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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나루, 서강나루, 양화나루 마포구 麻浦區

草霧 2013. 11. 29. 14:29

 

 

 

 

마포나루, 서강나루, 양화나루

 

마포구 麻浦區

 

 

Mapo-gu (Map'o)

 

 

서울특별시의 중서부에 있는 구.

조선시대에는 한성부에 속했으며, 1911년에 잠시 경기도 고양군에 속했다가 1936년 경성부로 편입되었다. 1944년 서대문구역소에서 분리되어 마포구역소가 되었으며, 1945년 마포구로 개칭되었다. 1990년대 이후 여의도와 인접한 강변 지역을 중심으로 재개발이 진행되어 서울특별시 서부권의 중심 지역으로 발전하고 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덕은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마포의 명칭에는 두가지가 전해 내려온다. 이 지역에는 호수가 세 군데 있어서 삼포(三浦)로 불렸는데 우리말 ''자에 해당하는 한자어 ''()자가 붙음으로써 마포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이곳 물가()에 베옷을 짓는 마()가 많이 재배되어 마포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시의 중서부에 위치한 구. 구청 소재지는 성산동이다.

 

 

조선시대 한성부의 성저십리(城底十里) 지역

후기에는 용산방(龍山坊)과 서강방(西江坊)에 속하였다.

1911년 고양군의 연희면(延禧面)과 용강면(龍江面)

1936년 경성부로 편입

1944년 서대문구와 용산구의 일부를 합해 마포구가 신설

 

 

 

고려시대의 마포

신라말기에는 한강유역이 지방호족들의 군웅할거지로 되었는데 그중 양길의 부하였던 궁예(弓裔)895년 한산주 관내의 10여성을 복속시켜서 관직을 정함에 따라 이 무렵부터는 궁예의 지배지로 되었다. 한강유역을 장악한 궁예는 곧이어 황해도와 한산주 관내의 30여성을 더 함락시킨 후 개성으로 옮겨 충주.청주. 지역까지 진격하였다.

 

9-4년 국호를 마진(摩震 : 911년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개칭). 연호를 무태(武泰)라 하는 한편 철원으로 도읍을 옮겨 남쪽으로 상주에 이르기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철원에 도읍을 정한 태봉은 남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한강을 건너야 했는데 지금의 광장교. 한강대교,마포대교가 놓여있는 곳에서 분산하여 배를 탔을 것으로 추측된다. 강폭이 비교적 좁거나 아니면 넓어도 물살이 약한 곳을 이용하여 나룻배를 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봉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개성의 호족출신인 왕건(王建)이 여러 장군의 추대를 받아 918년 고려를 건국하여 왕이 되면서 곧이어 신라와 후백제에 대한 회유,공격의 방법으로 936년에는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이 무렵에도 역시 많은 지방세력들이 한강변을 비롯하여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왕건은 세력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들을 포섭 회유할 필요를 느꼈다. 이에 호족의 딸과 자신이 결혼을 하는 이른바 결혼정책을 시행하였고 그러지 못할 경우 중앙의 고위직으로 맞아들였다.

 

한강 유역에 있던 대표적 호족- 로는 왕규(王規) 와 금주강씨(衿州姜氏 혹은 衿川姜氏)로 명한 강감찬(姜邯贊)5대조 강여청을 들 수 있다. 왕규는 광주의 중심세력이었고 강여청은 금주(시흥)의 토착세력이었으므로 왕건이 한강유역의 제압을 위해서는 이들을 포섭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왕규의 두 딸과 겹결혼을 하였으나 오히려 정권에 비상한 관심을 둔 왕규가 자신의 외손자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왕위 게승시키려는 음모를 꾸며 난을 일으켰다. 왕권에 대해 정면 도전한 이같은 왕규의 난은 한강 유역 호족의 첫번째 난이었다.

 

금주강씨의 경우 강궁진(姜弓珍) 때 태조에게 협력하여 세력을 내림으로써 한강 남쪽 시흥 일대의 세력으로 등장하는데 아들인 강감찬은 아버지의 세력기반을 입어 중앙관계에 진출한 후 거란이 침입했을 때 귀주대첩(龜州大捷)을 세워 명성을 얻게 되었다.

 

한편 한강하류지역으로서 지금의 마포 서쪽 지역에 해당되는 곳의 호족으로는 풍덕유씨(豊德柳氏)가 있다. 태조의 제1왕비와 제6왕비가 각각 풍덕지방의 호족출신의 딸이므로 마포지역이 일찍부터 역사무대에 등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초는 아직 왕권이 확립이 되지 못했던 관계로 개경지방이 정치중심이 되었다.

 

한편 신라말에 유입된 지리도참설(地理圖讖說)에 따라 1068년에 남경이궁(南京離宮)을 설치한 이래 1096년에는 김위선(金謂蟬)이 도선의 풍수지리설을 들어 남경천도를 건의하였고 3년 후에는 왕이 친히 남경의 지세를 살피고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까지 두었으며 1104년에는 남경에 왕이 거주한 궁궐을 완성하였다. 1308년에는 남경을 한양부(漢陽府)로 고치고 유수를 윤으로 고치는 외에도 판관.사록과 같은 관직을 두었다.

 

13258월 충숙왕은 왕비인 조국장공주(曺國長公主)와 함께 한양에 행차하여 용산의 높은 언덕 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장막을 치고 행궁(行宮)으로 삼아 머물렀으나 20여일 후 공주가 아들을 낳은지 9일만에 세상을 떠난 일이 있었다. 습기찬 강가에서 임시 거처를 마련했기 때문에 산후조리를 못한 왕비는 죽음을 맞았지만 왕의 순주시에 사용했던 행궁이란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용산 행궁의 위치에 대해서는 구구한 설이 많다. 그 가운데 가장 유력하게 꼽는 곳이 지금의 한강대교 북단 근방이라는 설과 난지도 근방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한강대교 북단은 조선시대에도 군사요충지로 꼽았던 곳이고 난지도 근방은 조선시대에 성산(城山)을 쌓았던 곳이며 맞은편 양천(陽川)에서 봉화를 받아볼 수 있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한편 고려말에는 왜구(倭寇)가 교동.강화지역에까지 출몰함으로써 한강하류지방도 그 피해권에 들게 되어 해상교통이 마비되는등 지방민에게 큰 불편과 위협을 주었다. 한강은 고려시대에도 남쪽지방의 조세를 운반하던 조운(遭運)으로 사용되었는데 왜구의 창궐로 인하여 조운이 막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운의 페쇄는 곧 개경에까지 영향력이 파급되었으며 조정에서는 한양천도론까지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의 마포

북한산의 웅대한 산세가 안산으로 뻗치고, 다시 안산은 용산구릉산맥, 노고산구릉산지, 와우산구릉산맥의 세갈래로 한강연안까지 뻗었는데, 한강의 침식을 받아 농바우, 잠두봉, 선유봉 등의 기암절벽이 발달하였다. 동쪽에는 남산이 보이고, 북에는 병풍같이 부드러운 와우산과, 노고산이 지켜선 그 사이로 멀리 안산, 인왕산, 백련산과 하늘높이 솟구친 삼성산, 관악산, 기장산의 원경도 절경이다. 눈아래에는 유유히 넘쳐 흐르는 한강과 강건너의 밤섬과 여의도는 더욱 강산 풍광의 아름다움을 돕는다. 더욱 호수 같이 잔잔한 한강의 물굽이는 강산 풍광의 극치를 이룬다.

 

이와 같이 수려한 삼개에는 수많은 철새들과 백로가 너울거리며 날으는데, 저녁이면 양화진 강 하늘에 낙조가 걸려 벌겋게 물들 때에 수백척의 돛단배가 모여 드는 광경은 과연 한폭의 그림이었다. 따라서 예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과 시민들이 찾아와 뱃놀이를 즐기든 풍류의 고장이 되었기에 국초부터 서호8경으로 이름난 고장이다.

 

 

서호8

 

 

용산강에 비 개인 날 저녁에 뜬 달 구경

삼개 나루로 돌아오는 수많은 돛단배의 경치

방학교 부근의 샛강에서 밤 낚시하는 등불 원경

밤섬 주변에 쌓인 깨끗한 백사장의 원경

농바위 부근의 많은 인가에서 저녁 짓는 연기 오르는 경관

와우산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목동들의 피리소리

양화진 강 하늘에 붉게 물든 낙조와 노을의 장엄한 경치

관악산에 맑게 개인 날 어른거리며 오르는 아지랑이의 신비로운 원경

 

 

서호8경의 서호는 현재의 마포에서 서강에 이르기까지의 연안을 통칭하여 부른다라고 옛 지리서에 분명히 기록되어 전한다. 대체로 서강과 혼용해서 사용해도 무방할 것이다. 서호라고 특별히 명명하게 된 까닭은 고려말의 기록에도 전한다. 예전에는 밤섬과 서강나루 일대는 강폭이 넓고 강류가 완만하였으며, 조석으로 밀썰물이 드나들 때에는 한때 강물이 정지되어, 마치 큰 호수로 변했다. 따라서 뱃놀이를 즐기는 호수와 같다하여 풍류를 겸하여 서호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아름다운 강산 풍경이 수려한 고장이기 때문에 예부터 많은 문인과 명사들이 서강의 풍광을 따라 와서 저택이나 별장과 누정을 짓고 자연을 즐겼다. 마포 전역에 34개의 정자가 있었는데 그 중심인 서강부근에 30여 정자가 집중하였던 것으로 보아서도 더 잘 알수 있다. 이와 같이 강산 풍관이 좋고 수많은 누정이 밀집한 고장은 국내외에서 따로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니, 삼개의 강변 풍광은 과연 세계적인 자연과 인문의 조화를 어울린 승경의 고장이다.

 

을축년 큰 홍수에 유실된 유서 깊은 망원정이 198910월에 복원되어, 옛 모습을 되찾게 되어 눈 아래에 성산대교를 바라보며 먼 김포 평야와 한강이 서천 멀리에 흘러 가는 강산풍경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삼개의 명물인 황포돛단배도 제작하여 진수식을 올리고, 마포나루굿도 발굴하여 다시 계승하게 되었으니, 삼개의 풍최를 더욱 엿볼수 있다.

 

 

조선시대의 마포

옛지지(地誌)에 기록된 마포

고려말부터 대두되던 한양천도론은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후 2년이 지나면서 실천되었다. 지덕(地德)이 끝난 개경에서부터 새로운 지기(地氣)로 확장되고 있는 한양으로 천도해야 한다는 주장은 신왕조의 개창에 앞장섰던 사람들이고 이들의 주장에 따라 곧바로 실현에 옮기게 된 것이다. 이성계의 왕위등극과 함께 개성의 왕씨를 중심으로 형성된 구 귀족세력의 반발에 대처할 필요성 또한 천도의지를 가속화 시켰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려 했던 첫번째 이유는 한강을 끼고 있는 인문지리적 위치의 중요성 때문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 경도 상에 보면 경도는……남쪽으로 한강이 옷깃과 띠처럼 둘러있고 왼쪽으로는 널리 높은 관령이 연접해 있으며 오른쪽으로 넓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라고 하며 마포 서쪽의 한강하류지역까지를 그 지세에 포함을 시키게 되었다. 용산강 하류인 마포는 백사장을 지나 바로 시흥으로 가는 길이 되므로 고려 초기부터 호족들이 근거지로 삼아 개경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여겼다.

 

한편 이중환의 택리지 복거총론 생리조 에서도 한양으로 천도한 것은 조운의 편리함 때문이라 할 정도로 조운의 발전은 약속된 것이었다. 전국의 세곡이 조운을 통해 한양으로 모였을 뿐만 아니라 도성 안의 일반 생활품도 대부분 선박으로 한강을 통해 공급됨에 따라 한강 곳곳에 선박이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게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조고되어온 곡물은 대개 한강의 5강을 통하였다.

 

한강 5강에 대한 기록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3, 한성부 산천조), 동국여지비고(2 한강조), 강현지략(2 산천편한강조) 등에 나타나 있는데 대략 용산강.마포강.노량진.뚝섬.양화도를 일컫는다. 이중 지금의 마포지역과 관련되는 곳은 용산강.마포강.양화도이다.

 

용산강은 경상.강원.충청.경기도 상류로부터 북한강을 따라 조운되어온 종착지점인데 당초에는 10리의 긴 호수로 되어 연화가 만발한 관광지였으나 조선초 건너편 염창 부근의 모래언덕이 무너지면서 용산강이 호수가 없어지는 대신 조수가 들어오게 되었다. 이에 따라 지방의 세곡수송선이 모두 용산강으로 밀려들어 성황을 이루었는데 오랜시간이 지나면서 상류로부터 운반된 퇴적물이 하상을 점차 높혀 수위가 낮아지고 염창 모래언덕에는 해마다 진흙이 쌓여 조수가 들어오지 않자 조선 중기에는 각도의 조운 선박이 마포와 서강 방면으로 정박하게 되었다.

 

마포강은 용산강 하루로 3남 지방의 곡식운수는 물론 어물류의 집산지이기도 했는데 각지에 연결되므로 서울의 무여항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서 이웃한 동막과 함께 번성하였다. 동국여지비고에는 도성 서쪽 15리 지점의 서강까지를 서호라 하였으며 황해.전라.충청.경기도 하류의 조운이 모두 모였다. 양화도는 도성 서쪽 15리 지점으로 바다를 거쳐 들어오는 물자를 서울로 반입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인천 강화로 통하는 간로(間路)가 되며 그 북쪽이 마포지역과 연결되어 있다.

 

한강은 조운뿐만 아니라 남북여결의 진도(津渡)로서의 위치도 중요하다. 강폭이 넓으면 진, 좁으면 도로 불렀다. 진도에는 소형배가 소속되어 사공 혼자서 노를 저었는데 마포지역과 연결되는 나루터는 용산지.마포진.서강진.율도진.양화도.곰암진.행주진으로 한강 본류 18개 나루터 가운데 7개였다. 용산진고 마포진.양화도는 5강에 속하였으며 서강진은 서해안 지방의 조운 종착점인데 [동국여지비고]에는 마포에서 이곳까지를 서호라 하고 하삼도에서 들여온 세곡을 이곳의 광흥강창.풍저강창에서 저장하였다.

 

율도진은 지금의 밤섬으로 당시에는 모래사장으로 되어 있었는데 여의도와 인접해 있으며 백사장 건너 인천으로 가는 간로가 되었다.

 

공암진은 공총진(孔叢津)으로도 부르는데 한강의 최하류 부분에 속하며 남쪽은 도성출입에 직접 영향을 주지 않지만 양천현의 관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공암진의 북단은 지금의 당산철교 부근이 되는데 강화.양천부근에서 오는 사람이 대개 이용하므로 도성출입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보면 년간 12번에 걸쳐 지내는 기우제 가운데 첫 번째, 여섯번째는 한강에서, 일곱번째는 용산에서 하여 이 지역이 조운이나 교통로 이외에 신성지역으로서의 기능도 담당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전략지로서의 마포

 

 

 

 

선조 25414일 왜장 고니시의 군대가 부산포에 상륙하여 곧 부산포와 동래성을 함락하고 약 20만명의 왜군이 북상했는데 동 28일에는 충주에 도착하여 1진은 여주를 경유, 남한강을 건너 한성으로, 2진은 죽산 경유 한강을 건너 한성으로 침입할 것을 모의하였다. 이때 여주의 남한강은 강원도 조방장 원호가 한강의 제천정에서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부원수 신각(申恪)이 군사를 이끌고 방어에 임하였으나 양쪽다 왜적의 저지에 실패하여 한강방어선은 무너지고 말았다.

 

한강방어선이 무너진 도성은 이미 왕이 의주로 몽진한 이후여서 텅비어 있었기 때문에 들이닥친 왜적의 약탈과 만행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15931월부터 명나라의 원군이 본격적으로 동원됨에 따라 조명연합군의 작전활동으로 전세는 역전되었다. 이와 함께 전국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승병활동으로 왜적은 군량부족과 사기저하로 지쳐있었는데 2월에는 행주산성에서 권율(權慄)의 군사 3,000명과 그 열배에 해당되는 왜적과의 싸움에서 대승을 하였다.

 

행주대첩으로 조선군의 사기가 충천했고 이를 계기로 각지의 관.의병 반격작전이 시작되었다. 권율은 적의 재침공을 예상하고 창의사 김천일(金千鎰).충청수사 정걸(丁傑)등으로 하여금 수군으로서 한강입구에서 용산서쪽 한강중심부까지 진출시켜 적의 병세(兵勢)를 남북으로 분리토록 하는 한편 이 구간의 진도에 있는 선박을 모두 모아 적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권율의 이같은 작전으로 보급로의 차단과 기한에 시달리게 된 왜군은 한성 탈출이라는 긴박한 사정에 놓이게 되자 더 이상 전쟁을 끌면서 확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명나라에 대해 강화요청을 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측은 명.왜의 이같은 밀담에는 상관없이 용산창의 곡식과 광흥창.풍저창에 보관되어 있는 곡식마저 불태워 만일의 경우 이 지역을 왜적이 점령했을 때에 대비하는 등 갖가지 작전을 구상, 실천하였다.

 

조선측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315일 강화에 있던 명나라의 심유경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소서행장을 만남으로써 회의는 급진적으로 진행되었다. 철저하게 조선측이 배제된 가운데 용산강 위에서 필담을 통한 강상회담을 하던 강화회담은 418일 이여송(李如松)이 지켜보는 가운데 왜적이 철수를 하고 남은 군량미 2만석을 명나라 심사련에게 넘기며 조선의 순화군.임해군과 황정목.황혁.이영의 세 사람을 데리고 한강을 건너면서 가설한 부교를 철수함으로써 한강변 싸움은 일단락되었고 서울지역에서의 임진왜란도 매듭지어졌다.

 

 

개항장으로서의 마포

1866년 전국적인 천주교에 대한 대금 압령을 내리고 교도에 대한 박해와 학살을 감행한 것이 병인사옥이다. 이 박해에서 조선으로 몰래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해 오던 프랑스선교사 12명중 9명이 살해되었으나 그중 리델신부와 시노 11명이 함께 탈출하여 중국 천진에 체류하고 있던 프랑스 아시아함대사령과 로즈제독에게 그 내용을 보고하였다. 로즈는 곧 이 사실을 주청프랑스공사 베로네에게 보고하고 청국에 엄중한 항의를 한 후 선교사 박해 문책을 이유로 조선원정을 단행하였다.

 

이에 동년 810일 청나라를 출발 12일 물치도(勿淄島) 앞 바다에 정박하여 1856년 제작된 해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한강 어구의 수로탐색을 위한 탐측항해에 착수하였다. 18일에는 양화도를 거쳐 서강인 마포 하중동까지 들어와 닻을 내리고 수심탐사를 하면서 근방의 산천등 생활필수품의 보급로가 거의 끊어지게 되어 인심은 더욱 흉흉해졌는데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프랑스군의 서울침입 소문까지 나돌았다. 다음날까지 머물던 프랑스함대는 상세한 지도제작을 한 후 22일 중국산동성으로 귀항하였다.

 

프랑스함대의 마포정박사건은 대원군 정권에 대한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며 이일은 병인양요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강화광성진의 이기조(李基租). 정족산성의 양헌수(梁憲洙). 문수산성의 한성근(韓聖根)이 특별히 한강 어구 방어를 위해 편성되어 97일부터 104일까지 약 한달간 전투가 지속되었다. 한강어구싸움에서 조선측 승리는 프랑스군의 포함외교를 실패로 이끌었었다.

 

곧 로즈제독이 한강 수로를 면밀하게 검사한 결과 함대운항이 불가능하고 해안경비가 견고하다는 것을 파악하여 조세미와 양곡의 보급로인 강화를 점령하면 조선이 굴복하리라는 예상을 하였지만 조선정부의 강력한 대응으로 결과는 조선측의 승리로 끝났고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중되었다.

 

그러나 1875년의 운양호사건은 더 이상 조선이 쇄국정책을 지속할 수 없게 만들었고 이듬해 강화조약이 맺어지면서 개항을 하게 만들었다. 18778월 인천에 도착한 주한 일본대리공사 하나부사일행이 1021일 서울에 들어올 때 마포지역의 사람들은 투석을 하며 저지한 일도 있었다.

 

더욱이 인천이 개항장으로 확정되면서 서울의 관문이 되는 마포지역의 변화는 급속도로 진전되었으며 1895년 전국의 지방행정제도가 개편될 때 이 지역에도 많은 변화가 있게 되었다. 1884년에 일본은 용산개시(龍山開市 )를 요구하였고 이듬해 2월부터는 일본 민간인의 입경과 정주도 허용되면서 오늘날 마포동부지역과 용산일대에 일본인의 거주중심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888년에는 마포~인천간을 취항하는 기선 13t급 삼호호(三湖號)16t급 용산호(龍山蝴)로 하여금 육로를 통하지 않고 인천에서 서울로 직접 들어올 수 있도록 하였다. 서울에 들어온 일본 상인들은 인천까지 운반해온 쌀, 쇠가죽, 해초 등을 마포나루를 통해 서울로 반입시켰기 때문에 마포일대는 매우 번성하였으나 비정상적인 이들의 거래방법으로 인해 마포객주들은 거래 때마다 긴장하였다.

 

이듬해에는 인천의 독일계상사 세창양행(世昌洋行)35t급 재강호(濟江號), 1890년에는 미국인 타운젠트가 운영하는 순명호(順明號)가 차레대로 치항하여 명실공히 마포항은 무역항으로 등장 활약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청국측은 한강수로에 중기선의 왕래가 잦아지자 1892년 마포나루에 경사국(警査局)을 설치하여 이 지역 단속을 엄중히 하면서 마포지역은 청.일 양국의 세력 교전장으로 변하여 갔다.

 

이러한 국내외의 정세변화에 따라 1894년에는 한성부를 비롯한 전국의 행정구역을 변경하기에 이르렀는데 마포지역은 서부 용산방(龍山坊)과 서강방(西江坊)으로 성외(城外)지역에 포함되었다, 곧 한성부 관할구역으로 편입된 이 때의 면적은 용산방의 공덕리계.옹리.동문외계.진휼창계.신창내계.탄항계.형제정계.구수철리계.창전리계.하중리계.신정리계.상수일리계.하수일리계.당인리계.율도계로 대략 지금의 마포구 일원에 해당되는 지역이었다.

 

 

철도부설과 마포의 성쇄

조운이 모든 물자의 수송을 전담하던 시기의 마포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무역항으로 발전하여 도성 안 종루가에 버금가는 상업지역으로서의 번영을 누려왔다. 그러나 1897년 경인철도 기공식에 이어 2년 후인 1899년에 시작된 경부철도 부설공사가 1905년 서울~초량간다란 변화가 있게 되었다.

 

곧 육상교통을 철도편에 의지하게 되면서 더 이상 수운에 의한 물도부설이전에는 서대문~아현동~한강, 남대문~만리재~한강, 청파동~마포~용산으로 가는 길 가운데 하나를 때문에 서대문 밖이 번성하였고 마포 일대는 이들을 상대로 하는 상업이 발달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철도 부설공사의 시작으로 판도가 바뀌게 되었다. 경인.경부선에 이어 1896년 프랑스 그레테회사에게 경의철도 부설권을 허가하였으나 3년이 지난 후까지 측량는 서울 ~개성간 철도부설공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 공사는 당인리에서 기공식을 시작하여 선로공사까지 끝냈으나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로 중단되고 한국 내의 모든 정치.군사.경제권은 일본 소유로 되고 말았다.

 

경인 경부철도의 부설공사로 인해 발전하기 시작했던 마포지역은 젓갈종류 집산 판매장소로 전락하기 시작했으며, 경의선의 깃점이 될 수 있었으나 러일전쟁으로 중단되면서 마포지역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마포구지 95~103)

 

 

서울의 관문이요 외항인 요충지

구의 중부와 동부에 와우산(102m)·노고산(105m) 등이 솟아 있으며, 그밖의 지역은 대체로 100m 이하의 낮고 평탄한 지형을 이룬다. 한강이 구의 남쪽을 흐르며, 불광천과 사천천이 한강으로 유입한다. 한강수운이 성했던 당시에는 마포나루를 중심으로 상업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한강수운이 쇠퇴한 후에는 주거지역으로 발달했으나 국회의사당이 자리한 여의도를 잇는 마포대교가 완공되고, 마포로·용마로·서강로 등이 정비됨에 따라 공덕동 일대는 새로운 업무지구로 변모했다.

 

동교동에는 호텔·예식장·고급음식점 등이 많으며, 홍익대학교와 서강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는 상수동과 신수동은 서대문구의 신촌 일대와 더불어 대학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한강의 하중도였던 난지도 일대는 쓰레기매립장으로 이용되었으나 현재 폐쇄되었다. 앞으로 지반이 안정되면 대규모 환경생태공원과 첨단 정보단지로 조성될 계획이다. 상암동 일부지역에서는 아직도 채소·화훼 등을 재배하는 근교농업이 행해지기도 한다.

 

서울의 중서부 한강연안에 위치한 마포지역은 안산에서 갈라진 와우산 구릉산맥과 노고산 구릉산맥, 용산 구릉 산맥이 한강으로 뻗어 세 산맥연안에 호수처럼 발달한 서호, 마호, 용호가 있었는데, 3호를 삼개(三浦-3개의 포구)라고 불렀고 이 삼개중 지금의 마포를 마포강, 마포항 등으로 불려 마포라는 명칭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마포구는 이처럼 옛날부터 수상교통의 요충지로서, 또는 삼남지방에서일찍부터 발달된 어촌이 형성되었다. 마포구 일대는 조선 전기에는 한성부 관할구역으로서 성밖 10리내에 있기는 하였으나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설정되지 못하였던 것으로 짐작되며, 조선후기 두모방, 한강방, 둔지방, 용산방, 서강방 등 5개의 방이 한성부 행정구역으로 새로 설정되면서 마포구 일부가 용산방과 서강방에 속하게 되었다.

 

191010월 조선총독부는 1495년부터 존속되어 오던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하여 경기도에 예속시켰고, 이듬해 4월에는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성부에 부, 면제도를 실시하였으며, 이때 종전의 용산방과 서강방은 용산면, 서강면으로 개칭되었고 각각 31개 동리와 10개 동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11년의 지방관제는 3년만에 개편되어 191312월 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해 마포는 용산면 일부가 경성부 서부로 편입되고, 서강면은 경기도 고양군에 편입되었다. 그후 마포구는 여러차례 행정구역 변천을 겪다가 944123일 총독부령 제 350호에 의해 서대문구와 용산의 일부를 분할하여 지금의 마포구가 신설되었으며, 설치당시의 관할구역을 보면 아현정, 공덕정, 신공덕정, 도화정, 마포정, 토정정, 용강정, 염리정, 대흥정, 신수정, 구수정, 현석정, 신정정, 하중정, 창전정, 동교정, 서교정, 상수일정, 하수일정, 당인정, 합정정, 망원정, 율도정등 23개 정이었다.

 

1945815일 해방되어 일제가 물러나고 미군이 입성하여 미군정이 실시되었고, 19451016일에 각구의 행정을 담당하는 "구역소""구청"으로 "구장""구청장"으로 개칭하였으며, 이때부터 마포구역소는 마포구청으로, 행정구역 명칭인 """"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1955418일에는 시조례 제66호에 의하여 종전의 동회를 동으로 하였으며, 각 구청에는 행정동을 따로 정하여 행정업무를 담당하였는데, 이때 마포구는 아현1,2,3,4, 신공덕1,2, 도화1,2, 관란동, 대흥동, 염리동, 신석동, 세교동 등의 19개 행정동을 두었다. 그후 여러차례의 동명 및 관할 구역 변경을 거처 198591일 시조례 제 2016호로 용강동 일부를 염리동에 편입하고, 198961일을 기해 서울특별시마포구동명칭및 구역획정조례 제84호로 하수동 전역을 상수동으로, 망원동 28번지를 서교동으로, 망원동중 망원1,2동 관할구역을 제외한 전지역을 합정동으로 동명칭을 변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동쪽으로 용산 줄기의 능선을 따라 용산구와 접해 있고, 북쪽은 은평구·서대문구, 서쪽은 고양시와 접해 있으며 남쪽은 한강을 경계로 영등포구·강서구와 접해 있다. 창천·홍제천·불광천이 한강으로 유입되며, 와우산·노고산·성산·연희산의 작은 구릉이 이어져 있고 난지도에는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조선 후기 한양으로 집산되는 많은 조세와 물자가 마포나루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상업활동이 번창하였다. 그리고 동교동에서 양화대교에 이르는 구간은 지하철 2·6호선의 개통으로 도로가 확장, 정비됨에 따라 호텔·예식장·종합상업시설과 고급 상점가가 조성되어 있고, 홍익대학교 앞 지구는 새로운 젊은이의 문화광장이 되고 있다. 영등포·강서구 지역에서 도심으로 진입하는 통로로서 도심과 직접 연결되는 간선도로가 놓여져 있다. 그리고 양화대교, 마포대교, 성산대교와 지하철 2호선이 통과하는 당산철교 등이 놓여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예로부터 마포나루, 서강나루, 양화나루가 있어 전국의 배들이 드나들었고, 한강이남 영등포지역을 잇는 주요 교통로가 있었다. 이를 중심으로 전국의 화물이 집산하게 되고 저자(시장)거리가 형성되는 등 선박과 공미를 중심으로 경제활동이 이루어졌다.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 서울의 관문으로 교통의 요충지이며, 동쪽의 마포로를 중심으로 현대화된 빌딩이 숲을 이루어 업무중심지구로 급속히 성장하게 되고 동서남북을 가로지르는 지하철 2호선, 5호선, 6호선과 내부순환도로, 자유로, 강변북로와 한강을 가로지르는 마포, 서강, 양화, 성산, 가양대교가 있다.

 

특히, 발달된 교통을 중심으로 마포로 양화로에 들어선 초고층 빌딩의 도심업무시설은 가까운 영종도 신공항의 지리적 여건과 맞물려 비즈니스 하기에 가장 각광받는 최적의 경제활동의 기반이 되고 있으며, 도화동, 공덕동, 용강동, 합정동 등에 위치한 깨끗하고 친절한 숙박시설과 어우러진 휴식공간으로 서비스 산업의 중심지이다. 상암동 일대 200만평에 생태환경과 디지털 미디어 산업이 어우러진 미래형 복합도시인 새 천년 신도시가 조성되면 이곳은 영종도 신공항선, 경의선 등의 광역 교통망이 지나는 요충지로서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생태도시, 첨단디지털·미디어 기업이 집적된 정보도시, 세계로 통하고 남북한을 잇는 관문도시로 조성되어 꿈과 희망이 넘치는 미래형 도시로 화려하게 태어날 것이다.

 

 

 

 

조수가 드나드는 하항

서울 지하철 2호선이 마포구의 합정(영등포구의 당산역과 연결), 홍대입구, 신촌(지하), 이대, 아현역(서대문구의 충정로역과 연결)을 지나간다. 서울 지하철 5호선은 마포구의 마포역, 공덕역(서울 지하철 6호선, 인천국제공항철도와 환승), 애오개역을 지나간다.

 

서울 지하철 6호선은 마포구의 월드컵경기장역, 마포구청역, 망원역, 합정역(서울 지하철 2호선과 환승), 상수역, 광흥창역, 대흥역, 공덕역(인천국제공항철도, 서울 지하철 5호선과 환승)을 지나간다. 인천국제공항철도은 공덕역 (서울지하철5,6호선 환승) 및 용산선이 마포구를 거쳐 가며, 공덕역이 마포구에서 가장 많은 노선이 교차하는 역이다.

 

 

 

성산대교·양화대교·마포대교

1 공세청 터(供稅廳址) 표석

2 광흥창 터 (廣興倉址)표석

3 담담정 터 (淡淡亭址) 표석

4 무쇠막 터 표석

5 박석거리 (薄石路)표석

6 박세채정승 (朴世采政丞家址)살던 곳 표석

7 독립운동유적지 마포전차 종점 표석

8 삼개포구(麻浦浦口) 표석

9 서강나루터(西江津址) 표석

10 서활인서(西活人暑址)

11 양화진나루터 (楊花鎭津址) 표석

12 밤섬주민생활터 표석

13 공덕리금표(孔德里禁標) 표석

14 점검청지(點檢廳址) 표석

15 독립운동유적지 경성형무소 표석

16 아소정터 표석

17 염전머릿골

18 토정이지함 선생집터

19 선통물천 표석

 

 

 

 

 

 

 

 

동네예술가 프로젝트

공공예술가 5명의 모임인 "공화국 리라"2007년부터 망원동의 구석구석을 예술품으로 장식하는 "동네예술가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공덕동에는 순댓국 등을 파는 "소문난 집", 두부찌개 등을 파는 "옥상휴게실", 모듬전 등을 파는 "원조 할머니 빈대떡"이 있다. 도레미의 만화 검정고무신과 구자홍의 영화 나는 공무원이다의 배경이 된 지역이기도 하다.

 

 

 

 

마포원조 할머니 빈대떡

마포나루 축제

한여름밤의 강변축제

서울프린지페스티벌

마포나루 새우젓축제

하늘공원해맞이행사

대한민국라이브뮤직페스티벌

한국실험예술제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

서울와우북페스티벌

홍대거리미술전

마포아트센터

마포문화원

서교예술실험센터

마포 청소년수련관

마포구립 서강도서관

마포 어린이 영어도서관

마포청소년문화의집

상암DMC DMC홍보관 누리꿈스퀘어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박물관

월드컵경기장, 월드컵기념관기념품샵

월드컵 공원 하늘공원 노을공원 난지천공원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자원순환테마전시관 평화의 공원 서울에너지드림센터

한강 시민공원, 망원지구 난지지구

양화나루/잠두봉유적, 절두산순교성지&기념관 양화진공원 양화진홍보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홍대 홍대문화 스트리트H

공민왕사당제

마포나루굿 재현 행사

밤섬부군당제

 

 

 

 

 

 

 

마포 테마관광코스 

 

 

 

    

상암Sangam Course 열정과 미래와 자연이 함께 숨쉬는 곳

DMC홍보관-디지털파빌리온-한국영화박물관-월드컵경기장-월드컵공원-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자원순환테마전시관-하늘·노을공원(평화의 공원 하늘공원 노을공원 난지천 공원)

 

 

홍대 Hong dae Course 젊음과 열정, 그리고 예술의 향연

홍대관광안내소

홍통거리

트리아이미술관

서교예술실험센터

비보이공연

테마거리, 걷고싶은거리 화방거리 피카소거리 홍통거리 클럽거리 벽화거리

 

 

잠두봉 유적지 Jamdubong Site Course 숭고한 죽음과 영원한 삶의 공존

절두산 순교성지-양화진공원-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홍보관-망원정

 

 

야간 Night Course 저녁에 즐기는 색다른 즐거움

한강야경

상수동 카페거리

홍대야간문화체험

 

 

 

도화동(挑花洞)과 도화낭자

도화동은 복사나무가 많고 봄철이 되면 복사꽃이 피어 경치가 좋았으므로 복사골이라 부르던 데에서 유래된 동명(洞名)이다. 옛날 우리나라는 봄철이 되면 진달래, 개나리꽃과 함께 살구꽃이 유명하였다. 특히 복사꽃은 살구꽃과 함께 유실수의 꽃이기 때문에 집 주위에 많이 심어서 친근한 꽃이 되었다. 따라서 거의 마을마다 집마다 복사·살구꽃이 인가 주위에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봄철이 되면 그 복사꽃에서 풍겨나는 향기,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이 사람의 정신을 황홀하게까지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복사꽃이 많은 마을을 흔히 도화동이라 부르고 또 상춘객들의 유상(遊賞)하는 장소가 되어 유명해졌는데, 고대소설 심청전에 나오는 황주 도화동(黃州 挑花洞)은 널리 알려진 것이며, 서울지역에도 마포 도화동 외에 다시 북악 아래의 도화동, 혜화문 밖의 도화동 등을 볼 수 있다. 북악 아래 있는 도화동의 풍경에 대하여는 정조조의 문인 유득공(柳得恭)의 아래와 같은 시에서도 볼 수 있다.

 

바람불고 비오니 시냇물 불어나는 것이

이 봄이 가기전에 도화동 구경가세나

 

동중의 복사나무 천 그루나 되는데,

사람은 나비따라 가고 나비는 사람따라 오네.

 

모두 도화동의 옛날 승경 승사(勝事)를 잘 말하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두 도화동은 산하곡한(山下谷閑)에 위치한 도화동이었지만 마포의 도화동은 산을 등지고 강에 임한 도화동으로서 그 경치는 좀 호화롭고 바람을 따라 나는 꽃과 향기는 좀더 멀리 퍼졌을 것이니 이곳 도화동의 풍경은 특별히 색다른 바가 있었을 것이다.

 

이 도화동의 동명을 가져오게 한 복사골은 지금도 도화제1동 경사진 곳에 마을 이름을 남겨 전하는데, 여기에는 또 다음과 같은 전설이 함께 남아 다시금 그 옛날 이곳의 도화풍경의 신비경을 상상하게 된다. 아득한 옛날 옛적, 이곳 복사골에는 마음씨 착한 김성(金姓)의 노인이 아름다운 무남독녀 도화낭자(挑花娘子)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도화낭자의 아리따운 모습과 마음씨는 천궁(天宮)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옥황상제의 며느리로 하늘에 올라가게 되었다.

 

김노인은 딸이 천궁으로 출가하는 것이 기쁘기는 하지만 외딸을 영영 이별하게 되니 서운한 마음이 이를 데 없었다. 김노인은 그 선관이 주고 간 씨를 집 근처에 심고 얼마 후에 복사나무가 자라 꽃이 피는 것을 즐겁게 구경하며 지냈다. 그리고 김노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복사나무는 번성하고 마을 사람들 또한 김노인과 도화낭자를 생각하며 복사나무를 많이 심어 일대가 모두 복사꽃밭을 이루기까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이적(神異的)인 전설, 선경을 방불케 하는 도화풍경(挑花風景)과 함께 이 복사골을 중심으로 한 일대를 도화동으로 부르게 된 것은 퍽 오랜 옛날부터의 일로 고종조 초기에 편찬된 육전조례(六典條例)에 의하면 서부 용산방(龍山坊)에 도화동(挑花洞)의 내계(內契), 외계(外契)가 갈려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구역이 넓기 때문에 동을 내동·외동으로 함은 물론 계도 내동계·외동계로 갈라 편성하였던 것이다.

 

 

염리동의 유래와 개운사(開運寺)

염리동은 행정동명과 법정동명이 일치하는데 동명이 붙게 된 유래는 옛부터 소금장수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불리어지게 되었다 한다. 현재는 없어졌지만 대흥동의 동막역(東幕驛) 부근에 소금창고가 있었으며 마포나루(삼개)에서 소금배가 그곳까지 들어 왔다고 한다.

 

마포는 옛부터 염전머릿골이 있어서 이 곳에는 소금배가 드나들어 소금전이 있었다고 하는데,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보면 한성부(漢城府) 시전에 삼대시三大市 : 종가, 이현(梨峴남문가 있는데 그 상품중에 마포염이 명시되어 있는것을 보아도 마포가 소금을 서울에 공급하였던 곳임을 알 수 있고, 얼마전까지만 해도 마포하면 소금과 새우젓 집산지로 유명하였으므로 염리동의 명칭은 우연한 이유에서 유래된 것은 아닐 것이다. 개운사와 관련된 이야기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조선 인조 15년 가을 한 척의 배가 삼개에 닿아 있는데 그 배 가운데에는 사람은 없고 다만 경함(經函)만 들어 있는데 그 함안에는 중원개운사간(中元開運寺刊)이란 6글자가 씌어 있었다. 이상히 여겨 이것을 관에 보냈더니 왕이 보시고 이르기를 임자없는 배가 삼개에 표착한 것은 참으로 영괴(靈怪)하다. 이 경문은 중원의 개운사에 일찍이 나타난 일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 이같은 이름의 절이 있으면 짐은 그 절에 이것을 주어서 오래도록 호장(護臟)케 할 것이다.라고 분부하시었다.

 

당시 우리나라에 개운사라는 이름의 절이 광주 나한산성 동문안에 있었으므로 왕은 경함(經函)을 금련십습(金練十襲)으로 잘 짜서 친히 신하를 보내어 절에 간직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뒤 숙종 20년 겨울 그 절에 불이 나서 그 경함을 간직해 둔 누각에 불길이 타오르려고 했을때, 갑자기 큰 비가 퍼부어 불을 껐으므로 누각속에 간직한 물건은 그 때문에 하나도 손실된 것이 없었다고 한다.

 

 

토정동(土亭洞)의 유래

마포 강변 마포동의 서쪽, 용강동의 동남쪽에 토정동이 있다. 마포동과 함께 바로 넓은 강변에 임하여 풍경도 좋고 강상(江上)을 통한 물자의 수출입도 많던 곳이다. 헌종조(憲宗朝)의 저술인경조부지(京兆府誌), 고종조의육전조례(六典條例)등 옛날 문헌에도 서부 용산방(西部龍山坊)의 토정리계(土亭里契)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부근은 옛날부터 토정마을, 토정동·토정리 등으로 부르고 기사(記寫)되어 왔음을 볼 수 있다.

 

이 토정동의 명칭은 명종(明宗) 선조조(宣祖朝)의 문인이요 기사이던 토정 이지함(李之函)의 거주지였던 데서 유래된 것이라 하며 해방후에도 마포 유수지가에 토정선생 옛 집터로 전해지는 빈터가 남아 있었고 또 멀지 않은 곳에는 윗토정으로 불리어지던 마을도 있었다. 그렇다면 토정의 동명, 지명은 일찍이 400년전 토정이 세상을 떠나기 전후한 시기부터 일반인들에 의하여 불리워지던 마을 이름, 땅 이름임을 알 수 있는 일이다.

 

토정 이지함의 인물과 그가 이곳에 거처하던 사실에 대하여 선조조의 문인 어우당 유몽인(於于堂 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지함은 지번의 아우인데, 역시 기이한 선비로서 베옷, 짚신에 삿갓을 쓰고 다녔다. 가다가는 사대부들과도 함께 노는데 태도와 언행이 방약문인하였으며 제가의 각종 술법을 통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한 조각 배를 타고 네 귀퉁이에 큰 바가지를 달고 세 번이나 제주에 들어갔는데도 풍파의 환란이 없었다. 몸소 장사를 하여 민중들에게 실리를 가르치며, 맨손으로 생업을 하여 수년내에 양곡 수만섬을 쌓아 놓고는 모두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해도(海島)로 들어가서 박을 심어 박 수만개를 거두고 그것을 타서 바가지를 만들어, 양곡 몇 천섬을 팔아 경강의 마포로 운반해 오고 강촌사람들을 모집해서 흙을 쌓고 안을 발라 높이 백척이나 되는 토실을 만들어 이름을 토정이라 하며 그 곳에 양곡을 쌓고 토실 위에서 거처하였다.

 

여기에 보면 토정은 매우 괴이한 행색으로 도술이 많아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능히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이야기들이 구전하여 오기도 한다. 또 지금도 1년의 신수를 보는 점서 토정비결(土亭秘訣)이 널리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기행하는 기적의 사람으로 알려졌던 것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이토정은 다만 그러한 기행괴술(奇行怪術)의 사람이라기보다 나라를 근심하고 구국제민(救國齊民)의 방도를 강구하며 학문을 닦고 착한 일을 권장하던 큰 선비였다. 다만 그가 탐내지 않고, 고결한 언행으로 특별히 전송숭앙(傳誦崇仰)하는 대상이 되었으며, 그의 행적은 좀더 확대되고 신비화되는데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것이 우선 당시의 우국경세가(憂國經世家)로서 이토정의 깊은 추허를 받기도 했던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아래와 같은 기록에 의해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아산현감(牙山縣監) 이지함이 죽었다. 지함은 소년시절부터 욕심이 적어 물건에 대해서는 아끼는 것이 없었다. 타고난 기질이 보통사람과 달라 능히 한서기갈(寒暑飢渴)을 참고 견디는데 어떤 때는 종일토록 알몸으로 열풍중에 앉아 있고, 10일씩이나 음식을 들지 않고도 병이 나지 않았다.

 

천성이 효도하고 우애하며 형제간에 유무를 상통하고 자기 소유를 따로하지 않으며, 재물을 경히 여겨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의 급하고 어려운 일을 구제해 준다. 세상의 변화와 여색에 담담하여 아랑곳하지 않으며,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기를 좋아하는데 위태로운 파도를 만나도 놀라지 않았다. 하루는 표연히 제주에 들어갔는데 목사가 그의 명성을 듣고 환영하여 객관에 머물게 하며 아름다운 기생을 뽑아 잠자리를 같이하게 하는데, 창고의 곡식을 가리키며 기생에게 말하기를 네가 만일 이 사람을 잘 모시면 한 곡간의 양곡으로 상 주리라하였다. 기생이 그의 위인을 이상히 생각하며, 그 마음을 움직여 보려고 결심하였다. 밤이 되어 온갖 아양을 부리며 유혹하였지만 토정(土亭)은 날이 밝도록 끄덕하지 않으니 목사가 한층 더 경중(輕重)하였다.

 

소년시절에는 학문에 힘쓰지 않았는데 장성하여 그의 형 지번(之蕃)이 글읽기를 권고하니 그제는 발분근학(發憤勤學)하여 침식을 잊기까지 하였는데 얼마 안가서 글뜻을 통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거 볼 생각을 하지 않으며, 구속받지 않고 마음 내키는대로 하는 생활을 좋아하였다.

 

「「이이와는 일찍부터 잘 아는 사이였는데 이이가 성리학에 종사하기를 권하니 지함이 나는 욕심이 많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이가 세리방화(勢利芳華)와 성색재리(聲色財利)가 모두 어른께서 탐탁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아닌데 무슨 욕심이 있어 학문에 방해가 되겠습니까하니, 지함이 하필 병리 성색만이 물욕이 되겠는가? 마음의 향하는 바가 천리가 아니면 모두 인욕이다. 나는 마음대로 하기를 좋아하여 바르고 곧게 단속하지를 못하니 이 어찌 물욕이 아니겠는가하였다.

 

이때 아산 현감에 임명되었는데 친한 이들이 부임하기를 권거하였다. 지함이 홀연히 부임하여 백성들의 고통되는 일을 물으니 양어지를 들어 말하는 이가 있었다. 대개 읍에는 양어지가 있는데 백성들로 하여금 돌아가며 고기를 잡아 바치게 하여 매우 괴로워하는 것이었다. 지함이 이에 그 못을 메워 후환을 영영 없이 하였다. 모든 명령하는 일이 다 백성을 사랑함을 위주로 하니 백성들이 사랑하고 사모하였는데, 갑자기 이질에 걸려 얼마 안되어 죽으니 나이 62세였다. 고을 백성들이 슬퍼하기를 친척같이 하였다.

 

이토정을 잘 알던 대학자요 정치가인 율곡 이외에도 당시의 학문높고 뜻 있는 인사들로 널리 알려진 우계 성혼(牛溪 成渾), 중봉 조헌(重峰 趙憲), 고청 서기(孤靑 徐起), 구봉 송익필(龜峰 宋翼弼)등과도 깊은 친교가 있고 또 신임을 받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그 방비책을 누차 상언(上言)하였으며 난이 일어남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전전하다가 부산에서 칠백의사(七百義士)와 함께 순절한 중봉 조헌(重峰 趙憲)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서 자주 서로 찾아다니며 강학토론하였지만 토정이 세상을 떠난 후, 유배중에서 풀려난 중봉은 곧 충청도 보령으로 가서 토정의 신위앞에 곡제하며 그 죽음을 슬퍼하였는데 보령으로 가는 도중에 토정선생을 생각하며 지은 아래와 같은 시는 중봉이 얼마나 토정을 존경하고 신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천리 먼길에 님을 만나 그 옛날 함께 놀은 것이,

이 내 몸 종신토록 허물적게 하려 하시었소.

 

오늘 이 길 다시 오지만 님을 뵈올 수 없는 것이,

이 세상 건질 큰 계책을 누가 올릴고.

 

이렇게 당대 명사들의 추허(推許)와 존경을 받았으며, 또 서민들과 같이 생활하고 서민들을 돌보아 주던 이토정(李土亭)이었던 만큼 그의 생애와 사실은 서민들에 의하여 확대되고 미화(美化) 신비화되었던 것이다. 위에서 보인 어우야담 중 "야담" 또한 이토정의 사실을 좀 더 확대 신비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만리현 변전(邊戰)

삼문 밖과 아현 사람들이 성군분대(成群分隊)하여 몽치를 가지고 혹 돌을 던지며 함성을 지르면서 서로 급히 쫓아, 만리현위에서 접전하는 형상을 하는데 이를 변전(邊戰)이라 하며 퇴각하여 달아나는 편은 졌다고 한다. 전하여 오는 말은 삼문 밖이 이기면 기내(畿內)가 풍년들고, 아현이 이기면 제도(諸道)가 풍년든다고 한다.

 

용산, 마포의 소년(少年)들은 무리지어 아현을 구원한다. 한창 싸울 때는 외치는 소리가 땅을 진동하여 머리를 싸매고 서로 공격하여 이마가 깨지고 팔이 부러져 피가 흘러도 그치지 않으며, 사상하여도 뉘우치지 않고 또 목숨을 대신 갚는 법도 없으니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무서워하여 서둘러 피해간다. 법금(法禁)을 맡은 관청에서 특별히 금지하지만 고질(痼疾)이 된 습속을 아주 없이 할 길이 없다. 성내 아이들도 이것을 본받아 종로 비파정 등지에서 하며, 성 밖에는 만리현과 양수현이 편싸움을 하는 곳이 된다.

 

특히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남대문밖(三門)사람들이 이기면 경기, 즉 서울부근이 풍년들고 아현사람들이 이기면 8도가 풍년드는 것으로 전하여 왔다는 점이다. 이것은 곧 아현이 경기외의 8도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아 왔다는 사실을 말하여 주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편싸움은 양편으로 두패가 나누어 싸운다고 하여 '편싸움'으로 부르고 변전(便戰, 邊戰)으로 기록한 것인데 그 유래가 오래된 것으로 평양의 석전이나 황해도의 햇불싸움등과 대동소이한 것으로 그 기원은 우리나라의 상무정신(尙武精神)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세에 와서 고종3(1866), 미국상선 숴맨호가 대동강상에 들어와 무리한 요구와 행동을 하여 소요가 일어났을 때 평양의 유명한 돌팔매꾼이 그 공격에 등장하였던 것이나 갑신정변때 일본공사 일행이 성내를 탈출하여 서대문을 나와 마포를 향해 달아날 때 곳곳에서 돌맹이가 날아들었던 것도 그러한 석전, 변전의 여풍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석전은 고개나 강을 경계로 하여 마을과 마을 또는 동과 서, 남과 북등으로 편을 갈라 돌로 싸우는 가장 남성적인 민속놀이로 "돌싸움" 또는 "편싸움"이라고도 한다.

 

서울에서는 보름날 저녁 아현(阿峴)사람들과 삼문(동대문, 서대문, 남대문)밖의 사람들이 만리동(萬里洞)고개에서 석전을 행하였다. 아현쪽에서는 용산, 마포의 불량소년들까지 가세하였다. 여기서 아주 격렬한 편싸움이 벌어져 그 소리가 지축을 흔들었으며 이마가 터지고 팔이 부러지는 부상자가 속출하여도 그치지를 않았다. 또 삼문에서도 아이들이 만리동 고개의 석전을 모방하여 종가(鍾街, 현 종각근처)와 비파정(琵琶亭, 관수동근처)등에서 편싸움을 하였다.

 

석전은 돌을 던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배수진, 장사진 등 여러 가지 진형(陣形)과 진법을 쓰기도 하며 부상자가 많이 발생하고 심지어 죽는 일까지 있어서 관()에서 못하게 금하여도 고쳐지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석전이 전쟁을 방불하는 전통적인 민속놀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또 석전은 위험을 내포한 과격한 싸움이지만 용감한 정신을 함양하고 집단적으로 공격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전(實戰)을 대비한 훈련의 성격도 지닌 민속놀이이다.

 

석전의 기원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고구려때 국왕이 관전하였다는 기록이 중국문헌에 나타,이조실록(李朝實錄)을 비롯하여 패관잡기(稗官雜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경도잡지(京都雜誌)등 많은 문헌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오랜 역사를 거치는 동안에도 석전은 민중의 연중행사로서 널리 행하여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석전은 가장 남성적이고 전투적이라는 특징뿐만 아니라 민간신앙적인 성격도 함께 지니고 있다. 만리동 고개 석전의 경우 삼문밖 사람들이 이기면 경기도가 풍년이 들고 아현사람들이 이기면 다른 도()에 풍년이 든다는 것이다. 석전의 승부에 따라 풍년과 흉년을 미리 알 수 있는 점복(占卜)적인 요소와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주술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신수동(新水洞)의 유래

신수동이 한성부에 처음 편입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영조 27(1751)에 수책성자(守冊城字) 도성삼군분계총록(都城三軍分界總錄)에 서부 서강방(西江坊-성외) 신수철리계(新水鐵里契)라고 나타났으며, 수선전도(首善全圖)에는 수철리(水鐵里)라고 기록하였다. 신수동의 동명유래는 확실치는 않으나 이 곳에서 오래 살던 이에 의하여 신수동의 원래 이름은 수철리에서 기원했는데 수철이란 이름은 신수동 110번지와 109번지 일대를 무쇠막또는 무수막이라 불렀기 때문에 수철이란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무쇠막은 옛부터 정부에 무쇠솥 농기구를 만들어 바치던 공장이 많이 있었으므로 생긴 마을 이름이다. 또 솥을 만드는 바탕을 설치해서 무쇠를 녹여 부었기 때문에 바탕거리라고 부르는 곳 110번지 1호에는 집을 지을 때에도 기초공사에서 쇳조각이 많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50번지 일대를 메주 무수막이라고 불렀는데 이 곳은 옛날부터 정부에서 쓰는 메주를 쑤는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 그 옆동네에는 아가위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아가 나뭇골또는 아기 나무골이라고도 부르는 동네가 있었다. 이 동네 위쪽 현재 성결교회 아래쪽 202번지 3호에는 장사바위가 있었다.

 

이런 이름이 붙게 된 까닭은 이 동네에 살았던 장사가 이 바위에 올라갔는데 그때 손톱자국과 발톱자국이 파여져 흔적이 남았고, 이 바위에 소변을 보았더니 구멍이 뚫어져 버렸는데 일제때 장사가 다시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한 왜인들이 그 구멍에 정을 박고 쇳물을 끓여 부어 넣게 함으로써 장사의 혈을 끊어 놓았다 한다. 또 이 곳 노인들이 어렸을 때 이 구멍에다 연줄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 사금파리를 넣어 찧어서 곱게 만들고 다시 풀을 섞어 연줄에 발랐던 일도 있었다 한다.

 

 

아현동(阿峴洞)의 유래

아현(阿峴)계 동명(洞名)은 육전조례(六典條例)등 고종조(高宗朝)때 많이 보이는데, 그 중 고종 31(1894) 갑오경장때 종래 한성5부의 부()로 고칠 때 기록에 의하면 당시 한성의 동····북의 5서중 서서반송방(西署 盤松坊)과 북서 연희방(北署 延禧坊)으로 아현의 여러 동명(洞名), 계명이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즉 서부 반송방(西部 盤松坊)과 북부 연희방(北部 延禧坊)에 있는 계·동명 중 아현명칭의 계가 5, 동이 4개소가 있는데 그것은 안산(鞍山)의 남쪽으로 뻗어나간 줄기 즉 지금의 아현동 고개마루를 중심으로 한 북쪽의 대현(大峴), 남쪽의 만리현(萬里峴)사이의 지역을 아현으로 통칭하던 데에서 연유된 것으로 보여진다.

 

동중(洞中)에는 흔히 애우개로 불리어지는 아현의 고개마루는 물론 굴레방다리, 오부수마을, 큰 행화동, 작은 행화동, 행화교(杏花橋), 너럭바위, 너럭바위샘등의 지명(地名)이 남아 전함을 볼 수 있다. 남쪽에 만리현과 서북쪽의 대현(大峴)이라는 두 큰 고개 중간에 있는 이 고개가 작기 때문에 애고개즉 아현(阿峴)으로 부르던 것이 로 변하여 아현이 되고 그 고개 이름 아현이 그대로 동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옛날 한성부에서 서소문을 통하여 시체를 나가게 하였는데 아이 시체는 이 고개를 지나서 묻게 하였으며, 지금 아현동 산7번지 일대에 많이 있는 아총(兒塚)이 그것을 말하여 주는 것이라 하며, 풍수설과 주산(主山)을 부아악(負兒岳)이라 하는데 그 아이가 달아날 의사가 있으므로 서쪽에 있는 산을 모악(母岳), 남쪽의 산을 벌아봉(伐兒), 모악에서 서남쪽의 산을 병시현(餠市峴)이라 이름지어 아이가 달아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그 중 벌아봉은 아기를 못나가게 막는 의미요 병시현은 떡으로 달래어 머무르게 하는 의미인데, 그 병시현이 곧 아기를 달래는 고개 아현이었다는 것이다.

 

또 견한잡록(遣閑雜錄 : 선조조 문인 )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우리 지방 기로(耆老)의 모임이 둘이 있다. 하나는 아이현(兒耳峴)의 여러 늙은이(고개 아래 거주하는 이들)들이 경진년(선조 13, 1580) 가을부터 모임을 가지다가 임진년 여름에 와서 난리를 만나 흩어졌는데 매달 각 집으로 돌아가면서 모임을 가지며 활쏘기를 하고 혹은 바둑두고 시를 지으며 즐겼다.

 

처음에는 20인이었는데 나중에는 9인이 되었다. 중략 하나는 만리현의 여러늙은이(고개아래 거주하는 이들)들이 임진년(선조 15)봄부터 모임을 갖다가 임진년 여름에 난리를 만나 흩어졌는데 매달 돌아가며 모여 활쏘고 바둑두며 시 짓는 것이 아현과 같았다. 아이현(阿耳峴), 아현(阿峴)은 우리말의 "아이고개" "애고개"를 한자로 옭겨 쓴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아현(阿峴)이 작은 고개를 의미하는 "아기고개" 아이고개"에서 유래되었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박석거리

옛날 이곳(신수동)에 영감님 내외분과 아들 며느리가 살고 있었는데 그 아들은 기운이 장사였다고 한다. 어느 날 영감님 내외분은 노들(노량진)에서 있는 굿구경을 떠나고 며느리 혼자 집을 보고 있었는데 남편이 들어왔다가 아내 얼굴을 보니, 굿구경을 가지 못한 서운한 낯빛을 알아 차릴수가 있었다. 그래서, 장사는 아내에게 슬쩍 이렇게 물었다. "당신 굿구경을 보고 싶지 않소?" "보고는 싶지만 어떻게 갈수가 있어야지요?"하고 아내가 대답하자, 장사 남편은 "그럼 내가 구경을 시켜줄테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겠오?" 이 조건에 아내는 순순히 응락하였다.

 

장사는 아내의 눈을 가리기 위해 행주치마를 머리에 뒤집어 쓰게한 뒤 절대로 허락없이 벗지 않도록 당부하고 자기 손바닥에 아내의 두 발을 올려 놓도록 하였다. 아내가 손바닥에 두 발을 올려놓자 갑자기 공중으로 뜨는가 하더니 귓가에 바람이 윙윙 부는 것이 굉장히 빠르게 가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그런 일이 있었나 싶더니 땅 위에 내려 놓는것같이 생각되었다. 이어서 남편이 행주치마를 벗게하자 주위를 살펴보니 자기집은 아니고 노들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눈이 똥그레 어리둥절한 아내를 장사남편이 데리고 굿구경을 시켜주었다. 다시 저녁때가 되자 아버지 어머니보다 먼저 집에 돌아와야 하는 까닭에 장사남편은 아내를 다시 데리고 올 때와 같은 방법으로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아내는 보고 싶던 굿구경을 어른들 모르게 감쪽같이 갔다 온 생각을 하니 참으로 자기 남편이 고맙고 신비한 힘을 지닌 것을 자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만 해도 요술을 부리는 사람이나 괴상한 힘을 가진 사람은 관가에서 처형하던 때인데 젊은 아내의 입을 통해 이 사람 저 사람으로 소문이 퍼져나가자 드디어 장사는 관가에 붙잡혀 죽게 되었다. 늙은 부모와 아내는 땅을 치고 발을 굴렀으나 이미 때는 늦은 것이었다.

 

장사가 처형된 날 밤 이 곳 박석고개에는 큰 용마가 땅속에서 나타나 크게 울며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 용마가 장사의 무덤에서 나왔기 때문에 용마는 장사의 변신이라고 하며 이때 용마의 발굽에 큰 바위들이 부서져 박석이 되었다 하여 이 박석고개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라 한다. 이 이야기는 신수동 전설인데 신수동사무소 뒤편 310번지 일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박석거리는 잔돌이 많이 깔려 있어서 유래된 이름이다. 땅이 질어서 잔돌을 많이 깔아 놓은 것 때문에 이름이 생겼다고도 하며 해주에서 들여온 돌로 구들장을 이 곳에서 많이 만들어 냈는데 이 구들장을 만들고 남은 돌조각들을 이 고갯

 

 

와우산

당인리(서울화력)발전소 동북쪽에 높이 105m 되는 산이 있는데 이를 와우산(臥牛山)이라 한다. 이 산이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자리잡고 있어서 멀리서 바라다 보면 마치 소가 꿇어 앉아 있는 모양과 같으므로 와우산이라고 부른다. 지금 와우산 기슭은 창전, 상수(上水)로 나누어져서 주택지가 나날이 늘어가고 있지만 와우산 동편 기슭 창전동에는 일찍이 조선 초기부터 광흥창이라는 큰 창고가 있었다. 이 곳 광흥창은 황해·평안·전라·충청등 여러 도와 경기연안에서 들어오는 공미(貢米)를 모아서 쌓아두던 곳이었다.

 

, 굴레방다리와우산에 대한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의하면, 예전에 큰 소가 있었는 데 길마는 모악산에다 벗어 놓고, 굴레는 북아현동 163번지 남쪽 네거리에 벗은 다음 서강을 향하여 내려가다가 와우산에 가서 누웠다. 그 까닭으로 북아현동 네거리에 있는 다리를 굴레방다리 또는 륵교(勒橋)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육전조례 호전편(六典條例 戶典篇)에 의하면 광흥창은 호조에 속해 있다고 하며 모든 관원의 녹봉(祿俸)을 관장한다. -중략(中略)- 매월 20일후에 이조, 병조에서 작성하는 봉급조서의 성안(成案)을 기다려 감봉 및 물품관리관의 귀책사유의 해제 여부를 고찰하여 광흥창에 통지한 다음 날짜를 배정하여 지급한다.

 

 

왕십리와 마포 사람 : 구전(口傳)

조선시대 구전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로 목덜미가 까맣게 탄 사람을 왕십리 미나리 장수라 하였고 얼굴이 까맣게 탄 사람을 마포 새우젓 장수라 하였는데, 그 이유는 왕십리에서 아침에 도성 안으로 미나리를 팔러 오려면 아침 햇빛을 등 뒤에 두고 오기 때문에 목덜미가 새까맣게 탔기 때문이고, 마포에서는 아침에 도성안으로 새우젓을 팔러 오려면 아침 햇빛을 앞으로 안고 오기 때문에 얼굴이 햇빛에 새까맣게 탔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아 왕십리나 마포에는 미나리나 새우젓을 파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마포는 단순히 생선이나 새우젓을 파는 어촌이 아니라 전국의 선박들이 모여드는 강항(江港)으로서 일찍부터 번성했다.

 

 

쌍용대

쌍용대는 두 개의 용머리 모양의 바위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인데 이 일대는 1969년경 택지조성을 하는 바람에 주택들이 들어섰고, 개바위는 (太岩)는 쌍용산 남쪽 끝에 공덕동과 경계가 되는 염리동 27번지 96호 부근에 있었다 하는데 이상한 전설이 있다.

 

조선 철종때(哲宗) 이 곳에 살던 큰 부자가 개를 수십년 길렀는데 어느날 그 개가 집을 나가더니 돌아오지 않으므로 찾아나섰다. 그런데, 개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고 쌍용산남쪽에 전에 없던 개 모양(3m)의 바위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 후부터는 이 마을에 도둑이 없어지고 평화스런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얼마전만해도 매년 음력 71일에는 개가 입을 벌린 모양에다 음식을 놓고 제사를 지내는 무당(巫堂)들이 있었으며, 이 바위를 수호신(守護神)으로 모셨다고 한다.

 

 

염리동 물장수

일제 강점기때 일이다. 염리동 지역에 우물을 파면 우물에 간기(짠기운)가 있어서 주민들은 식수에 고충이 많았다. 현재 염리동사무소 부근에 보름물께라는 동네가 있었다. 보름물께 우물이 보름동안은 물맛이 짜다가, 다시 보름동안은 물맛이 달기 때문에 붙여진 동네이름인데 그 지역의 우물이 대체로 간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주민들은 물을 사서 먹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물장수들이 물지게로 물을 날라 주었다. 물값은 돈으로 지불했고 주로 월부제로 주었다. 물장수들이 새벽에 물을 지고 오면, 주민들은 집집이 윤번제로 돌아가며 물장수들에게 아침밥을 제공했다. 새벽부터 물을 져날라 허기진 물장수들이 밥을 어찌나 싹쓸이하여 잘먹었던지 식성이 좋은 사람들을 일러 물장사 상먹듯 한다는 속어가 유행했다.

  

장사 고각보와 장사 초립동이

지금의 대흥동(大興洞)에 옛날에 고각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힘이 장사인데 조랑말을 끌고 동소문으로 해서 원산(元山)으로 다니며 북어를 실어다 파는게 직업이었다.

 

그때는 한 사람이 말을 끌고 원산까지 갔다가 북어를 싣고 오고 그러는데 이 사람이 어찌나 심술이 궂고 불량을 폈던지 동소문밖에서 원산까지 오백리길에 고각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한다. 그래서 마방집에서는 고각보가 올만한 날짜에 말 방을 따로 해놓고 깨끗이 청소를 해 놔야 했다. 그런데, 하루는 웬 초립동이가 말 두 마리를 끌고 들어오더니 고각보의 마방에다 말을 떠억 매니, 주인 마누라가 있다가 "저것 또 왜 저기 말을 매나" "거기 매지 말고 다른데 매시요" 하니까. "나도 말죽 사 맥이고 밥 사 먹고 그러는데 마방이 깨끗해서 매는데 왜 딴데다 매라고 하오?"하였다.

 

"거기에다 말을 매는 사람은 따로 있고 거기 맸다가는 좋지 않으니 딴데 매시요."라고 주인 마누라가 다시 말리면서 "이만 저만한 고각보라는 사람이 올텐데 그 사람은 힘이 장사고 아주 심술이 구진이인데 해 질 무렵에 여기 들어올꺼요. 그러니 말을 딴데 매시오." 그러니까 젊은 초립동이가 "나는 손님이 아니냐" "왜 딴곳에 매라고 그러느냐?"고 영 옮겨 매지 않았다. 주인 마누라가 아무리 말해도 안들으니까 괘씸해서 "이따 혼좀 나보라"고 가만 두었다고 한다.

 

해질 무렵이 되니까 고각보가 말 두 마리를 끌고 들어와 마구간에다 말을 매려다가 "누가 어떤 놈이 여기다 말을 맸냐"고 호통을 치더니 물어도 안보고 허리에 찬 장두칼로 고삐를 끊고 딱딱 때려서 말을 내쫓았다고 한다. 초립동이는 제 말고삐가 끊어져서 내쫓기니깐 아무말도 않고 밖으로 가서 자기말을 붙들어다가 다른 데다 맸다. 아무말도 안하는데 시비할 것도 없지.

 

그 시절엔 신발이란 짚세기를 신고 다닐때니깐 감발을 하고 다녔다. 감발을 하면 저녁에 마방집에 들어가서 감발을 끌러 자기가 빨아야 했다. 누가 빨아줄 사람이 없으니까. 빨으면 이것을 부뚜막위에 넌다. 부뚜막이 뜨거우니까, 새벽에 마빨려고 대야에 물을 담으러 부엌에 들어가니깐 초립동이가 말죽 끓이는 불을 때는데, 물거리 나무를 때고 있었다. 물거리는 무얼 물거리라고 하는고 하면 시골산에 잡목, 싸리, 머 이런 나무를 베리를 똑똑 잡아당겨서 끊어서 아궁이에다가 넣는 것이었다. "스으 요놈 대단하구나" "도구대같은데 웬 힘이 이렇게 많은가"하구 그 집 뒤로 돌아가서 물거리 나무를 잡아당겨서 끊을라고 해도 안 끊어지자, 큰일났다고 생각했다.

 

말 고삐를 칼로 잘라 버렸는데, 만약에 저놈이 나하고 힘을 겨루자하면 꼼짝없이 맞어죽겠다고 걱정하고, 맞아죽을 것을 예방하느라고 연구해 가지고 다시 부엌에 들어가 보니깐 말죽이 한참 끓고 있었다. 말죽이 끓어서 벌레덕벌레덕 하면 이걸 저어야 하기에 초립동이가 고물개를 가지고 이걸 젓고 있어서 "아 그 고물개로 젓고 있으면 언제 젓는냐?"그러니까 "뜨거운 걸 어떻게 접니까? 이렇게 젓지요" "에헤에 그사람!" 하더니 팔때기를 여기까지 걷고는 "이 말죽을 언제 다 젓느냐"하면서 끓는 말죽 솥에다 넣고 휘위 휘위 저어서 손을 뺏다. 고각보가 뜨거운걸 죽자꾸나 참고 살이 익는 것도 사양안하구 그놈한테 우세 안 시킬라고 나와서 냉수에다 씻고 보니 살이 익어, 오무라져 버렸다고 한다. 손이 그래서 죽을 것만 같았다.

 

초립동이가 "꽤 뜨거울 텐데 저이가 저렇게 끓는 죽에 팔을 집어넣고 휘위 저으니 얼마나 뜨거우랴"하고 손가락을 넣어봤더니 하도 뜨거워, 손가락을 얼른 빼고 "저 사람은 나보다 엄청난 장산가보다"하고 그만 꼼짝을 못했다고 한다. 동막(東幕)에서 고각보는 소문난 사람인데 원산 오백리길에 험하게 굴어서 고각보라고 하면 울던 어린애도 그쳤다고 한다.

  

공민왕사당

공민왕사당은 창전동(倉前洞) 2번지 즉 태창(太昌)터 뒤 와우산 동남쪽 산기슭에 오래된 느티나무에 둘러싸여 있다. 고려말 공민왕은 제위때 이곳의 한 정자에 머물면서 한강을 바라보고 시화(詩畵)를 즐겼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신당(神堂)을 지은 까닭은 조선왕조 초기에 이 곳 서강 일대의 양곡 창고를 지을 때 공민왕이 이 곳 동네 노인에게 현몽하여 "여기에 당을 짓고 봉제(奉祭)하지 아니 하면 역사가 순조롭지 못할 것이다."하기에 이 곳에 와보니 영정(影幀)이 발견되었으므로 신당을 지었다 한다. 그리하여 매년 음력 101일 자시에 제사를 성대히 지내왔는데 제사가 소홀하거나 불경사가 있으면 창고에 화재가 나는등 재난이 뒤따랐다 한다.

 

신당안에는 공민왕과 비()인 노국공주(魯國公主), 왕을 호위하는 충신 최영(崔瑩)장군의 영정과 왕자, 공주와 옹주 등의 화상이 있고 그 앞에는 신당우물이 아직도 있는데 동네사람들이 최근까지 식수로 사용하였다.

 

공민왕때 왜구의 침입이 시작되어 이들에게 크게 시달려 왔던 탓인지 몰라도 주민들에 의하면 구한말 때 교역차 이곳에 머물렀던 일본상인 36명이 공민왕의 진노로 해서 식중독에 걸려 죽은 사실이 있었고, 일제때 이곳을 말을 타고 지나던 일본사람이 갑자기 말발굽이 땅에 붙어버려 움직이지 못하자 당황하여 칼로 말을 베어 죽이고 허둥지둥 이 곳에서 도망하고 말았다하는 이야기가 남아았다. 이러한 소문이 퍼졌는지 이곳 신당부근 서강동(西江洞)에는 일본사람이 살지 못했다고 한다. 또 사당앞에 신당우물이 있는데 상수동의 당우물,왜우물과 더불어 서강3대 우물로 유명했다.

  

손돌풍

한강에 대한 전설로는 윤청파(尹淸波)전설찾아 삼천리에 손돌풍(孫乭風)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고려중기때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도로 피난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던 고종(高宗)시대가 아니면, 조선시대 후금(後金)의 군대가 침입해 온 인조대왕(仁祖大王)시대 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 추측되는 때였다.

 

추격하는 적의 군대가 워낙 급하였기 때문에 피난길에 오른 왕은 한강에서 배를 타고 하류로 내려가 강화도로 건너가려는 뱃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왕의 마음은 착잡하고 불안한 가운데 배에 오르게 되었으며 왕이 탄 배를 젓게 된 사공은 특별히 성실하고 경험이 많은 사공중에서 가려뽑힌 손돌이었다. 손돌은 자기 배에 오르게 된 왕을 모시고 노를 젓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면서 끝까지 안전하게 모시겠다는 마음가짐을 하고 열심히 배를 저어 나갔다.

 

그런데, 얼마쯤 강을 따라서 내려가다 왕이 앞을 내다보니 여울물이 있는데 손돌이 방향을 그 쪽으로 돌려 자꾸 노를 젓는 것이 아닌가! 위험하고 두려운 생각이 든 왕은 측근에게 지시하여 여울물쪽으로 가지 않도록 손돌에게 전달했으나, 손돌은 지시를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계속 그 방향으로 노를 젓는 것이었다.

 

이에 의심이 더럭 든 왕은 뱃사공 손돌이 적과 내통하여 왕을 물속에 빠뜨려 죽이려는 계획이 있다고 단정하여 여봐라 저 손돌이를 곧 결박하여 참수하라고 좌우에 명령하니 끌려온 손돌은 강화도까지 안전하게 가는 뱃길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여울물은 위험해 보이지만 제가 안전하게 모셔갈 수 있습니다.

 

만약 저 여울물쪽으로 가지 않으면 위험하오니 통촉하십시오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애원하였으나 왕은 끝내 참형의 명령을 거두지 않자, 손돌은 죽을것임을 알고 체념한 뒤 바가지 한 개를 올리면서 상감마마, 만약 배를 저어 나가다 뱃길을 잃어 배가 위험하게 되면 이 바가지를 배 앞에 던져 이 바가지만 쫓아가시면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마지막 말을 한 뒤 처형되었다.

 

손돌이 처형된 후 다른 뱃사공으로 대신 배를 저어가자 초겨울의 북서풍이 세차게 불면서 회색구름이 몰려오자 배는 좌우로 흔들려 도저히 뱃길을 잡을 수 없고 침몰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이 때 급한 나머지 손돌이 바친 바가지를 배 앞에 던지게 하니 바가지는 둥실둥실 배 앞에서 떠 가는 것이 아닌가! 왕이 탄 배는 바가지가 인도하는 대로 뱃길을 잡으니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왕은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하여 생각해보니 손돌이 억울하게 죽은 것이라 판단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은 것이어서 측근에 명하여 비석과 사당을 세우게 하였다. 그 바가지는 손돌의 혼이라고 말들 하며 그가 처형된 음력 1020일은 매년 북서풍이 거세게 불어 오는데 뱃사람들으니 이를손돌풍(孫乭風)이라 한다. 손돌의 억울하게 죽은 영혼이 북서풍이 되어 불어온다고 믿고 있는 이 뱃사람들은 이 바람을 매우 무서워하여 매년 음력 1020일에는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사당에 제사를 지낸다. 그가 처형된 곳을 손돌목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지금도 물살이 세고 배가 한번 이곳에 들어가면 위험하기 때문에 붙여진 곳이라고 한다.

  

일년 신수 점치기

연초에는 1년의 신수가 어떠할련지 궁금한 마음에서 점을 치는 습관이 있다. 일년지계는 재원이라고 하여 1년동안의 계획을 연초에 세우거니와 1년동안 닥쳐올 운명이 어떠할련지 알고 싶어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다. 사업이 번성할는지, 과거에 합격할는지, 관계가 승진할는지, 무병건강하고, 재액은 없을런지등, 앞날에 전개될 여러 가지 일에 대하여 미리 알고 싶어한다. 미리 알면 그에 대처할 수 있고 안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연초에 가장 일반화된 점복은 토정비결이다. 가정이나 거리의 어디를 가나 토정비결을 보는 광경을 발견할 수가 있다. 토정비결은 꼭 믿어서가 아니라 거의 습관화되어 연초면 대개 한번은 토정비결을 보기 마련이다. 아이들은 제외되지만 어른들은 먼데 사는 가족이나 출가한 딸의 것까지도 보아준다.

 

연초에는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토정비결을 보아주기 위하여 임시로 점복사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토정비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짐작이 된다. 또 매년 토정비결 책이 베스트셀러의 위치를 차지할만큼 많은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고 하는 것으로 정초의 토정비결을 통한 점복속이 얼마나 성한가 짐작된다.

 

토정비결은 토정 이지함이 만든 길흉화복의 예언서로서 가장 널리 알려진 점복서이다. 점괘의 산출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당년의 태세수에 연령수를 합한숫자를 8로 나누어 남는 숫자를 첫괘로 삼고, 다음 월건수에다 생월의 일수 즉 생월이 크면 30, 작으면 29를 합한 수를 6으로 나누고 남는 숫자를 둘째괘로 삼고, 마지막으로 생일숫자와 일진수를 합한 수를 3으로 제하고 남는 수를 셋째 괘로 삼는다.

 

이렇게 하여 괘 숫자를 산출한 다음에 토정비결 책의 같은 괘 숫자를 찾으면 종합괘사와 월괘사가 나타나 있다. 토정비결은 1년의 년운과 월운을 미리 알아둘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토정비결은 태세·월건·일진을 가지고 점치기 때문에 같은해·같은달·같은날에 출생한 사람은 동일운명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나 그래도 가장 흔한 점술법이다.

 

정초의 점복으로 옛날에는 오행점이 유행되었다. 오행점은 금····토의 오행을 가지고 점치는 방법인데 음양술에 근거를 둔 점복이다. 다섯 개의 나무와 엽전에 오행의 각자를 새기어 가지고 주문을 암송하면서 던져 나타난 글자를 금····토에 맞추어 점사를 읽고 풀어 점치는 것이다. 다섯자를 가지고 점사가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점사의 종류가 토정비결처럼 많지 않다.

 

설날에 짐승의 동작을 보아 점치는 방법도 있다. 즉 소가 일찍부터 기동하면 풍년이 들고, 송아지가 울어도 년사는 풍조이며, 까치가 울면 길조이며, 도깨비불이 일어도 길조이고, 까마귀가 울면 풍재와 병마가 있고, 개가 짖으면 도둑이 많으며, 개보다 사람이 먼저 일어나면 한 해를 무료하게 보내게 된다고 전한다.

 

또 설날의 일기를 보아서 그 해의 일들을 점치는 수가 있다. 즉 바람이 없이 날씨가 맑으면 풍년이 들고, 해가 붉으면 한재가 있고, 푸른 빛이면 풍재가 있으며, 검은 구름이 하늘에 가득하면 홍수를 만나게 된다고 한다. 또 북풍이 일면 풍작이고 남풍이 일면 흉작이라고 믿고 있다. 어촌에서는 설날에 바람없이 맑으면 더욱좋고 남풍이 불면 풍어, 동풍이 불면 흉어라고 전하여 농경과 어로에서 때로 상반되는 수도 있다.

 

정초에는 1년의 일을 미리 알고자 하는 궁금한 마음에서 여러 가지 점을 치는데 그 중에서 윷을 가지고 점치는 것을 윷점이라 부른다. 윷점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으니 많은 사람이 편을 짜서 집단적으로 놀아 그 결과로 마을의 운수를 점치거나 그 해의 풍흉을 점치는 것과, 다른 하나는 윷을 놀아 나타난 숫자를 가지고 개인의 운수를 점치는 방법이다.

 

집단의 운수를 점치는 윷점은 남녀로 편을 가르거나 또는 사람 수대로 짚을 길고 짧은 것의 두가지로 잘라 골라 잡게하고 긴 편과 짧은 편으로 나누어 놀이를 하는데 수답과 천수답으로 미리 정하고 그 승부에 따라 풍년이 될 것인가 흉년이 될 것인가를 점치는 방법이다.

 

개인의 운수를 점치는 것은 윷을 던져 그 숫자에 따라 세가지 괘를 만들고 그의 수에 따라서 정해 있는 점사를 해석하는 것이니 일일일괘에서 사사사괘까지 64괘가 있다. 윷점은 세 번을 던져서 괘를 얻으므로 방법이 간단해서 부녀자와 아동들사이에 널리 행해지고 있다.

 

 

 

 

손돌(孫乭)

이지함(李之函)

신숙주(申叔舟)

박세채(朴世采)

한백겸(韓百謙)

김자점(金自點)

월산대군(月山大君)

양령대군(讓寧大君)

박제순(朴齊純)

이하응(李昰應)

효령대군(孝寧大君)

 

 

 

 

밤섬의 유래

섬의 모양이 밤알 모양같이 생겼다하여 밤섬(栗島)이라 불리어 졌고 주민들은 1967년까지 고기잡이와 배만드는 것을 주업으로 하였으며, 뽕나무와 약초(감초)와 염소를 방목하고 살았음.1968년 여의도 개발시 토사와 석재를 사용하고 현상태로 남게됨 자연초지로 존치 거주민 62세대 마포구 창전동 이주19884월부터 철새도래지로 관리 LG 그룹에서 29,700천원 투입, 갈대, 갯버들, 버들강아지, 찔레 등 58,000포기 식재 1999. 8. 10. 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

 

[대동지지]에 의하면 서강 남쪽에 있는 한 섬으로 섬 전체가 수십리의 모래로 되어 있으며 거민들은 부유하고 매우 번창한 편이었다고 한다. 특히 경치가 아름다워 [서울명소고적]에서는 율도는 일찌기 마포팔경을 읊은 글 가운데에서도 '율도명사(栗島明沙)'라 하였듯이 맑은 모래가 연달아 있어서 그야말로 한강 강색과 섬의 풍치는 묘하게 어울린다라고 하였다

 

밤섬(栗島)에 관한 조선시대 기록으로, 성현(成俔)[용재총화]에 의하면 율도(栗島)는 조선초기부터 뽕나무를 심어 잠업이 성행한 지역이었고, 서울장안에 뽕잎 값이 비쌌을 때 밤섬에서 뽕을 대기도 하였다. 밤섬에 관한 풍습은 명종실록 명종 114월 조()에 기록하고 있는데 섬 주민의 생활방식이 문란한 것으로 비쳐져있는데, 이는 외부와 교통이 제한되어 남의 이목을 덜 의식했기 때문이다. [동국여지비고]에서도 고려때는 귀양보내던 섬이었으며 도선(渡船)장으로 백사장을 건너 인천으로 가는 간로(間路)가 된다고 하였다.

 

밤섬이란 명칭이 붙은 까닭은 섬이 밤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이섬은 초기에는 고립된 섬이었으나 여의도가 점점 넓은 하중도(河中島)로 발달하게 되었고, 감수기에는 여의도에 연속하게 된다. 기반암은 단단한 바위층이고, 섬의 동부와 서부에 발달한 하식애(河蝕崖)는 작은 해금강이라 불렀고 절경을 이루었다.밤섬(栗島)과 여의도의 주변에는 홍수때는 거의 침수 됐다가 끝나면 하상이 수면위에 노출되는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는데, 조선시대에는 대략 250300만평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밤섬은 서강쪽에 여의도는 영등포쪽에 가까웠는데, 여의도는 1916년부터 비행장으로 사용되었으며 광복후에도 1958년 김포 공항이 세워지기 전까지 민간 및 군용기지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홍수시에는 백사장이 침수되어 밤섬 고지대의 주민들의 교통이 차단되어 고립되곤 하였다.이후 밤섬은 여의도가 개발되면서 한강하구의 확장으로 유수를 좋게하고, 여의도 제방의 축석에 필요한 잡석채취를 위해 19682월 폭파 해체된다.

 

현재의 윤중제인 여의도의 방축을 쌓을 때114,000입방미터의 잡석과 147,500입방미터의 흙을 이용할 수 있었다. 폭파에 의하여 밤섬의 대부분은 없어지고 일부 10여개의 조그마만 섬의 형태로 남았다. 그리고 20여년동안 계속된 한강 퇴적물에 의하여 섬에는 나무와 풀이 우거지고 새들이 모이면서 도심속의 철새도래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80년대 한강종합개발시에는 철새도래지와 어류서식지로서 보존할 가치가 크기 때문에 현 상태로 존치하게 된 것이었다.

 

서울 마포구 서강동 15통으로 되어있는 밤섬은 500년전 조선의 서울 천도와 함께 배 만드는 기술자들이 처음 정착했다고 한다. 수도 서울에 있으면서도 지금껏 한강물을 식수로 마시며 거의 원시공동사회체제 속에서 살아온 이 섬에 마씨(), 인씨, 석씨, 선씨 등 희성(希性)이 많은 것이 가장 뚜렷한 특색의 하나다. 폭파 당시 밤섬에는 부군신, 삼불제석님, 군웅님의 3신을 모시는 사당을 만들어 17대를 살아온 62가구 443명이 살고 있었는데 대부분 어업과 도선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밤섬은 면적에 비하여 가구가 많고 농업생산은 별로 없으나, 섬사람들은 옛부터 한강 수운에 관련된조선업, 뱃사공, 배에 물산을 실어 내리는 하역에 의존하였다. 암석으로 이루어진 큰 밤섬 아래에는 한강의 퇴적으로 작은 여러 개의 모래섬이 발달하였는데, 그 백사장은 좋은 조선장(造船場)이 되어서, 여러 백년 동안 조선업이 가장 중요한 직업이 되었다. 배만드는 기술자인 목수가 가장 큰배를 많이 제작하던 시기에는 54()였고, 일제시대에는 강제징용수첩을 받은 청년층 조선목수가 17명이었다고 한다. 조선업은 타지방의 주문을 받는 것과, 공임(工賃)을 받고 타지방에 고용되어 가는 경우가 있는데, 조선업이 번영하던 시절에는 경기가 좋았었다. 그러나 6.25의 피해를 겪은 이후 조선업은 완전히 쇠퇴하여 다른 직업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풀무골

풀무골은 월드컵 주경기장 부근 일대에 있던 옛마을의 이름으로 야동(冶洞) 이라고도 불려졌는데, 풀무골의 지명은 조선시대 엽전을 만드는 대장간이 많아 대장간의 풀무를 상징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또한 풀무골은 동래 정씨(東來 鄭氏) 가문이 400여년 , 한양 조씨(漢陽 趙氏) 와 전주 이씨(全州 李氏)가문이 200여년 거주해 온 집성촌(集性村)이기도 하였다. 2002년 월드컵 주경기장이 건설되면서 마을이 완전 철거되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됨에 따라 향토문화유적지 복원 차원에서 풀무골 복원사업이 추진 되어 원래의 마을과 가까운 이곳에 풀무골을 상징할 수 있는 대장간 등의 시설을 설치하게 되었다.

 

 

절두산순교지가 있으며, 한국 유일의 정교회 건물이 있다.

절두산순교지(切頭山殉敎址)와 순교기념관, 외국인묘소, 공민왕사당과 한강변에 여러 부군당이 있다. 마포구는 지리학상 포구문화가 일찍부터 번성하였으며, 성밖 농촌취락으로 발전되었는가 하면, 강변풍경이 아름 다워 전국의 시인묵객들이 즐겨찾는 정감 넘치는 고장이었다.

 

마포나루(지금의 토정동, 마포동 일대), 서강나루(지금의 신정동, 하중동, 상수동일대), 양화나루(지금의 절두산 서쪽부근)가 있었는데, 이곳이 워낙 절경이었기에 옛 사람들은 일찍이 마포8(麻浦八景)이라 일컬어왔고, 풍류시객과 중국사신들이 경치를 조망하며 시문을 읊던 정자(亭子)가 서강지역만도 30여개가 넘었으며, 전하는 시문(詩文)만도 50여수가 된다고 한다.

 

또한, 구한말 개항장으로서 관문역할을 하여 급속한 발전을 하게 되었고, 1866년 천주교도 박해사건으로 프랑스함대가 서강의 하중동 앞까지 올라와 병인양요의 도화선이 되기도 하는 등 풍운의 역사를 겪기도 하였다. 그후 서울에 철도가 부설되면서 물화집산의 포구로서 마포의 기능이 점차 줄어들었고, 6.25 전쟁을 거치면서 강화만이 막혀 한강으로 배들의 출입이 금해지자 마포의 포구문화는 사라지게 되었다. 옛 마포사람들은 마포나루터의 안녕과 번영은 물론, 마포항을 드나드는 선박들의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나루굿을 매년 5월 단오절 이전에 실시해왔다.

 

서구문명을 가장 먼저 받아들였던 곳으로 절두산 순교성지, 외국인 묘지등 다양한 근대사의 문화유적이 있으며, 서울시 기념물 제 9호인 망원정, 토정동의 토정 이지함 집터 표석, 양화진 나루터 표석, 삼개포구 표석, 마포종점 노래비 등이 역사를 함께 하고 있다. 또한, 사통팔달 교통과 도시속의 업무중심지구로 발전하면서 신세대의 패기와 활력이 넘치는 홍대앞 거리, 신촌거리와 함께 아현동 웨딩거리는 젊은 감각과 문화의 꽃을 피우고 있으며 사라진 마포나루굿을 재현한다.

 

 

 

사적 제399호 양화나루 잠두봉유적

서울시 기념물 제9호 망원정지

서울시 민속자료 제17호 정구중가

용강동 정중구 가옥 서울시 민속자료 제17

월인석보(月印釋譜) : 보물 제745

안중근의사 유묵 보물 569-9

밤섬부군당 도당굿 서울시무형문화재 35

창전동 공민왕 사당 등록문화재 제231

서교동 최규하 대통령가옥 등록문화재 제413

미몽(일명:죽음의 자장가) : 등록문화재 제342

자유만세 : 등록문화재 343

검사와 여선생 : 등록문화재 제344

마음의 고향 : 등록문화재 제345

피아골 : 등록문화재 제346

자유부인 : 등록문화재 제347

시집가는 날(일명:맹진사댁 경사) : 등록문화재 제348

 

 

 

 

 

 

법정동 기준26, 행정동 기준은 16

성산(城山아현(阿峴공덕(孔德신공덕(新孔德도화(桃花용강(龍江토정(土亭마포(麻浦대흥(大興염리(鹽里노고산(老姑山신수(新水구수(舊水현석(玄石창전(倉前상수(上水신정(新井하중(賀中당인(唐人서교(西橋동교(東橋합정(合井망원(望遠연남(延南상암(上巖()

 

 

 

 

 

 

 

공덕동 孔德洞 (Gongdeok-dong)

공덕동은 이곳에 있던 옛지명이 공덕리(孔德里)였으므로 유래되었다. 공덕동을 이루고 있는 옛날의 자연부락인 한 정동은 큰우물이 있으므로 붙여진 명칭인데 공덕동 사람들이 다 마실 수 있을 만큼 수량이 풍부한 곳이었다. 따라서 이 우물은 마을 제사나 행사때는 물론 이웃지역에서도 사용했는데 가뭄에도 수위의 변화가 없었다. ´한정´이라는 뜻은 큰우물·우두머리우물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만리재는 만리창(萬里倉)이 있었으므로 유래된 동명이면서 고개 이름인데 대현(大峴) 혹은 큰고개라고도 한다. 아현(애고개)에 대응한 것인데 고개가 길고 높아서 넘어가는 것이 마치 만리나 된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한 편 공덕동 298-16번지와 342번지에는 이문(里門)이 있었다. 도둑을 막기 위해 세웠던 이문은 마을 자치단위로 순번을 정해 야간 순찰을 하는 일종의 숙직소였다. 조선시대의 이문은 도성 안에 세워졌으며 서소문 밖은 훈련도감에서 순번을 돌던 칠패와 팔패로 구성되었다. 공덕동 방면은 주로 칠패에서 순라를 행했으며 용산방면과 연결되어 있었다.

 

공덕동396-4번지는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이 있다는 표석을 세웠으므로 푯돌배기 혹은 표석골이라 불렀다. 천하를 호령하던 대원군이 청군에 의존하여 세력을 찾은 명성황후 민씨에 의해 운형궁에서 유폐생활을 하고 있던 중 18954월 아끼던 손자 준용마저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강화 교동으로 유배형을 받게 되자 분노하여 성을 떠나려하다 제지되자 성안의 운현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있던 별장에서 머물게 되었다.

 

지금의 동도고등학교 자리인 이 별장에서 사실상 은둔생활을 시작하던 대원군은 자신의 일생이 너무나 덧없음을 뒤돌아 보고 스스로 조소한다는 뜻에서 거처하는 집의 이름을 아소정이라 하였다. ´내가 내자신을 비웃는다´는 뜻이었다. 조정에서는 대원군이 아소정에 거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입구에 표석을 세워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였다.

 

늙 고 병든 대원군은 부대부인 민씨의 죽음을 이곳에서 맞이하였고 19022월 그 역시 아소정에서 서거하자 이곳에서 장사를 지냈으므로 일대를 국태공원(國太公園)이라 불렀다 그의 사후 아소정에 대원군의 묘소와 사당을 만들었으나 1910년 묘소를 경기도 파주군으로 이장하고 1917229일 손자 이준이 죽자 같은해 4월 옛날 아소정 자리에 무덤을 만들었다. 그러나 1936년 도시계획에 의해 공덕동이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이준의 사당과 묘소도 선산인 경기도 파주군으로 이전하였다.

 

한편 주인없는 아소정터는 총독부 소유의 국유지로 편입되었다가 용도변경에 의해 학교부지로 변경불하되어 동도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운동장 한 가운데 동그마니 놓여있던 아소정은 학생들의 학교생활에 불편함을 초래함은 물론 미관상이나 학교운영상에도 좋지 않아 철거하고 서대문구 봉원동 소재의 봉원사가 6·25동란으로 소실되었으므로 이절의 대방(大房 : 염불당)으로 1966년에 이전 복원하게 되었다.

 

공덕동 105번지 현재의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자리는 원래 마포형무소 자리였다. 경성형무소라는 명칭으로 1920년대에 지어졌는데 서대문형무소에 기결수를 분산 이전시켜 수용하였으나 안양에 교도소를 새로 건립하여 이전하면서 그 터는 학교부지로 할 것으로 결정되어 경서중학교가 있다가 지금은 서부지원이 옮겨와 자리하고 있다.

 

독립운동 유적지공덕동 105번지 현 서울 지방법원 서부지원 자리에는 1912년 일제가 경성형무소(후에 마포형무소로 개칭)를 설치하여 많은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서 순국하고 옥고를 치루던 곳이다.

 

 

아현동 阿峴洞 (Ahyeon-dong)
아현동은 아현(阿峴) 혹은 아이고개·애고개라고 부르던 고개가 있어서 동명이 유래되었고 서소문밖에 위치하였 였다.도성 4대문과 그 사이의 4소문 가운데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성밖으로 갖다 버리는데 사용하는 문은 주로 서소문(西小門)과 광희문(光熙門)인데 이 가운데 서소문은 서북쪽 지역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며 광희문은 동남쪽 지역 거주민들이 주로로 이용하였으므로 일명 시구문(屍口門) 혹은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였다.

 

서소문 밖의 시체매장지는 만리재·애고개와 와우산 등이 이용되었고 이 가운데서도 애고개는 특히 아이들 시체를 많이 매장했기 때문에 명칭이 붙었다. 그런가 하면 만리재가 너무 길고 높아서 마포나루 쪽으로 가자면 한나절 이상은 족히 걸리므로 이보다 서북쪽에 있는 작은 고개를 넘기가 쉽다는 뜻으로 만리재를 큰고개라 한데 비해서 아이 만큼이나 작은고개라는 뜻에서 불렀던데서도 연유되었다.

 

아현동에는 우물도 많이 있었는데 이는 수맥이 북악에서 아현을 지나 복개된 창전로쪽으로 지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03번지에는 말똥우물이, 양정중고등학교 뒷산에는 삼태우물,서아현파출소 앞에 파마우물, 8번지에 쌍우물, 소의초등학교 후문께에 까치물이 있었고 너럭바우 밑에는 너럭바우샘이 있었으며 그외 호박밭 약물터·회나무우물도 있었다.

 

한편 아현동에는 활인서(活人署)가 있었다. 아현동 267번지·281번지 일대로 아현중고등하교·아현직업학교·아현초등학교 자리이다.

 

고려시대의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제도를 이어받아 14149월에 활인원(活人院)으로 개칭하면서 기구를 강화하였다. 그후 실질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여 유명무실하던 것을 영조때 부활시켜 활성화되었는데 1882년에 폐지되고 그 후 이사업은 혜민서(惠民署)업무와 통합되면서 제중원으로 이어졌고 다시 1905년에 설립된 대한적십자병원으로 계속되었다.

 

아현동의 풍습으로는 매년 정원 보름에 행하던 석전(石戰)을 들 수 있다. 변 전(邊戰) 혹은 편싸움이라고도 하는데 돌이나 몽둥이를 들고 싸우는 싸움이다. 삼문(三門)밖과 아현사람들이 서로 무리를 이루어 쫓고 쫓기면서 행하는 일종의 풍습인데 삼문밖의 주민이 이기면 서울부근에 풍년이 들고 아현이 이기면 8도에 풍년이 든다고 해서 삼문밖의 사람들도 아현쪽으로 붙어 아현패가 이기도록 하였다. 도성과 마포나루가 이어지던 길목에 있던 아현을 전국을 대표하는 지명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 싸움의 함성으로 천지가 진동하는데 싸움에서 혹시 부상을 했다 하더라도 상관치 않았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어느쪽에서도 변상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아예 정월 보름날은 다른길로 피해서 다녔다고 한다.

 

서활인서터아현초등학교와 아현중학교 직업학교 자리에는 고려때의 '동서대비원' 제도를 이어받은 빈민의료기관인 '서활인서'가 세워져 성안 사람들의 질병치로는 물론 일대 빈민의 병을 치료하던 곳이었다.

 

선통물천옛날 애고개쪽에서 마포()로 흐르는 개천을 거슬러 각종 삼남의 물품이 들어와 장안으로 반입되었으면 물건이 먼저 통과하는 개천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

 

 

도화동 桃花洞 (Dohwa-dong)

도화동의 동명은 이곳이 조선시대부터 도화내동이라 부른데서 유래된다. 도화동은 복숭아꽃이 많이 피어있으 므로 복사골이라 불렀는데 삼성아파트와 우성아파트 일대를 말한다. 산비탈인 이곳의 복숭아꽃은 절경이어서 밤섬에서 보면 쪽빛 한강물과 붉은 분홍색의 복숭아꽃이 서로 어우러져 무릉도원처럼 느끼게 해준다.

 

도화동에 얽힌 전설이 두 개가 있다. 그 중 하나는 복숭아 골에 살던 고종 때의 김판돌이라는 사람이 매일 밤섬에 가서 고기를 잡아 칠패시장에 내다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살아갔는데 어느날 문득 율도에서 고기를 잡다 말고 고개를 들어 자기가 살던 집을 바라다 보니 절경중에서도 으뜸이라 연신 감탄을 했다. 바닥에 닻이 닿는 순간 땅인줄 알고 바로 뛰어 내리다가 익사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다른 하나는 아득한 옛날 옛적 마음씨 착한 김씨 노인과 외동딸 도화낭자가 함께 복사골에 함께 살고 있었다는 전설이다. 곧 이곳에 사는 도화낭자의 아리따운 모습과 마음씨는 천관(天官)의 귀에까지 들려 옥황상제의 며느리로 간택되었다. 김노인은 딸이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것은 기쁘나 외동딸과 영 이별할 것을 생각하니 서운하기 이를데 없었다.

 

이 러한 노인의 마음을 애처롭게 생각한 천관은 천상의 천도복숭아를 하나 주고 갔는데 노인이 그 씨를 집 근처에 심고 복사나무가 크는 것을 딸을 보는 마음으로 살았다. 노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복사나무는 번성하였는데 마을 사람들은 노인과 도화낭자를 생각해서 복사나무를 심어 가꾸면서 일대가 복사꽃으로 뒤덮혔다는 이야기이다.

 

앞의 것은 이 지역 일대가 자연생 복사꽃으로 뒤덮혔으므로 지명유래가 되고, 뒤의 것은 인위적으로 복숭아 밭을 조성했다는 것인데 경원선이 가설될 무렵만 해도 일대는 복숭아밭이 있었으나 그후 점차 주거지로 바뀌면서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고 지금은 도화동이라는 동명만 있을 뿐이다.

 

도화동은 비교적 지대가 높아서 크고 작은 고개가 많이 있었는데 용산 새창으로 넘어가는 새창고개와 용산에서 마포로 넘어가는 용신고개가 있었다. 새창고개는 사창고개라고도 하는데 용산에 있던 별영창이 있으므로 지명이 유래되었고 용신고개는 삼개고개라고도 하는데 마포를 이름자 그대로 이두음화 시킨 한글로 쓴 것이 삼개이기 때문이다.

 

298번지에는 홍문(紅門)이 서 있었다 하여 홍문터라 부른다. 이곳의 홍문은 조선 영조때 살았던 효녀 지심을 위해서 마을사람들이 합세해서 효행을 알려주어 세워진 것이다. 지심은 일찍 어머니가 죽고 동냥젖으로 컸는데 어린나이에도 몸이 불편한 아버지의 뒷바라지는 물론 동네의 굳은 일은 도맡아 하였으므로 마을사람들 모두가 친딸처럼 여겼다.

 

어 느날 지심이 마을에서 지내는 제사음식을 장만하기 위해 집을 나서 얼마가지 않았을 때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호랑이 한마리가 버티고 앉아 잡아 먹을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지심의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고기가 먹고 싶다는 이야기를 해왔던 차에 지심의 눈에는 호랑이가 전혀 무섭지 않고 다만 고기덩어리로 보였다. 맨손인 그녀는 이런 생각으로 호랑이와 서로 마주보며 서 있었는데 호랑이보다 더욱 기세등등한 자세였다.

 

이윽고 호랑이가 지심에게 달려들어 잡아먹을 태세를 갖추는 순간 지심도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연약한 어린여자의 힘으로 호랑이를 대항한다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난 다음부터 지심은 점차 수세에 몰리고 말았다. 호랑이도 이 무렵은 지친 상태였다.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순간 깜빡 기절을 했을 때 총소리가 나더니 호랑이가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호랑이를 전문으로 잡는 포수가 때마침 길을 지나다가 이 광경을 보고 구해주었던 것이다. 지심은 그간의 사정을 말하여 포수는 호랑이의 가죽만 가지고 지심은 호랑이 고기를 얻어 실성한 아버지를 위해 호랑이고기로 탕을 끓이고 구워서 정성껏 봉양한 끝에 아버지는 낫게 되고 이런 소문을 듣게 된 영조의 후궁이며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가 지심의 갸륵한 정신을 영조께 아뢰어 효녀정문을 내리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지심을 위해 세워졌던 정문은 고종 초까지 있었는데 일본군이 프랑스함대가 마포강까지 들어올 무렵 이 정문이 군병들의 진로에 방해된다하여 철거하여 그 터만 남게 되었다.

 

복사골 전설도화동 산언덕에 복사꽃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마음씨 착한 김노인의 외동딸 도화낭자가 옥황상제 며느리가 되면서 선관이 김노인에게 주고간 천도복숭아를 심어 복사골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사창고개 백범로의 등성이로 도화1동에서 용산구 효창동 사창마을(세창고개) 방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일컬는다.

 

대동우물터 도화12-224호에 있던 우물로 을축년 대홍수에 용산의 이촌동에 살던 이재민들이 도화동으로 이주해와 공동으로 사용하던 우물.

 

 

용강동 龍江洞 (Yonggang-dong)

용강동은 이곳이 고양군 용강면이었던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용강동을 이룬 동막리는 옹기를 제조하던 곳이 많 았기 때문에 옹리라 하던 것을 동이를 만드는 곳이라는 뜻의 동막(東幕)으로 바뀌었다. 이곳이 동이를 제조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조선 초기때의 문인 성현(成俔)이 지은 용재총화(庸齋叢話)에도 나오는데 "사람이 사용하는 도기는 질그릇을 말하는데 도성에서 소요되는 항아리 종류인 와기는 노량·마포 등지에서 나오며 이곳 사람들은 이 일로 인해 생업이 유지된다."하였다.

 

옹이 그릇은 젓갈종류나 김장을 하기 위한 그릇뿐만 아니라 술을 빚어놓는 그릇으로도 사용했다. 동막 부근이 좋은 소주가 생산된다는 사실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나타나는데 이에 의하면 공덕·옹막 사이에서 생산되는 약주의 진품인 삼맥주(三麥酒)는 양조법이 까다로워 일반소주와는 다른 맛을 내는데 수백 내지 수천독씩 빚어냈다고 한다. 이 삼맥주는 노란 빛을 띠는데 마시면 마치 이슬을 먹은 것처럼 산뜻하지만 그냥 두면 기름이 낀 것처럼 탁하다고 하였으며 오장에 특히 좋은 술이라 하였다.

 

용강동이라 이름지었던 까닭은 이곳의 마포강이 마치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곳이라는 풍수지리에 따라 지어진 이름이다. 149번지 일대에 있던 우물을 작은우물, 430번지 부근에 있던 우물은 큰우물이라 했는데 큰 우물은 동막사람 모두가 마실 만큼 수량이 풍부한 우물이었다. 작은 우물은 여름철 배탈이 났을 때 효과가 있었다고 하는데 톡 쏘는 듯한 맛이 있었다. 이로 보아 아마도 탄산성분이 함유된 것이 아닌가 한다.

 

용강동 335번지에는 서울시 민속자료 제17호로 1977317일 지정된 정구중(鄭求中)집이 있다. 이 가옥은 동향으로 배치된 구가형(口家形)집으로 안채, 행랑채, 별당이 따로 축조되어 있으며 안채뒤에 있는 별당은 전형적인 자 집이다. 이 가옥은 도시의 제약된 좁은 대지 안에 전통적인 안채에 별당채까지 갖추어 오밀조밀한 깊은 맛을 보여주는게 특징이며 1920년대 이후 한식주택의 면모를 보여주는 개량한옥으로서 보기드문 예인 것이다.

 

이 집에 들어서면 넓지 않은 마당에 측백나무, 철쭉, 목련, 장미, 소철, 사철나무, 난초롱이 있어 운치를 더해주는데 이집은 구한말 용강동의 부농인 이모씨가 무남독녀에게 주기위해 당시 장안에서 이름난 4대 목수중의 하나인 연영달씨를 시켜 지었다고 하며 목재는 압록강 유역의 홍송과 백송을 뗏목으로 옮겨와 한강에 2년동안 잠겨 놓았다가 1년간 건조한 후 못을 전혀 사용치 않고 지었다는 것이다.

 

용강동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토정길의 연변은 마포주물럭갈비가 처음 시작된 곳이다. 처음에는 전차를 이용한 승객들이 종점인 이곳에 내려 퇴근길에 주로 이용하던 주점의 술안주로 개발해낸 것인데 돼지고기의 특유한 냄새를 없애기 위해 몇가지 양념을 섞어 만들었다. 사람들의 입맛이 변함에 따라 마포주물럭갈비라는 대명사로 바뀌었고 재료도 점차 고급화되어 점차 쇠고기로 바뀌어지면서 마포를 알리는 명물로 바뀌어졌다.토정길 북쪽은 옛날 지번 그대로이나 그 남쪽은 구획정리가 되어 비교적 반듯반듯한 모양새를 이루고 있다.

 

토정 이지함 집터무소유를 실천한 자유인이자 조선3대 기인이며 토정비결의 저자로 더 잘 알려진 토정 이지함 선생이 살던 집터로 토정동 한강 삼상아파트 자리에 표석이 있다.

 

정구중가서울시 민속자료 제17호로 1977317일 지정된 정구중씨 집으로 대지는 241평에 건평 71평으로 1920년에 건축된 집이다.

 

삼개포구마포의 옛 포구 이름으로서 토정동 강변도로 아래에 삼개포구의 표석이 있다.

 

 

대흥동 大興洞 (Daeheung-dong)

대흥동의 동명은 동막하리를 대흥정이라 하여 1936년 서울의 구역을 확장할 때 편입되면서 비롯된다. 대흥동이 발 전하기 시작한 것은 19293월 용산~당인리간을 왕복하는 용산선을 개설하면서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옹기를 만드는 한갓진 마을에 불과했으나 당인리 화력발전소에 소용되는 각종 물자 운반을 하는 철도의 개통으로 중간 기착점인 동막역이 건설되면서 분주해졌다.

 

이 동막역 근방의 우물을 새우물이라 했는데 화차의 냉각수로 사용하기 위한 물을 구하기 위해 새로 팠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며 이 우물이 있는 동네를 새우물거리라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논가운데 있던 우물을 논가운데 우물·논우물·답중동우물 등으로 불렀는데 논물을 대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동막역을 만들고 철도를 부설하면서부터 동막역을 중심으로 하여 만들어진 마을의 혈이 끊어졌다고 하는데 원래 있던 마을 혈매기라고 불렀다. 장사와 큰인물이 난다고 해서 좋은 집터로 여겼는데 혈이 끊어지면서 마을도 가난해졌다고 한다.

 

대흥동에는 불당재가 있다. 최영장군을 모신 당집이 있는 동산근처인데 대흥동 416번지에 있는 동제당을 불당재라고도 한다. 17세기결 동막하리에 화재가 빈번하자 어느 도사가 덕물산의 최영장군 제당을 이전하면 화재예방이 된다 해서 당을 현 위치로 이전 건립하였다. 불이 나지 말라는 뜻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건립된 것인데 곧 "불이 안나는 당"이라는 뜻을 가진 불당재이다. 불당재 안에는 최영장군 부부를 주신으로 모셨으며 명덕당이라는 4칸의 신당 안에 공민왕을 비롯하여 신격이 밝혀지지 않은 무속신을 봉안하고 있었다. 동제당을 겸했으므로 속칭 불당재라 했는데 지금은 화재로 소실되어 없어졌다.

 

숭문고등학교 옆에는 서낭당이 있었다. 서낭당 일부가 학교터로 편입되었는데 이 서낭당 앞의 서낭목은 느티나무로 동네를 지켜주었다. 서낭당 주변에 있는 마을에서는 많은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고려장을 행할 무렵 왕명에 의해 노인들은 필요없는 존재라 하여 하루 아침에 이들 노인을 전부 노고산에 갖다 버리라는 고을원의 방이 붙었다.

 

서 낭당 언덕에 살던 한 젊은 부부는 차마 늙고 병든 어머니를 버릴 수 없어 밤새도록 별도로 집 한칸을 짓고 그곳에 어머니를 모시면서 울긋불긋한 옷을 입히고 고깔을 세워 제단위에 앉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동네에 내려가 간밤에 꿈속에 신령이 나타나서 마을에 재앙이 곧 닥칠 것인데 나를 잘 모시면 이 재앙은 피해 갈 수 있다는 계시를 해주길래 깜짝 놀라 일어나 보니 언덕위에 없던 집 한채가 서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집안을 들여다보니 꿈속에 나타난 신령이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있다는 이야기를 퍼뜨렸다.

 

사람들이 놀라서 함께 달려가보니 과연 고깔 쓴 노인이 앉아있는데 신기하게도 동네사람들의 집안내력이며 마을 일을 알아 맞혔다. 오랫동안 동네일을 맡아보는 아들내외의 이야기를 듣고 또 언덕 위에 살고 있었으므로 동네를 내려다보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던 노인이었으므로 동네 이야기에 대해서는 줄줄 욀 수밖에 없었다. 놀란 동네사람들은 신이 내려왔다며 노인이 있는 집 둘레에 금줄을 두르고 일반인의 접근을 막았으며 조석으로 음식을 차렸다.

 

고을의 원도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는데 마침 부정한 일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 일이 나랏님의 귀에 들어가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초조할 때였다. 이에 노인은 "어찌 나라의 돈을 착복해서 자리 밑에 감추고 조강지처를 노비로 만들었느냐"며 호통을 치고 즉시 원래대로 할 것을 말하였다. 너무 정확한 지적에 원님도 놀라 수백번 절을 하고 감사로 돌아간 후 노인의 지시대로 시정한 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노인은 죽을 때까지 서낭당에서 동네사람들이 바치는 음식을 섭생하며 살다가 죽었는데 이 때문에 서낭당 뒷산을 노고산(老姑山)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염리동 鹽里洞 (Yeomni-dong)

염리동을 이룬 마을로는 느티나무배기 쌍룡대·개바위·마루보시사택·고추밭머리 등이 있다. 느티나무배기는 65~67 번 지 일대인데 느티나무가 언덕위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느티나무는 우리나라에서 많이 자라는 나무로 마을 수호신이나 동네입구의 정자나무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쌍룡대는 개바위 주변에 있던 마을인데 용 두 마리가 하늘로 올라간 후 그 자리에 빈터가 생겼으므로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구획정리가 되어 있는 지역으로 27-44번지 일대이다.

 

쌍룡대는 개바위 주변에 있던 마을인데 용 두 마리가 하늘로 올라간 후 그 자리에 빈터가 생겼으므로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구획정리가 되어 있는 지역으로 27-44번지 일대이다. 개바위는 바로 쌍룡산 남쪽 끝 27-88번지에 있는 개처럼 생긴 바위를 말하는데 철종때 이곳에 사는 인색하기 그지없던 장자(부자) 한사람이 자식이 없는 대신 큰 개 한 마리를 수십년간 길렀다. 자식이상으로 정든개였으나 어느날 갑자기 집을 나가 들어오지 않자 장자는 개를 찾아다녔다.

 

동 네 입구 쌍룡산 남쪽에 자신의 집에서 키우던 개와 비슷한 모습을 한 바위를 발견하고 너무나 반가워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자 장자쪽을 향해 개가 고개를 돌리고 컹컹 짓기 시작하였다. 다가가 자세히 보니 개가 아니고 바위인데 장자가 오자 꼬리를 흔들면서 반가워했다. 바위로 변한 개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이 덧없음을 알고 재물을 풀어 동네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한편 자신은 정처없는 유랑을 떠났다. 이 개바위가 생긴 뒤로 마을에는 도둑이 없어졌는데 동네 사람들은 이때부터 개바위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정하고 장자가 동네를 떠난 매년 음력 71일을 기일로 정해 개바위에 제사를 지냈다. 개바위는 개가 아래를 쳐다보고 쉬는 모습으로 되어 있다.

 

공기바위는 현 청소년독서실 뒤에 지름 2m 정도의 둥그런 바위 2개가 나란히 있었는데 이 바위 위에서 천상의 옥황상제 궁녀들이 매월 보름이면 내려와 공기를 하였으므로 명칭이 유래되었다. 그러나 주변지역의 정리로 공기바위는 없어졌다. 마루보시사택은 178번지와 36번지 일대이다 .

 

염 리동 일대는 1936년 서울로 편입될 때 일본인 마루보시의 목장이었는데 이곳에 소속된 목동들과 관리인을 위한 사택을 지은 것이 마루보시사택이다. 개바위 아래에는 냉정(冷井)물이라는 우물이 있었다. 찬우물이라고도 하는데 장자집의 개가 집을 나왔다가 이 찬우물에서 물을 먹은 후 바위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찬우물은 개바위제사 때 사용된다.

 

한편 염리동은 글자 그대로 소금과 관련된 곳인데 동막역 부근에 소금창고가 있었으므로 이와 가까운 일대에 소금장수들이 많이 살았으므로 이름이 유래되었다. 이들 소금장수들은 동막에서 사온 옹이항아리에 소금을 담고 나루에서 부린 생선류와 서로 맞바꾸었다. 마포동의 소금머리골에는 소금배가 드나들던 소금전이 있었다.

 

150번지에는 아소정(我笑亭)이 있었다. 흔히 대원군 공덕리별장이라 부르는 이 아소정은 아흔아홉간으로 1893년부터 이곳에 대원군이 거주하였으며 19022월 그가 세상을 떠나자 이소정 울안에 산소를 썼으므로 일대를 한때 국태공원(國太公園)이라 하였다.

 

아소정터지금의 동도고등학교자리에 있었던 '아소정'은 구한말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실전후 사실상 운둔생활을 시작했던 아흔아홉칸의 별장으로1898년 대원군이 타계한 후 국태공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1966년 서대문에 있는 봉원사 대방(염불당)을 짓기 우해 이전되었으나 불타고 없어졌다.

  

신수동 新水洞 (Sinsu-dong)

신수동의 동명은 원래 이곳을 이룬 자연부락이 신수철리(新水鐵里)였는데 1936년 경성부로 편입하면서 신수정 신 수정이라 하던 것을 광복 후 신수동이라 한데서 비롯된다. 신수동의 옛이름인 신수철리는 새로된 수철리라는 뜻인데 원래 수철(水鐵)은 무쇠를 뜻한다. 신수동 110번지 일대를 무쇠막이라고 하는데 무쇠솥이나 농기구 등을 만들어 팔거나 국가에 바치는 공장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곧 무쇠막으로 ""이란 물건을 만드는 막사, 장소라는 뜻이다. 수철리는 성동구 금호동 앞 나루터도 무쇠막나루터라고 했는데 한자로는 수철리나루로 썼던 것과 같다.

 

109번지 일대는 바탕거리라 하는데 바탕 또는 기본이 된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며 솥이나 농기구를 만드는 기계의 하나로 주물틀을 우리말로 바탕이라 했으므로 바로 솥을 만들기 위해 걸었던 바탕이 있다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109-2번지의 바탕우물은 바로 무쇠막에서 사용하던 우물인데 벌겋게 달은 쇠를 식히는 것은 고운 모래나 물을 사용했는데 바탕우물의 물로 길러 쇠를 식혔다.

 

50 번지는 메주무수막이라 하는데 궁중이나 관헌에서 필요한 메주를 다량으로 쑤어서 바치는 일을 하던 곳인데 대개 도성 밖 4군데에서 하였다. 메주쑤는 곳은 우선 콩을 씻어야 하므로 물이 좋아야 하고 둘째, 운반이 용이한 곳에 위치해야 하기 때문에 메주가마가 있는 곳은 물가에 있는 마을이 우선 선정대상이 되었다. 신수동의 메주무수막은 메주가마라고도 불렀다.

 

신수동 311~334-8번지에 이르는 길은 박석거리로 불렀다. 길이 질어서 박석을 깔아놓았다는 것인데 이곳에 살던 한부자가 비만 오면 질퍽해진 땅 때문에 가죽신에 흙이 묻는 것이 싫어서 하인들을 시켜 돌을 깔게 하면서부터 이름이 유래되었다. 신수동 371-1번지는 오원산·김진사동산 등으로 부르는데 처음에는 오씨가, 나중에는 김진사가 소유한 것이라 해서 명칭이 바뀌어졌다. 얕으막한 동산인데 경치가 아름답기도 한 이 산에 서면 사방을 내려다 볼 수 있으므로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원수처럼 두 집안이 지냈다.

 

그 러다가 오씨가 먼저 동산을 차지하자 김진사는 관가에 오씨가 무사를 일으켜 역모를 도모하는 자금을 대고 있다고 거짓으로 고발하여 먼곳으로 귀양보내고 관가에서 재산을 몰수케 한후 김진사가 이를 재빨리 차지하면서 김진사동산이 되었다고 하는데 서로 이웃해 있던 두집안의 싸움을 보다 못한 오씨의 딸과 김진사의 아들이 결혼을 하고 양 집안을 화해시키면서 그때부터는 오금동산으로 불렀다.

 

신수동 202-3번지의 장사바위는 박힌 바위라고도 하는데 힘센 장사가 이곳에 살았을 때 바위로 올라가면서 손톱과 발톱으로 긁었기 때문에 흔적이 남았는데 어느날 자다가 바위에 소변을 보자 구멍이 뚫어졌다. 일제 때 장사가 다시 태어날 것을 두려워했던 일인들이 그 구멍에 정을 박고 쇳물을 끓여 부어 넣게 함으로써 장사바위의 혈을 끊었다고 전하며 또 다른 전설로는 이곳에 살던 한 부부가 결혼하지 28년이 넘도록 자식이 없자 지나가던 탁발승이 시주를 하면 아이를 점지해주겠다는 말을 하였고 이에 노부부는 집안의 재산 절반을 뚝 떼어 절에 바쳤다. 얼마 후 부인의 몸에서 태기가 있었는데 열달이 지나도 출산을 못하고 1년이 넘어도 출산하지 못하다가 열다섯달만에 겨우 태어났다.

 

나오자마자 아이는 활을 쏘고 한손으로 커다란 나무를 뽑는 기이한 행동을 하였다. 놀란 노부부는 아이의 이러한 행동을 쉬쉬하며 감추었다. 이 무렵은 나라에서 장사는 반역을 꾀할 염려가 있으므로 모두 잡아들이라는 방이 붙었으므로 포졸들이 집집마다 장사가 있는지 여부를 조사할 때였다. 한편 젊었을 때부터 부인을 사모하고 있던 같은 동네의 홀아비 한사람이 이 집의 아이가 장사라는 이야기를 듣고 몰래 숨어들어 아이를 지켜보았는데 과연 장사인지라 혼비백산하여 그 즉시 관가에 고발하였다.

 

관원들이 아이를 체포하러 오자 일곱살된 장사는 바위를 던지며 저항하다가 한 포졸이 쏜 화살에 눈을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때를 놓치지 않고 포졸들이 달려들어 아기장사를 체포하여 처형하자 노부부의 상심은 매우컸다. 이에 남편은 쪽박산 위로 올라가 아이 생각을 하며 한숨을 쉬자 산의 모양이 그 한숨소리에 줄어들어 쪽박처럼 작아졌고 부인은 한강으로 달려가 투신, 목숨을 스스로 끊었다. 관헌과 싸우면서 아기장사가 던진 바위가 바로 박힌바위이다.

 

 

서교동 西橋洞 (Seogyo-dong)

서교동의 동명은 서쪽 잔다리를 줄여서 부른 데서 유래된다. 서교동의 명칭이 유래되었던 아랫잔다리 곧 서세교 는 지금의 서교동사무소 일대를 말하는데 한강으로 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작은 다리가 있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곧 작은 다리가 잔다리로, 이를 한자로 고친 것이 세교(細橋)가 되는데 동서 두군데에 있던 것중 서쪽의 잔다리에서 서교동이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도당꿀은 신촌전화국 근방인데 연희동에서 합정동에 이르는 개천이 복개되어 지금은 이면도로로 활용하고 있으나 옛날에는 이곳을 흐르는 개천의 물이 맑고 깨끗해서 사람들이 모여 빨래를 하거나 김장철에는 무우나 배추를 씻는 등 허드레물을 이용했기 때문에 특히 신촌전화국 근방의 개천가에 있는 큰 바위를 세답바위라 하였다. 빨래터 큰 바위라 하는데 웬만한 이불호청 한 장 정도는 너끈하게 널어 말릴 수 있는곳이 바로 이 세답바위였다.

 

동 네사람들, 특히 여자들의 사랑방역할을 하여 각종 정보가 교환되기도 했는데 서답바위라고도 불렀다. 이 지역에서는 세답바위에서 한번 거론된 사람은 두 번 다시 빨래터 출입은 물론 동네 출입조차 할 수 없어서 세답바위가 동네 부인들의 재판소 역할까지 했다고 한다.

 

일찌감치 투기바람이 불었던 서교동은 일제 때까지만 해도 한적하고 넓은 들판이어서 양화나루로 가는 길목이었다. 각종 채소밭이 펼쳐지던 구릉지대였는데 한말 선교사들이 양화나루를 건너 지금의 양화로를 거쳐 신촌~아현 일대로 하여 도성으로 들어오는 과정인데 계절의 변화를 먼저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대 한제국때 우리나라에 들어온 비숍(Bisop)여사는 이 길을 통해 도성으로 들어오면서 느낀점을 '길이라고는 하나 가마 두 대가 교행하여도 서로 부딪침이 없을 만큼 넓어서 평원같았다. 나중에 도성으로 들어간 후 조선의 길이 얼마나 좁은가를 깨달았지만 양화나루에서 얼마되지 않은 곳 잔다리라는데는 길보다 오히려 광장이라는 표현이 더욱 적합한 곳이었는데 이곳에서 만난 여인들은 더욱 인상적이다.

 

농촌일을 하면서도 흰색옷을 깨끗하게 손질해 입고 있어서 눈이 부실 정도였다. 들판 한가운데로 흐르는 물은 하늘빛과 같아서 온통 푸른 보석으로 박아놓은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라고 하여 조선에서의 입국소감이 서교동 때문에 무척 감명을 받은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느낌은 도성으로 가까이 갈수록 실망을 거듭한 쪽으로 옮겨진다. 곧 도성 안의 도로는 얕고 폭이 좁은데다가 오물과 하수시설의 미비로 질퍽거리기 일쑤라는 글을 함께 남겨 놓음으로서 상대적으로 서교동 일대의 깨끗한 느낌을 더욱 강하게 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아랫잔다리 안쪽 마을은 안말이라 하고 현 한빛은행 서교동지점 근방은 밤나무가 많이 자라는 곳이라 했으므로 밤동산이라고도 했는데 바로 이 밤동산이 시루처럼 생겼으므로 시루기봉·시리미 혹은 증산이라 하였다. 증산아래 동네를 증산마을이라고도 하였다.

 

증산마을에도 부군당 혹은 도당이라 부르던 마을 수호신을 제사지내던 곳이 있었는데 이 도당에서 사용하던 우물이 도당물 혹은 도당우물이었다. 바가지샘이라고도 부르던 도당우물은 부정탄 사람이 지나가면 금방 물빛이 탁해지므로 제사준비를 할 무렵에는 도당물 근처에 금줄을 치고 사람들의 근접을 막았다. 도당우물과 도당도 택지개발사업을 실시하면서 모두 없어졌다.

 

한편 1957년의 서교구획정리사업지구가 고시되면서 일대의 모습을 전혀 다르게 만들었으며 하루에도 수십대씩, 당시로는 보기 힘든 짚차가 왕래하였다. 하얀 먼지를 날리며 평원 한가운데를 달리는 이 짚차의 행렬이 바로 투기행렬이었다. 이 덕택에 서교동 일대는 마포지역에서도 가장 부유하고 복잡해진 곳으로 발전할 수가 있었다.

  

동교동(Donggyo-dong)

동교동의 동명은 동쪽잔다리 곧 윗잔다리를 줄여 부른데서 비롯된다. 동교동의 동명유래가 된 윗잔다리는 망원동 길 과 동교동길 사이의 복개도로 오른쪽에 있는 잔다리에서 비롯되었는데 이곳이 윗잔다리도 동세교리가 되기 때문이었다. 용산선 철길을 중심으로 좌우에 있는 120여가구가 윗잔다리로 된다. 와우산 기슭에서 이어져 내려오므로 동교동의 지형이 높아서 그 서쪽은 아랫잔다리, 동쪽을 윗잔다리가 된다.

 

동교동은 궁동이라 하여 연희궁과 가까운 곳에 있었으므로 서교동 지역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양화진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한 점은 서교동과 같다. 동교동은 1957년 서교택지조성사업에 의해 형성된 것이 현재의 지형인데 그 이전에 형성된 마을은 농촌의 전형적인 풍경이었다. 개발이후부터 중상층이 살고 있어서 마포구의 어느 지역보다도 비교적 주민 이동이 적은 편에 속하였다.

 

신촌전화국 근방에는 강성생 혹은 강성샘이라는 웅덩이가 있었다. 둘레 20평 정도의 수렁인데 사람이 빠지면 나올 수가 없는 갯펄처럼 된 곳인데 한강과 통했다는 설이 있다. 이는 지금 신촌전화국 뒷편의 복개도로의 하천이 한강까지 유입되고 그 하천의 물이 이 수렁과도 통했기 때문이라 한다.

 

옛 사람들은 아기의 태를 이곳에 버려야만 무병장수 할 수 있다 하여 도성안에 있는 사람들도 이곳까지 와서 태를 버렸는데 이 태가 썩는 악취가 대단해서 일제 때는 태를 버릴 경우 벌금 등 처벌을 한다는 팻말을 붙여 놓기도 하였다.

 

서교동 336-1번지에는 정자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도 수렁우물인데 한강물이 불어나면 이 우물의 수위도 올라가고 그 반대가 되면 우물수위도 낮아진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왜냐면 한강과 우물과의 직선거리도 상당할 뿐만 아니라 한강변 합정동과 이곳의 지질구조도 조금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신촌전화국 자리는 정종막웅덩이라 불렀다. 1920년대 마포형무소 건립을 위해 이곳의 흙을 퍼내 벽돌을 만들었으므로 생겨난 웅덩이었다. 웅덩이 바로 옆에는 죄수를 수용 감독하기 위한 죄수막이 있으므로 정종막이라 하였다. 한편 노고산동 56-88번지 앞의 냉정우물은 냉천이라고도 하는데 부스럼이 난 사람이 머리를 감은 후 동전을 우물 속에 던지면 부스럼이 낳는다는 속설을 갖고 있다.

 

부 스럼은 열이 많은 사람에게 발생하는 일종의 곰팡이균 번식작용인데 찬물로 감으면 열을 식혀주는 것이며 동전을 던진다는 것은 치료를 해준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라 하겠다. 동전의 성분이 물에 녹아 많은 무기질을 함유하므로 냉정우물의 효과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새동네 혹은 신촌이라 부르는 곳은 동교동 12통 및 13통 일대이다. 용산선을 처음 부설할 때 철도계획선에 살고 있던 주민을 집단 이주시킴으로써 생겨난 동네로 60여년 전만해도 120가구였다. 이때는 고씨 집촌성이라 할 만큼 고씨성을 가진 사람이 많이 살았으며 그외 황씨, 김씨, 송씨, 노씨, 장씨, 임씨, 오씨 등이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합정동 合井洞 (Hapjeong-dong)

합정동에는 조개우물이 있었다 하여 동명이 유래되었다. 합정동의 유래가 되는 조개우물은 지금의 절두산순교 박 물관이 세워진 근방인데 처형장이던 이곳에서 망나니들이 사형도구로 쓰는 칼을 갈고 물을 품기 위해서 팠던 우물이다. 우물바닥에 조개껍질이 많아서 조개우물로도 불렀는데 이 우물은 천주교인을 한참 탄압할 무렵 이곳에서도 고문을 자행할 때 사용되었다. 천주교인의 물고문용 우물이라 할 수 있는데 강변도로의 건설로 없어졌다.

 

합정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곳은 서울외인묘지공원과 양화대교 진입 인터체인지 및 한강시민공원과 절두산순교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양화대교가 놓여진 곳은 조선시대 서울을 출입하던 나루터인데 동국여지비고2 산천조에 의하면 "양화도는 서강나루에 있는데 처음에는 나루지기인 도승을 두었으나 후에 별장을 두었다"고 하였고 관방조에는 "양화진은 1754년에 설치한 것으로 어영청 소속으로 별장이 있고 아장이 200명이었다"고 되어 있다.

 

그 외 각종 문헌에도 양화나루에는 나루지기가 있으며 방어를 위한 진()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곧 고려 이래로 양천·강화로 가려면 반드시 이곳 양화나루를 건너야 했으므로 영조 이후에는 송파진·한강진과 함께 서울 3진으로 요충지였다. 잠두봉 서쪽의 양화대교 동쪽지점인 양화나루를 큰나루라 하였으며 맞은편은 안양천이 유입되어 합류되는 지점을 연결하였다. 이 나루는 바다와 통해 있으므로 경상·전라·충청·경기도의 공세와 미곡을 서강의 광흥창까지 운반하는 조운(漕運)전용항구였다.

 

조선초에는 용산강을 한강 으뜸의 항구로 쳤으나 수위가 낮아지면서 하류지역으로 옮겨지게 되었는데 1591년의 기록이나 1636년의 기록에서도 수위가 얕아져 양화나루 이상은 배가 다닐 수 없다고 하였다.

 

한편 양화나루 근방은 경치가 매우 뛰어난 곳이었다. 절두산성당이라 부르는 곳은 마치 누에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어서 잠두봉이라는 표현을 하고 그곳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정경은 그림과도 같았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擇里志)에 의하면 "용산서쪽에 마포·토정·농암 등의 강마을이 있어 모두 서해와 통하므로 8도의 배가 모여 들게 되어서 성내외 공후 귀족들이 모두 이곳에 정자를 짓고 놀이와 잔치장소로 삼았다"고 하였다.

 

한 강진에서 시작된 뱃놀이의 마지막 지점이 되는 잠두봉 아래의 양화나루에 대해서 명나라 사신 예겸이 "도성에서 서남으로 15리쯤 가면 나루터가 있어 양화도라 하는데 대개 각 도에서 오는 군량이 와서 닿는 곳이다. 나루 어구에 푸른 돌이 수리나 되는 듯한 넓은 산이 물가에 벽처럼 섰는데 푸르고 늙은 소나무가 많아서 마치 높은 관을 쓰고 칼을 든 이가 섞여 서서 서로 마주한 것 같다.

 

여기에 올라가면 한없이 조망이 좋았기에 걸어서 돌깔린 산마루에 올라가 소나무를 의지하여 모두 나무를 엮어 만든 난간에 기대고 바라보니 멀리 가까이 있는 돛단배들이 그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언덕 저 멀리에 기름진 논밭이 많고 촌가가 총총히 있다"는 표현을 한 것을 보아 이곳의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경치의 잠두봉 아래 모래밭은 조선 후기에 가면 일대변혁이 이루어지게 된다. 곧 앞서도 설명한 바 있듯이 천주교인의 대량 처형장소로 바뀌어졌던 것으로 후일 절두산천주교성지라 불리는 곳이다. 합정동 96-1번지에 세워진 천주교 절두산순교박물관 자리에서는 병인박해 때 프랑스신부 9명과 남종삼바오르 등이 처형당하였다.

 

많 은 사람들이 처형당하면서부터 잠두봉은 절두산이라는 명칭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강뚝에서는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김옥균의 시체가 효수된 일도 있었다. 합정동 144번지에는 외국인묘지공원가 있다. 양화진 진대(鎭臺)의 뒷동산에 해당되는데 1885년 임금으로부터 땅을 하사받아 다음해부터 묘를 쓰기 시작해서 약 500기의 묘가 있다.

 

입구 가까이 있는 것은 대한매일신보사장 배설의 묘와 우리나라 종교계·교육계에 공이 많은 언더우드부부와 그의 친묘, 이화여대에 공이 많은 아펜셀러·앨리스·베백카를 비롯해서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설립자 더글라스··에비슨의 묘도 있다. 또한 1991417일에는 대한결핵협회장으로 한국결핵사업의 선구자 셔우드 홀이 그의 유언에 따라 이곳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

 

망원정지망원정은1424년 효령대군이 지은 별장으로 1925년 큰 홍수로 유실되었다가 1989년 복원된 정자로 예전에는 '희우정'으로 불리웠다.(서울시문화재 기념물 제9)

 

잠두봉 절두산 성지조선후기 병인박해 때 프랑스 신부 등과 많은 천주교신자가 처형당한 곳으로 순교 기념관이 있다.(구가지정 문화재 제399)

 

 

망원동 望遠洞 (Mangwon-dong)

망원동의 동명은 이곳에 망원정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되었다. 망원정의 동명이 유래된 망원정은 망원동 137, 207-1 번지 일대인 양화나루 서쪽에 있었는데 태종의 아들이며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별장인데 1424년에 건립되었다. 1425년 왕이 농사형편을 살피러 이곳에 거동했다가 새 정자에 올랐을 때 때마침 비가 내려 온 들판을 흡족하게 적시므로 왕이 매우 기뻐하며 정자의 이름을 희우정(熹雨亭)이라 하였다.

 

효령대군은 왕의 이같은 행차와 명명에 깊이 감사하며 당시 서도(書道)로 이름높던 부제학 신색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고 시문의 대가인 춘정 변계량(卞季良)에게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 이때 지은 변계량의 기문은 "정자의 제도가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은데 백악산이 뒤에서 굽어보고 한강이 앞에서 흐르며 서남쪽의 여러 산은 넓고 멀어서 아득하여 구름과 하늘과 연기가 물밖으로 저 멀리 보일 듯 말 듯 한다. 굽어보면 고기·새우도 역력하게 셀 수 있는데 바람실은 돛과 모래위의 새들은 바로 정자 아래서 오가며 천여그루의 소나무는 푸르고 울창하여 술상위에서 아른거린다."하였다.

 

희우정은 강변과 가깝게 있는 누각 형식의 건물로 둘레에 난간이 둘러져 있으며 주위에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울창했는데 왕이 이곳에 기거했던 1445년에는 지중추사 이장(李藏)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주화질여포를 발사하여 실전을 방불케하는 훈련을 하여 세자인 문종과 대군 등이 희우정 서쪽 봉우리에 올라 관람하였다.

 

1484 년에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소유로 바뀌게 되자 월산대군은 정자를 보수하여 "먼 경치도 잘 볼 수 있다"는 뜻으로 망원정(望遠亭)으로 하였다. 성종은 세종때의 예에 따라 매년 봄 가을 이곳에 납시어 농사의 정도를 살피고 수전(水戰)연습을 관람하였으며 문인명사들과 시주(試酒)를 즐기기도 하였으나 형인 월산대군이 죽은 후에는 정자를 찾지 않았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1506년 연산군은 창의문 밖 탕춘대에 호화찬란한 탕춘정(蕩春亭)을 짓게 하고 양화도에서 탕춘대성이 있는 장의동 어구에 이르는 거리에 수로를 파서 한강물을 끌어 들여 탕춘정 앞으로 흐르게 할 것을 명하였다. 그런가하면 동년 7월에는 한강가 망원정을 크게 확장할 것을 명하였는데 초가지붕에 건물은 천여명이 앉을 만큼 크게 짓되 정자위에서 바라다보이는 어떠한 건물도 모두 철거하도록 하였다. 정자의 이름도 수려정(秀麗亭)으로 고치게 하였다.

 

그 러나 동년 9월 중종반정으로 모든 공사가 중지되고 철거됨에 따라 망원정을 본래의 경치좋은 모습으로 명사들이 청유(淸遊)를 즐기는 명소로 바뀌었다. 경기가 좋은 이곳은 주로 명나라 사신 접대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잠두(蠶頭)와도 가까워 잠두로 가는 길에 이곳으로 들리는 사람도 많았다. 복원되기 전 희우정의 그림은 작가가 알려지지 않았는데 강안 절벽 암반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정면 3, 측면 1칸 규모의 건물이다. 마루 둘레는 난간을 돌렸고 팔작지붕인데 1925년 을축년 홍수로 소실된 것을 1991년에 복원하였다.

 

473, 476번지 일대는 한강으로부터 올라온 가물치,잉어,메기 등이 많아 밤세워 고기를 잡았던 방울내였는데 참새가 많아 밤새도록 호롱불을 켜고 참새를 잡았다고 하나 망원동의 대부분지역이 1960년이후 택지개발로 인해 구획정리가 되면서 공동주택이 형성된 곳이 많다. 강변도로와 동교로 사이에는 공장지구가 형성되어 있으나 그외의 지역은 주택지구로 형성되어 있는데 특히 망원동 450-3번지의 망원제1유수지는 홍수때 한강물이 역류하여 넘치면서 주변일대가 침수된 사건이 있었다.

 

 

연남동 延南洞 (Yeonnam-dong)

연남동의 동명유래는 연희방 남쪽에 위치한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연남동은 1975101일 서울시조례 제 979호에 따라 연희동 일부를 떼어 연남동으로 하면서 생겨난 동인데 마포지역에서는 가장 역사가 짧다. 연희동에 속했던 연남동은 1867년에 만든 육전조례에 처음으로 한성부 북부 연희방이라는 명칭이 나타나고 1894년 갑오개혁 때에는 한성부 서서 연희방 성외 정자동계 정자동 염동1계 염동, 음월리계 음월리로 되어 있었다.

 

1910101일 한성부가 경성부로 바뀌면서 경기도 관할지역으로 격하되고 1911411일에 경기도령 제3호로 도성안을 536, 성밖을 8면제로 할 때 경성부 연희면에 속했고 191441일 경기도고시 제7호로 고양군 연희면 연희리가 되었다. 19364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로 경성부 구역이 대폭 확장됨에 따라 경성부 연희면이 되었다.

 

1940 71일 서부출장소의 설치로 이의 관할이 되었다가 1943610일 구제도의 실시에 따라 서대문구 연희정이 되었다. 1946101일 서대문구 연희동으로 바뀌었다. 197371일 대통령령 제6548호로 서대문구 성산동과 연희동 일부가 마포구로 편입되었으며 1975101일 대통령령 제7816호로 연희동 각 일부를 마포구로 편입함과 동시에 서울시조례 제797호로 편입된 연희동 일부지역을 연남동으로 개칭하였다.

 

197791일 서울시조례 제1185호로 동교동 일부가 연남동에 편입되면서 0.65의 면적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당초에 연남동을 이루고 있는 지역은 연희동 지역중 서남쪽 접경으로부터 경의선까지 도로 중심 서북쪽의 도로와 철도와의 교차점으로부터 은평구 수색동에 이르는 서부지역이 되는데 성산대로의 개통으로 연희동 남측이 연남동으로 편입된 오늘날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연남동은 1970년대에 접어든 이후에 정비된 지역이 많으므로 비교적 산뜻하고 세련된 고급주택들로 이루어져 있다. 도시계획이 잘되어 있고 주택과 주택사이의 도로도 넓어서 서울시내에서도 대표적인 주거지역으로 형성되어 있다. 연남동에서는 경성중·고등학교·경성여고·경성유치원으로 구성된 경성학원이 있으며 241-60~255-20번지 사이의 500m의 가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연희로와 평행하는 복개된 개천을 따라 경의선 철로 아래를 통과하는 가로의 연변에는 서울에서도 유명한 순대국집이 있는데 택시기사들이 주로 이용하며 정보교환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성산동 城山洞 (Seongsan-dong)

성산동의 동명은 성산이 있었으므로 유래된다. 성산은 한강대안 강서구 공암에서 봉화를 받아들이는 곳으로 겸재 정 선이 양천대감으로 있을 때 이곳 성산을 소재로 하여 그림을 그린 것이 여러점 있다. 성산동을 이루는 풀무골은 야동(冶洞)이라고도 부르는데 시영아파트~불광천 건너 상암동으로 가는 길목이다. 조선 효종때 김자점이 역모를 일으키기 위해 군사를 동원할 자금을 구하느라고 이 일대에 위조엽전과 병기제작하던 사주전이 있었는데 엽전을 녹이기 위해 풀무간을 만들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풀무골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신촌 농협지점 근방은 바로 이 풀무간에서 병기와 엽전주조하는 것을 보호 감시하기 위해 도성쪽을 향해 망을 보던 장소였다. 이 망고개에서 망을 보고 있다가 도성쪽에서 사람이 나오면 마포구청 방면의 소식고개를 향해 달려갔는데 망고개·소식고개·풀무골은 김자점이 처형당하면서 주변 일대에 대한 수색작전을 전개해서 많은 사람이 살육당하기도 했다.

 

1950년대 초기만 해도 이 일대가 논밭으로 되어 있던 까닭에 녹슨 옛날 엽전을 적잖이 발견할 수 있었다. 성산2교를 지나 한양성심병원 뒤 밭과 주택이 있는 곳은 묘꼴 혹은 미꿀이라 하는데 옛날에는 골짜기가 깊어서 도둑이 많고 무서워서 인가가 살지 않았다고 하는 곳이다. 성산2동사무소 일대는 무리울 혹은 무이동(武夷洞)이라 하는 곳이다. 무리를 지지 않으면 행동하기가 힘들 만큼 으슥한 곳이어서 언제나 떼지어 지나는 곳이라는 뜻이다. 또 성산노인정에서 동사무소쪽으로 올라가는 고개는 동노고개·동턱고개라 하는데 숨이 턱에 찰 만큼 가파르다 해서 동턱고개라 하였다.

 

소 나무가 우거졌는데 정월 대보름날에는 이곳의 서낭당에서 서낭제도 지냈다. 소나무가 서낭이었는데 이곳 서낭당은 길을 가던 나그네면 누구나 무사한 여행이 되어 달라고 비는 뜻에서 서낭당에 빌고 지났다. 일대에 아파트 건설공사를 하면서 서낭당도 없어졌는데 흔적을 알려주는 소나무만 몇그루 남아 있다.

 

성산의 원 마을 끝에는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해서 새말이라고도 불렀는데 무이동 바로너머 마을이 되기도 한다. 후동은 공동묘지 뒷동네라고도 부르는데 너머골, 뒷골 등으로 부르며 무이동 너머에 있었다. 이러한 성산동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가 홍제천의 직강공사를 시작하면서부터인데 굽어있던 원래의 홍제천을 외곽으로 꺽어내면서 주변의 경지정리로 들어갔고 이것은 광복후 성산지구 택지조성으로 바뀌어짐에 따라 현재의 지형 모양으로 바뀌었다.

 

풀무골월드컵 경기장 부근 성산동 499번지 일대엔 옛부터 농기구 등을 만들던 풀무골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조선 효종때 김자점이 이곳에서 위조 엽전과 사주전을 만들기도 했다.

 

 

상암동 上岩洞 (Sangam-dong)

상암동의 동명은 수상리와 휴암리에서 각각 한 글자씩 합쳐서 만들어졌다. 상암동은 191441일 경성부 연희 면의 수상리·구리동·휴암과 고양군 하도면 덕은리 일부(난지도)를 합하여 고양군 연희면 상암리로 하였다. 1949813일 대통령령 제159호로 서울시로 편입되고 이튿날 대통령령 제160호로 은평출장소 상임리로 되었다.

 

1950 315일 서울시조례 제10호로 상암동이 되었으며 1955418일 서울시조례 제66호로 성산동·상암동·중동을 병합한 성암동이 되었다. 1975101일 대통령령 제7816호에 따라 서대문구 상암동이 마포구로 편입되면서 동사무소가 설치되었다. 상암동은 행정동과 법정동이 일치하는 동이다. 상암동을 이루고 있는 구석말은 귀리(歸里)의 구석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인데 귀이깨라고도 한다. 모로돌아 한강가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인데 산17번지와 83,84번지 일대이다.

 

물치는 물위치 수색(水色수상리(水上里수생리(水生里)라 하는데 수색동 앞 넓은 들 건너 마을을 말하며 장마때면 한강물이 이곳 앞까지 오므로 붙여진 명칭인데 154~163일대이다. 부엉바위골은 휴암동이라 하는데 이곳에 휴암이 있어서 명칭이 유래되었으며 산28~32번지 일대이다. 원래는 휴암이라 했는데 명칭이 바뀌었다. 이곳 부엉바위에서는 부엉이가 울면 밤이 된다는 뜻이고 구석말로 가는 걸음도 멈추었다고 한다.

 

압도(鴨島중초도(中草島)는 부엉바위 뒤로 있는 산이 매봉산인데 밤이되면 매산의 매가 잠들고 낮에는 부엉이가 잠들었다고 한다. 압도·중초도는 난지도(蘭芝島)라고 하는데 글자 그대로 난초와 지초로 어우러진 경치 아름다운 곳이었다. 1977년 이곳을 서울시 쓰레기처리장으로 만들기 전만 해도 갈대숲이 아름다워 청춘남녀들이 데이트를 하거나 애정영화의 셋트장소로 이용하던 곳이었다.

 

편 마암으로 구성된 난지도는 한강하류 삼각주로서 많은 동식물이 서식하던 곳이었는데 8m정도의 자연제방이 섬의 북단에서 동서방향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 제방을 넘으면 다시 자연제방이 되기 때문에 섬 남단의 절벽과 사이에 자연스러운 모양의 제방으로 이루어진 천연의 자연장소였으므로 조선말까지는 이곳이 뱃놀이의 정류소로도 이용되었다.

 

하중도이므로 충적평야(沖積平野)가 형성되어 전답으로 이용되어 오던 이곳이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19771월부터 19억원의 공사비와 연 70만명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7월까지 방수제방축조에 성공함에 따라 홍수피해를 줄이게 되었는데 이 지역의 매립을 위해서 서울시내 쓰레기를 활용하기로 하였다.

 

난지도상암동은 옛부터 난꽃과 영지의 자생지인 난지도가 유명했다. 옛 선조들은 나라의 정사가 잘 되는지를 알려면 이곳의 난꽃들을 보면 알 수 있다는 하였으며 택리지에서 좋은 풍수조건을 가진 땅이라고 소문이 났다. 1977년 서울시 쓰레기처리장으로 만들기 전만 해도 이곳은 갈대숲과 샛강이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지역이었다. 지금은 월드컵주경기장 건설 및 생태공원 조성 등 새천년 밀레니엄 도시의 꿈으로 새롭게 도약하는 지역이다.

 

 

신공덕동(Singongdeok-dong)

신공덕동은 이곳의 옛이름이 신공덕리이기 때문에 유래되었다. 신공덕동을 이루고 있는 단위부락으로는 말등테 · 신촌·호박밭·홍예동·감나무밭·복사나무동산을 들 수 있다. 신촌은 새로 생긴마을이라는 뜻이다. 신공덕동 일대가 조선 말까지만 해도 야산으로서 옛지명에서 보듯 갖가지 과실나무가 심어져 있거나 채소재배지였으므로 사람이 사는 지역은 아니었다.

 

이러한 자연환경을 가진 곳에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을미사변이 일어날 무렵이어서 일본군인이 횡행하는 도성 안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싫어 전날의 판서벼슬을 지낸 김대감이 일가식솔을 이끌고 낙향하여 농부가 되려는 생각으로 마포나루까지 갔다가 되돌아와서 정착한 곳이 이일대이다. 이때부터 부락이 형성되었으므로 신촌 혹은 새말이라는 명칭이 붙게된 것이다.

 

한편 신덕교회가 있는 곳은 대한제국 무렵까지 부군당으로 사용되었는데 당시 배경을 살펴보면 명성황후 민씨가 임오군란으로 장호원의 민응식의 집에까지 피난갔다가 그곳에서 만난 무녀 이씨가 환궁일자를 정확하게 맞히면서 그녀를 진령군으로 봉하고 미신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면서 민간에서는 각지에 당집이 세워지고 민비는 내탕금으로 부군당제사때마다 떡과 술을 보냈다.

 

한편 지금은 백범로로 편입된 92번지일대에 홍문(紅門)이 서있다 해서 홍문집터라고 하였는데 홍문은 효부·효자·열녀 등을 위해 세우고 후세사람들에게는 이 일을 본 받으라는 뜻에서 세워진 것이다. 홍살문이라고도 하는데 이 문이 세워지면 가문의 영광은 물론 마을 전체의 영광으로 누렸다. 그런데 홍문은 효성에 관계있는 사람을 위해 세운 것이 아니고 효창원에 있는 홍살문을 뜻하는 것이므로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

 

공덕동의 서울지방법원서부지원자리는 마포형무소가 있었으며 그 인근에 있는 만리동길의 동서양쪽은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복역수들의 작업장이었다. 마포형무소를 만들 때 중국인 노동자 쿨리를 대거 채용하여 공사장으로 투입했는데 이때 쿨리들의 집단 숙식장소가 지금의 공덕시장부근이다. 이들 쿨리가 형무소 건축노동시간 이외에는 자신들의 생계유지를 위해 근처의 야산을 개간하여 채소밭을 일구면서 식수와 관개용수로 개간한 것이 호인(胡人)의 우물이다.

 

경원선 공덕리 역이 있던 곳은 형무소 연와공장이었는데 지금의 공덕동 로타리에 해당된다. 이 공장에서는 3·1운동 이후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많은 항일 국구민족운동가들의 작업장소였는데 특별히 사상범으로 분류된 항일운동가들은 이곳의 작업장에 배치되지 않았고 회유가 가능하다고 판정된 사람들만을 배치했으므로 이른 시간 이들의 무리가 헌병대와 간수들의 감시를 받으며 작업장으로 향할 때면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분노에 사로 잡히기도 하였다

 

서강동 西江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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