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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3

草霧 2013. 12. 16. 11:22

 

 

 

한없이 보잘 것 없으면서 한없이 위대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3

 

김별아(소설가) | 2013.12.13

 

 

설경(사진:와우서울)

 

 

나는 저 산들을 잘 안다고 허세를 떨어서는 결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의 기대감에 갇혀서도 안 되겠다고 느꼈다. 다음번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미리 짐작하지도 않겠다고 맹세했다. 산중의 규칙은 너무나 야만적이고 또 기이했다. 나는 앞날에 어떤 어려움, 좌절,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지 결코 상상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끊임없는 불확실성에 대비하여 매 순간 매 순간, 매 걸음 매 걸음 조심해야 한다고 나 자신을 향해 다짐했다. 내가 이미 죽은 목숨인 것처럼 생각하며 앞날을 살아나가기로 했다. 잃을 것이 없으면 아무 것도 나를 놀라게 할 수 없고 나의 투쟁을 멈추게 할 수 없다. 공포 때문에 나의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방해받지도 않을 것이다. 그 어떤 위험도 감당 못할 정도로 거대하지는 않으리라.

- 난도 파라도(Parrado Nando) 《난도의 위대한 귀환》중에서

 

 

[서울톡톡] 자연은 아름답다. 자연은 위험하다. 아름답기에 위험하고, 위험한 만큼 아름답다. 자연을 즐기거나 누리고, 심지어 '정복'하기까지 하려는 사람들은 철저히 자연을 '대상화'한다. 산을 깎아 길을 뚫고 물을 막아 흐름을 바꾸는 포악질에 도취해 서서히 다가오는 자연의 도도한 복수를 눈치 채지 못한다. 오로지 스스로 그러한 자연은 인간에게 길들여지지 않는다. 어리석고 오만한 인간들이 잠시 그것을 잊을 때, 자연은 복수한다. 마침내 인간을 길들인다.

20개월에 걸쳐 '백두대간' 남한 구간 632킬로미터를 종주하면서 나는 끊임없이 그것을 깨달았다. 높이 오를수록, 깊이 들어갈수록 산이 무서워졌다. 변화무쌍한 날씨에 산행의 조건은 시시각각 바뀌고,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추고 방심하면 안전사고가 났다. 그래서 함께 종주를 진행한 팀의 구호는 "까불지 말자!"였다. 산행을 시작할 때마다 등산화 끈을 단단히 조이며 "까불지 말자!"를 세 번씩 외쳤다. 새벽어둠 속에 희미한 실루엣으로 우뚝한 산은 그제야 사정을 한 번 봐준다는 듯 슬쩍 산자락을 열어주었다.

스물세 살의 청년 난도는 자신이 속한 럭비팀을 태우고 원정경기를 떠난 소형 비행기가 안데스 산맥에 추락하기 전까지 자연에 대한, 삶에 대한 두려움을 몰랐다. 그리하여 72일간의 사투 끝에 기적적으로 생환하기까지 추위, 굶주림, 가족과 친구들의 죽음을 겪으며 그가 뜻밖에 발견한 것은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이다. 죽음과 공포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삶의 본능과 욕망이다.

누군가는 난도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얼라이브>에서 살아남기 위해 동료의 인육을 먹는 충격적인 장면을 기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자신감과 결연함, 자기에 대한 믿음과 결정에 대한 확고한 신뢰로 생존자들 가운데서 '지도자' 역할을 했던 난도의 친구 마르셀로가 당국이 수색 작업을 취소했다는 뉴스를 듣고 절망하는 모습이다. 그때 난도는 마음이 약하기보다 너무 강했기 때문에 철저하게 부서지는 마르셀로를 보며 '생지옥에서 너무 강한 확신은 우리를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혹독한 자연 속에서는 오히려 평상시의 문명인다운 사고방식이 목숨을 앗아가는 위험 요인이 되는 것이다.

오직 수굿하게 우리가 자연의 일부임을 인정할 일이다. 더 이상 잃을 것도 감당하지 못할 것도 없는, 그토록 한없이 보잘 것 없으면서 한없이 위대한 존재가 인간이다. 거룩한 생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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