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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밑 첫마을, 도봉구 道峰區

草霧 2013. 11. 27. 18:26

 

 

 

 

도봉산 밑 첫마을

 

도봉구 道峰區

   

 

Dobong-gu (Daofeng)

 

 

 

서울특별시의 동북부에 있는 구.

명칭은 이 지역의 명산인 도봉산(道峰山)에서 이름을 따왔다. 도봉산의 이름의 유래는 두가지이다.

 

조선 왕조를 여는 길()을 닦은 봉우리()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학문을 연마하고자 도()를 닦았던 봉우리()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원래 경기도 양주군 해등촌면에 속했으며, 1924년 노원면과 병합되어 노해면이 되었다.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어 성북구 관할하에 있다가 1973년 성북구에서 분리되어 도봉구가 되었다.

 

1988년에 노원구가 분구되었으며,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행정구역 개편으로 방학동·도봉동·창동·쌍문동 일부를 제외한 수유동·미아동·번동·우이동이 강북구로 분리·신설되었다. 시의 북동부에 위치한 구. 구청 소재지는 창동이다.

 

조선시대 경기도 양주군 해등촌면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노원면을 합친 노해면

1963년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편입

1973년 숭인출장소와 노해출장소의 관할지역을 통합하여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분구 신설

1988년 노원구가 분리

 

 

고려 태조는 이 내소군을 견주라 개칭하고 신라 때의 한양군을 양주라 고쳐 양주에 주지사를 두어 견주를 관할케 하였고, 현종 9(1081)에는 견주를 양주에 편입하였다.

 

조선 태조 3(1394)에는 양주고을 범위 내에서 도읍한성부을 정하고 현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기타 양주 지역은 그대로 양주로 속하게 하였고, 2년 후인 1396년에는 한성부의 5부 방리명(坊里名)을 정하여 경계표석을 세웠는데 이 때 도봉구 일부 지역은 동부 숭신방(崇信坊)에 속하였다.

 

따라서, 도봉구의 일부 지역은 조선시대부터 한성부의 성외 지역이 되어왔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영조 때 각 도읍지(道邑誌)를 모아 편찬한여지도서를 보면 도봉구 지역인 노원면과 해등촌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종 32(1895)에는 한성부 소속의 양주군은 칙령에 의거 13도제에 따라 경기도의 3등군이 된다. 이후 일제 강점기인 1912년경 노원면과 해등촌면은 양주군에 계속 속해 있다가 2년 후인 1914년 노원면과 해등촌면이 노원면으로 통합하게 되는데 창동, 도봉, 방학, 쌍문리 등의 우리 구 전체 지명이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

 

도봉구는 동쪽으로 노원구, 서쪽으로 강북구, 북쪽으로 의정부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서울 동북부의 관문으로 면적은 20.842로 이중 북한산 국립공원을 비롯한 공원면적이 구면적의 52.5%에 달한다. 도봉구의 서남부로 흐르는 우이천은 강북구와 경계를 이루어 흐르고, 북부로는 의정부시와 경계를 이루는 도봉산이, 동부는 한강상류 지류인 중랑천이 흐르고 있다.

 

도봉구의 상징인 도봉산은 태백산맥에서 뻗어 내려온 광주산맥의 한 봉우리로서 예로부터 서울의 진산으로 사랑받아 왔으며 산 전체가 웅장한 바위로 이루어져 드높은 화강암 벽이 흰 빛을 뽐내며 공중에 솟아 변함없는 지조와 의리의 상징으로 서울을 굽어보고 있다.

    

도봉산은 최고봉인 자운봉(紫雲峰)이 망월사 뒤편에 위치하고 있고, 천축사 뒤편에 위치한 만장봉(萬丈峰), 바위 봉우리가 기둥처럼 솟아있는 주봉(柱峰), 그밖에 선인봉(仙人峰), 오봉(五峰) 등이 연이어 있어, 승천하는 용의 기세 같기도 하고, 혹은 거북 모양 같기도 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불러일으키는 명산으로 천만 서울 시민이 즐겨 찾는 휴식처이다. 197371일 성북구에서 분리 신설될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명산이자 우리 지역의 상징인 도봉산 이름을 따서 도봉구라고 하였다.

 

도봉구는 서울시청으로부터 약12동북부에 구의 중심인 방학동이 위치하며, 구 전체면적은 20.84로 서울특별시 면적의 3.4%를 차지하고 있다. 도봉구 면적 중에서 가장 많이 차지하는 부분은 북한산국립공원을 비롯한 공원으로, 구면적의 48.2%10.05에 달하고 있다. 서울시의 최북단에 위치한 도봉구는 동쪽으로 노원구 상계동과, 서쪽은 강북구 수유동·우이동과, 남쪽은 노원구 월계동 및 강북구 번동과 북쪽은 의정부시 장암동 등과 접하고 있는 서울 동북부의 관문 지역이다.

   

 

 

 

 

 

쌍문동 효자이야기

지금의 쌍문동에 250여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효자, 효부이야기가 있다. 남궁 지(南宮 遲)는 어려서부터 부모 섬기기를 남과 달리 정성을 다하였고 부친의 병환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드리고 부친의 대변을 혀에 대고 병세를 살폈다고 전한다. 그리고 남궁 지의 처() 하동 정씨는 출가할 때 의장과 경대를 하인이 돌아가는 길에 친정으로 되돌려 보내고 말하기를"나는 이미 출가외인이 되었으니 어찌 친정의 물건을 탐내어 부모공양에 손색을 입게 하리요"라고 하였다. 또 시댁에서도 효도와 우애를 갖추어 지극 정성으로 시아버지가 2년간 병환으로 누워 계실 때 정()씨는 해산한 아이를 남에게 맡기고 항시 시아버님 곁에서 시중하였다고 한다. 아들 남궁 조는 암회리(현 방학동)에 살면서 모친의 병환이 위독하자 옷차림을 한 번도 풀지 않고 정성껏 약을 달여 드렸고 밤에는 북두칠성을 향하여 자신이 대신 죽게 해 달라고 축원하였으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드렸다고 한다. 남궁 지와 그의 처 하동 정씨 내외와 그의 아들 남궁 조의 행실이 조정에 알려져 효자문 쌍문(雙門)을 세우게 되었으며(1893년 교지) 현재 쌍문동(雙門洞)의 동명(洞名)은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방학동 하마비

도봉산 방학동에는 하마(下馬)()이 있다. 예전에 하마비(下馬碑)가 있었다 하여 생겨난 지명이다. 하마비는 대개 비석에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새겨 누구나 말에서 내리게 한 것이다. 왕을 비롯하여 훌륭한 어른과 관련이 있는 곳에 하마비를 세워 그 어른에 대해 예의를 지키는 것이다. 하마들 뒷산에 덕수이씨 묘가 많은데, 조선시대 3대 정승이 살았다고 한다. 세도가 상당하여 가족이나 일가 친척은 물론 그 집에서 부리는 남녀 하인들도 위세가 당당하였다. 이 때문에 이 집 앞에서는 누구나 가릴 것 없이 타고 있던 말에서 내리게 되었고, '하마(下馬)'라는 지명이 생긴 것이다. 방학동에는 또 하나의 하마들 이야기가 있는데, 폭군 연산군 묘에 있었던 하마비이다. 비록 왕에서 쫓겨났으나, 왕을 지냈으므로 하마비가 세워졌다고 전한다. 연산군 묘가 있던 앞들을 역시 하마평(下馬坪)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방학동 용바위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천주교 공동묘지 자리는 이전에 용바위가 있었다. 펑퍼짐한 큰 바위로 한 가운데에 1m 정도가 파여 있었는 데, "여기서 용이 올라갔다.“, ”용이 살다가 하늘로 등천할 때를 기다리는데 기회가 오지 않아서 걱정을 하고 또 걱정을 하였다."라는 말을 마을 어른들이 하면 아이들은 여기는 용이 살만한 큰 물이 없는데, 어떻게 살았을까?”라고 아주 궁금하게 여기곤 했었다. 그러면 어른들은 "용은 꼭 물에만 산 것이 아니라 산에서도 살았다.“, ”풍수지리로 볼 때 산등성을 용이라고 한다.“, ”용이 꿈틀꿈틀 하면서 아래로 내려온 것 같아서 붙인 이름이다." 라고도 하였으며, “용이 육지에서 올라갈 때는 큰비가 오는 날이다.”, “구름이 새까맣게 낮게 몰려들고 비가 오면 숨어 있던 용이 그 구름 속으로 쑥 올라간다.”, “올라가면서 꼬리로 바위를 치고 올라갔기 때문에 용바위가 생긴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천주교 공동묘지가 조성되면서 이 용바위를 없애 버렸다고 한다.

 

 

 

구의 동쪽은 노원구, 서쪽과 남쪽은 강북구, 북쪽은 양주시·의정부와 접해 있다. 지형적으로 서부 산지와 중앙 저지로 구분되는데. 서부 산지는 백두대간 철령 부근에서 갈라져 서남쪽으로 달리는 한북정맥이며, 서울의 진산인 삼각산과 도봉산 사이의 준령이 뻗어있다. 중앙 저지는 우이천과 도봉천이 흘러 중랑천으로 합류된다. 남쪽은 서울의 시가지에 연속되는 주택지구이고 북쪽은 산림지로 되어 있다.

 

도봉구의 지형은 서남부는 강북구와 경계를 이루는 우이천이 흐르고, 북부는 의정부시와 경계를 이루는 도봉산이, 동부는 낮은 지대로 함경남도 원산의 영흥만에서 시작하여 서울을 거쳐 서해안까지 뻗어 내린 좁고 긴 골짜기인 추가령 지구대 남단에 해당되는데, 이 골짜기를 따라 한강상류 지류인 중랑천이 흐르고 있다. 이 동부 저지대를 사이에 두고 노원구쪽에 불암산(508m), 수락산(637.7m)이 있다. 도봉구의 상징인 도봉산은 서울의 진산이라 불리는 북한산과 연접해 있으며, 최고봉인 자운봉(739.5m)을 비롯하여 만장봉(718m), 선인봉(708m), 오봉(625m) 등이 깎아지른 듯 솟아 있고, 그 사이로 계곡의 맑은 물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도봉산

연산군묘와 은행나무

도봉서원과 각석군

서울 창포원

무수골

옹기민속박물관

방학동도깨비시장

국립공원생태탐방연수원

중랑천

도봉산 생태공원

발바닥공원

방학사계광장

초안산 근린공원

쌍문근린공원

초안산 생태공원

원당샘공원

도봉 역사문화 길

도봉서원

김수영 문학관 및 문화의 거리

함석헌 기념관

전형필 가옥 보수 및 공원화

창동복합공연장

둘리뮤지엄

    

 

시의 북서부에는 도봉산(717m)·우이암(542m) 등이 솟아 있으며 남동쪽으로 가면서 지세가 점차 낮아진다. 구의 동서쪽 경계를 따라 한천과 우이천이 흘러 중랑천에 유입한다. 과거에는 중랑천 연안의 평야를 중심으로 벼농사가 잘되고 채소·화훼·과수재배와 양계·양돈·육우사육 등이 활발했으나, 도시화에 따라 거의 아파트단지로 변하였다. 노동력이 풍부해 잡화·의류·가발 등과 하청에 의한 기계·전자부품 생산 등의 가내공업이 횔발하다. 또 도시화 이전에 공업이 발달했던 창·도봉동 일대는 섬유·화학공업의 비중이 크다. 시가지는 방학동·창동·쌍문동 일대에 발달했다. 또한 도봉동과 방학동 일대에는 식품·제지·의류·제약업체들이 입지하고 있으며 쌍문·창동·방학 등의 지하철역 일대는 상업과 서비스업이 발달했다. 남북으로 뻗은 도봉로는 구의 남북으로 통하는 중심 길이며, 우이동과 상계동으로 진입하는 방학로(放鶴路)와 수유리와 월계동을 잇는 한천로(漢川路)가 개통되어 이 지역의 교통 불편을 덜어 주고 있다.

 

次道峯書院韻(차도봉서원운)

望道峯作(망도봉작)

秋日(추일)

道峯霽雪(도봉 제설)

祝石嶺望道峯(축석령망도봉)

萬丈峰(만장봉)

入道峰(입도봉)

道峯晴雲(도봉청운)

題道峯書院(제도봉서원)

도봉(道峰) 박두진

도봉 (道峯) 이병기

촌은 유희경과 매창의 시

도봉서원 춘·추향제

도봉산축제

도봉구 등()축제

 

 

문화유적은 도봉동에 천축사(天竺寺도봉서원(道峰書院)이 있으며 도봉계곡에는 빼어난 암각글씨가 있고, 방학동에는 연산군의 묘소와 양효안공신도비부묘소가 있다.

 

서울 연산군묘 - 사적 제362

서울초안산분묘군

양효공안맹담과정의공주묘역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0

전주이씨영해군파묘역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06

만월암석불좌상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1

충정공 목서흠 묘역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7

도봉서원과 각석군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8

서울 방학동 전형필 가옥 - 등록문화재 제521

천축사 목조석가삼존불

천축사비로자나삼신불도

천축사비로자나삼신괘불도

한일섭제 박종선류 아쟁산조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

도봉사 치성광여래삼존도

율창 유의호 송서

회산군 이염 묘

이집묘

염상섭 묘

이무영 묘

방학동 바둑판 돌

명월동문(明月洞門) 바위글씨

계수석(谿水石연월암삼폭(延月巖三瀑와폭(臥瀑) 바위글씨군

성비 묘 (임영대군파 오산군 묘역 내)

조대비별장터(조선조 익종의 비)

양주목사 선정비(善政碑)

원당샘

창동리 석조이정표

누원점(樓院店)

한치례(韓致禮)

방학동 은행나무

정암(靜庵) 조광조

우암(尤庵) 송시열

안맹담(安孟聃, 1415-1462)

정의공주(貞懿公主, ? ~ 1477)

이인(李仁, 1465 ~ 1507)

남언경(南彦經, ?-?)

유희경(劉希慶, 1545~1636)

김병로

송진우

정인보

함석헌

계훈제

홍명희

전형필

김수영

전태일

문예봉

 

 

 

 

 

 

코스1: 연산군묘와 은행나무 길

연산군과 정의공주 묘, 방학동 은행나무와 원당샘 등 도봉구의 대표적 문화유산이 모여있는 곳이다. 또한 바둑판돌과 두꺼비 모양의 바위가 있으며, 문학가 염상섭과 이무영의 묘와 이집, 이합 등 덕수이씨 묘역이 있는 역사문화의 산교육장이다.

 

 

 

 

방학동 은행나무회산군 묘역연산군묘명월동문(조선시대 바위글씨)이집묘바둑판돌염상섭 묘이무영 묘이합 묘두꺼비 바위연월암 삼폭, 와폭, 계수석(조선시대 바위글씨)한치례 묘정의공주 묘목서흠 묘성비 묘(태조 이성계의 후궁)

 

코스2: 무수골 왕족 묘역 길

한글창제에 숨은 협력자 세종의 둘째딸 정의공주와 남편 안맹담의 묘와 세종의 아들인 영해군 이담의 후손의 묘역과 조선 태조 이성계의 딸인 의령옹주와 부마 계천위 이등의 묘 등 조선 왕족들의 묘가 많이 있다.

 

 

 

 

 

정의공주묘 앞 출발귀록계산, 와운폭(바위글씨)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영해군 묘-영춘군 묘-완천군 묘)금동지묘의령옹주와 부마 계천위 이등의 묘

 

코스3: 원통사 길

서울에서 가장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무수골을 통해서 자현암, 원통사를 거쳐 방학동 능선을 통해 풍양조씨 사당옆에 있는 간송 전형필 묘로 내려오는 이 길은 서울시가 가을에 걷고 싶은 길로 선정 하였다.

 

 

 

 

도봉역 출발무수골 주말농장세월교자현암원통사방학동 사지간송 전형필 묘와 사당(풍양조씨 사당 옆)

 

코스4: 도봉서원과 바위글씨 길

서울내 유일한 서원인 도봉서원과 서원을 출입한 조선 선비가 남긴 바위글씨(각석군)를 통해 아름다운 도봉산과 계곡 그리고 선현의 학문과 사상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역사문화 생태 탐방코스이다.

 

 

 

 

도봉산역탐방지원센터도봉동문(바위글씨)가학루와 용주담, 필동암(바위글씨)제일동천(바위글씨), 연단굴, 만석대(바위글씨)무우대, 제월광풍(바위글씨)염락정파(바위글씨)고산앙지, 광풍제월(바위글씨)도봉서원북호동천(바위글씨)서광폭, 화락정(바위글씨)문사동(바위글씨)(문사동계곡)

 

코스5: 천년고찰 길

도봉산의 오랜 천년고찰과 불교문화가 남긴 문화유산인 만월암 석불좌상과 천축사 비로자나삼신불도, 비로자나삼신괘불도를 감상할 수 있는 산행 중심의 탐방코스이다.

 

 

 

 

도봉탐방 지원센터도봉대피소만월암(석불좌상)석굴암천축사도봉대피소서원교도봉사도봉탐방 지원센터

 

코스6: 도봉 옛 길

도봉구가 옛 양주에 속해 있을 때부터 있던 오랜 길로 옛날 원산으로 올라가던 경원대로가 바로 이 길이고, 함흥차사가 이 길로 올라가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던 길이기도 하다. 도봉의 옛 발자취를 상상을 하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쌍문역노해파출소 터노해면사무소 자리방학천교모랫말터천주교 도봉동성당성황당 터무수천교서원내교누원터도봉산역

 

 

코스7: 도봉 현대사 인물 길

창동의 세 마리 사자라 불리우는 김병로, 송진우, 정인보 선생과 현대문학의 대표적 거목인 홍명희, 김수영 시인 등 도봉구에서 거주하며 현대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이 살던 곳을 탐방하며 그들의 삶을 다시 한번 회고하는 인물중심의 역사탐방코스이다.

 

 

 

 

창동역창동역터창동초교홍명희 옛집터송진우 옛집터김병로 옛집터정인보 옛집터문예봉 옛집터함석헌 옛집전태일 옛집터계훈제 옛집터김수영 시인 옛본가도봉역

 

 

 

 

 

 

 

 

 

 

 

 

 

 

촌은 유희경과 매창이야기

 

 

 

 

서러운 만남

동인과 서인의 정쟁은 극에 달했다. 1591년 이른 봄,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은 서울을 떠나 남으로 향했다. 도탄에 빠진 백성과 전운이 감도는 나라를 걱정하며 또한 잊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국상이나 사대부상에 자주 불려 다니며 상례를 집행하던 중인의 신분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 역시 그를 기방(妓房)으로 내몰았을 것이다.

 

침류대를 중심으로 백대붕과 함께 풍월향도 시단을 이끌었던 위항문학의 선구자 유희경은 천리길을 내려와 부안 기생 이매창(李梅窓, 15731610)을 만났다. 당시 나이 마흔여덟 살의 유희경은 스물의 기녀를 본 순간 사랑에 빠지고 만다. 서울에서부터 매창에 대해 들어 왔는지라 스물여덟의 나이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촌은과 매창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깊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촌은은 매창을 처음 만난 날 증계량(贈癸娘)이라는 칠언절구를 바쳤다.

 

     曾聞南國癸娘名(증문남국계랑명) 일찍이 남국의 계랑이라는 이름 들었는데

詩韻歌詞動洛城(시운가사동락성) 싯구와 노래솜씨 서울에까지 진동했지

今日相看眞面目(금일상간진면목) 오늘 만나 진면목 대하고 보니

却疑神女下三淸(각의신녀하삼청) 무산 신녀가 삼청(三淸)에 내려온 듯하여라

 

열 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매창은 이미 서울까지 알려진 기생 시인이었다. 촌은은 매창을 무산의 신녀에 비유하면서 극찬하고 있다. 초회왕이 무산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 때 꿈 속에 신녀가 나타나 교합했다는 신녀는 시집도 가기 전에 죽은 한을 풀기 위해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된다고 한다. 그 신녀가 도가에서 말하는 신선이 사는 삼청인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에 내려온 듯하다고 표현하였다.

 

     桃花紅艶暫時春(도화홍염 잠시춘) 복사꽃 붉고 고운 짧은 봄이라

撻髓難醫玉頰嚬(달수난의 옥협빈) 고운 얼굴에 주름지면 고치기 어렵다오

神女下堪孤枕冷(신여하심 고침냉) 신녀라도 독수공방은 견디기 어려우니

巫山雲雨下來頻(무산운우 하래빈) 무산의 운우지정 자주 내리네

 

촌은 유희경은 희증계랑(戲贈癸娘,)이라는 칠언절구로 신선의 세계에서 깨가 쏟아지는 즐거움을 그리고 있다. 이들에게는 세속의 체면이나 권위는 필요치 않았다. 둘 간의 사랑과 시를 통한 화답이 얼마나 절정했으면 이 고장 출신의 시인 신석정은 이매창, 유희경, 직소폭포를 가리켜 부안삼절이라고 하였다. 황진이, 송도삼절이라 불리는 서경덕, 박연폭포처럼 말이다.

 

이별 그리고 그리움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400여 년 전 애절한 별리를 노래했던 연인들은 만남과 이별, 그리고 또 만남과 이별이라는 서러움을 시를 통해 들려주고 있다. 부안 기생 매창은 한시에 능했을 뿐 아니라 거문고 연주도 매우 뛰어났다. 배꽃이 푸른 하늘에 비처럼 떨어질 때 이별한 님이 가을이 짙어가도 소식 없으니 그이도 나를 생각하기나 하는지 애절함에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한 수절가는 애절하기만 하다. 쓸쓸한 가을밤에 들려오는 거문고 가락이 더욱 시렸으리라. 유희경이 서울로 간 사이 임진왜란이 터졌다. 촌은은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고 있던 터라 매창을 만날 겨를이 없었다.

 

매창은 촌은과 헤어진 동안 수십 편의 시를 통해 님에 대한 그리움의 한을 노래했다.

 

     春冷補寒衣(춘빙보한의) 봄날이 추워 겨울옷을 꿰매고

紗窓日照時(사창일조시) 사창에는 햇살이 비치는구나

低頭信手處(저두신수처)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기니

珠淚滴針絲(옥루적침사) 옥루가 바늘과 실을 적시는구나

    

매창의 시자한(自恨)에서는 유희경이 떠나고 없는 봄은 너무나 추워 추울 때 입던 옷을 다시 꺼내어 수선하면서도 그리운 마음에 바느질이 되지 않아 눈물만 흘리는 서러움이 진하게 베여 있다. ‘오늘 아침 어머니 그리워 글을 쓰자 하나 / 글을 쓰기도 전에 눈물이 가득하구나마치 남해로 유배온 서포 김만중이 어머니 생신날 지은 사친시(思親詩)를 연상하게 한다. 유희경 역시 전쟁 중이라 만나지 못하는 매창을 그리워하면서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娘家在浪州(낭가재낭주) 계랑의 집은 낭주[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아가주경구) 이 몸이 사는 집은 서울이라네

相思不相見(상사불상견) 서로가 그리워하지만 보지 못해

腸斷梧桐雨(장단오동우) 오동나무에 비내리면 애가 끊기는구나

    

촌은은 회계랑(懷癸娘)에서 서울과 부안이라는 천리길 떨어진 곳에 살고 있어 서로 만나지 못하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오동나무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애가 끊기는 고단한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러한 시편들은 촌은집에 여러 편 실려 있다. 도중회계랑(途中懷癸娘)에서는 가인을 이별한 후 남쪽 하늘이 막혀 떠도는 자신의 어지러운 마음과 파랑새마저 소식을 전하지 않음에 벽오동에 떨어지는 찬비소리 들려 차마 견디지 못하는 심정을 노래하였다.

 

아내 외에는 단 한 번도 마음을 준 여자가 없었던 유희경, 기방 출입도 자제했던 그가 스물여덟이나 어린 매창에게 빠진 것은 둘 다 시대를 초월한 시인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일까. 그들은 첫만남부터 예사롭지 않았고, 전쟁으로 인한 이별 후에도 사랑의 노래를 천리길 머나먼 곳으로 주고 받았다. 임진왜란으로 이별해야 했던 두 연인은 15년만에 다시 만난다. 전쟁이 끝나면 곧바로 부안으로 달려가야 했을 유희경이 왜 서울에 남아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스무살의 꽃다운 처녀가 서른다섯이 될 때까지 독수공방 시킨 촌은의 심사는 무엇이었을까. 그 긴 청춘을 매창은 수절해야 했다. 기생이라는 신분임에도 정조를 지킨 그녀의 심사는 또 무엇인가. 전쟁이 끝난 후 매창은 수많은 명사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지만 오로지 마음을 받친 늙은 시인만을 그리움으로 간직한 것이다.

 

15년만의 재회와 매창의 죽음

1592년 이별했던 촌은과 매창은 160715년 만에 다시 만난다. 그 긴 세월 매창의 애간장을 녹였던 촌은이 63세의 노인이 되어 나타났지만 매창은 더 없는 사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부남이었던 유희경은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그 옛날 헤어지면서 열흘 만이라도 시를 논하면서 재회할 것을 약속하였기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從古尋芳自有時(종고심방자유시) 예로부터 꽃향기 찾을 때 있다지만

樊川何事太遲遲(번천하사태지지) 번천[당나라 시인 두목]은 어인 일로 이리도 더딘고

吾行不爲尋芳意(오행불위심방의) 내가 가는 것은 꽃향기 찾아가는 뜻만 아니라

唯趂論詩十日期(유진논시십일기) 오로지 시를 논하자던 10일의 약속을 좇음이라오

 

칠언절구중봉계랑(重逢桂娘)은 환갑을 지난 촌은 유희경이 매창과의 어렵고도 중요한 만남을 이야기 하고 있다. 다시 만남이 기녀 매창의 육체적 관계가 아닌 문학을 논하기 위해서라고 단정하고 있다. 15년 전 매창은 헤어지면서 열흘만이라도 더 머물며 시를 논하자고 애원한 적이 있었다. 촌은은 그 약속을 핑계로 재회하지만 마음 속에는 깊은 사랑이 샘솟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영원히 함께 할 수 없었던 그로서는 시를 핑계로 삼을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기약없는 이별을 한 연인은 만나지 못한다. 그것은 3년 후인 1610년 매창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촌은은 매창의 부고를 듣고 애도의 시인 도옥진(悼玉眞)이라는 칠언절구를 읊는다.

 

     香魂忽駕白雲去(향혼홀가백운거) 향기로운 넋 홀연히 흰 구름 타고 가니

碧落微茫歸路賖(벽락미망귀로사) 하늘나라 아득히 머나먼 길 떠났구나

只有梨園餘一曲(지유이원여일곡) 다만 배나무 정원에 한 곡조 남아 있어

王孫爭設玉眞歌(왕손쟁설옥진가) 왕손들 옥진의 노래 다투어 말한다오.

 

매창의 죽음을 끝내 잊지 못해 양귀비의 이름을 빌려 지은 시이다. 이원(梨園)에서 현종을 모시고 예상우의곡을 연출하던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장한가. 그것은 바로는 현종과 양귀비[양옥진]의 불륜의 사랑을 아름답고 슬프게 묘사한 노래였다. 그도 역시 자신의 사랑이 불륜이었음을 인정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촌은이여, 매창이여

남해 용문사에 소장된 촌은집책판에는 천민 출신의 위대한 시인 촌은 유희경과 황진이와 쌍벽을 이루는 버금가는 조선 최고의 여류시인 이매창의 사랑노래가 오롯이 담겨 있다. 유희경은 사대부들과 교류하면서 정업원 아래 있던 자기 집 시냇가 흐르는 개울가에 있는 바위를 침류대라 하고, 이곳에서 이름있는 문인들과 시로써 회답하였다. 그는 북악단풍 등 20경을 시로 지어 읊기도 하였으며, 수많은 문인들과 교류한 시집 침류대시첩을 펴냈다. 그는 당시 천인신분으로 시에 능했던 백대붕과 함께 풍월향도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하여 위항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유희경은 서경덕의 문인으로 도봉서원을 건립하고 남언경이 사액을 받은 곳으로1623년에 도봉서원 옆 영국동 집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말년에 시를 지으며 도봉서원 앞 계곡에서 풍류를 즐겼으며, 계곡에는 암각글자가 새겨진 14개의 각석군이 분포하고 있다. 이 곳은 도봉산 계곡 중에서 경치가 아름답기로 이름났던 곳으로 바위와 바위 사이에 겹쳐있던 침류를 이름 그대로 맑은 시냇물을 베게 삼아 누워 즐길 수 있는 곳이라 하였다. 또한 남언경으로부터 문공가례를 배워, 상례에 특히 밝아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상을 집례하면서 이름이 나기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일으켰으며 광해군 때 이이첨이 폐모의 소를 올리기를 간청하였으나 거절하고 그와 절교하였다. 인조반정 후 왕은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 가의대부로 승진시켰다. 문집으로 촌은집, 저서로 상례초가 있다.

 

 

 

 

 

 

 

 

<소설 정의공주(한소진 저) 중에서 일부 수록>

 

 

정의는 솔직히 이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각이니 마음이니 다 아름다운 우리 말인데 무엇때문에 거기에 한자의 의미를 더해야 하는가? 그냥 그대로 두면 안되는 것인가? 우리 백성들은 흥과 눈물이 많아서 행복할 때는 하늘이 떠나갈 듯 즐겁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울다가도 갑자기 힘을 내는 백성이거늘 어찌 그 마음에 악마의 음침한 기운이 들어간다 하겠는가? 백성들의 삶을 한자가 억지로 틀어막고 있습니다. 한자도 어렵지만 이두는 더욱 어려워 우리 백성들은 정말 힘든 삶을 살고 있다 들었습니다. 그러니 저희들이라도 우리 말을 한자로 풀이하려 들지 말고 글을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힘을 실어줘야 하지 않을는지요?” “이두로 사람을 四覽이라고도 표현한다지요? 사방을 둘러본다는 뜻이겠지요. 그것은 아름다운 말인 듯합니다. 아름다운 말도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제 생각은 한자를 빌어 이두로 쓸 때조차도 조상들은 의미에 의미를 더하느라 몹시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라고 하였다.

 

세종은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것은 자신이 언제나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 우리 백성의 혼은 중국인의 혼과 다르다. 정의의 말대로 우리글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치세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아바마마, 한시를 쓸 때마다 저는 참으로 답답함을 느끼옵니다. 비둘기는 구구하며 우는데 어찌 한자로 관관(關關)이라 표기해야만 하나요? 시경에 관관저구 재하지주(關關雎鳩 在河之洲)라는 시구가 있습니다. 노래하는 한 쌍의 비둘기, 황하의 물가에서 노는구나----. 소녀, 귀한 종이를 밤새 구겨버리고 만 것은 마음과 글자가 합치되지 않는 남의 글로 언니 곁에 가자니 마음이 쓰라려 그랬습니다.” 라고 하자, 세종은 정의는 낙천정에서 하늘의 뜻을 알고 천지를 감동시켜 세상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하라. 과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는고?” 라고 명하였다. 우리말을 한자가 대신할 수 없다는 정의의 말은 백성들의 한탄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서 빨리 이 슬픔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마음의 울림이 세종의 온 몸으로 퍼져갔다.

 

--- 중략 ---

 

이윽고 우리글 창제 선포를 앞두고 세종은 모두를 불러 최종적으로 점검했다. 우리 문자는 인간을 중심으로 음양을 다 감싸 안을 수 있는 소리글로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수양도 감격에 겨워 아바마마께서 은 하늘이 인간에게 흘러 내려오니 그냥, 그대로, 그렇게의 의미를 지닌 가장 자연스러운 글자라 하셨고 은 땅으로부터 인간이 솟아오르니 나다()’를 기본으로 하며, ‘은 사람이 땅과 하늘을 안고 있으니 다함을 뜻하고, ‘을 합쳐 완성된 모두를 의미하며, ‘은 하늘과 땅, 인간이 완벽하게 조화하여 어우르는 철학이 숨겨져 있다고 하며, ‘만 봐도 인간이 하늘과 땅을 지켜보는 형상으로 본다는 속 뜻을 갖게 되며, ‘은 우주를 뜻하여 어느 나라에도 없는 사념이니 이는 조선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글자라 하시니 그 해석이 놀라울 따름이라며 백성들이 빠르게 우리 글자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힘차게 말하였다. 정의는 귀신도 한자는 부수와 획수가 너무 많아 학자들도 다 배우지 못하나 우리글은 가로선과 세로선, /, ‘그리고 등 여섯 개의 모형만 있으면 만 가지도 넘는 무궁무진한 글자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며 그것으로 모든 말을 다 표기할 수 있으니 가히 귀신도 알아볼 글자가 아닌가? 모두 세종께서 음운과 음성학뿐 아니라 하늘과 땅, 인간을 우리 문자에 적용한 덕분으로 모든 글자를 소리내어 말할 수 있으니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누구든, 천지 자연의 소리를 그대로 사용하여 서로의 생각을 펼칠 수 있는 일이라 하면서 감격, 또 감격하였다. 그로써 모든 일이 끝났다.

 

 

 

법정동 기준 4개동, 행정동 기준은 15

방학(放鶴도봉(道峰(쌍문(雙門) 4개동이 있다

 

 

 

 

 

 

쌍문동

쌍문동 동명(洞名)의 유래는 몇 가지가 전해온다.하나는 현 쌍문동 286번지 근처에 계성(鷄聲)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계성과 그 부인이 이름 모를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이 생시에 부모를 정성껏 모시지 못한 것을 후회하여 부모의 묘 앞에 움집을 짓고 여러 해 동안 기거하다가 죽자 마을 사람들이 그의 효성을 지극히 여겨 그의 묘 근처에 효자문(孝子門)을 두 개 세운 데서 쌍문(雙門)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옛날에는 현 창동 우체국 부근에 열녀문이 두 개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또 쌍갈래 길에 이문(里門)이 있었으므로 쌍갈무늬가 쌍문으로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최근에는 쌍문(雙門)’은 효자문(孝子門)이 두 개라 쌍문이라 한 것인데, 효자 남궁지와 그의 처 하동 정씨(鄭氏), 그의 아들 효자 남궁 조 부자가 고종으로부터 효자문을 받았는데 부자(父子)의 묘소가 노해파출소(옛 쌍문동 중심지)에서 볼 때 남과 북에 있어 쌍문이라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목 해등촌면에 속하였으며, 1912년에 편찬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경기도편에 나타나는 양주군 해등촌면 12개 리 가운데 소라리(所蘿里계성리(鷄聲里)지역에 해당한다. 1914년 노원면과 해등촌면이 통합되어 노해면이 설치되었을 때 소라리·계성리가 통합되면서 쌍문리라는 지명이 처음 나타났다.

 

196311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이 서울시 성북구 노해 출장소에 편입되면서 쌍문리는 창동 동사무소 관할 하에 있었다. 1973년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분리 신설되면서 도봉구에 편입되었으며, 법정동인 이 동은 행정동인 쌍문14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1960년 이전까지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을 위주로 하고 있었으며, 그 후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하여 쌍문로와 도봉로 주위에는 상가가 밀집되어 있다. 자연마을로 계성동, 쇠죽골, 해등천 등이 있었는데, 이 마을들이 합쳐져 동을 형성하였다

 

쇠죽골 : 쌍문1동 내시 묘가 있는 아랫마을. 동대문 시장에 소를 매매하러 가기위해 시골에서 올라온 소장수들이 이곳에서 쇠죽을 먹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소여물골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제성겻 : 계성과 그의 효성 지극한 아들이 살았다는 마을. 쌍문제1동에 해당한다.

해등천 : 현 쌍문제2동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소군래라는 하천에서 깨끗한 물이 이 마을을 거쳐 방학동으로 흘렀는데, 물이 바닷물처럼 맑아서 해등천이라 불렀다고 한다.

 

 

방학동

도봉서원(道峯書院)의 창건과 관련하여 조선시대 어느 임금이 도봉서원의 터를 정하기 위하여 도봉산 중턱에 앉아 있다가 학()이 평화롭게 놀고 있는 것을 보고 방학(放鶴)이라 하였다는 이야기와 이 곳 지형이 학이 알을 품고 있는 것 같다고 하여 방학(放鶴)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과 관련된 전설은 아마도 한자(漢字)로 방학리(放鶴里)란 지명이 이루어진 후에 덧붙여진 이야기로 보인다.

 

또한 곡식을 찧는 기구인 방아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우리말로 방아골()’로 불리던 것을 한자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음이 비슷한 방학리(放鶴里)로 고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최근에는 방학동의 원래 이름은 암회리(岩回里)였는데, 도봉산 줄기가 동남방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다시 되돌아와 암회리라 했던 것을 학()이 날아가는 형국의 지세로 보아 풍수지리가의 조언으로 일제시대 방학(放鶴)’이라 작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목 해등촌면 지역이었고, 1914년 노해면 방학리로 되었다. 1963년 서울시 성북구에 편입되면서 방학동으로 되었고 1973년 도봉구 관할로 되었다. 1975년 도봉동에서 분동되었으며 1980년 방학1·2동으로 분동, 19882동이 다시 2·3동으로 분동되었고 19943동이 4동으로 분동되었다가 2008년에 4동이 3동으로 통합되었다. 현재 법정동인 방학동은 행정동인 방학13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통은 방학로가 마을의 중심을 지나며, 성북구에서 의정부시로 나가는 도봉로가 동쪽으로 지나고 있다. 예로부터 도심에서 멀지 않은 지역이어서 북한산 자락에는 왕실과 귀족들의 묘소가 많이 있다.

 

박수겻고개 : 쌍문리에 있는 고개

가살피 : 방학동과 도봉동과의 경계지점에 있는 마을

금성윗돌 : 방학굴 앞에 있는 들

도당마을 : 현재 방학 3동 신동아 4차 아파트 단지 일대로 도봉산자락에 복숭아꽃, 오얏꽃 등 이 만발하는 평화로운 마을로 국태민안한 요순 시대를 방불케 하여 요 임금의 칭호인 제요도당씨(帝堯陶唐氏)에서 '도당'이라는 글자를 따서 도당마을이라 하였다고 한다.

금잇들 : 방학동 도당마을 앞에 있는 들. 거머리가 많았다고 한다.

논굴재 : 방학굴에 있는 고개

복개내 : 방학동에서 중랑천으로 들어가는 내. 한자로는 '福開川'

생잇돌 : 도당마을 앞에 있는 들

성고개 : 바위가 성()과 같은 고개 밑에 있는 마을. 바위를 돌아 들어간다 하여 암회리(岩回 里)라고도 이름하였다.

시루봉 : 방학동 도당마을 뒤에 있는 봉우리. 모양이 시루같다.

원당이 : 소원을 비는 신당(神堂)이 있어서 생긴 이름. 한자로 '元唐里'

초당마을 : 초당(草堂)이 있었던 마을

황소바윗굴 : 방학굴에 있는 골짜기. 모양이 황소같은 바위가 있다.

 

 

창동

조선시대 이 곳에 양곡 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창동초등학교 옆 공터에는 오랜 옛날부터 창동리(倉洞里)라는 돌로 제작된 이정표가 세워졌었는데, 199591일 구 창5동 주민센터(창동 700-7) 옆으로 이전하였다. 도봉구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중랑천을 경계로 노원구 상계동, 서쪽은 쌍문동, 남쪽은 강북구 번동, 북쪽은 방학동과 접해 있다. 창골·유만(流滿말미·모랫말 등의 자연마을이 합쳐 창동을 형성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목 해등촌면에 속하였는데, 1912년에 편찬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경기도편에 나타나는 양주군 해등촌면 12개 리 가운데 창동리(倉洞里마산리(馬山里유만리(流滿里) 지역에 해당한다. 이 후 191441일 전국의 부(()을 통폐합할 때 노원면과 해등촌면을 합쳐 노해면을 만들면서, 노해면 내에 도봉리·방학리·쌍문리·창동리·월계리·공덕리·하계리·중계리·상계리·9개리를 설치하였는데 이때 종래 해등촌면의 마산리·유만리·창동리를 합하여 창동리라 하였다. 1963년 노해면이 서울시 성북구에 편입되면서 창동이 되었고, 1973년 도봉구로 편입 되었다. 1988년 노원구로 편입되었다가 1989년 다시 도봉구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되었다. 창동 일대는 쌍문동과 함께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토기, 석기, 간석기 등의 유물이 8·15 광복 전 일본인들에 의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신석기시대부터 마을의 유래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말미 : 옛날 산에다 말을 많이 먹였다 해서 붙여진 이름, 한자는 마산동(馬山洞)

모랫마을 : 1동과 월계동과의 경계지역에 모래가 많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방줏굴 : 방죽이 있는 마을

배라깃들 : 수원(水源)이 적어 날씨가 가물면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창동 292번지, 300번지 일대에 해당한다.

삼봉못(三峰) : 부근에 삼각산의 봉우리가 비쳤다는 연못

유만이(流滿里) : 큰 늪이 있어 물이 가득하였던 데서 연유한다. 일명 한내(漢內)

종자들 : 유만이 앞에 있는 들. 7년을 가물어도 물이 있어 메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창골 : 조선시대 창고가 있었던 데서 연유한다.

 

 

도봉동

서울의 명산인 도봉산 아래 있어 얻어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목 해등촌면에 속하였는데 1912년에 편찬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경기도편에 나타나는 양주군 해등촌면 12개리 가운데 상누원리 무수동 영국리 지역에 해당한다. 191441일 전국의 부(()을 통폐합할 때 노원면과 해등촌면을 합쳐 노해면을 만들면서 노해면내에 도봉리 방학리·쌍문리·창동리·월계리·공덕리·하계리·중계리·상계리 등 9개리를 설치하였는데 이때 종래 해등촌면의 상누원리·무수동·영국리를 합하여 처음으로 도봉리라 하였다. 1963년 성북구에 편입되면서 도봉동으로 되었고, 1973년 도봉구 관할로 되었다. 1975년 도봉동에서 방학동이 분동되어 나갔고, 1977년 도봉1·2동으로 분동되었다. 1988년 노원구로 편입되었으나, 1989년 다시 도봉구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북쪽으로는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고, 남서쪽으로 도봉산과 북한산의 연봉을 따라 봉우리와 구릉 지대가 많고 맑은 계곡이 곳곳에 있어 자연 경관이 아름답다. 동쪽은 한천을 경계로 상계동과 접하며, 서쪽의 경기도 양주군, 남쪽의 방학동, 북쪽의 경기도 의정부시와 접해 있다. 자연마을로는 다락원, 서원말, 무수울, 웃다락원 등이 있다. 다락원과 웃다락원은 의정부시와의 인접지역에 조선시대에 공무로 출장하던 사람들이 묵던 원()이 있었고, 그 원집에 다락, 즉 누각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락원 : 다락으로 된 원()이 있었다. 한자로는 누원(樓阮)이라고 한다.

도당재 : 굿을 하는 신당이 있는 고개

뒷굴 : 도봉서원 뒤에 이는 골짜기

서원말 : 도봉서원이 있는 마을

서원내 : 도봉서원 앞에서 흐르는 시냇물의 이름을 따라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 한자로는 書阮 川洞이라고 한다.

서낭당 : 무수울의 다른 이름. 서낭당이 있었다.

무수울 : 도봉동 104번지 일대로 마을 이름의 유래는 약 500여년 전에는 수철동(水鐵) 일명 무 쇠골이라 하였고, 이후 무수동(無愁洞)이라 개칭하였는데 그 연유는 영해군 묘소 형국이 선인무수지형(仙人舞袖之形)으로 신선이 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형국이라 하여 무수동(無愁洞)이라 호칭을 했다. 또한 서낭당이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생겼다는 설과 세종이 재위시 이 곳에 왔다가 원터(도봉동 578번지) 약수터의 물을 마시고 물 좋고 풍광 좋은 이 곳이야말로 아무런 근심이 없는 곳이라고 하여 무수골로 칭해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