변이후 형조판서 등을 지냈으나 실패하였고, 갑오개혁으로 경무사와 군부대신 등을 지냈다.
1895년 11월에는 춘생문 사건에 가담했다가 실패하고 한때 망명생활을 하기도 했다. 대한제국 수립 후 법부대신, 고등재판소 판사 군부대신 등을 거쳐 을사 보호 조약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계몽, 사회 운동에 전념하였다. 1907년에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전라도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분도되자 초대 전라남도 관찰사가 되으며, 초대, 4대 전라남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910년 일제 강점기에 조선귀족으로 남작과 자작의 작위를 받았으나 1911년에 사망하였다. 윤두수의 차남 윤흔의 7대손으로, 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사후 증 의정부찬정에 증직된 윤취동(尹取東)의 아들이며, 경재 윤영렬의 형이다. 후일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尹潽善)은 그의 종손이었다. 한일 합방 직후 사망하여 그의 친일 행적 여부를 놓고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자(字)는 영중(英仲)이고 호는 반계(磻溪), 본관은 해평이다. 충청남도 출신.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고, 2006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일제 강점기 초기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1900년대 초 전라남도 광주시내에 세워졌던 그의 선정비인 '관찰사 윤공웅렬 선정비'(觀察使尹公雄烈善政碑)는 훼손당할 위기에 처했다가 1957년 광주공원 입구에 옮겨졌고 1965년 다시 동쪽 언덕에 옮겨져 다시 세워졌다.
《찬란한 유산》은 2009년 4월 25일부터 7월 26일까지 방영된 SBS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다. 줄여서 찬유라고도 부른다. 자극적인 소재와 개연성 부족한 일명 ‘막장드라마’가 대세인 2009년 상반기 드라마 코드에 반대되는 '착한드라마' 라는 호평을 들으며, 24회부터는 전국 시청률 40%를 돌파하기도 하였다.
중견 기업을 이끄는 할머니 덕에 재벌 3세로 살아가던 선우환(이승기)이 우연히 할머니를 돕다 자신의 유산을 대신 상속받게 된 고은성(한효주)과 이리 저리 얽히면서 사랑을 만들어나가는 이야기다. 여기에 모든 것을 갖춘 남자 박준세(배수빈)와 어머니의 재혼으로 고은성과 ‘동갑내기 자매’가 된 유승미(문채원)가 이들과 사각관계를 형성한다.
http://www.visitseoul.net/kr/article/article.do?_method=view&m=0004003002017&p=03&art_id=717&lang=kr
http://blog.daum.net/kw2996/544
부암동 뒷산에 오르면
효자동 청와대 입구에서 자하문 방면으로 오르면 북악산 자락 아래 한적한 길가의 풍경이 나타난다. 자연 풍광이 넉넉하여 계절 따라 그 경치가 매번 다른 풍모를 뽐낸다. 지난 2007년 북악산을 개방한 후로는 등산객도 제법 늘었다. 길 반대편으로는 주황색 지붕의 주택가다. 이 또한 도심의 아파트촌과는 다른 풍경이다. 한적하고 고요하지만 독특한 마을 분위기를 품고 있다. 팍팍한 우리의 살림살이를 대변하듯 저만의 오롯한 풍광을 만든다.
자하문 고개를 넘어서면 부암동이다. 부암동은 예스런 정취와 예술 문화의 향취가 조화롭게 자리하며 서울의 명소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호기심에 대한 책임감 갤러리’처럼 자그마한 갤러리가 있는가 하면, 환기미술관처럼 오랜 시간 부암동의 터줏대감으로 지내온 큰 갤러리도 있다. 자하문 고개에 조금 못 미쳐서 청운공원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좌측의 인왕산 방면으로 오르는 길인데, 주의를 기울이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소박하여 더욱 정겨운 공원
청운공원은 1970년대 초 조성된 국내 최초의 아파트 단지인 청운시민아파트가 있던 터에 자리하고 있다. 지난 2008년 아파트 철거 후 약 2만 7450제곱미터의 부지를 공원으로 새롭게 단장한 것이다. 인왕산 자락이라 암벽과 푸른 산세를 병풍처럼 두른다. 맞은편 대로를 건너면 북악산인데, 산길을 따라 오르는 서울 성곽의 윤곽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암동은 개발 제한 구역과 군사 보호 구역으로 묶여 있던 터라 개발이 더딘 마을이다. 그래서 한층 사람 사는 풍경이 진하고 집 한채가 정겹다. 반대편으로는 서울 시내의 풍경이 보이고, 가까이에는 청운동 아래로 먼발치 N서울타워까지 내달리는 비경이다. 청운공원은 인왕산을 포함해 사방 어디나 빼어난 풍경이 색깔을 달리하며 다가선다. 공원 그 자체로도 손색이 없지만, 진입 광장에서 바닥분수까지 이어진 제법 긴 산책로는 한쪽 편에 인왕산을 끼고 있어 더욱 좋다. 산책로를 따라서 운동 시설과 광장 등도 있다. 진입 광장에는 팔각정이 있는데 조망 시설로 손색이 없다.
윤동주(尹東柱,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
한국의 독립운동가, 시인, 작가이다. 아명은 윤해환(尹海煥),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중화민국 지린 성에서 출생,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숭실중학교 때 처음 시작을 발표하였고,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일본 유학 후 도시샤 대학 재학 중,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7세의 나이에 고문 후유증으로 요절하였다. 그의 사후 일본군에 의한 마루타, 생체실험설이 제기되었으나 불확실하다. 사후에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일본식 창씨개명은 히라누마 도오슈(平沼東柱)이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시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아성찰 등을 소재로 하였다. 그의 친구이자 사촌인 송몽규 역시 독립운동에 가담하려다가 체포되어 일제의 생체 실험 대상자로 분류되어 처형당하였다. 1990년대 후반 이후 그의 창씨개명 '히라누마'가 알려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송몽규는 고종 사촌이었고, 가수 윤형주는 6촌 재종형제간이기도 하다.
최규식 경무관 동상
최규식(崔圭植, 1932년 9월 9일 ~ 1968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경찰관으로 1968년 김신조(金新朝)를 비롯한 무장 공비들에 의한 1·21 사태 때 사망했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강원도 춘천 출생으로 동아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부산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1961년 경찰에 투신해 1967년 10월부터 서울 종로경찰서장으로 재직하였다.
1968년 1월 2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특수부대인 124군 부대 소속 김신조 및 31명의 무장 공비들이 당시 청와대를 습격해 정부 요인을 암살하려고 남파되자 청와대 바로 옆에서 이를 검문하다가 총격전이 벌어졌고 정종수 경사와 함께 총에 맞아 죽었다. 사후 경무관으로 특진되고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었으며 그 근처에 동상도 건립되었다.
부암동에 있는 조선 시대의 성문이다. 북문(北門) 또는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린다. 태조 5년(1396) 서울 성곽을 쌓을 때 세운 사소문(四小門)의 하나로 창건되어 창의문이란 이름을 얻었다. 현재의 문루는 1741년(영조 17) 세운 것으로 사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북소문인 창의문은 자하문이란 애칭으로 널리 불렸다. 숙정문이 항상 폐쇄된 채 제 구실을 못하였기에 숙정문 역할까지 도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창의문을 늘상 북문이라 불렀던 것이다. 도성의 북쪽 교외로 빠지거나 가까이는 세검정과 북한산으로 가자면 이 문이 관문이기에 이용도가 적지 않았다. 이 문 근처에 자하가 많이 끼였는지 서울 사람들은 세검정 일대를 두고 ´자하문밖´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창의문 밖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 자하문은 사소문 중에서 그 원형을 유일하게 보존하고 있는 문이다. 건평 49.587m²(15평) 안팎의 조그마하지만 매우 단단하고 굳건한 기풍을 풍기는 건축물이다.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색다른 특징을 엿볼 수 있는데 바로 목계를 달아놓은 것이다. 동소문 문루에 봉황새를 그려놓은 것이 여타 문과 다른 특색이듯 창의문 추녀에 나무로 닭을 깎아 매달아놓은 것 역시 다른 문과 유를 달리하는 모습이다. 그 까닭은 문밖의 지세가 지네와 유사한 상이기에 그 기세를 제압하자면 지네와 상극인 닭의 꼴을 만들어 매달아놓아야 한다는 속설에 따른 것이다. 창의문에 얽힌 역사적 사실 중 인조반정에 관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15년(1623) 이귀 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綾陽君 倧: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이다. 1623년 3월 12일 이귀, 김유, 김자점, 이괄 등은 반정계획을 진행하던 중 계획이 일부 누설되었으나 예정대로 실행에 옮겨 장단의 이서군과 이천의 이중로군은 홍제원에서 김유군과 합류하였다. 반정군은 창의문을 향해 진군하여 문을 깨뜨리고 입성한 뒤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창덕궁을 무난히 점령하였다. 이에 당황한 광해군은 궁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가 체포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로 귀양 보내지고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인조이다. 후에 영조는 이 거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창의문의 성문과 문루를 개축하고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걸어놓게 하였다. 지금도 그 현판이 문루에 걸려 있다.
서울 성곽 사대문과 사소문을 기점 삼아 길게 이어지는 서울 성곽은 조선의 역사이자 서울의 상징이다. 창의문에서 북악산 방면으로 올라가거나, 반대편 언덕의 청운공원을 지나 인왕산을 올라가도 성곽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낮에 여유 있게 산책하는 것도 좋지만, 밤에 서울 성곽에서 내려다보는 야경도 빼놓을 수 없다.
환기미술관 창의문 아래에는 한국 추상미술의 제1세대인 수화 김환기 선생을 기리는 환기미술관이 있다. 이곳에서는 그의 작품을 연대별로 전시하고, 다양한 기획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 등을 수시로 실시한다. 또한 화강암으로 지은 미술관은 김환기 선생의 정신을 구현해 그 예술적 깊이를 더한다
사소문(四小門)을 아시나요
오늘날 종로구 청운동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를 창의문(彰義門)고개라 부른다. 서울 성곽의 서북에 자리한 창의문이 있는 까닭이다. 창의문은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해 '자하문고개'라고도 불린다.
창의문은 태조 5년(1396) 도성을 축조할 때 함께 건축되었다. 성곽은 약 17km에 달했는데 도성의 동서남북에 4대문(大門)을 두었고, 그 사이에 사소문(四小門)을 만들었다. 홍화문(혜화문), 광희문, 소덕문(서소문), 창의문을 일컬어 사소문이라고 하는데, 창의문은 서북쪽의 소문에 해당되며 북한산과 양주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였다.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창의문은 태종 16년 이곳의 통행이 왕조에 악영향을 준다는 풍수지리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폐문하여 사람들의 통행을 금했다. 또한 창의문은 인조와도 짙은 연을 맺었다. 인조반정 때 능양군(인조)을 비롯해 그를 따르는 의군(義軍)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이때 공을 세운 김류(金臘), 이귀(李貴), 이괄(李适), 원두표(元斗杓) 등 1등 공신에서 3등 공신까지의 공신명이 기록된 현판을 만들어 걸었는데 지금도 보존돼 있다. 문루는 임진왜란(1592) 때 불탔는데 영조 16년(1740) 재건했고 1958년 보수했다.
변치 않고 간직한 고고한 기풍
창의문은 여타 사소문에 비해 규모가 작다. 그러나 성곽을 구성하는 문인 만큼 쌓아 올린 축대에선 매우 탄탄한 기풍이 깃들어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이 두드러진다. 도시계획으로 사라진 소의문이나 보수작업으로 그 모습이 바뀐 혜화문(홍화문), 광희문과는 달리 사소문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건물 양식은 숭례문이나 흥인지문(興仁之門)의 석축과 같은 양식으로 축대를 작은 규모로 쌓고 그 위에 세운 단층 문루다. 특히 자하골에 자리해 그 아름다움이 더욱 빛을 발한다. 자하골은 개성의 자하동처럼 골이 깊고 물과 바위가 아름다워 ‘자하골’이라 부른 데서 비롯됐다.
창의문은 옛날에는 서울의 육조거리(세종로)를 빠져나와 고양(高陽), 양주(楊州) 방면으로 줄달음치던 길의 경계였다. 고개에 올라서서 아득한 도성의 전경을 되돌아보는 기분이 어떠했을까. 지금은 창의문을 시작으로 북악산 산행과 서울 성곽 답사에 나설 수 있다. 북악산은 지난 40년 동안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었으나, 요즘은 창의문에서 백악마루를 너머 숙정문까지 성루 성곽과 나란한 산책로가 연일 사람들의 발길을 끈다.
전해오는 이야기
개성의 경치 좋다는 곳 자하동을 본따 자하문이라 불렀다는 창의문은 인왕산 자락 청계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문밖에 펼쳐져 세검정과 함께 풍류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1396년(태조 5년) 창건된 소문(小門)으로 평양과 의주, 양주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였으나 풍수지리설에서 이 문을 열어놓으면 궁궐과 왕조에게 액을 불러온다는 미신때문에 1416년(태종 16년) 왕명으로 대문을 걸어 잠궈 봉쇄시키고 일반 행인들의 통행을 금지시켰다. '문을 열어놓으면 왕기가 빠져나간다'는 풍수사들의 주장에 따라 문은 세웠으나 수백년간 사용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 후 '군사들에게는 개방하라'는 세종의 명에 따라 강무에 참여하는 군사에 한하여 통행이 허용되었고 사냥하러 나가는 왕과 왕실 종친들만이 은밀하게 이용하는 비밀의 문이 되었다. 국가적인 공역(工役)을 수행할 때같은 긴요한 경우에만 성문을 열었다는 얘기다. 성문 밖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산세가 흡사 지네를 닮아 지네의 독기가 성문을 넘어 궁궐로 살기를 뿜어내져 이를 막아야 한다는 어이없는 주장 때문이었다. 1506년(중종 1년) 백성들의 불편을 해소하고 물자운송에 편리를 돕기 위해 다시 개방하였다.
자하문 모래가 깨끗하고 아름다워 찾는 사람이 많았는데 사천(沙川)이라 불리던 냇가는 바위산으로 이루어진 삼각산과 백악산 사이를 흐르는 개울로 장마에 깍여 내려오는 모래가 많았다. 때문에 사람들은 모래내(沙川)라고 불렀다.
또한 자하문 고개에서 바라보는 도성은 장관이었다고 한다. 경회루가 우뚝 솟아있고 멀리 숭례문이 시야에 들어오고 좌 백악 우 인왕을 끼고 목멱산(현 남산)을 바라보면 별천지에 온 느낌에 잠시 쉬었다가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은 인조반정이 있던 광해군 14년(1623) 3월 12일 밤 홍제원에 집결한 반정군이 세검정을 거쳐 이 창의문을 통해 창덕궁을 장악해 인조정권을 만들어 냈다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의 문루(門樓)는 1741년(영조 17년)에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홍예를 빠져 나와 문루를 올려다보면 창의문(彰義門)이란 편액이 지금도 선명하다. 도성 8개 문 중에서 가장 잘 보존된 문이기에 큰 손상 없이 깨끗하기 때문이다. 1956년에 이 문을 보수할 때 장여 속에서 묵서(墨書)가 나왔는데 여기에는 '1741년(建隆 6) 6월 16일에 상량(上樑)을 하였다'고 적혀 있어서 건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자하문터널
서울성곽
홍화문(弘化門, 북동쪽, 일명 혜화문, 동소문)
광희문(光熙門, 남동쪽, 일명 수구문, 시구문)
소덕문(昭德門, 남서쪽, 일명 소의문, 서소문)
환기미술관은 고 수화(樹話) 김환기 선생의 예술을 보존, 연구,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1992년 개관했다. 김환기 선생의 유화, 수채화, 드로잉, 오브제 등의 작품과 생활 유품, 편지, 사진 등의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를 상설 전시 및 회고 전시, 기념 전시 등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현대 미술에 대한 기획과 전시 공간도 마련되어 있어 다른 기념 미술관과는 차별화되고 있다. 최근 부암동이 젊은이들에게 사랑받는 거리가 되면서 함께 주목받고 있다.
부암동보다 환기미술관
문화를 향유하는 데 관심이 많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최근 가장 가보고 싶은 동네로 손꼽히는 부암동. 버스를 타고 북악스카이웨이 입구에서 내리면 언덕 아래 조용한 마을을 만난다. 담장 너머로 그저 개 짖는 소리만 가끔씩 들릴 뿐이다. 여기가 서울이 맞나 싶을 만큼 평화롭고 고즈넉한 분위기에 젖어 골목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환기미술관이 나온다.
환기미술관은 고 수화(樹話) 김환기 화백의 예술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미술관이다. 김화백이 작고한 뒤 부인 김향안 여사가 환기재단을 설립하고 1992년 화백의 이름을 따서 미술관을 개관했다. 김환기 화백은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한 작가이자 한국 근대 회화의 추상적 방향을 연 최고의 화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한국의 이미지를 가미한 작품뿐 아니라 구체적인 이미지 대신 연속적인 사각 공간 속에 점묘를 배열해 한국적 모티프를 살린 작품들을 발표했다.
후학 양성에 힘쓰라는 김화백의 뜻을 기려 제도나 국적을 초월해 장래성이 돋보이는 작가들을 발굴하여 환기상을 수여하고 다음해에는 전시회를 열 수 있는 기회도 준다. 김환기 선생의 작품 세계를 연구한 서적을 출판하기도 하고, 몇 해째 북아트전을 이어오고 있다. 유행이나 상업성에 휘둘리지 않고 진중한 행보를 해나가는 것이다.
자연을 닮은 작품과 건축물
미술관 입구에는 거대한 소나무 두 그루가 문지기처럼 서 있다. 3채의 석재 건물은 겉보기에는 제각각이지만 내부는 하나로 이어진다. 별관에서 티켓을 구입하고 낮은 계단식 담장을 따라 본관을 돌아 올라가면 옥상 정원이다. 사각형의 옥상 정원에서는 3층의 미술관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바로 뒷산으로 산책을 나갈 수도 있다.
본관은 총 8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붕의 작은 원형 천장을 비롯해 전시실의 모든 방향으로 햇살이 스며든다. 특히 3층의 상설 전시실은 이 갤러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으로 손꼽힐 만큼 주변 환경을 고스란히 담아 한옥의 매력을 살렸다.
또한 각 전시실은 둥근 모양으로 서로 교차되어 관람객이 동선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건축가 우규승의 작품으로, 그는 누구보다도 김환기의 미술 세계를 잘 이해한 건축가다. 그의 설계는 김환기의 미술 세계를 담으면서 자연과 어우러진다. 기존의 지형을 변화시키지 않고 경사면을 있는 그대로 활용했으며, 김환기의 작품에 등장하는 산이나 달, 구름 등의 이미지를 갤러리 외관에 투영했다. 환기미술관은 건축가 우규승의 손을 빌려‘김환기의 부활’을 이뤄낸 셈이다. 미술애호가가 아니더라도 부암동 산책길에 꼭 한 번 들러보길 권한다.
'커피프린스 1호점' 촬영지<산모퉁이>
《커피프린스 1호점》은 대한민국 MBC(문화방송)의 텔레비전 드라마이다. 2007년 7월 2일부터 2007년 8월 27일까지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에 방영되었다.
원작은 눈과마음이 2006년 출간한 이선미의 로맨스 소설 《커피프린스 1호점》이며, 각본 작업에 원작자도 참가했다. 연출자 이윤정은 문화방송 최초의 여성 드라마 감독이다. 기획은 《히트》, 《전원일기》, 《애드버킷》의 이은규가 맡았다.
주인공 최한결은 동인식품의 후계자이며 홍사장과 함께 커피프린스 1호점의 공동주인이다. 남장 여자인 고은찬은 커피프린스 1호점 종업원이다. 커피프린스 1호점의 다른 종업원으로는, 유명한 병원집 아들인 진하림, 원래 일본인이나 여자를 쫓아 한국까지 오게된 노선기, 폭력으로 정학을 맞았다가 복학해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황민엽이 있다. 한결이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화가 한유주는 방송음악가인 한결의 사촌형 최한성과 연인 사이다. 첫사랑 한유주를 잊지 못하던 한결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남자로 알고 있는 종업원 은찬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데...
백사실 계곡 (백석동천)
백사실계곡은 서울에서 보기 드물게 문화사적(백석동천, 사적 제462호)과 자연환경이 잘 어우러진 우수한 자연생지역으로서 도룡뇽, 개구리, 버들치, 가재 등 다양한 생물체들이 서식하고 있다. 특히, 1급수 지표종인 '도룡뇽'은 서울특별시자연환경보전조례에 의한 서울시 보호야생동물로서 백사실계곡에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어 그 보존가지가 매우 높은 지역이다. 아는 사람만 안다는 서울의 청정 계곡으로 도롱뇽이 산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백사(白沙) 이항복의 별장터가 있어 붙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깊은 숲을 따라 이어지는 오솔길과 걸음을 막아서는 크고 작은 계곡의 정취는 이곳이 과연 서울인가를 의심하게 한다. 버들치, 도롱뇽 등의 서식지인 만큼 계곡에 발을 담그지는 말고 그저 풍광만 탐할 것을 권한다. 카페 산모퉁이와 군부대를 지나면 계곡 입구가 나온다.
부암동 백석동천은 백사 이항복(1556~1618)의 별서로 추정되는 유적으로, 1800년대에 조성되었다. ‘백석(白石)’은 백악산, 지금의 북한산을 말하며, 동천(洞天)은 신선이 와서 놀 정도로 경치가 좋다는 의미이다. 예전부터 이곳은 ‘백사실’로도 불렸는데, 이항복의 호를 따서 백석동천을 바꿔 불렀을 것으로 추정한다.
“물 맑은 백사실계곡과 이제는 터만 남은 백석동천”
백석동천에는 건물터와 연못 등이 남아 있다. 사랑채가 있던 곳에는 담장과 석축 일부가 남아 있고, 아래쪽으로 연못터와 연못 한쪽에 육각정자의 주춧돌과 돌계단이 남아 있다. 인근에 ‘白石洞天’(백석동천), ‘月巖’(월암)이라 새긴 바위가 남아 있다. 서울 한복판에 자리한 백사실계곡은 물이 맑고 오염되지 않아, 개구리, 맹꽁이와 1급수에서만 사는 도롱뇽이 자란다.
http://heritage.daum.net/heritage/19090.daum#intro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은 1800년대 도성에 인접하여 조성되었던 별서 관련 유적으로 주변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에 건물지(사랑채, 안채 등)와 연못 등이 남아있으며, 인근에"백석동천(白石洞天)"·"월암(月巖)"등의 각자(刻字)바위가 위치하고 있다. 백악산(북악산) 뒷자락에 북한산을 정면으로 자연 경관이 수려한 백사골에 조성된 동천(洞天 :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의 하나로 주변에 흰 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답다고 하여 “백석동천”이라 불린다고 전하며, ‘백석’이란 중국의 명산인 ‘백석산(白石山)’에서 비롯된 것으로 ‘백석산’은 ‘백악산(북악산)’에서 착안된 것으로 풀이 된다. 서울 지역의 별서로서는 김흥근(金興根) 별서인 석파정(石坡亭), 김조순(金祖淳) 별서인 옥호정(玉壺亭), 심상응(沈想應)의 별서로 알려진 성낙원(城樂園) 등이 남아 있다. 백석동천은 남북을 중심으로 육각정자와 연못이 있고, 약 3.78m 정도의 높은 대지 위에 사랑채 부분과 안채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현재 사랑채와 정자 등은 건물터에 기초만 남아 있고, 담장과 석축 일부가 남아 있다. 백석동천은 사랑채 등의 건물지와 연못, 각자바위 등이 잘 남아 있고 마을과의 거리감을 확보하고 있는 등 별서의 구성요소를 두루 갖춘 격조 높은 조원(造園)의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서울부암동백석동천유적은 1800년대 도성 밖에 조성되었던 별서 관련 유적으로 주변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에 건물지(사랑채, 안채 등)와 연못 등이 남아있으며, 인근에"백석동천(白石洞天)"·"월암(月巖)"등의 각자(刻字)바위가 위치하고 있다. 서울 지역의 별서로서는 김흥근(金興根) 별서인 석파정(石坡亭), 김조순(金祖淳) 별서인 옥호정(玉壺亭), 심상응(沈想應)의 별서로 알려진 성낙원(城樂園) 등이 남아 있다. "백석동천유적"은 사랑채 등의 건물지와 연못, 각자바위 등이 잘 남아 있고 마을과의 거리감을 확보하고 있는 등 별서의 구성요소를 두루 갖춘 격조높은 조원(造園)의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http://myhome.internet.olleh.com/~sealove78/travel2008-2/21091018-10.htm
서울 부암동 백사실 계곡은 북악산 북사면에 있는 계곡물이 깨끗하고 숲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백사실계곡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계곡에는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등이 있고, 능선에는 소나무, 아카시아나무 등이 넓게 자리잡고 있다. 백사실 계곡 약 1km 구간에는 도룡뇽 알주머니가 수만개 발견되는 등 도룡뇽, 산개구리, 무당개구리, 가재, 다슬기 등이 서식하고 있는 맑은 계곡물을 자랑한다.
백사실 계곡의 중심에는 조선후기 별서가 있었던 자리인 백석동천이 자리잡고 있다.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별서터에는 안채와 사랑채 건물 초석과 연못 등이 남아 있다. 이 계곡은 조선중기 문신인 백사 이항복의 별장이 있었다고 하여 '백사실 계곡'이라고 부르며, 정식 명칭은 '북악산의 아름다운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이라는 뜻을 지닌 백석동천이라고 한다. 서울의 인왕산이나 북악산과 마찬가지로 이 곳에서는 흰색의 바위가 빼어난 경치를 만들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백사실계곡으로 들어가는 길은 세검정에서 현통사를 거쳐서 들어갈 수도 있고, 부암동 주택가를 언덕길을 따라서 올라갈 수도 있는데, 세검정에서 주택가를 지나 계곡을 따라서 걸어올라 가는 길이 더 운치가 있어 보인다.
백사폭포
형통사
월암 바위글씨
조선시대 양반들의 별장지로 유명했던 북악산 계곡인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명승 36호)이 한때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소유였던 사실이 밝혀졌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최근 명승경관 연구사업의 하나로 백석동천 관련 옛 문헌들을 조사한 결과 조선 후기 대학자인 추사가 이곳을 사들여 별장을 지었던 사실을 확인했다고 12일 말했다. 박지원의 손자인 19세기 문인 박규수의 문집 <환재집>에 이곳을 ‘백석정’이라고 일컬은 표현이 전하는데, 조사 결과 추사의 문집 <완당전집>에 “선인이 살던 백석정을 예전에 사들였다”는 내용을 확인했으며, 추사 자신의 주석(해설)에서도 “나의 북서(北墅: 북쪽 별장)에 백석정 옛터가 있다”
그 중에 백미는 명승 36호로 지정된 백석동천(白石洞天). 영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의 별장이 이 곳에 있었다고 해서 백사실(白沙室) 계곡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백석은 북악산을, 동천은 신선이 사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니 백석동천은 '북악산에 있는 경치 좋은 곳'이란 뜻쯤 되겠다. 울창한 소나무 숲 속 실핏줄 같은 계곡엔 북악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졸졸거린다. 맑은 물에는 사대문 안에서 유일하게 도롱뇽이 서식한다.
백석동천 한가운데엔 둥그런 연못터와 육각형 정자터, 사랑채터와 안채터 등이 남아있다. 주변 큰 바위에 백석동천과 월암(月巖)이란 각자(刻字)가 있어 당시 선비들의 풍류를 전해준다. 백석동천 일대를 추사 김정희가 소유했었다는 자료가 발견됐다고 한다. 추사의 완당전집에 "선인 살던 백석정을 예전에 사들였다"라는 대목과 주석에서 "나의 북서(北墅ㆍ북쪽 별장)를 말한다. 백석정 옛터가 있다"고 한 대목이다.
6각형 정자터와 연못
백석동천 바위글씨
백사실계곡 생태경관보전지역
서울의 내사산(인왕산, 북악산, 남산, 낙산) 중 북악산 북사면 사이에 있으며 물이 깨끗하고 주변 숲 또한 잘 보존되어 있어 체계적인 관리와 보전을 위해 <백사실계곡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다. 계곡부는 상수리나무, 느티타무, 산벚나무 등이, 능선부는 소나무, 아카시아나무 등이 넓게 군락을 이루고 있다. 야생조류로는 서울시 보호종인 오색딱다구리 등이 있으며 그 외 도룡농, 산개구리, 무당개구리, 가재, 다슬기 등이 서식하고 있다. 1800년대 별서 관련 유적인 백석동천은 자연경관이 수려한 백사골에 조성된 동천의 하나로 주변에 흰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답다하여 백석동천이라 불린다. <출처:서울시청>
http://younghwan12.tistory.com/3212
서울부암동 백석동천,
백석동천은 조선시대의 별서가 있었던 곳이다.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에 건물터와 연못 등이 남아 있으며, 인근에 '백석동천', '월암' 등의 각자 바위가 있다. '백석동천'의 백석은 '백악(북악산)'을 뜻하고, 동천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을 말하다. 따라서 '백석동천'은 '백악의 아름다운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이라는 뜻이다. 한편 백석동천은 인근 주민들에게 '백사실 계곡'이라고 불리면서 이항복의 별장지였다고도 전해지는데, 이는 이항복의 호가 백사인 것에서 유래하여 구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곳에는 연못과 육각정의 초석이 그대로 남아 있고, 그 뒤의 높은 곳에는 사랑채의 돌계단과 초석이 잘 남아 있다. 사랑채 뒤의 배드민턴 연습장 터에는 안채가 있었다고 한다. 백석동천은 마을과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있으며, 수려한 자연경관과 건물들이 잘 어우러져 있어서 격조높은 별서 건축의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 <출처:서울시청>
화평을 기린 세검정
조선 19대 숙종은 탕춘대성을 쌓고 세검정도 지었는데, 인조반정 후에 칼을 닦았다는 설보다는 전투를 멀리하고 화평을 구가하겠다는 설이 설득력 있다.
서울 시내 한강으로 흘러가는 지류는 모두 14개다. 그 가운데 주변에 문화재가 유난히 많은 하천이 바로 홍제천. 이곳은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의 성문인 홍지문을 시작으로 이광수 별장 터와 석파랑, 세검정, 탕춘대 터, 조지서 터 등 물길 따라 역사도 유유히 흘러왔음을 말해준다. 홍제천 상류에 자리한 세검정은 인왕산,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도심 속 트레킹 코스의 종착점이자, 현대와 공존하는 조상들의 삶의 흔적이다.
세검정의 명칭 유래에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다. 가장 유력한 설은 1623년 인조반정과 관련이 있다. 이귀, 김류 등 반정군들이 홍제원에 모여 세검입의(洗劍立義·칼을 씻어 정의를 세움)의 맹세를 한 후 반정을 모의했다. 그리고 거사가 성공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검정을 세웠다는 주장이다. 그 모양은 정(丁)자형 3칸, 팔작지붕의 정자 형태이다. 기록에 의하면 1747년(영조 23)에 재건됐고 1941년 소실되었다가 1977년에 복원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한다. 홍제천이 흐르는 세검정 주변은 북악산 남쪽 기슭 백운대에서 이어지는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하다. 근래에는 평창동, 구기동, 홍지동, 부암동 등 세검정 주변의 고즈넉한 마을 분위기와 여기에 어울리는 카페, 레스토랑들이 들어서면서 새롭게 부상하는 서울의 명소가 되고 있다.
풍류를 즐겼던 세검정
세검정의 수려한 자연경관은 옛 조상들의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연산군은 이곳 물을 이용하여 수각과 탕춘대 등을 짓고 여유를 즐겼을 정도다. 하지만 숙종조에는 북한산성, 탕춘대성을 쌓고 이 부근을 수도 서울의 북쪽 수어진지로 삼으면서 군인들이 쉬었다 가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세검정에 끊이지 않았던 것은 시화 소재를 찾아 거닐던 시인, 화가들의 행렬이었다. 정조, 순조 때의 서민 시인으로 유명한 천수경은 그의 편서 <풍요속선>에서 세검정의 아름다운 풍경을 표현했고 조선 후기 화가인 겸재 정선의 <세검정도> 역시 세검정을 독창적인 시각으로 그려냈다. 세검정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정자 아래 맑은 물과 주변의 신록은 사계절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고 현대 건물들과 어우러진 세검정은 시대를 초월한 매력을 풍기고 있다. 최근에는 주변에 아담한 레스토랑도 들어서서 찾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세검정은 밖에서만 관람할 수 있으며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차일암 바위 위에 지어진 것이 특징으로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된 세검정은 丁자형 3칸, 팔작지붕의 정자다. 세검정 차일암은 조선 시대 세초(실록을 편찬한 뒤 그 초고를 없애던 일)를 하던 장소였다.
칼을 씻어(洗:씻을 세) 칼(劍·칼 검)집에 넣으며 태평성대를 기원하고, '실록' 편찬 후 사초를 씻어 흔적을 지우던 곳. 세검정과 차일암.
현재 서울 세검정이라는 지역은 세검정(洗劍亭) 정자를 중심으로 한 부암동, 홍지동, 신영동 ,평창동 일대를 통틀어 가리키는 지역 대명사로 쓰인다. 이곳의 지형은 북한산 줄기가 뻗어 내린 관계로 평지보다는 계곡이 많다. 그렇기에 인조반정 때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으나 그 후 간장 담그는 기술자와 창호지 만드는 기술자를 상주케 하여 '메주가마골' 이라는 별칭도 생겨 났으며, '실록'을 편찬 한 후 실록의 기초가 되었던 사초(史草)를 물에 지우는 세초지가 있었으며, 종이를 만들던 조지서(造紙署)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한말에는 이곳에 신식 군영(軍營)을 설치하였고, 또한 광목을 바래던 표백서(漂白署)도 있었다.
서울 도성안에는 아침의 파루(罷漏), 저녁의 인정(人定)을 알리는 종루가 있었기에 그곳을 종로(鐘路)라고 부르게 되었다. 남한산성내의 가운데를 종로라고 부르고 수원의 화성의 가운데 화성행군 일대를 종로라고 부른다. 또한 평창동은 이곳에 선혜청(宣惠廳)의 창고 평창(平倉)이 있었으므로 해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세검정 길을 사이에 두고 평창동사무소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간 평창동 330번지에 소재하며, 원래 평창은 상·하로 2창(倉)이 있는데, 부평, 인천, 과천, 시흥, 안산, 양천, 양주, 용인, 고양, 파주, 교하의 11개 읍으로부터 운반해 온 대동미(大同米)를 보관하였다.
평창동 330번지의 평창은 5군영의 하나인 총융청(摠戎廳)의 창고로 상창(上倉)이 되고, 156번지의 평창은 선혜청(宣惠廳)의 창고로 하창(下倉)에 해당되는데 나중에 지었기 때문에 신창(新倉) 혹은 센창이라고 불렀다. 한편 선혜청은 여러 곳에 창고를 두었는데 북창(北倉)은 삼청동에, 별창(別倉)은 용산강(龍山江), 동강(東江)은 옛 장용영(壯勇營)에 두었으며, 그 외에도 평창(平倉), 만리창(萬里倉), 광흥창(廣興倉)을 두었다.
신라 태종 무열왕(654∼660)이 삼국 쟁패 과정에서 죽어간 신라의 화랑과 수많은 장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현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 대찰 장의사(壯義寺)를 지으며 세검정이라는 정자도 장의사(藏義寺)의 부속 건물인 정자터라고 전해진다. 연산군(1500~1505년경)때에 들어서며 사찰은 쇠락의 길을 걸으며 연산군은 탕춘대를 마련하고 수각(水閣)으로 사용되었으며, 일설에는 숙종때 북한산성을 수비하기 위하여 병영 총융청을 마련하였는데. 이것에 있는 군인들의 휴게시설로 세웠다는 말도 있다. 이후 영조 24년 (1748 ) 중건하였으며 이때 세검정 현판을 달았다.
광해군 15년(1623)에 인조가 능양군(綾陽君)으로 있을 때 이귀, 김류등과 함께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인조반정에 성공한 후 이 정자 아래로 흐르는 홍제천(모래내) 맑은 물에 칼을 씻었다 하여 세검정이라 이름하였다. '세검이라 함은 칼을 씻어 칼집에 넣고 태평성대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세검정은 인조반정을 의거로 평가하여 이를 찬미하는 상징으로 만들어 진것이다.
누각 바로 뒤로는 탕춘대가 보이고 그 왼쪽으로는 지금과 꼭 같은 길이 나있다. 누각 앞 오른쪽으로는 차일암이 있고 냇가가 흐른다. 신기할정도로 현재와 꼭 같은 풍경이다.
현재의 정자는 1941년 부근에 있던 종이 공장의 화재로 소실되어 겸재 정선의 세검정도를 보고 1977년 복원한 것이다. 겸재 정선의 '세검정도를 보면 정자의 받침 돌기둥이 높직한 누각형식의 건물로 도로쪽을 향하는 면에는 나지막한 담장을 돌리고 입구에 일각문을 두었으며 건물의 측면에는 편문을 두어 개울로 내려갈수있게 묘사되어 있으나 현재는 개울로 내려갈수있는 시설물은 없어서 조심스레 경사진 바위를 타고 내려갔다. 여느 정자와는 달리 'ㄱ'字 모양의 육각 정자로 되어있다.
겸제 정선의 세검정圖 (출처: 간송미술관·DongA.com참고)
사찰 장의사터(藏義寺址)와 총융청터
현재 세검정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는곳이 신라 때 창건된 장의사(藏義寺)의 옛터이며 그 후 총융청이 들어서있던 곳이다. '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 전하는 절의 창건과정을 보면 7세기중엽 한반도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간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무렵 신라의 화랑인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 둘은 황산벌(지금의 논산지방)에서 한강유역의 쟁탈권을 확보하기 위해 백제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밀고 밀리는 와중에서 두 화랑은 선봉에 나서 신라군사를 독려하며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고, 마침내 둘은 장렬하게 최후를 마치게 된다.
절은 이 두 청년과 전사자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659년(무열왕 6)무열왕이 세운 추복사찰(追福寺刹)이다. 나라를 위해 젊은 목숨을 바친 두 화랑의 의로움이 서려있다는 뜻에서 장의사라 하였다. 이후 두 화랑의 회생정신을 기리고자 신라인의 발길이 이어졌다. 규모는 매우 컸으며 고려시대의 몇몇 금석문을 보면 원종대사 찬유(869∼958), 법인국사 탄문(900∼975), 자정국존 미수(1240∼1327)등의 고승들이 이곳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신라때 국왕에 의해 창건되어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오랜 세월 영화를 누려 왔던 장의사는 이제 연산군시대에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터만 남아 있던 장의사에 1712년(숙종 38) 군사훈련소인 연무대가 설치되었고, 1747년(영조 23)에는 총융청(總戎廳)이 설치되어 3백여칸의 건물이 들어섰다. 1886년 이후에는 신식군대인 별기군의 훈련장이 되기도 하였다. 1930년 후반에 국민학교가 세워졌다가 1948년 지금의 세검정초등학교가 들어서게 되었다.
차일암 세초지와 사관
사극을 보노라면 왕 아래 곁에서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붓을 들고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사관이다. 사관의 역사는 중국에서 부터 시작되었고 고려시대에도 있었다. 사관은 국왕이 있는곳에는 항시 같이 있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기록되고 있으니 국왕에게는 친숙하기보다는 지긋 지긋한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여자사관을 뽑아 잠자리까지 기록하자고 할 정도였으니... 사관이 기록한 것을 사초라하며 이 사초를 모아서 실록을 만든다. 조선시대 사관은 예문관 소속 8명의 전임사관이 있었고 이를 가르켜 한림이라 하였다. 그외 춘추관의 겸관들은 3정승을 비롯하여 52명쯤 된다. 전임사관들이 입시하는 제도가 정착할때 까지는 군왕과 사관들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혈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사관들이 모든 정사에 입시하게 된것은 사관을 비롯한 젊은 신진인사들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세검정 이곳은 여름철에 詩會를 연 곳으로 유명했다. 시회는 원래 글을 통해 인격을 닦으려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주요 모임이었다. 지금은 길이 터널이 뚫리며 차량 소통도 많아지고 많은 집들이 들어서며 복잡한 도시로 변했지만, 예전 세검정 아래 맑은 물이 흐르는 모래내는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며 놀고 동네 아낙들의 빨래터로 이용되며 항시 맑은 물이 넘치는 풍경 좋은 곳이었다.
세검정과 차일암
차일(遮日)이란 햇볕이나 비를 막기위해 하늘을 가리는 포장으로 학교 운동회때 귀빈석에 쳐진 천막을 생각하면 쉽다. 예전에는 광목 ·삼베로 만들어서 혼인이나 회갑잔치 등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볕을 막기 위하여 사용하며 장례식 때도 사용한다. 차일을 우산처럼 대나무에 기름종이를 발라 쓰는 것을 차일산(傘)이라 하는데 옛날 야외의 시연(詩筵)이나 향연(饗宴) ·과거시험 ·한시백일장 같은 데에서 사용하였다.
차일암의 세초연
실록은 '당대사'였다. 오늘날로 따지자면 현대사인 셈이다. 그래서 당연히 그 때 살았던 사람들이 보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었다. 심지어 군왕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원칙이 제대로 지켜진 실록은 오직 '조선왕조실록' 뿐이었고, 따라서 '조선왕조실록'이 빛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실록'을 만들기 전에 사관들이 매일 왕의 곁에서 모든것을 일일이 기록한 글이 사초이다. 사초(史草)란 실록 편찬의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자료였다.
사초편찬 과정은 크게 초초, 중초, 정초의 3단계로 나뉜다. 실록은 이 가운데 정초본을 대본으로 삼아 금속활자로 인쇄하여 시대에 따라 4부 또는 5부를 만들었다. 실록청은 총재관(總裁官), 도청(都廳), 방(房)의 3단계로 구성되었으며 실록의 편찬이 3단계의 공정을 거쳐 이루어지며 실록을 편찬할 때 주로 이용되었던 자료를 보면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은 바로 사초와 시정기(時政記)였다. 그 밖에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의정부등록(議政府謄錄)'과 후대에는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일성록(日省錄)' 등을 비롯하여 '각사등록(各司謄錄)', 개인의 일기나 문집, 소(疏), 야사 등 많은 자료를 참고하였다.
'실록' 편찬이 끝나면 글쓴이의 비밀을 보장하고 그 기록을 없애버리기 위해 초초본과 중초본을 세검정에서 흐르는 물에 세초(洗草)하여 먹으로 쓰여진 글씨를 없애고, 종이를 재생하는 차원에서 세검정 근처에 있는 조지서(造紙署: 아래 상세안내 참고)로 보내져서 다시 종이로 재생되었다.
세초연(洗草宴)은 실록의 편찬이 완료된 이후 사초(史草)나 초고(草稿) 등을 물에 씻어 지우며 여는 잔치를 말한다. 세초는 조지서(造紙署)가 있었던 세검정(洗劍亭) 냇가에서 행해졌는데, 실록 편찬에 참여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근처의 차일암(遮日巖)에서 세초연을 베풀었다. 다음의 시는 숙종∼영조 연간의 문신인 조문명(趙文命,1680∼1732)이 '숙종실록'을 편찬한 뒤 세초연에 참석하여 노래한 한시이다.
차일암의 차일을 칠때 기둥을 세웠던 흔적
산과 바위가 어우러려 물이 맑은 세검정(洗劒停) 일대는 서울시민들의 둘도 없는 소풍 장소였다. 인왕산을 앞에 두고 북악산을 뒤로한 공기 맑고 풍경 좋은 세검정. 북악산으로부터 흘러내리는 계곡물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육각형의 작은 정자인 세검정은 '차일암'이라 부르는 평평한 바위에 세워졌는데, 왕조의 실록을 편찬한 뒤에 그 원고가 되는 사초를 이 바위 위에서 차일(천막)을 치고 맑은 물에 한지에 쓴 사초를 집어넣어 먹글씨를 씻어버린 일에서 비롯되었다.
실록포쇄란 사고에 보관되어 있는 실록을 좀이나 습기로 인한 부식이나 충해(蟲害)를 막기 위해 3년에 한번 정도 바람을 쏘이고 햇볕에 쬐어 말리는 것을 말한다. 실록은 아무나 볼 수 없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실록의 포쇄를 매우 엄격하게 시행하였는데,춘추관(春秋館)에서 사관을 파견하여 이를 담당하였다.
탕춘대(蕩春臺)터
탕춘대는 1506년 연산군이 세운 누대(樓臺)이다. 연산군은 경치가 좋은 이곳 일대를 연회 장소로 삼고 시냇물이 내려다 보이는 바위위에 탕춘대를 지었다. 영조때에는 무사들을 선발하여 이 일대에서 훈련 시켰다하여 연융대(練絨臺)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는 이 위로 빌라촌이 형성되어있다.
조지서(造紙署)
조선시대 궁중과 중앙정부기관에서 사용하는 종이와 중국에 공물로 보내는 종이 등을 생산하던 관설 제지소.1415년(태종 15) 조지소(造紙所)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가 1465년(세조 11) 조지서로 이름이 바뀌었다. 서울 근교의 물이 좋고 넓은 바위가 있어 한지(韓紙) 제조에 적당한 자하문(紫霞門) 밖 탕춘대(蕩春臺)에 설치되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제지 기술자인 지장(紙匠)이 81명, 보조역이라 할 수 있는 차비노(差備奴)가 90명이 있던 수공업장이었다. 지장은 조선의 '부역동원제'에 의해 3교대로 동원되었다. 이들은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제지기술자들이었고, 따라서 조지서에서 생산되는 종이는 국내에서 최고 품질의 종이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까지 천하무비(天下無比)로 알려졌었다. 조지서에 소속된 지장들은 이미 조선의 전기부터 조지서 근처에 하나의 마을을 이루어 살면서 생산에 종사할 만큼 전업수공업자화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한때 조지서가 큰 타격을 받기도 했는데, 1626년(인조 4)의 기록에 의하면 전쟁 후에 조지서에는 겨우 5명의 지장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정부에서 승려지장을 동원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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