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근(문화평론가) | 2014.02.04
[서울톡톡] 과거 명절특집의 주인공은 아나운서였다. 평소 정제된 모습만 보여주던 아나운서가 명절엔 망가진 모습이나 인간적인 면모를 많이 드러냈는데 그게 시청자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래서 아나운서들의 토크쇼라든가 아나운서 장기자랑 같은 것들이 명절특집으로 많이 방영됐다. 하지만 요즘엔 아나운서가 더 이상 명절의 주인공이 아니다.
몇 년 전부터 '아나테이너' 열풍이 불었다. 아나운서가 일반적인 엔터테이너, 즉 연예인처럼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젠 아나운서가 망가지는 모습을 1년 365일 언제나 볼 수 있다. 그러자 아나운서 특유의 신비감이 사라져버렸는데, 그것이 바로 명절특집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겠다.
새롭게 명절의 주인공으로 등극한 것은 아이돌이다. 명절에 방영되는 온갖 특집에 아이돌들이 등장하는 세상이 됐다. 특히 최근 들어 아이돌 체육대회가 한국 명절특집을 대표하는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다. 처음엔 일반적인 예능 특집 속에서 간단한 걸그룹 달리기 코너 정도로 등장해 네티즌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카라의 구하라가 달리기로 일약 대스타가 되기도 했다. 달리기 코너가 그렇게 큰 관심을 받자 방송사에서 아예 아이돌 육상대회를 별도로 편성하기에 이르렀고, 그것이 점점 커져 이젠 명절만 되면 아이돌들이 육상, 수영, 풋살, 양궁 등의 종목에서 승부를 가린다.
한국의 대표적인 아이돌들이 거의 다 참가하기 때문에 참여인원만 백수십여 명에 달하는 초대형 행사가 됐다. 이렇게 특정 방송프로그램에 현역 스타 가수들이 총집결하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광경이다. 이것은 방송의 힘의 그만큼 막강하다는 것, 그리고 이런 체육대회를 통해서라도 얼굴을 알려야할 만큼 가요계의 경쟁이 격심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경쟁적으로 체육대회에 참여하다보니 부작용도 크다. 운동선수도 아닌데 갑자기 대회에 참가해 뛰느라 부상선수가 속출한다. 가수로서의 활동에 지장을 받으면서까지 체육대회에 출전하지만, 참가자가 워낙 많기 때문에 단독샷 한번 못 받아보고 시간만 버리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면 좋은 성적을 거둬 화제를 모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몇몇 가수들은 평소에 경기준비에 열정을 쏟는다.
가수는 뮤지션으로서의 능력을 키워 작품과 공연을 통해 팬과 만나야 한다. 지금처럼 명절 체육대회 때문에 시간과 체력을 소비하는 건 정상적인 풍경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 지금의 아이돌 체육대회가 2010년대 한국 명절특집의 이상했던 기억으로 남을 지도 모른다.
과거 명절 땐 주한 외국인들의 장기자랑이 많이 방영됐다. 요즘에도 외국인들이 나오긴 하는데 그 스케일이 커졌다. 단순히 주한 외국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외국인들이 케이팝 따라잡기에 나선다. 그만큼 한류의 위력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거 외국인들의 가요 따라하기가 '재롱잔치' 수준이었다면, 요즘엔 한국 아이돌의 안무를 거의 비슷하게 소화할 정도로까지 발전했다.
이제 성룡과 맥컬리 컬킨은...
1980년대 이래 한국 TV 명절영화의 주인공은 성룡이었다. 성룡은 액션과 코믹을 결합한 가족영화로 20여 년간 명절 안방극장에 군림했다. 하지만 요즘엔 한국영화가 명절특집의 주인공으로 바뀌었다. 이번 설 연휴만 해도 <광해>, <도둑들>, <7번방의 선물> 등 세 편의 천만 영화가 방영되며 안방극장을 주도했다. 한국영화의 전성기가 명절특집에 반영됐다고 할 수 있겠다.
최근 명절스트레스가 부각되면서 '시월드'나 '처월드' 관련 토크쇼도 명절특집의 중요한 영역이 됐다. 또, 과거 명절특집이 일회적으로 끝났다면 요즘 명절특집은 정규 편성을 염두에 둔 시험제작 성격으로 방영된다는 점도 달라진 풍경이다. 방송가의 경쟁이 심해져 명절특집도 정규 프로그램 기획하듯이 심혈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명절특집의 변화 중에 가장 아쉬운 것은 씨름의 몰락이다. 과거엔 명절만 되면 온 가족이 씨름 경기에 열광했는데 이젠 한때의 추억으로 남았다. 지금의 명절특집 흐름도 시간이 흐르면 추억으로나 남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