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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치1번지 종로구 鍾路區 (5)

草霧 2013. 12. 10. 16:10

 

 

 

 

한국의 정치1번지

 

종로구 鍾路區

  

 

 

 

 

 

 

Jongno-gu (Zhonglu)

 

 

 

 

 

 

 

14 숭인1崇仁洞

숭인동의 동명은 1914년 동명 개정 때 조선초부터 있었던 한성부 숭신방과 인창방의 첫 글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창신제3동과 인접한 숭인153, 56, 61번지 일대는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해서 신리(新里) 또는 새말이라 하였다. 현재의 숭인1동은 왕산로 북쪽에 위치하여 동쪽에 숭인2동과 성북구 보문동이 있으며, 지봉길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 창신1동과 창신3동이 서로 이웃하고 있다.

 

단종애사 정순왕후의 숨결 숭인동

낙산공원(3번 마을버스) → ① 자주동샘 → ② 정업원 터 및 청룡사 → ③ 동망정 → ④ 묘각사 → ⑤ 동묘 및 풍물거리시장 → ⑤ 여인시장터 → ⑥ 영도교 청계천

 

15 숭인2崇仁洞

숭인동의 동명은 1914년 동명 개정 때 조선초부터 있었던 한성부 숭신방과 인창방의 첫 글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낙산에서부터 흘러내린 물이 청계천으로 유입되기까지는 크고 작은 많은 개천들이 여러 갈래 이어져 있었는데 특히 창신동 방면에서부터 이어온 개천에는 쪽나무로 만든 다리가 걸쳐져 있어 이를 쪽다리 혹은 남교(藍橋)라 하였고 다리 근방에 형성된 마을은 쪽다리골, 남교동이라고도 하였다.

 

또 영미다리가 있는 곳은 영미다릿굴 혹은 영미동(穎眉洞), 연미정동(燕尾亭洞)이라고도 하였다. 동묘(東廟)가 있는 곳에 형성된 마을은 동묘동 혹은 동못골이라 하였다.동묘의 북쪽에는 시장이 있었으므로 장거리(場巨里)라 하였다. 장거리의 시장은 조선시대 초 여인들만 모여서 거래하는 채소시장이었는데 동망봉 아래 초가 암자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 단종의 왕비 송씨를 돕기 위해서였다.

 

숭인272번지 일대는 싸전이 많이 모여 있었으므로 싸전굴 혹은 미전동(米廛洞)이라 불렀다. 경기도 이천(利川)등지에서 운송되어 온 쌀가마는 파루시각 이후는 동대문 안으로 반입시키지 못하고 이에 다음날 인정시각이 되어서야 쌀의 도성안 반입이 가능했으므로 성문이 열릴 때까지 가까운 이곳에서 쌀의 매매가 이루어졌다. 현재의 숭인2동은 왕산로를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의 동은 청계로를 경계로 중구 황학동, 북쪽의 동은 동쪽에 동대문구 신설동, 서쪽에 숭인1, 북쪽에 성북구 보문동이 있다.

 

16 종로 5,6가동 鐘路

 

종로6

는 종로에서 여섯번째의 거리라는 뜻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종로6가에는 한성부 4부학당의 하나인 동학(東學)이 있었기 때문에 이와관련된 지명이 많다. 지금의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 자리는 조선시대 4부 학당의 하나인 동학이 있었으므로 일대의 마을을 동학동이라 하였다. 동학골 서쪽에 위치한 마을은 동학이 있어 선비들을 길러냈으므로 양삿골, 양사동(養士洞), 양인사동(養人舍洞)으로 불렀다.

 

313~320번지 일대는 대학천과 청계천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섬처럼 보였기 때문에 섬말 도촌(島村)이라 하였다. 종로6가의 상인들이 관원의 착취를 꺼려 집 앞채를 납작하게 짓고 방망이 같은 살창을 하여 겉으로는 어려운 것처럼 꾸미고 안채는 훌륭하게 지었기 때문에 두방망잇골·쌍봉동(雙棒洞)이라 불렀고 종로변 북쪽에 연한 지역이었다.

 

충신동 214번지와 종로6238번지, 효제동 164번지를 이어주는 곳은 방아의 다리처럼 생겼기 때문에 다리의 이름을 방아다리라 하고 부근의 마을을 방아다릿골 혹은 저교동(杵橋洞저교(杵橋)라고 불렀다. 종로52번지와 6252번지를 이어주는 다리는 동대문에서 종로쪽으로 첫째 다리가 되므로 부근의 마을을 첫다리 혹은 초교(初橋동교(東橋)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효제동 175번지와 종로6239번지를 이어주던 검정다리 이외에 동대문에서 을지로로 가는 성벽 밑 청계천에는 홍예문으로 다섯칸이 되어 있는 오간수다리가 있었다. 오간수문(五間水門)이라고도 하던 이 다리는 광무 11(1907) 토목국장 유맹(劉猛)이 청계천의 물이 잘 통하게 하기 위해 헐고 그 후 신식다리를 놓았다. 초교·방아다리 등 여러 군데에 있던 이들 다리는 청계천과 대학천의 복개공사로 차례로 없어지고 지금은 이름만 남아 전한다.

 

종로6가는 북으로 충신동, 동쪽은 창신동, 남쪽에 중구 을지로6가가 있으며 서쪽은 효제동과 종로5가와 이웃하고 있다. 종로 가운데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종로6가는 종로2~5가에 이르는 길목이 거의 대부분 상업지역임에 비해 주거지역이 혼재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 동대문 성벽을 따라 도성안 제일 끝 지역이 되던 종로6가에는 율곡로와 종로가 교차하는 외에도 여러개의 지선도로가 있는 도로가 발달한 곳이다.

 

연지동

의 동명유래는 이곳에 큰 연못이 있어서 유래되었다.연지동을 이룬 냉정동(冷井洞)은 찬우물골이라 하는데 어의궁(於義宮) 남서쪽에 물맛이 매우 찬 우물이 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고 연지동은 연못골이라고도 한다. 연지동의 동명칭 유래는 이 연지동이 속하였던 방()의 명칭인 연화(蓮花)와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에는 동··남쪽에 연못이 있었는데 동지(東池)는 동성(東城)의 연동(蓮洞), 서지(西池)는 돈의문(敦義門) 밖 모화관(慕華館) 옆에, 남지(南池)는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다고 하였으며, 이러한 연못은 장원서(掌苑署)에서 관리하고 이들 연못에서 나오는 연자(蓮子)는 왕실용으로 진공하였다.

 

그런데 동지가 성() 안인지 밖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혀진 바가 없으나 동지가 동대문 밖과 경모궁 앞 2곳에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연지동에 있었던 연지는 후자의 경우임에 확실하다. 곧 동지는 연지동의 연지를 말하며 창경궁과 경모궁(景慕宮)앞에서 흘러 내려가는 물위에 놓인 초교(初橋)의 서쪽과 철물교(鐵物橋)라고도 하는 통운교(通雲橋)의 동쪽에 있는 다리를 연지동교(蓮池洞橋)로도 불렀다.

 

연지동은 북으로 연건동, 동으로 효제동, 남으로 종로5가와 서쪽은 원남동, 인의동으로 둘러싸여 있다. 조선시대 동촌(東村)으로 불렀던 이 지역은 양반들이 거주했던 곳으로 일찍부터 주거지역으로 개발되었으며 1925년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으로 대학촌의 일원이 되기도 한 곳이다.

 

종로5

의 동명은 종로에서 다섯번째의 거리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종로5가는 남쪽으로 청계천, 동쪽으로는 성북천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두다릿골은 종로4가와 종로5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 두다리가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일명 이교동(二橋洞)이라고도 불렀다. 이교(二橋)는 두다리 외에도 재교(再橋연못골다리·연지동교(蓮池洞橋)로도 불렸는데 연못골과 연결되던 곳으로 종로578번지와 효제동 331번지 근방을 이어주던 다리이다. 동대문에서 종로쪽으로 두번째 다리가 된다. 웃냇골은 개천 윗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으로 상천변동(上川邊洞)으로 불렸다. 청계천에 면한 지역이다.

 

한우물골은 큰 우물이 있으므로 한우물 또는 대정동(大井洞)이라 하였다. 웃한우물골은 한우물 위쪽에 있는 마을이므로 웃한우물골 또는 한자명으로 상대정동(上大井洞)이라 하였다. 아래한우물골은 한우물골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아래한우물골 또는 한자명으로 하대정동(下大井洞)이라고도 하였다.

 

어의동(於義洞)은 종로5가와 연지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 어의궁(於義宮)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어의궁은 두 곳이 있었는데 하나는 사직동으로 인조(仁祖)가 즉위하기 전에 머물던 잠저(潛邸)인 상어의궁(上於義宮)이며 다른 하나는 효종(孝宗)이 탄생하여 거처하던 곳으로 효제동 근방인데 하어의궁(下於義宮)이라 하였다.

 

조선 정종(定宗)원년(元年)에 종루를 중심으로 800여칸의 행랑(行廊)을 조성하고 시전(市廛)을 의도적으로 배치하면서 지금의 종로가 상권지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여기에 1905년 동대문시장이 설치되면서 이현시장(梨峴市場)과 연결 상권이 형성되자 종로 전구간은 더욱 빠른 속도로 상업지역으로 발전해 나가게 되었다. 청량리에서 서대문까지 운행되던 개통 당시의 전차역이 지금의 종로5가 지하철역 부근이었으므로 자연스러운 화물수송을 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종로5가는 일찍부터 한약재 거래장소로 이용하여 지금은 대구 약령시(藥令市)와 함께 한약재 도매시장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 일대에 대형 도매약국이 생겨난 것은 1958년 종로5124-4번지에 보령약국이 개업하면서부터이다. 종로를 사이에 두고 남북 가로변에는 많은 도매약국이 집결되어 있으며 한약상가는 종로5가 네거리에서 동쪽의 가로변에 밀집되어 있다. 이와 함께 가로변 북쪽 골목에는 이들 한약상가와 건재상을 대상으로 하는 한약제분업소도 밀집되어 있다.

 

종로5가 네거리를 기준으로 남쪽으로 훈련원길 서쪽에 위치한 곳은 동대문시장이 되는데 예지동의 동대문시장과 이어진다. 동대문시장은 19057월에 개설되었다고 하나 18세기 전반에 큰 규모의 시장이 사상도매(私商都賣)의 본거지로 이곳에 형성되고 있었다. 즉 개설 초기에는 동부 이현에 세워졌다고 해서 일명 배우개장이라고도 불리었으나 개설되던 그 해 11월에 시장관리를 위해 광장주식회사(廣藏株式會社)가 설립되면서부터 광장시장이라고도 불리었다.

 

그러나 197012월에 종로6가 동대문 맞은 편에 기존의 동대문시장보다 훨씬 규모가 큰 동대문종합시장이 개설됨으로써, 현재 동대문시장이라 부르는 것은 사실상 종로5,6가 일대의 전체 상가를 가리키며 과거의 동대문시장은 광장시장에 한정되고 있다.

 

종로5가쪽은 식품 및 잡화상과 신발류 취급점포가 대부분이다. 종로5가의 현 위치는 동쪽은 종로6가와 연해 있고 서쪽은 종로4가와 접해 있으며 남쪽은 청계천로를 경계로 중구 방산동과 이웃해 있고 북쪽은 효제동과 연해 있다. 종로5가의 동서로는 종로가 지나고 있으며 훈련원로와 대학로, 종로가 서로 합쳐지는 곳은 교통의 요충지대이기도 하다. 동대문시장과 중구 을지로6가 방산시장 및 종로6가의 동대문종합시장이 동쪽과 서쪽 남쪽에 형성되어 있으므로 일찍부터 상업지역으로 발달할 수 있는 여건이 성숙되어 있는 곳이다.

 

충신동

의 동명유래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동의 서북쪽에 조선시대 유학의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이 있고, 동쪽으로는 4부학당의 하나인 동학(東學)이 있었기 때문에 유학이 성하던 곳이라 하여 유학의 8대 강목인 인의예지충신(仁義禮智忠信)을 각 두글자씩으로 한 동명을 만들었다는 설과 1914년 경성부의 동명 제정 때 방명(坊名)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충신의 일부 지역이 조선시대 숭신방(崇信坊)에 해당되므로 의미가 비슷한 을 써서 충신동이 되었다는 설이다.

 

효제동과 충신동의 경계가 되는 도로는 대학천을 복개하여 만들었다. 이 때문에 충신동에는 여러개의 다리가 놓였으며 이와 관련된 지명이 많았다. 충신동 214번지와 종로6238번지, 효제동 164번지를 이어주는 곳에는 방아다리가 있었다. 이곳의 지형이 디딜방아의 다리처럼 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한자로는 저교(杵橋)라 하고 충신동가 효제동의 이름을 따서 충효교(忠孝橋)라고도 하였다. 충신동 104번지와 효제동 108번지 사이에 놓인 다리는 새로 다리를 만들었기에 새다리·신교(新橋)라 불렀는데 나무를 걸치고 그 위에 흙을 덮었기 때문에 흙다리 혹은 토교(土橋)라 하였다.

 

이화동 220번지와 충신동 80~100번지 사이에 있는 마을은 옹달우물골이라 하였는데 오목한 곳에서 물이 샘솟아 나와 인근 사람들의 식수로 썼기 때문에 옹달우물이라 하고 주변의 마을은 옹달우물골이라 하였다. 율곡로변으로 이화동과 경계가 되는 충신동 7통 일대는 장원동(長垣洞) 혹은 진담골이라 하였다. 이화동 27~28번지에 조선시대 공신(功臣)의 초상화와 관재(棺材)인 동원비기(東園秘器)를 관리하던 장생전(長生殿)이 있었고 장생전의 담이 길게 쳐져있었기 때문에 부근의 마을은 긴담골이 되었다가 다시 진담골로 변하였다.

 

충신동은 동쪽으로 창신동, 남쪽에 종로6, 서쪽은 효제동이 있으며 북쪽은 이화동과 접하고 있다. 동의 한가운데를 율곡로가 지나면서 동서로 양분하고 있으며 낙산 남쪽 기슭의 서쪽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광복과 6.25동란으로 월남민들의 숫자가 급증하면서 임야와 전답으로 되어 있던 충신동 일대가 주택지로 변하였기 때문에 율곡로를 기준으로 한 동쪽지역은 비교적 택지 정리가 복잡하게 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

 

지금의 충신동 지역은 대부분 서민층의 주택가이며 율곡로·대학로 주변에는 소규모 상가지역이 형성되어 있다. 충신동은 종로구의 다른 동과 마찬가지로 동세가 크게 늘어나지 않는 지역이다. 충신동에는 율곡로가 동의 중앙부를 관통하면서 대학로와 종로6가 동대문 방향과 연결시켜 주고 있고, 그 밑으로는 지하철 4호선이 지나가 이 지역의 교통을 더욱 편하게 해주고 있다. 충신동에 있는 관공서로는 효제파출소가 충신동 105-1번지에 유일하게 위치하고 있다.

 

효제동

의 동명유래는 두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이곳에 부왕(父王)에 대한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가 지극하던 효종대왕의 잠저(어의궁)가 있었던 데서 연유하며 또 하나는 이 동의 윗쪽에는 성균관이 있고, 인접한 종로6가에 4부학당의 하나인 동학(東學)이 위치하여 유학(儒學)이 성하던 곳이라 해서 유학의 대강인 인의, 예지, 효제, 충신 등을 이 인근 일대의 동명으로 삼으므로써 효제동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효제동에는 오랜 옛날부터 불려져 오는 옛 자연부락의 명칭과 지형지물에 관한 명칭들이 다음과 같이 전해져오고 있다. 우물가에 회화나무가 있기 때문에 회화우물·홰우물·괴천(槐泉)이라 불렀고 인근의 마을은 회화우물골·괴천동(槐川洞)으로 불렀다. 종로5·6가 동사무소가 있는 일대를 일컫는다. 효제동 24번지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풍화작용으로 인해 자꾸 부스러져 흘러내리므로 썩은 바위라 불렀고 그 주변의 마을은 썩은 바윗골이라 하였다. 상북동(尙北洞)은 웃돌이라고도 불렀는데 171~175번지 일대에 논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다.

 

효제동 290번지 지금의 효제국민학교 운동장 동쪽에 둘레가 5리나 되는 큰 연못이 있어서 그 일대를 연못골, 연지동으로 불렀는데 1906년 이 연못을 메우고 효제국민학교 전신인 어의공립보통학교를 건립하였다. 효제동은 동쪽으로 대학천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개의 다리가 놓였다. 종로 방향으로 첫다리 안쪽에 있는 다리는 안다리·내교(內橋)라 하였고 안다리가 있는 마을을 안다릿골·내교동(內橋洞)으로 불렀다. 효제동 163번지 일대이다. 효제동 108번지와 충신동 104번지 사이에 놓인 다리는 새로 놓았기 때문에 새다리 혹은 신교(新橋)라 불렀는데 나무로 만든 위에 흙을 새로 덮었으므로 흙다리라고도 하였다. 흙다리 근방에 있는 효제동·충신동 일대의 마을을 신교동(新橋洞) 혹은 새다릿골로 불렀다. 종로5가 파출소 근방이다.

 

효제동 164번지와 충신동 214번지, 종로6238번지 어름의 세 동이 만나는 지점에 있던 다리는 이곳의 지형이 디딜방아의 다리처럼 생겼으므로 방아다리, 한자로 저교(杵橋)라 하였다. 이 다리는 또 충효교(忠孝橋)라고 했는데 효제동과 충신동의 어귀에 있으므로 두 동의 이름을 따서 불렀다. 충효교라 불렀다는 또 하나의 설을 동대문쪽에서 창덕궁·창경궁 등 궁궐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다리를 지나야 하므로 임금에게 충성하라는 뜻으로 불렀다고도 한다.

 

효제동에 포함된 옛 지명 어의동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려 때 이씨가 고려조를 엎지르고 한양에 도읍을 정한다는 도선(道詵)의 도참설(圖讖設)이 널리 퍼졌는데, 그 기운을 미리 막기 위하여 한양 동쪽에 있는 동촌(東村) 즉 이 지역에 오얏나무를 많이 심었다가 무성하면 베어 버리고 지명도 한자명으로 예이동(刈李洞)이라 하였다. 그러던 것을 조선조에 들어와서 이를 종이촌(種李村) 또는 어의동으로 고치고 오얏나무 대신 버들을 많이 심었으므로 양류촌(楊柳村)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효제동은 동으로 충신동과 종로6, 남으로 종로5, 서쪽은 연지동, 북쪽에 이화동이 있으며 동의 서쪽으로는 남북으로 대학로를 비롯하여 효제국민학교 앞과 이화동에서 종로6가에 이르는 지선도로들이 전개되어 있으므로 도로율이 비교적 높다. 남쪽의 상업지대인 종로5가와 접한 까닭에 동대문시장 등지에 생활근거지를 둔 주민이 많고, 서울대학교가 신림동의 캠퍼스로 이전하기 전까지는 서울대학교를 비롯하여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에 재학중인 대학생들의 하숙촌이기도 하였다.

 

지금의 효제동 지역은 대학로 주변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 소규모 상가지역과 서민층 주택가로 구성되어 있다. 효제동을 둘러싸고 대학로와 종로5,6가 큰 도로, 그리고 율곡로 등이 교차하고, 지하철1호선과도 가까와 교통은 매우 편리한 지역이나 인근에 위치했던 서울대학교의 이전, 강남지역의 급속한 발전에 따른 인구이동 등과 관련하여 인근의 충신동과 마찬가지로 동세(洞勢)가 크게 늘어나지 않는 지역이다.

 

쇼핑재미와 먹을거리의 다양성 종로 5.6가동

1호선 종로5가역(4번 출구) → ① 백제약국(김상옥길) 먹자골목 → ② 열혈의사 김상옥 항일 시가전 및 자결지 → ③ 구 정신여학교 → ④ 보령약국(약령길) 먹자골목 1호선 종로5가역(5번 출구) → ⑤ 청계천 상가 및 골목 (종묘상가 등산용품 및 천막상가 철공상가 군용품상가 신진시장 생선구이 골목 헌책방 골목) 전태일 동상 → ⑦ 청계천 (버들다리 ~ 오간수문교 → ⑧ 오간수문지 및 가산터 → ⑨ 동대문 왕산로

 

17 종로 1,2,3,4가동 鐘路

 

중학동

88번지 일대에 조선시대 중등교육기관으로 4부학당의 하나인 중부학당(中部學堂)이 있었으므로 명칭이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 있었던 중학(中學)의 이름을 따서 지은 중학동은 삼청동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중학천과 백운동에서 시작하여 경복궁 앞으로 흘러내린 두 물이 마주치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물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있다.

 

중학교(中學橋)는 중학동 88번지 서쪽에 있던 다리로 중학 앞에 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다. 중학교중학다리로 불렀으며 근방에 형성된 마을은 중학교동(中學橋洞중학다릿골·중학동이라 하였다. 중학동과 세종로에 걸쳐있는 마을은 수문동(水門洞수문골이라 불렀는데 중학천으로 흘러들어가는 수문이 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며 지금은 공원으로 조성된 곳으로 정부합동 민원실이 있다.

 

박석고래 혹은 박석현이라 부르던 곳은 한국일보사 후문 쪽에서 율곡로쪽의 언덕과 이어지는 곳인데 진흙땅으로 비가 오면 질퍽해서 걷기가 힘들어서 박석(?)을 깔았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다. 동십자각 앞에서 안국동으로 이르는 길은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꽤나 높았던 고갯길로 소나무가 우거져 있으므로 송현(松峴), 솔고개라 하였다. 이곳 송현의 소나무가 얼마나 무성한가에 대해서는 경복궁좌강(左岡)의 소나무가 번성하고 있으므로 인근의 인가를 철거하라고 태조가 명령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길이 낮추어지고 넓혀진 것은 191111월 조선총독부고시 제78호 경성시구개수예정계획노선에 의해 폭12간으로 확장되면서이다. 박석고개의 동쪽에 있는 마을은 동골·동곡(東谷)으로 불렀는데 한국일보사에 해당된다.

 

송현동·사간동·중학동에 걸쳐있는 마을은 다락골 혹은 벽동(碧洞)이라 부르는데 율곡로 일부와 율곡로 북쪽에 도로에 면한 일대이다. 다락처럼 길가 깊숙한 곳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현재의 중학동은 북으로 사간동·송현동이 동쪽과 남으로는 수송동, 서쪽은 세종로가 둘러싼 곳으로 동의 서북쪽 모퉁이는 녹지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견지동

동명은 조선시대 중부 8방인 하나인 견평방에 있는 의금부에서 재판할 때 뜻을 굳게 가지고 일을 공평하게 처리한다는 의미에 따라 1914년 동명 제정 때 붙여졌다. 견지동을 이룬 자연부락은 동정동(銅井洞), 금부후동(禁府後洞), 도화동(圖畵洞), 빙고동(氷庫洞), 전동(典洞), 청석동(靑石洞) 등이며 경복궁·창덕궁 등 궁궐이 가까이 있는 관계로 인해 관청과 관련된 명칭이 많이 있다.

 

전의감(典醫監) 영문 앞에 있던 우물은 구리 벽돌로 쌓아서 물을 뜰 때마다 쇳소리가 나므로 구리우물이라 하였고 이를 한자로 고친 것이 동정(銅井)이며 동정이 있는 마을이라 해서 동정동(銅井洞구리우물골이라 하였다. 금부후동은 지금의 공평동 94번지 일대에 금부(義禁府)가 있었으므로 금부가 있는 뒷동네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금부뒷골이라고도 한다. 청석동은 청성동(靑城洞) 혹은 청석골이라 고도 하였다.

 

도화동은 회화(繪畵)를 맡은 관청인 도화서가 있으므로 도화동, 도화섯골이라 하였다. 빙고동은 빙고(氷庫)가 있었던 곳으로 빙곳골이라고도 하였다. 전동은 견지동 39번지에 전의감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동명이다. 전의감이라고도 불렀다.

 

견지동의 동쪽으로는 관훈동, 서쪽으로 수송동, 남으로 공평동, 북으로 송현동과 접해 있으며 우정국로가 동의 동서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우정국로는 종각에서 율곡로와 이어지는 폭 30m, 연장 550m로서 도로변에는 붓, 벼루, , 한지 등을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경운동

동명은 191441일 동명 개정때 경행방(慶幸坊)''자와 부근에 있는 운현궁(雲峴宮)''자를 따서 제정되었다. 경운동에는 몇개의 자연부락이 있다. 석정동(石井洞)은 운현궁 남쪽에 있던 마을로서 돌로 된 우물이 있어 돌우물골이라 하였다. 석정동은 이를 한자명으로 옮겨 부른 것이다. 교동(校洞)은 향교동(鄕校洞), 향곳골이라고도 했는데 교동은 경운동·낙원동·종로2~종로3가에 걸쳐 있는 마을이다. 한양의 향교가 있어 동명이 유래되었으며 향교동이라 불렀는데 줄여서 교동이 되었다.

 

경운동은 동쪽으로 운니동과 익선동이, 남쪽으로 낙원동이 있고, 서쪽으로는 관훈동이 있으며 율곡로를 경계로 북쪽에 안국동·재동이 있다. 경운동을 통과하는 율곡로는 동십자각에서부터 이화동 사거리를 거쳐 동대문에 이르는 가로명으로 폭 30m, 총연장 3,000m로 조선시대 때 경복궁과 창덕궁을 잇는 길이었다.

 

서린동

조선 건국 후 한양으로 천도하여 구획했던 행정구역 가운데 중부(中部) 8()의 하나인 서린방(瑞麟坊)의 방명을 그대로 동명으로 한 것이다. 서린동을 형성하던 옛지명 가운데 낭후(廊後사기전동(砂器廛洞주전동(紬廛洞백목전동(白木廛洞합동(蛤洞)등 시전과 직접 관련을 가진 것이 많다. 도성안의 시전(市廛)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커서 행세를 하였다는 육의전(六矣廛) 가운데 면포전(綿布廛목전(木廛지전(紙廛포전(布廛내외어물전(內外魚物廛)이 서린방 내에 있었던 것도 상업이 일찍부터 발달했음을 알게 해준다. 이는 도성의 중심지인 옛날 운종가의 남쪽에 위치하였으므로 상업지인 동시에 주거지로서의 기능 수행도 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서린동 일대에는 옛날부터 많은 시정인(市井人)들이 거주하여 궁핍하지 않은 생활을 영위하였고 조선말부터 일제 강점기에 걸쳐서는 기생들의 입주가 많아 기생촌으로 알려져 있으며 무교동(武橋洞)과 함께 음식환락가를 이루며 번창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서린동에는 예전부터 여러 개의 마을이 있는데 행랑뒷골이라는 낭후동(廊後洞)이 있으며 주석전이 있어서 이름이 붙은 주석전골·두석동이 있고 마을 모양이 방망이와 같다고 하여 방망잇골이라는 추동(椎洞)이 있다. 사기전이 있었던 사기전골이 있어 사기전동 또는 사기동이라 하였고, 서린동과 남대문로1가에 걸쳐 백목전(白木廛)이 있었던 백목전동(白木廛洞)이 있으며 전옥(典獄)이 있으므로 해서 전옥동(典獄洞전옥골, 그 뒤쪽은 전옥훗골·전옥후동(典獄後洞)이라고 하였다. 황토(黃土)마루를 깎아내려 세종로와 연결되는 큰 길이 생기자 그 인근에 마을이 생겨났다. 이 마을은 새로 만든 길가에 생겼다 하여 신작로동(新作路洞)이라 하였다.

 

특히 광화문 우체국 동쪽에는 혜정교(惠政橋)가 있었는데 그 서쪽에는 세종 때부터 해의 그림자를 보아 시각을 아는 앙부일귀(仰釜日晷)를 두었으므로 그 부근의 마을인 신작로동(新作路洞), 송교(松橋), 혜천(惠泉), 피마동(避馬洞), 낭후동(廊後洞)을 합하여 앙부일귀의 뜻을 딴 일영대계(日影臺契)라 하였다. 앙부일귀대는 1970년 지하철 1호선 공사로 탑골공원으로 옮겨 놓았다.

 

서린동과 남대문로1가에 걸쳐있던 마을은 장자우물이 있으므로 장자우물골 또는 부정동(富井洞)이라 하였으며 종로1가쪽의 서린동은 조개전이 있었으므로 합동 혹은 조개전골이라 하였다. 이 조개전골 뒤에는 담장이 붙어서 이어져 있으므로 병풍을 친 곳과 같다 해서 허병(許屛)이라는 마을이 있었고, 혜정교 근처 우물 주변의 마을은 혜천동(惠泉洞혜전골·혜전교우물골이라 하였다. 서린동 146번지에는 길가에 박고사우물이 있었는데 이 곳에서 고사를 지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근처 사람들이 해마다 고사를 지낼 때면 온 마을이 사람들로 붐볐다고 한다. 박우물이라고도 하던 이 우물 아래쪽 서린동 96번지는 안고사우물 또는 줄여서 안우물이라 불렀는데 박우물과 달리 집 안에 있었으며 박우물처럼 고사를 지내면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서린동은 북으로 종로를 사이에 두고 종로1가와, 동쪽은 우정국로를 사이로 하여 관철동과 남쪽은 청계천로를 경계로 다동·무교동과, 서쪽은 세종로를 경계로 하여 신문로1가에 싸여있다. 종로와 청계천 사이에 길게 형성된 서린동의 현재 모습에서 주거지역을 찾기란 매우 힘들고 근래에 조성된 재개발사업으로 고층빌딩이 대부분 자리잡고 있거나 사업이 추진 중이다.

 

돈의동

동명이 유래된 돈녕부지(敦寧府址)를 오늘날에 정확하게 고증할 수는 없지만 1914년의 동리명 제정시 신설된 돈의동 구역 대부분이 고종 때 돈녕계 돈녕동과 어의동계에 속하였던 것을 미루어 보아 적어도 영조 이래 돈녕부상계, 돈녕부하계의 영역 안에 들어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일설에 의하면 돈녕부가 익선동에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돈의동과 익선동의 경계부근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돈의동을 이룬 부락으로는 교동, 누동, 명주전골, 어의동, 장대장동, 한동 등인데 교동은 향교가 있기 때문에 붙여졌으며 향교동, 향골이라고도 한다.

 

명주전골은 한자로 옮기면 주동(紬洞)이 되는데 종로3·낙원동·돈의동에 걸쳐잇는 마을로 명주전이 있었기 때문에 동명이 유래되었다. 어의동(於義洞)은 어의궁이 있으므로 붙여졌고 한동은 한양동·한양골이라고도 부르고 누동은 다락골·다락우물골이라고도 한다. 장대장동은 영조 때 장군을 지낸 장붕익(張鵬翼?1735)과 그의 아들 태소(泰紹), 손자 지항(志恒지풍(志豊)과 증손자 현택(鉉宅)이 지금의 피카디리 극장 뒤편에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숙종이 홍봉한(洪鳳漢)에게 무숙공 장붕익이 어느곳에 사느냐고 묻자 홍봉한은 사람들이 이항복(李恒福)을 어성대감(禦城大監)이라 부르듯 무숙공은 장대장이라 부른다라고 아뢰었고 이에 숙종은 포도청 맞은 편 장붕익이 사는 곳을 장대장동이라 부르라는 명을 내리면서부터 유래가 시작된다.

 

또한 돈의동에는 의리가 두터운 채씨 형제가 살았기 때문에 동명 유래가 비롯된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서울에 살던 채제민(蔡濟民)이라는 젊은이가 평양으로 가서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하여 돌아올 노자마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가 숙소로 묵고 있던 주인집 딸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임을 눈치챈 집주인은 채제민이 서울의 양반이란 점에 끌려 데릴사위로 삼았다. 그러나 결혼 후 채제민이 하는 일 없이 매일 빈둥빈둥 지내자 장인은 그를 미워하기 시작하여 드디어 쫓겨날 지경에 이르렀을 때 후일 명재상으로 알려진 채제공(蔡濟恭)이 평양감사로 부임해왔다.

 

채제민의 장인은 감사와 사위의 성이 같으므로 아마 일가라도 되나 보다하고 사위더러 ", 이번 감사가 채제공이란 분인데 너 아냐?"하고 물었다. 이에 채제민은 "안다 뿐입니까. 제 사촌형님인데..."하고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그러자 장인은 깜짝 놀라면서도 사위를 내세우면 큰 이득이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사위에게 "그럼 뵈러 가야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전혀 본적도 없는 채제공감사를 안다고 큰소리를 친 채제민은 이 말에 ", 뵈러 가야지요, 하지만 이꼴을 하고 서야 갈 수가 있겠습니까? 의관도 준비하고 다른 인사치레도 준비를 해야 가지요"라며 옷을 만든다 무엇을 준비해야 한다면서 채제민은 평양감사를 만나러 가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급기야는 감사를 만나러가지 않을 수 없게된 채제민은 벌레 씹은 표정으로 관아 앞에 나아가 다짜고짜 울기 시작하였다. 관원들이 다가와 그 연유를 물었으나 감사를 직접 만나야만 대답을 하겠노라며 계속 대성통곡을 하였다. 문밖의 이러한 소란을 전해들은 평양감사는 채제민을 관아로 들게 하였다. 평양감사 앞에 앉은 채제민은 무조건 살려주십사하며 석고대죄를 하였는데 이에 당황한 감사는 "넌 어디서 온 누구인가?"라고 묻자 "서울에서 온 채제민입니다.""그래? 채제민이라 나하고 항렬이 같구나."하였다. 이말에 용기를 얻은 채제민은 우는 것을 그치고 "감사의 항렬과 이름이 같길래 정의 장인께 감사를 사촌형님이라 거짓말을 했으니 이 어찌 큰 죄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제 목을 치십시오"라 하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평양감사는 "게 무슨 소리냐, 네가 너의 사촌형이 되면 될게 아니냐. 좋다, 객지에서 동생하나 얻어서 좋고 너도 형을 얻어서 좋고..."그리고 내아로 가더니만 자기 부인보고 "여보, 내 사촌동생이요"하고 인사시키고 그 아들들에게는 채제민을 아저씨라 인사시켰다. 그리고는 ", 늬 장인하고 같이 오너라. 그래야 여기 있는 동안 편할 것 아니냐"하니 채제민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 뵙고 오느냐"하고 장인이 물으니 ", 뵙고 옵니다. 감사께서 장인도 뵙자고 하니 빨리빨리 갑시다"하며 급히 음식과 선물을 준비해 가지고 갔다. 그랬더니 감사 채제공이 버선발로 뛰어 나오면서 "사돈 어서 오십시오"라는 인사를 하고는 "애가 집을 나간지가 오랜데 생사를 몰라서 걱정을 했더니 이렇게 따님과 결혼까지 하였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하였다. 채제공이 평양감사 임기 동안은 채제민도 평양에서 잘 지내고 있다가 서울 내직으로 들어올 때 채제민도 따라왔다. 그리고는 지금 돈의동에다가 아랫채, 웃채 집을 짓고서는 웃채는 채제민이 살고, 아랫채는 채제공이 살아서 의를 두텁게 했다고 하여 돈의동으로 했다. 돈의동은 북으로 익선동, 동쪽은 묘동, 남쪽은 종로3, 서쪽에 낙원동에 접한 전형적인 도심의 주택지구이다.

 

관훈동

191441일 동명 개정에 따라 이전 관인방(寬仁坊)의 대사동(大寺洞), 청석동(靑石洞)의 각 일부와 훈동(勳洞)을 병합하여 방명이었던 관인방의 자와 훈동의 자를 따서 관훈동이라 하였다. 1914년 관훈동의 관할구역이 된 대사동 지역은 인사동과 관훈동에 걸쳐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탑골공원 자리에 큰 절인 원각사(圓覺寺)가 있어 댓절골, 또는 한자명으로 대사동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함께 편입된 청석동(靑石洞)은 지금의 관훈동과 견지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가 살고 있어서 청성동(淸城洞), 청성골이라 하였던 것이 변하여 청석골로 되었다.

 

영조 27(1751) 도성의 방어를 위해 주민자치 조직을 편성 기입한 수성책자(守城冊字) 도성삼군문분계홍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는 충훈부내계(忠勳府內契)가 있었으나 그 후로는 이름이 제외된 훈동(勳洞)은 충훈부(忠勳府)가 있었기 때문에 동명이 붙여졌는데 충훈붓골이라고도 하였다.

 

현재의 관훈동은 동쪽으로 경운동, 남쪽으로는 인사동, 서쪽으로 견지동과 접하여 북쪽으로 율곡로를 경계로 하여 안국동, 송현동과 마주보고 있다. 인사동길이 동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관훈동은 상업지구로서 인사동길의 양편으로 주로 골동품상가가 운집하고 있으며 인사동과 이웃하여 전통문화의 거리로서 관훈·인사동 전통문화의 마을축제라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관수동

191441일에 경성부제 실시에 따라, 이전 장통방의 입동, 비파동, 창곡동, 상판교의 각 일부를 병합해서 청계천의 유수(流水)를 관망(觀望)한다는 뜻에서 관수동이라 하였다. 관수동을 이룬 자연부락으로는 갓전골·도깨빗골·벙거지골·비팟골·웃너더릿골·작은갓전골·준천삿골이 있다. 이 가운데 도깨빗골은 관수동 91-1번지 한국전력 청계송전소가 있는 서쪽 첫째 골목으로 도깨비가 있었기 때문에 마을이름이 붙여졌다. 개화기 때 들어온 전기불을 흔히 도깨비불이라 하였으므로 한국전력의 변전소가 이곳에 처음 세워질 때 전기를 빗대어 도깨비라 하였다. 작은 갓전골은 관수동과 관철동 사이에 있는데 갓전골에 딸린 부락이어서 명칭이다. 1914년에 관수동이 될 때 병합된 입동(笠洞)일부는 종로2·종로3·관수동에 걸쳐 있던 갓전마을(笠洞)이었다.

 

창곡동은 벙거짓골이라고도 하는데 벙거지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파동(琵琶洞)은 비팟골 또는 비앗골이라고 하는데 관수동과 종로3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비파정(琵琶亭)이 있어 이름이 붙여졌다. 비파정은 관수동에 있던 정자로 매년 정월 대보름이 되면 청년들이 모여 돌을 가지고 편싸움을 하던 이른바 석전(石戰)장소로 남대문 밖 우수재, 동대문 밖 안감내, 신당동의 무당내와 함께 편쌈 터로 이름났던 곳이다. 관수동은 청계천의 유수(流水)를 관망한다는 뜻에서 붙인 동명으로 관수교라는 다리가 있었다. 이 다리는 고지도(古地圖)수선전도(首善全圖)서울지도에 교량표시가 보이지 않는다. 또한 관수동은 일제 때부터 중국인이 많아 거주한는 중국인가(中國人街)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현재 관수동은 상업지구로서 대부분이 상가와 유흥업소가 많다. 관공서는 없으며 관수동은 59번지에 서울극장이 있고, 91번지에는 한국전력 청계송전소가 있다. 관수동의 현재 위치는 동쪽으로 돈화문로를 경계로 하여 장사동과 마주보며 서쪽은 관철동과 북쪽은 종로3가와 남쪽은 청계천로를 경계로 중구 수표동, 입정동과 마주하고 있다.

 

종로1

동명은 보신각 종이 있는 거리의 첫머리에 있다 하여 붙여진 것이다. 지금 종로1가일대는 성내를 중심으로 하던 옛날 서울에 있어서 동서남북 4정문의 통로를 연결하는 십자가였던 만큼 조선 초기 한양천도 진작부터 수도 서울의 중심지 대시가로 되었으며 저녁에 인정(人定) 아침에 파루(罷漏)로 대종을 쳐서 도성의 입문을 개폐하게 하던 종루(鍾樓)가 세워진 후로는 이 거리를 종루십자가 또는 운종가(雲從街)로 불렀다. 지금의 종로의 명칭도 이 십자가상에 종로가 세워진 데에서 연유하였으며, 또 조선의 한양전도 후 세워졌던 종로는 지금도 위치와 명칭은 바뀌었을 망정 십자가로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남아서 세고(歲古)의 여운을 풍겨주고 있다.

 

종로1가는 조선시대에 시전상가(市廛商街)가 형성되었던 곳이므로 대부분 상업과 관련된 옛 지방이 많다. 주전동(紬廛洞)은 명주를 파는 전이 있고 일명 명주전골이라고도 하였다. 상사동(相思洞)은 청진동과 종로1가에 걸쳐있던 마을로 골목을 좁게 만들어서 사복사(司僕寺)에서 기르는 상사마(相思馬)가 암내를 맡고 뛰면 이 곳목으로 몰아넣고 붙잡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상삿골, 또는 상동(相洞)이라고도 불렀다. 두석동(豆錫洞)은 주석을 파는 전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주석전골이라고도 불렀고 세종로 근방에 있었던 마을이다.

 

외상사동(外相思洞)은 청진동과 종로1가에 걸쳐있던 마을로 상삿골의 바깥쪽이 되므로 바깥상삿골이라고도 불렀다. 허병동(許屛洞)은 서린동(瑞麟洞)과 종로1가에 걸쳐있던 마을이다. 피마동(避馬洞)은 큰 길을 가다가도 높은 사람의 행차를 멀리서 보면 말머리를 이 골목으로 돌렸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혜천(惠泉)골은 종로1가와 서린동에 걸쳐있던 마을로 혜정교(惠政橋)우물·두께우물·상삿골우물이라 부르던 우물이 있으므로 혜정교우물골 또는 혜천동으로 불렀다. 조개전골은 종로1가와 서린동에 걸쳐있던 마을로 조개전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한자로 합동(蛤洞)이라고도 하였다.

 

현재의 종로1가 동쪽은 종로2가와 연해있고 서쪽은 신문로1가와 접해 있으며 남쪽은 서린동, 북쪽은 청진동과 이웃하고 있다. 40m의 종로가 동면적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청진동쪽과 이웃하고 있는 부분만 상업지역으로 활용되고 있다.

 

익선동

익선(益善)이란 그 글자 그대로 '더욱 착하다' '더욱 잘한다'는 의미인데 중국의 한() 고조(高祖)가 명장 한신(韓信)에게 "그대는 군사를 얼마나 거느리고 잘 싸울 수 있느냐"고 물을 때 자신있게 "()은 다다익선(多多益善)입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익선동의 동명은 용병(用兵)이나 글자의 원래의 의미와는 전혀 관계가 없이 정선방의 익랑(翼廊)골에서 비롯되었다. 익선동의 옛 지명으로는 와룡동 161번지 앞에 다락우물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대를 다락골 또는 누동·다락우물이라 불렀다. 돌우물골은 석정동(石井洞)이라고 하는데 누동궁쪽에 돌을 쌓아올려 만든 우물이 있었으므로 마을이름이 연유되었다. 한동은 한양골·한양동이라고도 불렀는데 낙원동·돈의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고려 때 한양의 고을 터였기 때문에 명칭이 유래되었다. 한동의 아랫쪽 익선동을 아래 한양골 또는 하한동(下漢洞)으로 불렀는데 궁동(宮洞)과 돈녕동(敦寧洞) 사이에 낀 동네였다. 지금의 익선동 34번지와 166번지 가운데 위치한다.

 

궁동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사당인 누동궁(樓洞宮)이 익선동 166번지에 있었으므로 궁골·궁동이라 불렀다. 누동궁의 익랑(翼廊) 좌우쪽으로 줄행랑이 있었으므로 익랑골이라 하는데 익선동의 동명유래가 되었다. 익선동은 동으로 와룡동, 남으로 돈의동이 서쪽은 경운동과 낙원동이 둘러싸고 있으며 북쪽은 운니동과 접해 있는 전형적인 주택지구이다 .

 

 

운니동

동명은 이곳에 있는 운현궁과 니동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운니동의 동명 유래가 되는 니동(泥洞)은 익선동과의 경계가 되는 소로(小路)의 남쪽인데 영조 때 만든 도성지도(都城地圖)에는 이곳을 니동으로 표시하였으므로 이 길을 진골이라 호칭해오고 있는 사람도 많이 있다. 진골은 니동 뿐만 아니라 습동(濕洞)으로도 표기되는데 이는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서 표현되었던 것으로 보여지므로 니동으로 정착된 것은 영조 이후로 여겨진다.

 

교동국민락교 뒤의 고개는 비만 오면 땅이 몹시 질퍽거렸으므로 구름재 또는 운현(雲峴)으로 불렀는데 운니동 동명 유래가 된다. 서운관 남쪽의 고개이름이 운현이고 운현의 남쪽 근방 운니동 80·85·114번지 일대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살았으므로 인근의 지명을 따서 운현궁이라 하였다.

 

운니동은 북으로 안국로를 사이에 두고 가회동과, 남으로는 경운동, 익선동과 접해 있으며, 서쪽은 경운동, 동쪽은 와룡동과 둘러싸여있다. 동의 동쪽 지역은 주택가가 밀집되어 있으나 안국로에 면한 지역은 재개발사업으로 세워진 삼환기업사옥, 가든타워 빌딩이 있으며 동의 서쪽과 남쪽에는 덕성여대 및 운현궁이 보기 좋게 조화되어 있다.

 

예지동

인의동에서 종로4가를 지나 동남쪽으로 향하면 그 일대가 예지동인데 동학(東學)이 근처에 있으므로 유학의 대강(大綱)인 효제(孝悌), 충신(忠信), 인의(仁義), 예지(禮智)의 이름을 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예지동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옛마을로는 냇골 혹은 냇게라고도 하는 마을이 있었다. 이것은 청계천변에 위치하므로 냇가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며 냇골의 윗쪽에 자리잡은 마을은 상천변동(上川邊洞) 혹은 웃냇골·웃냇개라 하였다.

 

중구 주교동 146번지와 예지동 135번지 사이에는 효경교(孝經橋)가 있었다. 효경다리·효경교·효교(孝橋)라고도 불렸는데 동국여지승람』『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영풍교(永風橋)로 되어있다. 부근에 소경들이 많이 살아서 소경다리라 하던 것이 변해서 새경다리로 되었으며 도성지도(都城地圖)에서는 효경다리로 표기하였다. 서쪽 교각에 있던 정사금영개조(丁巳禁營改造)의 각자(刻字)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로 없어졌다.

 

석수방동(石手房洞)은 돌을 다듬는 석수방이 있으므로 이름이 붙여졌으며 석수방골이라고도 하였다. 하피마동(下避馬洞)은 아래피맛골이라고도 하였고, 옥방(玉房)이라고도 불렀던 옥방골에서는 비녀, 가락지고리 따위의 장식을 파는 옥방이 있었다. 중붓골이라고도 하는 중부동(中部洞)이 있었으며, 칠방동(漆房洞)은 칠을 하는 칠방이 있으므로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예지(禮智)라는 동 명칭의 유래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인의동의 (()와 함께 오상(五常)의 두 조항인 ()()를 취한 것이며, 이 부근 일대가 예로부터 큰 상가지대였던만큼 상권을 형성해나가는 데에도 특별한 예절과 지혜가 필요했던 것을 의미한다. 박제가(朴齊家)한양성시전도가(漢陽城市全圖歌)가운데

 

이현(梨峴)과 종루(鐘樓) 그리고 칠패(七牌)는 온갖 공장(工匠)과 상인들 많이도 모이는데 도성중(都城中)에서도 유명한 3대시장이라네. 일만물화(一萬物貨) ()를 따라 수레가 줄이었네.

 

라는 문장 중에서 이현시장은 배오개시장 혹은 배우개장이라고도 하였다. 동대문시장의 전신이 되는 이 배오개장은 인의동의 이현을 깃점으로 한 남측일대에 형성되어 있었는데 사람이 많고 차마(車馬)가 연이어 다니는 곳이었으므로 종루 앞과 남대문 밖 칠패시장과 함께 서울의 3대 시장으로 유명하였다.

 

예지동은 북쪽으로 종로4가와 동쪽은 종로5가에 접해있고 남쪽은 청계천로를 경계로 중구 주교동과 마주보며 서쪽은 장사동과 연이어 있다. 배오개시장이 있어 일찍부터 상권이 형성되었던 예지동에는 그 맥락을 이어 오늘날에도 광장시장과 귀금속, 시계 도매상가가 줄지어 있는 반면 거주인구수는 극히 적다.

 

훈정동

동명은 이곳이 원래 더운 우물물이었으므로 이를 한자로 옮긴데서 유래되었다. 훈정동의 동명은 종묘 앞 시민광장 안의 훈정동 66-5번지에 있는 더운 우물에서 비롯되었다. 어수(御水)우물, 한우물도 불리는 이 우물은 여름에는 물맛이 얼음처럼 차고 겨울에는 김이 무럭무럭 오르고 따스할 뿐만 아니라 달작지근하여 종묘대제(宗廟大祭)때에는 반드시 이 물을 길어서 사용했고 임금의 어수(御水)로 사용했기 때문에 명칭이 유래되었다. 크다는 뜻과 많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우물에서 한우물혹은 대정(大井)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는데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수량이 고갈되지 않고 홍수가 져도 넘쳐나는 법이 없이 일정한 수위를 지니고 잇는 것이 이 우물의 특징이다. 이 우물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을 훈정동·더운 우물골이라고 불렀다. 봉익동과 훈정동에 걸쳐있는 마을은 이 우물이 크다는 뜻에서 한우물골 대정동(大井洞)으로 불렀다. 한편 훈정동·인의동·종로4가에 걸쳐 있는 마을은 더운우물의 뒤쪽에 위치했으므로 뒤 우물골 또는 한자명으로 후정동(後井洞)이라 하였다.

 

훈정동은 종묘를 중심으로 하며 종묘와 관련된 옛 자연부락 명칭이 있다. 훈정동에 통합되었던 묘동(廟洞묘전동(廟前洞순라동(巡邏洞)이 그러한 예이다. 묘동은 지금의 묘동·봉익동·훈정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써 대()묘인 종묘가 있으므로 대못골이라 하며 한자로 표기하는 것이 대묘동(大廟洞)이고, 이를 줄여 묘동이라 하였다. 묘전동은 대묘 앞에 있던 마을이므로 대묘앞골, 한자명으로 묘전동이라 하였다. 순라동은 원남동과 훈정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 종묘를 순찰하는 순라청이 있었으므로 순랏골, 술랫골 또는 순라동이라 한 것이다.

 

이 밖에 훈정동에 있던 옛 자연부락은 비석동(碑石洞)이 있다. 훈정동과 인의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 종묘 입구에 해당되기 때문에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었기 때문이며 비선골이라고도 한다. 훈정동은 종묘와 종묘 앞 시민광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쪽으로 원남동과 인의동이, 남쪽은 종로3가와 종로4, 서쪽은 봉익동과 권농동으로 서로 접하고 있으며 북쪽은 율곡로를 경계로 하며 와룡동과 마주보고 있다. 1966년 종로3가의 초가지붕 개량을 시작으로 종묘 앞 훈정동 일대에 대한 지붕개량상업이 진행되면서 면모를 일신하기 시작하였는데 종로와 청계천에 걸친 세운상가가 들어서면서 종묘 앞 지역은 상업 중심지역으로 변모하였다.

 

종로3

동명은 종로에서 세 번째의 거리가 된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종로3가는 조선시대 여러 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엇으나 지금은 그 위치를 일일이 확인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종로3가는 종루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므로 이와 관련된 시전상점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고 지명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명주전골은 종로3·낙원동·돈의동에 걸쳐있던 마을로 명주전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주동(紬洞)이라고도 하였다. 벙거짓골은 종로3·관수동·장사동에 걸쳐있던 마을로 벙거지전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모곡동(帽谷洞)이라고 하였다.

 

행랑뒷골은 종로3가에서 6가까지 행랑을 지었는데 그 뒤에 있던 마을인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웃너더리는 장사동(長沙洞) 근방에 있던 다리로 너더리 윗쪽에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상판교(上板橋)라고도 하였다. 아랫너더리는 너더리 아랫쪽에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하판교(下板橋)라고도 하였다. 널우물골은 널로 짠 우물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인데 일명 판정동(板井洞)이라고도 하였다. 종로3가의 현 위치는 동쪽은 종로4가와 연해있고 서쪽은 종로2가와 접해 있으며 남쪽은 관수동·장사동과 이웃해 있고 북쪽은 돈의동, 묘동, 봉익동과 접해있다. 동의 한가운데를 동서로는 종로가, 남북으로는 돈화문로가 교차하므로 교통이 편리하다. 종로를 중심으로 남북 양쪽으로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권농동

191441일 동명 개정에 따라 이 곳에 있던 채소재배를 권장하는 농포서(農圃署)의 이름을 따서 권농동이라 하였다. 권농동은 농포동, 마동, 수문동, 숭문동이 모여서 이루어진 동명인 만큼 농사와 관련이 깊다. 농포동은 돈화문 밖 동쪽에 궁중에서 필요한 내농포(內農圃)가 있어서 붙여진 동명인데 농포안이라고도 하고 농파니라고도 불렀다. 지금 창덕공원으로 조성된 일대가 농포안이었다.

 

마동(麻洞)은 마전골 혹은 마전동(麻田洞)이라고도 하는데 와룡동, 봉익동, 권농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대략 권농동 185~190번지 일대가 된다. 창덕궁에서 흘러내린 물이 종묘전교(宗廟前橋)와 파자교(把子橋) 사이로 들어가므로 냇가의 폭이 넓고 반석도 많았다. 이 때문에 빨래터로 최적이어서 끊임없이 마전을 하였는데 한자로 쓴 마전(麻田)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수문골은 권농동과 와룡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대략 두 동의 경계부근이 된다. 창덕궁에서 종묘 쪽으로 흐르는 냇물의 아랫쪽에 창살같이 한 문을 달아 놓았으므로 수문동(水門洞) 혹은 수문골이라 하였다. 승문원골은 승문원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농포동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 주인공의 성장배경 장소로 설명되었다. 창덕궁과 창경궁, 종묘 사이에 위치한 농포동은 북촌 양반들의 출입이 무상했기 때문에 양반사회의 부조리를 파악하기 쉬운 곳이었다. 또 일설에는 홍길동전의 저자가 이곳에 살았다고도 한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은 재질이 뛰어나고 학식이 풍부하나 재상집의 서자로 태어난 까닭에 천대가 심하므로 집을 나가 활빈당(活貧黨)의 괴수가 되어 탐관오리와 토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못살게 하고 억울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다가 나중에는 먼 섬으로 나가서 왕이 되었다는 것이 소설의 줄거리이다. 권농동은 동쪽으로 훈정동의 종묘와 남쪽은 묘동, 서쪽은 와룡동과 접하며 북쪽은 와룡동의 창덕궁과 접하고 있어서 도심에는 보기 드물게 숲속에 싸여 있는 동으로서 폭 30m, 총연장 3,000m의 율곡로가 통과한다.

 

봉익동

종묘와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다. 태묘(太廟대묘(大廟)라고도 부르는 종묘(宗廟)와 담을 같이 하므로 일대의 동네를 대묘동·대묘골이라 하였고 종묘 앞으로 흐르는 큰 개울가의 넓은 반석은 빨래를 하는 마전으로 이용되었으므로 마전이 잇는 동이라 하여 마전동(麻田洞)이라 했는 데 줄여서 마동(麻洞)이 되었다. 대정동(大井洞)은 큰우물이 있으므로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봉익동의 봉익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왜냐하면 조선 초기 한성부 552방과 갑오개혁 이후 5() 47()에 속한 동()이나 계()의 이름에서도 이와 유사한 명칭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봉익이란 흔히 봉황새의 날개를 말하고 봉()은 임금을 뜻하기 때문에 봉자(鳳字)가 붙은 지명이라면 왕궁의 소재지나 제왕의 주거지를 연상하게 된다. 즉 종래 동양에서는 용()과 봉()을 신령한 동물로 인정하고 비범한 인물을 용봉지재(龍鳳之材)라 하였으며, 제왕이 앉는 의자를 용상(龍床), 제왕이 거처하는 궁궐을 봉궐(鳳闕)이라고 하였다. 또 의자의 주변에 용모양의 장식을 하고, 궁궐 문 위에 봉황을 새겨 놓기도 하엿다. 뿐만 아니라 궁궐의 좌우협문을 봉액(鳳腋)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이 봉익의 동명이 궁궐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종로3가 큰 길가에까지 나온 봉익동은 창덕궁과의 거리가 멀고 돈화문 앞에서 봉익동으로 나오는 중간에는 권농동·와룡동·익선동 등의 여러동이 있다. 그렇다고 하여 가까이 있는 종묘와 어떠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도 없다.

 

봉익동의 마동에는 조선초기부터 환관들이 많이 거주해 왔다. 환관이라 하면 성불구자인 남자로 오히려 육체적인 결함 때문에 궁녀들이 많은 궁중에 들어가서 시중을 들며 또 행세를 하기도 하던 이를테면 일종의 특수층 사람들이다. 환관이 이러한 특수한 지위에 있었던 만큼 그 친족이나 친지가 그들을 통하여 출세하기도 하였으며 출사(出仕)를 노리는 일부의 무리들은 이 환관들에게 간청하여 자기의 앞길을 열어 보려고 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환관의 존재와 같이 높은 곳에 붙어서 행세하는 것을 발봉익(發鳳翼) 곧 봉익의 날개에 붙어 다니는 물건이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광무제기(光武帝紀)용인부봉익(龍麟附鳳翼) 이성기소지이(以成其所志耳)에 어원을 두는데 용의 비늘에 매달리고 봉의 날개에 붙어서 자기의 뜻을 이룬다는 말이다. 옛날 환관들의 존재야말로 용이나 봉익과 같은 궁중세력에 붙어서 자기 분수 이상의 호사와 세도를 누리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봉익동의 동명은 동중의 환관 세거(世居)의 사실을 의미하여 그렇게 제정한 것으로 보여진다.

 

환관은 남자 내관으로 일명 환자(宦者환시(宦侍내시(內侍) 등이라고도 하며, 그 기원은 중국에서 비롯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에 환수(宦竪)라는 기록이 보이며, 고려·조선시대를 통하여 왕의 측근에서 많은 폐해와 물의를 자아내었다. 고려 초에는 대간(臺諫)의 직능에 통제력이 강하여 환관은 다만 궁중의 잡무를 담당하는 남반(南班) 7품의 제한된 지위만 가지고 있었으나 몽고의 지배에 따른 무질서한 왕권의 전제가 대두되자 차츰 그들의 지위가 향상되어 원종 때에는 국정에 참여하였고 충렬왕 이후에는 몽고에 갔던 환관이 사신으로 귀국하면서 원나라를 배경으로 한 행패가 심하여 내시부(內侍府)까지 설치되었다. 공민왕 5(1356)에는 환관직을 고쳐 내상시(內常侍내시감(內侍監내승직(內承直내급사(內給事궁위승(?계관령(溪官令내담사(內擔事) 등을 두었다가 내시부를 설치하였다. 환관들은 점차 대간의 권한을 몰아내고 왕의 측근에서 권력을 잡아 정치에 간섭하는 한편 대토지를 소유하는 등 정치적·경제적 질서를 문란하게 하였다. 내시부는 우왕 때 폐지하였다가 공양왕 때에 다시 두었다.

 

환관은 본래 선천적이거나 또는 특수한 사정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거세된 자로서 천민계급에 많았으나 그들의 득세에 따라 왕의 옹호하에 권력과 부귀를 위하여 스스로 환관이 되는 이가 많아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제도를 따라 내시부를 두고 궁중내의 식사의 감독 명령의 전달, 대궐문의 수직(守直) 및 소제 임무 등 잡무와 염습(殮襲하광(下廣)의 일을 맡아보게 하였으나 그 임용에 제한을 두어 일반 관직과 구별하고 단속을 엄히 하여 고려 때와 같은 큰 폐단은 없었다. 그러나 왕과 왕비 가까이 있으므로 이를 이용한 청탁이나 뇌물을 받아 부정한 재화를 쌓는 일은 불가피하였으나 명나라의 요구로 발탁되었던 환관이 귀국한 후에 부당한 요구를 강요하고 친척에게 축재를 시키는 일은 계속되었다. 환관도 처첩을 거느렸으며 그들에게는 이성(異姓)의 양자(養子)도 허락되었다.

 

조선시대 내시부의 정원은 140명으로 종2품의 상선(尙膳)이외에 상온(尙瑥상다(尙茶상락(尙樂상전(尙傳상책(尙冊) 등의 내시직명이 있으며, 영조 때는 내시를 가르치던 내시교관 2명이 있었으나 정조 때 폐지하고, 대전장번(大殿長番대전출입번(大殿出入番왕비전출입번·세자궁출입번·빈궁출입번을 두었다. 환관제도는 갑오개혁을 계기로 철폐되었다. 아동문학가 어효선(魚孝善)은 봉익동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봉익동에는 장씨성을 가진 사람이 경영하는 큰 양조장이 있었는데 그는 동네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다. 이 집에서는 큰 길가에 세물전(貰物廛)을 벌여놓았다. 세물전이란 혼인이나 장사 때에 쓰는 물건을 세를 받고 빌려주는 가게이다. 그때는 대개 혼인이나 환갑잔치도 집에서 했으므로 대청 마루 끝에 마루를 덧대어 넓히고 뜰에 차일을 치고 손님을 치렀다. 이 집에서는 새색시가 타는 꽃가마·꽃족도리·활옷·비녀·낭자·목기러기·촛대·병풍·돗자리와 같은 따위와 신랑의 사모관대·목화 따위와 교자상·대접·탕기··접시·목판 등 그릇을 빌려주는 것은 물론이고 장사지낼 때는 송장을 상여에 실어 무덤까지 날랐다.

 

그 시대의 서울 사람들 가운데 이 집의 물건을 세내어 쓰지 않은 집은 거의 없었고, 이 집 양조장에서 만든 술을 안 사다 쓴 잔치도 없다고 할만큼 봉익동의 세물전은 장안에서 유명하였다. 이 세물전 건물은 함석 지붕을 덮은 이층집이었다. 이러한 봉익동은 6.25동란 직후에 한동안 적선구역(赤線區域)인 사창구역(私娼區域)이 되었으나 지금은 도시 재개발계획으로 인한 변화로 이러한 것들은 없어지고 도심지 속의 주택가를 이루고 있다.

 

봉익동은 북으로 권농동이, 동쪽으로는 훈정동, 남쪽으로는 종로3, 서쪽은 묘동으로 둘러싸인 긴 사다리꼴 모양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묘동과 종로3가가 상가지대라면 봉익동은 비교적 대로변을 벗어난 주택지구에 해당되는데 종묘의 담장을 끼고 경계가 이루어져 있으므로 공기가 맑다.

 

인의동

성균관의 아랫쪽에 있고 사학(四學)의 하나인 동학(東學)이 있으므로 유학의 대강인 효제(孝悌), 충신(忠信), 인의(仁義), 예지(禮智)의 이름을 따서 인의동이라 하였다. 인의동은 여러 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다. 가정동(嘉井洞)은 더운우물 부근에 작은우물이 있었으므로 개우물골이라고도 부른다. 연지동에 걸쳐 있는 곳은 연지골, 훈정동에 걸쳐 있는 지역은 후정동(後井洞)이라 부른다. 등자리(登子厘) 있는 마을은 등자동(登子洞등자전골·등잣골이라 불렀다. 한편 28번지와 이현궁지 일대는 대한제국시대의 보병연대가 자리 잡았다. 이중 28번지 일대는 후일 주택지구로 분할되었으므로 새로 생긴 터라는 뜻으로 생긴 터라는 뜻으로 새터 신기동(新基洞)으로 부른다.

 

인의동·종로4·예지동에 걸쳐 있는 마을은 배오개가 있으므로 배오개 혹은 이현(梨峴)이라 하였다. 배오개는 도깨비고개·백고개·백채·배고개·이현 등의 이름으로 부르는데 인의동 112번지 동쪽에 있던 고개로 지금의 배오개 길이 지나는 곳이다. 예전에는 숲이 많아서 짐승과 도깨비가 많았으므로 도깨비고개라 했는데 대낮에도 혼자서 넘기가 힘들어 백명을 모아야만 넘는다 해서 백고개·백재라 하였다. 백채로 음이 변했다가 배고개 되었으며 다시 배오개로 되었다. 일설로는 도깨비고개 입구에 배나무가 여러그루 심어져 있기 때문에 배나무고개·이현이라 불렀다고 한다.

 

인의동은 동으로 연지동, 남으로는 종로4, 서쪽의 훈정동, 북쪽으로 원남동이 연접해 있으며 동의 남북으로 배오개길이 지나고 있다. 동 면적의 2/3정도가 대한제국 때 보병 제59연대가 주둔했던 지역이어서 주택가는 북쪽으로 형성되어 있다.

 

인사동

조선시대 중부 관인방(寬仁坊)자와 대사동(大寺洞)자를 취하여 지어진 것이다. 한경지략2 각 동조를 보면 대사동은 곧 탑사동(塔寺洞)인데 옛날에는 원각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석탑만 남아 있다라고 하였다. 한경지략은 순조(1801~1834)연간에 지어진 책인데 이 때에는 대사동과 탑사동으로 혼용하여 불리워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여러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된 인사동은 대사동에서부터 동명 유래가 되는데 댓절골·사동 등의 이름으로도 불려졌으며 지금의 인사동과 관훈동 사이에 걸친 마을이다. 큰 절인 원각사(圓覺寺)가 있었으므로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 향정동(香井洞)은 향우물골·향나무우물골·상우물골로도 불렀는데 우물 옆에 향나무가 있었으므로 명칭이 유래되었다. 이문동(里門洞)은 인사동·종로2·공평동에 걸쳐있는 마을로 222번지에 순화궁(順和宮)의 이문이 있어서 마을 이름이 붙었으며 이문안이라고도 하였다.승동(承洞)은 인사동과 종로2가에 걸쳐 있는 마을이고 그 옆으로는 수전동(水典洞), 승동이 북쪽에는 과부 다섯명이 살았다는 오과붓골이 있었다. 낙원동과 인사동에 걸쳐 있는 부락은 원골 혹은 원동(園洞)이라 하였다.

 

인사동을 탑동(塔洞사동(寺洞탑사동(塔寺洞)이라는 명칭으로 오랫동안 불러왔던 것은 대광명전(大光明殿)을 비롯하여 400여칸 규모의 원각사에 딸린 석탑이 유명했기 때문이다. 탑골공원에 현존하는 이 석탑은 원각사가 낙성된 후에 세워졌고 이때부터 대사동이라는 동명보다 탑과 관련된 동명으로 불려졌던 것이다. 인사동은 동으로 낙원동, 남으로 종로2가와 서쪽의 공평동, 북쪽의 관훈동과 서로 접해 있다. 인사동길과 태화관길이 서로 교차하는 인사동은 동의 서쪽을 재개발하여 상업업무 중심지역이 되었다.

 

묘동

이곳이 조선왕조 역대왕 및 배위(配位)의 신위(神位)를 봉안하고 제사드리는 종묘(宗廟)에서 가깝다는 데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1441일 동명 제정시 누동·마동·묘동의 각 일부를 합하여 수은동(授恩洞)으로 하였다. 이때의 동명은 강제로 한국을 병합한 일제에 대해 반감을 갖는 한국인이 많았으므로 민심수습을 위해 소위 은사금(恩賜金)이란 명목으로 각 계층의 사람들에게 돈을 주며 기술을 가르치던 은사수산장(恩賜授産場)이 있었으므로 붙여졌다. 또한 1955418일 동설치 조례에 따라 동장관할 구역의 행정동제를 실시하여 묘동은 훈정동·봉익동 일원과 함께 신설된 대묘동사무소의 관할에 속하였다. 이 때의 동명은 종묘(宗廟)를 태묘(太廟) 혹은 대묘(大廟)라 하였으므로 그의 명칭에서 유래되었다.

 

묘동을 이룬 누동(樓洞)은 다락골, 다락우물골이라 하는데 다락우물이 있어서 명칭이 유래되었다. 마동(麻洞)은 묘동에서 봉익동으로 흐르는 시냇가에 형성된 마을로 마전터가 있기 때문에 붙여졌다. 묘동은 북으로 익선동과 권농동, 동쪽은 봉익동, 남쪽으로 종로3, 서쪽은 돈의동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동의 한가운데로는 남북으로 돈화문로가 동서로는 폭 12m의 도로가 지나고 있다. 돈화문로를 중심으로 길게 상가지역이 형성되어 있다.

 

낙원동

191441일 동명 제정에 따라 이전 중부 경행방 교동, 탑동, 어의동, 주동의 각 일부와 정선방의 한동과 관인방의 원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시내 중앙의 낙원지라 할 만한 탑골공원이 있으므로 낙원동이라는 동명이 새로 생겨난 것이다. 낙원동은 서울의 북촌(北村)에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궁궐과 관련이 깊다. 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서울의 중심 지역으로 되어 온 곳이기도 한다. 교동(校洞)은 경운동과 인접지역인데 낙원동 280번지에 향교(鄕校)가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향교동 혹은 향곳골이라고도 하며 낙원동 271~283번지 일대이다. 원동(園洞)은 인사동과 낙원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원골이라고도 부른다. 탑동(塔洞)은 탑골이라고도 부른다. 한동(漢洞)은 한양동(漢陽洞한양골이라고도 부르는데 낙원동·익선동·돈의동에 걸쳐 있는 마을이다.

 

고려 때 한양에 남경(南京) 정하고 이궁(離宮)까지 설치했는데 이 일대가 한양고을의 중심이 되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조원경(趙元卿)이 이곳으로 옮겨와 일가를 창립하면서 한양조씨(漢陽趙氏)를 이루었다고 하여 한양조씨 창업터라고도 한다. 창씨(創氏)를 했다는 증빙이 남아있는 흔적은 없으나 옥호가 한양으로 된 음식정과 가게의 상호에서 그 연관성을 짐작해 볼 뿐이다.

 

현재의 낙원동 지역은 서울의 중심지인 상업지역으로서 유흥음식점들이 많은 편이다. 북으로 경운동, 익선동이, 동쪽으로 돈의동이 서로 접하며 남쪽으로 종로2가와, 종로3, 서쪽으로 인사동으로 둘러싸여 있다.

 

관철동

191441일 동명 개정에 따라 중부 장통방의 청포후동, 혁전후동, 염동, 동곡, 입동의 각 일부와 장교동, 관자동, 정자동을 병합하여 관자동(貫子洞)자와 철물교(鐵物橋) 자를 합하여 관철동이라 하였다.

 

관철동의 동명을 가져오게 한 관자동(貫子洞)은 금···뼈로 망건 당줄을 꿰는 고리인 관자를 파는 전이 있어 관잣골 또는 한자명으로 관자동이라 하였다. 또 철물교(鐵物橋)는 종로230번지 동남쪽에 있던 다리로 계동, 재동 방면의 물이 관훈동, 인사동을 거쳐 남쪽으로 흘러서 장통교(長通橋) 아래로 흘러 들어가는 중간으로 지금의 종로2가를 건너는 다리인데 통운교(通雲橋)라고도 하였다. 주변에 철물전(鐵物廛)이 많았기 때문에 철물전교 또는 철물교, 줄여서 철교라고도 하였다. 이는 영조 때에 발행한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門分界之圖)(일명 漢城圖)를 비롯하여 여러 고지도에도 모두 속명인 鐵物橋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 순조 연간에 만들어진 한경지략(漢京識略) 에도 계생동의 여러 개천물이 흘러 통운교를 지나 영풍교(永豊橋)에 이어진다. ····통운교는 대사동 입구에 있는데 홍석교(虹石橋)로 지금은 철물교라 일컫는다. 고 하여 청운교(淸雲橋)에서 통운교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대동지지(大東地志)로 변했는데 다시 철물교라 바뀌어지게 되었다.

 

관철동은 철계천이 동의 남변(南邊)을 지나고 있기 때문에 옛부터 크고 작은 여러 다리로 청계천을 건넜다. 철물교 이외에도 관철동 11번지와 중구 장교동 51번지 사이에 놓인 다리는 장찻골다리 혹은 장통교(長通橋장교(長橋장창교(長倉橋)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다리의 서쪽 기둥에 신미개조(辛未改造)」「을해개조(乙亥改造)의 여덟글자를 새겨 놓았다.

 

철물교와 장교는 모두 석교(石橋)이나 토교(土橋)목교(木橋)의 형태로 곳곳에 놓여졌던 다리는 장마로 개천물이 불어나거나 일시적인 폭우로 인하여 유실되는 경우가 허다하였고 또 제대로 보수 관리하지 못하여 붕괴되는 일도 많았다. 그러나 1958년부터 시작된 청계천 복개공사로 이들 교량이 설치되었던 곳은 모두 아스콘포장으로 되어버렸으므로 그 정확한 위치를 고증할 수 없음이 아쉽다.

 

관철동에는 시전(市廛)과 관련된 자연부락명이 많이 남았다. 갓전골·관잣골·소금전골·신전뒷골·청포뒷골 등이 그것이다. 그외에도 골목이 괭이처럼 생겼다 하여 괭잇골, 미친 아기씨가 살았으므로 붙여진 동명인 미친아기씻골, 골목 모양이 ""자로 되었으므로 정자골 혹은 정자동(丁字洞)이라 하였으며 장통교 북쪽에는 골목이 매우 길었다 하여 붙여진 장찻골·장교동(長橋洞)이 있다. 또 관철동과 종로2가에 걸쳐 있는 마을로 거리가 몹시 더러워서 똥골이라 했던 곳은 한자로 동곡(東谷) 으로 썼다.

 

한편 이 지역에 일찍부터 상권이 형성되었던 까닭은 육의전(六矣廛)이 있는 종루가(鍾樓街)이기도 했거니와 관수동 지역에 걸쳐 조정의 하급관리인 역관(譯官의원(醫員일관(日官화공( )과 이들하고 연결된 상인들의 집단 거주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웃한 서린동에는 상민들의 감옥인 전옥서(典獄署)가 있었고 이곳에 수감된 죄수들의 식량을 자급자족한다는 미명과 옥졸들의 살림을 보탠다는 이름아래 수감죄수들이 짚신을 삼아 내다 판 곳이 바로 관철동의 혜전(鞋廛)이었다.

 

따라서 관철동은 궁중 납품상인인 육의전과 죄수의 물품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특히 생활필수품인 소금··관자·청포·짚신상점이 이 일대에 모여 있었던 것은 청계천 건너 삼각동·수표동이 서민집단 거주지역이었던 까닭이다. 갓전골은 관수동의 갓전골과 이어져 있었으며 관잣골은 장찻골 서쪽에 있는 마을이었다.

신전뒷골은 관철동과 종로2가에 걸쳐 있는 마을로 신전의 뒤쪽에 위치하므로 신전뒷골 또는 혁전후동이라 하였고, 청포후동은 종로2가의 청포전 뒤에 있는 마을이므로 붙여졌으며 청포전뒷골이라고도 하였다.

 

소금전골은 염동(鹽洞염수전(鹽水廛)골이라고도 하였는데 종로275번지와 관철동 15번지 일대이다. 조선시대에는 소금이 국가 전매용품이었으므로 간혹 소금전골에서는 암거래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새벽부터 소금을 사려고 소금전 앞에는 줄지어 사람들이 서 있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개중에는 시전상인에게 슬며시 웃돈을 주어 정량보다 많은 양의 소금이 매매되는 경우도 있었다. 장마철이 되어 소금의 유통이 여의치 않거나 봄·가을철의 소금 수요가 급증할 때는 소금전 상인은 이같은 방법으로 과외로 돈을 벌 수 있었다.

 

또한 도성(都城)의 중앙 상가지대에 위치했던 까닭에 옛부터 시전상인들의 거주지가 되기도 했으며 일제 때는 여관과 기사(妓舍)가 있는 동리(洞里)로 유명하였다. 관철동의 모습은 대중음식점, 유흥음식점, 다방업 등의 식품접객업소가 밀집해 있어서 젊은층의 만남의 장소로 손꼽히고 있다. 보신각 주변에 심어진 과일나무는 서울을 풍요롭고 아름다운 거리로 만들기 위해 시도된 것으로 사과나무가 심어져 있어 도심 가운데 농원의 느낌을 갖게 해준다. 특히 종로2가 뒷길에는 한 때 많은 입시학원이 모여 있었으므로 이 일대가 재수생 골목 또는 학원골목이라는 오명(汚名)도 가진 적이 있었다.

 

관철동은 서울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교통이 매우 좋으며 지하철 1호선 구간의 종각역이 동 경계선 위에 위치하고 있고, 관철동 10번지에 있는 삼일빌딩은 건축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높은 빌딩으로 손꼽았다. 관철동 43번지에 관수파출소가 있으며 주거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교육기관은 없다. 관철동은 동쪽으로 관수동과 서쪽으로는 서린동과 마주보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청계천로가 경계되어 있고 북쪽으로는 종로2가와 맞닿아 있다.

 

공평동

동명은 중부 견평방(堅平坊)의 전동(典洞), 금부후동(禁府後洞), 발리동(鉢里洞), 이문동(里門洞)의 각 일부와 괴동(槐洞)을 병합하여 견평방에 있는 금부(禁府)에서 공평하게 재판을 처리하다는 뜻을 따라 1914년 동명 제정 때 붙여졌다. 공평동 지역은 옛날의 운종가 즉 종루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지금도 그 남쪽 종로2가의 지역이 상가로 번창하고 있지만, 공평동은 옛날부터 종로 시전의 일부분으로 유명하였다. 옛날의 동계(洞契)관계를 보더라도 발리전계(鉢里廛契)에 바리동이 있고, 어물전계(魚物廛契)에 이문동(里門洞)과 후동(後洞), 향정동(香井洞), 수전동(水典洞), 승동(承洞)이 있었는데 이들 동()중에 바리전, 즉 유기전이 있다 하여 이름하였던 바리등이나 어물전계에 속하였던 전동(典洞), 이문동 등은 현재의 종로2가의 구역과 양분되어 있다.

 

주단전(綢緞廛)이 전의감동 입구 동서 양쪽에 있는데 곧 종루가 북쪽의 약 42방 지점으로 중국 비단·색비단 등을 판다. 내어물전은 이문의 동서 양쪽에 있고 각종 건어물을 판다. 유기전은 바리전이라고도 하며 내어물전 서쪽 행랑 뒤에 있고 각종 유주기명(鍮鑄器皿)을 판다. 은면전(銀麵廛)은 전의감동 입구 동쪽에 있다. 모전(毛廛)은 속칭 우전(隅廛)이라고도 하는데 길 모퉁이에 설치되었으므로 그 이름이 연유되었고 토산과실을 판다.

 

그런데 이들 시전은 모두 종로2가 이북이며 공평동 이남의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공통성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이 지역에 상권이 형성되자 이들 시전을 검찰하기 위한 경시서(京市署)1392년 공평방에 설치하였다. 1466년에는 평시서(平市署)로 명칭이 바뀌어졌는데 시전에서 사용하는 척((저울과 물가의 등락을 관할하였다.

 

경시서의 관원으로는 영(주부(主簿직장(直長봉사(奉事) 등이 있었으며 전체적으로는 서원(署員) 5, 고직(庫直) 1, 사령(使令) 11명이 있었는데 고종 31년에 폐지되었다. 공평동에는 괴동(槐洞) 혹은 회목동(檜木洞회화나뭇골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회화나무가 있어서 동명이 붙여졌다. 공평동·청진동·견지동에 걸친 마을로 의금부(義禁府) 뒤쪽에 있었던 금부뒷골은 금부후동이라고도 하였다. 공평동 5번지에 중앙집산장이라는 시장이 있었던 것도 이 일대가 일찍부터 상권이 형성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공평동 일대는 도심지의 재개발사업에 따라 옛 건물들이 헐리고 대신 큰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데 의금부자리에는 제일은행 본점을 비롯하여 공평빌딩·한미빌딩 등 크고 작은 업무용 빌딩들이다. 다양한 상가와 관광회사들이 즐비하며, 명보아트홀이라는 극장이 새로 개관되어 영화관람객들로 붐비고 있다.

 

이러한 공평동은 인사동과 낙원상가 또한 명동 입구로 가는 길목이 되므로 많은 차량과 사람들의 통행으로 항상 붐비고 있다. 30m, 연장 550m의 우정국로와 폭 15m, 연장550m의 삼봉길, 8m, 연장720m의 태화관길이 서로 교차하고 있으므로 공평동과 사통팔달한 교통로임을 대변해준다. 공평동의 위치는 동으로 인사동, 서로는 청진동과 접해 있고 북쪽은 삼봉길과 태화로를 경계로 하여 견지동과 마주보며 남으로는 종로를 경계로 서린동, 관철동과 마주한다.

 

장사동

청계천 쪽의 사토(沙土)가 장사형(長蛇形)을 이루었으므로 그 뜻을 따서 장사동의 동명이 생겨났다. 서울을 동서로 관통하는 개천(청계천)변에 위치한 동시에 돈화문(敦化門)앞을 흘러내려오는 하천이 청계천으로 유입되는 어구에 자리잡은 장사동은 이와 관련된 옛지명이 많다.

 

장사동 20번지 서북쪽의 다리는 웃너더리 또는 상판교(上板橋)라 했으며 84번지 서북쪽 다리는 아래너더리 또는 하판교(下板橋)라 하였다. 중구 입정동 5번지와 장사동 20번지 청계천 사이에 놓였던 다리는 새로 놓은 다리라 하여 신교(新橋새다리라 불렀다. 이 다리 부근에는 화류장을 전문으로 만들어 장농집이 있으므로 화류교(樺榴橋)라고도 하였는데 음이 변하여 하리곳다리 하랑교(河浪橋하교(河橋화교(花橋)등으로도 불렀다. 장사동 148번지 아세아극장 앞 청계천에 놓았던 다리도 신교라 불렀는데 두 개의 신교 가운데 하랑교로 불려지던 것이 더 먼저 건설되었다. 또 장사동 55번지 동북쪽의 다리는 두껍다리라 했는데 다리의 두께가 두꺼우므로 명칭이 붙었던 것을 한자로 고치면서 섬교(蟾橋)라고도 불렀다. 중구 주교동 146번지와 예지동 135번지 사이에 놓였던 다리는 영풍교(永豊橋효경교(孝經橋효교(孝橋효경다리·새경다리·소경다리 등의 명칭으로도 불렸는데 장사동과 예지동이 서로 연접해있으므로 장사동의 다리로 혼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판교와 하판교는 널판으로 다리를 놓았으므로 너더리 혹은 판교(板橋)라 불렀으며 두껍다리는 흙으로 만든 토교였다. 관수동 125·126번지에 준천사(濬川司)가 있어서 청계천을 비롯한 한성부 안 모든 하천의 준설을 담당하였으나 상류로부터 내려오는 토사와 각 가정에서 버리는 각종 오물 등으로 번번히 하천 바닥은 메워지기 일쑤였다. 더구나 바닥에서 파낸 각종 오물이나 모래를 먼 곳으로 옮긴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특별한 오물을 제외한 대부분의 모래는 그대로 개천변 언덕 위에 적치하게 되는 도성내에서 제일 큰 개천인 청계천변의 이곳은 모래 언덕이 마치 뱀처럼 길게 늘어진 형상으로 쌓여있었으며 이러한 긴 모래뚝은 최근세에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한성부 5부의 하나인 중부 청사가 있던 곳을 중부동·중붓골이라 불렀는데 수송동으로 옮긴 후에도 여전히 중부동이라 하였다. 두껍다리로 통하는 길목은 가운데피마병문, 웃너더리로 연결되는 곳은 웃피마병문, 아래너더리쪽은 아래피마병문이라 했는데 각각 한자로는 중피마병문·상피마병문·하피마병문이라 하였으며 특히 가운데피마병문에 있던 네거리는 관네거리로 통칭하였다. 병문은 길가에 있는 골목어귀로 종로3가에 피마동, 예지동과 종로4가에 하피마동이 있었으므로 피마동으로 진입하는 곳이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장사동 83·84번지 일대가 아래피마병문, 돈화문로변의 20번지 일대는 웃피마병문이 되고 57·58번지 일대가 가운데 피마병문이다. 이곳을 지나는 작은 네거리가 관네거리다.

 

종로3가쪽 돈화문로 변에는 벙거지를 파는 점포들이 있었으므로 병거짓골 또는 모곡동(帽谷洞)이라 하였다. 장사동의 동명 유래가 되기도 하는 청계천은 광화문네거리에서 광통교까지만 일제 때 복개, 정돈한 상태에 있었을 뿐 나머지 구간은 거의 방치되다시피 하였다. 다만 19499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대광교에서 영미교에 이르는 3,240m 구간의 준설사업을 시행했을 뿐이다. 시가지 중심을 꿰뚫는 대배수간선(大排水幹線)이면서도 암거화(暗渠化)되지 않아 쓰레기와 토사(土砂)의 퇴적으로 해마다 하상(河床)이 높아져 자칫하면 범람의 위험이 뒤따르고 악취가 나므로 해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구간별로 준설을 해왔다. 복개하지 않은 채로 시내 중심을 흘러가는 하수로 양안(兩岸)주민들의 생활에 고통을 줄 뿐 아니라 경관상으로도 불량하였다. 한편 도심을 관통하는 도로의 부족으로 이를 복개하면 교통소통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관계기관 전문가들의 연구에 따라 서울시의 본격적인 하수도 사업의 하나로 청계천을 복개키로 결정하였다.

 

1957년부터 1961년까지 4차에 걸쳐 시행된 청계천복개공사는 1차로 1958525일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광교에서 장교(長橋)에 이르는 450m와 방산시장 앞의 30m, 195812월부터 19604월까지는 2차 시공구간으로 장교에서 주교(舟橋)까지 849.5m와 방산시장앞 120m, 19599월부터 19609월까지 3차 시공구간으로는 주교에서 방산교(芳山橋)까지 232m, 19605월부터 196112월까지 제4차 시공구간은 방산교에서 오간수교(五間水橋)까지 677m를 복개하여 총길이 2,358.5m, 1654m, 총 복개면적은 79,849였다. 복개비로 소요된 공사비는 166,170여만원으로 당시로는 천문학적인 숫자에 가까운 금액이었고 연 인원도 242,000여명이 동원되었다.

 

청계천을 중심으로 좌우 양안에 사는 사람들은 정월에 연싸움을 하였다. 그중에서도 정월 대보름날에는 예지동과 장사동이 동서로 나뉘어 지거나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북쪽의 장사동·예지동이 한편이 되거나 남쪽의 주교동·수표동쪽 사람들이 한편으로 되어 연줄에 사기풀을 입히고 연줄끊기시합을 하는 고고매놀이도 성행하였다. 연줄을 끊은 쪽은 한해의 운수가 좋다 하여 아이들의 시합에 온동네 주민들이 모두 나와 응원을 하였다.

 

이름 그대로 맑은 물이 흐르던 청계천은 조선시대에 개천으로 불리웠으나 일제 때 바뀌었으며 사람들이 많이 모여살자 점차 오염되어 조선시대에는 종종 조정에서까지 논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4후퇴로 서울 시민이 남쪽으로 피난 간 얼마동안은 청계천물이 맑고 잔잔히 흘러 피라미떼가 몰려서 꼬리를 치던 때도 있었다.

 

장사동은 동으로 예지동, 남으로 청계천로를 경계로 중구 입정동과 마주보며 서쪽은 돈화문로를 경계로 관수동과 마주보고 있다. 북쪽은 종로3가와 맞닿아 있다. 철물 부속, 소방기구 및 전기, 전자부속상가가 대부분인 장사동은 조선시대부터 상공업 자본의 중민들이 많이 운집해 있었으며 그 맥락은 지금에도 이어져 청계천로를 따라 1평 내외의 크기에서 크게는 30평 정도에 이르는 점포에서 각종 상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

 

원남동

은 창경원의 남쪽에 있다하여 동명이 유래되었다. 원남동의 옛마을로 단우물이 있음으로 해서 붙여진 단우물골은 감정동(甘井洞)이라 불렀고 배오개에서 박석고개까지 일대는 통안 혹은 통내(統內)라 불렀으며 잣배기고개 남서쪽에 있던 마을은 신민동(新民洞)이라 하였다. 명나라가 청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자 명나라의 지사들이 청국인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청의 원수를 갚기위해 우리나라에 찾아와 조선의 백성이 되기를 원했으므로 종묘의 동북쪽 담 아래 잣배기고개 남서쪽에 살게 하였으므로 신민동이라 하였다.

 

종묘 동쪽의 원남동 첫째 골목은 통통학골이라 했는데 통내의 넒은 골목이라는 뜻이고, 잣배기고개는 원남동 로타리에서 연건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잣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원남동 로터리 동남쪽, 신민동과 대각선이 되는 방향의 마을을 염치낭골이라 하였다. 소용골은 황참의다리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모양이 호리병과 같으므로 소용골이라 하며 소용동(所用洞)으로 썼는데 이것이 변하여 호동(壺洞)이 되었다. 순랏골은 원남동과 훈정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종묘를 순찰하는 순라청이 있었으므로 생긴 명칭이다.

 

원남동 76번지 서쪽에 있던 황참의다리는 황참의(黃參議)가 사재로 다리를 놓았으므로 황참의다리 또는 한자명으로 황참교(黃參橋황교(黃橋)라 하였다. 원남동은 19101220일 충무로4가에서 창경원까지 경성전차가 신설되고 이어서 1915818일 충무로4가선 연장선의 신설과 1030일 종로4가에서 창경원까지 복선이 건설되면서 창경원을 찾는 인파가 많아진 이후 상가지역으로 활발하게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원남동은 창경궁로가 동의 남북을, 율곡로가 동의 동서로 관통하며 기타 간선도로가 없는 주택 및 상가 밀집지역이다. 동의 남쪽 2/3지점까지 도로변에는 상가가 형성되어 있고 안쪽으로는 주택지가 조성되어 있다

 

와룡동

의 동명은 임금이 기거하던 창덕궁이 있으므로 나라의 상서(祥瑞)인 와룡, 봉익의 이름을 따온데서 유래된다. 창경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고개는 건양현(建陽峴)이라 하는데 건양다경(建陽多慶)에서 비롯되었으며 두 궁궐이 모두 역대 임금이 거처하던 곳이므로 경사스러운 일이 많았다는 뜻을 지닌다. 와룡동과 묘동에 걸쳐 있는 마을은 다락우물이 있었으므로 다락우물골, 다락골 줄여서 누동(樓洞)이라 하였다.

 

창경궁과 창덕궁이 있는 이곳을 와룡동이라 한 것은 옛날 동양에서 왕을 용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황제를 상상의 신령한 동물인 용에 비겨서 황제의 얼굴을 용안(龍顔), 앉는 자리를 용상(龍床)이라 하였으며 또 타는 수레를 용가(龍駕), 배를 용주(龍舟)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황제가 거처하는 궁전은 물론 사용하는 기구 등까지도 모두 용을 조각 또는 도화하였다. 조선의 건국 사실을 엮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도 역시 이러한 의미에서 지어진 가사 이름이었다.

 

와룡동은 율곡로를 경계로 한 북쪽 지역은 창덕궁과 창경궁이, 돈화문로 좌우측에 상가와 주택가가 밀집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와룡동은 북으로 명륜3가동, 동쪽으로 연건동, 남쪽으로 권농동, 훈정동, 원남동, 돈의동이 서쪽은 원서동, 운니동, 익선동이 에워싼 도끼처럼 생긴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창덕궁과 창경궁이 동 전체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수송동

191441일 행정구역의 개편을 위한 부제(府制)실시에 따라서 이전의 중부 수진방(壽進坊)의 수동(壽洞)과 송현(松峴)의 각 일부와 박동( ), 괴정동(槐井洞)과 징청방(澄淸坊)의 중학교(中學橋) 일부와 사복동(司僕洞)을 병합한 것인데, 수동과 송현의 첫 자인 을 각각 따서 수송동이라 하였다. 수송동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에서 광화문우체국까지 6()거리의 뒷편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관아(官衙)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갑오개혁때 중서(中署) 수진방내의 계(), () 관계룰 보면

 

수진궁계 : 수동, 박동, 괴정동

송현계 : 송현

제용감계 : 수동

사복계 : 수동

상동계 : 상동

 

으로 되어 있어서 이때까지도 수전동은 수동으로 많이 칭호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수동 즉 수진동은 수진궁계, 제용감계, 사복계의 3개에 분속되었던 것으로서 그 구역도 상당히 넓었던 것으로서 보여질 뿐만 아니라 수진궁, 제용감, 사복 등의 계명으로 보아서 이 수진동에는 수진궁과 함께 궁중 및 국내의 거(), (), (), ()의 일을 맡아보는 사복시와 궁중에 진헌하는 저(), 마포(麻布), 피물(皮物), 인삼 및 정부용 의복·((능직(綾織포백(布帛) 등 물자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제용감 등의 관서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수송동은 조선시대의 관청가였다가 일제 때는 교육의 거리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각종 기업체와 나라의 살림을 맡은 국세청, 종로구의 살림을 맡고 있는 종로구청이 관내에 있어 다시 관청가로 순환되고 있는 느낌을 주고 있다. 주택지의 면적보다 더 넓은 면적을 관공서와 기업체가 차지하고 있으므로 낮에는 활기를 띠우지만 일몰 이후에는 인적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해가는 곳이 수송동이다. 이런 탓으로 점심시간에는 각 건물에서 토해내는 직장인들로 인근의 식당은 항상 초만원을 이루고 있는 것도 수송동의 특징이다.

 

현재의 수송동은 북으로 율곡로를 사이에 두고 송현동과 동쪽은 견지동, 남쪽은 삼봉길을 경계로 하여 서린동, 서쪽은 세종로동과 중학동으로 둘러싸여 있다. 종로4가의 동명은 종로의 네번째의 거리가 된다는 뜻에서 비롯된다. 종로4가는 여러 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었다. 묘동(廟洞)은 대뭇골·대묘동(大廟洞대묘골 등으로 불려졌는데 종묘(宗廟)가 있어서 명칭이 유래되었다. 하피마동(下避馬洞)은 아래피맛골이라고도 하는데 종로4가와 예지동에 걸쳐있는 마을로 피맛골 아랫쪽에 위치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종로4가와 5가 사이에는 두다리 혹은 이교(二橋재교(再橋연못골다리·연지동교(蓮池洞橋)라 부르던 다리가 있었다. 동대문 쪽에서 두번째 다리가 되므로 붙인 이름이며 옛날의 연지동에 속했기 때문에 연못골다리라 했었다. 종로4가는 종로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종로선과 종로4(후에 돈암동까지 연장)까지 연결되는 전차노선이 있어서 더욱 번화한 곳이었다. 특히 종로4가 네거리의 동북쪽에 동대문경찰서가 신설되고 광장시장으로 인해 주변에는 일찍부터 은행 등의 금융관계 점포들이 들어섰으므로 1968년 종로를 가로지르는 전차궤도를 철거하기까지 종로일대에서는 종로2가와 함께 종로4가가 가장 번성하던 곳이었다.

 

종로4가의 현 위치는 북으로 인의동과 훈정동, 동쪽은 종로5가와 접해있고 남쪽은 예지동, 서쪽은 종로3가와 서로 이웃하고 있다. 동의 한가운데를 남북으로는 배오개길이, 동서로 종로가 관통하는 대로변의 상업지역이다. 지금의 종로4가 거리의 좌우에는 각종 상점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으며 북측 창경궁로 주변에는 한국담배인삼공사 서울영업본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등 건물이 있으며 남측에는 광장시장을 비롯해서 천일의류상가 등이 들어서 있고 조흥은행·한국상업은행 등의 지점이 들어서 있다.

 

종로2

의 동명은 종로의 두 번째 거리가 된다 하여 유래되었다. 종로는 조선시대에 종루가(鐘樓街종가(鍾街) 또는 운종가(雲從街) 등으로 불렸다. 종로는 세종로 사거리 황토현에서 종로6가까지의 거리로 네거리에 층루(層樓)를 짓고 누()위에 종()을 달고 그 아래로 사람과 우마(牛馬)가 다니게 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흔히 보신각(普信閣종각(鐘閣)으로 불려지는 이 누각은 지금의 종로네거리에 있었으나 1915년의 남대문로 개수공사를 위한 도시계획에 따른 종로의 확장으로 원래보다 동남쪽으로 물러나 관철동에 2층 누각으로 새로 지어졌다. 임진왜란으로 종각이 불타고 초석만 남게되자 이곳은 상인들의 노점터가 되었고 그 옆에 종각을 새로 세웠는데 규모가 작았다. 1875년에 원래의 위치로 환원하여 크게 지었다. 이 때의 위치는 197310월지하철공사 도중 유구(遺構)의 일부분이 노출되면서 발굴 조사되었다. 유구로 보아 종각은 십자각으로 동서남북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가 뚫려 있었음이 확인되었으며 남북 4칸으로 초석의 배치 길이는 43.1척이고 동서 5칸은 60척으로 평면적 70여평 규모였다.

 

조선시대 종로2가 지명 역시 종로1가와 같이 상업에 관련된 것이 많다. 갓전골은 종로2가와 3·관철동·관수동에 걸쳐있던 마을로 갓을 취급하는 갓전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인데 일명 입동(笠洞)이라고도 하였다. 바리전골은 종로2가와 공평동에 걸쳐있던 마을로 각종 유기그릇을 파는 바리전이 있은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발리동(鉢里洞)이라고도 하였다. 베전병문골은 종로2가와 3가에 걸쳐있던 마을로 현 탑골공원 동쪽 낙원동 입구에 삼베전이 있은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포병동(布屛洞)이라고도 하였다. 소금전골은 종로2가와 관철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 소금전이 있었기 때문에 소금전골 또는 염수전동(鹽水廛洞), 염동(鹽洞)등으로 불렀다. 종이전골은 포병동 남쪽에 있던 마을로 종이전이 있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며 지전동(紙廛洞)이라고도 하였다. 청포전 뒷골은 종로2, 관철동, 남대문로1가에 걸쳐있던 마을로 석승베(三升布)와 양털, 그리고 모자 따위를 파는 청포전 뒤에 있던 마을이므로 청포후동(靑布後洞)이라고도 하였다.

 

탑골은 종로2가와 낙원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 원각사(圓覺寺)10층탑이 있는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탑동(塔洞)이라고도 하였다. 상나무골은 종로2가와 관철동에 걸쳐있던 마을로 우물가에 향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향정동(香井洞)으로도 쓴다. 수전동(水典洞)은 종로2가와 인사동에 걸쳐있는 마을이며, 동곡(東谷)은 똥골로도 부르는데 관철동과 종로2가에 걸친 마을이다.

 

종로2가의 현 위치는 동쪽은 종로3가와 연해 있고 서쪽은 종로1가와 접해있다. 남쪽은 관철동, 북쪽은 인사동, 공평동과 이웃하고 있다. 종각네거리에서부터 시작되는 종로2가의 면적 대부분 역시 폭 40m의 종로가 차지하며 탑골공원이 동의 동북쪽에 있다. 종로를 중심으로 좌우에는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청진동

은 이곳은 조선시대 한성부 징청방(澄淸坊)과 수진방(壽進坊)의 일부였던 관계로 방명에서 한자씩 따온데서 유래되었다. 청진동의 동명이 유래된 수진방에는 수진궁이 있었다. 수진궁은 조선 예종의 둘째아들인 제안대군 현( )의 사저로 그 뒤 어려서 죽은 대군(大君), 왕자, 공주, 옹주 및 자손이 없는 후궁들의 제사를 지내는 궁()이 되었다. 지금의 수송동 삼양식품(전 종로국민학교) 동북방과 종로구청의 일부에 해당된다. 또 징청방의 징청은 난세를 다스려 밝게 한다는 뜻이다.

 

청진동의 자연부락 명칭 및 지명은 다음과 같다. 금부뒷골은 공평동과 청진동을 경계로 하는 길의 청진동 쪽에 있는 마을로 금부후동(禁府後洞)이라고도 하며 공평동 94번지에 의금부가 있었기 때문에 의금부(義禁府) 뒷골이라고도 한다. 싸전골은 쌀전이었으므로 붙여졌고 한자명으로는 미전동(米廛洞)이 되며, 바깥상삿골은 청진동과 종로1가에 걸쳐있던 마을로 상삿골의 바깥이 되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외상사동(外相思洞)이라고도 불렀다.

 

청진동과 종로1가에 걸쳐있던 마을은 골목이 좁아서 사복시(司僕)에서 기르는 상사마(相思馬)가 암내를 맡고 뛰면 이 골목으로 몰아 넣고 붙잡았으므로 상사골 또는 상사동(相思洞), 줄여서 상동(相洞)이라 하였다. 상삿골의 안쪽에 있는 마을은 안상삿골 혹은 내상사동(內相思洞)으로 불렀다.

 

수진방굴은 수송동과 청진동 사이에 걸쳐있던 마을로 수진방골·수진박골·수진동·수동이라고도 하였으며 종로1가쪽에 있는 수동(壽洞)의 입구는 수동병문(壽洞屛門)이라 불렀다. 서울의 중심에 위치한 청진동은 광화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6()를 비롯하여 의정부(議政府), 한성부(漢城府) 등이 위치하였으므로 이의 영향을 받아 자연히 관청가 다운 면모를 지내게 되었다.

 

육조거리와 운종가(雲從街)T자로 교차되는 곳에 위치했던 만큼 청진동에는 이와 관련된 상권이 일찍부터 발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관과 결탁한 부유한 상인들이 이 일대에 살고 있어서 가옥의 크기나 규모 등이 북촌(北村) 양반집을 능가할 정도로 크고 으리으리한 집들이 많이 있었다. 때문에 북촌에 대비한 부촌(富村)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청진동에는 이웃 서린동과 함께 이들 상인과 관리를 상대로 하는 기생들이 많이 모여사는 곳이 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 시대부터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는 특히 중학천변을 따라 종로에 이르는 거리에 곱게 단장한 기생들의 발걸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어서 기생촌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른바 요정이라는 명칭의 근대식 요리점의 발생지가 청진동 중학천변이었다.

 

피마동(避馬洞)길이기도 했던 이곳에는 고관대작의 행차를 피신한 서민이나 하위직 관리들이 주로 이용했기 때문에 이들을 상대로 한 문안 목로집이 발달하였다. 대감댁 곰국보다 잣다는 목로집 술국은 오가는 상인들의 시장기를 면해주는 요기가 되어 유명하였다. 중학천변에 모여든 목로집으로 인해 청진동일대는 마침내 해장국골목이라는 대명사까지 얻게 되었다.

 

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목로집과 함께 부자 상인과 관리를 대상으로 한 고급 기생집도 함께 병존한 곳인 청진동인데 일제 침략과 아울러 요정이라는 명칭으로 한국근대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인사동의 태화관·명월관 등과 광복이후 번성한 국일관 등은 요리집으로 불려졌던 초창기의 요정인데 그 만큼 규모가 크지 않았지만 청진동에도 여러 개의 요정이 있었다.

 

바로 이웃한 공평동 163번지에 헌병경찰정치의 대명사로 불리던 종로경찰서가 있었고 조선총독부와 각 기관들이 주변에 위치했기 때문이며 아울러 서울의 동맥인 종로가 동의 남쪽을 통과하였으므로 이들 업소가 생겨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이 전통은 광복 후에도 이어져 자유당 시절이래 근대에 이르기까지 요정정치의 대명사로 알려진 청진동의 장원이 유명하였다. 자유당의 국회의원이었던 서민호(徐民豪)의 소유 한옥을 개조하여 첫 출발한 이 요정은 33년동안 정계의 비밀 협상 무대로 제공되어 오다가 1991년 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에는 아파트 모델 하우스가 들어 서 있다.

 

현재의 청진동은 종로구의 중앙에 위치해 있는데 북쪽으로 삼봉(三峰)길을 경계로 수송동과 인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세종로동, 남쪽으로 종로1, 동쪽은 공평동과 접해있다. 조선시대에는 육조(六曹)거리가, 광복후에는 세종로를 중심으로 한 현대적 관청거리로 조성된 지역이 동의 서부지역을, 조선시대 이래 상권이 중심이 된 종로거리를 남부지역으로 하여 발전을 해온 것이 특징이다.

 

문화적 갯벌 종로 1.2.3.4가동

5호선 광화문역(3번 출구) → ①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 → ② 중학천 물길 → ③ 조계사 대웅전 및 백송 → ④ 우정총국사랑메시지 창→ ⑤ 북인사마당 → ⑥ 인사동길 → ⑦ 남인사마당 → ⑧ 탑골공원 및 원각사지 십층석탑 등 → ⑨ 동피마길 → ⑩ 귀금속 상가 → ⑪ 서순라길 율곡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