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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치1번지, 종로구 鍾路區 (4)

草霧 2013. 12. 10. 16:08

 

 

 

 

 

한국의 정치1번지

 

종로구 鍾路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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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Jongno-gu (Zhonglu)

 

 

 

 

 

8 혜화동 惠化洞

 

명륜동3

193641일 숭3동이었던 이곳의 동명을 유학교육의 유일한 기관인 명륜학원이 있는 동이라 하여 명륜정3정목(明倫町3丁目)으로 명명했던 데서 비롯된다. 명륜동3가는 성균관이 위치했던 관계로 이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자연부락명이 많았다. 관동(館洞)은 성균관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관사람말이라고도 하였다. 관사람은 성균관에 모신 4() 10() 6()의 제사를 주관하는데 고려 말의 유학자 회헌(晦軒) 안유(安裕)가 노비 100명을 개성의 성균관에 바치면서 비롯되는데 이들의 일부가 한양의 성균관 주변에 자리잡으면서 자손이 번성하여 이룬 마을이며 주민이며 안씨노비촌이라고도 하였다. 안씨의 노비자손이 번창하자 이 마을에는 순홍안씨의 노비문서 없이는 들어가서 살 수 없을 정도였다. 이들은 비록 노비신분이나 성현을 모시므로 긍지도 대단하였다. 시골에서 올라온 유생들도 신분상으로는 노비인 이들에게 하오」「하게등의 존대를 썼을 정도였으며 성균관 유생들 대부분이 이 관사람의 집에 기숙하였으므로 노비였지만 위세가 당당하였다. 도의정치에 어긋난 일을 할 때 성균관 유생들은 왕궁앞에서 집단데모인 권당(捲堂)을 하면 관사람들은 이들의 밥을 나르느라 온 마을이 텅비기도 하였다. 관동 노비들의 구심행사(求心行事)920일로 이 날은 상전이었던 안유의 기일(忌日)로 각기 쌀과 베를 추렴하고 성균관에서도 돈과 쌀을 보조하여 제사를 성대하게 치루도록 하였다. 성균관 제사의 제수 장만에 필요한 희생(犧牲)은 관동사람들의 특혜였다. 제사에는 신()과 공식(共食)하는 뜻에서 희생을 가지고 국을 끓여 제사에 참석한 사람이 고루 나누어 먹는데 농사신(農事神)인 신농(神農)에게 풍년을 빌며 소를 바친 후 먹는 음식이 선농탕(先農湯)이었다. 따라서 이 선농탕을 관동 노비들이 직접 끓여 여염집을 상대로 팔기 시작했으므로 한말까지 이 관동에서만 먹을 수 있는 특수음식이 선농탕(설렁탕)이었다.

 

성균관을 반궁(泮宮)이라고도 하므로 성균관 동쪽 마을은 동반동(洞泮洞) 혹은 동반골이라 하고 서쪽 마을은 서반동(西泮洞) 혹은 서반골이라 하였다. 영동(營洞)은 영문골·영문동(營門洞)이라고도 하는데 창경궁 월근문(月覲門) 동북쪽의 마을이다. 별대영문(別隊營門)이 있었으므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성균관의 이문(里門) 안쪽에 있는 마을을 이문동(里門洞이문안, 홍문(紅門)이 있는 마을은 홍문동(紅門洞)이라 했는데 홍문선골에서 홍문섯골로 바뀌었다. 또 성균관 앞에 있던 다리는 반교(泮橋반수교(泮水橋)라 하였고 탕평비각(蕩平碑閣)앞에 있는 다리는 비각다리라 하였다.

 

명륜동3가는 우리나라 교육기관의 모태가 되는 성균관이 있던 곳으로 동의 서쪽과 북쪽은 임야로, 동쪽과 서남쪽은 전형적인 주택지구로 되어 있으며 전체 동면적이 1/3을 성균관대학교가 차지하고 있다. 동의 북쪽은 성북구 성북동, 동쪽은 명륜동1, 남쪽은 명륜동4, 와룡동, 서쪽은 원서동과 삼청동으로 싸여 있으며 조리를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

 

혜화동

은 성북구 삼선동과의 경계지점이 되는 고개에 도성(都城) 8() 가운데 하나인 혜화문(惠化門)의 이름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혜화동으로 편입된 옛 지명들은 오랜 옛날부터 불리어 온 자연부락 명칭들로 혜화동의 옛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상백동(上栢洞)은 혜화동과 동숭동에 걸쳐 있던 마을이다. 태종 때 박은( )이 낙산(駱山)아래 이 곳에 살면서 잣나무를 심고 백림정(栢林亭)을 세웠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인데 웃잣골로도 불렀다. 상토교(上土橋)는 혜화동과 명륜동2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 혜화동 132번지에 있던 흙다리 위쪽에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인데 웃흙다릿골, 줄여서 웃흙다리로도 부른다.

 

송동(宋洞)은 혜화동과 명륜1, 명륜2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 효종 때의 유학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토교(下土橋)는 흙다리 아래쪽에 있던 마을이므로 아래흙다릿골, 줄여서 아래흙다리 또는 한자로 하토교라 하였다.

 

혜화동의 동명이 유래된 도성 4문 중 하나인 혜화문(惠化門)을 소재로 그린 그림으로는 겸제(謙齊) 정선( )동소문(東小門)(견본담채 17.5×13.5고려대학교 박물관소장)이 있다. 지금 명륜동 큰길로 꺽어지는 창경궁 모퉁이쪽 언덕 위에서 혜화문을 바라본 모습인데 원래는 지금의 서울의대 뒤편과 창경궁의 동편 산줄기가 언덕으로 이어져 있었던 것을 일제 때 새길을 내면서 현재와 같이 산언덕을 끊어낸 것이다. 아직 남아있는 양 언덕의 높이를 감안하면 충분히 수승이 가는 위치에서 바라본 각도이다.

 

지금의 동성중고등학교와 천주교 혜화동 성당이 들어서 있는 백자동일대의 산아래 동네에는 큰기와 집들이 즐비하고 소나무숲이 우거진 낙산줄기는 흰 구름이 휘감아 돌고 있다. 동소문은 원래 여진족(女眞族)의 도성 출입 전용문이었으므로 조선 초에는 상당한 규모의 문루(門樓)가 있어 위용을 과시했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청()을 건국한 여진족이 예전 명나라 사신이 드나들던 서대문으로 출입하면서부터 문의 관리를 소홀히 하여 문루가 없어지고 암문(暗門)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동소문 밖 돈암현(미아리 고개)이 원래는 적유현(狄踰峴) 곧 되넘이고개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동소문은 여진족 전용 출입문이라는 기록과 부합된다. 영조 때 중수하면서 걸었던 문액(門額)은 당시의 명필인 조강이(趙江履, 16971756)의 글씨이다.

 

혜화동의 또 하나의 특징으로는 인근 명륜동에 옛 국립대학격인 성균관(成均館)이 위치하여 옛부터 이 일대가 유학교육(儒學敎育)이 성했던 지역이었던 것과 관련하여 역사가 오랜 교육기관들이 많이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카톨릭대학을 비롯해서 경신고교, 동성고교, 혜화여고, 서울과학고교 등이 들어서 옛 교육 중심지로서의 맥을 잇고 있다.

 

혜화동은 종로구의 동북단에 위치하며 북으로는 성북구 성북동, 동쪽은 삼선동과 접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동숭동, 명륜동4가와 서쪽에 명륜동1·2가에 각각 접해 있다. 동의 남쪽과 북쪽 양 끝 지역에 카톨릭대학, 동성중고교, 과학고교, 경신고교 등이 집중된 교육지역이며 창경궁로와 대학로가 혜화동로터리에서 합쳐져 서울의 동북 간선도로인 동소문로를 형성하고 있다. 성북구와 경제점인 동의 북쪽은 북악산 자리 끝에 위치하여 비교적 완만한 경사도를 이루고 있으며 고개길로 혜화문이 있던 동소문로는 1939년경에 전차궤도가 부설되면서 도로가 확장되고 턱도 낮아졌으며 창경궁로와 미아로 확장공사에 따라 1988년부터는 더욱 노폭이 넓어졌다.

명륜동1

193641일 유학(儒學)의 유일한 교육기관인 명륜학원이 있는 동이라 하여 명륜정1정목(明倫町1丁目)이라 한데서 비롯된다. 명륜학원은 국권이 탈취된 후 성균관이 경학원(經學院)으로 바귀면서 1930년 봄에 부설하였다. 명륜동1가는 조선시대에 있었던 여러 개의 자연부락들로 구성되었다.

 

성균관 서북쪽의 개천이 있는 곳에 있던 부락은 갯골 또는 포동(浦洞)이라 한다. 성균관길을 다라 북쪽으로 올라가 우암길과 마주치는 1통 일대가 여기에 해당된다. 도덕골 혹은 도덕동(道德洞)이라 부르던 곳은 성균관 동북쪽의 3통 일대에 해당되는데, 성균관에서 인륜의 대도를 강론하므로 그 뜻을 따라 마을이름을 지은 것이다. 또한 명륜동 3가쪽 혜화국민학교 근방에 웃우물이 있다하여 상정동(上井洞) 또는 웃우물골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효종 때 유학자 우암 송시열이 살았다는 명륜동12번지 일대는 그의 성을 따서 송동(宋洞)이라 하였다. 명륜동178번지 현재 성균관대학교 동북쪽 부근을 수지동(水之洞)이라 하였고, 식당동(食堂洞) 또는 식당골이라 부르던 곳은 성균관 동쪽으로 83·92번지 일대가 된다. 식당동이라는 명칭이 유래된 것은 성균관에서 과거를 볼 때마다 이들 수험생을 대상으로 재빨리 식당이 차려졌기 때문이다. 식당동에 있던 우물은 마을 이름을 따서 식당우물이라 하였다.

 

피마동(避馬洞)은 피맛골이라고도 하는데 명륜동1가와 명륜동2가의 경계지역 쯤이다. 임금이 성균관에 거둥할 때 군관들이 말을 타고 호위, 시종하게 되는데 임금이 성균관으로 들어가면 무관들인 호위군관들은 감히 따라 들어가지 못하고 성균관 동쪽 이곳에서 말을 묶어두고 임금이 나올 때까지 피해 있었으므로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명륜동12번지에 있던 북묘(北廟)부근의 마을은 흥덕골이라 하였다. 북묘 서쪽과 북쪽에 걸친 마을인데 산 1번지와 북묘 일대에 걸친 곳에 흥덕사가 있어 동명이 유래되었다. 흥덕골은 산수가 매우 맑고 아름다운 가운데 온갖 꽃나무와 화려한 누각, 큰 연못들이 있어서 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꽃이 잇달아 피어서 늘 꽃동산을 이루었다. 이에 흥덕동의 아름다움은 경도십영의 하나로 표현되어 흥덕골 꽃구경(興德賞花) 혹은 흥덕골 연못구경(興德賞蓮)으로 뭇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흥덕동에서 시작하여 연건동·이화동에 있는 장경교(長慶橋) 밑을 지나서 오간수교로 흘러 들어가는 시내를 흥덕동천(興德洞川)이라 하였다. 경도십영의 이곳 흥덕동의 뛰어난 경치는 흥덕동천이 구비구비 감돌아 지나면서 아름다움을 더해 주었는데 피마동 부근에 오면 말이 쉬는 동안 말도 씻기고 물도 마시게 만들었으며 식당동 사람들의 빨래터로 이용되었다.

 

길다랗게 생긴 명륜동1가의 중허리를 꿰어차고 지나가 명륜3가동과 경계를 짓는 길은 성균관길이다. 10m15m 길이 900m로 우암길과 이어진다. 우암길은 명륜동1가와 혜화동의 경계를 이어준다. 조선시대부터 전형적인 주거지역으로 손꼽아왔던 명륜동1가의 교육기관으로는 혜화초등학교가 있다. 혜화동은 성북구 삼선동과의 경계지점이 되는 고개에 도성(都城) 8() 가운데 하나인 혜화문(惠化門)의 이름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혜화동으로 편입된 옛 지명들은 오랜 옛날부터 불리어 온 자연부락 명칭들로 혜화동의 옛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상백동(上栢洞)은 혜화동과 동숭동에 걸쳐 있던 마을이다. 태종 때 박은( )이 낙산(駱山)아래 이 곳에 살면서 잣나무를 심고 백림정(栢林亭)을 세웠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인데 웃잣골로도 불렀다. 상토교(上土橋)는 혜화동과 명륜동2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 혜화동 132번지에 있던 흙다리 위쪽에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인데 웃흙다릿골, 줄여서 웃흙다리로도 부른다.

 

송동(宋洞)은 혜화동과 명륜1, 명륜2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 효종 때의 유학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토교(下土橋)는 흙다리 아래쪽에 있던 마을이므로 아래흙다릿골, 줄여서 아래흙다리 또는 한자로 하토교라 하였다.

 

혜화동의 동명이 유래된 도성 4문 중 하나인 혜화문(惠化門)을 소재로 그린 그림으로는 겸제(謙齊) 정선( )동소문(東小門)(견본담채 17.5×13.5고려대학교 박물관소장)이 있다. 지금 명륜동 큰길로 꺽어지는 창경궁 모퉁이쪽 언덕 위에서 혜화문을 바라본 모습인데 원래는 지금의 서울의대 뒤편과 창경궁의 동편 산줄기가 언덕으로 이어져 있었던 것을 일제 때 새길을 내면서 현재와 같이 산언덕을 끊어낸 것이다. 아직 남아있는 양 언덕의 높이를 감안하면 충분히 수승이 가는 위치에서 바라본 각도이다.

 

지금의 동성중고등학교와 천주교 혜화동 성당이 들어서 있는 백자동일대의 산아래 동네에는 큰기와 집들이 즐비하고 소나무숲이 우거진 낙산줄기는 흰 구름이 휘감아 돌고 있다. 동소문은 원래 여진족(女眞族)의 도성 출입 전용문이었으므로 조선 초에는 상당한 규모의 문루(門樓)가 있어 위용을 과시했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청()을 건국한 여진족이 예전 명나라 사신이 드나들던 서대문으로 출입하면서부터 문의 관리를 소홀히 하여 문루가 없어지고 암문(暗門)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동소문 밖 돈암현(미아리 고개)이 원래는 적유현(狄踰峴) 곧 되넘이고개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동소문은 여진족 전용 출입문이라는 기록과 부합된다. 영조 때 중수하면서 걸었던 문액(門額)은 당시의 명필인 조강이(趙江履, 16971756)의 글씨이다.

 

혜화동의 또 하나의 특징으로는 인근 명륜동에 옛 국립대학격인 성균관(成均館)이 위치하여 옛부터 이 일대가 유학교육(儒學敎育)이 성했던 지역이었던 것과 관련하여 역사가 오랜 교육기관들이 많이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카톨릭대학을 비롯해서 경신고교, 동성고교, 혜화여고, 서울과학고교 등이 들어서 옛 교육 중심지로서의 맥을 잇고 있다.

 

혜화동은 종로구의 동북단에 위치하며 북으로는 성북구 성북동, 동쪽은 삼선동과 접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동숭동, 명륜동4가와 서쪽에 명륜동1·2가에 각각 접해 있다. 동의 남쪽과 북쪽 양 끝 지역에 카톨릭대학, 동성중고교, 과학고교, 경신고교 등이 집중된 교육지역이며 창경궁로와 대학로가 혜화동로터리에서 합쳐져 서울의 동북 간선도로인 동소문로를 형성하고 있다. 성북구와 경제점인 동의 북쪽은 북악산 자리 끝에 위치하여 비교적 완만한 경사도를 이루고 있으며 고개길로 혜화문이 있던 동소문로는 1939년경에 전차궤도가 부설되면서 도로가 확장되고 턱도 낮아졌으며 창경궁로와 미아로 확장공사에 따라 1988년부터는 더욱 노폭이 넓어졌다.

 

명륜동2

193641일 숭2동을 유학교육의 유일한 기관인 명륜학원이 있는 동이라 하여 명륜정2정목(明倫町2丁目)으로 명명했던 데서 비롯된다. 명륜동2가는 조선 후기부터 동명이 많은 문헌에 나타나는 만큼 자연적으로 형성된 마을이 많이 있었다.

 

송동(宋洞)은 명륜동1·2가와 혜화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우암 송시열이 살았던 집 부근의 마을이라해서 붙여졌다. 상토교동(上土橋洞)은 웃흙다리골이라고도 하는데 혜화동과 인접한 21·22번지 일대이다. 혜화동에는 2개의 토교(흙다리)가 잇었는데 2개 중에서 보다 윗쪽에 있는 것을 상토교(上土橋) 혹은 웃흙다리라 하고 이 다리 근방에 형성된 부락을 흙다릿골이라 하였다. 관기교동( 橋洞) 혹은 관기교골·관기다릿골·관다리골이라 부르는 곳은 명륜동2178188번지 일대인데 이곳에서 명륜동4183번지를 이어주는 다리가 관기다리이므로 그 이름을 따서 붙여진 동명이다. 이 다리에서 임금의 성균관 거둥시 박석고개를 넘어오는 관기가 보였기 때문에 다리이름을 붙였다. 광례교동(廣禮橋洞)은 광례곳골이라고도 하는데 혜화동사무소가 있는 근방에 광례교가 있었고 이 다리의 주위에 발달한 마을이어서 동명이 붙여졌다. 궁내정동(宮內井洞)21번지 일대의 마을인데 경종계비(景宗繼妃) 선의왕후(宣懿王后)의 친정에 큰우물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궁안우물골이라고도 한다. 궁정동(宮井洞)은 궁내 정동 부근의 마을로 궁안골이라고도 불렀다. 박정동(朴井洞)은 박우물골이라고 하며 지금의 창경궁로가 지나는 길 가운데 있었다. 사현사동(四賢祠洞)은 사현삿골이라고 하며 전 고려대 혜화병원이 있던 일대의 마을로 사현사가 있었기 때문에 동명이 유래되었다. 산천동(山泉洞)은 성균관대학교 정문 동쪽의 마을인데 산우물이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졌으며 산우물골이라고도 하였다. 정문동(旌門洞)127번지에 정문이 있었기 때문이며 정문골이라고도 하였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하는 등 서울이 텅비게 되어 성균관까지 수모를 입을 지경에 처하자 성균관 유생이었던 정신국(鄭信國)과 박잠미(朴潛美)가 공자(孔子증자(曾子안자(顔子맹자(孟子자은(子恩)5()의 위패를 남한산성에 있는 개원사(開院寺)로 옮겨 난을 피하게 하였다. 이에 나라에서 이들 두사람에게 정문을 내리고 사당을 세워 호성사(扈聖詞)라 하였으므로 동명이 유래되었다. 피마동(避馬洞)은 피맛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성균관 동쪽으로 명륜동1가에 걸쳐 있는 마을이다. 임금이 성균관에 거둥할 때 호위하는 군관들은 임금이 성균관에 들어간 후 말을 이곳에 매어두고 기다렸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명륜동2가의 서쪽 끝으로 성균관길, 남동족으로 창경궁로가 지나고 있는 동으로서, 한 때 성균관대학생과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집단 하숙촌이 되었다. 그러나 1972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자리를 옮겼고 학생들도 보다 하숙비가 싼 변두리 동네로 옮겨 자취를 하거나 지방학생 기숙사가 곳곳에 마련되면서 간신히 대학가 하숙촌의 맥을 이어갈 뿐이다.

 

명륜동2가를 지나는 창경궁로는 종로4가에서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는 폭 25m, 연장 1,750m인데 창경궁에 동·식물원이 모두 있을 때 해마다 4월이면 창경원 벚꽃구경을 하려는 상춘객(賞春客)으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던 길이다. 196811월 서울의 전차궤도가 철거되기 전에는 을지로4가에서 돈암동까지 전차가 운행되던 길이기도 하다. 1988년부터 확장공사를 시작하여 도로 양옆의 건물을 철거, 새단장을 한 곳이다. 명륜동2가는 북으로 명륜동1가와 동으로는 혜화동, 남쪽은 명륜동4, 서쪽으로는 명륜동3가를 둘러 싸여 있다.

 

명륜동4

193641일 숭4동을 유학교육의 유일한 기관인 명륜학원이 있는 동이라 하여 명륜정4정목(明倫町4丁目)으로 명명했던 데서 비롯된다. 명륜동4가는 북으로 명륜동2가와 명륜동3, 동으로 대학로를 경계로 하여 동숭동과, 남으로는 연건동, 서쪽으로 창경궁로를 경계로 와룡동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전형적인 주택가를 형성하고 있는 명륜동4가에서는 오래된 기와집들과 좁은 대지 위에 효율적 주택구조 기능을 갖춘 다세대·다가구주택이 적당한 비율로 혼합 배치되어 있다.

 

명륜동4가와 명륜동2가 사이로는 개천이 흘렀는데 지금은 복개되어 일대에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다리를 중심으로 한 마을이 이루어졌으며 곳곳에 우물이 많이 있었다. 명륜동4가에 남아 있는 마을로는 곤우물골·광례곳골·깊은우물골·박석동·북장우·사락다릿골·한우물골 등인데 동명으로 보아 모두가 다리와 우물을 중심으로 발달된 마을임을 알 수 있다.

 

관우물골은 곤우물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명륜동447번지 냇가로 관기교 아래쪽에 있던 관기다리우물이 변하여 관우물, 곤우물이 되었다. 이곳의 관기교는 명륜동4180번지 동북쪽에 있었던 다리로 임금이 성균관에 거동할 때 이 다리에서 박석고개를 넘어오는 관기가 바라다보였기 때문에 이름이 붙었다.

 

광례교동(廣禮橋洞)은 광례교가 있는 마을이므로 광례곳골, 또는 광례교동이라 한 것이다. 명륜동4127-8번지에는 깊은 우물이 있었는데 깊이가 30척 가량 되며, 밑바닥이 돌로 되고 물맛이 아주 좋았기 때문에 동네 일므도 깊은우물골이 되었다. 한우물골이라고도 하는 한정동(寒井洞)은 한우물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한우물은 명륜동4120번지에 있었던 큰 우물로서 아무리 가물어도 수량이 줄지 않고 물이 차가웠던 우물이라 한다.

 

명륜동2가와 명륜동4가 사이에 걸쳐 있는 동네를 박석동이라 하였는데 박석고개가 있었으므로 박석고개 또는 박석동이라 하였다. 박석고개는 창경궁 정문 북쪽 곧 월근문(月覲門)쪽에 있는 고개인데 연건동에 있던 경모궁(景慕宮)의 입수목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박석고개는 경모궁이나 창경궁에 비해 지대가 낮았으므로 낮은 지맥의 보호를 위해 박석을 깔아 박석고개가 된 것이다. 지맥의 보호를 위해 박석을 깔아 박석고개가 된 곳은 명륜동4가 외에도 종로구에 4군데가 더 있으니 대기는 길이 질어서 통해이 불편하여 도로 보수차 박석을 깔았던 것이다.

 

경모궁의 북쪽 담 위쪽에 있는 마을은 북장우(北墻隅)라 하였고 사락다릿골 혹은 사락교동(思樂橋洞)은 명륜동4193번지 북쪽에 사락다리가 있어서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

 

한편 명륜동4가에는 창경궁로(昌慶宮路)와 대학로(大學路)가 지나고 있다. 종로4가에서 창경궁을 걸쳐 명륜동4, 혜화동로터리에 이르는 창경룽로는 폭 25m 연장 1,750m의 길이다. 대학로는 종로5가에서 이화동사거리를 거쳐 혜화동로터리에 이르는 1,550m의 길을 일컫는다. 이 길은 원래 노폭이 25m였는데 1984년 지하철 4호선 공사를 마무리 지으면서 이 길의 북쪽인 이화동사거리에서 혜화동로터리까지 40m로 확장하였다.

 

문학·예술의 '()' 혜화동

창경궁(성균관대학교) → ① 대명거리 → ② 서울연극센터 → ③ 짚풀생활사박물관 → ④ 현대시박물관 → ⑤ 한무숙기념관 → ⑥ 장면가옥 → ⑦ 혜화동 주민센터 → ⑧ 혜화문 → ⑨ 혜화문길(시장공관길) → ⑩ 김상협 가옥 → ⑪ 와룡공원 → ⑫ 말바위 → ⑬ 삼청공원 삼청길

 

9 가회동 嘉會洞

 

재동

은 잿골을 한자로 옮긴 데서 유래된다. 잿골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살펴보면 왕위 계승의 뜻을 품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심복인 권람(權覽)의 추천으로 한명회(韓明會)를 만나 단종7(1453) 단종이 누이 혜경공주(惠敬公主) 즉 영양위(寧陽慰) 정종(鄭淙)의 집에 행차한 기회를 이용하여 무사들을 매복시키고, 어린 단종을 성실히 보필하는 황보인( )등을 유인하여다가 참살할 때 이들이 흘린 피로 내를 이루고 비린내가 나므로 사람들이 집안에 있는 초목회(草木灰) 즉 재를 모두 가지고 나와서 붉은 피를 덮으니 동중은 온통 회()로 덮였다. 그 후부터 이곳을 잿골 즉 회동으로 부르게 된 것인데 그 회동의 잿골이 재동의 잿골로 바뀌어지게 된 것이다. 재동을 이룬 옛부락은 잿골 또는 회동(灰洞)으로 부르는 재동과 동곡(東谷) 홍현(紅峴)이 있다. 동곡은 가회동, 재동, 화동에 걸쳐있는 마을로 홍현 동쪽이 되므로 이름이 붙여졌고 동골이라고도 불렀다. 홍현은 붉은 재라고도 하는데 붉은 흙이 많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정독도서관 남쪽, 재동과의 지점부근이다.

 

현재의 재동은 동으로 계동과 접하고 남으로 율곡로를 경계로 하여 경운동과 마주한다. 서쪽은 안국동, 북쪽은 가회동과 연접해 있고, 헌법재판소가 위치한 83번지를 제외한 재동의 대부분 지역은 조선시대 이래 전형적인 양반집단 부락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거의 대부분이 주택가로 형성되어 있어 서울의 전통마을의 성격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곳이다.

 

계동

은 원래 계동, 가회동, 원서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 이 지역에 제생원(濟生院)이 있어서 제생동이라 하다가 변하여 계생동(桂生洞)이 되었는데 1914년 동명제정시 계생동의 명칭이 기생동(妓生洞)과 비슷하다 하여 계동으로 줄여서 고쳤다. 영조27(1751)에 간인(刊印) 배포한 수성책자(守城冊子)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북부 양덕방(陽德坊) 관내의 계생동이 대개 현위치에 기입되어 있음으로 보아서 영조 때 또는 그 이전부터 이 곳이 계생동으로 칭호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또 순조 말기의 편자로 인정되는 한경지략(漢京識略)각동조(各洞條)에서는 계생동에는 제생원이 있으므로 제생동이라도 칭하였는데 후에 음이 변하여 계생동이 되었다. 또 계생동에는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의 옛집이 있었다라 하고 궐외각사조(闕外各司條) 제생원에 보면 지금 북부 계생동을 살펴보면 곧 옛날 제생원이 이곳에 있었던고로 제생동이라 불려졌으며 제와 계의 음이 서로 혼용되는 까닭에 계동이라 칭한다 하였다. 여기에 의하여 계생동의 원명은 제생동이요, 그 제생동이라는 동명의 기원은 제생동이 이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시작되었으며 제와 계의 한자음이 서로 혼동됨으로 하여 나중에는 제생동이 계생동으로 전칭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계동의 동명 유래가 되는 제생원은 태종 6(1397) 조준(趙浚)의 건의에 의해 지방의 향약재(鄕藥材)를 수납하여 혜민국(惠民局), 동서활인서(東西活人署)와 같이 궁민(窮民)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설치되었다. 현재의 계동은 동으로 원서동, 서쪽은 가회동과 재동이, 북으로는 삼청동과 서로 닿아있고 남으로 율곡로를 경계로 운니동과 마주보고 있다.

 

원서동

의 동명은 글자 그대로 창덕궁의 후원 서쪽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서동의 동명이 이루어지기 전의 이 지역의 동명은 원동(苑洞)이요, 또 그 이전의 동명은 원동과 같은 우리말 음인 원동(院洞)으 로서 그 유래가 매우 오래되었다. 이 곳에서 원동의 이름이 보이는 것은 고종 31년 갑오개혁 때의 기록에서 부터이며 1914년에는 관상감(觀象監)이 있던 원서동 206번지 일대를 관상감골 혹은 관동(觀洞), 제생원이 있언 계동 140-2번지 현재의 원서공원 일대는 계동(桂洞) 혹은 제생동(濟生洞), 창덕궁 요금문(曜金門) 밖에 함춘원(含春苑)이 있었으므로 일대를 원골 혹은 원동(苑洞)의 일부를 합하여 원동으로 하였으며, 1936년 서울의 동리명을 모두 일본식 정()으로 고칠 때에 원서정(苑西町)으로 고쳤던 것이 광복후 정을 동으로 고쳐서 지금에 이른다. 한편으로는 창덕궁 밖에 정업원(淨業院)이 있었기 때문에 관동(館洞)과 대비, 원동(院洞)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원동(苑洞)이 되었다고도 전한다. 정업원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여승들의 수도처를 의미하는 명칭이다. 조선의 한양천도와 함께 창덕궁에서 가까운 곳에 정업원을 설치하였는데, 승려의 입성을 금지하는 조선사회에서도 왕궁 지척의 장소에 자리잡은 이 정업원만은 예외로 왕실의 비호와 원조를 받는 유일한 불교의 전당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곳 정업원의 성종 때 노예가 180여구에 이르렀으며 명종 때에는 많은 인력, 물력을 동원하여 인수궁(仁壽宮)을 정업원 경내에 짓기도 하였다. 정업원이 있었던만큼 이곳의 동명을 유학의 본산인 성균관이 있던 지역의 동명 관동과 대비하는 원동(院洞) 또는 정업원동이라 하였다.

 

현재의 원서동은 창경궁의 서쪽에 위치함으로써 명칭이 유래된 원서동은 동으로 와룡동, 서쪽은 계동, 북쪽에 청운동이 있으며 남쪽은 율곡로를 경계로 운니동과 마주보고 있다. 창덕궁 담을 새로로 길게 형성된 전형적인 주택지구이다.

 

가회동

가회동의 동명은 조선초기부터 있었던 북부 10()중의 하나인 가회방에서 유래된다. 가회동을 이룬 조선시대의 자연부락 중 홍현(紅峴)은 정독도서관의 남쪽에 있던 고개로 붉은 흙이 많아서 붉은 재(紅峴)라 하였으며, 동곡(東谷)은 가회동·재동(齋洞화동(花洞)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붉은 재의 동쪽이 되므로 동골이라 한 것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또한 맹현(孟峴)은 홍현의 북쪽에 있는 고개로 세종 때에 유명하던 고불 (古佛)맹사성(孟思誠)과 후손으로 숙종 때 황해(黃海충청감사(忠淸監司)를 지낸 맹만택(孟萬澤)이 살았으므로 맹감사고개 또는 맹동산이라 하였다. 한경지략(漢京識略)2 각동조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맹감사현(孟監司峴)은 북악산 아래 재동 접경에 있었는데 옛날 세종조의 정승이던 문정공(文貞公) 맹사성이 살던 곳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러온 것이다. 맹사성은 정승 지위에 있으면서도 모든 일을 대체(大體)만으로 판단, 처리하고 사소한 일에는 관계하지 않았으며 공사(公事)가 끝나면 초라한 집으로 돌아와 장기인 피리를 불었다. 공사를 품의(稟議)하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문을 열고 들라 하여서 일을 결재하는데 생활이 아주 간소해서 여름이면 뜰안 소나무 그늘 아래 앉고, 겨울이면 방안에 앉는데 부들자리를 좌우편에 깔았을 뿐 별다른 물건이 없었다. 사람이 돌아가면 문을 잠그기 때문에 공사를 품의하러 오는 사람이 동구(洞口)에 와서 피리 소리를 들으면 맹정승이 반드시 집에 있는 것을 알았다.

 

옛날 명관의 간결청렴하고도 풍류가 있는 일단의 생활을 여실히 말하여 주는 이야기라 하겠다. 현재의 가회동은 동으로 계동, 서쪽은 화동, 남쪽은 재동, 북쪽은 삼청동으로 둘러싸인 동으로 전통적인 한옥가옥들이 많아 서울 도심지 속에 비교적 조용한 주택지를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

 

세월을 거닐다, 북촌 한옥마을 가회동

3호선 안국역(3번 출구) → ① 북촌문화센터 → ② 재동초등학교 → ③ 락고재 한옥체험관 → ④ 청원산방 → ⑤ 석정보름우물터 → ⑥ 중앙고등학교 → ⑦ 가회동11번지 → ⑧ 가회민화박물관 → ⑨ 가회동 31번지 → ⑩ 맹사성 집터 및 동양문화박물관 → ⑪ 삼청동 전망대 → ⑫ 정독도서관 '화개길' 벽화골목 → ⑬ 경복궁 돌담길 율곡로

 

10 이화동 梨花洞

 

동숭동

191441일 경성부의 동명제정 때 숭교방 동쪽에 있는 동이라 하여 동숭동이 동명이 유래되었다. 낙산 정상 부분부터 기슭 전체를 차지하는 동숭동은 일찍부터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았고, 성문(城門) 가까이 있는 도성(都城)안 마을인데다가 성균관(成均館)과 창경궁·배오개시장이 머지않은 곳에 있어 부락의 부락의 형성 여건이 좋았다. 따라서 현재까지 여러 개의 자연부락 이름이 남아 전한다.

 

남상문은 낙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선조 때 군수 남상문(南尙文)이 살았다. 명나라 사신 양호(楊鎬)가 낙산에서 놀다가 내려다 보니 마을 한가운데에 정원·연못·나무의 조화가 이루어진 경치가 뛰어나게 아름다운 것을 보고 단숨에 뛰어내려가 아름답게 정원을 가꾼 주인의 뛰어난 기상을 보고 감탄하여 그 집의 대문에다 치덕구우달존지려(齒德俱優達尊之閭)을 쓴 후부터 마을사람들은 남상문의 집을 자랑스럽게 여겨 마을이름을 남상문이라 불렀다. 백동너머의 마을은 너멍굴, 서울법대 부근은 먹골이었다.

 

쌍계동은 동숭동과 이화동에 걸쳐 있었던 마을로 쌍시내의 수석이 매우 아름답고, 뒤에는 바위가 기묘하면서도 수목이 울창하고 꽃나무가 많이 있어서 경치 좋기로 이름이 났다. 서울에서 아름답기로 이름난 곳은 첫째 삼청동, 둘째 인왕동, 셋째 쌍계동, 넷째 백운동, 다섯째 청학동을 꼽았다. 우잣골 또는 상백동은 동숭동과 혜화동에 걸쳐있는데 태종 때 박은( )이 낙산(駱山)아래에 살면서 잣나무를 심고 백림정(栢林亭)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신댓골 혹은 신대동(新岱洞)은 신대우물 근처에 있던 마을로 중종 때 학자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이 살았는데 집 뒤의 석벽이 매우 기묘하고 우물이 맑고 차며 풍치가 아름다우므로 신대명승(申臺名勝)이라 붙인 데서 연유되었다. 신대동(申臺洞)이라고도 한다. 아랫골은 하백동(下栢洞)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동숭아트홀 근방을 일컫는다. 이 근방에서 조선후기의 서화가인 표암(豹庵) 강세황(姜世晃)은 날마다 낙산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 보며 그림 소재를 찾았다.

 

동숭동 30번지 서쪽에는 광례교(廣禮橋), 그 옆에는 동숭교(東崇橋)가 있었으나 전체가 복개되어 다리의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쌍계재터는 성균관 동쪽에 있던 세조 때 문장가인 김유(金紐)의 서재터로 예조판서 강희맹이 부()를 지어 칭찬한 일도 있다. 내간정(來澗亭)은 쌍계동에 있던 정자터로서 쌍계(雙鷄) 이재(李梓)가 이름을 지었다. 낭만과 젊음이 넘치는 동숭동에는 대학로를 인접하여 마로니에 공원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공간이 하나의 타운을 형성하면서 이채로운 주변 환경과 함께 발전하고 있다.

 

연건동

의 동명은 연화방과 건덕방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이래 오랫동안 주거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오고 있는 연건동에는 자연부락명이 여럿 남아 있다. 과동(果洞) 혹은 과목동(果木洞)이라 부르던 곳은 22통 일대인데 과실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고 남미탑동(南彌塔洞)은 남이탑골이라고도 불렀는데 남이탑이 있어서 명칭이 유래되었으며 126번지 일대이다. 세조 대 명장(名將)이며 태종의 외손자인 남이(南怡)장군의 집터인데 장군이 유자광(柳子光)의 모함을 입어 억울하게 죽은 후 원한 대문에 터가 세다하여 이곳에 아무도 살지 않게 되자 폐가(廢家)가 되어 쑥과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순조 때까지 그저 채소나 지어먹는 빈터로 남아 있었는데 하루는 이 집터의 옆에 사는 사람의 꿈에 남이장군이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자 그 사람은 장군을 위하여 원혼을 모시고 사당을 짓고 탑을 세웠다. 순조 18(1818)에 공식으로 남이장군의 해원복권(解怨復權)이 된 이후의 이야기로 남이장군이 태어날 무렵 3년 동안이나 낙산(駱山)에 풀이 나지 않았던 곳이 장군의 집터이며 터의 한가운데 있던 큰 바위를 중심으로 해서 사당을 짓고 남이장군을 모셨다.

 

또한 남장우라는 마을은 경모궁의 남쪽 담 밖에, 북장우는 북쪽 담 밖에 있었고, 담골은 당골 또는 장동(墻洞)이라 불렀는데 어의궁(於義宮)의 담 북쪽에 있었다. 반송동(盤松洞) 또는 반송우물골은 연건동 66번지에 있었는데 우물가에 반송이 있었다. 반송정동(盤松井洞)이라고도 한다. 쉰골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자리에 있던 마을로 한적하므로 쉬어간다는 뜻이다.

 

서울대 부속병원 남쪽과 구 창경국민학교의 경계지점 부근의 고개는 나무가 울창해서 도깨비가 많이 살았으므로 도깨비고개라 불렀는데 독갑재 또는 독갑현(獨甲峴)이라고도 하였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뒷동산은 마두산(馬頭山)으로 임오군란 이후에 청나라 오조유(吳兆有)의 병영이 있었다.

 

연건동 66번지 부근에 32주의 반송이 있었던 곳을 어애송(御愛松)터 혹은 반송터라 불렀다. 영조 43(1767)에 강릉부사 조진세(趙鎭世)가 심었던 소나무로 정조가 경모궁에 참배한 후 문희묘(文禧廟)터를 구경하기 위하여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사방으로 가지를 뻗은 소나무의 아름다움을 표창하여 어애송이라 하였다. 연건동 29번지 서울의대 자리에 있던 경모궁(景慕宮)앞에는 응연교( ), 연건동 128번지와 이화동 171번지에 있던 장생전(長生殿)을 연결해주었던 다리는 장생전교(長生殿橋장경교(長慶橋장교(長橋)였으며 연건동 178번지와 이화동 184번지를 잇던 다리는 새로 만든 다리라 하여 신교(新橋) 또는 새다리라 불렀다.

 

연건동은 북으로 명륜동4가와 동으로는 대학로를 경계로 동숭동과 마주보며 남쪽은 효제동, 연지동, 충신동, 원남동과 인접해 있으며 서쪽은 창경궁로를 경계로 와룡동과 마주보고 있다. 지역 면적의 약 60%를 서울대 의대, 치대 및 부속병원이 차지하며 한국국제협력단과 산업디자인포장개발원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주택가와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조선시대 이래로 동촌(東村)의 주택지로 손꼽히기도 하는 연건동은 율곡로, 창경궁로, 대학로가 동()의 동, , 남쪽을 돌아지나므로 교통환경 여건으로는 최적의 지역이다.

 

이화동

의 동명은 지금 이화동 2번지에 있던 이화정(梨花亭)에서 유래되었다. 이화동의 옛마을로는 동숭동과 이화동에 걸쳐있던 쌍계동(雙鷄洞)이 있다. 기묘한 암석 울창한 수림에 두줄기의 맑은 시냇물까지 있으므로 조선시대에는 삼청(三淸) · 인왕(仁王) · 쌍계(雙鷄) · 백운(白雲) · 청학(淸鶴)이라 하여 도성안의 5대 명소 가운데 세 번째로 꼽혔다.

 

효제동은 효젯골 · 병골 · 호동(壺洞)이라고도 불렀는데 이화동 25번지 일대의 마을이다. 선조 때의 부제학 유숙(柳肅) · 승지 유섭(柳燮) · 유활(柳活) 3형제가 서로 처마를 잇대어 살면서 부모 모시기를 한결같이 하므로 사람들이 부러워하며 효자형제가 모여사는 집이라 부르던 것이 효자가(孝子家), 효제가(孝悌家), 효제동(孝悌洞)으로 변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동네의 모양이 병처럼 생겼으므로 병꼴, 한자로 호동(壺洞)이라 하였다. 느릿골은 널을 만드는 장생전(長生殿)이 있으므로 붙여진 동명이고 그 서쪽에 놓여있던 다리를 장생전교(長生殿橋) · 장경교(長慶橋) · 장교(長橋)라고 불렀다.

 

이화동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조성해 주는 낙산은 이화동, 동숭동, 창신동, 동대문구 신설동, 성북구 보문동, 삼선동에 걸쳐있는 산으로 산의 모양이 낙타와 같으므로 낙타산(駱駝山), 낙산, 타락산(駝駱山)이라 하기도 했다. 명종 때 학자 남사고(南師古)가 동으로 낙산, 서로 아현을 가리키며 반드시 붕당(崩黨)이 생것 것이라 했는데 그의 예언대로 동인(東人)각마(各馬)로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서인(西人)혁안(革安)이란 뜻으로 인조반정 후에 안정되었다. 이화동은 동쪽으로 창신동, 남쪽으로 충신동, 서쪽으로 연건동과 북쪽의 동숭동으로 둘러싸인 마름모꼴의 지형이며 낙산(駱山) 정상의 서남쪽 산록에 형성된 마을로 전형적인 주택지구이다.

 

타임머신 타고 추억여행 이화동

4호선 혜화역(3번 출구) → ① 함춘원지 → ② 대한의원 → ③ 구 공업전습소 본관 → ④ 쇳대박물관 → ⑤ 이화장 → ⑥ 굴다리길 벽화골목 → ⑦ 70,80년대 시간여행 낙산성곽길 → ⑧ 낙산공원 팔각정 → ⑨ 홍덕이 밭 → ⑩ 로봇박물관 → ⑪ 마로니에 공원 및 구 서울대학교 본관 대학로

 

11 창신1昌信洞

 

창신동

의 동명은 조선초부터 있었던 한성부의 방() 가운데 인창방(仁昌坊)과 숭신방(崇信坊)의 글자를 따서 1914년 동명 개정 때 제정되었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朝鮮)을 개창하고 한성부의 행정관할 구역을 제정할 때부터 있어왔던 창신동은 역사가 오래된 만큼 자연부락의 이름도 많다. 지금의 청계천이 완전 복개되어 청계천으로 모여드는 지천(支川)까지도 없어졌지만 창신13.1아파트 1동 앞에는 복차천(伏車川)이 흘렀고 이 개천에 놓인 다리를 복차교라 하였다. 복차교는 복차다리 혹은 복초다리라고도 불렀으며 부근의 창신1531번지 일대를 복초다릿굴, 복차교동, 복차동이라 하였다.

 

이스턴호텔이 있는 부근의 마을은 도성(都城) 바로 밑에 형성되었다 해서 성밑굴 혹은 성저동(城底洞)이라 하였고 창신182번지 일대는 연못이 있고 정자가 있었다하여 정자동(亭子洞)이라 하였다. 이 연못은 동지(東池)라 불렀는데 서대문 밖의 서지(西池), 남대문 밖의 남지(南池)와 함께 연꽃이 많이 심어져 있던 것으로 유명하였다. 특히 서지의 연꽃이 많이 피면 서인(西人)이 득세하고 동지의 연꽃이 많이 피면 동인(東人)이 득세한다 하여 동서양당(東西兩黨)이 서로 상대방에 해당하는 연못으로 몰래 잠입하여 꽃이 못피도록 꽃대를 부러뜨린 경우가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연못들도 1930년을 전후해서 매립되었다.

 

동덕여중고가 있던 창신1225번지 일대는 새말이라 불렀다. 동덕여학교를 짓기위해 부지(敷地)를 물색할 때 사람들이 모여 새로 마을을 형성하여 살게 되었으므로 새말 혹은 신촌(新村)이라 불렀다. 창신1195번지 일대의 궁안우물에서 넘쳐 흐르는 물은 작은 개천이 되어 청계천으로까지 이어졌는데 이 개천위에 쪽나무를 놓은 다리가 있어 남교(藍橋) 혹은 쪽다리라 불렀는데, 창신1276일대를 말한다. 영미다리에서 오간수교를 지나 3.1아파트까지의 청계천변은 뚝섬, 광나루까지 운행되던 기동차 길이며 이스턴호텔과 한전변전소 자리는 기동차 시발지역사였다. 동대문 로터리에서 청량리역까지의 왕산로에는 6.25동란 직후 약3~4년간 역마차가 운행되었다. 창신1327-27번지에는 우리나라 초창기 아파트 구조의 하나로 알려진 동대문아파트 131가구가 1965년에 건축되었다. 아파트라는 개념이 도입된지 얼마되지않아 아직도 답답한 생활공간으로 여기는 일반인들에게 동선(動線)의 단축과 연료의 혁신 등으로 주거개념 자체를 일환시킨 건물이다.

 

또한 1969515일과 815일에 각각 기공된 3.1시민아파트는 19681016일 도심쪽 윤락가(淪落街) 전면 철거 계획에 따라 청계천변을 정리하는 한편 청계천 복개공사를 위한 부대사업으로 진행되었다. 19699월까지 창신동 방면의 이들 무허가 판자집을 모두 철거하고 높이 10층의 서민 임대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겠다는 계획 아래 추진되었다. 현재의 창신1동은 왕산로를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의 동은 청계로를 경계로 중구 신당동, 북쪽의 동은 지봉로를 경계로 동쪽에 숭인1, 숭인2동이 있으며, 서쪽은 창신2, 북쪽에 창신3동이 자리잡고 있다.

 

마음을 여는 사람의 추억 창신동

1호선 동묘앞역(9번 출구) → ① 안양암 석감마애 관음보살상 → ② 당고개 → ③ 당고개공원 → ④ 절개지 → ⑤ 사다리집 대문 → ⑥파리의 연인촬영지 → ⑦ 지장암 → ⑧ 인력시장 → ⑨ 창신시장 → ⑩ 인장거리 → ⑪ 문구, 완구 도매상가 → ⑫ 신발도매상가 → ⑬ 수족관상가 세검정길

 

12 창신2昌信洞

창신동의 동명은 조선초부터 있었던 한성부의 방() 가운데 인창방(仁昌坊)과 숭신방(崇信坊)의 글자를 따서 1914년 동명 개정 때 제정되었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朝鮮)을 개창하고 한성부의 행정관할 구역을 제정할 때부터 있어왔던 창신동은 역사가 오래된 만큼 자연부락의 이름도 많다. 창신2649번지에는 한우물이 있었는데 우물의 규모가 크고 수량도 많기 때문에 큰우물, 대정동(大井洞)이라 하였다. 창신2동 입구에서 약 300m정도 들어간 지점을 홍숫골 혹은 홍수동(紅樹洞)이라 부르는데 복숭아와 앵두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으므로 마을 전체가 온통 붉은 열매를 맺는 나무로만 싸여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암벽에 홍수동이란 세글자가 새겨져 있다. 홍숫굴과 이어진 곳을 인숫굴 혹은 인수동(仁壽洞)이라 하는데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의 창신2동은 왕산로 북측에 위치하여 동쪽에 창신1, 창신3, 서쪽에 충신동, 이화동 북쪽에 성북구 보문동에 자리잡고 있다.

 

13 창신3昌信洞

창신동의 동명은 조선초부터 있었던 한성부의 방() 가운데 인창방(仁昌坊)과 숭신방(崇信坊)의 글자를 따서 1914년 동명 개정 때 제정되었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朝鮮)을 개창하고 한성부의 행정관할 구역을 제정할 때부터 있어왔던 창신동은 역사가 오래된 만큼 자연부락의 이름도 많다.

 

숭인동의 청룡사(靑龍寺)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은 자줏굴, 자지동(紫芝洞)이라 불렀다. 자줏굴 돌산 중턱에는 청룡정(靑龍亭)이 있었다. 사정(射亭)으로 장충단의 석호정(石虎亭), 마포의 화수정(華水亭), 가회동의 일가정(一可亭), 천연동의 서호정(西虎亭)과 함께 서촌오처사정(西村五處射亭)의 하나로 이름이 났던 곳이다. 청룡정의 동쪽으로 동묘(東廟) 맞은 편에는 붕어우물이 있으므로 해서 부어정동( 魚井洞)이라 하였다.

 

붕어물굴, 붕어우물굴 혹은 줄여서 부정동( 井洞)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이 우물은 크고 물이 많은데 홍수가 나자 이 우물이 넘쳐 흐르고 부근의 개천에 있던 붕어가 우물 안으로 들어와 살았으므로 붕어가 사는 우물이라는 뜻이다. 1977년까지도 붕어우물이 있어 허드렛물로 사용했다. 자줏굴 뒷산은 돌로 되어 있으므로 돌산 혹은 석산(石山)이라 한다. 창신동의 전체지형이 그러하듯 산비탈에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곳의 지층이 암반이므로 기초공사를 깊게 하지 않아도 붕괴의 위험이 없다. 석산은 1960년대 초반까지 채석장으로 사용되었는데 이곳에서 채취된 석재는 전국 각지에서 으뜸으로 쳤다.

 

배성여자상업고등학교와 창신아파트가 있는 근방을 당현동(堂峴洞)이라 하는데 당고개가 있는 마을이므로 이름이 붙여졌다. 배성여자상업고등학교는 부락제를 지내던 도당(都堂)자리였고 도당이 있는 고개이므로 당고개라 하였다. 도당 아랫쪽에는 소경이 북을 치고 경()을 외우며 마을 사람들의 앞날에 대한 길흉(吉凶)을 점쳐주었으며 마을 제사가 있을 때는 따로 선정된 제관(祭官)과 함께 제사일정과 행사를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1968123일 서민아파트 2,000동 건립계획 가운데 창신숭인지구 500평이 선정되었고 이듬해 14일에는 창신동쪽 낙산지구에 시민아파트 30동의 기공식이 있었으며 동년 31일에는 이 일대에 대한 아파트 건설을 위해 무허가 건물의 철거가 있었다. 현재의 창신3동은 동쪽에 숭인1, 서쪽에 창신2, 남쪽에 창신1, 북쪽에 성북구 보문동에 둘러 쌓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