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역사탐방 6탄, 을미사변 (1895년)
(작전명이 여우사냥)
1895년(고종 32)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지휘하는 폭도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당시에는 왕비)를 시해한 사건 그러나 왕비시해에 대한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극도에 달한 상황에서 친일내각에 의해 추진된 개혁은 전국적인 반일의병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을미의병)
명성황후시해 현장에는 고종·황태자 및 미국인 교관 다이,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 그외 많은 조선인이 있어 진상을 낱낱이 목격하여 사건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자세히 알려졌다. 이에 구미열강이 강경한 태도로 일본인의 사건 관여사실을 주장하고 나서자, 일본은 이의 처리방안으로서 미우라를 해임, 고무라[小村]를 판리공사(辦理公使)로 임명하였다. 한편 미우라 등 관계자 48명을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구치하고, 형식적으로 관련혐의자에 대한 취조를 하였으며, 결국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전원석방시켰다. 결국 을미사변은 항일의병활동의 원인과 아관파천(俄館播遷)의 계기가 되어, 한국은 러시아의 보호국과 같은 지위로 떨어졌고, 일본의 식민지화계획에 차질을 가져왔다.
http://k.daum.net/qna/openknowledge/view.html?category_id=OJ&qid=2hgYJ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21008130108248
http://ko.wikipedia.org/wiki/%EC%9D%84%EB%AF%B8%EC%82%AC%EB%B3%80
http://desert.tistory.com/3151
http://cafe.daum.net/nansan9988/9Wst/1726?docid=pY0E|9Wst|1726|20090123173355&q=%C8%AB%B7%F9%B8%AA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사건을 고종이 아관파천을 결정하게 된 주요 원인으로 보며, 또한 의병 봉기의 계기가 되었다고 여긴다. 또한 대한제국 성립의 한 원인으로 평가한다. 이 사건을 기회로 한국의 개화파들 중 일부는 일본으로 망명하게 됐다. 사건의 주요 가담자의 한사람인 조선군 1대대장 우범선은 후에 조선 조정에서 파견한 자객 고영근에 의해 암살된다. 대원군의 가담 여부에 대해서는 일본의 억측이나 누명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으나, 1990년대 이후 바뀌었다. 1990년대 초 대원군의 가담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유길준이 미국인 은사 모스 목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흥선대원군을 조선인 최고위 협력자로 지목한 것이 알려지게 됐다. 이후 박은식의 한국통사와 황현의 매천야록 등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인사들에 의해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 협력자로 지목되었다.
사건을 조명함에 있어 조선인 협력자들의 존재 역시 간과하기 힘들다. 흥선대원군은 일본 공사관을 찾아가 명성황후 제거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를 두고 여러가지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박은식은 춘추전국시대에 조돈(趙盾)이 왕을 암살한 것을 비유하여 이와 다를바 없다고 평가하였으며 감정이 사람의 양심을 가린다며 비판하였다.[11] 편지에서 유길준은 명성황후 암살은 실행되었지만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 문제를 일본공사와 협의하고 일본측에 약간의 도움을 요청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유길준은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대원군을 암살 배후로 지목한 유길준 역시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로 지목됐다.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명성황후를 암살한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 중 한사람이라고 지목하였다.[12] 명성황후가 암살당할 무렵 윤치호는 유길준과 일본인 이시쓰카가 사건의 전말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자신을 저녁 식사에 자신을 초대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당대에도 조선인 협력자들의 이름이 지목되었으나, 유길준은 피신했도 대원군은 고종의 생부이니 처벌할수 없었으며, 처벌은 일본 공사관 통역관 박선, 전 군부차관 이주회 선에서 종결되었다.
한국의 친일파나 일본의 극우 인사들은 한국의 근대화를 방해하는 “민비”를 처단함으로써 한국의 근대화를 촉진하였다고 주장한다. 반면 그와 같은 주장에 대해 서구화만을 근대화로 오해하여 자주적 근대화를 수구·반동으로 여겨서 일으킨 폭거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또한 대원군과 민비의 권력암투가 빚어낸 참극일 뿐이라는 시각도 있다
http://blog.daum.net/mickeyeden/16155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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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충단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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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단 공원비석 |
2. 경복궁 건청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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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해된 건청궁 옥후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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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운현궁 노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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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명성황후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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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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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명성황후 피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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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
6. 홍유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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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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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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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wikipedia.org/wiki국립고궁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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