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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두 번째로 면적이 작은 구, 금천구 衿川區

草霧 2013. 11. 26. 12:59

 

 

 

 

 

서울에서 두 번째로 면적이 작은 구

 

금천구 衿川區

    

 

Geumcheon-gu

 

서울특별시의 남부에 있는 구

경기도 시흥군 동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63년 가산리·시흥리가 영등포구에 편입되었고, 1980년 구로구로 분리·신설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지방행정구역개편으로 구로구의 시흥동·독산동과 가리봉동 중 일부가 금천구로 분리·신설되었다. 구청 소재지는 시흥동이다.

조선시대 경기도 시흥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시흥군 동면(시흥·안양·신림리)

1936년 시흥군 북면의 일부지역을 경성부로 편입

1949년 경기도 시흥군 동면, 구로(九老도림(道林번대방리(番大方里)가 편입

1963년 동부지역인 가산(加山시흥리(始興里) 편입

1980년 김포군에서 영등포구로 편입된 오류·고척동 등을 합해 구로구로 분구

1995년 남쪽지역인 가산·독산·시흥동이 금천구로 분리 신설

 

 

고려 시대에는 금주(衿州)로 불렸으나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인구가 적은 마을은 주()가 아닌 천()이나 산()으로 개칭하라는 명에 의해 금천현(衿川縣)이 되었다. 조선 정조 때 시흥현으로 이름이 변경되는데 경기도에 시흥시가 있어서 과거의 지명을 다시 되살렸다. 서울 서남권의 중심지로 발돋움하는 금천구는 예로부터 경기지역의 중심지로 자리 잡아 온 유서 깊은 고장이다. 지금의 금천구 지역은 삼국시대에는 백제가 다스렸다고 하나 정확한 고증자료가 없고, 4세기말부터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어 잉벌노현(仍伐奴縣)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잉벌노란 '뻗어나가는 땅 또는 '넓은 들'이란 뜻이라고 한다. 이 명칭은 이후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경덕왕 16(757)에 곡양현(穀壤縣)으로 개명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태조23(940)에 금주(衿州)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이때부터 옷깃 금()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줄곧 금주로 불리다가 조선 태종13(1413)에 금천현(衿川縣)으로 개칭되었다. 금천현이란 이름은 이후 정조 19(1795) 시흥현(始興縣)으로 변경될 때까지 380여년간 불리워 졌다.

 

조선시대의 금천현 관할구역은 동쪽으로는 과천현(果川縣), 서쪽으로는 부평부(富平府), 남쪽으로는 안산군(安山郡), 북쪽으로는 노들나루(露梁津)까지 미치는 매우 광활한 지역이었다. 여지도서(與地圖書)에 의하면 조선후기 금천현은 가호수가 1,873호에 인구는 7,763명이고 행정구역은 6개면 39개 동리였다

 

조선 정조 19(1795)에 시흥현(始興縣)으로 다시 명칭이 바뀌었고 다시 1895년에 시흥군(始興郡)으로 승격되었는데 관할구역은 지금의 금천구와 영등포구, 동작구, 관악구, 구로구 및 안양시와 광명시의 일부지역까지 포함하고 있었으며 군청은 지금의 시흥5동 지역에 있었다.

 

 

서울 면적의 약 2.1%를 차지하며 중구에 이어 서울에서 두 번째로 면적이 작은 구

10개의 행정동과 3개의 법정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행정동 중에서는 가산동의 면적이 가장 크고 독산4동이 가장 작다. 구명은 시흥군의 전 명칭이던 금천현(衿川縣)에서 유래하였다. 199531일 구로구에서 분리, 설치되었다. 금천이란 명칭은 조선시대의 지명인 금천에서 유래했다. 이 지역에는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는 산업단지에 많은 외국인 근로자들의 거주함으로써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동쪽으로 관악구, 북쪽으로는 구로구와 경계를 이루며, 서쪽과 남쪽으로는 서울시의 남서부 경계로서 경기도 광명·안양시에 각각 면하고 있다. 관악산(629m)의 서쪽 기슭에서 안양천에 이르는 지역에 발달된 지역이다. 따라서 금천구는 남동쪽이 높아 해발 390m에 이르며 북서쪽으로 갈수록 낮아지고, 서쪽에는 안양천이 북으로 흘러 한강에 합류한다. 지역의 형태는 신발 모양을 하고 있으며, 1978년에 개통된 남부순환로가 동서간을 따라 구로구, 관악구와 경계를 이루고, 남북간으로는 길게 안양천이 광명시와 경계를 이루면서 경부선이 나란히 지나고 있으며, 이 구간 지하에 새로 건설될 강남도시고속화도로가 통과할 예정이다. 또한 시흥대로가 금천구의 중심부를 관통하여 1번 국도인 경수산업도로, 서해안고속도로와 연결되며, 서부간선도로가 시흥대교에서 연결도로의 역할을 하고 있고 고속철도광명역’(경기도 광명시)이 인접하는 등 서울의 남서부 교통의 요충지가 되고 있다. 이러한 철도와 도로망의 발달은 서울의 남서쪽 제일 바깥부분에 치우쳐 있는 금천구의 지리적 입지의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서울과 지방을 잇는 교통상 요지가 되고 있다.

 

 

1968년에 한국수출산업단지 제2공단, 1973년에 제3공단

가산동에 들어서고 인근에 많은 공장과 주거지역이 밀집해 있어 공기오염 등 환경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공단이 들어서면서 근로자들의 숙소로서 이른바 벌집 또는 닭장집이라고 하는 주택이 건립되기도 하였다. 그 후 공단이 디지털산업단지로 바뀌고 안양천 정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환경이 날로 좋아지고 있다.

 

인구는 행정동별로 볼 때 독산동과 시흥동에 거의 대부분이 거주하는 반면 한국수출산업공단이 입지한 가산동의 상주인구는 구 전체인구의 약 0.7%에 불과하다. 시흥동과 독산동의 주거지역은 서울의 변두리 주거지역의 전형을 이루고 있으며, 불량주택지역이 재개발되고 있다.

금나래아트홀

금나래아트홀도서관

금천구립가산정보도서관

금천구립정보도서관

구민문화체육센터

금천예술공장

금천문화원

금천시설관리공단

금빛휘트니스센터

독산동잔디축구장

금천아트캠프

노동자생활체험관

금천 벚꽂 축제

문전성시-남문시장

 

답골

시홍2동 서울탑동초등학교가 위치한 곳은 탑이세워저 있는 마을이라 단골이라 하였고 탑의 골자기라는 뜻에서 탑시굴이라고도 부른다.

 

비석거리

시흥5동에 800년 이상된 은행 나무 2그루와 시흥 현령의 선정비 4기가 서있는 분 군을 비석거리라고 불렸습니다.

 

 

순흥안씨양도공파 묘군, 호압사 석약사불좌상, 한우물 및 주변호암산성지

서울 호암산성 - 사적 제343

순흥안씨양도공파묘군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4

호압사 석불좌상(약사불) -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8

 

한우물 제2우물지

한우물은 금천구 시흥동 산93-2 호암산 정상 (해발 315m)에 위치하고 있다. 한우물은 용보(龍洑) 또는 용추(龍湫)라고 했다. 통일 신라시대 (6 ~ 7세기경) 축조되었다가 조선시대에 서쪽으로 약간 이동하여 다시 축조되었다. 통일 신라시대는 그 규모가 동서 17.8m, 남북 13.6m, 깊이 2.5m이며, 조선 시대에 축조된 우물은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였다.

 

이 우물은 가뭄 때는 기우제를 지내고 전쟁 중에는 군사용으로 사용되었다. 임진왜란 때 한국의 장군 선거이가 진을 가지고 행주산성의 권율 장군과 함께 외군과 전투하면서 이 우물을 군사용수로 사용하였고, "동국 여지 승람에는 호암산에 옛 성이 있고, 그 성안에는 한 못이 있어 날씨가 가물면 비오기를 빌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가뭄 시에는 기우제를 하였던 것으로 엿보인다. 한편, 조선조 건국 설화와 관련하여 방화용 설도 있다. 그리고 "2 우물지"는 한우물에서 동남 방향으로 300m 떨어진 곳에 있으며, 남북 18.5m, 동서 10m, 깊이 2m 것으로 1990 년의 발굴 결과 밝혀졌다가 아직 복원되지 없다. 산 정상에 있는데 항상 물의 양이 일정 맑고 있기 때문에 신비를 느낀다.

 

 

순흥안씨 양도공파묘역

순흥안씨 양도공파 묘역은 고려말 조선시대에 축조되었으며 금천구 시흥동 산 126-1에 소재하고 있다. 이 곳은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인 양도공(良度公) 안경공(安景恭: 13471421)을 비롯한 그 후손들의 묘 3기가 있고, 묘 이외에도 조선시대 2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사람들에게 세워 준 신도비(神道碑) 3기가 있다. 또한 문인의 형상을 본뜬 문관석(文官石)과 무인의 형상을 하고 있는 무관석(武官石)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사이에 불을 밝히는 장명등(長明燈)이 세워져 있다. 이 곳은 한 집안의 여러 무덤이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 조선초기의 분묘제도를 연구하는 자료로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호암산성터

산성터의 평면 형태는 북동-남서 방향으로 길쭉한 마름모꼴인데 해발325m 능선을 따라 축조한 전형적인 테뫼식 산성이며 자연지형을 잘 이용하여 축성한 것으로 성벽의 총 길이는 1,250m 가량으로 추정된다. 산성이 오랜 기간 방치되어 지금은 약 300m의 성벽만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호암산성의 축성 목적과 시기를 알려주는 직접적인 문헌자료는 없지만 산성 발굴 조사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유적과 산성이 위치한 입지조건, 지형을 근거로 하여 관련문헌자료와 비교한 결과 축성 시기는 통일신라시대 문무왕 12년경으로 신라가 나당 전쟁시 한강을 넘어 수원으로 넘어가는 육로와 남양만으로 침입하는 해로를 효과적으로 방어, 공격하기 위하여 세운 요새로 추정하고 있다.

 

 

석구상

한우물 동북방 50m 지점에 동물석상이 1구 있는데, 이것이 일반인에게는 조선 왕조의 도읍 설화와 관련된 해태상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석상은 경복궁의 해태와 마주보는 위치에 놓아 관악산의 화기를 누름으로써 서울 장안의 화재를 막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석상의 형상이 해태로 보기보다는 개의 형상에 가깝고, 경기읍지(1956) 등의 기록에 따르면 석구상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싶다. 형상의 크기는 길이1.7m, 0.9m, 높이1.0m 가량으로 석상기법이 세밀하고 사실적이어서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으며 발과 꼬리 부분 또한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석약사 불좌상

석약사 불좌상은 금천구 시흥2234에있는 호압사의 약사전에 있습니다. 제작 년대는 16세기 무렵 (추정) 재질은 석재로 높이 102, 어깨 36, 무릎 폭 56200041 일 서울특별시 문화재 자료 제 8 호로 지정되었다. 석약사 불좌상은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낮고 부처님의 머리카락은 세세하게 표현되었으며 얼굴은 넓은 사각형으로 약간 볼륨이 표현되고 있어 고려말 조선 초기의 양식이나 얼굴과 무릎 부분의 손상으로 금칠을 보수했다.

 

 

 

호압사

금천구 시흥2234번지에 있는 호압사는 조선조 태조 2, 임금의 명에 의해 문맹 대사가 창건 이래 1841 년에 수축하고 1935 년에 다시 약사 전 6 사이를 개축 했다. 금천구에서 유일한 전통 있는 사원, 호압사는 창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태조가 조선을 세우고 궁전을 건설 때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고 여러 번 지은 궁전이 무너져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어둠 속에 반은 호랑이, 절반은 어떤 모습 모르는 이상한 괴물이 나타나 눈에서 불을 내뿜으며 건물태우려고 했다. 태조가 괴물에게 화살을 쏘라고 하였고, 화살은 빗발처럼 쏟아졌으나 괴물은 아랑곳없이 궁궐을 무너뜨리고 사라졌다.

 

태조가 침통한 마음으로 침실에 들어갔을 때 어디선가 한양은 비할 데 없이 좋은 도읍지로다"라는 노인의 힘찬 목소리가 들렸다. 태조가 깜짝 놀라 "누군가"고 물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장군이 걱정하고 계신 것을 해결해 드리려고 왔습니다"고 말했다. 태조가 어떤 좋은 생각이 있냐고 묻자 노인은 저 멀리 보이는 한강 남쪽에 있는 산 봉우리를 가르켰다. 태조는 달빛 속에서 노인이 가리키는 곳을 보고 깜짝 목소리를 높였다. "호랑이이다! 그 호랑이의 머리를 산봉우리가 한양 (한양)을 내려다보고있다."이라며 태조는 노인에 그 산 봉우리의 기운을 봉인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말했다. 노인은 "호랑이는 꼬리를 밟히면 꼼짝 못하는 짐승이기 때문에 저렇게 호랑이 모양의 산 봉우리의 꼬리 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롭다"고 말했다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 다음날부터 여기에 절을 지어 호압사"라고 명명했다.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19251226일 매문사(賣文社)에서 발행한 시집 '진달래꽃'은 시인 김소월(金素月, 본명 : 廷湜, 1902.8.6~1934.12.24)이 생전에 발간한 초판본 시집으로 토속적, 전통적 정서를 절제된 가락 속에 담은 시 작품을 많이 수록한 점이 고려되어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진달래꽃'은 소월의 사후에도 여러 출판사에 의해 시집이 발간될 정도로 우리 민족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품의 하나로 손꼽히며, 이 시집에는 고대 시가인 '가시리''아리랑'의 맥을 잇는 이별가의 백미인 '진달래꽃'을 비롯하여 '먼후일', '산유화', '엄마야 누나야', '초혼' 등 주옥같은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법정동 기준 3, 행정동 기준은 12

시흥(始興가산(加山독산(禿山)

 

독산3동에선 2006년부터 "문화마을 만들기"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민둥산 독에 담긴 독산동 사람들의 푸른 이야기"라는 주제로 다양한 공공미술 사업이 진행 중이다.

 

까치머리 독, 대머리독자를 사용한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 산봉우리에 나무가 없어 벌거숭이 산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강희(본관 : 衿川, : 禿山)의 말에 의하면 지금의 시흥I C에서 문성초등학교 부근이 산이었으나 한성 외부에 있는 까닭에 도끼로 찍히고 소나 염소 따위에게 먹힘을 당하여 벌거숭이가 된 데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조선조 중기 이전부터 독산이라 부른 것이 확인된다.

 

196311일 시흥군 동면 5개리(가리봉, 독산, 시흥, 신림, 봉천)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편입(관악출장소 관할)되면서 가리봉리와 독산리를 합쳐 행정동 명칭을 가리봉리의자와 독산리의자를 따서 가산동이라 정했다. 1970518일관할구역 변경 조례에 의하여 가산동을 가리봉동으로 변경(법정동명은 가리봉동, 독산동)했으며, 1975101일 관할구역 변경시 가리봉동, 독산동으로 분리하여 각각 법정동명과 행정동명을일치시켰다. 199531일 분구시 63년도부터 70년도까지의 행정동명을 따서 가산동이라 하였다.

 

시흥동은 글자 그대로일어난다, 뻗어난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어학적으로 풀이를 해보면 고구려때 이지역을 잉벌노(仍伐奴)라 불렀는데 잉벌(仍伐)으로 느르늠의 음전(音轉)으로 연장을 뜻하며 노()의 음은 내()의 음차(音借) 라고 하여또는평지를 뜻하기 때문에 잉벌노란늠내로 연장지, 즉 뻗어 나가는 땅이라는 뜻으로서시흥과 잉벌노의 상통함을 알 수 있다. 미루어보건대 통일신라 경덕왕때 이곳을곡양현으로 했던 것도이와 관련이 있는 듯하며, 고려 성종때 금주현의 별칭을 시흥이라 한 뜻을 이해할 수 있다.

 

 

 

 

 

 

 

가산동(加山洞)

1995년 구로구에서 금천구가 분구될 때 가리봉동 중 남부순환로의 남서쪽에 위치하던 가리봉1,3동 일부를 금천구에 소속하게되어 가산동이라 하였다. 가리봉동의 대부분 지역이 포함되었다. 가산동의 명칭은 1963년 편입시 가리봉리과 독산리 통합하여 쓰였던 명칭에서 유래한다.

인근의 加里峰洞자와 독산동(禿山洞)자를 따서 명명한 이름.

조선시대 : 京畿 始興郡 東面 加里山里

 

 

독산동(禿山洞 )

1914년 독산리와 문교리(文橋里)를 합쳐 시흥군 동면 독산리라고 불렀다. 독산동의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의 산봉우리에 나무가 없어 벌거숭이 산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姜曦의 호가 禿山이었는데 어느 사람이 마을 이름을 따서 禿山이라고 호를 붙였는가 아니면 딴 뜻이 있었는가하고 물었다. 강희가 대답하기를 내 집 뒤에 산이있는데 벌거숭이 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독산이라고 한다. 원래는 나무가 있었는데 漢城郊外에 있은 까닭에 도끼로 찍히고 소, 염소 따위에게 먹힘을 당하여 벌거숭이가 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면 조선시대 중기 이전부터 독산이라 부른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 말까지는 경기도 시흥군 東面에 속한 禿山里였다. 1963년 서울시의 행정구역 확장이 되면서 종전의 시흥군 동면의 독산리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었다. 동시에 관악출장소가 설치되면서 독산동은 영등포구의 관악출장소 관할 아래에 있으면서 가리봉리와 합쳐 加山洞으로 명명되었다.

 

 

시흥동(始興洞)

시흥동(始興洞) 동명의 유래는 글자 그대로 '일어난다, 뻗어간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으로 조선 正祖 19(1795) 21일 금천현(衿川縣)의 행정지명을 시흥현(始興縣)으로 개칭하면서부터 불리어지기 시작한 이름이다. 고구려 때 잉벌노(仍伐奴)였던 것이 통일신라 때는 곡양(穀壤)으로 되었으며, 고려 때 금주(衿州)라 하던 것을 조선시대에 이르러 금천(衿川)이라 하였다. 정조 때 시흥현(始興縣)으로 개칭한 후 1895526일 시흥군(始興郡)으로 승격되었다.

 

관악구의 줄기인 삼성산(三聖山) 언저리에 위치하고 있는 시흥동의 조선시대 자연부락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돌팍재는 돌이 많아 인근에서 집을 지을 때 이곳의 돌을 파냈으므로 해서 생겨난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실상 삼성산은 해발 455.8m의 산이지만 관악산의 형세가 그러하듯 바위산이다. 때문에 호암(虎岩)이라든지 하는 동물모양의 암석을 비롯, 나무보다는 바위가 더 많고 이 산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고개이므로 돌팍재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삼성산은 고려 말엽 불교계를 이끌던 지공(指空;?~1363), 무학(無學;1327~1405), 나옹(懶翁;1320~1376)의 세 고승이 이 곳 산에 올라 각기 수도할 자리를 잡고 정진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둠배꿀은 삼성산 아래에 있는 마을 이름의 하나로 동구 밖에 있다 하여 '동구밖 골'이라 하였는데 점차 동밖골동박골둠배꿀로 음이 변한 것으로 보여진다. 독산동에서 말뫼(斗山)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뫼고개라 하는데 이는 말머리 모양으로 생긴 고개라는 뜻에서 말머리(馬頭)산이 말산(馬山)이 되고 다시 말()과 음이 같은 말()로 바뀌어 斗山 또는 말뫼라는 이름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예부터 도살장이 있던 곳을 부장촌이라 하는데 시흥동에 유난히 많은 짐승이름의 고개라든지 바위가 있는 것은 도살장이 있었기 때문에 여겨진다. 지리적으로도 시흥에 행궁(行宮)이 있었고 정조가 행차하면 한양에서부터 육류의 운반이 사실상 힘들었기 때문에 행궁에서 소요할 육류의 도축장이 필요했을 것이다.

 

시흥4동 지역을 새재미라 한다. 시흥역 주변을 빌소라 하였으며, 현 탑동초등학교가 있는 시흥2동 지역에는 탑이 세워져 있던 동네라 하여 탑곡(塔谷) 혹은 탑골이라 하였고 탑골의 골짜기라는 뜻에서 탑시굴이라는 이름도 붙여졌다. 841번지 일대인 시흥초등학교 주변은 송노골이라 하였다. 또 시흥5동 일대를 읍내라고 불렀는데 현재도 토착인은 옛날의 전래동명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 관악산의 여맥이 이 마을 전역에 미치어 그런지 마을 뒤 ()芝山에는 기묘한 바위들이 있어 예부터 이 마을 사람들은 바위에 재미있는 애칭을 붙여 놓았다.

 

삼성산의 형상이 호랑이 모양을 닮았기 때문에 호암산(虎岩山)이란 異名을 갖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시흥2동 새봄교회 바로 앞에 위치한 칼바위는 바위가 칼처럼 뾰쪽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쟁기바위, 보습바위라고도 한다. 마치 칼자루를 옆으로 뉘어 놓은 듯한 이 바위는 임진왜란 때 일본 장사와 우리나라 장사가 턱걸이내기를 하던 중 일본장사가 99번을 하고 백번째 매달리는 순간 바위 밑으로 떨어지면서 바위의 뾰쪽한 끝이 쪼개어져 나갔다고 한다.

 

이 바위가 세워진 틈새는 겉으로 보기에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이나 속은 매우 넓어서 장정 스물 대여섯 명이 능히 앉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인근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여름철 피서지가 되기도 한다. 또 이 칼바위의 틈새는 나라에 난리가 났을 때 사람들의 피난처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가까이는 6.25동란 때에도 이곳에 숨어서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기다린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또 장사가 오줌을 누자 오줌줄기 때문에 바위 한가운데가 패여 나갔다는 팽이바위와 한우물에서 곧바로 능선을 따라가면 각시가 앉아 있는 형상을 한 각시바위도 있다. 각시바위는 현재 과천을 행해 돌아앉아 있는데 과거에는 시흥을 향해 있었지만 어느 아낙네가 과거보러 간 낭군이 금의환향하길 학수고대하며 과천 쪽으로 돌아앉는 바람에 과천만 발전하고 시흥은 뒤쳐졌다고 한다.

 

검지산(黔芝山) 정상에는 호랑이가 걸터앉아 잇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호암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다음 이 바위의 북쪽에 돌사자를 묻고 바위의 남쪽에는 石犬(돌로 만든 개)4마리를 묻었다고 한다. 이것은 이곳 호랑이로 하여금 북쪽을 두려워하고 남쪽의 개는 불쌍히 여기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시흥군읍지,1899)

 

시흥2동에는 행궁지가 남아있다.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존하고 양주 배봉산(拜峰山)아래에 있던 영우원(永祐園)을 수원 화산(華山)으로 천봉(遷奉)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하는 동시에 수시로 능행을 하였다. 능행길은 동작동을 거쳐 과천으로 가는 것이 정로였으나 그 길 가운데는 사도세자의 처벌을 주동한 김약로(金若魯) 형의 무덤이 있어 정조는 금천, 안양으로 노정을 바꾸었다. 19(1795)에는 안양의 토교(土橋)였던 만안교(萬安橋)를 돌다리로 바꾸고 왕의 능행을 위해 이 곳에 행궁을 지었다. 이 행궁은 옛 관청자리였다고 하며 행궁의 규모는 114이나 되었다고 한다. 정조가 융릉(隆陵)으로 참배할 때마다 이 행궁에 들렀으며 이 때 금천현을 시흥현으로 개칭하였다.

 

이곳 266번지 일대는 수도경찰청장, 초대외무부장관과 1952년에는 국무총리를 역임한 청랑 장택상(滄浪 張澤相)의 별장이 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별장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이곳의 별장은 흔적조차 없고 인근의 상점들에 인용된 '별장수퍼마켓' '별장약국'등에서 이 지역일대가 별장이었음을 겨우 확인해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시흥동 산 93-2번지에 서울특별시지방문화재 제10호인 天井(한우물,龍湫)이 있다. 예부터 관악산 봉우리의 큰우물이라는 뜻으로 불리었던 이 천정은 길이 22m, 12m의 작은 연못 규모의 우물로 가뭄때에는 기우제를 지냈으며 전시에는 군용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호압산(虎壓山)에 옛성이 있으며 그 성안에는 한 못이 있어 가뭄이 심하면 비 내리기를 하늘에 빌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 군용에 대비했다는 것은 옛 성이 이곳에 있었는데 석축둘레가 1,681이라고 한 것으로 보면 성중에 수비군이 주둔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으며 유사시에는 다수의 군인이 합군 했을 것으로 추측되어 음료용으로 쓰였을 것으로 예측된다. 또 하나는 임진왜란 때 선거이(宣居怡) 부대가 진을 쳤던 자리가 이 부근이므로 군인의 음료용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마을 뒷산에 호압사(虎壓寺)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을 세운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태조가 조선을 개창하고 궁궐을 세울 때 전국의 목수와 많은 역군을 동원하였으나 일이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여러 차례 지붕에 흙을 덮었으나 밤만 되면 비가 내려 곧 바로 무너져 다음날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이에 태조가 몸소 거동하여 일을 독촉하였지만 여전히 일의 진행은 잘 되지 않았다. 태조가 몹시 초조해 하던 차에 어느날 밤 어둠 속에서 괴물이 나타났는데 반은 호랑이고 반은 형체조차 알 수 없는 이상한 동물이었다.

 

이 괴물은 눈으로 불길을 내뿜으며 대궐 가까이까지 와서 건물을 들이받으려는 자세로 부르르 떨고 있었다. 이 대 태조는 괴물에게 화살을 쏘라고 하였고 그와 동시에 화살이 빗발처럼 괴물에게 쏟아졌으나 괴물은 화살에 아랑곳없이 궁궐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태조가 직접 활에 화살을 메워 쏘려고 할 때 궁궐은 무너지고 괴물은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태조는 침통한 모습으로 궁궐로 돌아와 침실에 들었을 때 어디에서인지 "한양은 비할데 없이 좋은 도읍지로다" 라고 하는 노인의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태조는 의아해서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건 아실 것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장군께서 심려하고 있는 것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릴까 하여 이곳에 왔습니다"고 하였다.

 

태조는 무슨 묘안이 있는가고 공손히 물었다. 그 노인은 저 멀리 아득히 보이는 한강 남쪽 산봉우리를 보라고 가리켰다. 태조는 달빛 속에서 노인이 가리키는 곳을 보다가 깜짝 놀라 소리를 쳤다. "호랑이다! 저 호랑이 머리를 한 산봉우리가 한양을 굽어보고 있다" 하고 태조는 노인에게 저 산봉우리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노인은 "호랑이란 꼬리를 밟히면 꼼짝 못하는 짐승이니 저처럼 호랑이 형상을 한 산봉우리의 꼬리 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입니다" 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 다음날부터 이곳에 절을 짓고 호압사(虎壓寺)라고 명명하였다.

 

시흥의 ,,3로 유명한 사람은 인재 강희안(仁齋 姜希顔;1418~1464)과 자하 신위(紫霞 申緯)라고 한다. 인재의 詩思畵趣는 왕유(王維)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그 아우인 사숙재 강희맹(私叔齋 姜希孟)이 평한 바 있다. 특히 인재의 글씨는 진체와 송설체에 능했으며 그림 가운데 '고사관수도'는 남송의 원체화풍을 발전시킨 명대 절맥화풍을 반영한 것으로 회화사적 의의가 크다. 또 인재의 아우 강희맹(1424~1483)도 시흥의 농업 전반을 기술한 '금양잡록(衿陽雜錄)'을 저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