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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동의 두얼굴

草霧 2014. 1. 17. 11:25

 

 

 

서울 최고 조망권을 지닌 한남동의 두 얼굴

 

 

 

골목길 기행 ⑩ 한남동

 

시민기자 채경민 | 2014.01.13

 

[서울톡톡] 차를 타고 강변북로를 달리다보면 최고의 한강 조망권을 자랑하는 이른바 부촌(富村)을 쉽게 볼 수 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외벽 마감재에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커다란 창호가 달린 건물들이 뿜어내는 웅장한 느낌은 그 존재만으로도 '부의 위력'을 실감하게 한다. 하지만 모든 건물이 그런 건 아니다. 같은 조망권을 공유하면서도 절묘한 대비를 이루는 풍경이 바로 옆에 펼쳐진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붉은 벽돌집, 색이 바래고 부서진 슬래브 지붕, 실핏줄처럼 얽혀 있는 골목길. 대표적 부촌으로 꼽히는 한남동의 두 얼굴이다.

두 가지 모습이 공존하는 용산구 한남동 풍경

언덕 너머로 펼쳐지는 파노라마

허름한 건물들이 가득한 이곳은 행정구역상 한남1동에 속한다(새 도로명 주소를 기준하면 대사관로에 해당하는데, 동네의 분위기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1960년대부터 서울로 몰려든 사람들이 언덕을 따라 터를 잡고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곳이다. 지대가 높은 언덕에 집을 짓고 길을 만들다 보니 골목마다 어김없이 가파른 계단이 들어서 있다. 여러 갈래로 뻗은 골목길은 너비도 다양하지만 구조도 복잡해 미로를 통과하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한남1동의 새주소는 `대사관로`이다

비좁은 골목을 한참동안 헤맸지만 황량한 기운만 감돌 뿐 인적을 찾아볼 수 없다. 재개발을 앞두고 주민 대부분이 이주를 마쳤기 때문. 집집마다 빈집임을 알리는 표시가 붙어있고, 낡은 담장 너머로는 길고양이들의 울음소리만이 구슬프게 들려온다.

"2011년쯤 공사를 시작한다고 들었는데 아직까지 시작을 못했어. 언제쯤 할런지 몰라. 40년 넘게 살았던 곳이라 떠나기가 아쉬워서 공사 시작하기 전까지는 여기서 살려고 해. 난 그저 이대로가 좋은데 맨날 개발 얘기만 하니 머리가 아파."

재개발 구역 바로 옆에서 이웃도 없이 홀로 살고 있다는 어르신 한 분이 한숨 섞인 푸념을 늘어놓았다.

경치를 감상하기 가장 좋은 위치는 언덕길 정상에 우뚝 선 한광교회 건물이다. 보광동과 한남동이 만나는 절묘한 경계선에 위치해 있는데, 지은 지 50년이 넘은 건물이다. 한강 자락 어디에서나 이 교회 건물을 볼 수 있어 한남동 주민들에게는 이곳 주민들에게 이곳은 랜드 마크 같은 곳이다. 교회 건물 뒤편 주차장으로 가니 한강과 강변북로, 남산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졌다. 저 멀리 하얏트 호텔과 이슬람 사원의 모스크도 한눈에 들어왔다.

한광교회에서 바라본 한남동 풍경

이 같은 풍경은 지명의 유래와도 관련이 있다. 남쪽에 한강이 흐르고 북서쪽에는 남산이 있는 형국에서 착안해 한강과 남산의 머리글자를 따서 정한 지명이 바로 '한남동'이기 때문이다. 풍수지리 명당으로도 알려져 1970년대부터 부와 명성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한남동이 서울의 대표적 부촌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풍수지리학적 이점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오래된 골목에 담긴 삶의 풍경

간간히 산책을 즐기는 외국인 여행객들만 보일 뿐 골목은 조용하다. 이태원에 있는 이슬람 사원에 들렸다 골목길을 따라 산책에 나섰다는 한 일본인 관광객은 골목 풍경이 신기한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는 게 신기해요." 낡고 오래된 것들이 만드는 풍경은 우리 뿐 아니라 외국인들에게도 묘한 느낌을 주는 구경거리인 듯하다.

한남동 골목길 풍경

손으로 직접 쓴 간판과 시멘트 블록으로 엉성하게 만든 건물들이 만드는 70~80년대의 풍경은 대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목가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아직도 이런 곳이 남아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기다 재래시장에 도착했다. 언덕 정상에 자리 잡은 이곳의 이름은 '도깨비 시장'

한남동 도깨비 시장

대부분의 재래시장이 지대가 낮은 곳에 위치해 있는 것과는 반대로 이곳 도깨비 시장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재래시장이라고 부르기가 낯설 정도로 인적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군데군데 빈 가게들도 눈에 띄었다. "한때 어찌나 사람들이 많았는지, 발 디딜 틈조차 없었어. 그런데 다들 떠나가고 이제는 유령이 나올 법한 곳이 되었네. 그나마 재개발되면 여기도 다 없어질 거야." 어르신의 목소리에는 옛 시절에 대한 진한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젊은 디자이너들의 새로운 아지트

한남동 골목길에서 내려와 이태원 거리를 지나 낮은 골목길에 들어섰다. 이곳 골목에 들어서니 색다른 분위기가 펼쳐진다. 산뜻하게 단장한 점포들이 곳곳에 들어서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한남동 디자이너 아지트 골목

젊은 패션 디자이너들이 모여들어 하나둘 점포를 열면서 최근 이곳은 패션 피플들에게 새로운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홍대나 가로수길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차분하게 쇼핑할 수 있는 공간이다. 실제로 이곳에 점포를 낸 디자이너들 중에는 골목길이 주는 '소소한' 영감을 받고 싶은 이들이 많다고 한다.

어느덧 길 위에 어둠이 내리고 희미한 불빛이 하나둘 켜졌다. 한강변에서 올려다 본 한남동 언덕엔 또다시 두 개의 풍경이 펼쳐졌다. 경관 조명을 받으며 우아함을 드러낸 대형 빌라 건물과 한두 집만이 불을 밝힌 채 적막감이 흐르고 있는 언덕 마을. 재개발이 시작되면 머지않아 두 개의 풍경은 하나의 풍경으로 합쳐질 것이다. 시간과 문화가 차곡차곡 쌓인 골목, 거칠고 모진 삶의 기억을 간직한 공간들을 마주할 수 있는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채경민 시민기자 채경민 시민기자는 기자·PD 생활을 거쳐 현재도 방송 관련 일을 계속 하고 있다.
도시화로 인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골목길, 그 길에 담긴 우리 이웃들의 따뜻한 삶을 기록하기 위해 그가 카메라를 들었다. 골목길에 오면 늘 마음이 편해진다는 채경민 시민기자, 우리가 살았던 삶의 흔적이 덧없이 사라지기 전에 그와 함께 마음이 편해지는 골목길 기행을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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