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희문(光熙門)
성동구 城東區
Seongdong-gu (Seongdong-Gu)
서울특별시의 중동부에 있는 구.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의 동부에 있는 자치구이다. 조선 시대 4소문의 하나인 광희문(光熙門)이 있었던 곳이다. 서울을 에워싸던 성곽의 동쪽이란 의미에서 구명을 정했다.
원래는 한성부의 인창방과 두모방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경성부를 축소시킬 때에는 고양군에 속하기도 했다. 1936년 다시 경성부로 편입되어 동부 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43년 구제(區制)의 실시로 동대문과 성동구로 나누어졌다. 이후 고양군의 뚝도면과 광주군의 4개 면이 성동구에 편입되었으나, 1975년 한강이남 지역은 강남구로 분리되어 나갔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행정구역개편으로 자양동·화양동·모진동·군자동·능동·중곡동·구의동·광장동 등이 광진구로 분리·신설되었다.
시의 동부에 위치한 구. 구청 소재지는 마장동이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의 인창방(仁昌坊)과 남부의 두모방(豆毛坊)에 속했던 곳 1914년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纛島面)과 한지면(漢芝面)에 편입 1936년 경성부 편입 1943년 구제(區制) 실시에 따라 동부출장소 관할구역이 동대문구와 성동구로 분리 1949년 서울특별시 확장에 따라 뚝도면을 편입 1963년 광주군의 4개 면을 편입해 천호·송파·언주출장소를 설치 1973년 송파·언주출장소를 폐지하고 영동출장소를 설치 1975년 강남구가 분구됨에 따라 한강 이남지역이 분리 1995년 동일로를 경계로 광진구 분구
성동이란 명칭은 도성의 동쪽이란 뜻으로 수도 서울을 에워싼 성곽을 말합니다.옛날4소문 중 하나인 광희문을 통해 도성을 빠져 나오면 동녘으로 전개되는 들녘이 있었는데 이 들녘을 흔히 동교 또는 전교라 불렀습니다.전교는 화살을 꽂았다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우리말로는 살곶이들입니다.
이 들녘이 끝나는 곳에 한강이 있으며, 한강변에는 뚝섬, 두뭇개 등의 나루가 있어 강원도에서는 목재와 땔감이, 충청·경상도에서는 식량과 잡화가 몰려드는 등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는 관문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두뭇개 뒷산 저자도와 압구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는 독서당이 세워져 조선왕조를 지탱한 많은 수재들이 학문수학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농촌 취락들이 산재하여 여유있는 생활을 하는 등 조선시대까지 이 곳 동교는 한없이 평화로운 고장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성동구의 행정구역은 한성부 남부 두모방으로 대표됩니다. 정조 13년에는 두모방, 인창방,경기도 고양주면, 망우면이 성동구 지역에 해당되었으며, 이 시기에는 서서히 촌락이 형성되었습니다.
서울에서 가장 긴 수변을 접하고 있는 물의 도시 서울에서 가장 긴 수변을 접하고 있는 물의 도시 이미지청계천, 중랑천, 한강 등 총 14.2km의 수변과 접하고 있는 물의 도시로, 성동구는 수변구간의 적극적인 개발을 통해 무지개가 피어나는 꿈과 희망의 수변도시로 발전할 것입니다.
남동부지역은 중랑천과 청계천이 흘러와 합류해 한강에 유입되면서 이룩된 범람원에 해당되는 저지이며, 구 전체적으로 평탄한 충적평지로, 시가지가 이루어져 교통이 발달해 있다. 주택과 공장이 혼재하는 혼합지구로 원래 근교농업이 발달했으나, 광복 후 계속적인 인구 증가와 성동교(城東橋)·광진교(廣津橋)의 건설로 도시화가 진전되어 왕십리지구와 뚝섬지구개발 되었다.
‘교통이 빈번하고 장래의 대발전이 예상되는 곳’ 1937년의 한 신문에서 표현한 왕십리다. 근 한 세기 전부터 왕십리 전성시대는 미리 예고되어 있었던 듯하다. ‘왕십리’란 명칭이 무학대사가 조선조 오백년의 터를 잡을 때 ‘십리만 더 가라’는 늙은 농부의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이젠 달라져야 할 것 같다. 왕십리(往十里)란 이름처럼 ‘열 십[十]자의 정중앙에서 어디든 갈[往] 수 있는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라면 왕십리의 긴 역사를 대표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가 조해일의 1974년 作「왕십리」에는 남자 주인공이 60년대 왕십리를 추억하는 장면이 나온다. ‘왕십리 역 광장은 전차의 종점이 있던 곳이다… 동대문에서 청계천 변을 끼고 달려 나와 뚝섬까지 이르는, 시(市)에서 운행하던 성동(城東)의 명물 중 하나였던 단선의 궤도차가 역 앞 광장 한 복판을 통과했다…’ 소설을 나지막이 읊어보니 그 시절 왕십리 풍경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넓게 펼쳐진 미나리밭, 시내 각처로 나가는 전차와 뚝섬, 광나루를 다니던 기동차가 분주하게 오가며 먼지를 풀썩이던 이곳은 언제나 활기찬 도시였다.
또 하나 떠오르는 70년대 왕십리의 익숙한 풍경은 논산훈련소로 떠나던 입영열차의 기적소리다. 입영열차에 몸을 싣고 차창 밖 가족과 연인을 뒤로 한 채 눈물을 훔치던 청춘들에게 왕십리는 그야말로 ‘눈물의 이별 정거장’이기도 했다. 하루에도 수백 명씩 이곳을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으로 붐비던 왕십리는 예나 지금이나 꼭 거쳐야 하는 교통 요충지였다.
이러한 긴 역사를 가진 교통의 요충지 왕십리의 더 큰 발전을 위해 춘천∼용산 구간을 운행하는 ‘ITX-청춘열차’의 왕십리역 중간정차를 제안하려한다. 현재 용산, 청량리 역 정차만으로는 서울 동부권, 강남권, 경기 동․남부 이용객들의 환승 편의성을 모두 충족시키기 어렵다. 평일 통근시간대 ITX-청춘열차를 이용해 출퇴근을 하는 직장인이 많은 상황을 고려해 왕십리에 정차한다면, 단 1∼2분도 소중한 직장인들에겐 환승으로 인한 시간 절약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주말 여행지로 가장 많이 손꼽히는 춘천이나 강촌 등 경춘선 여행지들에는 열차를 타고 더 많은 여행객들이 발걸음 할 수 있을 것이다. 왕십리가 여러 노선과 연결되는 만큼 청춘열차와 연계된 관광 상품도 다양한 노선 개발로 이어질 수 있다. 자전거를 이용하는 시민들도 마찬가지다.
이달 초에는 9년이 넘는 공사 끝에 왕십리에서 선릉까지 연장된 분당선이 개통됐다. 첫 열차를 시승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2호선을 타고 돌아가야 했던 강남도 10분이면 갈 수 있다. 특히 이번 분당선 개통으로 왕십리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철도 노선 4개가 교차하는 ‘쿼드러플(quadruple)’ 역세권이 됐다. ITX-청춘열차까지 정차하게 된다면 왕십리는 서울시내 동서남북 및 경기지역 수도권, 강원도까지 어디로든 쉽고 빠르게 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될 것이다.
서울 부도심으로서 최적의 입지와 긴 역사가 축적된 교통 기반시설을 갖춘 왕십리는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곳이다. 성동구는 그동안 ‘왕십리 지도’를 바꾸기 위해 힘써왔다. 2004년에는 옛 미군부대 자리에 구청 구의회 교육청 등을 한곳에 모아 종합행정마을을 만들었고 2008년엔 염원하던 왕십리 민자역사가 완공됐다. 이듬해 한양대부터 민자역사까지 이어지는 구간을 젊음의 거리로 조성하고 역사 앞에 왕십리 광장을 열어 벌써 4년째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생산과 유통, 주거 기능을 갖춘 복합형 도시 생산과 유통, 주거 기능을 갖춘 복합형 도시 이미지2.17㎢의 성수 준공업 지역의 생산 기능과 용답동 중고자동차 매매시장, 마장축산물시장의 유통기능, 금호, 옥수, 행당동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한 주거 기능을 고루 갖추었습니다.
구의 남쪽은 한강에 접해 있으며, 중랑천과 청계천이 한강에 흘러든다. 대부분의 지역은 낮고 평탄한 지형을 이룬다. 일제강점기에는 각종 공장들이 입지했고, 1970년대 초부터는 신흥주택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여 현재는 공장과 주택, 상업시설들이 혼재해 있다. 금호동·옥수동·상왕십리동·하왕십리동·행당동 등은 현재 대대적인 재개발사업이 시행되고 있다. 성수동 일대에는 전자·기계·제약·화학공장 등이 밀집해 있으며, 한양대학교가 있는 행당동 일대에는 상업과 서비스업이 발달했다. 마장동은 말을 사육했던 곳이라는 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굴되기도 했다.
왕십리를 중심으로 강남, 강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 왕십리를 중심으로 강남,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 이미지지하철 2,3,5호선과 국철, 분당선의 다섯개 노선이 통과하는 17개의 전철역이 위치하고 있으며, 동호대교, 성수대교를 축으로 강남, 북을 연결하는 서울 동북부의 교통 중심지입니다.
동호대교·성수대교·영동대교로 강남지역과 이어지는 남북 종단 도로가 나 있고, 지하철 2호선이 동서로 관통하며, 강변북로·뚝섬길·왕십리길·광나루길·천호대로 등이 동서로 횡단하고 있다. 왕십리를 중심으로 강남,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2, 3호, 5호선과 국철이 통과하는 15개 역과 지하철 분당선 공사가 추진 중에 있으며, 동호대교, 성수대교를 축으로 강남, 강북을 연결하는 서울 동북부의 교통 중심지이다. 청계천, 중랑천, 한강 등 총 14.2km의 수변과 접하고 있는 물의 도시로, 성동구는 수변구간의 적극적인 개발을 통해 수변도시로 발전을 꾀하고 있다. 2.17㎢의 성수 준공업 지역의 생산 기능과 용답동 중고자동차 매매시장, 마장동 축산물시장의 유통 기능, 금호동, 옥수동, 행당동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한 주거 기능을 고루 갖추고 있다.
▶ 1코스: 하천 따라 걷는 편안한 길(마장→사근→응봉→옥수) 청계천, 두물다리(청혼의벽), 청계천문화관, 마장축산물시장, 살곶이다리, 궁도장, 금호나들목, 옥수(한강변), 맛집(4개소)
▶ 2코스: 숲과 공원이 펼쳐지는 도심 속 쉼터(성수→응봉→금호→옥수) 서울숲, 응봉산, 대현산공원, 구립금호도서관, 배수지공원, 금호산, 매봉산, 맛집(5개소)
▶ 3코스: 발길 따라 즐기는 문화, 예술의산 체험장(왕십리→행당→응봉→금호) 성동구청(무지개도서관), 왕십리광장, 소월아트홀, 성동구립도서관, 독서당생태다리, 금남시장, 백범학원․김구주택 기념비, 달맞이공원, 맛집(8개소)
▶ 4코스: 물과 숲이 가득한 푸른 길(성수→송정→용답) 성수문화복지회관, 수도박물관, 서울숲뚝섬유원지, 송정제방공원 (매미학습장), 새말정, 용답자동차매매시장, 중랑물재생센터 및 도시철도공사 견학, 용답토속공원, 맛집(4개소)
▶ 특화거리: 마장동 축산물시장, 마장동 꽃게골목, 한양대 주변, 용답동 로데오거리, 성수수제화타운
▶ 전통시장: 도선동상점가(곱창골목), 금남시장, 뚝도시장, 마장동축산물시장, 용답상가시장
자연의 보고-청계천, 청계천 8경 청계천 문화관 http://www.cgcm.go.kr 청계천생태탐방 철새보호구역, 청계천하류인 고산자교 ~ 중랑천합류부 구간 마장축산물시장 응봉산개나리축제 서울숲가요제 서울숲 마장축산물시장 서울숲 서울숲광장 뚝섬문화예술공원 습지생태원 뚝섬생태숲 자연체험학습장 한강공원 응봉산 암벽등반공원 성동문화광장 왕십리문화광장 왕십리교통광장 송정제방공원 용답토속공원 용답꽃공원 응봉(배수지)공원 응봉은 산모양이 매처럼 보이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하며 조선시대 왕들이 매사냥을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옛날에는 하나의 줄기였으나, 도시개발로 인해 응봉산, 대현산, 금호산, 매봉산, 배수지공원 5개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고 한강에 연접해 있어 한강을 조망할 수 있으며 경관이 수려하고 체력단련시설이 설치되어 이용이 편리하다.
무학봉근린공원 성수근린공원 금호산 대현산 매봉산 응봉산 달맞이 근린공원 성동구민종합체육센터 마장국민체육센터 용답동 인조잔디구장 광희중 인조잔디구장 응봉산 인공암벽 등반시설 청계천~중랑천변 자전거도로 서울교육문화센터 금호공원체육관 대현산체육관 열린금호교육문화관 성동문화회관 성동구립도서관(본관) 열린금호교육문화관 구립용답도서관 구립금호도서관 성동문화원 구립 무지개도서관 수도박물관 성동종합사회복지관 성동노인종합복지관 옥수종합사회복지관 한양대학교박물관 중고자동차매매시장 공연축제왕십리(서울숲)가요제 응봉산개나리축제 성동문화마당 성동소년소녀합창단 정기공연 응봉산해맞이축제 성동구립여성합창단 정기공연
숲과 강이 생동하는 『서울숲·남산길』 서울의 대표적인 공원인 서울숲에서 남산간 20리 길을(약8㎞) 약 3시간동안 한강과 강남의 우수경관을 조망하면서 응봉산, 대현산, 금호산, 매봉산을 넘어 버티고개를 지나 남산까지 가는 코스로, 자연과 역사, 문화를 동시에 접할 수 있는 『도심속 체험 산책로』입니다. 서울숲→응봉산→독서당공원→대현산공원→배수지공원→금호산→매봉산→버티고개→국립극장→남산 N서울타워
성동 송정둑길 무료로 개방되는 어린이대공원을 후문으로 들어가 한 바퀴 돈 후 정문으로 나가게 된다. 이름 그대로 아이들과 함께 가도 아주 좋을만한 코스이다. 이후 군자교 부근에서 시작되는 송정동 둑길을 지난다. 옆으로 동부간선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들리기는 하지만 높이 솟은 가로수들이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한여름에도 걷기가 나쁘지 않다. 또한 중반 무렵 화장실 왼쪽으로 시작되는 은행나무길은 울창한 숲 속에 들어와 있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이후 조선시대에 가장 긴 다리였다는 살곶이다리를 건너 중랑천길을 잠시 걸어 응봉역으로 진입한다. 아차산역~어린이대공원~송정동 둑길~살곶이다리~응봉역
성동 중랑천길 무료로 개방되는 어린이대공원을 후문으로 입장해 산책하듯 거닐다 정문으로 나가게 된다. 이름 그대로 아이들과 함께 가도 좋을만한 코스이다. 이후 군자교 부근에서 시작되는 송정동 둑길을 지나 조선시대에 가장 긴 다리였다는 살곶이다리를 건너 응봉역을 거쳐 응봉공원으로 오른다. 응봉공원 전망대에서는 서울숲과 함께 한강 일대가 조망되어 야경 촬영지로도 명성이 높다. 이후 걷게 되는 서울숲은 115만㎡에 5개의 테마공원과 다양한 볼거리를 갖추고 내방객을 기다린다. 아차산역~어린이대공원~송정동 둑길~살곶이다리~중랑천 길~응봉공원~용비교~서울숲~뚝섬역
청계천 길 개 요 : 지하철 1호선과 2호선이 지나는 시청역 4번 출구를 나와 400m만 걸으면 바로 청계천의 들머리가 되는 청계광장이 나온다. 이어 물가로 내려가는 통로를 이용해 물길을 따라 휘적휘적 걸으면 2시간 정도 되는 청계천 산책로가 시작된다. 이후 중랑천과 만나는 합수머리에서 중랑천 둔치로 길을 갈아탄 뒤 조금만 더 걸으면 중랑천변 바로 옆으로 자리한 응봉역까지 갈 수 있다. 이후 더 걷고 싶다면 응봉역 바로 옆에 붙은 전망 좋은 응봉공원과 서울숲을 연결할 수 있다. 시청역~청계천길~중랑천 합수머리~응봉역
성동 중랑천길 응봉공원과 서울숲을 돌아볼 수 있는 코스이다. 응봉공원 전망대에서는 서울숲과 함께 한강 일대가 조망되어 야경 촬영지로도 명성이 높다. 이후 걷게 되는 서울숲은 115만㎡에 5개의 테마공원과 다양한 볼거리를 갖추고 내방객을 기다린다. 응봉역~ 응봉공원~용비교~서울숲~뚝섬역
성동 한강수변길 5개의 테마공원으로 이루어진 서울숲의 금쪽같은 산책로를 걸어 서울숲의 얼굴마담이라고 할 수 있는 생태숲 보행가교를 이용해 한강시민공원 뚝섬지구로 나간다. 이후 뚝섬지구에 나 있는 산책로를 따라 다양한 익스트림 탈 것 볼 것이 산재한 뚝섬유원지역 부근까지 간다. 전체적인 코스에 경사로가 없으므로 입문자 걷기 코스로도 적합하다. 다만 뚝섬지구 산책로를 걸을 때는 도보전용 산책로를 이용해야 좀 더 안전한 걷기를 할 수 있다. 뚝섬역~서울숲~생태숲 보행가교~한강시민공원 뚝섬지구~ 뚝섬유원지역
살곶이다리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고장으로 옥수동 응봉에서는 구석기시대 지표유물이 발견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두모포(豆毛浦)·입석포(立石浦) 등 포구가 발달하여 물산의 유통중심지가 되었으며, 살곶이다리가 놓여진 살곶이벌에는 국립목장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뚝도수원지제1정수장 시도 유형문화재 제72호 서울 새남굿 중요 무형문화재 제104호 오죽장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5호 소목장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6호 아기씨당 성동구 향토유적 제1호 남이장군사당 忠武公 南怡將軍之碑 성덕정터 쌍호정터 부군당 최유련개국원종공신록권 보물 제1282호
살곶이다리 사적 제160호 조선시대 가장 긴 다리로 기록되어 있는 돌다리로 세종이 지시하여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홍수를 이겨내지 못해 허물어지기를 되풀이해 60여년 후인 성종 14년에 완성했다. 가운데 두 줄의 교각을 낮게 설계하여 다리의 중량이 자연스럽게 중앙으로 모이게 했으며, 교각에 수많은 흠집을 내어 물살의 영향을 덜 받도록 만들었다.
봉산탈춤 중요 무형문화재 제17호 황해도 봉산군 동선면 길양리에서 전승되다가 1915년경 사리원으로 옮겨 전승되던 탈춤으로 현재 전승지는 서울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황해도 탈놀이의 최고봉을 이루었던 봉산탈춤은 이북지방의 큰 명절인 단오날 밤에 개최해오던 행사이자 하지의 축제였다. 봉산탈춤은 길놀이/고사ㆍ무등춤으로 이루어진 전편과 탈놀이로 이루어진 후편으로 구별되고 크게 7장으로 나누어지는데 제1장 4상좌춤, 제2장 팔목공춤, 제3장 사당춤, 제4장 노장 춤, 제5장 사자춤, 제6장 양반춤, 제7장 미얄춤으로 되어 있다. 봉산탈춤은 그 극본과 춤, 가면, 의상 및 반주 음악에 있어 한국 가면극의 특성을 잘 지니고 있으며, 다른 가면극에 비하여 종교적 의미는 희박하고 민중의 오락적 요소와 사실적인 수법이 특이하다. 김기수씨 외에도 양소운, 윤옥, 김애선 씨 등이 각 장마다 특색 있게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
아기씨당굿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33호 행당1동 128번지 901호에 위치한 아기씨당에서 해마다 음력 4월과 10월에 치뤄지는 아기씨당 굿은 조선 시대부터 내려와 오랜 역사를 가진 마을굿으로 알려져 있다. 당주는 세습되는 당의 주인이기도 하고, 굿을 주관하는 굿의 주인을 일컫기도 하는데 현재 아기씨당의 당주는 김옥염으로 7대에 걸쳐 무업을 해오고 있다. 총 13거리로 이루어진 아기씨당굿은 유교식 제례와 무속식 굿이 합쳐져 있는 것이 특색으로 제사를 먼저 지낸 다음 굿을 한다.
무쇠막터 금호4가는 무수막, 즉 수철리를 한자음화해서 “금(金)”은 철(鐵)에서 인용하고 “호(湖)”는 수(水)에서 인용하여 금호동이 되었다. 이곳을 무수막, 무쇠막, 무시막이라고 칭하여 수철리라 한 것은 조선시대 주철을 녹여 무쇠솥, 농기구 등을 주조해서 국가에 바치거나 시장에 내다 파는 대장장이(치장)들이 모여 살았고, 대장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왕십리 배추장수와 함께 물쇠골 솥장수라고 일컬었다
동빙고터 빙고는 나라의 제사 등에 사용되는 얼음을 저장하고 출납하는 것을 관장하던 관아로, 동빙고의 얼음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 등의 제사에 쓰게하고, 서빙고의 얼음은 궁권이나 백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조선 태조 5년(1396년) 동빙고와 서빙고를 설치하여 이를 예조의 속아문으로 했는데, 동빙고는 한강 연안 두모포, 현재 성동구 옥수동 8번지에 있었다가 연산군 10년(1504) 서빙고의 동쪽 (오늘날 용산구 동빙고동)으로 옮겨졌다.
미타사 미타사는 서울인근에서 가장 오래된 여승방으로 옥수동 395번지 달맞이봉 아래 위치해 있다. 원래는 종남산(終南山) 동쪽 기슭에 있었는데 옥수동에 있던 메주가마를 자하문 밖으로 옮겨 가며 사람은 적고 도둑이 많으므로 절을 이 곳에 옮기고 절 이름을 종남산 미타사라고 고쳤다. 또 두뭇개(豆毛浦)에 있으므로 두뭇개승방이라고도 하였다.
법정동 17개동 기준, 행정동 기준은 20개 하왕십리(下往十里)·상왕십리(上往十里)·도선(道詵)·홍익(弘益)·마장(馬場)·사근(沙斤)·행당(杏堂)·응봉(鷹峰)·금호동1가(金湖洞一街)·금호동2가·금호동3가·금호동4가·옥수(玉水)·성수동1가(聖水洞一街)·성수동2가·송정(松亭)·용답(龍踏)
하왕십리(下往十里), 왕십리제2동 왕십리로 통칭되던 지역으로 왕십리를 양분하여 우리동은 아랫쪽에 자리잡고 있다 하여 하왕십리로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동부 인창방 왕십리였다가 1911년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경기도 한지면에 속했으며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해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하왕십리로 하였다. 그 뒤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 8호에 의해 경성부 구역확장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되어 하왕십리정으로 되었으며 1943년 총독부령 제 163호에 의해 성동구에 속하였다. 1946년 서울시 헌장 제 1조에 의해 일제식 동명을 모두 버리고 하왕십리동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왕십리(上往十里) 도선(往十里 道詵) 왕십리(往十理)라는 이름은 조선 초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도읍을 정하려고 이곳까지 왔다가 한 노인으로부터 십리를 더 가라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해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지역은 조선 초부터 한성부에 속했지만, 도성안의 경우처럼 거리가 번성한 것은 아니어서 이 일대를 왕십리평(往十理坪) 또는 왕심평(往尋坪)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들판이라는 말이다. 6. 25동란 전까지만 해도 왕십리 일대의 주민은 반농반상(半農半商)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곳 일대를 일명 진퍼리(진펄)라고 부른 것도 질펀한 들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왕십리제1동은 상왕십리동(上往十理洞)과 하왕십리동(下往十理洞)의 일부인 ‘왕십리길’ 북쪽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에 동사무소가 설치되기 시작한 것은 1916년 9월 28일(경성부고시 제19호)이었다. 광복 직후에 서울시가 발간한 ‘시세일람(市勢一覽)’을 보면 상왕십리동내에 상왕십리 동부동회(東部洞會)와 서부동회(西部洞會)를 두었다가 동부동회는 상왕십리 제1동으로, 서부동회는 상왕십리 제2동으로 개칭되었다.
그 뒤 1959년 10월 30일(시조례 제165호) 상왕십리 제1동을 조선시대의 인창방 이름을 따서 인창동(仁昌洞), 상왕십리 제2동을 현인동(賢仁洞)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그리고 1975년 10월 1일 (시조례 제981호) 인창동 지역의 일부와 현인동 지역을 중구 황학동으로 편입하여 인창동 일부를 하왕십리제1동 관할에 두었는데, 1985년 9월 1일(시조례 제2015호)에 하왕십리제1동을 왕십리제1동으로 개칭하였고, 2008년 8월 11일 도선동과 합쳐졌다.
고산자로와 왕십리길을 끼고 있는 도선동의 명칭에 대한 유래는 두 가지가 전해진다. 그 하나는 통일신라 때 비기도참설(秘記圖讖說)을 주장한 도선대사가 무학봉에서 수도했다는 전설에 따라 붙여졌다고도 하며, 또 조선개국 때 무학대사가 태조의 명으로 도읍지를 물색하던 중 왕십리에 가서 지세를 살피고 있을 때 소를 타고 지나던 노인이 무학대사에게 서북쪽으로 십리를 더 가라고 지시를 하였는데 바로 이 노인이 신라말 도선대사의 현령이었다는 것이다.
도선동은 법정동인 도선동, 홍익동의 행정을 담당하는 동 관할구역 명칭이다. 마장로 좌우편에 위치한 홍익동은 한민족의 시조 단군의 건국이념이 홍익인간이었기 때문에 이를 따서 제정되었다고 한다. 광복직후에 도선동 지역은 하왕십리 동부동회, 홍익동 지역은 하왕십리 중앙동회에서 행정을 담당하다가 1955년 4월 18일 동제 실시로 하왕십리 동부동회는 하왕십리제1동, 하왕십리중앙동회는 하왕십리제2동으로 바뀌게 되고, 이어서 1959년 10월 31일(서울특별시조례 제165호)에 하왕십리제1동이 도선동, 하왕십리제2동이 홍익동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1970년 5월 18일(서울특별시조례 제613호) 홍익동을 폐지하고 도선동에서 도선동과 홍익동의 행정을 담당하였으나 2008년 8월 11일 왕십리제1동과 합쳐져 왕십리도선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 뒤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 8호에 의해 경성부 구역확장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되어 하왕십리정으로 되었으며 1943년 총독부령 제 163호에 의해 성동구에 속하였다. 1946년 서울시 헌장 제 1조에 의해 일제식 동명을 모두 버리고 하왕십리동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장(馬場) 조선초기부터 말을 기르던 양마장이 이곳에 있어서 마장안, 또는 한자명으로 마장내(馬場內), 마장리(馬場里)라 한 것이 동명으로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동부 인창방에 속해 있었으며 영조 27년(1751)에 나온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동부 인창방 마장리계였으며, 갑오개혁(1894) 때에는 동서(東署) 동소문외계 마장리라고 하였다.
1911년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경성부 인창면 마장리라고 했으며,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하여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마장리라 하였다. 그 뒤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 8호에 의해 경성부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경성부로 편입되면서 일제식 동명인 마장정이라 하였으며 1943년 조선총독부령 제 163호에 의하여 성동구에 속하였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모두 없앨 때 마장동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뒤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 8호에 의해 경성부 구역확장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되어 하왕십리정으로 되었으며 1943년 총독부령 제 163호에 의해 성동구에 속하였다.1946년 서울시 헌장 제 1조에 의해 일제식 동명을 모두 버리고 하왕십리동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근(沙斤) 청계천을 끼고 있는 사근동의 동명은 신라 때 세워진 사근사 (沙斤寺)가 현재의 한양대학교 축구장 부근에 있었기 때문에 유래되었다. 조선초기에는 한성부 성저십리(成底十里)에 속했던 사근동은 갑오개혁(1894) 때 한성부 동서(東署) 인창방(성외) 사근리로 나타나고 한일합방후 1911년4월1일(경기도령 제3호)에 는 일제가 경성부 인창면 사근동이라 칭하였다.
얼마전까지도 사근동은 미나리와 채소가 많이 재배되었던 곳으로 알려져있으며, 현재한양대학교가 세워진 곳에 [치마바위]라고 하는 치마를 두른 모양의 큰 바위가 있었다. 이 치마바위는 일제 때 도로 확장을 하면서 폭파되었는데 붉은 피가 흘러 공사를 중지했다는 설도 있고, 또 이곳이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화산이 되므로 화재 예방책으로 이 바위에 검은 칠을 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바위 위에는 한양대학교 미술대학이 세워져 있다.
행당(杏堂) 갑오개혁(1894) 때부터 칭해 내려온 것으로, 행당초등학교 동쪽산 일대 아기씨당(堂)이 위치한 곳에 옛부터 살구나무와 은행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서 붙여진 이름. 조선초에는 한성부 성저 10리에 속했는데 이 마을이 질펀한 들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진펄리 또는 진팔리라 하였으며 영조때에는 한성부남부 두모방 신촌리계에 속했으며 , 갑오 개혁(1894) 때에는 한성부 남서(南署)두모방(성외)신촌리계 의 행당리동ㆍ전관1ㆍ2계의 전관동으로 되었다.
1911년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하여 경성부 두모면 행당리 전관동으로 되었으며, 1914년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행당리 전관동이 되었다. 그 뒤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하여 경성부에 소속시켜 행당정이 되었으며 1943년 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해 앞서 동대문 출장소가 동대문구와 성동구로 나뉘어져 행당동은 성동구에 속하였다. 1946년 서울시헌장 제1조에 의하여 일제식 동명을 모두 없앨 때 행당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응봉(鷹峰) 응봉동의 동명은응봉동 남쪽에 위치한 응봉산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응봉의 산이름은 산모양이 매처럼 보이기 때문에 붙여졌다 또는 조선시대의 역대왕이 이곳에서 매사냥을 하였기에 매봉이라고 하였다 한다. 이곳은 조선 초부터 한성부(漢成府) 성저십리(城底十理)에 속하였으며,조선 중엽 영조 27년에 나온 수정책자(守城冊子)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의하면 남부(南部)두모방(豆毛坊) 신촌리계(新村里契)로 나타나 한성부 5부에 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은 한일합방 이후 경성부(京城府) 두모면(豆毛面) 신촌리(新村里)로 불리다가 1914년 4월 1월에는 경기도 고향군에 속하여 한지면(漢芝面) 신촌리(新村里)로 개칭되었으며 1936년 구제도(區制度) 실시에 따라 성동구에 속하였고 해방이후 일제식 동명 일소에 따라 1946년 10월 1일 응봉동으로 개정되어 현재에 이른다. 응봉동 지역이 조선시대『신촌(新村)』즉 새말 이라고 부르게 된 까닭은 살곶이다리 부근에 있던 집 10여호를 매봉 밑에다 새로터를 잡아 이전하였다 하여 새말 또는 한자로 신촌(新村) 이라고 하였다.
금호(金湖) 옛날 이곳에서 선철(銑鐵)을 녹여 무쇠솥, 농기구 등을 주조했으므로 무쇠막 무시막 또는 무수막이라고 했는데, 이를 한자명으로 수철리(水鐵里)라 하였다. 수철리란 동명은 현 마포구의 신수동, 구수동도 수철리라 부르고 있어서 이와 구분하여 인근 주민들이 수철리의 철(鐵)에서 금(金)을, 수(水)에서호(湖)를 인용하여 이곳을 금호, 또는 동무수막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왕십리의 배추장수와 함께 무쇠골(수철리)의 솥장수가 유명하였다.
조선초에는 한성부 성저(城底) 10리에 속했으며 영조 27년(1751)에 반포된 수성책자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한성부 남부 두모방(성외) 수철리계였으며 갑오개혁(1894) 때 남서(南署) 두모방(성외) 수철리계의 수철리동이 되었다. 1911년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5부 8면제를 실시하면서 두모방은 두모면이 되어 금호동은 경성부 두모면 수철리라 했으며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해 5부 8면제가 폐지되자 8면 중에 하나였던 두모면은 한지면에 병합되고, 금호동은 고양군에 편입되면서 한지면 수철리가 되었다.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 8호에 의해 경성부 구역확장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금호정이라 하였으며 1943년 구제도 실시에 따라 성동구에 소속되었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모두 없앨 때 금호동이라 했으며 1964년 서울특별시조례 제 320호에 의하여 금호동을 1?2?3?4가로 분할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호동은 성동구의 어느 동보다 지형의 기복이 심하고 경사가 많은 지대인데도 인구가 밀집되어 있다.
금호라는 동 이름은 옛날 이곳에서 선철(銑鐵)을 녹여 무쇠솥, 농기구 등을 주조하던 무쇠막(무수막 또는 무시막 이라고도 함)이라는 명칭에서 나왔다. 무수막을 한자명으로는 수철리(水鐵里)라 하지만 당시 마포구 신수동, 구수동도 수철리라 불렀기 때문에 이와 구분하여 수철리의 철(鐵)에서 금(金)을, 수(水)에서 호(湖)를 인용하여 이곳을 금호 또는 동무수막 이라고 하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십리의 배추장수와 함께 무쇠골(수철리)의 솥장수가 유명하였다.
금호2,3가동은 대부분 구릉지대이나 어느 동보다 지형이 가파르고 기복이 심해 많은 재개발사업이 추진중이며, 남쪽으로 독서당길이 지나고 서쪽으로는 동호로가 지나는 한편 지하철 3호선 금호역과 5호선 신금호역이 위치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한 지역이다.
금호2가동은 광복 직후부터 금호1가동과 함께 금호북부동회로 칭하였고 금호3가동은 금호남부동회로 칭하였다가 1955년 4월 18일 동제(洞制)의 실시로 함께 금옥동이 되었다. 금옥동이 1959년 10월 31일 금북동, 금남동, 옥수동으로 분동되면서 금호2가동은 금북동, 금호3가동은 금남동으로 호칭되었고 1970년 5월 18일에 법정동 지역과 동일하게 금호1,2,3,4가동사무소가 각각 설치되었다. 그 후 2008년 8월 11일(성동구행정기구설치조례 제780호) 금호2가동과 금호3가동이 통합되어 금호2,3가동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옛날 이곳에서 선철(銑鐵)을 녹여 무쇠솥, 농기구 등을 주조했으므로 무쇠막 무시막 또는 무수막이라고 했는데, 이를 한자명으로 수철리(水鐵里)라 하였다. 수철리란 동명은 현 마포구의 신수동, 구수동도 수철리라 부르고 있어서 이와 구분하여 인근 주민들이 수철리의 철(鐵)에서 금(金)을, 수(水)에서호(湖)를 인용하여 이곳을 금호, 또는 동무수막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왕십리의 배추장수와 함께 무쇠골(수철리)의 솥장수가 유명하였다.
조선초에는 한성부 성저(城底) 10리에 속했으며 영조 27년(1751)에 반포된 수성책자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한성부 남부 두모방(성외) 수철리계였으며 갑오개혁(1894) 때 남서(南署) 두모방(성외) 수철리계의 수철리동이 되었다.
1911년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5부 8면제를 실시하면서 두모방은 두모면이 되어 금호동은 경성부 두모면 수철리라 했으며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해 5부 8면제가 폐지되자 8면 중에 하나였던 두모면은 한지면에 병합되고, 금호동은 고양군에 편입되면서 한지면 수철리가 되었다.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 8호에 의해 경성부 구역확장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금호정이라 하였으며 1943년 구제도 실시에 따라 성동구에 소속되었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모두 없앨 때 금호동이라 했으며 1964년 서울특별시조례 제 320호에 의하여 금호동을 1·2·3·4가로 분할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호동은 성동구의 어느 동보다 지형의 기복이 심하고 경사가 많은 지대인데도 인구가 밀집되어 있다.
옥수(玉水) 옥수동의 동명은 옥수동에 산5번지에 있었다는 옥정수(玉井水)라는 위장에 좋다는 유명한 우물이 있었고, 그 우물의 이름을 따서 마을이름을 옥정숫골이라고 한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이 곳을 두뭇개, 두멧개 또는 한자음으로 두모주, 두모포(동국여지승람-도성 동남쪽 5리허,연산군일기 11년 5월 9일조에 등장)라고 불렀다.
옥수동은 성동구 서남쪽 지역의 법정동 명칭이다. 1988년 7월 1일(구조례 제59호) 옥수동이 옥수제1동, 제2동으로 분동되었다가 2008년 8월 11일 다시 합쳐져 오늘에 이른다. 옥수동은 활발한 재개발사업으로 한남하이츠, 삼성, 극동, 극동그린, 현대, 옥수하이츠, 풍림아이원 등의 아파트가 위치해 있다. 특히 한강을 바라볼 수 있는 조망권이 탁월하여 “강북의 압구정동”이라 불리고 있다. 옥수동 244번지 동쪽에는 조선초 국가에서 젊고 유능한 학자들(국조호당록 참고)을 뽑아 일정기간 사가독서(賜暇讀書)하도록 한 독서당(중종12년 서기1517년,동호독서당-임란때 소실,정조때 규장각 학사의 독서를 위해 옥수동 유하정에 호당을 설치했다 함)이 세워져 있었다. 그래서 약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독서당길이라 칭한다. 동명인 옥수동은 원래 한성부 남부 두모포계였다가 일제때 명칭이 두모동에서 옥수정으로 변경된 후(1936년4월1일) 1946년 서울시헌장 제1조에 의해 옥수동으로 굳어져 현재에 이른다
옥수동 339번지에 있었던 옥정수 우물은 4.19이후 옥수로가 개통되면서 매몰되고 말았다. 옥수동 산1번지에는 태조5년이후 동빙고(옥수동8번지) 북쪽에 설치해 왕이 동빙제를 지내던 사한단도 있었다 한다. 옥수동은 한강을 끼고 있는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쌓여 있어서 서울근교에서는 드물게 한적한 곳으로 많은 유적과 일화가 남아있는 유서깊은 동네이다.
성수동(聖水洞) 옛날 성덕정이란 정자와 뚝도 수원지(水源地)가 있던 곳이라 하여 각각 첫머리를 따서 성수(聖水)라 했다는 설과 한강을 낀 물가 마을로 한강물을 식수로 사용하는 깨끗하고 고마운 물이라는 뜻으로서 성수라는 동명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뚝섬ㆍ전관ㆍ전교 등으로 불리어 왔으며, 영조 27년(1751) 수성책자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남부 두모방(성외) 전관1, 2계 전관동이었으며 갑오개혁(1894) 때는 남서(南署) 두모방 전관1, 2계 전관동이었다.
1911년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경성부 두모면 독도1, 2계가 되었고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해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 동독도리(현 성수동 2가), 서독도리(현 성수동 1가)가 되었다. 그 뒤 1949년 대통령령 제 159호에 의해 서울특별시 구역확장에 따라 서울시 성동구에 편입되었으며 1950년 서울특별시조례 제10호에 의해 성수동1, 2가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수1가2동은 북으로는 중량천, 남으로는 서울숲공원 및 한강이 인접해 있으며 예로부터 지역 주민의 단결과 화합을 바탕으로 준공업 지역과 주거지역이 조화를 이루며 발전하는 최근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고장입니다.
성수동일대는 조선시대에 뚝섬, 살곶이벌 등으로 칭하였고 풀과 버들이 무성하여 조선초부터 말을 먹이는 목장이 되었으며, 조선 태조때부터는 임금의 매사냥터였으며 임금이 무예를 검열하던 곳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옛날 성덕정이란 정자와 뚝도 수원지(水源地)가 있던 곳이라 하여 각각 첫머리를 따서 성수(聖水)라 했다는 설과 한강을 낀 물가 마을로 한강물을 식수로 사용하는 깨끗하고 고마운 물이라는 뜻으로서 성수라는 동명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뚝섬ㆍ전관ㆍ전교 등으로 불리어 왔으며 영조 27년(1751) 수성책자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남부 두모방(성외) 전관1, 2계 전관동이었으며 갑오개혁(1894) 때는 남서(南署) 두모방 전관1, 2계 전관동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뚝섬ㆍ전관ㆍ전교 등으로 불리어 왔으며 영조 27년(1751) 수성책자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남부 두모방(성외) 전관1, 2계 전관동이었으며 갑오개혁(1894) 때는 남서(南署) 두모방 전관1, 2계 전관동이었다. 1911년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성부 두모면 독도1, 2계가 되었고 1914년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 동독도리(현 성수동 2가), 서독도리(현 성수동 1가)가 되었다. 그 뒤 1949년 대통령령 제159호에 의해 서울특별시 구역확장에 따라 서울시 성동구에 편입되었으며 1950년 서울특별시조례 제10호에 의해 성수동1, 2가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수2가동은 법정동이며 행정동으로는 성수2가제1동과 성수2가제3동으로 나뉜다.
송정(松亭) 이 동의 동명 유래는 문헌이나 구비설화로 전해 오는 것이 없어 그 유래를 알 길이 없으나 다만 송정동 앞에 솔마장벌 또는 양마장평으로 불리는 들판이 있는데 이곳이 양마장 솔마장과 관계가 있어 숫마장, 즉 숫말을 기르는 곳이라 하여 숫마장으로 부르던 것이 차츰 전음되어 솔마장으로 되고 그것이 다신 한자로서 송정(松亭)이라 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 때에는 한성부 남서(南署) 두모방(성외) 전관계 장내능동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경성부 두모면 장내능동이라 했으며,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해 경성부 행정구역을 새로 정할 때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 송정리라 하였다. 그 뒤 1949년 대통령령 제 159호에 의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성동구에 속하였으며 1950년 서울시조례 제 10호에 의해 송정리를 송정동으로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용답(龍踏) 1975년에 용두동(龍頭洞) 지역과 답십리동(踏十里洞) 지역 일부가 통합되어 신설된 동이므로 머리 글자인 용(龍)자와 답(踏)자를 따서 붙인 동명입니다. 1975년 서울특별시조례 제979호의 동명칭 및 구역획정에 의해 동대문구의 용두동 일부와 답십리동 일부를 합쳐 용답동으로 하고 성동구에 편입시켰다. 이때 성동구의 중곡동ㆍ능동ㆍ군자동의 일부를 분할하여 동대문구 장안동으로 하고 남쪽으로 들어온 동대문구의 용두동ㆍ답십리동의 일부를 성동구 용답동으로 하였다.
영상물주요업무계획중장기 종합계획사업예산서기타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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