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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치1번지, 종로구 鍾路區 (3)

草霧 2013. 12. 10. 16:07

 

 

 

한국의 정치1번지

 

종로구 鍾路區

 

 

 

 

 

 (3)  

 

Jongno-gu (Zhonglu)

 

 

 

 

 

 

 

 

법정동 87개동 기준, 행정동 기준 17

수송(壽松청운(淸雲신교(新橋궁정(宮井세종로(世宗路효자(孝子창성(昌成통인(通仁누상(樓上누하(樓下옥인(玉仁사직(社稷체부(體府필운(弼雲내자(內資통의(通義적선(積善삼청(三淸팔판(八判안국(安國소격(昭格(사간(司諫송현(松峴부암(付巖신영(新營홍지(弘智평창(平倉구기(舊基교남(橋南(송월(松月홍파(紅把교북(橋北행촌(杏村도렴(都染당주(唐珠내수(內需신문로1(新門路一街신문로2·가회(嘉會((원서(苑西인사(仁寺청진(淸進서린(瑞麟중학(中學종로1(鐘路一街종로2·종로3·종로4·종로5·종로6·공평(公平관훈(寬勳견지(堅志와룡(臥龍권농(勸農운니(雲泥익선(益善경운(慶雲관철(貫鐵낙원(樂園(훈정(薰井봉익(鳳翼돈의(敦義장사(長沙관수(觀水인의(仁義예지(禮智원남(苑南효제(孝悌연지(蓮池충신(忠信이화(梨花연건(蓮建동숭(東崇혜화(惠化명륜동1(明倫洞一街명륜동2·명륜동3·명륜동4·창신(昌新숭인(崇仁무악(毋岳)

 

 

 

 

 

 

1 청운효자동 淸雲孝子洞

    

궁정동

191441일 동명 개정에 따라 이전 북부 순화방의 육상궁동, 동곡, 온정동, 신교, 박정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육상궁의 자와 온정동, 박정동의 자를 따서 궁정동이라 하였다. 정동의 동명과 함께 지금도 고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육상궁(毓祥宮)의 건물이다. 지금 청와대 서쪽, 바로 북악밑에 자리잡은 육상궁은 처음 영조가 그의 생모인 최씨를 위하여 세웠던 사묘(祠廟)였다.

 

궁정동을 이룬 자연부락인 동골은 궁정동과 효자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육상궁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동곡(東谷)이라고도 한다. 박우물골은 청운동과 궁정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박우물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인데 박정동(朴井洞)이라고도 한다. 박우물은 깊이가 그다지 깊지않아 바가지로 물을 뜰 수 있었으므로 바가지우물이라 하던 것이 박우물로 변하였는데 박과 음이 같은 박()으로 바뀌어졌다.

 

육상골은 육상궁동이라고도 하는데 육상궁이 있으므로 붙여진 명칭으로 궁정동과 효자동에 걸쳐 있는 마을이다. 194610원 일부지역에서 임의적으로 동회제도가 실시될 때 궁정동은 신설된 경무동회(景武洞會)에 소속되었는데 이때의 동명은 경복궁 비원에 있는 과장(科場)이며, 열무장소(閱武場所)와 성역(聖域)으로 사용되던 경무대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현재의 궁정동은 북으로 청운동, 동쪽으로는 세종로, 남쪽은 효자동, 서쪽은 자하문길을 경계로 하여 신교동과 마주보고 있다. 청운동의 관할지역 가운데 가장 작은 면적이지만 비교적 넓은 이면도로가 동의 한 가운데를 종횡으로 지나고 있다.

 

신교동

신교동 70번지 신교소방관 파출소와 궁정동 9번지 사이를 연결해주던 새 다리가 있었던 동()이라 하여 이를 한자로 옮긴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지금은 이름뿐 복개시설로 인하여 다리의 형체를 볼 수는 없다. 경우궁(景祐宮)과 경복궁(景福宮)사이를 흐르던 냇가의 가장 북쪽에 위치했던 신교는 대동지지(大東地志)수선전도(首善全圖)에도 표시가 되어 있으나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인왕산 아래 백운동에서 시작한 개천이 동남으로 흘러 자수궁교(慈壽宮橋)와 금청교(禁淸橋)를 지난다라고만 표기되고 신교의 이름이 보이지 않으므로한경지략이 저술된 1830년부터 대동지지가 제작된 1864년 사이에 신교가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또 중종조의 문인 눌재(訥齋) 박상(朴詳)청송당시(聽松堂詩)오가는 가교에는 외나무 건너놓였고, 허송하다 심은 버들 일만실이 드리웠네라는 싯구가 말하는 것처럼, 옛날에 있어서 거의 성시(城市)와 떨어진 느낌조차 있다. 이 유심(幽深)한 지역에 정작 다리다운 이름있는 다리가 가설되지 않았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고종조, 이곳에 새 다리가 놓이고 동명도 이 다리의 가칭인 새다리 그대로 부르던 때에, 동리의 구역은 상당히 넓었던 것으로서 지금의 신교동 일원은 물론 청운동, 궁정동, 효자동 등의 지역이 신교라는 동 안에 포함되었다.

 

현재의 신교동은 북으로 청운동, 동쪽은 자하문 길을 경계로 궁정동과 인접해 있으며 남쪽과 서쪽은 옥인동으로 둘러싸여 있다. 19592월에 종로소방서 관할 신교소방관 파출소가 설치되어 화재예방과 소방관계 민원사항을 담당하고 있으며, 서울맹학교와 선희학교가 신교동의 약45%를 차지하고 그외 나머지는 주택가로 형성된 서울의 전형적인 북촌(北村)이다.

 

청운동

이곳에 원래 있던 청풍계(淸風溪)와 백운동(白雲洞)의 첫글자를 따온 데서 유래된다. 동명이 유래된 청풍계와 백운동은 도성 북쪽 인왕산과 백악사이 자하문(창의문)고개의 남쪽에 있다. 이곳은 깊숙하고 그윽한 계곡에 맑은 수석이 청풍과 함꼐 항상 백운으로 덮여 있었다. 백운동에는 조선 초기 중추부 이의념(李義念)이 살자 그 뒤를 이어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들어와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성의 서북쪽 산자락에 위치한 백운동은 산도 높지 않고 골짜기도 그렇게 깊지 않지만 푸른 송림과 등라덩굴 사이로 맑은 냇물이 소리내어 흐르고 맑은 하늘에는 아침저녁으로 점점이 떠있는 흰구름이 아름다워 주변의 경관과 함께 어우러지므로 옛날부터 많은 문인, 묵객들이 즐겨 찾아 은거소창(隱居消暢)하던 곳이었다.

 

그 중에도 지금 청운국민학교 뒤쪽 일대는 임진왜란 후에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청절대신(淸節大臣)으로 유명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복거지(卜居地)가 되었던 청풍계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이곳에 오면 누구든 시 한수를 읊지 않을 수 없게되어 많은 문인들이 청풍계 백운동을 노래하였다. 청운동에는 여러개의 자연부락이 있었다. 123번지의 청운국민학교 앞에 있었던 우물은 크고 수량도 많아 바가지로 푸게 되었으므로 박우물이라 하였고 마을을 박우물골 또는 한자명으로 박정동(朴井洞)이라 불렀으며 청운동과 궁정동에 걸쳐 있었다. 신교(新橋)는 신교동 70번지와 청운동 108번지를 이어주는 다리로 장조(사도세자)의 생모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사당인 선희궁을 만든 후 그 동편에 새로 놓았는데 새다리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유난동(幽蘭洞)은 경기상업고등학교 부근에 있던 마을로 바위에 幽蘭洞이라는 글씨가 각자되어 있다. 자핫골은 청운동 일대를 통칭하는 말로 골이 깊고 수석이 맑고 아름다워서 선경(仙境)에 비하며, 또 개성의 자하동과 같다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창의동(彰義洞)은 청운동 일대를 일컫는데 창의문 안쪽이 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고 변해서 장의동(壯義洞)으로 불렀으며 줄여서 장동(壯洞)이라고도 한다. 근처에 김상헌상용 형제의 후손이 많이 살았으므로 이들을 壯洞金氏라고도 불렀다.

 

청운동 일대를 중심으로 서리(胥吏)들의 마을이 있어 상대(上臺) 또는 웃대라 하였다. 경복고등학교(청운동 89 - 1)가 있는 곳은 조선말에 효곡(孝谷) 또는 쌍효자거리, 쌍효자가(雙孝子街)로 불렀는데 오늘날 효자동의 동명이 유래되었다. 조선 순조 때까지만 하더라도 경기상업고등학교(청운동 89번지)에 있던 청송당(廳松堂)부근은 많은 종류의 꽃이 있었기 때문에 도화동(桃花洞)이라 부를 정도였고 도성안의 사람들이 봄철 놀이장소로 손꼽던 곳이었다.

 

현재의 청운동은 동으로 삼청동세종로와 남쪽은 궁정동신교동옥인동과 인접해 있고, 서쪽과 북쪽은 부암동으로 둘러싸여 있다. 법정동과 행정동이 일치하는 청운동은 북악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어 동전체의 절반 가량이 임야지대로 되어 있다. 동의 서쪽에는 인왕산길이 중앙의 남북으로는 자하문길과 창의문길이 통과하며 북악산의 중간을 지나는 청운터널이 부암동과 청운동을 이어주므로 교통이 편리하고 쾌적한 주거환경을 이루고 있다.

 

누상동

191441일 경성부(京城府)의 동명을 새로 제정 실시함에 따라 누각동의 위치한 북부 순화방의 누각동(樓閣洞)의 일부를 누상동이라 하였다. 고종 초 편찬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누각동은 인왕산 아래에 있고 연산군 때에 누각을 지었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지금은 여항(閭巷)의 서리노퇴자(胥吏老退者)가 많이 살고 있는데 그들은 화과업(花果業)에 종사하는 자가 많다.

 

누각이 있었기 때문에 동명이 유래된 타당성은 인정하나 과연 연산군 때 누각을 지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시 된다. 여기서 누각이라 함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건물이 될만큼 규모가 큰 누각 건물로 민가의 것이라기 보다 궁궐과 관련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연산군 때 과연 누각동 일대에 그러한 건축을 영건(營建)한 사실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직염국으로 개편하기도 하였지만 충선왕 2(1310)에 다시 도렴서로 복원하여 말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조선에서도 고려시대의 직제, 임무 등을 그대로 계승하여 한양천도 후에 도렴서를 궁궐에서 가까운 이곳에 설치하였고, 70여년은 지나서 세조 6(1460)에는 중부수진방(壽進坊)에 있는 제용감(濟用監)에 병합되었다. 1914년 동리구역을 조정 개편할 때에는 도렴서가 있는 일대의 마을인 도렴동, 공조(工曺)의 뒤가 되므로 붙여진 공후동(工後洞) 혹은 공조뒷골, 적선동 170번지에 궁중에서 필요한 술과 감주를 공급하는 관아가 있었고, 그 주변의 부락은 사온동( ) 혹은 사온섯골, 의영고가 있던 주변의 마을은 의영곳골 혹은 의영동(義盈洞)의 구역을 합하여 도렴동을 신설하여 지금에 이른다.

 

현재의 도렴동은 북으로 내자동길을 경계로 하여 적선동과 남으로는 당주동, 서쪽으로 내수동, 동쪽은 세종로로 둘러싸인 삼각형 모양의 지형이다. () 면적의 60%이상이 세종문화회관의 주차장과 경희궁 시민공원 등으로 되어 있고 실제 생활주거 면적은 30% 정도밖에 안된다. 도렴동 45번지에는 교통방송국이 위치해 있다. 연산군은 역대 어느 왕보다도 이궁(離宮)등의 건축물을 많이 지었다. 연산군일기에 의하면 창의문(彰義門) 밖의 장의사(藏義寺)터에 세웠던 이궁 소격서동(昭格署洞)에 세운 이궁 두모포(豆毛浦)이궁 등이 대체로 서울에 세운 연산군 때의 이궁으로 세 곳 이외의 이궁은 나타난 것이 없는 것으로 보아 누각동에 누각을 세운 시기가 연산조였다고 함은 잘못 전해진 기록이며 광해군(光海君)때 조성한 누각동 일대에 소재했던 인경궁(仁慶宮)이 아닌가 한다.

 

인경궁은 광해군 9년부터 15년까지 역사(役事)를 계속하여서 그동안에 외전(外殿내전(內殿별실(別室) 등의 주요건물을 영조하였으나 궁궐로서의 제반시설을 채 완공하지 못한 가운데 일어난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건축을 중단한 궁궐이다. 광해군이 인경궁을 건립하게 된 배경은 승려 성지(性智)의 권유에 의하였다. 인왕산은 석산이 튀어나온 데다가 인왕이라는 두 글자가 길하므로 그 아래 왕궁을 세워 왕자가 거처하면 역수(曆數)가 가연(可延)하고 오랫동안 태평성대를 일으킬 수 있다는 주장에 따라 건축되었으나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하고 이복아우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유배, 마침내 죽게 만드는 등 패륜정치를 일삼던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축출되자 인경궁은 빈집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인조11년에는 인경궁의 일부를 철거하여 목재와 기와를 창경궁의 내전 조성에 사용하였고 나머지 전각들은 효종 때까지 존치되었다가 숙종, 영조 년간에 건물들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민가(民家)가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200년 동안 존속된 인경궁의 위치는 현재의 필운동, 누상동, 누하동, 옥인동 일대로 인조11년에 일부 전각이 철거되고 나머지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었던 곳이 누각동 일대였다. 동국여지비고에서 말하는 누각동은 곧 인조이후 남아있던 인경궁의 전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연산군때 누각동에 궁궐을 영조한 일은 전혀 없으며 그 이후에도 그런 사실이 없다. 더구나 인경궁은 건립한 후 왕이 거처한 일없이 폐기되었던 것과 완성되지 못한 채 일부 철거된 '폐기된 궁궐'이어서 궁이라고 지적하지 않고 누각이라고 했던 것 같다.

 

따라서 동국여지비고누각동은 연산군 때 세운 누각이 있어 그 동명이 유래되었다는 것은 오전(誤傳)이며, 광해군 때 세운 인경궁의 누각이 있어서 동명이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누각동이란 지명은 인경궁이 이룩된 광해군이후에 생성된 지명이었으며 일제 초까지 사용되다가 없어진 동명이었던 것이다.

 

현재의 누상동은 북으로 옥인동, 동으로 누하동, 남으로 필운동, 사직동, 무악동과 접하며 서쪽으로는 서대문구 홍제동에 이웃한 전체면적의 2/3가 산지(山地)로 형성된 곳으로 동의 동북쪽에 비교적 오밀조밀하게 주택지가 밀집하여 형성된 누상동은 동명이 연유되는데 영조때 만든도성지도(都城地圖)에는 누각동이라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누상동을 통과하는 가로는 인왕산길 하나뿐인데 인왕산길은 사직동에서 누상동, 옥인동을 거쳐 청운동의 창의문까지의 폭 12~15m, 연장2,300m가로(街路)이다. 누상동은 186번지에 인왕산정 노인정, 184번지에 옥인유아원, 50번지에 누상유아원이 위치하고 있다.

 

누하동

남척동(南隻洞), 송목동(松木洞), 장성동(長成洞), 오거리(五巨里), 유목동(柳木洞), 누각동(樓閣洞) 일부를 합쳐 누각동 아랫쪽에 있으므로 동명이 유래되었다. 조선후기 이래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는 만큼 역사가 오래된 동이다. 이 가운데 누하동의 동명 유래가 되는 누각동의 지명은 영조 때 만든 도성지도(都城地圖)에는 표시되어 있다.

 

누각은 연산군 때 지었던 정자가 아니고 광해군(光海軍) 때 건축한 인경궁(仁慶宮)으로 증·개축하여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됨에 따라 이후 빈집으로 두자 황폐되어 빗물이 새는 누각으로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또 누각골에 사는 사람들도 양반 사대부가(士大夫家)가 아닌 서리(胥吏)들임을 보더라도 퇴락한 궁궐터로 보아야 할 것이다. 누상동, 누하동, 체부동에 걸쳐있는 누각동에 사는 사람들은 옛부터 집집마다 담배 쌈지와 갓을 만들었는데 용마루 위에 시렁을 얹고 쌈지와갓을 널어 말렸으므로 "누각골 색시는 쌈지 접는 데로 다간다"는 노래가 있었다.

 

남척동은 누각골 아랫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납작하므로 납작골이라 불렀는데 한자로 남척동이라 표기하였고, 유목동은 버드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서 붙여졌으며 버드나뭇골 이라고도 한다. 복정동은 물이 맑고 차서 삼복 더위도 물리친다는 복우물이 있기 때문에 복우물골이라 했고 한자로 쓴 것이 복정동(福井洞)이다.

 

송목동은 소나우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졌으며, 장성동은 담이 성처럼 길게 뻗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아마도 인경궁의 담이 아닌가 생각된다. 수성동(水聲洞)은 누하동 뒤쪽으로 누상동과 경계되는 곳의 지명인데 한가롭고 그윽하여 물소리가 끊어지지 않는다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이 수성동에는 기린교(麒麟橋)가 있었는데 석교(石橋)였다.

 

현재의 누하동은 동으로 통인동, 체부동이 남으로는 필운동, 서쪽의 누상동과 북쪽은 옥인동이 에워싸고 있으며 전형적인 집단 주택지역이다. 주택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누하동에서 옛날의 아름답던 계곡과 바위들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서울을 전형적 주택지임을 동의 초입에서부터 느낄 수가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비를 맞으며 수성동에 와 이런 시를 남겨놓았다.

 

골짜기 들어오니 몇 무 안되고 나막신 아래로 물소리 우렁차고

푸르름 물들어 몸을 싸는 듯 대낮에 가는데도 밤인것 같네.

고운 이끼 자리를 깔고 둥근 솔은 기와덮은 듯

낙수물 소리 예전엔 새 소릴러니 오늘은 대아휼(大雅譎)같다.

 

산마음 정숙하면 새들도 소리 죽이나

원컨대 이 소리 세상에 돌려 저 속된 것들 일침(一針)가해

꾸밈없이 만들었으면

저녁 구름 홀연히 먹을 뿌리어 시의(時意)로 그림을 그리게 한다.

 

옥인동

옥동(玉洞)과 인왕동(仁王洞)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옥인동의 동명이 유래된 옥동은 옥류동(玉流洞) 혹은 옥골이라 불려지기도 하는데 옥인동과 통인동에 걸쳐있는 지역이다. 옥인동 47번지 북쪽 돌벽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글씨라고 하는 옥류동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지금은 개인의 집 담안으로 들어가 찾아보기가 어렵다.

 

서로 혼용해서 사용된 동명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료로는 영조 때에 그려진 도성지도(都城地圖)옥동척강(玉洞陟崗)이라는 그림인데 둘다 겸제 정선의 작품으로 지도에는 옥류동으로, 그림의 제목에는 옥동으로 되어 있다. 그림은 세종의 왕자 영해군의 후손이 이춘제(李春 )의 집 후원에서 모임을 가진 후 청나라 청옹정제의 황후 나랍씨(那拉氏)의 진위겸진향사(進尉兼進香使) 부사(副使)로 연행라는 이춘제 일행이 청풍계를 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러한 옥류동은 장안에서 명승처로 손꼽히는 곳이어서 고관들의 별장이 곳곳에 들어서서 연회와 시연이 그치지 않았고 옥류동의 각자(刻字)아래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으며 이 냇물을 탄뢰란(灘瀨瀾)이라 불렀다. 이런 옥류동은 글자 그대로 맑은 물이 흐르는 곳으로 처음에는 민가지대가 아닌 곡간(谷澗) 유수처(流水處)를 말하는 것이었다고 보아진다. 도성지도에도 옥류동은 인왕산 아래의 수원처(水源處)로 표시하고 있어 옥류동이란 처음은 인왕산 아래의 속간유수처를 지칭하였으나 차차 그 명칭이 확대되어 그 근처의 민가지대를 호칭하는 지명으로까지 옮겨 칭하였다고 할 것이다.

 

다음은 인왕동인데 기록에 인왕동이란 이름이 보이는 것은 세종 때부터인 바 인왕동이란 지명은 세종무렵부터 존속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인왕산이란 지명은 어떻게 하여 생겼나가 문제인데, 이에 대하여 인왕동과 관계있는 것으로는 인왕산(仁旺山)과 인왕사(仁王寺)로 이들은 모두 같은 위치에 있었던 것이므로 그 세가지는 상호간에 서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인왕사는 태조, 성종 때의 기록에도 종종 등장하며 연산군 때는 인왕산 복세암과 금강굴이 경복궁을 내려 누르고 있으므로 근방의 민가와 함께 철거토록 했다는 기사로 보아 적어도 연산군 때까지는 존속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인왕산의 이름이 기록에 처음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태조부터 세종 때까지로 이때는 서봉(西峯), 서산(西山)이라는 명칭 이었다. 인왕산의 명칭이 정식으로 등장한 것은 광해군 때로 산에 옛날에는 인왕사가 있어서 그 이름으로 되었다고 하여 인왕사에서 인왕사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연유에서 본다면 옥인동 역시 인왕사에서 단정할 수 있는데 아마도 인왕사동에서 인왕동으로 변천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의 옥인동은 효자동 관할구역 가운데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데 북으로는 부암동, 청운동과 동쪽은 효자동, 남쪽에 통인동, 누하동, 누상동이 연결되어 있고 서쪽은 서대문구이다. 옥인동은 동쪽이 주거지역 서쪽은 자연녹지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어 실제 가용면적은 전체의 절반 정도밖에 안된다. 이러한 옥인동을 남북으로 가로 지르는 인왕산길과 동의 경계를 이루는 자하문길이 중심도로이다.

 

창성동

갑오개혁 때 북서 순화방관하에 사재감상패계 창성동(昌成洞)'()'자와 순화방내 사재감하패계의 동명중에 장성동(長城洞)이라는 동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장성' 또는 '창성'으로 이름하는 옛날의 고성지(古城址)라고 있는 데에서 온 것은 아닌가 생각되나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여러 지리서 중에서 그러한 고성의 유지(遺址)가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성지와 관련하여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고 청송당(聽松堂)이 음이 서로 비슷한 관계로 하여 창성동(昌城洞)으로 변하고 성과의 관련이 없는 창성(昌城)이 무의미하는 점에서 다시 글자의 음이 같은 '()'자로 바꾸어서 창성동(昌成洞)으로 아화(雅化)되어 유래된 것 같다.

 

창성동을 이루고 있는 자연부락 가운데 옥정동(玉井洞)은 일명 더운우물골이라고도 불린다. 이 마을에 우물이 있었는데 그 물이 맑고 달아서 옥로수(玉露水)와 같다 하여 옥정(玉井)이라고도 하였다. 대동(帶洞)을 창성동과 통의동에 걸쳐 있었던 마을로서 띠를 만드는 집이 있으므로 이름이 붙어졌고 띳골이라고도 하였다. 백구동(白拘洞)은 효자동과 창성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흰개를 많이 길렀으므로 흰갯골이라 하였다. 간곡(間谷)은 창성동 117번지 서쪽에서 67번지 옆으로 통한 사잇길에 있는 마을로 샛골이라고도 하였다. 또한 범숫골이란 마을이 백구동(흰갯골) 서쪽에 있었는데 수목이 많아서 범이 소를 많이 잡아 먹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의 창성동은 동으로 효자로를 사이에 두고 세종로와 마주 보며 남쪽은 통의동과 서쪽은 자하문길을 경계로 통인동과 접해 있고 북쪽은 효자동에 이어졌다. 지금의 자하문길은 당초의 창성동쪽 1/3가량이 도로였고, 통인동쪽 1/3은 하천이었던 것을 복개, 확장하여 동의 서쪽 경계선이 되었다. 동 면적의 1/3가량 진명여자중·고등학교와 국민대학 부지였으나 진명여중·고는 1989년 양천구 목동으로 이전함에 따라 종로경찰서에서 사용하며 국민대학부지는 정릉으로 대학이 이전한 후 지금은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서에서 사용하고 있다. 창성동은 동쪽의 효자로를 사이로 경복궁의 옆에 있으므로 맑은 공기와 함께 효자로를 따라 심어놓은 은행나무의 가로수가 매우 운치있는 곳이며, 서울 시내에서 가장 은행잎이 아름다운 색상으로 물드는 곳이 창성동쪽의 효자로를 따라 심어져 있는 가로수이다.

 

효자동

이곳에 있던 원래의 자연부락 효곡(孝谷)에서 유래되었다. 효곡은 고종31년 갑오개혁때에도 동명중의 하나로 보이는 것으로서 그 유래가 오래임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동명은 원래 이곳에 임천조씨(林川趙氏)의 쌍효자가 나서 유명하였기 때문에 쌍효잣골」「효잣골로 불러온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쌍효자란 조원(趙瑗)의 아들 희정(希正)과 희철(希哲) 형제를 말함이며 나라에서 이들에게 내린 정문(旌門)이 있었기 때문이다. 1914년 이래로 다른 동리들의 일부까지 포함하여 효자동으로 불러오게 되었으며 일부에서는 효에 대한 새로운 일식을 이야기하고 가부장을 중심으로 하는 가정윤리의 관념이 많이 변천된 오늘에 있어서도 효자동의 동명은 새삼 옛날의 윤리관과 가정미담을 다시금 상기하게도 한다. 효자동을 이룬 자연부락은 효자동과 궁정동에 걸쳐있는 곳에는 더운 우물이 있어서 더운 우물골 혹은 온정동(溫井洞)으로 불렀다. 궁정동(宮井洞)의 육상궁(毓祥宮) 동쪽에 해당되는 효자동 138~145번지일대는 동곡(東谷), 동골이라 하였고, 육상궁 동쪽 동네라는 뜻이다. 동골의 좌측에 있는 동네는 육상궁동, 육상굴이라 하였다.

 

효자동, 창성동, 통의동에 걸쳐 있는 마을은 장동(壯洞)이라 하였는데 처음에는 창의동(彰義洞)이라 하다가 변해서 장의동(壯義洞)이 되고 다시 장동으로 줄여서 불렀는데 지금의 효자로를 따라 서쪽으로 길게 형성된 마을이다. 효자동과 창성동에 걸쳐있는 마을은 흰갯골 혹은 백구동(白拘洞)으로 불렀는데 경복궁 가까이에 있던 이 동네에서는 흰털을 가진 개를 많이 길렀기 때문이다.

 

현재의 효자동은 동쪽으로 효자로를 사이에 두고 세종로의 경복궁과 접하고 북쪽으로 궁정동과 인접하고 서쪽은 옥인동과 남으로는 창성동과 이웃하고 있으며, 종로구의 북부지역에 위지해 있다. 경복궁 서쪽에 위치한 효자동은 조선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러 번성했던 곳이며 일제 때에도 비교적 한국인이 많이 살았던 지역이다. 지금의 주택가도 일제 초에 대부분 구획정리된 상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전차노선이 효자로에 개설되면서부터 1968년 전차궤도가 철거되기까지, 서민, 학생들이 세검정계곡의 맑은물과 능금, 자두 등의 꽃구경 또는 과일을 맛보기 위해 효자동 종점에서 내려서 걸었기 때문에 매우 많은 사람들이 효자동을 통과하였다. 한때 효자로는 한적한 길이었으나 1993225일 청와대주변 개방이후에는 많은 시민들이 이 길을 이용하고 있다.

 

통인동

조선시대 이곳 옛 마을의 하나인 한성부 북북 준수방 통곡과 인왕산의 글자를 각각 한자씩 따온 데서 유래되었다. 193641일 서울의 동명을 일제식의 정()으로 일원화 하면서 통동(通洞)에서 통인정(通仁町)으로 바뀌어 졌다. 이는 이웃해 있던 통의동(通義洞)1914년의 동명 개정 때 통의방(通義坊)의 방명(坊名)을 그대로 따서 동명으로 삼은데 비해 통인동은 이곳을 이룬 옛 자연부락인 통곡(通谷)의 이름을 따서 통동이라 하다가 1936년 동명 개칭 때 이웃한 동의 이름을 유교의 기본 덕목이 되는 인의예지(仁義禮智) 가운데 두 번째인를 사용한 대신 통동은 그 첫째 근본이 되는을 넣어 통인정으로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예는 인의동, 예지동의 동명을 들 수 있다.

 

통인동을 이룬 자연부락 가운데 통곡은 통골이라고도 하며 사포서(司圃署)가 있는 마을은 사포동, 옥인동과 통인동에 걸쳐 있는 마을은 옥동(玉洞) 혹은 옥류동(玉流洞)이라 하였다. 현재의 통인동은 동으로 자하문길을 경계로 하여 창성동·통의동과 마주하며 남쪽에는 체부동, 서쪽에는 누하동이 있으며 북쪽에 옥인동이 자리잡고 있다.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에 자리잡은 통인동은 궁궐이 가까웠던 만큼 이와 관련된 관청이 여럿 있었고 관청 출입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 받은 통인동은 지금도 주택가로는 으뜸으로 꼽고 있으며 이곳 주민들도 서울 사람이라는 자긍심이 대단히 높다.

 

세종로 1번지

일제시대 총독관저 (總督官邸)가 경무대 (景武臺), 청와대 (靑瓦臺)로 되었으며 조선 총독부가 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보존(保存)되었으나 광복 50주년을 맞아 경복궁 복원 사업으로 1996년 철거 되었다.

 

청풍계 백운동 노래와 충.효의 고장 청운효자동

3호선 경복궁역(4번출구) → ① 옛 청와대 보안여관 → ② 창성동 한옥마을→ ③ 쌍홍문 터 및 해공 신익희 가옥 → ④ 무궁화 동산 → ⑤ 육상궁 → ⑥ 최규식 경무관 동상 및 창의문 → ⑦ 윤동주 시인의 언덕 → ⑧ 백세청풍바위 및 김상용 집터 → ⑨ 송강 정철 집터 및 시비 → ⑩ 선희궁 터 → ⑪ 국립 서울 농맹학교 담장벽화 → ⑫ 우당 기념관 → ⑬ 기린교 → ⑭ 윤동주 시인 누상동 하숙집 → ⑮ 박노수 가옥 이상범 가옥 및 화실 세종대왕 나신터 자하문길

 

2 사직동 社稷洞

 

적선동

이 지역이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적선방이었기 ?문에 지명이 그대로 계승되었다. 원래 왕가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에 이웃하고 또 의정부를 위시한 중요 관청과도 인접하여 있었기 ?문에 특별히 적선지가(積善之家) 필유여경(必有餘慶)이라는 옛 글귀의 뜻을 취하여 이곳은 적선, 그 남쪽 지금의 세종로 네거리 남측 일대는 여경이라 하였다. 적선동은 조선 초기까지 한성부 서부 인달방과 적선방에 걸친 지역이었다. 적선동은 여러 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으며 경복궁과 가까이 위치하기 때문에 관아명칭에 따른 동명이 많았다.

 

월궁동(月宮洞)은 월성위궁골이라고도 하는데 여조의 둘째부마(月城尉) 김한신(1720~1758)이 살았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다. 김한신의 자는 유보(幼輔)인데 13세 때 영조의 제2녀 화순옹주(和順翁主)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졌다. 오위도총부 도총관제용감제조를 지냈으며 8법의 글씨를 다 잘 써서 애시책문(哀諡冊文)을 자주 썼다.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붕어다릿골은 붕어다리가 있다하여 붙여진 명칭인데 한자로는 어교(魚橋)라 하였다. 적선동 77번지 정부종합청사 부근 효자동쪽 입구에 있었는데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북어교(北御橋)로 되어 있다. 북어교에서 붕어교로, 다시 어교(魚橋)로 변하였다.

 

십자교(十字橋)는 서십자각(西十字閣) 서쪽에 형성된 마을로 서십자각다리가 있기 때문에 십자교라 하였고, 내자동 71번지와 적선동 사이에는 종침교(琮琛橋)가 걸쳐 있었으므로 부근의 마을은 종교동(宗橋洞) 혹은 종침다릿골로 불려졌다. 내자동과 적선동 경계 부근에는 장흥고(長興庫)가 있었다. 설치 당시에는 남부 호현방으로 지금의 충무로1·회현동1·남대문로3가 접경지대에 있었는데 후에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장흥고가 있는 마을이라 해서 장흥고동·장흥동·장흥곳골로 불렸다.

 

한편 장흥고동에 대해서 한경지략에 장흥동에는 옛날에 장흥고가 이곳에 있었고 읍취헌( 翠軒) 박은(朴誾)의 옛 집터이며 또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의 집으로 그가 손수 심은 소나무 한그루가 일찍부터 있다. 일찍이 좌상(左相) 김광국(金光國)의 집으로 쓰여지기도 했는데 김광국의 집은 새로 지은 것으로 구조가 너무 사치스럽다 하여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황폐하여 말썽이 되었던 옛집을 찾아 볼 수가 없다고 일대를 설명하였다.

 

사은동( )은 사온섯골이라 하는데 적선동 170번지에 사온서( )가 있었기 때문에 그 부근의 적선동·세종로·도렴동에 걸쳐있는 마을의 이름이 유래되었다. 적선동은 북으로 통의동, 동쪽은 세종로, 남쪽에 도렴동이, 서쪽에 내자동으로 연접되어 있으며 사직로가 동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사 위를 지나는 사직로를 경계로 북쪽은 주택지구, 남쪽은 재개발된 상업업무중심지구로 확연한 구분이 되어있다.

 

필운동

북쪽으로는 누상동(樓上洞누하동, 동쪽으로는 체부동(體府洞내자동(內資洞), 남쪽과 서쪽으로는 사직동(社稷洞)과 접해 있다. 조선 전기에는 한성부 서부 인달방(仁達坊) 관할지역이었으며, 1894(고종 31)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 개편 때는 인달방 내수사계(內需司契) 도가동(都家洞), 사직동계 사직동, 수성궁계(壽城宮契) 송목동(松木洞도가동·남정현(南征峴), 분선공계(分繕工契) 전정동(塡井洞필운대·구동(龜洞)이 필운동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19144월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도가동, 사직동, 송목동, 도가동, 전정동(塡井洞), 필운대, 구동, 대구도가동(大口都家洞) 등이 통합되어 필운동이 되었으며, 같은 해 9월 출장소 제도 신설로 경성부 서부출장소 필운동이 되었다. 19364월 동명이 일본식 지명인 필운정이 되었으며, 19434월 구제(區制) 실시로 종로구 필운정이 되었다.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이 동()으로 바뀔 때 필운동이 되었다. 법정동인 필운동은 행정동인 사직동(社稷洞) 관할하에 있다. 필운이란 지명은 필운대 이름에서 연유한다. 거북골(일명 龜洞), 남정동, 도가동, 대구도가동, 송목동 등의 옛마을이 있었다. 거북골은 거북 모양의 거북바위가, 남정동은 남정문이, 도가동은 물건을 제조·판매하는 도가집이, 대구도가동은 대구를 파는 도가집이, 송목동(일명 소나무골)은 소나무가 많았다는 데 명칭이 연유한다.

 

누상동(樓上洞), 누하동, 옥인동(玉仁洞) 일대를 포함한 지역에 인경궁(仁慶宮)이 있었다. 인경궁은 1676(광해군 9)~1682년에 짓다가 인조반정으로 중단하였다. 1692(인조 11)에 일부를 철거하여 창경궁(사적 123) 건립에 사용하였고 나머지 전각들은 효종 때까지 남아 있었다가 숙종과 영조 때 없어지고 민가들이 들어섰다. 12번지에는 대한제국 당시 궁내부대신을 역임한 심상원(沈相源)의 집터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배화여자대학, 배화여자고등학교, 배화여자중학교, 매동초등학교 등이 있다. 기념관으로는 육영수여사기념관이 있으며, 사회복지시설로는 1997년에 설립된 아나율의 집이 있다.

 

체부동

북쪽으로는 통인동(通仁洞), 동쪽으로는 통의동(通義洞), 남쪽으로는 내자동(內資洞), 서쪽으로는 필운동(弼雲洞)과 접해 있다. 조선 초기에 한성부 북부 순화방(順化坊), 1751(영조 27)에 한성부 북부 순화방 사재감계(司宰監契)에 속하였다. 1894(고종 31) 갑오개혁으로 한성부 북서(北署) 순화방 하패계(下牌契) 구곡동(九曲洞체부동(體付洞누각동(樓閣洞) 등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한성부 북서 순화방 하패계 구곡동·체부동과 누각동 일부가 통합되어 체부동이 되었다. 19364월 동명이 일본식 지명으로 변경됨에 따라 체부정이 되었으며, 19434월 구제(區制) 실시로 종로구 체부정이 되었다.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이 동()으로 바뀔 때 체부동이 되었다. 법정동인 체부동은 행정동인 사직동(社稷洞) 관할하에 있다. 체부란 지명은 체찰사부 또는 체부청이 있었다는 데 연유한다. 구곡동, 누각동 등의 자연마을과 다리인 금천교(禁川橋)가 있었다. 구곡이란 명칭은 마을이 아홉 굽이나 꾸불꾸불한 곳에 있다는 데 연유하며, 금천교는 고려시대 충숙왕 때 가설된 적선동(積善洞), 통의동, 내자동 등으로 통하는 십자로에 있던 돌다리이었는데, 도로공사로 매몰되었다.

 

도렴동

조선초기에 도렴서(都染署)라는 관아가 있었다고 하여 이름한 것이다. 조선왕조에서 처음 도렴서를 설치한 것은 태조 원년(1392)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아직도 고려왕조의 옛도읍 개성에 있을 때의 일이요, 이곳 지금 도렴동에 도렴서가 설치되었던 것은 태조 3년에 한양천도가 실현되고 이듬해에 경복궁이 준공된 다음 즉 태조 4·5년경의 일일 것으로 보여진다.

동국여지비고1 혁파공서조(革罷公署條)를 보면, 도렴서라는 관아는 조선에서 창설한 것이 아니요, 이미 고려왕조 때부터 있던 관제를 그대로 인존(因尊)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도렴서는 그 관부명이 표시하는 것처럼 주로 궁중진헌용 직조물의 염색을 맡았던 관청으로서, 고려의 제11대 문종 때에 정8품의 영1, 9품의 승2인 외에 다시 사()4, 기관(記官) 2인을 두어서 그 일을 맡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충렬왕 34년에는 잡직서라는 관청과 병합하여 직염국으로 개편하기도 하였지만 충선왕 2(1310)에 다시 도렴서로 복원하여 말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조선에서도 고려시대의 직제, 임무 등을 그대로 계승하여 한양천도 후에 도렴서를 궁궐에서 가까운 이곳에 설치하였고, 70여년은 지나서 세조 6(1460)에는 중부수진방(壽進坊)에 있는 제용감(濟用監)에 병합되었다.

 

1914년 동리구역을 조정 개편할 때에는 도렴서가 있는 일대의 마을인 도렴동, 공조(工曺)의 뒤가 되므로 붙여진 공후동(工後洞) 혹은 공조뒷골, 적선동 170번지에 궁중에서 필요한 술과 감주를 공급하는 관아가 있었고, 그 주변의 부락은 사온동( ) 혹은 사온섯골, 의영고가 있던 주변의 마을은 의영곳골 혹은 의영동(義盈洞)의 구역을 합하여 도렴동을 신설하여 지금에 이른다. 현재의 도렴동은 북으로 내자동길을 경계로 하여 적선동과 남으로는 당주동, 서쪽으로 내수동, 동쪽은 세종로로 둘러싸인 삼각형 모양의 지형이다. () 면적의 60%이상이 세종문화회관의 주차장과 경희궁 시민공원 등으로 되어 있고 실제 생활주거 면적은 30% 정도밖에 안된다. 도렴동 45번지에는 교통방송국이 위치해 있다.

 

당주동

19144월 경성부제 실시하면서 서울의 동리를 폐합 조정할 때에 종래의 봉상사전(奉常司前), 내섬동(內贍洞), 남문동(南門洞), 창례동(昌禮洞), 북문동(北門洞), 대창동(大昌洞), 훈조동(燻造洞), 야주현(夜珠峴), 당피동(唐皮洞)의 각 일부를 합한 동인데 종래의 동명 중 당피동의 자와 야주현의 자를 따서 붙인 동명이다. 당주동을 이룬 여러 개의 자연부락의 유래를 보면 내섬시가 있어 붙여진 내섬동은 내섬삿골이라고도 하며, 봉상사 앞에 있는 마을은 봉상사전동 혹은 봉상사 앞골이라 했다. 남문동은 봉상사의 남문이 있으므로 붙여진 동명으로 남문골이라 했고, 북문이 있는 곳을 북문골 혹은 북문동이라 하며 내수동과의 경계에 걸쳐 있다.

 

대창동과 훈조동에 걸쳐 있던 마을은 창례동, 봉사사의 대청이 있는 마을은 대청동 혹은 대청골이라 했는데 음이 변해서 대창동으로 되었으며, 대창골 아랫쪽에 있는 마을은 아래 대청골이라 불렀다. 또한 당주동과 신문로1가의 세문안교회터에 걸쳐 있던 마을은 훈조동이라 불렀는데 메주가마가 있었기 때문이며 메주가맛골이라고도 하였다.

 

당주동의 동명이 된 당피동 혹은 당핏골은 중국 의원 피씨가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며, 야주현은 야주개로 불리워졌으며, 이 고개에 서면 경희궁의 정문인 홍화문의 현판이 명필이어서 밤에도 거리를 비치기 때문에 그 앞의 지명을 야조가(夜照街)라 하였고 야주현(夜晝峴)의 주()가 같은 음의 주()로 바뀌어졌다.

 

내수동과 당주동, 도렴동의 경계 부근에는 승전빗다리 혹은 승전교(承傳橋), 승전색교(承傳色橋)라는 다리가 있었는데 승전빗아치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 북악산 쪽에서 흘러내린 물이 청운동, 효자동을 거쳐 세종로 쪽으로 모여 들었던 조선시대의 당주동 풍경은 얕으막한 동산과 작은 개천들이 함께 어우러졌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의 당주동은 북으로 내수동, 동으로 도렴동, 남쪽은 신문로1, 서쪽은 신문로2가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치 부채를 활짝 편 것과 같은 지형이다. 1970년대말부터 시작된 도심재개발 지역으로 비교적 일찍 정비가 시작된 까닭에 동의 동서와 남북간을 폭 10m 이상의 도로가 통과하고 있는 전형적인 도심의 구조형태를 이루고 있다.

 

내수동

옛날 내수사(內需司)라는 관청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1914년에 동명을 개정할 때에는 영빈동(英嬪洞), 누정동(樓井洞), 승전교(承傳橋), 내수사전동(內需司前洞), 내수사와 사직동(社稷洞), 박정동(朴井洞), 종교(宗橋), 대창동(大昌洞), 북문동(北門洞)의 각 일부를 합하여 수창동(需昌洞)으로 이름하였다가 뒤에 내수동으로 고쳤다. 옛날에는 이곳이 서부 인달방(仁達坊) 관내에 속하였다.

 

내수사는 그 이름이 의미하는 것처럼 궁내에서 쓰는 미곡, 포백(布帛), 잡물과 노비 등의 수요를 공급하는 것을 임무로 하였다. 궁중의 수용(需用)도 물론 정상적인 경용(經用)은 호조나 탁지부에서 공급하였던 만큼, 본사(本司)에서 공급하는 것은 그러한 정상적인 경용 외에 사용지수(私用之需)였던 것이다. 내수동을 이룩한 자연부락으로는 내수사(內需司)가 있었다. 직염국으로 개편하기도 하였지만 충선왕 2(1310)에 다시 도렴서로 복원하여 말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조선에서도 고려시대의 직제, 임무 등을 그대로 계승하여 한양천도 후에 도렴서를 궁궐에서 가까운 이곳에 설치하였고, 70여년은 지나서 세조 6(1460)에는 중부수진방(壽進坊)에 있는 제용감(濟用監)에 병합되었다. 1914년 동리구역을 조정 개편할 때에는 도렴서가 있는 일대의 마을인 도렴동, 공조(工曺)의 뒤가 되므로 붙여진 공후동(工後洞) 혹은 공조뒷골, 적선동 170번지에 궁중에서 필요한 술과 감주를 공급하는 관아가 있었고, 그 주변의 부락은 사온동( ) 혹은 사온섯골, 의영고가 있던 주변의 마을은 의영곳골 혹은 의영동(義盈洞)의 구역을 합하여 도렴동을 신설하여 지금에 이른다.

 

현재의 도렴동은 북으로 내자동길을 경계로 하여 적선동과 남으로는 당주동, 서쪽으로 내수동, 동쪽은 세종로로 둘러싸인 삼각형 모양의 지형이다. () 면적의 60%이상이 세종문화회관의 주차장과 경희궁 시민공원 등으로 되어 있고 실제 생활주거 면적은 30% 정도밖에 안된다. 도렴동 45번지에는 교통방송국이 위치해 있다. 내수사가 있음으로 해서 내수삿골·내수사동이라고 했으며 줄여서 내수사라고도 하였다. 이 내수사 앞에 있는 마을을 내수사앞골 혹은 내수사전동이라 하였다. 또 내수동 145번지에 있던 협성여자상업고등학교의 서쪽에 있는 마을은 다락우물이 있으므로 누정동(樓井洞) 혹은 다락우물골·신정우물이라 하였다.

 

내수동과 당주동에 걸쳐 있는 마을은 대창동(大昌洞), 내수동 6번지와 7번지 사이 곧 도렴동 정우빌딩 맞은 편을 도깨비골이라 하는데 골목이 좁고 음산해서 도깨비가 살고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내수동 244~250번지 일대는 북문골이라 하는데 당주동 128번지에 있는 봉상사(奉常寺)의 북문이 있는 곳에 해당되기 때문이며 북문동(北門洞)이라고도 불렀다. 승전교(承傳橋)가 있어서 승전빗다릿골 혹은 승전교라 불렀던 마을이 있었고 숙종의 후궁 영빈김씨(寧嬪金氏)가 살았던 마을을 영빈골, 영빈께, 영빈동이라 하였다. 종침교(琮琛橋)가 있는 근방의 마을을 종침다릿골·종교동이라 부르던 곳은 내자동길을 지나는 곳으로 내수동과 도렴동의 경계지역이다.

 

현재의 내수동을 통과하는 가로는 내자동길이 있는데 종합청사 남단으로부터 내수동을 거쳐 사직공원에 이르는 가로명으로 폭20m, 연장 700m의 길이다. 세종로와 사직로를 연결하고 있는 이 길은 일찍이 조선시대 때 광화문 앞 6조거리에서 사직단으로 가는 주요 도로였다. 내수동은 북으로 내자동길을 경계로 해서 내자동과 마주보고 동쪽은 도렴동과 이웃하고 있으며, 남쪽은 신문로지구 재개발사업이 비교적 완료되어 고청빌딩군()을 이루고 있는 당주동과 이웃하며 서쪽은 신문로2가와 접하고 있는 반달모양으로 지형이 생긴 동이다.

 

내자동

동명이 유래된 내자사(內資寺)는 호조(戶曹)소속 관서이다. 고려 때부터 있어왔던 의성고(義成庫)를 태종 3(1403)에 내자시로 고쳤는데 궁내에 미(), (), (), (), (), (), (), (), 내연(內宴), 직조(織造)등의 공급을 담당하였다. 고려사에는 내자시나 의성고가 보이지 않는 대신 내방고(內房庫)가 있다. 충선왕(忠宣王) 원년(1309)에 운진창(雲臻倉)을 부흥창(富興倉)에 합하고 의성창(義成倉)으로 개칭하였으며 충숙왕(忠肅王) 2년에는 내방고로 고쳤다. 여기에 보이는 의성창 또는 내방고가 내자시의 전신인 의성고와 같은 관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내자시의 위치에 대하여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도 서부 인달방에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서 처음 창설 때부터 조선말기에 폐지될 때까지 같은 장소인 지금의 내자동역내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직염국으로 개편하기도 하였지만 충선왕 2(1310)에 다시 도렴서로 복원하여 말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조선에서도 고려시대의 직제, 임무 등을 그대로 계승하여 한양천도 후에 도렴서를 궁궐에서 가까운 이곳에 설치하였고, 70여년은 지나서 세조 6(1460)에는 중부수진방(壽進坊)에 있는 제용감(濟用監)에 병합되었다.

 

1914년 동리구역을 조정 개편할 때에는 도렴서가 있는 일대의 마을인 도렴동, 공조(工曺)의 뒤가 되므로 붙여진 공후동(工後洞) 혹은 공조뒷골, 적선동 170번지에 궁중에서 필요한 술과 감주를 공급하는 관아가 있었고, 그 주변의 부락은 사온동( ) 혹은 사온섯골, 의영고가 있던 주변의 마을은 의영곳골 혹은 의영동(義盈洞)의 구역을 합하여 도렴동을 신설하여 지금에 이른다. 현재의 도렴동은 북으로 내자동길을 경계로 하여 적선동과 남으로는 당주동, 서쪽으로 내수동, 동쪽은 세종로로 둘러싸인 삼각형 모양의 지형이다. () 면적의 60%이상이 세종문화회관의 주차장과 경희궁 시민공원 등으로 되어 있고 실제 생활주거 면적은 30% 정도밖에 안된다. 도렴동 45번지에는 교통방송국이 위치해 있다. 한경지략(漢京識略)동국여지비고의 내자시조의 기사(記事)말미에 모두 금폐(今廢)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적어도 고종이전에 페지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동국여지비고에는 '금폐'라는 기사 아래 유권초각(有捲草閣)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은 이때에 내자시는 폐지되었지만, 그 청사건물 중의 하나인 권초각만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전일 내자시의 역사를 말하여 주고 있던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내자시의 관장업무도 여지승람이나 한경지략등에서 모두 동국여지비고의 기사와 같은 내용을 기입하여 그 변동이 없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내자시의 관원은 조선초에 정(3), 부정(4), 첨정(4), 판관(5), 주부(6), 직장(7), 봉사(8) 1명씩을 두었으나 조선후기에 와서 감축되다가 고종 19(1882)에 내자시가 폐지된 후에 이 일을 사옹원(司甕院)에서 장악하게 되었다.

 

내자동을 이룬 부락으로는 고간동·곡정동·남정동·전립동·사직동·은행동·장흥동·종교동·창렴동이 있었다. 고간동(古澗洞)은 장흥교의 곳간이 있으므로 곳간골이라고도 하였다. 남정문(南正門)골은 내자동과 필운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남정문재가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며 혹은 남정동이라 하였다. 남정문재는 내자동 277번지 부근에 있던 고개로서 남정문이 있어 남정문재, 한자명으로 南正峴(南征峴)이라 하였다. 전립동(戰笠洞)은 벙거지를 만드는 집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며 벙거짓골이라고도 하였다. 곡정동은 금천교 쪽에 있는 마을로 굽은 우물이 있어서 붙여졌다. 사직동쪽의 마을은 사직골, 은행나무가 있던 부락을 으능나뭇골 혹은 은행동이라 불렀으며 내수동과 연결되는 곳에 있는 마을은 종침다릿골이라 하였다. 또 옛날 도렴동계(都染洞契)와 대창동계(大昌洞契)가 있던 부분의 부락은 창렴동이라 불렀다.

 

내자동은 북으로 체부동, 동쪽으로는 적선동과 접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내자동길을 경계로 내수동과 마주보고, 서쪽은 필운동과 이웃하고 있다. 사직로(社稷路)가 동 북쪽 3/4지점을 동서로 관통하고 있는 내자동은 비교적 주거지역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내자동을 통과하는 가로는 사직로와 내자동길이 있다. 사직로는 동십자각에서 사직공원을 거쳐 독립문에 이르는 폭 30, 연장1,500m로 율곡로·세종로·의주로가 연결되어 있으며, 내자동길은 종합청사 남단으로부터 내수동을 거쳐 사직공원에 이르는 가로명으로 폭20m, 연장700m로 세종로와 사직로를 연결한다. 내자동은 세종로(世宗路)와 연이은 중심지로서 상업지구와 주거지역이 혼재해 있는 지역이다.

 

통의동

동명은 조선시대에 이곳이 한성부 북부 의통방(義通坊)이었다가 갑오개혁 때 통의방(通儀坊)으로 바뀐데서 유래된다. 통의방은 태조5(1396) 4월 한성부에 명하여 한성5부의 각 방명표(坊名標)를 세우게 할 때 북부 10방 중 하나로 처음 기록에 나타나는데 이 의통방이 곧 지금의 통의동을 중심한 지역이었다. 의통이란 방명은 그 후 500년간 지속되어 오다가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관제와 지방구역의 개정이 있으면서 종래 5(五部)5(五署)로 고치고 방동명(坊洞名)의 일부 개정이 있을 때 종전의 의통방이 통의방으로 개칭되었으며 1914년의 동명 제정으로 종전 통의방을 중심지역으로 한 동명으로 바꾸어졌다.

 

통의동을 형성하고 있는 마을로는 흰 소나무가 있다해서 통의동 35번지 일대를 흰소나뭇골, 백송동(白松洞)으로 부르고, 효자동과 통의동 사이에 형성된 마을은 장동(壯洞)이라 하였다. 원래 창의문(彰義門)이 있으므로 해서 창의동이라 하던 것이 변해서 장의동이 되고 다시 장동으로 줄었다.

 

경복궁 영추문(迎秋門)밖에 있는 마을은 매짓골 혹은 매동(梅洞)이라 부르고 창성동과 통의동 사이에는 띠()를 만드는 집이 있다 해서 띳골·대동(帶洞)으로 불렀다. 또 영추문과 마주보는 곳, 매동의 아랫쪽은 서문동(西門洞)으로 불렀다.

 

현재 통의동은 북으로 창성동과 연결되어 있고 동쪽은 효자로를 경계로 세종로의 경복궁과 마주보고 있다. 남쪽은 적선동, 서쪽은 자하문길을 경계로 통인동과 체부동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동의 동쪽에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이 있으므로 궁궐과는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 영조의 잠저인 통의동 35번지 창의궁자리는 동면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1910년 이후 도시계획에 따라 비교적 반듯반듯하게 주택가를 형성하고 있다. 자하문길을 중심으로 한 일부 가로변에 상업지대가 구성되어 있다.

 

신문로2

동명은 돈의문(敦義門)을 새로 지은 성문이라는 뜻을 한자로 옮긴 것에서 비롯된다. 신문로2가는 경희궁과 돈의문이 있기 때문에 이에 관련된 옛지명이 남아 있는 곳이 많다. 농포동(農圃洞)은 농포안이라고도 하는데 경희궁 밖 신문로27번지 일대에 채소를 가꾸는 농포가 있고 내관(內官)들이 관리했으므로 농포가 있던 일대를 일컫는 명칭이다.

 

새문동(塞門洞)은 태조 때 건축한 서대문인 서전문(西箭門)을 세종 때 폐지하고 그 남쪽에 새로 돈의문(敦義門)은 세웠으므로 서전문을 막았다는 뜻으로 붙여진 명칭이다. 서전문의 원래 위치는 지금의 사직동에서 독립문으로 넘어가는 사직터널 근방으로 추측되는데 사직동쪽 신문로21번지 일대가 새문동에 해당된다.

 

순라동(巡邏洞)은 술랫골 혹은 순랏골이라고도 하는데 순라청이 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었다. 신문내(新門內)는 새문안이라 하는데 현 고려병원과 문화방송국 사이에 세종 때 돈의문을 새로 세웠으므로 광화문 방향의 새문안길 좌우쪽의 명칭이다. 오궁골은 오군골·오궁동·오중터라고도 하는데 피어선빌딩이 있는 일대이다. 세조 때 이인손(李仁孫)이 이곳에 살았는데 극배(克培극감(克堪극증(克增극돈(克墩극균(克均)의 아들 5형제가 모두 공신으로서 모두 봉군(封君)되었으므로 오군골이라 했는데 음이 변하여 오궁골이 되었다.

 

장생동(長生洞)은 조선시대 공신(功臣)의 도상(圖像)과 관재(管材)인 동원비기(東園秘器)를 보관하던 장생전(長生殿)이 있었기 때문에 명칭이 유래되었다. 장생전은 1395년에 경복궁 서쪽 사직단 근방에 지어 공신의 도상을 모셔두었으며 1411년에 이를 수리해서 사훈각(思勳閣)으로 개칭하고 태조와 개국공신의 도상을 모셨다. 1433년에 북부 관광방으로 옮겨 지은 후 장생전으로 환원하였고 1504년에 혜안전후동(惠安殿後洞)으로 옮겼다. 장생전의 관원은 도제조(都提調) 1, 제조(提調) 3, 낭청(郎廳) 3명이 있었는데 모두 겸직으로 도제조는 영의정, 제조는 호조·예조·공조판서가, 낭청은 호조·예조·공조낭관으로 임명되었다.

 

함춘원(含春苑)골은 경희궁 남쪽에 있는 동산으로 담을 둘러쌓고 나무를 기른 함춘원이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지리적으로 보아 경희궁 맞은 편 새문안길 남쪽에 접한 지역으로 추축된다. 홍화문골은 홍화문동(弘化門洞)이라고도 하는데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이 있으므로 붙여진 지명이다. 현재의 신문로2가는 동으로 내수동, 당주동, 신문로1가와 남쪽으로 평동, 중구 정동, 충정로 서쪽은 송월동, 홍파동, 행촌동이 있으며 북으로 사직동으로 둘러 쌓여있으며, 동 전체 면적의 약 절반은 경희궁 공원이 차지하고 있다.

 

신문로1

동명은 서대문(西大門)의 속칭이 새문이므로 이를 한자로 옮겨 적은데서 유래된다. 신문로라는 지명은 길가 서쪽 언덕위에 도성(都成) 4대문의 하나인 서대문이 있기 때문이었는데 서대문은 원명이 돈의문이었으며, 또 그 위치가 몇번 변경됨에 따라서 서전문(西箭門), 신문(新門), 새문으로도 불렸다. 1914년 서대문정이 형성되기 전에도 이 부근에는 신문내라는 동리가 있었으며, 그 곳을 새문안 그 지역내에 있는 교회를 새문안교회로 부르는 것도 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신문로1가는 도성의 4대문 가운데 하나인 서대문으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시대에는 비교적 번잡한 곳에 속하였다. 따라서 여러부락이 합쳐져서 신문로1가를 형성하였는데 세종로와 신문로1가에 걸쳐있는 마을을 동령동(東嶺洞) 혹은 동령골이라 했는데 동쪽에 황토마루가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광화문빌딩(국제극장)일대가 해당된다.

 

원동(園洞)은 동산(東山) 혹은 동산말이라고 하는데 동령동에서 이어지는 곳으로 얕으막한 함춘원(含春苑)의 동산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비변삿골은 신문로259번지에 비변사가 있었기 때문이며 새문안길을 따라 구세군회관이 있는 곳까지였다. 신문로1169번지에는 선공감(繕工監)이 있었으므로 주변의 부락을 선공동 혹은 선공감골이라 하였고 43번지 일대는 염정동(廉井洞) 혹은 염정골·염정수골이라 불렀는데 철종의 가짜 외숙 염정수(廉井洙)가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새방골은 전 세종로 동사무소가 있던 일대로 관기(官妓)들이 많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방골·하방교 또는 아랫방골이라 부르는 곳은 신문로1가와 세종로에 걸쳐있는 마을인데 수선전도(首善全圖)서울지도에 교량 표시만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경희궁에서 가까운 순서로 하방교(下芳橋중방교(中芳橋상방교(上芳橋)로 생각되며 다리의 부근 부락을 아랫방골·중방골·웃방골이라 하였다.

 

동산말 동쪽에는 우물이 있다 해서 우물골 혹은 정동(井洞)이라 불렀으며 염정숫골 서쪽의 마을은 창림정동(昌林井洞)으로 불렀다. 당주동과 이어지는 세종문화회관 사잇길을 야주개·야주현 혹은 애주갯골로, 새문안길 남쪽으로 신문로1가와 2가 사이에 형성된 부락은 오궁동(五宮洞)으로 불렸다. 러시아영사관 동북방향으로 구러시아영사관 일부 부지도 포함되었으나 지금은 빼곡하게 민가가 들어서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새문안교회 동쪽에서 당주동에 걸쳐있는 마을은 관청 납품용 메주를 쑤는 곳이 있다해서 붙여진 메주가맛골·훈조동(燻造洞)이 있었다.

 

신문로223번지에 있었던 다리를 송교(宋橋), 옛전 경기여고를 들어가는 골목입구에 백목전이 있었으므로 이곳에 놓여있던 석교를 백목전다리(白木橋)라 하였다. 현재의 신문로1가는 동으로 세종로와 남으로 중구 정동, 서쪽은 신문로2, 북쪽에 당주동이 있으며 동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새문안길이 동서로 길게 뻗어있다.

 

세종로

우리나라의 정치중심지로 역대 제왕중 업적이 가장 뛰어난 세종대왕의 정치를 본받으라는 뜻에서 그 묘호(廟號)를 따서 붙여진 동명이다. 세종로는 비각에서 세종문화회관을 거쳐 광화문까지의 구간으로서 광화문통이라 부르던 것을 1946년에 개명한 것이다. 이 거리를 세종로로 변경했던 것은 그것이 옛날의 왕궁인 경복궁의 앞거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며 이 거리는 세종대왕의 탄생지인 준수방(俊秀坊)에서 멀지 않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세종로동은 조선시대 옛 지명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그에 관계되는 지명이 많이 남아있다. 세종로와 도렴동이 이어지는 세종로 81-3번지 세종문화회관 자리에는 토목·건축·산림 및 하천관리를 담당했던 공조(工曹)가 있었으므로 그 뒤쪽 동네는 공후동(工後洞공조뒷골이라 하였다. 신문로11번지와 세종로 202번지 사이에는 광제교(廣濟橋)가 있었으므로 인근의 마을은 광제교, 중구 태평로1가와 연결되는 광화문지하도 광화문빌딩쪽 출입구는 구서부동(舊西部洞구서붓골이라 하였다. 191번지 현대빌딩의 당주동쪽은 당피동(唐皮洞당핏골, 도렴동 12번지와 이웃한 세종로쪽은 도렴서가 있다 하여 도렴서동(都染署洞도렴섯골, 세종로 202번지 일대는 동령동(東嶺洞동령골이라 했는데 동쪽에 황토마루가 있다 하여 구리색의 누런 빛이 나는 고개의 의미로 동령동(銅嶺洞)이라던 것이 변하여 동령동(東嶺洞)으로 되었다.

 

현 동아일보사가 있는 곳은 조선시대에 주석전이 있었으므로 교보빌딩 뒤쪽을 주석전골·두석동(豆錫洞)이라 하였고, 세종로 150번지 지금의 교보빌딩 자리는 노예(奴隸)의 부적(賦籍) 및 송사(訟事)를 맡은 장예원이 있었는데 1764년에 보민사(保民司)로 고쳤으므로 그 일대를 보민동(保民洞보민삿골로 불렀다. 사온동( )은 적선동 170번지에 사온서( )가 있었으므로 인근을 사온섯골·사온동이라 하였는데 정부종합청사 후문쪽 일부가 여기에 해당된다. 중구 태평로 60~61번지에는 조선시대 중등교육과정인 사학(四學) 가운데 하나인 서학(西學)이 있었고, 이 근처에는 얕으막한 고개가 있었으므로 이를 서학현(西學峴서학재라 하였는데 태평로1가와 세종로의 경계부분에 해당된다.

 

신문로123번지에는 송기교(松杞橋)가 있었으므로 그 인근의 부락을 송기교·송기다리라 하였는데 근방에 가죽을 파는 송기전(松杞廛)이 있었으므로 다리이름이 유래되었다. 하방교(下芳橋)는 하방골·아래방골이라고도 하는데 신문로1가와 세종로 사이에 걸쳐있는 다리의 이름이 하방교이므로 인근의 마을은 하방골이라고도 하였다.

 

문화부와 미대사관이 있는 곳은 조선 초기에 손님 접대와 연향(宴享) 및 종재(宗宰)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관청인 예빈사(禮賓寺)가 있었으므로 예빈싯골, 예빈동(禮賓洞)이라 하였다. 이 예빈시는 현재의 중구 태평로2가로 옮겼다가 1778년에 소공동의 남별궁자리로, 다시 중구 북창동으로 옮겼다. 송기다리 동북쪽에서는 이간우물이 있으므로 인근의 마을을 이간정동(二間井洞이간동(二間洞이간우물골이라 불렀다. 지금의 광화문로타리는 황토가 많은 얕으막한 고개로 되어있으므로 황토마루라 하였고 이 고개를 중심으로 세종로·신문로1·태평로1가 이름에 있는 마을을 황토마을 황토현(黃土峴)이라 불렀다.

 

한편 청운동쪽의 물이 흘러내려 광화문 앞을 지나 중학동에서 삼청동쪽에서 흘러내린 물과 합쳐지므로 세종로에는 여러 개의 교량이 있었다. 붕어다리는 어교(魚橋)라고도 부르는데 광화문 동쪽에 서쪽에 놓여진 다리를 말한다. 동쪽은 동붕어교, 서쪽은 서붕어교라고 하는데 어교(御橋)라던 것이 변하여 어교(魚橋)가 되고 다시 와전되어 붕어다리라고 했던 것 같다. 동십자각 옆에 있는 다리는 십자교(十字橋)라 하였다. 현재의 세종로는 북으로 경복궁과 청운동, 동쪽은 중학동과 종로1, 2가동, 남쪽은 서린동, 중구 정동, 무교동과 서쪽은 적선동, 도렴동, 신문로1가로 둘러 싸여 있으며 노폭 100m, 총연장 600m의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길이며, 심장에 해당하는 지역이자, 주요도로이다

 

사직동

동명이 보이는 것은 퍽 오래 전부터의 일로서 영조 27(1751) 9월에 왕이 성내 시민의 도성수호에 대한 절차 등을 윤음으로 반포하는 중에도 사직동계의 명칭이 보인다. 그리고 1914년 경성부제의 실시와 함께 동리간의 구역을 재조정할 때에는 옛 사직동의 일부에 무덕문(武德門)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무덕문골 혹은 줄여서 무덕동이라는 마을로서 무덕문은 사직동에서 신문로 2가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었던 것으로 경희궁의 북문이었다. 그리고 사직동과 내수동에 걸쳐 박우물이 있다하여 박우물골 또는 박정동(朴井洞)이라는 마을과 도정궁(都正宮) 앞 등 너머에는 너멍골이, 사직동 서쪽에는 창평동(昌平洞)을 합하여 사직동으로 하였는데, 동명은 사직단(社稷壇)이 있음으로 해서 유래되었다.

 

사직동 동명 유래가 되는 사직단은 사직동 1 -28에 위치한다. 원래 사직의 연원은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사()는 토신(土神), ()은 곡신(穀神)을 의미한 것인데 토신은 곧 국토를 주재하여 관리하는 신으로, 곡신은 농작의 풍흉(豊凶)을 좌우하는 신이라 보았던 만큼 농업을 주산업으로 하던 고대 농본(農本)국가에서는 왕신의 조선(祖先)을 모신 종묘와 함께 가장 중시하던 시설이었다. 따라서 근대에 와서는 국왕이나 대신은 종묘사직과 사생(死生), 존망(存亡)을 같이 할 의무를 느끼기도 하였으며 또 사직은 국가를 의미하는 말로 쓰기까지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선덕왕(善德王) 때에 사직단이 처음 설치되어 그 제사(祭祀)가 국가 사전(祀典)에 의하여 거행되었고 고려 때는 성종 10년부터 왕의 교지(敎旨)에 의해 설치되었으며, 뒤이어 사직단의 제사의식 등이 상정되고 국가에서 큰 일이 있을 때에는 왕이 사직단에 나아가서 직접 제사를 드렸다.

 

한편 조선에서는 태조 2년 한양에 도읍을 정한 뒤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제도에 따라 종묘는 당시 왕궁인 경복궁의 동쪽인 동부 연화방에 두고 사직은 왕궁의 서쪽인 서부 인달방 즉 지금의 사직공원 안에 설치하였는에 태조 4(1395)에 조영되었으며 단이 완성되자 주변에 동서북쪽 산기슭을 따라 담장을 두르고, 안에 신실(神室)과 신문(神門)을 세웠다.

 

사직단은 19077월 이후부터 제사가 폐지되면서 공원으로 조성되었고 공원에는 신사임당(19701014일 건립), 이율곡(196988일 건립)의 동상과 김동인문학비(197610월 건립)와 공원안 언덕쪽에는 시립종로도서관이 있고 사직동 1 - 48번지에는 국내유일의 어린이 전용도서관이 자리잡고 있으며 황학정 근처에는 사직노인정이 외로운 노인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사직동은 북으로 누상동, 필운동이 서쪽은 무악동, 행촌동 남쪽은 홍파동, 송월동, 신문로2가와 동쪽에 내수동, 내자동이 둘러싸고 있다. 인왕산의 정상에서 동쪽과 남쪽을 관할구역으로 하여 그 산록에 자리잡은 사직동은 공원지구와 주택단지가 어우러져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법정동과 행정동이 일치하는 사직동은 행정관할 면적의 약 50%를 차지하고 있다.

 

세종마을 사직동 코스 : 좌묘우사(左廟右社)

5호선 광화문역(2번출구) → ① 광화문광장 → ② 대림미술관 → ③ 통의동 백송 터 및 창의궁 터 → ④ 홍종문 가옥 → ⑤ 배화여자학교 및 백사 이항복 집터(필운대) → ⑥ 황학정 → ⑦ 단군성전 및 사직단 → ⑧ 오솔길 → ⑨ 성곡미술관 → ⑩ 서울역사박물관 → ⑪ 서울시립미술관 → ⑫ 경희궁 → ⑬ 흥국생명 앞 조형물 '해머링 맨' 신문로1

 

3 삼청동 三淸洞

 

소격동

동명은 삼청전(三淸殿)의 삼청성진(三淸星辰)의 제사를 지내는 소격서(昭格署)가 있었다하여 유래되었다. 소격동은 소격서가 있던 곳인데 일설에는 화동24번지라고 하나 오히려 소격동 24번지가 맞다. 이는 소격서가 삼청전의 제사를 주관하였던 관청인 만큼 삼청전 입구에 있어야 했고 지금의 삼청동길이 원래 개천이었던 데다가 이 근방에 소격서다리가 있었기 때문에 증명된다. 더구나 소격동의 이전 명칭이 오래전부터 소격서동(昭格署洞)이었고 삼청동의 동명 역시 임진왜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아 도가류(道家類)의 수도·기도의 전당인 삼청전은 산수가 깨끗하고 수려하여 동곡(洞谷)이 깊은 곳에 있었지만, 정부에서 임명한 관원들의 일상적 집무처인 소격서는 삼청동 입구인 소격동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소격동을 이룬 옛 부락으로 대안동(大安洞)은 큰 안동(安洞)이라고 하며 송현동·안국동·소격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소격동 국군서울지구병원 동쪽의 동네가 해당된다. 화개동(花開洞)은 장원서의 화초 재배지가 있으므로 붙여진 명칭으로 화동(花洞)이라고도 하며 소격동과 화동이 인접한 곳, 대안동의 북쪽이 해당된다. 현재의 소격동은 동으로 화동과 안국동, 남쪽에 송현동과 사간동 , 서쪽은 삼청동길을 경계로 하여 세종로 1번지와 마주 보며 북쪽은 팔판동으로 싸여 있다. 동면적의 약 절반 가량이 국군서울지구병원이 점유하여 나머지 거의 모든 면적은 주거전용지구로 지정되어 있다.

 

삼청동

동명은 도교(道敎)의 삼청전(三淸殿)이 있어서 유래되었다. 삼청동은 도성(都城)의 북쪽지구에 해당되면서 경복궁의 동북지역인데 산이 맑고(山淸) 물도 맑으며(水淸) 그래서 사람의 인심 또한 맑고 좋다(人淸)는 뜻의 삼청(三淸)이 되었다. 삼청동은 옛날부터 경치가 아름답고 맑은 계곡물이 흘러 내려 도심인의 몸과 마음을 맑게 해주었으므로 바위나 다리, 우물, 골짜기 등에 얽힌 이야기와 이름도 많이 남아있다. 가까이 있을 때에는 한번 발을 들여 놓으면 떠나기가 싫고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리워서 뛰어가 보고 싶은 것이 삼청동의 맑고 깨끗하고 그윽한 경치이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명사(名士)들이 이곳을 찾아와 아름다운 풍광을 시로 읊었는데 손곡(蓀谷) 이달(李達)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북촌(北村)의 시장은 거리와 잇따르고, 무성한 가을숲은 성곽을 뒤덮었네.

삼청보전(三淸寶殿)은 옛모습 그대로인데, 한번 종소리 울리니 궐문(闕門)을 닫네.

흐르는 물은 바위 아래로 떨어지고, 이슬 젖은 풀사이로 반딧불 날아드네.

멀고 먼 세상근심 이제야 잊고자, 밤 이미 깊었지만 돌아갈 줄 모르네.

 

용재( ) 성현(成俔)용재총화( 齋叢話)에서삼청동은 소격서(昭格署) 동쪽에 있는 마을로 계림제(鷄林第)에서 북쪽이고 송림 사이로 맑은 샘물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산은 높고 수림은 빽빽히 들어서 있으며 깊숙한 바위골짜기를 따라 수리(數理)를 못가 바위가 깎아질러 벼랑을 이루는데, 뿌리는 물이 낭떠러지에 무지개를 드리듯 사방으로 흩어지는 물방울은 구슬 같다. 그 아래에는 물이 고여 소()가 되고 언저리는 편평하고 넓어서 수십명이 앉을 만한데 장송(長松)이 얽혀 그늘을 만들고 있다. 두견(杜鵑)과 단풍잎으로 봄과 가을에는 붉은 그림자가 비쳐 진신(瑨紳)들이 많이 놀고 그 위로 수보(數步)를 가면 넓은 굴이 있다. 하여 당시의 풍치를 소개하였다. 정조도 국도팔영(國道八詠) 가운데 삼청녹음(三淸綠陰)을 넣었다.

 

현재의 삼청동은 북쪽으로 부암동과 성북구 성북동, 동쪽은 계동, 원서동, 가회동 남쪽에는 팔판동과 화동, 서쪽은 청운동과 접하고 있다. 국무총리공관, 금융연수원, 감사원, 문교부 중앙교육연수원 등과 삼청공원이 있는 삼청동은 개발제한구역 면적이 주거와 상업지역보다 더 많다.

 

사간동

중학동 북동쪽 경복궁담의 동쪽 일대를 옛날부터 간동(諫洞) 또는 사간동으로 불러 오는데, 그것은 이곳 경복궁 건춘문(建春門)의 길 건너편에 사간원이라는 관청이 있었던데에 연유한 것이다. 한말까지 중학동(中學洞), 송현(松峴), 벽동(碧洞), 간동(諫洞)이 모두 관광방(觀光方) 중학계(中學契) 안에 있었는데 1914년 부제 실시 때 옛 간동에 다시 벽동의 일부를 포함하여 사간동으로 개편하였다.

 

사간동의 동명유래가 된 사간원은 왕에 대한 충고기관으로 왕의 과실이나 여러 정령(政令)의 득실에 대해 간쟁(諫諍), 논박(論駁)하는 일을 맡았다. 사간동은 사간원이 있던 간동과 송현동, 중학동, 사간동 사이에 걸쳐 형성된 벽동으로 이루어졌다. 벽동은 다락골 혹은 벽장골이라고도 하는데 사간동 91, 97-2번지와 송현동의 미대사관저 서쪽 그리고 율곡로가 지나고 있는 중학동 북쪽 일대가 된다. 벽장처럼 동 사이에 길게 끼어서 이루어진 부락이므로 그렇게 불렀다.

 

현재의 사간동은 북으로 소격동, 동으로 송현동, 남으로 중학동이 있으며 서쪽으로 삼청동길을 경계로 세종로와 마주하고 있다. 조선시대 북촌지역이었던 사간동은 세종로의 경복궁과 길 하나로 마주보고 있고 노폭이 넓은 삼청동길에 이어져 있으나 전형적 주택지구의 특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사간동 118번지는 196841일 개관된 불란서 문화회관이 있고, 바깥 벽면을 장식한 훈민정음 동판이 출판인들의 회관다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대한출판문화회관이 사간동 105-2에 위치하고 있다.

 

안국동

동명은 이곳이 조선초기부터 있어오던 북부 10방 중의 하나인 안국방의 방명을 그대로 동명으로 한데서 유래된다. 대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의 선을 경계로 하여 그 이북의 지역을 차지하였던 북부의 여러 방은 북악, 인왕의 두 산아래에는 비록 인구는 희소할 망정 연적이 넓고 경치가 좋은 곳도 많았지만, 그 이남 즉 경복궁 동서쪽의 지역에는 방리의 면적이 그리 넓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한 방내의동, 계도 그 수효가 많지 않았다. 안국방도 다른 경복궁 동측에 자리잡은 광화(廣化양덕(陽德가회방(嘉會坊)등과 같이 영조 때의 기록에서도 방명을 그대로 동명, 계명으로 한 안국동계(安國洞契)하나 만이 보인다. 이러한 안국방, 안국동이 갑오개혁때에 이르러서는 많이 발전하였던 모양으로 안국방 계, 동명중 소안동계(小安洞契)에 속한 동리로 소안동, 홍현(紅峴), 안현(安峴) 등의 이름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1914년 동리 구역을 조정 개편할 때에는 안현과 소안동, 재동의 일부를 합하여 안국동으로 지금에 이른다.

 

안국동이 형성된 자연부락으로 대안동(大安洞)은 소격동과 덕성여중고, 풍문여고 일원에 걸쳐 있는 마을이고 소안동(小安洞)은 대안동의 동쪽에 있는 마을로 작은 안동이라고도 한다. 잿골은 재동(齋洞)이라고도 하여 안국동과 재동에 걸쳐 있는 부락을 말하고 붉은 잿골은 붉은 재 혹은 홍현(紅峴)이라 하며 화동과 안국동에 걸쳐 부락이다.

 

조선시대 이래로 전통적인 주택가로 손꼽혀 오고 있는 안국동은 북으로화동, 동쪽으로 재동, 남쪽으로 안국로를 경계로 종로 1,2가동과 서쪽은 송현동이 있다. 교육기관으로 덕성여중고등학교, 풍문여자고등학교가 있으며 안국동169번지에는 1969년에 건립된 걸스카우트회관이 있다.

 

화동

동명은 조선시대 이곳에 있던 화개동(花開洞)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화개동은 화기도감(火器都監)이 있었다는 설과 함께 화유( ), 화과(花果)의 일을 담당하는 장원서(掌苑署)가 화동 23번지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꽃을 기르고 있으므로 글자 그대로 화개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줄여서 화동(花洞)으로도 불렀다. 화개동은 화기동(火器洞)이었던 것이 변하여 화개동으로 되었다고도 하는데 원래 이곳에 화기도감(火器都監)이 있었기 때문에 화기동이 되다가 음이 비슷한 화개동으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화동을 이룬 자연부락으로 동곡(東谷) 혹은 동골이라 부르는 곳은 가회동과 연접되는 정독도서관 동남쪽이며 붉은 잿골은 화동, 안국동, 재동에 걸친 마을로 붉은 재가 있어서 이를 한자로 옮겨 홍현(紅峴)이라 하였다. 소안동(小安洞)은 작은 안동으로 화동의 남쪽과 안국동의 북쪽에 걸쳐 있는 지역이다. 또한 화동 1- 7번지 정독도서관 뒤 언덕배기 일대는 일찍이 맹현(孟峴)이라 불리던 곳으로 조선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청백리 맹사성과 그의 후손으로 숙종 때 황해동,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맹만택(孟萬澤)이 살았으므로 맹감사고개 혹은 맹동산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현재의 화동은 정독도서관 일대로 종로구의 중앙에 위치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삼청동, 북서쪽으로는 팔판동, 동쪽으로는 가회동, 남서쪽으로는 소격동, 남쪽으로는 안국동과 인접해 있다. 동 면적의 약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정독도서관은 경기고등학교였는데 1976220일 강남구 삼성동 74번지로 이전한 뒤 주변을 조경하여 시립정독도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송현동

솔고래(松峴)가 있었으므로 여기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송현동을 이룬 자연부락인 송현은 솔고개솔재라고도 부르는데 지금의 중학동 한국일보사와 건너편 미대사관저 사이에 있던 고개로 소나우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으므로 송현이라 불렀다. 이에 대하여는 태조실록(太祖實錄)74월 임진조(壬辰條)에도 경복궁 좌강(左岡)의 송()이 고()하여서 근강인가를 철할 것을 명하였다라고 한 기록이 있다. '경복궁 좌강'이란 송현과 그 내맥(來脈)의 소나우가 고고(枯槁)하므로 근처의 인가를 철거케 하였다는 것을 보면 이곳에는 조선 초 무렵에 송목이 많았고 그 송목은 국가에서 보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송목의 보호는 물론 산맥을 보전하기 위한 것이였을 것이다.

 

또한 조선 초의 소위 '정도전(鄭道傳)의 난'을 들 수 있는 바 태조실록 78월 기사조에 의하면 정도전·남합(南闔심효생(沈孝生) 등이 송현에 있는 남합처가에서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할 모의를 하다가 정안군(靖安君 : 태종) 당의 습격을 받아 복주(伏誅)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조선 초부터 있었던 송현이란 지명은 조선후기에는 영조 때의 도성지도에서 표시되고 있으며, 일제 강점 초기까지도 그 현의 이름이 칭용되다가 지금은 동명에 그 이름이 남아 있다.

 

수송동과 송현동 사이 송현으로 이어지는 곳의 고개는 비가 오면 질퍽하여 걷기가 힘들어서 박석()을 깔아 놓았기 때문에 박석고개, 박석현이라 불렀고, 덕성여중고가 있는 부근의 우물은 깊어서 두레박을 고리에 매달아 물을 퍼올렸으므로 고리우물이라 하였고 인근의 부락을 고리우믈골, 한자로 고리정동(古里井洞)이라 하였다.

 

현재의 송현동은 북으로 소격동, 동으로 안국동, 남쪽으로는 율곡로를 사이에 두고 중학동과 수송동, 서쪽을 사간동이 둘러싸고 있는 종()모양으로 생긴 지형이다. 광복과 함께 이 땅에 진주한 동서 양대 세력의 상징이 된 미대사관저(美大使館邸)가 동 면적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팔판동

동명은 조선시대에 이곳에 여덟명의 판서가 살았다는데서 유래되었다. 조선 순조년간(1801~1834)에 저술된 한경지략(漢京識略)2 각동조(各洞條)에도 팔판동의 유래가 되었던 8명의 판서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전하지 않고 있다. 단지 팔판동은 서울에서도 자연 지리적 조건이 좋기로 유명한 곳인 만큼 8명의 판서가 함께 살았다는 것이 그저 우연히 발생한 전설(傳說)에 그친 것이 아닐 것 같다. 이곳은 옛부터 팔판서골이라 하던 곳으로 아마도 주요 관아가 경복궁 남쪽에 위치해 있어 직주(職住)근거리의 편의성에 따라 경복궁 동북쪽에 인근하여 있는 이곳에 판서들이 주거지를 택하였을 가능성이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 복개된 삼청동길이 삼청동 계곡에서부터 흘러내리는 개천이면서 경복궁의 바로 동쪽에 위치한 까닭에 조선시대에는 벼슬길에 오른 양반들의 집단거주지가 되기도 하였다. 북촌(北村) 양반골을 형성했던 이곳에 판서 8명이 살았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 맥락은 지금도 이어져 삼청동 총리공관이 팔판동의 북쪽 끝지역과 이어져 있고 팔판동의 서쪽길은 청와대 앞으로 통하는 길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삼청동 157번지와 팔판동 115번지가 서로 연이어 있기 때문에 이 일대에 조선시대 삼청전(三淸殿)이 있던 곳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현재의 팔판동은 종로구의 북부지역으로 경복궁 동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북쪽 및 북동쪽으로는 삼청동, 서쪽으로는 청운동과 세종로동과 인접해 있으며 남쪽으로 소격동, 남동쪽으로는 화동과 인접해 있다. 또한 동십자각에서 삼청공원을 거쳐 삼청터널에 이르는 삼청동길이 팔판동의 동남부를 지나고 있다. 이 길은 율곡로와 사직로에서 성북동길과 이어지는 서울의 남북길로서 옛부터 서울의 명소인 삼청동 계곡을 찾는 길이며, 숙청문을 지나 성북동으로 가는 길이었다.

 

삼청동 코스 : 산청(山淸), 수청(水淸), 인청(人淸)

3호선 안국역(1번 출구) → ① 윤보선가 → ②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 → ③ 화개길 벽화골목 → ④ 삼청동 전망대 → ⑤ 삼청공원 → ⑥ 칠궁 냉천정(칠보사) → ⑦ 기기국 번사창 → ⑧ 등나무 및 측백나무 (총리공관) → ⑨ 여덟 판사의 동네 이야기 '팔판길''판서길' → ⑩ 장신구 박물관 → ⑪ 안동별궁 터 및 담장길 인사동

 

4 부암동 付岩洞

 

홍지동

동명은 탕춘대성(蕩春臺城)의 관문인 홍지문(弘智門)에서 비롯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제정된 동명에 의하면 상평방(常平坊 :城外) 경리청계(經理廳契) 안에 홍지문내동(弘智門內洞), 삼지동(三芝洞), 남문동(南門洞)으로 되었다. 일제하 191441일 경성부 축소계획에 따라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에 편입되었을 때 삼지동, 남문동을 병합시켜 홍지리라 하였고 193641일 경성부 확장실시에 따라 경성부관할로 편입될 때 홍지정(弘智町)으로 되었다가 1946101일 일제식동명의 일소에 따라 홍지동으로 되었다.

 

홍지동은 동명이 유래된 홍지문을 중심으로 마을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왔는데 홍지문 안쪽과 가까운 곳에 형성된 마을을 홍지문내동 혹은 줄여서 내동, 안골이라 하였는데 홍지문 90 ~ 97번지와 103 ~ 104번지 일대가 해당된다. 삼지동(三芝洞)을 혹은 삼지동(三池洞)이라고도 하는데 홍지문 서북쪽으로 67 ~ 70, 76 ~ 80번지 일대로서 비교적 높은 지대인데 소림사(小林寺)라는 절이 있고 절 앞에는 연못이 세개가 있었으므로 삼지동 이라고 불렀다. 연못가에 돌거북이 있었는데 경복궁 중건시 캐내에 석재로 사용했다고 한다.

 

탕춘대성은 전체 길이 약 4km로 북한산 비봉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천(沙川)의 홍지문에 이르는데 성문(城門)은 홍지문 하나 뿐이나 동북쪽으로 사천을 가로질러 오간수문(五間水門)이 있었으므로 탕춘대성 전체로 볼 때에 남쪽문에 해당되는 홍지문을 남문이라 불렀고 부근의 홍지동 36번지 일대를 남문동이라 하였다. 현재의 홍지동은 북으로 구지동, 동으로는 신영동, 남으로는 부암동과 접하고 있으며 서쪽으로 서대문구 홍제동이 있다. 홍지동 7번지에는 상명여자대학교와 부속초··고등학교가 여성교육 전담교육기관으로 서울의 서북부 가장 끝에 위치하고 있다.

 

신영동

조선 영조 26(1750)5군영(軍營)의 하나인 총융청(摠戎廳)을 신영동 219 - 4번지로 이전하였으므로 동명이 유래되었다. 고종 4년에 편찬된 육전조례(六典條例)에서 상평방에 처음 나타나고 갑오개혁 때 상평방내 경리청계에 속한 동명에서 신영동이 기록되어 있다. "상평방 경리청계 : 무계동, 부암동, 백석동, 홍지문내동, 삼지동, 구기동, 응암동, 왕정평, 신영동, 남문동"라고 적혀있다.

 

신영동의 명칭이 붙여진 유래를 궁궐지(宮闕志)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 찾아보면 조선시대 5군영 중의 하나인 총융청으로 영조 때 북한산성 수비를 담당시키고 그 청사를 창의문 밖으로 이전시켰다고 하였다. 따라서 총융청이 새로 영조되었다 해서 신영동이라고 호칭된 것이다. 원래 총융청은 인조2(1624)에 사직동 북쪽에 설치되었으나, 헌종 10년에 삼청동으로 청사를 이전시켰다가 영조 때에 신영동으로 다시 이전한 것이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총융청은 북부 진장방(鎭長坊)에 있었는데 영조 때 창의문 밖 연융대(鍊戎臺)에 이전해서 새로 설치했다. 신영의 영사(營舍)300년간이나 된다. 인조 때 창설되어 수원, 광주, 양주, 장단, 남양 등의 진 및 5영의 군무를 절제하게 하였고 영조 23년에 경리청을 폐지하고 총융청에 소속시켰다. 정조 때 수원에 영을 설치한 뒤에 수원진에서 군무를 절제하였다 폐지하고 헌종12(1846)에 총위영(總衛營)이라고 개칭하였다가 3년후인 철종 원년에 다시 본명으로 고쳤으나 고종21(1884)에 폐지되었다.

 

또한 탕춘대가 있던 부근의 시냇물이 감돌아가는 신영동 137, 139, 141 ~144번지 일대에는 승목소라는 부락이 있었고, 장의사(藏義寺)계곡은 봄철의 꽃, 여름의 과일, 가을철의 단풍이 어우러진 이곳은 세검정 일대의 수석과 함께 경관을 이루었으므로 시인(詩人), 묵객(墨客)들이 줄지어 찾았던 곳이고 1970년 초까지 각급 학교의 소풍장소로서도 각광을 받았던 곳이다. 현재의 신영동은 북쪽으로 구기동, 동쪽으로 평창동, 서쪽으로는 홍지동과 남쪽으로 부암동이 둘러싸고 있으며, 서북부지역 주요간선도로인 진흥로(眞興路)와 세검정길이 신영동의 심장부를 뚫고 지난다.

 

부암동

세검정(洗劍亭)쪽 길가에 높이 2m의 부침바위(付岩)가 있었기 때문에 동명이 유래되었다. 부암동은 무계동(武溪洞), 백석동(白石洞), 부암동(付岩洞), 삼계동(三溪洞) 등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북한산과 인왕산 자락에 위치하므로 바위, 계곡 등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무계동은 자하문 밖 서쪽 골짜기에 있었던 마을로 수석(水石)이 맑고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다. 중국의 무릉도원(武陵桃源)에 있는 계곡처럼 생겼다 해서 무계동이 되었는데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쓴 武溪洞의 각자(刻字)가 남아 있다. 안평대군이 이곳에서 산정(山亭)을 세워 무계정사(武溪精舍)라 이름을 붙이고, 글을 읊고 활을 쏘는 등 심신을 단련하였다. 무계정사를 짓기 전에는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집터였다. 무계정사는 안평대군의 호를 따서 비해당(匪懈堂)이라고도 불렀는데 여름철에는 특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경치를 즐겼고 기린교(麒麟橋)라는 다리도 있었다.

 

백석동은 부암동 115 115 - 1번지에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기 때문에 붙여졌으며 백석실(白石室)이라고도 하는데 흰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었다. 부암동은 부암동 134번지에 있었던 부침바위에서 유래된 동이며, 삼계동은 무계동 아래 부암동 318번지 일대를 말하며, 석파정(石坡亭)의 암벽에 三溪洞이라는 3글자가 새겨져 있다. 삼계동에는 조선말 이문대신(里門大臣)으로 알려진 김홍근(金興根)의 별장인 삼계동정자가 있었는데 후에 흥선대원군이 석파정(石坡亭)으로 고쳐 불렀으며 그 후 세습되어 이희, 이준, 이우의 별장으로 사용되다 6.25동란 후 천주교 주관의 콜롬비아 고아원에서 사용했었으나 지금은 개인 소유이다.

 

부암동은 1975101일 대통령령 제7816호 구관할구역이 변경됨에 따라 서대문구 부암동에서 종로구 부암동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부암동은 행정동과 법정동이 일치하여 1970518일 부암동사무소가 설치되어 부암동, 홍지동, 신영동을 관할하고 있다.

 

현재의 부암동은 북쪽으로 평창동, 신영동과 서쪽으로는 홍지동, 서대문구 홍제동, 동쪽으로 성북구 성북동, 삼청동, 남쪽으로 삼청동, 옥인동이 둘러싸여 있다. 또한 효자동에서 세검정 삼거리까지의 가로는 자하문(紫霞門)길인데 1986820일 준공 개통된 청운터널로 인하여 당초 궁정동 철궁에서 세검정 삼거리까지의 자하문길을 가운데 터널 북쪽 진입로에서 궁정동까지는 창의문(彰義門)길로 하고, 새로 개통된 이 길을 자하문길로 하였다.

 

부암동 생태 문화 탐방코스

세검정길(상명대) → ① 이광수 별장 터 → ② 홍지문 및 탕춘대성 → ③ 석파정 별당 → ④ 석파정 → ⑤ 안평대군 이용 집터 및 현진건 집터 → ⑥ 반계 윤웅렬 별장 → ⑦ '찬란한 유산' 촬영지 → ⑧ 윤동주 시인의 언덕(청운공원) → ⑨ 최규식 경무관 동상 및 창의문 → ⑩ 환기미술관 → ⑪ '커피프린스 1호점' 촬영지 → ⑫ 백사실 계곡 → ⑬ 세검정 터 세검정길

 

5 평창동 平倉洞

 

구기동

구텃굴이라는 동명을 한자로 옮긴데서 유래된다. 조선시대 한성부 상평방(常平坊)내 구텃굴이었다가 일제 때 이르러 191441일 경성부제 실시에 따라서 세곡(細谷)을 병합하여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로 하였으며, 광복후 1949813일에는 다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구기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955418일에 서울특별시 동제실시에 의하여 구기동은 법정동인 평창동과 함께 행정구역명인 평창동에 속하여 되었는데 1975101일 종로구로 편입되었다.

 

구텃굴은 무엇에 대한 구터인지 그 연원을 확인할 수 없지만 구기동을 이루고 있는 자연촌락 가운데서 "구터"의 가능성을 가늠해 볼 수 있겠다. 구기동의 자연촌락으로는 가늘굴·먹정굴·문수동·매박굴·독박굴·구텃굴이있다. 가는굴은 세곡이라 하며 가늘고 길게 들어간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매박굴은 구기동을 이룬 자연촌락 중 비교적 큰 마을인데 매바위가 있으므로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응암(鷹岩)이라고도 한다.

 

먹정굴은 구기동에서 불광동으로 넘어가는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구기터널이 뚫린 근방인데 산성(山城)의 암문(暗門)이 있고 검은 바위가 있어서 박쥐가 많으므로 먹정굴이라 하였다. 문수동(文殊洞)은 문수사(文殊寺)가 있는 매바위에서 거북바위 오른쪽 등에 걸친 수구 안쪽을 이루는 마을이다. 숙종 41년에 탕춘대성을 쌓을 때 좌의정 이이명( )"탕춘대성은 너무 넓어서 수비하기가 어려우니 차라리 문수동의 어귀를 막는 것이 성()을 쌓기도 편리하고 지키기도 용이하다"고 주장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탕춘대성을 중심으로 성을 쌓았다.

 

구기동은 종로구의 북쪽 끝에 해당하는 동으로 동쪽은 평창동, 서쪽은 서대문구 홍제동, 남쪽으로 홍지동과 부암동을 경계로 하는 비교적 면적이 넓은 동으로 북한산 국립공원 구역권이므로 고적과 관련된 곳이 많다. 특히 승가사 문수암과 같은 사찰을 비롯, 비봉의 진흥왕 순수비의 비봉에서 사천(沙川)의 홍지문에 이르는 탕춘대성이 구기동과 홍은동, 불광동과의 경계를 이루며 남아있다.

 

평창동

이곳에 선혜청(宣惠廳)의 평창(平倉)이 있었으므로 해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평창동의 지형은 북한산 줄기가 뻗어 내린 관계로 평지보다는 계곡과 산이 많다. 평창동의 유래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고종 때 편찬된 육전조례에는 평창동이 한성부 상평방(常平坊)내의 선헤청계에 속하여 있고, 그 후 일제강점기에 와서는 191441일 경성부제 실시에 따라 평창동은 율목동(栗木洞), 월계동(月桂洞)과 함께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평창리라 불리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광복된 후에도 곧 서울에 편입되지 못하다가 1949813일 경기도 은평면 평창리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로 편입시키고, 동년 814일 서대문구에 은평출장소를 설치하여 관할하에 두다가 1950315일 평창리는 평창동으로 바뀌었다. 1955418일 행정동제가 실시될 때 구기동과 평창도의 첫글자를 따서 구평동(舊平洞)으로 하였다. 1970518일 평창동사무소가 설치되어 구기동과 평창동을 관할하고 있으며 1975101일에는 구관할구역의 변경이 있을 때 서대문구에서 종로구 평창동으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른다.

 

평창동에는 율목동(栗木洞), 신창(新倉), 월계동(月溪洞), 평창굴장안의 토착마을이 있다. 율목동은 밤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 밤의 수확이 많은 동이므로 밤나무골이라 했던 것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평창은 선혜청의 평창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센창이라고도 하며 156번지 일대를 일컫는다. 평창굴은 330번지 일대인데 총융청의 평창이 있어서 붙여졌으며 당초에는 한양굴이라 하였다.

 

월계동은 월계정(月桂亭)이 있었기 때문에 동네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하는데 월계수로 만든 정자가 있기 때문에 월계동(月桂洞)이라 하던 것이 월계동(月溪洞)으로 바뀌어졌다. 186 187번지 일대는 장안이라 하여 평창동 중에서도 가장 큰 토착부락이었다. 도읍을 가리키는 말을 장안이라 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 일대는 한 때 유원지로서 서울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었던 곳이다.

 

평창동은 북쪽은 경기도 고양시와 성북구 정릉동, 동쪽은 성북동과 접하고 있으며 남쪽은 삼청동, 부암동과 서쪽은 신영동, 구기동과 접하고 있다. 종로구의 북쪽 끝에 해당되는 평창동은 전체 면적의 65% 이상이 개발제한구역으로 되어 있는 동으로 북쪽지방은 표고 200 ~ 714m의 비교적 높은 산지이며 동쪽과 남쪽 사이 급경사의 산지로 형성되어 있다.

 

한 폭의 그림속 풍경 평창동

세검정길(가나 아트센터) → ① 가나 아트센터 → ② 김종영 미술관 → ③ 연화정사 → ④ 영인문학관 → ⑤ 박종화 가옥 세검정길

 

6 무악동 毋岳洞

무악동은 1975년 서대문구 현저동의 일부가 종로구로 편입되면서 옛날 중국사신들이 오르내리던 무악현저(毋岳峴底)에 있다하여 붙여진 동명이다. 무악동은 무악현 아래에 있는 마을이므로 그 뜻을 따라 현저동으로 되었다가 다시 무악현의 이름을 따서 무악동으로 되었는데 이 무악현은 시대에 따라 여러가지 이름으로 부른다.

 

조선말까지는 중국사신의 유숙소인 모화관이 영천동에 있었으므로 모화관의 앞 곧 인왕산쪽의 동쪽 지점을 관전동(館前洞)이라 했고 그 반대쪽은 관후동(館後洞)이라 하였다. 홍제원(弘濟院)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모화현(慕華峴)이라 했는데 지명으로 변하여 통칭하게 되었다. 홍제원 북쪽에는 홍제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 홍제천은 사천(沙川)이라고 불렀다. 때문에 사천으로 향하는 고개라는 뜻에서 사현(沙峴)이라고도 불렀다. 인왕산 기슭 일대의 지질이 마사토로 바람이 불면 모래가 잘 날렸으므로 모랫바람 부는 고개라는 뜻의 사현이라는 설()도 있다.

 

이 고개의 왼편 산봉우리가 멀리서 보면 흡사 말안장 같기 때문에 안현 (鞍峴)혹은 길마재라고 불렀다. 고개의 양편에는 밤나무가 많았고 숲이 울창하였으므로 호랑이가 자주 출몰한 험악한 길이었다. 따라서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모여 한무리씩 떼를 지어 넘어 갔고 이 때문에 "모아재"라 했던 것이 모악현(母岳峴)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변하여 무악현(毋岳峴)이 되었다.

 

한편 조선을 개창한 태조 이성계가 도읍터를 물색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어 남경(南京) 일대를 조사할 때 하륜(河崙)이 무악 남쪽을 적극 찬성하였지만 일부에서는 명당이 너무 좁다고 반대하므로 태조 3(1394)에 왕이 직접 무학대사를 데리고 와서 조사를 하였다. 이 때 무학대사가 무악재 고개 마루턱에 올라 도성쪽을 한동안 살폈으므로 무학현(無學峴)이라고 하였다. 영조 45(1769)에 영조는 부왕인 숙종의 명릉(明陵) 역사를 시작하고 몸소 이 고개에 올라서서 명릉 쪽을 바라보며 이 고개를 추모현(追慕峴)이라 명명하였다.

 

어쨌거나 고개 하나에 여러개의 이름이 붙어있는 무악재는 매우 험한 고개였으므로 온갖 짐승들이 서식했었고 이에 따른 호환(虎患)도 자주 있었다. 나라에서는 북쪽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무악재를 낮추는 공사를 여러차례 한 끝에 수척(數尺)이 깎여지게 되었다. 영천(靈泉)까지 전차가 가설되면서 무악재를 또다시 확장, 낮추는 공사를 하였으며 1960년대의 공사로 거의 지금과 같은 위치로 낮아지게 되었다. 현재의 무악동은 의주로를 경계로 하여 서쪽의 서대문구 현저동과 마주보고 있으며 남쪽은 행촌동, 동쪽은 누상동, 사직동과 접하고 있으며 북쪽은 서대문구 홍제동과 누상동이 산 3번지를 정점으로 하여 각각 경계를 달리하고 있다.

 

인왕산 바위가 전하는 이야기 무악동

3호선 독립문역(3번 출구) → ① 서대문형무소 및 독립문공원 → ② 여관골목 → ③ 야생화정원 → ④ 해골바위 → ⑤ 선바위 → ⑥ 국사당 → ⑦ 마애불 → ⑧ 무악공원 의주로

 

7 교남동 橋南洞

 

평동

의 동명은 거평동(居平洞)이라고 부르던 이름이 줄어서 된 것이다. 평동의 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서대문을 나서서 무악재에 이르기까지는 거의 평탄한 길이고 서쪽의 안산(鞍 山)기슭과 인왕산 사이에 낀 분지형에 속하는 지역이다.

 

평동은 조선초부터 반송방(盤松坊)에 속해 있으며 갑오경장 때 지하계(池下契)의 여러 동 중 평동이란 이름이 처음 나타난다. 일제 191441일 경성부의 동, 정 명칭 및 구역을 공포할 때 평동 일부는 죽첨정(竹添町) 1정목과 교남동에 편입되고 그 일부가 평동이 되었으며 그 뒤 일제가 동, , 정목 등으로 불리던 명칭을 동을 폐지시켜 버리므로 해서 평동정이라 하게 되었다.

 

광복후 1946101일을 기하여 왜식동명을 개칭하게 되었기 때문에 평동정은 평동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1955418일 서울특별시 동제 실시로 인하여 교남동이란 행정구역 명칭이 생겨 송월동 125번지에 설치된 교남동사무소가 평동, 교남동, 송월동의 3동을 행정적으로 관할하고 있다.

 

평동에 일부를 이르는 냉동은 원래 냉정동(冷井洞)이라는 한자명의 약칭으로 찬 우물골이라 불리워졌다. 일제 때에는 그 일부가 죽첨정2정목과 교남동에 편입되고 다시 이판동(李判洞) 일부가 냉동으로 편성되기도 하였다. 이 곳 평동은 1975101일 종로구로 편입되었다. 현재의 평동은 북으로 송월동과 세종로동, 서쪽은 서대문구 냉천동, 동쪽과 남쪽으로는 새문안길을 경계로하여 서대문구 충정로2가와 접하고 있으며 평동 108 - 2번지에는 스웨덴 대사관 있다.

 

행촌동

1914년 동명 개정에 따라 서부 반송방(盤松坊)의 은행동(銀杏洞)과 신촌동(新村洞)의 마을을 합쳐 동명을 붙인데서 유래되었다.행촌동은 조선시대의 자연부락이던 곡정동(谷井洞어수정동(御水井洞신촌동(新村洞은행동(銀杏洞)이 모여 형성된 동인 만큼 자연부락 이름에 얽혀있는 유래가 많다.

 

곡정동은 골우물골이라고도 하는데 어수우물골 아래에 있다. 골짜기에 우물이 있으므로 해서 붙여졌다. 인왕산 자락을 타고 내려와 형성되었으므로 골짜기가 여럿 있었는데 그중 독립문 가까이로 뻗어 내려간 골짜기 끝 행촌동 209번지에 우물이 있음으로 해서 일대의 마을을 골우물골이라 하였다.

 

신촌동은 새말이라고도 하며 독립문로로 편입된 지역과 교북동 1번지 및 골우물골과 연접된 지역을 말하는 모화관(慕華館)을 헐어내고 난 후 새로 생기기 시작한 동네이다. 일설에 의하면 서대문형무소가 맞은 편 현저동 101번지에 생기고 나서 많은 애국지사들이 수감되자 옥바라지를 하기 위한 그들의 가족들이 모여들어 집단부락으로 형성되었으므로 새말이라 했다고 한다.

 

어수우물골은 대신중고등학교 일대를 말하는데 이곳에 있던 우물의 물맛이 달고 좋았으므로 나라에서 식수(食水)로 사용했다 하여 어수정(御水井)이라 하였으며 어수정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어수정동 혹은 어수우물골이라 하였다. 어수우물골과 이웃한 171번지 일대에는 맹인들이 살았으므로 통명(通明)고을이라 했는데 이름이 변하여 동명골로 되었다.

 

행촌동 1-113번지에 있는 은행나무가 있는 마을을 은행동 혹은 은행나무골이라 한다. 은행동은 한 때 개미마을이라고도 불렸었는데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까지 폐휴지를 수합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자립단(혹은 자립부락민)들이 집단 거주하였다. 이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마치 개미 같아서 개미마을이라는 애칭이 붙었는데 1980년을 고비로 하여 일대의 정비가 되자 어느 정도 재산을 모든 이들도 하나둘씩 떠나고 동네 이름만 전설처럼 남아 있다. 행촌동은 남미대륙을 거꾸로 세워놓은 듯한 지형을 가지고 있는데 210-736번지를 정점으로 하여 동북쪽은 사직동, 서쪽은 무악동, 남쪽은 교북동과 홍파동으로 서로 맞닿아 있다.

 

송월동

은 송정동(松亭洞)과 월암동(月岩洞)자를 따서 송월동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송월동은 조선시대 반송방(盤松坊)의 관할 하에 있었으므로 특별히 소나무와 관련을 많이 갖고 있는 동이다. 실제 교남동의 동쪽 개천변에는 소나무가 가지런하게 심어져 있어 이곳의 운치를 따라올 만한 곳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복개되어 있으므로 길인지 개천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이곳 개천변에 있는 동네를 개천께 혹은 천변동이라 하였으며 특히 흰소나무가 정자처럼 서 있는 곳을 송정동이라 하며 소나무 아래에는 물맛이 매우 좋은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기상청(송월동 1번지) 부근에는 마치 보름달처럼 둥글게 생긴 큰 바위가 있으므로 월암(月岩) 혹은 위령바위라 하였고 이 바위가 있는 동네라 하여 워령바위골, 한자로는 월암동이라 하였다. 송정동이란 명칭이 소나무와 밀접한 관계룰 갖고 있었으므로 고려조의 강회백(姜淮伯)시를 소개하면

 

푸른 솔, 저 푸른 솔 길가에 났는데, 두어 그루 그늘 서로 이으니 덕이 이웃에 있는 듯,

큰 줄기 올라가서 서린 모양 용인 듯, 꿈틀꿈틀 달아니고 굽혔다 다시 펴네.

가는 가지 멀리 뻗어 푸른 장막 펼쳤는데, 햇볕을 가로 막아 서로 의지하고 있네

속에는 벽력을 감춘듯 태음을 기르고, 겉 겁질 헐려 떨어져 쭈구렁비늘 생겼네.

태고 옛적 나고 자라니 연대를 알 수 없는데, 도끼에 찍히지 않고 꺾여서 섶이 되지도 않았네.

심고 자란 것 조화에 의해서 되었으리, 지키고 보호하는데 지금은 신이 있다네.

내 지금 여기오니 때 마침 더운 날이라, 남풍이 낯을 스치고 티끌불어 날리네.

말 안장 기대고 그늘 아래 누우니, 어느 새 찬 소름나서 온 몸에 가득하네.

 

현재의 송월동은 북으로 홍파동, 서쪽으로 교남동, 남쪽으로 평동, 동쪽으로 세종로동이 위치하여 있고 송월동 32 - 10번지에는 스위스대사관이 있다.

 

교북동

은 교남동과 연접된 지점인 곳에 돌로 만든 다리가 있는 북쪽 동네라 하여 동명이 유래되었다. 곧 지금의 교남동 100번지로 교남파출소 앞에 석교(石橋)가 있어 다리의 북쪽을 교북동 남쪽을 교남동이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교북동에는 영은문(迎恩門)과 독립문(獨立門), 모화관(慕華館)을 헐고 새로 세운 독립관(獨立館)이 있었다. 태종 7(1407) 8월에 창건한 모화관은 영천동 69번지에 있었으므로 모화관의 앞에 위치한 영천동과 교북동에 걸쳐있는 마을을 관앞골 혹은 관전동(館前洞)이라 하였다. 교남동과 접한 78번지 부근일대에는 돌다리가 있었으므로 석교동 혹은 돌다리골·석다릿골이라 하였다. 교북동 11번지 일대는 교북동·행촌동·홍파동에 걸쳐 있었는데 나중에 만들어진 마을이므로 새말 혹은 신촌동(新村洞)이라 하였다.

 

파발동은 서울~의주간 통신수단의 하나인 파발이 지나는 곳으로 서울과 가장 가까운 연서역(延署驛)에 도착한 말과 연락인이 서울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쉬는 곳이 되므로 파발마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붙여졌다. 파발골이라고도 하는데 모화관의 동쪽인 관동과 석교동 사이가 된다.

 

홍화동(紅花洞)은 봄철이면 진달래와 살구복숭아꽃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살구가, 가을에는 감이 많이 열려 먼곳에서 보면 마치 붉은 꽃이 온 동네에 가득한 것 같이 보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의 대신고등학교 맞은편 사직로 남안(南岸)이 여기에 해당된다.

 

장원정동(壯元亭洞)은 모화관 부근에 있던 정자로 모화관에 근무할 무사(武士)를 선출할 때는 이 정자 부근에서 무술을 시범하여 실력을 겨루며 특히 장원한 사람에게는 정자에서 특별히 대접하였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장원정의 일부는 영천동에 해당된다. 오거리는 교북동, 홍파동, 행촌동으로 연결되어 있는 곳으로 다섯갈래의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의 교북동은 북쪽으로 사직로를 경계로 하여 행촌동과 서쪽으로는 의주로를 경계로 서대문구 영천동, 옥천동, 남쪽은 교남동, 동쪽으로 홍파동과 접하고 있다.

 

홍파동

의 동명은 홍문동과 파발동의 첫글자를 각각 따서 붙여졌다. 홍파동은 천변동(川邊洞어수정동(御水井洞신촌동(新村洞월암동(月岩洞파발동(把撥洞홍문동(紅門洞)의 자연부락이 합쳐져 형성되었는데, 천변동은 개천께라고도 하며 교남동과의 접경부분이 된다. 교남동과 홍파동의 경계지점에 작은 내가 흘렀으므로 내의 좌우측에 있는 부락을 천변동이라 하였다. 어수정동은 어수우물골이라고도 한다.

 

행촌동 대신중고등학교 부근 지금의 사직로가 지나는 남쪽 끝에 어수우물이 있었으므로 그 마을을 어수우물골이라 하였다. 신촌동은 교북동 11번지 일대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그 연변에 있는 홍파동 56번지 일대에 새말 혹은 신촌동이라 하였다. 월암동은 송월동과 접경지점인 홍파동 158번지 쯤에 워령바위가 있었으므로 워령바위골 혹은 월암동이라 한다.

 

파발동은 홍파동과 교북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홍파동 52·56번지, 교북동35·50~52번지가 된다. 파발마가 있는 역참(驛站)이 있었기 때문에 파발골 혹은 파발동이라 한다. 신라 때부터 있었던 우역제도(郵驛制度)의 하나인 파발은 조선 선조 30(1597)에 통신수송기능에서 통신기능만 담당하게 되었다. 이에 기발(騎撥)과 보발(步撥)을 두어 기발은 25리마다, 보발은 30리마다 1()을 두었다. 파발동은 근방에 농민들의 말을 징발하기 위해 세운 고마청(雇馬廳)이 있었는데 고마청은 아마도 기발의 역참이 아닌가 한다.

 

홍문동은 독립문 동쪽 행촌동에 있던 돈대인 연향대(燕享臺) 아래에 있던 마을로 효자의 정문(旌門)이 있었으므로 홍문동 혹은 홍문골이라 하였다. 홍문골 끝 지형이 오목한 곳에 있던 우물은 볼우물이라 하였고 행촌동에서 사직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행촌동 37번지 아래인 홍파동 42번지 부근 일대를 삼형제고개라 한다. 지금은 사직터널과 성산로로 이어진 넓은 자동차길이지만 사직터널이 소통되기 전에는 고개를 넘어 다녀야 했다. 고개에서 주막을 경영하던 삼형제는 우애가 깊고 효성이 지극했으므로 나라에서 정문울 세워 주었다.

 

홍지동 일원과 신촌, 어수정동, 천변동 등에서는 속칭 모화관삼국지 또는 엿방맹이골이라 하여 투전쪽장수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서 오래전부터 서민의 거주지역이었으며 특히 수공업 지역으로서 등물제조업과 투전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과 각종 판매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현재의 홍파동은 북으로 행촌동, 동쪽으로 사직동, 송월동, 남쪽으로 교남동 서쪽으로 교북동으로 둘러쌓였으며 우리나라 지도같은 땅 형태를 이루고 있다.

 

교남동

의 동명은 지금의 교남동 100번지 북쪽, 곧 교남파출소 앞에 돌로 만든 다리가 있다 하여 다리의 남쪽 동네를 교남동, 북쪽을 교북동이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교남동의 동명 유래가 되고 있는 석교(石橋)1830년에 유본예(柳本藝)가 지은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석교, 1864년에 김정호(金正浩)가 만든 대동지지(大同地志)에는 초교(草橋), 고종 초에 김정호가 만든 수선전도(首善全圖)에는 교량의 표시만 되어 있고 1902년 로얄 아시아틱소사이어티에서 간행한 서울지도에는 석교라고 표시되어 있다. 또 다리의 이름을 돌다리, 석다리라고도 불렀던 것으로 보아 수선전도제작 당시에는 이미 석교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석교는 교북동·천연동·교남동에 걸쳐 있어서 지금의 의주로 한가운데에 위치한 셈이 되었다. 석교가 있으므로 돌다리골 혹은 석교동이라 하였는데 사람의 통행이 빈번한 곳에는 언제나 장시(場市)가 형성되기 마련이듯 이 석교동에도 무악재 너머에 사는 사람들이 가꾼 각종 농산물을 다리께에 펼쳐 놓아 난전(亂廛)이 형성되곤 하였다.

 

이 난전은 지금의 영천시장(靈泉市場) 끝과도 연결되어 서대문을 통해 도성 안으로 출입하는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였으며, 1898년 서대문~청량리간 전차궤도가 부설되고 난 후 독립문 로터리 부근에 있던 전차종점과 가까운 이 일대는 자연스레 시장(市場)으로 번영 발전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또 교남동과 평동·충정로1가에 걸쳐 있는 마을을 평동 혹은 거평동(居平洞)이라 하여 교남동의 중심이 되었다. 실제로 교남동의 서남쪽 끝에 해당되는 이 거평동의 지대 자체가 낮고 평편한 곳에 있었으므로 살기 편한 곳이라는 뜻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거평동과 바로 이웃한 마을을 찬우물골·냉정동(冷井洞) 혹은 줄여서 냉동(冷洞)이라 하는데 찬우물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물맛이 매우 차며 한여름에도 얼음조각이 떠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의주로가 일대를 통과하여 도로 한가운데에 있는 셈이 되었지만 의주로가 개설되기 전만 하더라도 찬우물골에 있는 어떤 우물이라도 차갑고 달아서 한여름 나그네의 목을 충분히 적셔줄만 했다고 한다. 또 개천가에 있는 마을은 천변동(川邊洞) 혹은 개천께라 하였는데 교남동·송월동·홍파동에 걸쳐 있었다. 복개가 된 이곳의 일부를 현재 유료주차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현재의 교남동은 북쪽으로는 사직동, 세종로동과 동쪽으로 중구 정동, 서쪽으로 서대문구 영천동, 옥천동, 천연동으로 남쪽은 냄천동으로 둘러싸여 있다. 법정동과 행정동이 일치하며 교남동 이외에 평동, 송월동, 홍파동, 교북동, 행촌동을 관할구역으로 하고 있다.

 

역사·문화 기행 교남동

호선 서대문역(4번 출구) → ① 돈의문 터 → ② 경교장(강북 삼성병원) → ③ 홍난파 가옥 → ④ 권율장국 집터 및 수령 400년 은행나무 → ⑤ 딜쿠샤 → ⑥ 옥경이 슈퍼 → ⑦ 서울성곽 사직동 방향 → ⑧ 단군성전 및 사직단 → ⑨ 황학정 → ⑩ 배화여자학교 및 백사 이항복 집터(필운대) → ⑪ 홍종문 가옥 자하문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