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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돈의문), 서대문구 西大門區

草霧 2013. 11. 29. 18:04

 

 

 

 

서대문 (돈의문)

 

 

서대문구 西大門區

    

 

Seodaemun-gu

 

 

 

서울특별시의 중서부에 있는 구

'서대문'의 명칭은 조선 시대의 도읍지인 한양의 서문인 서대문(돈의문)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지만, 현재는 헐어진 서대문의 자리는 서대문구가 아닌 종로구에 속해 있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에 속했으며, 1914년에 경기도 고양군에 속했다가 1936년 다시 경성부에 편입되었다.

 

1940년 서부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43년 구제(區制)의 실시로 서대문구역소가 되었다. 1944년에 마포구역소가 분리되었으며, 1945년에 서대문구역소가 서대문구로 개칭되었다. 1979년에는 은평구가 분리되었다

 

 

 

시의 서부에 위치한 구. 구청 소재지는 연희동이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의 반석방(盤石坊)과 반송방(盤松坊)

북부의 상평방(常平坊연은방(延恩坊연희방(延禧坊) 지역

1914년 경성부 구역이 축소되면서 경기도 고양군 용강·연희·은평면

1936년 서울 편입

1943년 구제(區制) 실시에 따라 서대문구 신설

1944년 마포구 분리

1979년 은평구 분리 신설

 

 

 

 

 

 

통일신라시대에는 한양군으로, 고려시대에는 12목의 하나인 양주로 개칭되었으며 1396년 조선초 서울의 4대문 가운데 하나인 돈의문, 즉 서대문이 건립됨으로써 지금의 지명을 얻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태조는 한양을 한성부로 개칭하고 552방의 행정구역으로 분류하였으며 서대문구는 서부에 속하여 반송방, 반석방, 상평방, 연희방, 영은방의 일부 지역으로 중국과의 교류시 진입로 역할을 하였다.

 

한양천도가 실현되자 1396년에 약 18km의 도성이 쌓아짐에 따라 4대문 가운데 하나인 돈의문, 즉 서대문이 건립됨으로써성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지명을 얻어 비로소 서대문이라는 지역 이름을 얻게 되었다. 행정 구역상으로는 한성부를 552방으로 분류하였는데 그중 서대문지역은 한성부 서부지역의 반송방, 반석방과 북부의 상평방 연희방, 영은방의 일부지역이었다.

 

 

대학촌

인왕산·안산·백련산(白蓮山, 216m) 줄기와 그 사이에 흐르는 홍제천을 중심으로 동쪽은 종로구, 서북쪽은 은평구, 남쪽은 마포구와 접해 있다. 구릉과 한강 인접의 충적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지역이 주택가와 학원가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의주로·신촌로·연희로 등 삼각상의 간선도로변을 중심으로 상업지구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와 연결된 교통로가 발달해 있다. 신촌로와 성산로가 동서를 관통하며 연희로가 홍제천을 따라 남북으로 통한다.

 

또한 경의선이 통과하여 통일을 향한 전초기지 구실도 한다. 1914년 경의선의 개통과 1920년대 연세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의 설립은 이 지역 발달의 계기가 되었다.

    

 

서대문구는 동경 126˚와 북위 37˚에 위치한 비교적 온난한 지대로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만세문 비각 도로원표로부터 반경 5내에 위치하며, 구의 동쪽은 종로구와 중구에 접하여 있고 남쪽은 마포구, 서쪽은 은평구와 마포구 일부지역, 북쪽은 은평구에 접해 있으며, 대부분이 임야지, 분지, 구릉의 세 지역으로, 임야지는 인왕산(338m), 안산(296m)등 여러 봉우리가 종립하고 있어 홍은동, 홍제동 지역의 분지를 이루고 있다.

 

연연한 계곡일대에는 자연의 조화와 아울러 산지 수려한 선경을 이루고 있으며 한강을 향하여 서서히 감하고 있어 구 전체의 1/3을 차지하고 있으며, 세검천을 원류로 흘러내리는 홍제천과 불광천은 한강을 향해 나란히 흐르고 있어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또한 문화재와 사적지, 유서 깊은 대학을 비롯한 수십 개의 교육기관이 밀집된 문화와 교육의 중심지로서 그에 걸맞은 다양한 사업이 펼쳐지고 있다. 한편 충로정 지역, 가좌지역. 특히 신촌 지역이 있다.

    

북쪽에는 북한산 줄기가 뻗어 있으며, 동쪽과 서쪽에는 인왕산·안산(296m)·백련산(226m) 등이 솟아 있다. 사천천이 구의 서부를 서남류하여 한강에 흘러든다. 조선 도읍지 천도 때 후보에 오르기도 했으나, 장소가 협소하여 지금의 경복궁 자리로 정해졌다. 중구와 은평구의 중간지역에 위치한 지역으로 신촌은 일찍부터 서울의 주요 부심지역으로 발전했다. 한편 의주로·가좌로·모래내길 등이 있다.

    

 

 

 

 

봉원사

한국불교 태고종의 총본산 사찰이다. 서울 서대문구 봉원동 산1번지의 안산 자락에 있다. 신라 말기 진성여왕 3년인 889년에 도선이 처음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의 이름은 반야사(般若寺)였다. 이후 고려 공민왕 때 보우가 크게 중창하였다. 조선 태조가 불교에 심취했을 때 삼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하였고, 사후에는 태조의 초상이 봉안되기도 했다.

 

 

 

 

 

신촌

서대문구 신촌동(대현동)과 창천동, 마포구 노고산동과 대흥동 일대를 일컫는 지명이다. 주변에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서강대학교, 홍익대학교, 명지대학교(인문캠퍼스) 등의 대학교들이 밀집해 있다. 서울역에서도 멀지 않고 고양, 김포, 파주, 인천 등지로 연결되는 교통편이 발달하였으며, 많은 유흥업소 등이 모여 있어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서울의 대표적인 부도심 중 하나이다.

 

 

 

 

홍제천

옛날 인근에 중국사신을 접대하던 홍제원이 있었던데서 유래되었으며, 하천 본류에 모래가 많이 쌓여 물이 늘 모래 밑으로 스며들어 흘렀던 까닭에 모래내또는 사천(沙川) 이라고도 불리었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온 여인들이 맑은 물이 흐르는 홍제천에서 몸을 씻어 허물을 벗도록 한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홍제천이 맑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인왕산

해발 338.2m로 화강암이 유난히 노출된 것이 특징이다 . 경북궁의 주산을 중심으로 인왕산은 서울 내사산(內四山)의 우백호에 해당되며 그안산(案山)인 남산은 능선이 매우 부드럽고, 좌청룡인 동쪽의 낙산은 밋밋하고 얕은 지세이다 인왕산의 주봉은 둥글 넓적하면서도 남산같이 부드럽거나 단조롭지 않다. 또한 뾰족한 북악처럼 유달리 뛰어나지는 않지만 늠름한 남성적인 산세이다 인왕산은 불법의 수호신으로 사문(寺門) 또는 수미단 전면의 좌우에 안치하는 금강역사로서 둘 다 용맹하고 험악한 얼굴을 가지며 일명 이왕(二王) 또는 금강신(金剛神) 이라 한다. 인왕산에는 선바위를 비롯하여 중종(中宗)과 신비(愼妃)에 얽힌 치마바위부처님바위(佛岩)삿갓바위(笠岩) 등 바위의 형상이 실제의 사물과 유사한 기암괴석들로 이름 있는 바위가 적지 않아 어느 때 올라 보아도 그때마다 느낌을 가질수 있는 명산이며 인왕산에 오르는 등산길로는 크게 8개노선의 중요 등산로가 있다.

 

 

 

 

기차바위

정상에서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위 이름 그대로 기관차가 객차를 이끌고 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하여 이름 붙여진 바위로 홍제동 환희사 쪽에서 보면 제대로 볼 수 있다.

 

삿갓바위

인왕산 정상 가운데에 있으며 바위 그대로 삿갓을 벗어놓은 듯 하다 이 바위를 기점으로 남릉과 북릉, 동면과 서면 등으로 나뉘어진다.

 

부처님바위

남릉을 오르다 정상 부근 좌측으로 높게 솟아있는 바위로서 앉아있는 부처와 같아 부처님바위라 불리운다. 머리부분이 곧 떨어질 것 같이 아슬아슬하여 아슬바위라고도 한다.

 

안산

무악(毋岳)이라고도 불리우며 기산 · 봉화뚝 · 봉우재 · 봉우뚝으로 알려져 있다. 안산은 동봉과 서봉의 두 봉우리로 이루어져, 산의 모양이 마치 말의 안장 즉 길마와 같이 생겼으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그 동쪽에 있는 현저동에서 홍제동을 넘는 고개를 길마재, 즉 안현(鞍峴)이라 하였다.

 

 

 

 

해발 295.9m의 안산은 인왕산에서 서쪽으로 비스듬히 뻗어 무악재를 이루고 솟은 산이다. 길마재의 다른 이름인 무악재는 모악재로 부르기도 하였으며, 조선왕조가 개창되어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면서 무악은 궁궐의 주산(主山)으로 주목되기도 하였다. 식생은 연희동 지역인 서.남측 연희동 지역은 자작, 산벚, 물푸레, 잣나무 등 1990년도부터 환경림으로 양호한 수림을 형성하고 있으며, 북동부 암반지역은 왜소한 소나무, 산정부 일대는 팥배, 상수리, 오리나무가 분포하고 남동측 임야는 대규모 아까시나무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안산봉원사

무악 봉수대

 

 

백련산

정상(높이 215.5m)에서 능선을 경계로 서대문구와 은평구로 나누고 있으며 백련산은 동남쪽에 백련사(白蓮寺)라는 절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옛부터 동쪽의 청련사(靑蓮寺), 남쪽의 삼막사(三幕寺), 북쪽의 승가사(僧伽寺)와 함께 서백련(西白蓮)으로서 도성의 4대 비보사찰(裨補寺刹)가운데 하나로 전해지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절의 서쪽에 있어서 '西方淨 淨土寺'라고 하였는데, 어느 여름날 연못에서 갑자기 하얀 연꽃이 피어올라 백련사라 명칭을 바꾸었다고 한다. 백련산 정상(높이 215.5m) 등산로 주변에 체력단련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많은 시민들이 이용하고 있다.

 

 

 

 

궁동산

서대문구 연희동 산118번지 일대에 있는 산지형 근린공원으로서 연접 연희시범아파트가 노후되어 아파트 10개동을 철거하고 공원 및 실내체육관을 조성하였다. 인왕산에서 안산으로 이어진 산줄기는 안산 서쪽으로 서대문구청을 감싸고 모래내의 남쪽으로 연하여 연희1동의 104.3m 봉우리 등을 형성하고 있으며, 대동여지도에 보면 104고지 지맥 남쪽에 옛 연희궁(衍禧宮)이 표시되어 있다. 궁동공원과 연접한 이른바 104고지라고 불리우는 이 곳은 6.25전쟁 중 인천상륙작전 후 서울수복을 위한 격전지로 유명하며, 성산회관 뒷길로 50m 쯤 올라가면 '海兵隊一0四高地戰績碑' 라고 새겨진 기념비가 새워져 있다.

 

 

 

 

북한산

도시자연공원은 크게 2개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은평구 녹번동과 서대문구 홍은동 지역에 위치하고 또한 종로구 평창동과 구기동 성북구 정릉동, 성북동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북한산은 원래 하나의 공원이었으나 1983년 주요지역의 대부분이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됨에 따라 면적도 좁아지고 분산되었다.

 

 

 

 

 

안산자락길

 

 

 

 

연세대학교 박물관

이화여대 자연사박물관

이화여대 박물관 

서대문자연사박물관  

 

 

 

 

 

1897년에 지어진 독립문

독립문(사적 제32영은문 주초(迎恩門柱礎사적 제33), 현저동에 있던 서울구치소 자리는 사적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백련사(白蓮寺) 경내의 명부전(冥府殿삼성전(三星殿극락보전(極樂寶殿범종각(梵鐘閣원통전(圓通殿) 등이 있고, 그 밖에 보도각백불(普渡閣白佛), 봉원사 대웅전, 무악동봉수대지, 화산군신도비 등의 유적이 있다.

 

그리고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독립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독립운동과 일제의 만행을 살필 수 있는 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조선 백자 철화포도문호 국보 107

월인석보 보물 745

백자철화운룡문호(白磁鐵畵雲龍文壺) 보물 645

백자청화송죽인물문호(白磁靑畵松竹人物問壺) 보물 644

성석편(城石片) 보물 642

기사계첩(耆社契帖) 보물 638

죽주봉업사 정우5년명반자(竹州奉業寺 貞祐五年銘飯子) 보물 576

청자투각돈(靑磁透刻墩) 보물 416

감지은니묘법연화경제7(紺紙銀泥妙法蓮華經濟七) 보물 352

석조부도(石造浮屠) 보물 351

청자순화 4년명호(靑磁淳化四年銘壺) 보물 237

무악산 봉수대터 서울시기념물 13

양호거사비(楊鎬去思碑) 시 유형문화재 91

화산군신도비(花山君神道碑) 서울시 유형문화재 41

보도각백불(普度閣白佛) 서울시 유형문화재 17

 

 

 

독립운동의성지 독립문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이 독립국임을 상징하기 위해 영은문을 무너뜨리고 그 터에 지은 문으로서재필의 주도로 건립되었으며 세레딘사바틴이 설계했고, 그 현판은 이완용의 작품이다.

     

서대문형무소(서대문 구치소)

1907년 융희 원년 대한제국을 점령한 한국통감부가 서울에 세운 형무소이다.

 

이후 해방 뒤에도 교도소, 구치소로 활용되다가 1987년 교도소 시설은 경기도 의왕시로 옮기고, 박물관, 문화재 형식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 그 건물에 독립 공원의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설치되어 있다.

 

대한제국 말기에 지어져 일제강점기 때의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광복 이후 정치적 격변과 군사독재 정부에 대항한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의 고난과 아픔을 간직한 역사의 현장이다.

 

이곳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의주로 247(현저동 101번지)에 위치한 서대문 형무소는 대한제국 말에 일제의 강압으로 감옥이 지어져 80여년 동안 우리 근현대사 격동기의 수난과 민족의 한이 서려 있는 역사의 현장이자 우리 민족의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대표적인 탄압기관 이였습니다.

 

 

 

 

 

서대문 관광코스

 

1코스

서대문자연사박물관 안산 또는 홍제천 서대문독립공원,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신촌, 이대지역

 

12일 코스

서대문자연사박물관 홍제천 서대문독립공원,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인왕산 또는 영천시장 봉원사 연세대, 이화여대(이화웰컴센터, 캠퍼스투어) 신촌 걷고 싶은 거리, 이대 찾고 싶은 거리

 

박물관투어

이화여대자연사박물관, 이화여대박물관 연세대학교 중앙박물관 서대문자연사박물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법정동 기준 20, 행정동 기준은 14

연희(延禧충정로2(忠正路二街충정로3·(미근(渼芹천연(天然냉천(冷泉옥천(玉川영천(靈泉현저(峴底북아현(北阿峴대신(大新대현(大峴신촌(新村봉원(奉元창천(滄川홍제(弘濟홍은(弘恩남가좌(南加佐북가좌(北加佐)

 

 

 

 

 

 

충현동忠峴洞

() 중앙여고 내에 위치하고 있었던 의령원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원자인 의소(懿昭) 세손 정()의 묘소이며 일명 애기능으로 불려왔다. ‘애기능이 위치한 고개라 하여 애오개라 불리다가 애오개에서 유래한 한자어인 아현(阿峴)으로 불리워졌다고 한다. 일제시대 북아현정으로 불리다가 1946년 북아현동으로 바뀌었다. 1964년 대현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완료되어 마포구 아현동과 신촌로 이북지역 대부분이 북아현동에 편입되었다. 1955년에 북아현 1·2·3동으로 나뉘어졌고 20085월에 충정로동과 북아현3동이 통합하여 충현동으로 명칭변경이 되었다.

 

 

천연동 天然洞

동 이름은 동명여자중학교 자리에 있던 정자 천연정(天然亭)에서 유래하였는데, 이 천연정은 무악재를 오가는 관원들을 맞이하고 전송하는 연회장이었다고 한다. 1914년 지역의 구획을 새로 정할 때, 구한말까지 불리워오던 이판동 일부와 석교동 일부를 합하여 만들어졌고, 1975년 교남동 지역 중 의주로 서쪽 대부분이 편입되었다. 법정동으로서 행정동인 천연동·냉천동(冷泉洞옥천동(玉川洞영천동(靈泉洞현저동(峴底洞)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아현동 北阿峴洞

조선시대에는 성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동쪽의 광희문과 서소문을 통해야만 시체를 나가게 하였는데, 특히 아이 시체는 이 고개를 지나서 묻게 하였다 하여 아이 시체가 넘는 고개아는 뜻으로 아현이라 부르던 것이 동명이 되었다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일제시대 북아현정으로 불리다가 1946년 북아현동으로 바뀌었다. 1964년 대현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완료되어 마포구 아현동과 신촌로 이북지역 대부분이 북아현동에 편입되었다가 1955년에 1·2·3동으로 나뉘어져 있다가 200856일 북아현1·2동이 통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촌동 新村洞

조선시대에 한성부 북부(西部) 연희방(延禧坊)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연희방 새터말이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연희면에 편입되면서 고양군 신촌리가 되었다가 19361월 경성부의 지역 확장으로 경성부에 편입되어 일본식 지명인 신촌정이 되었다. 19407월 경성부 북부출장소 신촌정, 19436월 경성부 서대문구역소 신촌정, 194510월 구제(區制) 실시로 신설된 서대문구 신촌정이 되었다. 194610월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을 동()으로 고칠 때 신촌동이 되었다.

 

 

연희동 延禧洞

조선 초 양주 땅이었던 이곳은 태조가 신도읍지를 찾고 있을 때 무악재 아래에 위치 북쪽에 나지막한 산봉우리가 있고 동서쪽으로 산맥이 뻗어있는 명당터라하여 하륜 등이 도읍지로 적극 천거했던 지역 으로, 연희동의 동명은 현재 연세대학교가 있는 자리로 추정되는 연희궁터의 이름에서 연유된 것이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정자동, 염동, 궁동, 음월리라 부르던 지역으로 일제 때 경기도에 속하다가 다시 경성부에 속하여 연희정이 되었으며 1946년 연희동으로 개명되었다.

 

 

홍제동 弘濟洞

홍제동은 중국사신이 드나드는 중요한 육로에 위치한 지역으로 중국사신 및 여행객들이 머물렀던 현재의 국립 여관격인 홍제원이 이 지역에 위치하여 동명이 유래되었으며, 원래는 홍제원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홍제 내리라고 하다가 광복후 홍제동으로 바뀌었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홍제내리에 속하였고, 1936년 경성부로 편입되면서 홍제정으로, 다시 1946년 홍제동으로 바뀌었다. 1950년부터 1970년까지 안산동사무소 관할이었다가, 1970년에 홍제1·2·3동으로 분할되어 행정을 담당하였으며, 1975년에 다시 홍제2동이 2동과 4동으로 분할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홍은동 弘恩洞

홍은동이란 이름은 예전의 경기도 은평면 홍제외리 지역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홍제외리의 자와 은평면의 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홍제외리에 속하였고, 1949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홍은동으로 바뀌었다. 1964년 홍은1·2동으로 분할되었고 1970년과 1975년에 홍은3·4동이 새로 생겼다. 1980년에 홍은4동이 폐동되면서 홍은2동에 통합되었다.

 

 

남가좌동 南加佐洞

가재가 많고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가재울이라고 하던 것이 한자음으로 가좌리라고 하다가 가좌동이 되었으며, 가재울 남쪽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남가좌리에 속하였고, 1949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편입되면서 남가좌동으로 바뀌었다.

 

 

북가좌동 北加佐洞

가재가 많고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가재울', 한자음으로 가좌리라고 하다가 가좌동이 되었으며, 동 이름은 가재울 북쪽에 있다는 데서 붙여졌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 연희방 가좌동2(加佐洞二契)로 부르던 지역이었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북가좌리(北加佐里)에 속하였고, 1949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편입되면서 북가좌동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