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지식의 피라미드

근현대사 역사탐방 4탄, 정읍 동학운동 (1894년)

草霧 2012. 10. 9. 12:41

 

 

근현대사 역사탐방 4, 정읍 동학운동 (1894)

 

동학 농민 운동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運動)

http://yuksa.new21.org/data/his2-222.htm

http://cont2.edunet4u.net/~history/jo/donghak.htm

http://ko.wikipedia.org/wiki/%EB%8F%99%ED%95%99_%EB%86%8D%EB%AF%BC_%EC%9A%B4%EB%8F%99

 

동학 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1]1893~1895년 동학 지도자들과 동학 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민중의 무장 봉기를 가리키며, 크게 1894년 음력 3월의 고부 봉기(1)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2)로 나뉜다.

 

기존 조선 양반 관리들의 탐학과 부패에 대한 불만이 쌓이다가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의 비리와 남형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났다. 부패 척결과 내정 개혁, 그리고 동학 교조 신원 등의 기치로 일어선 동학 농민군 중 일부는 흥선대원군, 이준용 등과도 결탁했다. 전봉준은 대원군을 반신반의 하면서도 명성황후와 민씨 세력의 축출을 위해 대원군과 손을 잡았다. 대원군 역시 명성황후의 제거를 위한 무력 집단이 필요했고, 동학 농민군과 제휴하게 된다. 동학 농민군 중 일부는 탐관오리 처벌과 개혁 외에 대원군의 섭정[2]까지도 거병의 명분으로 삼은 바 있었다.

 

초기에는 동학난으로 불리다가 대한제국 멸망 이후 농민운동, 농민혁명으로 격상되었다.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으로도 불리며, 갑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갑오농민운동(甲午農民運動),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이라고도 한다.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황토현 전투

황룡천 전투

전주성 전투

이인 전투

금구, 태인 전투

우금치 전투

대원군과 전봉준

전봉준과 천우협

흥선대원군의 농민운동 사주

 

동학 농민 운동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농민 중심의 민중항쟁이라고 할 수 있다. 동학은 신분제의 타파를 외치고 있었기 때문에 혼란한 조선말 상황에 가난한 농민들이 의지할 수 있는 종교였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은 간단하게 반봉건적, 반외세적 농민항쟁이다. 농민이 주축이 되는 운동으로 지배계층에 대한 조선 시대의 최대의 항쟁이다.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결국 실패했으나 후에 3.1운동으로 계승되었다.

 

동학농민전쟁은 동학이라는 종교 조직과 동학인의 지도하에 일어난 농민 항거라는 점에서 이전의 민란과 다르며, 외세 배척을 목표로 했다는 점도 처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적 조건하에서 동학농민전쟁은 몇 가지 한계도 가지고 있었다. 첫째, 농민군은 조선 관군을 넘어선 외세의 개입에 대하여 맞서 싸울 만한 효과적인 무기와 병력이 부족하였다. 둘째, 농민들 중심의 동학군에 대항하여 기득권을 가진 향촌사회의 지주·부호·양반들의 민보단(民堡團)등을 통한 저항을 과소 평가하였다. 셋째, 사회 개혁을 위한 혁명을 수행 하면서도 대원군에 의지하려 한 것이 잘못이었다. 더구나 동학군 내 과격파는 조선왕조를 부정하고 새 정부를 구성하려는 시도를 보였고, 온건파 중 전봉준 등은 흥선대원군과 협력하는 등 동학군 내부에서도 의견이 일치되지도 않았다는 단점도 있었다.

 

전봉준이 백산에서 전라감사에게 내놓은 개혁요구서와 전주화약을 맺기 직전 관군 최고사령관 홍계훈에게 보낸 탄원서에는 대원군이 다시 권좌에 복귀하기를 바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오 동학 농민 운동은 애국적이고 애민적인 동기에서 일어난 구한말 최대의 농민 중심의 민중항쟁이었다. 한편, 농민군이 근대적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회혁명이나 계급전쟁을 꿈꾸었다는 민중주의 역사가의 견해도 있다.

 

결국, 동학농민전쟁은 순박하고 애국적인 농민들의 자기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때의 실패경험을 바탕으로 농민층의 반일애국주의가 다음 시기의 의병운동에 양반유생과 더불어, 함께 참여하는 성숙성을 보여주게 되었으며, 농민들의 내정개혁요구는 갑오개혁에 부분적으로 반영되는 성과를 가져왔다. 반영된 내용으로는 과부의 재가 허용과 신분제 폐지 등이 있다. 그러나 이 개혁에는 농민들의 소망이었던 토지 개혁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15] 김개남 등 일부 과격파의 국왕 참칭이라던가, 전봉준 등 일부는 흥선대원군 등과 내통했던 점 역시 대중에게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하면서 많은 지지를 받을수 없는 하나의 요인이 됐다.

 

갑오농민봉기 이후 어처구니 없는 점은 일본군이 농민군을 학살한 것도 모자라, 조선의 양반 및 부호층들이 전쟁에 진 농민들의 재산을 모두 빼앗고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곳곳에서 농민들을 색출, 학살하였다는 점이다. (이 점은 농민군이 1차 봉기의 성공 이후에도 양반 및 부호층에 대해 특별한 처형이나 재산 몰수 등이 없이 그들을 인정해 주었다는 점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이후로부터 일본군과 기득권을 가진 양반 부호들과의 연합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일본의 전략으로 채택되면서 훗날 <식민지 지주제>라는 민족분열정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1.

 

정읍역

 

http://info.korail.com/servlets/renew.sta.sta02000.sw_sta02200_v1Svt?code=0033&name=정읍

http://culture.jeongeup.go.kr/new/01place/other/01/?mode=view&num=79

2.

 

만석보비석

 

 

http://ko.wikipedia.org/wiki/%EB%A7%8C%EC%84%9D%EB%B3%B4

http://blog.daum.net/roadtour/3593605

3.

 

만석보혁파선정비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0818

4.

 

말목장터

 

 

 

http://heritage.daum.net/heritage/25842.daum

5.

 

전봉준 고택

 

 

 

http://gochang.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2800862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ily2you&logNo=40153081195

6.

 

고부 관아 터

 

http://heritage.daum.net/heritage/25926.daum

 

7.

 

황토현 전적지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KS_01_02_01&VdkVgwKey=13,02950000,35

8.

 

동학농민혁명기념관

 

 

http://www.donghak.go.kr/select.asp

9.

 

동학 혁명 모의탑

 

 

http://blog.yes24.com/blog/blogmain.aspx?blogid=amirfirdaus&artseqno=2994581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allarmel&logNo=10087413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