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락산·불암산 아래 위치한 첫 번째 마을
노원구 蘆原區
Nowon-gu
서울특별시의 동북부에 있는 구. 원래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에 속했으며,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어 성북구에 속했다. 1973년에 성북구에서 분리된 도봉구에 속했다가 1988년 도봉구와 노원구로 분리됨에 따라 노원구가 되었다.
노원의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가 있다. 옛날에는 갈대(蘆)만 무성해서 행인들이 불편을 겪어 여관인 원(院)을 설치했는데 여기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으며, 단순히 갈대(蘆)가 많은 들판(原)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시의 북동부에 위치한 구. 구청 소재지는 상계동이다. 조선시대 경기도 양주군 해등촌(海等村)·노원면(蘆原面)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두 면을 합친 노해면(蘆海面) 1963년 서울특별시 성북구 편입 1973년 성북구에서 분구된 도봉구 편입 1988년 도봉구에서 노원구가 분리 신설
청동기인은 이미 우리나라에서 살고 있던 신석기 문화인들과 동화 융합하면서 청동단추, 도끼, 조각칼, 세형동검, 방울달린 청동기, 주물틀, 등을 만들어 사용하였던 것이 출토물로 보아 확인된다.
고인돌은 택지개발이 시작되기 전인 1970년대에 드물게 발견되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개석(蓋石)과 고인돌이 해체된 채 서로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어 그 존재여부에 대한 확신은 없어도 양주군 일대에서 발견된 지석묘의 형태로 보아 미개발지에 대한 지표조사의 필요성이 있다.
노원지역은 노원구 공릉동∼상계동에 이르는 서울의 동북쪽 일대로 삼각산을 뒤로 하고 한강을 중심으로 원야지대를 앞에 두고 있어 고대 도읍지로 정할 만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백제 초기 도읍지로서의 하북 위례성을 이곳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위례성이라는 백제 시조가 처음 도읍하였던 곳으로 옛 자리가 지금 한양성 동북쪽에 있다.
북위례의 옛 자리는 경성의 동북쪽 10리 되는 곳 삼각산 동쪽에 있는데 주민들이 그 곳을 잘못 한양고현이라 하여 하북의 위례성에 대해 삼각산 동쪽설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방어와 생산활동을 위한 필수적인 배산임수(야)(背山臨水(野))의 지형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 후 이 지역은 백제의 한성시대에는 계속 백제의 영토에 속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장수왕이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고 남정(南征)을 감행하여 위례성을 함락시키고 아차산성에서 사로잡은 백제의 개로왕을 피살하였다. 따라서 한강유역 일대는 고구려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이 때 고구려는 군현제에 따라 현재의 도봉구, 양주군 일대의 새로운 점령지에 매성군(일명 昌化)을 설치하였다. 그 후 551년 백제·신라의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한강유역으로부터 후퇴를 하게 되니 이 지역은 다시 백제에 귀속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에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점령함으로써 백제·신라의 공수동맹이 파기 되었고 군단을 주둔시켜 관할하니 이 지역은 신라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이어 757년(경덕왕 16년)에 현 도봉구지역을 포함한 양주군 일대에 래소군을 설치하였다.
신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양주목 동쪽 15리 지점에 석문령(石門嶺)이 확인되었다고 하는 등 양주지역에 크고 작은 성이 많이 있던 것으로 보아 산으로 둘러싸인 노원지역에 성을 많이 쌓았었던 것으로 보이고, 1942년에 조선 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따르면 양주군에 약 15개의 성곽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시대 노원지역은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한 교두보로서 고구려 입장에서는 남하를 위해, 신라와 백제의 입장에서는 북진을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도 이 지역은 대일·대송 무역경로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고려 태조는 이 래소군을 견주라 개칭하고 신라 때의 한양군을 양주라 고쳐 이 양주에 지주사를 두어 견주(見州)를 관할케 하였다. 나아가 현종9년(1081)에는 견주를 양주에 편입하였다. 몽고와 여섯 번 전쟁을 치를 때에도 격전지로 바뀌어 많은 고초를 겪었고, 충렬왕 때는 개경과 가깝다는 관계로 왕의 사냥터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신진사대부들이 조선을 개국하면서 보수 귀족세력의 정치적 기반이었으며, 각종 폐단이 심했던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면서 지방행정제도를 개혁하기 시작하였다. 태조3년(1394) 10월 28일 개경으로부터 한양으로 천도하게 되니 한양부는 한성부로 개칭되었다. 이 한성부는 고려시대의 양주로서 양주고을 범위 안에서 도읍을 정하고 그 지역만을 한성부라 하였고 현 도봉구지역을 포함한 기타 양주의 관할구역이었던 지역은 그대로 양주에 속하였다.
한성부의 설치에 따라 양주 부치(府治)는 양진(광진) 서쪽 아차산 남쪽인 대동리로 이전하였으며 지양주지사로 승격되고 1395년에 다시 부(府)로 승격되었다. 태조 6년 부치(府治)를 다시 견주고기(見州古基)인 주내면 고읍리로 이전하였다. 태종 10년에 다시 양주를 목(牧)으로 강등하였다가 같은 해 13년 1,000호 이상의 규정에 따라 도호부(都護府)가 되었다. 세종 12년에 다시 양주목이 되는 동시에 진(鎭)을 두었다.
또 영조때 각 도읍지를 모아 편찬한 「여지도서(與地圖書)」를 보면 경기도 양주목(牧)내의 34개면(面)의 방리(里)가 있다. 이중 노원면과 해등촌면이 곧 노원구의 일부지역에 해당된다. 그리고 양주군은 고종 32년(1895) 윤(閏) 5월 1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실시된 23도제에 의해 한성부 소속의 군이 되었다가 1896년 8월 4일칙령 제360호에 의해 실시된 13도제에 의해 경기도 3등군이 되었다.
고구려 때의 매성현, 골의노현이 양주군의 속현이 되었다고는 하나 이들 지역이 양주 동남쪽인 것만 확인될 뿐 정확한 위치가 명시되지 않아 노원지역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사서에 정확하게 나타난 것은 신동국여지승람인데 이에 의하면 노원지역을 해등은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50리이고, 노원은 남쪽으로 40리, 마지막이 50리라고 되어 있어 노원보다 조금 북쪽이 해등인대 이 둘을 합쳐 지금의 노원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1905년 재정고문 메가다가 부임하면서 황실소유의 토지와 국유재산 정리를 위한 허락을 황실로부터 받아, 이듬해 7월 국유재산관리규정을 제정하여 국유부동산의 목록을 작성하여, 1909년부터 이듬해 7월까지는 역둔토조사를 실시하였다.
한편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1호로 양주군에는 34면 343동리를 두었는데 지금의 노원면 온수동·납대동·가좌동· 공덕리·장기리·월계리·간촌리· 은행리·양재리· 용동리·묘동리· 불암리·금주리·광석리·오목리· 무수동·갈해동·녹천리와 해등촌면 상누원리·무수동으로 이루어졌다.
1912년 5월 23일에 공포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경기도편에 의하면 양주군을 32개면, 343동리로 노원면과 해등촌면도 이 중에 속하였다. 914년 4월 1일에는 노원면과 해등촌면을 합쳐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으로 하고 청동리, 도봉리, 쌍문리, 월계리, 공덕리, 하계리, 중계리, 상계리를 관할하였다.
1950년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노원지역에 위치한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활약이 눈부시게 빛났다. 졸업을 앞둔 육사생도 1기생과 입교 20일밖에 되지 않은 2기생들이 양주군과 포천의 경계인 부평리에 진지를 구축하고 5시간 동안 적과 대치하여 분전하였으나, 무기열세 및 탄환의 소진으로 의정부가 함락될 무렵 전사한 동료의 시체를 가매장하고 후퇴하였다. 서울이 적에게 함락되면서 생도들은 대부분이 뚝섬쪽으로 후퇴하고 일부는 불암산에 남아 항전하였다. 적의 수중에 들어간 육군사관학교는 적의 의용군훈련소로 바뀌었다.
불암사에 본부를 둔 유격대는 1950년 7월 11일 공산군 100명이 배치된 퇴계원 보급소를 습격하여 적을 섬멸하였으며 8월 15일에는 피난하지 못한 서울 청년들이 강제로 훈련 받고 있던 의용군훈련소(육군사관학교)를 습격하여 의용군훈련생들을 탈출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부분의 유격대가 전사하고, 소수의 남은 대원들이 인천 상륙작전으로 서울이 탈환되자 학교로 복귀하여 임관되었다.
현재 서울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구. 서쪽으로 도봉구, 북쪽으로 의정부시, 동쪽으로 남양주시 별내면, 남쪽으로 중랑구와 접해 있다. 지형적으로 서부 저지와 동부 산지로 구분된다. 서부는 월계·번동 등의 구릉지를 제외하면 마들평야의 낮은 지대를 형성한다.
이 저지대의 중앙에 한천(漢川, 중랑천)이 흐르는데, 서쪽의 우이천(牛耳川)과 동쪽의 태릉천(泰陵川)을 합류하여 한강으로 유입된다. 동부 산지에는 불암산과 수락산이 있다. 이들 산지의 서쪽 사면과 산록에 있는 동네가 상계·중계·하계동이다.
서울 최동북부에 위치하며 북쪽과 동쪽으로 수락산, 불암산 등을 통해 경기도 의정부시, 남양주시와 맞닿아 있다. 구의 서쪽 경계를 따라 월계동을 관통하며 중랑천, 당현천이 흐른다.
북쪽 경계에는 수락산(638m), 동쪽 경계에는 불암산이 솟아 있으며, 그밖의 지역은 대체로 100m 내외의 저평한 산지를 이루고 있다. 구의 서부에는 중랑천이 남북방향으로 흐르며, 그 연안에는 시가지로 조성된 비교적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노원문화축제 노원문화의거리ArtFestival 초안산문화축제 태릉·강릉 태릉선수촌 이스턴캐슬 육군사관학교 노원문화의거리 http://www.nowonart.kr 갤러리파크
뉴타운이 70년 정착민을 새로운 철거민으로 만들다. 수락산·불암산의 안부(鞍部 : 산마루가 말안장처럼 움푹 들어간 부분)가 덕릉현(德陵峴, 덕릉고개)이며, 이 곳에서 남서쪽으로 흐르는 당현천(堂峴川)은 많은 토사를 퇴적시키면서 한천으로 흘러 들어간다.
서울과 의정부시를 연결하는 도봉로와 마들평야를 관통하는 동일로(東一路) 연변에 새로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시가지가 조성되었으며, 북쪽으로 개발제한지역과의 사이에 있는 농경지가 시가지개발의 확장으로 계속 잠식되고 있다.
상계·중계·도봉동 지역은 재개발계획 등에서 철거된 주민들의 이주정착지로 배정되어 영세주민의 밀집지역이 형성되었다. 1960년경부터 시작된 도심재개발사업으로 철거당한 주민들이 이 지역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1970년대 초부터 시가지가 크게 확장되면서 택지화되어 주택건설이 활발해졌다. 1960년대 도심지 재개발로 철거민이 상계·중계에 정착 1970년대 중반 도시재개발사업 1985년말 지하철 4호선이 개통
경원선과 경춘선이 성북역에서 분기, 베드타운 1911년에 부설된 경원선이 지나는데, 지하철 1호선과 연계되어 기존의 성북역·창동역 외에 월계역·녹천역이 신설됨으로써 도시교통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또 성북역에서 서울교외선·경춘선이 분기하며 지하철 4·7호선이 완공되어 도심과의 교통소통이 더욱 원활해졌다. 대부분의 구민들이 도시중심부와 그밖의 여러 지역에 생업기반을 두고 출퇴근하는 베드타운(bed town)의 기능이 강하다.
월계동 수락산 계곡에 자리하고 있는 허옇게 드러난 바위들이 골짜기의 계곡과 어우러져 마치 흰 구름이 머무는 것과 같은 절경을 이루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새말(조암동) 벽운동과 갈월 사이에 있는 마을이므로 사잇말이라 하던 것이 새말이 된 것이다. 한 때 상계동을 지칭하는 동명이기도 하였다. 새말은 이를 한자로 옮긴 것이 신촌동(新村洞)이다. 또 이와 음이 같다는 뜻에서 새암동이라 했는데 일제강점기 때 조암동(鳥岩洞)이 되었다.
덕릉고개 덕릉고개는 남양주시 별내면과의 경계지점으로 선조의 생부 덕흥대원군의 묘소(경기도 기념물 제55호,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에 소재)가 있어서 이름 지어진 곳이다.
온수골 보람아파트와 주공14단지, 청원고등학교가 있는 일대를 말하며 더운물이 솟아나온다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당고개 당고개역이 있는 곳으로 원래 당현이라 하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고개를 넘는 사람들이 돌멩이를 쌓아 기도를 올리는 성황당으로 변해 당고개로 부르게 되었다.
원터 상계초등학교와 롯데백화점이 있는 곳에 노원역과 노원(蘆院)이 있었는데 이곳을 원터 혹은 원기동이라 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서울에 도읍을 정하고 종묘와 사직의 위치를 잡기 위해 고심할 때 이 일대를 살펴보고 종묘의 자리로 정했으나 부근에 사직단을 세울만한 곳이 없어 포기했던 곳이기도 하다
새머리(鳥頭) 지형상 새의 머리 부분에 해당되는 곳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좌우날개에 해당하는 곳에 지하철 4호선이 동서로 통과하고 있으며 몸통부분에 백화점이 들어섰고 발과 꼬리부분으로 알을 낳는 곳은 주공아파트 3~6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납대울 조정에 바치는 조공을 모아 놓은 곳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납대동이라고도 한다.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이었던 윤두수가 살았던 마을이기도 하다.
광석마을 이 마을을 끼고 흐르는 개울에 석영질과 동(銅) 성분이 많은 돌이 있는데 해가 뜰 때 광채가 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용동(되룡골) 이곳에 살던 미꾸라지가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올라간 미꾸라지는 나이가 모자라 하늘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 왔다는 뜻으로 되룡골 이라고도 합니다.
녹천 월계동 근방의 야산사이의 계곡들이 월계동 767번지 근방에서 하나로 합쳐지는데 이 모습이 마치 사슴의 머리에 난 뿔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새술막 공릉동 93번지 일대로 한적한 이곳에 왕릉을 만들 때 동원된 인부들과 관리들이 드나들면서 생기게 된 마을이다. 조선시대 왕 일행의 동구릉 능행이 있을 때면 덩달아 일손이 바빴던 동네였다.
공덕골 공덕리를 흔히 부르던 말로 공릉동의 대표적인 큰 마을이다. 현재도 많은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연촌과 벼루말 연촌은 벼루말이라고도 불렀는데 이 마을에 있던 연못의 전체 모양이 벼루같이 보인다 하여 붙여졌다. 근래에 와서 연촌은 성북역 서쪽 일대를 지칭하게 되어 벼루말과 별개의 마을 이름이 되었다.
중랑천 중랑천은 경기도 양주금의 우이천, 당현천, 묵동천은 큰 줄기인 중랑천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신북리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면서 의정부시의 광쟁이 개울과 백석천(白石川)을 향하고, 서원천(書院川)을 합한 물줄기는 다시 노원, 도봉경계지역인 한천(漢川)과 당현천(堂峴川)을 거쳐 청계천과 합해져서 한강 본류로 흐른다. 현재 중랑천이라고 불리는 명칭은 시대와 지역적 특성에 따라 송계천(松溪川), 중랑포(中浪浦)등의 이름으로 불렸고, 도봉동 부근에서는 서원천(書院川), 상계동 부근에서는 한강의 새끼강 이라는 뜻으로 샛강이라 불렸다.
예로부터 서울시민들이 즐겨 찾는 휴식처 산수가 수려한 수락산·불암산 등에는 유적이 많이 분포해 있어 서울시민들이 즐겨 찾는 휴식처가 되었다. 공릉동에는 국제사격장과 실내수영장, 태릉스케이트장, 공원시설을 갖춘 유원지 등이 있어 관광지로 유명하다. 아울러 1971년에 세운 태릉선수촌과 태릉골프장이 있으며, 주변의 갈비집·배밭 등이 유명해 주말에 서울시민이 여가를 위해 즐기는 곳이었다.
안골 치성제(월계동) 소가 7개의 칼을 몸에 맞고서 쓰러져 있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발견하여 안골, 각심절, 벼루말 동네 사람들이 산제를 지낸 것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전한다. 예전에는 소 한 마리 통째로 잡아서 제를 지냈으나 밀도살을 할 수 없어서 지금은 약식으로 제를 올리고 있다. 이전에는 제각이 있어서 그곳에 모든 제기를 보관하고 음식을 준비했으나 6·25 전쟁으로 소실되어 버렸다. 허공 바위에서 제를 올리는데 흰 천으로 양옆을 두르고 천신의 기를 받아야 하므로 하늘을 맞지 않고 지냈다. 동네 사람에게 가장 존경받는 어르신이 제주가 되어서 3일간 외부의 출입을 하지 않았으며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고서 경건한 마음으로 제를 지냈다. 1년에 3회 지냈는데 2월 초하루는 통합적으로 제를 지냈고, 6월 초하루는 할머니 산제라 하여 간소하게 소 내장으로 산 밑에서 지냈으며, 10월 초하루는 통소를 잡아서 지냈다. 지금은 10월에 한번 제를 올린다.
녹천마을 치성제(월계동)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이유대감이 벼슬을 그만두고 경치 좋고 한적하며 조용한 곳을 찾아 기거하기를 바랬다. 그래서 처음 이곳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그의 호가 녹천이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녹천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녹천대감을 기리는 치성제를 지내게 되었는데 결구 이 치성제가 마을 공동의 제사로 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음력 2월 초하루와 6월 초하루, 10월 초하루에 제사를 지낸다. 또한 치성제의 신주(神主)인 녹천대감의 생신날(음력 2월 16일)이 따로 있어 그 날도 면국수와 산적 등의 제사음식을 차려 간소하게 제주(祭主)가 제(祭)를 지낸다.
월계동 각심제(월계동) 월계2동 마을에 큰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이 나무는 마을을 지켜주는 구능 할머니, 할아버지라 불렀으며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없어졌다. 매년 10월 초순 좋은날을 받아 마을의 대동단결을 위해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치성제이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조선 태종이 임금 왕위에 올랐을 때 흉년, 질병으로 민심이 흉흉해져 각심사 고승에게 도움을 청하자 고승의 말대로 온갖 정성을 다해 지신께 제를 올리자 그 뒤로 풍년과 함께 질병도 돌지 않았다고 하며 이때 드리는 제사를 각심제라 부르게 된 것이다.
공덕굴 치성제(공릉동) 먹골 늑대할머니 무당의 오래된 굿터로 수양딸인 무당에게 전수되어 지금까지 만신이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고 한다. 떡, 쇠머리, 과일 등을 차려놓고 마을의 평안을 기리는 전형적인 대동굿이다. 굿은 2년에 한 번으로 짝수해인 음력 초이틀이나 초사흗날에 치러진다. 굿 날이 정해지면 우물터 주위에 외로 꼰 새끼줄로 금줄을 쳤으며 마을 사람들은 출입을 삼가고 부정이 없는 가정을 시주, 화주, 도가로 정해 3일 전부터 굿 준비에 들어갔으며 굿에 필요한 비용은 각 가정에서 추렴하였다. 떡시루가 아홉 개인데 각 떡시루에는 바치는 이의 이름이 있으며 굿거리는 전형적인 12거리이다.
용동마을 산신제(하계동) 하계1동 전통 산신제로 음력 2월 1일과 10월 1일 두 차례 모셔지며 용동부락 노인정에서 동북쪽으로 약 500m 정도 올라간 불암산 기슭 마을 뒷산 중턱에 있는 큰 널석바위에서 오후 3시부터 4시까지 산신제를 지낸다.
은행마을 대동굿(중계동) 2년에 한 번씩 짝수해인 10월 1,2,3일 중 좋은 날을 받아 ‘도당할아버지’를 모시는 마을 전통 굿으로서 이웃 광석마을 대동굿인 ‘도당 할머니’를 모시는 굿과 함께 열리기도 했으며 두 어른의 혼을 달래줌으로써 마을의 일이 잘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하루 동안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즐겁게 놀았다. ‘대동단결한다.’의 의미로 오늘날까지 행해지고 있다.
구능 치성제(중계동) 마을의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 느티나무에 살았다고 전해지는 구능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는 제사로서 중계4동 144번지 근처에 치성 터가 있다. 이 치성 터 주위에는 큰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으며 제삿날은 매년 음력 9월 14일이다.
불암 산신제(중계동) 중계본동 1통에서 8통은 1967년부터 각지에서 모여든 철거민들의 이주 촌으로서 어렵게 마을을 형성한 탓인지 서로 융화되지 못하고 불화가 잦았다. 이에 이를 막아보자는 의미에서 불암 산신제가 시작되었으며 당시 6통 통장이던 정씨가 풍수를 보았는데 그들이 정착한 104번지 일대가 원래는 용이 누운 형상 이었는데 이주민이 정착하면서 그 용이 노했기에 많은 불화와 갈등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래서 풍수를 보아 용의 턱자리에 정성껏 음식을 올리고 1988년까지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그곳은 104번지 주민들이 살고있는 곳과는 거리도 멀고 당시 제를 모시던 분들이 그곳까지 오기가 불편하여 1989년부터는 음력 4월 좋은날을 받아 1통 은혜사 앞에 터를 마련하여 현재 제사를 모시고 있다.
간촌마을 산신제(상계동) 옛날부터 나라의 번영과 마을의 안녕을 위해 우두정(牛頭井)의 물을 길어 지냈다. 음력 7월 초하루와 10월 초하루 연 2회 산신제를 지내며 산신제 터는 상계5동 금호아파트 단지에서 수락산 자락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입구 우측면 계곡으로 올라가면 배드민턴 클럽이 나오고 입구 계곡에 산신제 터가 있다.
벽운마을 산신제(상계동) 조선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홍봉한이 그별당 우우당에 기거하면서 여러 인사와 모여 나랏일을 논의하였는데 그때 국가의 안녕과 마을의 무사함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어 오늘까지 이어졌다. 제사는 매년 3월과 9월에 지낸다. 특이한 점은 돼지 머리와 술을 사용하는 일반 제사와 달리 생수와 북어 등 마른 해물을 제물로 이용하는데, 이곳 지형이 음(陰) 기운이 강한 암산(女山)이기 때문이다. 우우당에서 수락산으로 약 10분 정도 올라가면 벽운산악회 건물이 나오는데 산신제 터는 건물 뒤 산기슭에 있다.
당고개 산신제(상계동) 과거 산림이 우거진 험준한 산골로 야생동물의 출현이 빈번하여 사람의 통행이 매우 어려운 고개였다. 이에 통행인들이 자신의 몸을 보호할 목적으로 돌을 들고 고개를 넘게 되었고 고개를 무사히 넘은 뒤 필요 없어진 돌을 던져 놓았는데 돌이 하나 둘 자연스럽게 쌓이게 되어 돌무덤이 되었다. 이후 이곳은 동네주민들의 기원을 비는 성황당이 되어 전래신앙을 숭상하던 많은 사람들이 매년 1월 15일 몸을 단정히 한 후 노송나무에 금줄을 치고 오색천을 두른 후 동네재앙을 물리치는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현재는 아파트 단지와 상가가 도로를 중심으로 주변에 들어서 있다. 성황당이 있었던 자리에 산신제의 유래를 기록한 당고개 표석만이 서있다.
사슴과 결혼한 염씨(廉氏) 처녀의 눈물 조선 중기 때 중랑천이 범람해서 우이천까지 물이 흘러들어 가는 큰 홍수 때문에 지금의 월계로 근방 마을은 모두 폐허가 되었다. 이에 대한 대책 마련 회의에서 마을 촌주(村主) 한 사람이 지난밤 꿈에 신선(神仙)을 만났는데, 내일 정오에 중랑천 가에 푸른 사슴 한 마리가 내려와 목욕할 것이니 제물을 준비해 두었다가 사슴에게 바치고, 마을에서 가장 예쁘고 정숙한 처녀 한 사람을 사슴에게 시집보내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라는 답을 해 주고는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때 염씨(廉氏) 집의 15세 난 딸을 사슴에게 시집보내기로 하였다. 이러한 결정이 있는 며칠 후 신선이 시킨 대로 산 정상에 제물을 준비하고 염씨 처녀를 곱게 단장시키고 사슴을 기다렸다. 정말 사슴 한 마리가 산에서 내려와 중랑천에서 목욕한 후 처녀를 태우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 766번지쯤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지금의 하천이 생긴 방향으로 사라졌다.
마을 사람들은 사슴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자 멀리서 물줄기 두 개가 나뭇가지 모양으로 흐르기 시작하더니 중간쯤에서 합쳐져 한 줄기로 되면서 황토흙으로 뒤덮였던 마을 앞 전답이 기름진 검은 색으로 바뀌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 신기한 일에 놀라워하자 그 중 한사람이 “이건 사슴과 결혼한 염씨 처녀의 눈물이니 냇물이름을 녹천이라 하자”고 제의하여 마을 이름도 녹천이라 하였는데 이때부터 녹천(鹿村) 혹은 녹천(鹿川)이라 하여 혼용하여 썼으며 이날 이후부터 마을이 번성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월계동 지역 헌화형(獻花形) 마을 이야기 녹천의 남쪽 아래에 능골이라는 마을 있었는데 마을 여성들의 기(氣)가 세어져 음란한 부녀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곳 사람들은 사람을 사슴에게 시집보낸 해괴한 일을 한 녹천 사람들 때문이라고 하여 녹천마을과 왕래조차 하지 않고 등을 지고 살게 되었다.
원래 능골에 이명(李蓂)의 무덤을 만들 때 지나가던 승려가 이곳은 헌화형이어서 “자손은 번성하지만 음란한 지형이니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땅을 밟아서 지기(地氣)를 다스려야하는 곳으로 될 땅”이라 하였다. 왜냐하면 헌화형은 양다리를 벌려서 중간구덩이를 연 것과 같은 자세인데 이는 여인의 다리를 벌린 형태이므로 음란하여 풍수지리설로 보아 주택지나 음택(陰宅,묘지)으로 별 환영을 받지 못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동네 재앙을 막을 수 있는 비법에 대해 물었는데 그 승려는 녹천 지역사람들과 혼인을 금하고 등을 지는 형태로 집을 짓고 마을의 동쪽에 절을 세우면 동네 화근이 사라진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마을이다.
온숫골(온수동) 마을 『자우물』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고 현대식 건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옛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지만 온숫골(온수동) 마을에 『자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원래 온숫골은 더운물이 솓아나온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옛날 이 마을 앞을 흐르던 도랑이 있었는데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았다고 하는 걸 보니 필경 깊은 연관이 있는 마을이다. 또 일제 때 일본 군인들이 기동 훈련을 하면서 지도를 펴놓고 온수동이 어디냐고 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으로 보아 물이 좋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던 모양이다. 이곳에 있었다는 자우물 물은 식수는 물론 농수로도 썼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자아올려 먹었다고 하여 자우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샛말의 소금장수 이야기 벽운마을과 갈울마을 사이에 있는 마을을 사잇말이라 하였는데 사잇말을 줄여 샛말이라고 했다. 이 마을 사는 사람들은 마포나루에서 소금을 사다가 조랑말에 싣고 함경도로 가서 그곳에서 많이 나는 황태와 바꾸어 동대문시장에 내다 팔았다고 한다. 노원지역은 남쪽과 북쪽을 잇는 주요 교통로로서 이러한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는 통로 역할을 했다고 한다. 한양을 중심으로 북쪽에서 내려오는 사람들과 남쪽에서 올라가는 사람들은 한탄강 양쪽에 들어선 객주집에서 하룻밤 쉬었다가 길을 떠났다고 한다. 그러니 이곳은 각처에서 온 사람들로 매우 붐볐을 것이다. 소금뿐만 아니라 새우젓 등 서해에서 나는 것과 동해에서 나는 황태 등을 사고팔아 꽤 돈을 많이 벌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마들평야 쇠제 이야기 노원지역은 허허벌판으로 갈대만이 무성하게 자라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양과 근접해 있고 북쪽지역인 강원도와 함경도로 가는 첫 관문이기 때문에 남쪽과 북쪽을 이어주는 교통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교통로를 따라 요지에 역원을 설치하여 교통 숙박의 편의를 제공하였는데 노원 지역도 역원이 설치되면서부터 그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또 오래전부터 노원 지역을 “마들평야”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갈대만이 무성하던 벌판에 역원이 생기자 이에 필요한 역마를 놓아기르게 된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이렇듯 들판에서 말들을 기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말굽에 씌울 징을 만드는 곳이 생겨나 그곳을 “쇠제”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유적으로 태강릉(泰康陵:사적 제201호), 문정왕후 윤씨의 태릉,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를 합장한 강릉이 있다. 육군사관학교 내에는 삼군부 청헌당·연령군신도비가 있으며, 하계동에는 한글고비가 있다. 또 월계동 각심재와 이명신도비, 초안산조선시대분묘군, 충숙이공신도비와 영정 등이 있다. 수락산·불암산 기슭에 학도암·불암사·흥국사·석천사·수락사·내원암 등의 많은 사찰이 있다.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 - 보물 제1542호 서울 태릉과 강릉 - 사적 제201호 서울 초안산 분묘군 - 사적 제440호 삼군부청헌당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6호 연령군이훤신도비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3호 정간공이명묘역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5호 충숙공이상길묘역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0호 학도암마애관음보살좌상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4호 본존불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81-1호 향우측협시상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81-2호 향좌측협시상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81-3호 학림사 석조약사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36호 불암산성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2호 월계동각심재 -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16호 학림사석불좌상 -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32호 공릉동 구 서울 공과대학 - 등록문화재 제12호 화랑대역 - 등록문화재 제300호 서울산업대학교 대륙관 - 등록문화재 제369호 서울 태릉과 강릉 사적 제201호 서울 초안산 분묘군 사적 제440호 아차산일대보루군 (수락산보루) 사적 제 455호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 보물제1524호 구 서울공과대학 등록문화재 제12호 화랑대역 등록문화재 제300호 서울산업대학교 대륙관 등록문화재 제369호 박정희대통령 의전용 세단 (육군박물관) : 등록문화재 제398호 한국광복군 군복 (육군박물관): 등록문화재 제460호 대한민국 육군기 (육군박물관) : 등록문화재 제461호 부산진순절도(육군박물관) 보물 제391호 동래부순절도(육군박물관) 보물 제392호 세총통(육군박물관) 보물 제854호 불랑기자포(육군박물관) 보물 제861호 조흡고신왕지(육군박물관) 보물 제1226호 대완구(육군박물관) 보물 제857호 호미명각궁(육군박물관) 중요민속자료 제35호 조각장 무형문화재 제35호 소반장 무형문화재 제99호 삼군부청헌당 (三軍府淸憲堂)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6호 연령군 이휜 신도비 (延齡君神道碑)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43호 정간공 이명 묘역 (李蓂神道碑)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5호 충숙이공영정 (忠肅李公影幀)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9호 충숙공 이상길 묘역 (忠肅李公神道碑)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70호 남지기로회도 유형(동산)문화재 제81호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 (鶴到庵 磨崖觀音菩薩坐像)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24호 학림사 삼신불괘불도 유형(동산)문화재 제211호 염불사 목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일괄 유형문화재 제250호 염불사 지장시왕도 유형문화재 제251호 도선사 석 삼존불상 유형문화재 제281호 기원사 독성도 유형문화재 제282호 묘법연화경 권 1~7(수도사) 유형문화재 제286호 수문장계회도(육군박물관) 유형문화재 제303호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육군박물관) : 유형문화재 제304호 학림사 석불좌상 문화재자료 제32호 기원사 산신도 문화재자료 제45호 정암사 아미타칠존도 문화재자료 제54호 각심재 (恪心齋) - 서울시 민속자료 제16호 불암산성 기념물 제45호 학림사 용굴암 학도암 생육신 梅月堂 김시습(金時習 : 1435∼1493)과 수락정사 조선전기 묵재(默齋) 이문건(李文楗:1494-1547)과 한글영비 생청백리공 이명(李冥 : 1496-1572) 병자호란 원종공신 충숙공(忠肅公) 이상길(李尙吉 : 1556-1637) 임진왜란시 '노원평 전투'를 이끈 고언백(高彦伯 : ? - 1609) 장군 이름을 세 번 바꾼 한말 의병대장 유세열(柳世列 : 생몰연대 미상) 장군 상계동 우우당 이병직(李秉直:1893-1973) 박세당 1629~1703 홍봉한 1713-1778 황금심 1922 – 2001.7.30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 千祥炳(천상병:1930-1993)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 : 1533-1601) 학문이 높았던 무관 부자 남치욱(南致勖 : 1494-?)·南彦純(남언순 : 1522-1578) 마들농요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2호
http://www.sports.or.kr/player
법정동 5개동 기준, 행정동 기준은 24개 상계(上溪)·중계(中溪)·하계(下溪)·월계(月溪)·공릉(孔陵) 등 5개동이 있다.
월계동 월계라는 동명은 밤에 높은 곳에서 월계동 지역을 내려다보니 맑은 시냇물에 달이 비치고 중랑천과 우이천으로 둘러싸인 모양이 마치 반달모양이므로 달 월(月)에 시내 계(溪)자를 붙여 월계동이라 하였다.
녹천(鹿川)마을 : 월계2동 683번지, 685번지 일대 이 마을 주변에는 높이 100m 내외의 야산 사이로 계곡이 있어 이 계곡이 2줄기로 나누어지다가 다시 합쳐져서 그 모습이 사슴뿔처럼 보여 붙여짐
능골(능동,능안,능리) : 월계2동 750번지, 774번지, 777번지, 산 55번지 일대 염광여중·고등학교, 신창중·고등학교, 월계중·고등학교, 인덕대학 일대 좌의정을 지내 청백리 정간 이명(李蓂)의 묘와 신도비 등이 마치 능처럼 크게 조성되어 있어 능골이라 불림
각심(覺心)마을 : 월계2동 600번지, 월계주공1,2단지 아파트 일대 녹천마을과 능골 사람들의 마을을 다스린다는 뜻에서 절의 이름을 각심절, 각심사라 한데서 불림
연촌마을(벼루말,안골) : 성북역 서쪽일대 월계로와 한천로가 만나는 우이천의 우측 광운전자고등학교 좌측 지역 이 마을에 연못이 있어 전체적인 모양이 벼루와 같다하여 불림
여우개 고개 : 월계동 392-20번지 일대로 성북역에서 광운대로 넘어가는 고개 이 고개에 숲이 울창하여 여우가 자주 나타나 길손들을 괴롭혔다 하여 불림
공릉동 공릉동은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에서 서울시로 편입될 당시에는 서쪽에 공덕리, 동쪽에 태릉, 강릉이 있고 그 안에 능골이라는 큰 마을이 두 개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태릉동으로 정하였다가 공릉리 주민의 반대로 동명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두 마을 주민의 합의로 자연부락인 공덕리의 공(孔)자와 태릉의 릉(陵)자를 따서 공릉동이라 하였다.
비실골(비선골,새술막마을) : 원자력병원에서 이어지는 노원길과 화랑로와 만나는 근처지역(서울여자대학교 근방지역) 태·강릉이 조성되면서 동원된 인부 및 관리들이 드나들고 조성후 경비 관계로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지고 또한 능을 일반인에게 개방됨에 따라 행락객을 상대로 음식점이 등장하여 새술막의 전통을 잇게되어 불림
무시울(무수동 마을) : 공릉동 172번지 자리(서울과학기술대 자리) 달랑지 고개 북쪽 병원 뒤에 높은 산이 있는데 이곳 뒤편에 신당을 모셔 놓고 무당이 살단 마을이라 붙여진 명칭
달랑지 마을(따블마을) : 공릉동 205번지 일대(한국전력연수원에서 경춘선 철로쪽으로 넘어오는 고개 좌우지역) 수림이 울창하고 호랑이,범과 같은 맹수들이 서식하고 있어 대낮에도 횃불을 들고 종을 울리고 고개를 넘어가야 하기 때문에 달구지에 종을 달고 넘는 고개에서 유래
묘동마을 : 태능 선수촌 자리 이곳은 많은 무덤이 있었고 특히 태·강릉의 능제 준비를 정자각(丁字閣)에서 하므로 묘산이라는 명칭이 유래하고 묘산의 앞쪽에 있어 묘동이라 불림
범다미 마을 : 육사 정문앞 일대 이 일대에서 방목하던 말을 호랑이가 물어 학교 뒤편 골짜기에서 잡아먹었다 하여 붙여짐
하계동 하계동은 한천의 제일 아래쪽에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까지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 가좌동 용동리, 상곡, 상곡리, 오목리, 양재동, 공덕동의 각 일부가 해당하였는데 1911년에는 양주군 노원면 용동리로 되었고 1914년 4월 1일에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하계리로 되었다.
가재울 마을(가좌동,개잘리) : 하계동 12, 250, 251, 256, 266번지 일대 하천이 맑고 깨끗해서 가재가 많이 잡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
용동(龍洞)마을(되룡골) : 하계동 산 34-1번지 일대 조선 개국 직후 이곳에 살던 미꾸라지가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하여 붙여진 마을
방아다리·응개마을 : 용동마을 앞에 있는 들판 개울 둘이 합하여 방아다리처럼 만들어 졌다하여 불림
상곡(上谷)마을 : 하계2동 경춘선 철도 남쪽지역 하계동 가운데 위쪽에 위치한다 하여 붙여진 마을
골말 : 하계동 70번지 일대 골짜기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
중계동 하중계동은 한천의 중간에 위치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의 일부지역으로써 납대동, 광석리, 은행리, 전주리, 오목리, 양재동이었다. 1911년에는 양주군 노원면 광석리로 되었다가 1914년 4월 1일 양주군 노원면과 해등촌면을 합쳐 노해면으로 하면서 노해면 중계리로 하였다.
은행마을 : 주공 6·7단지 아파트 일대, 중계본동 51∼61번지 일대 (중계본동 10통) 이곳에 수령 800여년, 높이 31m, 둘레 6.6m의 은행나무가 있어 붙여진 마을
광석마을(광석동,광석골) : 0번 시내버스 종점 일대(중계본동 9통) 이 마을 끼고 흐르는 개울에 동(銅)성분이 많은 돌이 있는데 해가 뜰 때 돌에서 광체가 난다하여 붙여진 마을
납대울 마을 : 중계동 75-95번지 일대, 영신 여중고 자리 조선 선조때 오음 윤두수가 살았던 마을로 조정에 조공을 모아놓은 곳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
무시울(무수동) : 산 104번지 일대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서 앞이 안 보인다 하여 붙여짐
전주골(전주리 마을) : 광석마을 옆에 붙은 지역 성주 이씨가 사는 마을인 광석리를 전주 이씨가 샀다 하여 붙여짐
밤나무정이 마을 : 중계4동 359번지 일대 밤나무가 있는 마을
상계동 상계동은 원터, 간촌, 당고개, 온숫골, 갈월, 샛말등의 마을이 한천(漢川)의 윗쪽에 위치하여 윗상(上)자에 시내계(溪)자를 붙여지어진 것이다. 상계동을 둘러싸고 있는 수락산과 불암산은 서울의 동쪽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수락산과 불암산 사이의 덕릉고개 일대는 전망이 아름답다. 수락산의 지명은 옛날에 사냥꾼이 산속에서 아들을 찾아 헤매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그 후로 바람이 불때마다 "수락아 수락아" 하는 소리가 들려 수락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벽운동(벽운마을,안골) : 상계동 미주 동방아파트, 은빛아파트, 수락중학교 일대 수락산의 바위가 곳곳에 허옇게 드러나 마치 흰구름이 머무는 것처럼 보여 불림
새말(간촌리,신촌동,새암동,조암동) : 벽운마을과 갈월마을 사이 지역 벽운마을과 갈울 사이에 있다하여 붙여짐
갈월(葛月)마을(갈울) : 수락산 자락 및 상계동 1272번지 일대 수락산 자락 밑으로 우묵하게 들어가 있어서 마치 초승달 모양으로 생긴 마을이라 붙여짐
온수동(온수골 마을,원수동) : 상계9동 주공 14단지와 청원중·고등학교 보람아파트 일대 이곳에 더운물이 솟아 나온다해서 붙여진 이름
도두머리 마을 : 상계9동 보람아파트 일대 진주등의 장식물로 만든 여자아이 댕기를 도두락 댕기라하고 댕기를 맨 머리를 도두락 머리라 해서 부잣집 여자아이의 상징으로 비교적 부촌이어서 붙여진 이름
조두(鳥頭)마을(신두,신머리) : 도봉 면허시험장 자리 옛 원터의 지형이 새의 몸과 날개 부분에 해당되고 면허시험장 쪽이 새의 머리부분에 해당된다 하여 불림
소고지 마을 : 노원구청 자리 이곳은 칡 등 소가 좋아하는 풀이 많아 소를 끌고와 풀은 먹이던 곳으로 소가 많다는 뜻에서 유래
원터(院基洞) : 롯데백화점, 노원전철역, 상계초등학교 일대 이곳은 갈대만 무성하고 인가가 없어서 행인이 몹시 곤란을 당하였으므로 나라에서 院을 세워 행인의 편의를 도와 주었다 하여 붙여짐. 또는 원집의 터가 있으므로 원터라 함
이랑개 마을 : 상계 주공6단지 아파트 자리 들판에 밭이랑이 멀리서 가지런하게 보여 붙여진 이름
당고개 마을 : 상계3동 지하철 4호선 종점지역 숲이 울창하고 꽤 높은 고개가 있어 산짐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돌을 들고 넘었던 고개라 하여 불린다.
|
'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 > 세상 쳐다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봉산 밑 첫마을, 도봉구 道峰區 (0) | 2013.11.27 |
---|---|
국정화 추진 “기억하라 1973” (0) | 2013.11.27 |
2013, 11, 4주차 뉴스클릭 TOP10 (0) | 2013.11.27 |
늦가을 풍경 (0) | 2013.11.27 |
서울생활백서(66) … 어린이집 학부모 에티켓 (0) | 2013.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