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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명의 장수한 노인'(九老)이 있었다는 전설, 구로구 九老區

草霧 2013. 11. 22. 16:45

 

 

 

 

 

'9명의 장수한 노인'(九老)이 있었다는 전설

    

 

구로구 九老區

  

  

Guro-gu (Jiulao)

 

 

서울특별시의 남서부에 있는 구

구청 소재지는 구로동이다. 조선시대 경기도 시흥군 지역 지역이었으며, 경기도 시흥군 동면 구로리·도림리·가산리·시흥리에 속했던 지역으로 1949년 구로리와 도림리가, 1963년 가산리, 시흥리가 영등포구에 편입되었다가 1980년 구로구로 분리·신설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행정구역개편으로 시흥동·독산동과 가리봉동 중 140~153, 234~239번지가 금천구로 신설되어 분구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 지역은 경기도 시흥군 북면(도림·구로리)과 동면(독산·가리봉·시흥리), 그리고 경기도 부천군 계남면(고척·개봉·오류·궁리)

1936년 시흥군 북면의 일부지역을 경성부로 편입

1949년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이 확장되면서 경기도 시흥군에 속해 있던 구로(九老도림리(道林里)가 영등포구로 편입

1963년 동부지역인 가산(加山시흥리(始興里) 등은 시흥군 동면(東面)에 속했던 것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편입되어 관악출장소 관할, 서부지역인 소사읍(素砂邑 : 지금의 부천시)의 일부는 오류출장소 관할

1980년 김포군에서 영등포구로 편입된 오류·고척동 등을 합해 구로구로 분구

1995년 가산·독산·시흥동이 금천구로 분리

    

 

옛날 이곳에 '9명의 장수한 노인'(九老)이 있었다는 전설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면적은 서울특별시 면적의 약 3.3%를 차지한다. 인구는 개봉2동이 가장 많다. 제조업 중심의 공업단지인 구로공단이 2000년에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이름을 바꾸었다.

 

동쪽으로 관악산 능선을 경계로 관악구와 접해 있고, 서쪽은 부천시, 남쪽은 안양시·광명시, 북쪽은 도림천을 경계로 영등포구·양천구와 접해 있다.

 

서쪽으로는 경인선과 경인로를 따라 도시가 발달하였는데 해발 150m 이내의 낮은 구릉으로 되어 있고, 남쪽으로는 안양천과 경부선을 따라 저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구 중앙에 안양천이 흐르며 김포준평원(金浦準平原)으로 이어진다. 199531일에 남쪽 지역이 금천구로 분리됨에 따라 현재의 지형을 이루었다. 이 지역의 중심지인 구로동에서 이름을 얻었다.

    

 

1971년 특히 당시에 구로공업단지의 전신인 구로수출산업단지가 들어섰다.

구로구의 공장지역은 한국수출산업단지가 들어선 구로동과 가리봉동이 중심을 이루었는데, 이곳은 영등포 공업지역과 연결되어 공장지대로서의 인상이 강화되었다.

 

근래에 구로동과 이어진 가산동 일대의 공업단지는 시대변화에 따라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면모를 바꾸었다.

 

구로지역이 공업단지가 된 것은 교통 외에도 풍부한 수자원, 풍부한 노동력, 그리고 저렴한 토지 가격 등의 유리한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공장이 밀집하여 안양천이 오염되어 환경파괴문제가 심각해지기도 하였다. 그 후 공장이 이전되고 디지털산업단지로 바뀌고 안양천 정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환경이 날로 좋아지고 있다.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가 들어선 구로동·가리봉동 주변과 영등포공업지역에 연결되어 가장 먼저 공업지대로 자리잡은 신도림동·고척동 주변지역에는 공장지대가 형성되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1965년부터 조성된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의 제1·2·3단지는 공업용지의 취득, 안양천과 도림천으로부터의 공업용수 공급, 경부선·경인선 및 국도와의 접근, 영등포공업지대의 기존시설 이용, 구로지역의 풍부한 노동력 수용 등의 용이한 이점을 바탕으로 입지했다.

 

1967년에 완공된 한국수출산업 제1공업단지는 구로동을 중심으로 섬유와 전자제품업체들이, 1972년에 완공된 제2단지와 1976년에 완공된 제3단지는 가리봉동을 중심으로 봉제와 전자제품업체들이 각각 입주해 있다.

    

구의 서쪽지역은 낮은 구릉지를 이루며, 안양천이 흐르는 동부지역은 경인선·경수선 지하철 제2호선이 개통되면서 구로역·신도림역·개봉역·오류역 주변에 큰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궁동·온수동 등은 개발제한구역에 묶여 주로 밭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안양천을 경계로 동서로 생활권이 나뉘어 있어 지역간 연계 체계가 다소 미흡하며, 오류2, 수궁동 지역에 개발제한구역(4.96, 구면적의 24.6%)과 시계경관지구(2.1, 구면적의 10.4%) 등의 미개발 지역과 함께 서울남부교도소·구치소 등 도심 부적격 시설이 위치해 있어 장기적으로 경인로를 축으로 신도림 · 구로역세권, 서울남부교도소·구치소 이적지, 천왕동 · 항동 지역을 잇는 종합적인 도시 개발이 필요한 지역이다.

    

 

서울특별시의 남서관문

서해안시대의 중심축인 김포국제공항, 인천항, 서해안고속도로와 인접한 서울특별시의 남서관문으로서 경부선 · 경인선 철도와 전철 1 · 2 · 7호선, 경인 · 경수국도가 연계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경인선과 경부선이 분기하는 구로역은 한국의 철도가 한곳에 모이는 지역이며, 경인가도와 중부·남부 지방의 국도와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 또한 남부순환도로, 지하철 2호선, 공단로 등과 연계되어 구내외를 원활히 연결하고 있다.

 

 

고척공구상가

구로기계공구상가

중앙유통단지

아트밸리예술극장

구로구민회관

프라임아트홀

예술나무씨어터

신도림테크노마트 야외무대

구로문화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이해교육원

구립소년소녀합창단

고척근린공원

궁동저수지 생태공원

온수도시 자연공원

올레길

구로기계공구상가단지 九老機械工具商家團地

구로디지털 벤처밸리

경제적 요구와 정치적 제도개선의 요구가 결합된 최초의 투쟁-구로동맹파업(經濟的 要求政治的 制度改善要求結合最初鬪爭-九老同盟罷業)

구로 노동야학에서 다문화교육으로, 구로 교육 약사(九老 勞動夜學에서 多文化敎育으로, 九老 敎育 略史)

구로를 대표하는 점프 구로 축제(九老代表하는 점프 九老 祝祭)

구로의 밝은 미래, 역동하는 안양천(九老의 밝은 未來, 力動하는 安養川)

노동문학의 산실, 구로공단과 가리봉동(勞動文學産室, 九老工團加里峯洞)

노동자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벌집촌(勞動者들의 哀歡이 서려 있는 벌집)

농촌 진흥 사업의 시험장이던 항동의 원종장(農村 振興 事業試驗場이던 航洞原種場)

산업 도시에서 디지털 여가 도시로, 구로의 여가 도시 프로젝트(産業 都市에서 디지털 餘暇 都市, 九老餘暇 都市 프로젝트)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경인선과 구로역(庶民들의 哀歡을 담은 京仁線九老驛)

서울의 옌벤족마을, 중국동포타운(서울의 옌벤마을, 中國同胞타운)

소통·배려·화합으로 함께 여는 새 구로시대, 구로비전 2020(疏通·配慮·和合으로 함께 여는 새 九老時代, 九老비전 2020)

열린 교정 밝은 사회로 가는 디딤돌, 영등포교도소(열린 矯正 밝은 社會로 가는 디딤돌, 永登浦矯導所)

첨단 IT밸리로 성장한 서울디지털산업단지(尖端 IT밸리로 成長한 서울디지털産業團地)

첨단 미래형 도시 재생 사업으로서 도시 브랜드 '카이브'(尖端 未來形 都市 再生 事業으로서 都市 브랜드 '카이브')

한국 최초로 세워진 수출 산업의 전진 기지,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韓國 最初로 세워진 輸出産業前進基地, 韓國輸出産業工業團地)

    

 

 

 

 

매우 적은 편으로 유진오씨 별장, 원각사, 관음사, 정선옹주 묘, 함양 여씨 묘역 등이 있다.

여계묘역 呂稽墓域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0

류순정·류홍부자묘역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2

평강성서유물박물관 平康聖書遺物 博物館

정선옹주묘 신도비 貞善翁主

항동기찻길

고척동 고인돌

인천과 서울의 쉼터, 오류동 주막거리 객사(仁川과 서울의 쉼터, 오류동 酒幕거리 客舍)

제례에서 놀이로, 수궁동 도당제(祭禮에서 놀이로, 水宮洞 都堂祭)

충신 부자 유순정·유홍 묘역의 비화(忠臣 父子 柳順汀·柳泓 墓域祕話)

케네스 바인 기증 유물(케네스 바인 寄贈 遺物)

고척동 고인돌(高尺洞 고인돌)

능묘(陵墓)

경주정씨 문중묘(慶州鄭氏 門中墓)

권신중 묘(權信中 墓)

노숭 묘(盧嵩 墓)

사천목씨 묘역(泗川睦氏 墓域)

순흥안씨 양도공파 묘군(順興安氏 良度公派 墓群)

신윤단 묘(申允丹 墓)

안경공 묘(安景恭 墓)

여계 묘역(呂稽墓域)

유홍 신도비(柳泓 神道碑)

이세분 묘(李世芬 墓)

이함장 묘(李諴長 墓)

전의이씨 묘역(全義李氏 墓域)

정선옹주 묘역(貞善翁主 墓域)

평산신씨 묘역(平山申氏 墓域)

개웅산 봉수대 터(開雄山 烽燧臺 )

개화산 봉수대(開花山 烽燧臺)

단군전 터(檀君殿 )

대원군 별장 터(大院君 別莊 )

방아다리 터

삼공구 사택 터(三工區 社宅 )

온수산 봉수대 터(溫水山 烽燧臺 )

유진오 별장 터(兪鎭午 別莊 )

천왕사 터(天旺寺 )

행궁 터(行宮 )

성곽(城郭)

계양산성(桂陽山城)

부평도호부 청사(富平都護府廳舍)

구 유일한 박사 별장(舊 柳一韓 博士 別莊)

    

 

 

법정동 10개 기준, 행정동 기준은 19

구로(九老신도림(新道林고척(高尺개봉(開峰오류(梧柳(온수(溫水가리봉(加里峰천왕(天旺()

    

 

 

 

 

아홉 노인의 장수 마을 구로 구로동

오래된 마을 구로

아홉 노인이 정착해 장수했다는 마을 구로(九老)

1997년에 발간된 구로구지에 따르면, 구로동은 조선 영조 때까지만 해도 경기도 금천현 상북면의 구로리였으나 1795(정조 19) 금천현이 시흥현(始興縣)으로 개칭됨에 따라 시흥현 상북면 구로리가 되었다. 191431일에는 조선총독부령(朝鮮總督府令) 111호에 따라 경기도 시흥군 북면(北面) 구로리가 되었고, 19364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따라 경기도 시흥군 동면(東面) 구로리가 되었다.

 

그리고 1949813일 대통령령 제159호에 따라 영등포구 구로리가 되었다가 1950315일 서울특별시 조례 제10호인 서울특별시 동리 명칭 중 개정의 건에 따라 영등포구 구로동이 되었다.

 

1872(고종 9)에 만들어진 시흥현지도에는 가리봉 서쪽에 구로리가 표시되어 있다. 구로리를 두고 강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구로리의 북쪽으로 흐르는 강에는 기탄교가 놓여 있고, 서쪽으로 흐르는 강에는 소기탄교가 놓여 있다. ‘기탄은 지금의 안양천을 일컫는다.

 

한자로 구로를 쓸 때 구로는 아홉 구()에 늙을 노()로 쓴다. 말 그대로 아홉 명의 노인을 뜻하는 것이 구로동이다. 이를 증명하듯 구로에는 예부터 두 가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모두 숫자 9와 관련된 내용들이다.

 

대한노인회 구로구지회장 김용덕[1935년생] 씨는 어릴 때부터 아홉 명의 노인이 장수한 마을이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 ‘구로는 곧 아홉 노인의 장수를 일컫는다고 했다. 또한 숫자 9와 노인이 들어가는 것은 같지만 그들이 마을을 지켜 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고 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원래 구로 지역은 지대가 낮아서 비가 많이 오면 마을이 잠기기도 했는데, 어느 해 마을에 비가 많이 와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피난을 떠났으나 아홉 명의 노인이 끝까지 남아서 마을을 지켰다는 것이다. 김용덕 씨는, 두 이야기 중 어느 것이 맞는지는 확신하지 못하지만 숫자 9와 노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구로라는 지명을 만들어 낸 것은 분명한 듯하다고 말했다.

 

서울 서남단에 위치한 구로동은 현재 구로순복음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구로본동과 걷고싶은거리·신구로유수지생태공원이 있는 구로1, 고려대학교 구로병원이 있는 구로2, 구로디지털단지가 있는 구로3, 남구로역이 들어선 구로4, 구로역과 신도림테크노마트가 들어선 구로5, 2호선 대림역이 위치한 구로6동 등 15개 행정동과 10개 법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로동에는 2010531일 현재 총 6559가구에 142936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특히 구로3동의 경우 최첨단 디지털 단지로 변화하면서 IT 회사가 밀집하고 하루 유동 인구가 11만 명에 육박하면서 과거 굴뚝 공장의 모습은 흔적조차 없어졌다.

 

도시의 외관은 현대화되었지만 그러나 구로동에는 예부터 내려오는 전설은 물론이고 그 전설과 관련된 상징물들이 마을 곳곳에 유달리 많이 전해 온다. 그 중에서도 구로동 340번지 구로구청에 세워진 노인상과 지팡이 조형물, 느티나무 그림 속 아홉 개의 원이 그려진 구로구 로고, 구로거리공원의 지팡이 조형물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조형물들은 구로동 주민이라면 한 번쯤 접했을 법하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이야기는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부자는 아니어도 끼니 걱정 없던 동네

구로동 과 가리봉동에서 만난 노인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었다. 바로 장화 없이는 못 사는 동네지.”,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으면 못 산다 했어.”라는 말이었다. 가리봉2동 골말경로당에서 만난 윤묘병[1927년생] 씨는 내 어렸을 때는 여기 장마라도 오면 난리가 났었지.”라는 말로 옛 시절의 고단함을 털어놓았다. 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장마철이면 지금의 대림역과 구로디지털단지역 아래에 있는 도림천 물이 넘쳐서 근처에 있는 도로며 집들까지 집어삼켜 여간 큰 불편을 겪은 게 아니었다고 한다.

 

[천수답 농사로 끼니 걱정 없던 동네]

50여 년 전만 해도 지금의 구로구 구로3동과 구로4동은 농사를 짓던 평야 지대였다. 가리봉동에 있는 낮은 언덕은 시흥으로 가려면 꼭 넘어야 하는 이었다. 구로동은 인근에 안양천과 도림천이 있고 땅도 평평해서 농사가 발달했다. 구로구에서 500년째 대를 이어 살아오고 있는 박명재[1932년생] 씨는, “여기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자는 아니어도 그래도 먹고사는데 지장 없는 사람들이었어요.”라고 말했다.

 

산업화가 일어나기 직전인 1960년대 초반만 해도 구로동 땅은 대부분 농지였다. 모두 논에는 벼를 심고 밭에는 푸성귀를 가꾸었다. 높지 않은 구릉진 산에는 일제 강점기부터 심어 놓은 복숭아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인근의 도림천과 안양천에서 물을 끌어 오기도 쉬웠고, 하늘에서 내린 비로 농사를 지어도 충분했다.

 

[도림천 범람으로 피해를 입던 구로동]

40~50년 전 농사짓는 시골 풍경이 다 그랬듯이 구로동 지역도 여느 농촌과 다를 것이 없었다. 소달구지로 짐을 싣고 다녔고 지게를 지고 논두렁을 걸어 다녔다. 박명재 씨는 당시는 농사짓는 동네였으니 물이 많은 게 좋았지, 너무 많으면 안 되지만…….”라며 유년기에 뛰어놀던 동네 모습을 묘사해 줬다. 박명재 씨의 집은 지금의 구로3동 지역에 있었다. 논에서 조금 더 높은 언덕 초입이었다. 집에서 영등포까지 가려면 논두렁을 지나 좁은 길로 걸어 다녀야 했다. 일제 강점기의 구로동은 여느 농촌의 모습과 똑같았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모습도 달라졌다. 1969년 구로동으로 이사 온 이인엽[1955년생] 씨는, 비가 오면 도림천이 넘쳐서 물난리가 났다고 옛날을 회고했다. 1968년과 1970년에도 태풍이 와서 도림천이 넘쳤다. 이인엽 씨의 기억에, 도림천에서 지금의 보성운수 자리까지 물이 차올랐는데, 지금의 두산아파트 지역과 보성운수 자리는 고도 차이가 있어서 다행스럽게도 동네 일부만 수해를 입었다고 한다.

 

[구로동에서 다리 건너 대림동 가려면 통행료를 냈어]

이인엽 씨가 인터뷰를 하던 중에 재밌는 이야기를 했다. 때는 1970년대로, 구로동에 공장이 많이 들어서면서 사람들이 공장으로 출퇴근을 하던 때였다. 이야기의 핵심은 사람들이 지금의 대림역 아래 도림천에서 나무로 엉성하게 만든 다리를 놓고 돈을 받으며 통행시켜 줬다는 얘기다. 이인엽 씨는 그때 1원인지 얼마인지는 오래돼서 기억을 잘 못하지만 돈을 받고 다리를 건너게 해 줬다.”고 말했다. 그 다리를 건너 대림동 너머에 살던 사람들이 구로공단으로 일하러 다녔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대림역 인근 도림천에서 다리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대림역과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이어지는 2호선 고가 도로는 도림천을 따라서 이어진다. 그 아래는 하천 정비를 통해 안양천까지 이어지는 산책로가 형성돼 있다. 하천 변에는 농구장, 배드민턴장 등 운동 시설을 마련해 놓아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

 

이제는 장마 때가 되어도 물이 차는 지역은 없다. 1990년대 중반 들어 하천이 개발되면서 상습 침수 구역이던 대림역 인근에 빗물배수펌프장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지난 2007년 안양천이 범람하여 인근 고수부지 공원이 모두 침수됐을 때도 구로동에서는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고 한다.

 

구로디지털단지[서울디지털산업단지]

1940년대 구로동 이야기

1940년대에 박명재[1932년생] 씨는 구로동 지역에서 십대를 보냈다. 일제 강점기, 구로와 가리봉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던 시절이기도 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구로동이 시흥군 북면에 속해 있었을 때의 이야기다.박명재 씨는 시흥에 있는 학교를 다니기 위해 요즘 말로 하면 과외를 받았다. 집으로 선생님이 찾아오는 과외가 아니라 마을에 있는 가리봉교회에서 만든 양명강습소를 통해서였다. 양명강습소에는 마을 사람들이 쌀과 돈을 모아서 모셔 온 선생님이 있었다.

 

[무서리하던 등하굣길]

구로동 인근에서 제대로 된 학교는 시흥에 있었다. 걸어서 십리나 되는 길이었다. 시흥국민학교를 들어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들이 섞여서 공부하던 시절로, 일종의 입학시험을 치러야 들어갈 수 있었다. 박명재 씨는 입학시험을 위해 마침 동네에 있던 양명강습소를 다녔다. 덕분에 한 번에 제 나이에 맞춰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국민학교를 들어가기 위해 재수, 삼수까지 했다. 그러니 수업이 끝나고 같이 뛰어놀다 통성명을 하다 보면 박명재 씨보다 나이가 두세 살까지 많은 경우가 허다했다.

 

박명재 씨가 1940년대 구로동을 누빈 건 등하교를 위해서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하굣길. 배도 고프고 장난도 치고 싶었다. 어느 날, 박명재 씨와 함께 구로동에 있는 집을 향해 돌아오던 친구가 밭에 들어가 무를 뽑아 먹자고 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 두 사람은 책가방을 한쪽에 모아 두고 밭으로 들어갔다. 친구가 앞장섰다. 그런데 뒤따르던 박명재 씨는 깜짝 놀랐다. 매일 무가 뽑혀 나가는 것을 수상하게 생각한 밭주인이 몰래 숨어 있었던 것이다. 밭주인은 까만 교복을 입은 아이들을 주시해서 보고 있었다. 앞장섰던 친구는 주인의 손에 잡혔다. 박명재 씨는 에라, 모르겠다하고는 2인분 책가방을 메고 냅다 집으로 뛰었다.

 

박명재 씨의 집안은 그리 넉넉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먹고사는 데 지장은 없었다. 당시 구로동 지역은 농사짓기 꽤 괜찮은 지역이라 인심도 나쁘지 않았다. 곳간이 비어 있지 않을 정도니 서로서로 나누며 돕고 살았다. 어쨌든 당시 친구는 무서리를 하다 걸렸지만 박명재 씨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아 자백하러 갔고, 결국 아버지한테 된통 혼난 기억이 팔순을 앞 둔 지금까지 생생하다.

 

[우마차 타고 다니던 영등포시장]

1940년대 당시 지금의 구로동에 살던 사람들은 대부분 농부였다. 몇몇 사람들은 복숭아 과수원을 했다. 주로 일본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해방이 되고 일본 사람들이 썰물같이 빠져 나가자 그 자리를 한국 사람들이 채우고 농사를 지었다. 인천과 서울을 잇는 철도가 있던 영등포는 인근 지역에서 농사지은 작물을 거래하던 시장이었다.

 

구로동에서도 영등포로 장을 보러 나갔다. 농사꾼들이니 말 대신 소를 탔다. 짐을 싣기도 편하고 논일을 할 때나 밭일할 때는 말보다 소가 더 실용적이었다. 그때는 영등포 장터에 다녀오는 것이 유일한 경제 활동이었다. 한 번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돈이 생겼기에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박명재 씨의 아버지도 그랬지만, 시장에 다녀오는 데는 항상 소소한 문제가 뒤따랐다. 바로 술이었다. 우마차로 꼬불꼬불 십 리를 가야 하는 길인데, 갈 때는 아침 맑은 정신에 일찍 출발하니까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올 때가 문제다. 가져간 쌀이며 보리 따위의 농작물을 모두 팔아 주머니가 두둑하니 기분이 좋다.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탁주 한 잔 걸치게 된다. 오래 만에 만난 인근 동네 사람들과도 술 한 잔 기울인다. 그러다 보면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가는 것이다.

 

언제인가, 집에서 기다리다 지친 어머니는 어린 박명재 씨를 장으로 보냈다. “아버지를 찾아오라.”는 특명이었다. 몇 살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박명재 씨는, “전쟁이 나기 전이고 해방된 후니까 아마 1940년대 후반일 꺼야.”라며 말을 이었다. 장에서 찾아 낸 아버지는 어머니의 예상대로 약주를 많이 한 상태였고, 그 덕에 박명재 씨는 우마차 대리 운전'을 했다고 한다.

 

박명재 씨는 1940년대까지 구로동은 여느 농촌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말한다. 1950년대는 전쟁과 재건으로 농사를 거르는 때도 많았고, 1960년부터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농사를 짓던 땅에 하나둘 공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래서 구로동의 옛 모습은 이제 팔순 노인의 기억에만 남아 있다.

 

도림천과 안양천 사이에 자리 잡은 마을들

[구로동의 자연 마을들]

오랜 옛날부터 구로동에는 각만이마을, 구루지마을, 늑대다리, 주막거리, 상나무재 등으로 불리는 자연 마을들이 있었다. 각만이마을은 현재 구로5동주민센터 서쪽 애경백화점 오른쪽에 있던 마을로, 풍수가들이 앞으로 이 지역에 수만 호의 가옥이 들어설 것이라고 예언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예언이 맞아 떨어진 건지 건물도 많이 들어서고 유동 인구도 많은 지역이 되었다. 각만이마을 뒷동산을 각만이동산이라고 불렀는데, 옛날에는 숲이 우거졌다고 한다.

 

늑대다리 부근 경인로 변에는 주막과 대장간을 포함한 서너 채의 집이 있어 주막거리라고 불렸다. 현재의 경인로 앞 기아산업 중기사업소 일대에 해당된다. 이 주막거리에서 멀지않은 곳에 경부선과 경인선의 분기점이 되는 구로역이 있었는데, 옛날의 주막이 오늘날의 역사(驛舍)가 된 우연치 않은 예이다.

 

구로동 523-29번지에 있던 상나무재에서 늑대다리로 가려면 오른쪽은 산이고 왼쪽은 논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가야 한다. 그런데 늑대다리에 거의 다가서면 산 밑에 겨울에도 얼지 않는 샘이 있었다. 이 물이 효험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인근 마을 사람은 물론 먼 곳에서도 퍼다 먹었으며,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이 샘에 고사를 지내는 사람도 많았다. 이 샘물은 특히 옻 오른 사람이 마시면 백발백중으로 나았기 때문에 옻우물약수터라고 불렀다.

 

구로지마을의 경우, 1965년 한글학회가 출간한 한국지명총람에 따르면 구로리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고, ··하의 세 구로리 중 지대가 낮은 곳의 마을을 구루지라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구로3동으로 구분되는 하구로리구루지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구루지마을 뒤쪽에는 산이 솟아 있고, 산에서 흘러내린 크고 작은 시내에 많은 다리가 놓여 있었다. 그중 구루지마을 뒤쪽에 해당하는 지금의 기아산업 중기사업소 정문 앞으로 흐르는 넓은 내에는 다른 곳과 달리 토교(土橋)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근처의 야산이 낮기는 하나 당시에는 워낙 숲이 무성했고, 마을 뒤쪽 후미진 곳이기에 한낮에도 늑대가 많이 나왔다고 전한다. 또 도둑들이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행인의 금품을 가로채기 일쑤여서 이 다리를 늑대다리라고 불렀으나 지금은 복개되어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한국지명총람에는 군용지밭이란 이름도 있는데, 국방부에 딸린 군용지의 밭이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마을의 서쪽 기슭에 윤씨네 농막과 서너 집으로 새로 생긴 지역은 새말이라고 불렀다. 이외에도 중구로리시꿀이란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안양천과 도림천의 추억]

2010년 현재 구로동에서 안양천과 도림천에서 뛰어놀았던 사람들을 만나기는 어렵다. 도시화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들고난 곳이라 옛 추억을 가진 사람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그래도 1960년대 초반에 구로동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천에서 물고기를 잡던 추억이 있다. 지금도 구로동에 살고 있는 이인엽[1955년생] 씨에게도 그런 기억이 남아 있다.

 

이인엽 씨에 따르면, 구로동에서 대림동으로 넘어가는 도림천에는 돌다리가 몇 개 놓여 있었다고 한다. 1960년대 생겨난 공장들은 대부분 구로동에 있었는데, 공장을 오가는 사람들은 인근 대림동과 가리봉동에 살면서 출퇴근길에 다리를 건너야 했다. 그 중 어떤 다리에서는 통행료를 받기도 했다고.

 

당시 어린 아이였던 이인엽 씨는 도림천과 안양천을 오가며 놀았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구로동 북쪽의 도림천은 구로동 아이들이 주로 놀러가는 곳이었다. 물가에서 멱을 감기도 했고, 물고기를 잡기도 했다. 개천가에 핀 나물들은 동네 아주머니들이 부지런히 뜯어 갔다.

 

구로동 남쪽에 있는 안양천은 1400년경에는 대천(大川)으로 불렀다. 조선 후기부터 대천 또는 기탄(岐灘)으로 호칭되다 근세에 이르러 안양천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1910년경의 안양천은 꽤 굴곡이 있는 사행 하천이었지만, 산업화 이후 도시 개발에 따른 하천 정비로 콘크리트 하천이 되어 버렸다.

 

[세월 따라 모습이 변한 안양천과 도림천]

구로구의 주요 하천인 안양천과 도림천도 개발의 시기를 겪었다. 1970년대에는 도림천 위로 지하철 2호선이 건설됐다. 개천 위에 기둥을 세우고 고가를 놓아 지하철이 다녔다. 지금도 그 모습은 그대로다. 하지만 아래 모습은 바뀌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하천은 썩은 냄새가 나고 오물이 방치된 곳이었다. 사람들은 하천 위로 덮은 아스팔트길로 다녔고 하천은 도로 아래로 흘렀다.

 

변화가 생긴 것은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이다. 한강 고수부지와 이어지는 안양천이 복원됐다. 한강시민공원에서 이어지는 길이 만들어졌고, 주민들이 산책과 운동을 위해 길을 찾았다. 한강에서 시작된 길은 꾸준히 이어졌다. 신도림역 부근에서 안양천과 만나는 도림천 역시 개발됐다. 신도림역에서 대림동으로, 다시 대방동까지 이어지는 도림천 역시 냄새나는 하천의 이미지를 벗었다.

 

2010년 현재 구로구 주민들은 도림천을 따라 운동을 한다. 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조깅을 하며 걷기도 한다. 구로동에서 시작한 도림천 변 길은 대림동과 신도림동을 거쳐 안양천과 만난다. 신도림에서 자전거로 한강까지 불과 10여 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구로디지털단지역에서도 자전거로 여의로를 가려면 천천히 달려도 20여 분이면 된다.

 

물에 들어가 고기를 잡고, 돌다리를 놓고 통행료를 받던 옛 모습은 모두 사라졌지만 이제 도림천은 주민 생활에 건강한 도움을 주는 하천으로 자리 잡았다. 두 개의 물길이 만나는 덕택에 보다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굴뚝 공장 지대에서 최첨단 디지털 단지로 탈바꿈하다

1970년대 연기를 내뿜는 굴뚝 공장은 구로공단[정식 명칭은 구로수출산업공업단지]의 대표 이미지에 다름없었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굴뚝 공장이 남아 있던 구로동은 2010년 현재 구로디지털단지[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완벽하게 탈바꿈해 그야말로 상전벽해를 실감케 하는 곳이 되었다.

 

[교통 편의의 이점을 안고 들어선 구로공단]

1960년대 현 구로3동 지역은 영등포에서 시작해 수원으로 가는 국도가 근접해 있었다. 영등포역과 약 5, 인천항과는 약 25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서 원부자재 수송에서도 다른 어느 지역보다 큰 지리적 이점이 있었다.

 

1967년 공단이 조성되자 공장 입주 유치와 지원책이 뒤따르는 가운데 31개 기업체가 구로공단에 입주했다. 이후 1972년 구로공단 2단지, 1976년 구로공단 3단지가 조성됐다.당시 구로공단의 주력 사업은 노동 집약적인 경공업이었다. 1·2수출공업단지가 가동된 1969년에는 섬유[40.3%] 및 가발[20.4%] 업종이 산업 단지 전체 수출액의 60% 이상을 차지했다.1970년대 이후 전기와 전자의 수출액이 전체 30%를 넘어섰지만, 1980년까지 구로공단 수출액의 50% 이상을 차지하던 것은 섬유·잡화 등의 경공업이었다.

 

[1970년대, 열악했던 업무 환경이 낳은 풍경들]

노동 집약적 산업이 밀집되다 보니 부작용도 많았다. 수출 물량을 맞추기 위해 10대의 어린 여성 노동자들도 하루 14~16시간을 근무하기 일쑤였다. 선일섬유노동조합위원장이었던 김현옥 씨는 서해문집에서 펴낸 내일을 여는 역사에서 한창 바쁘게 돌 때면 새벽 4시 퇴근이 예사였다. 저녁 8시 퇴근은 꿈도 못 꿨다. …… 휴일도 한 달에 첫째·셋째 일요일뿐이었고…… 일당은 하루 130원에서 140원이었다.”고 쓰고 있다. 1970년대 편도 시내버스 요금이 10원이었다.

 

이렇듯 열악한 업무 환경 때문에 구로공단에서는 줄곧 노동 운동이 일어났다. 가장 눈에 띄는 노동 운동은 ‘6·25전쟁 이후 최초의 동맹 파업이라 불리는 구로 동맹 파업이었다.

 

1985년 대우그룹 계열사인 대우어패럴 노조 간부가 연행되자 대우어패럴은 물론 구로공단 1단지에 입주했던 효성물산과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노조원 1000여 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이와 같은 구로공단의 동맹 파업은 1970년대 이후 노동 운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연대 투쟁이었다는 데 의의를 지니고 있으며, 이후 노동자 주도의 노동 운동 단체들이 활발하게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동맹 파업 과정에서 모두 43명이 구속되고, 연인원 370명이 구류를 살았으며, 700여 명이 강제로 사표를 쓰거나 해고당했다.

 

[1980년대, 침체기로 들어선 구로공단]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구로공단은 활기를 잃기 시작했다. 1962년 수출 실적 5480달러에서 시작해 1977100억 달러를 기록하면서 15년 만에 20배 가까운 성장을 이뤘지만, 세계 경제의 침체와 선진국의 신무역보호주의에 따른 수출 부진, 그리고 중화학 부문에 대한 중복 과잉 투자로 인해 수출 산업이 점차 침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임금 상승과 함께 산업 구조가 변화되면서 업체들은 값싼 노동력을 찾아 중국으로 공장 이전을 진행했다. 1992년과 1993년 두 해 동안에만 구로공단에서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등 해외로 생산 공장을 옮긴 업체가 42개나 생겨났다. 수도권 산업 분산 정책이 진행되자 그나마 있던 공장들도 수도권으로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정부는 1995년 재래식 공단을 최신식 첨단 공단으로 재개발할 수 있도록 공업 배치 및 공장 설립법 시행령 개정안을 시행했다. 그리고 다행히 이를 통해 구로공단은 점차 첨단 산업 기지로 변모하게 된다.

 

개발 따라 바뀐 마을의 모습

주경야독의 터전, 야학과 직업 학교를 아시나요

그때는 오히려 비행 청소년이 적었어요. 글 모르는 사람도 야학에 오지만 검정고시를 봐서 더 나은 직장에 가려는 학생도 많았죠. 연령대도 천차만별이었어요.” 1987년부터 2년 동안 천주교구로3동성당에서 운영했던 보스꼬근로청소년학교에서 교감으로 재직했던 최상남[1949년생] 씨의 설명이다.‘구로공단이란 단어가 옛말이 된 지금 야학이란 단어 역시 낯설게만 느껴진다.

 

[1970~1980년대 도시 노동자의 꿈을 키우던 곳, 야학]

한반도에 야학이 생겨난 지도 어언 100년이 넘는다. 1906년 함경남도 함흥군 신중면에 국내 최초 야학인 보성야학이 설립된 이후 2년여 만에 전국적으로 5000여 개의 야학이 생겨났다. 1960년대 야학은 제도권 교육을 보완하며 도시 빈민과 노동자들의 주경야독의 터전이 됐다. 1967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구로공단이 어느 정도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구로동 지역에도 야학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야학은 농민과 도시 빈민, 그리고 구로공단 같은 곳에서 일하는 도시 노동자들의 삶 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18대 한나라당 국회의원 원희룡[1964년생] 씨는 책 나는 서브쓰리를 꿈꾼다에서 공단에서 일하는 여학생들이 하나둘 교실 문을 밀고 들어왔다. 쭈뼛거리며 들어오는 수줍은 가득한 앳된 얼굴들이 나를 황홀케 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 구로공단에서 일했던 제17대 국회의원 심상정[1959년생] 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블로그[http://blog.daum.net/simsangjung/11158048]에서 “12, 13살 어린아이들이 산업체 특별학교에서 밤에는 공부하고 쉬지 못하는 바람에 낮에 일하다가 잠깐만 졸아도 프레스에 손이 오징어처럼 눌리기도 했다.”며 노동 운동에 뛰어든 이유를 밝히고 있다.

 

[200곳이 넘었던 구로공단 야학]

1970년대 구로공단 내에 몇 개의 야학이 꾸려지고 있었는지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다. 노동 운동에 뛰어든 대학생들이 공장에서 일을 하며 야학을 꾸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서울과 경기 지역 야학인 모임인 야학21’에 따르면 1970년대 말 서울 시내에는 200여 개의 야학이 있었다고 한다.

 

1970년 구로공단에는 다양한 야학이 존재했다. 1971~1977년까지 운영된 고등공민학교의 경우, 초등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중학교 과정을 6개월간 이수케 하고 검정고시를 치러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지도했다. 그러나 고등공민학교는 근로자들의 학력이 높아지고 취업 희망자들이 감소하는데다 1977년 산업체특별학급이 문을 열면서 폐교됐다.

 

산업체특별학급은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방식이었다. 초기에는 구로공단과 인접한 대방여자중학교와 영등포여자고등학교, 영등포공업고등학교, 북인천여자중학교,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등 5개교에 총 935명이 입학했고, 1993년까지 총 15466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이 외에도 검정고시 교육 기관인 공단청소년학원을 비롯해 근로여성 교양대학, 공단직업훈련원 등 다양한 교육 시설이 존재했다. 최상남 씨가 교감으로 재직했던 보스꼬근로청소년학교는 원래 경찰서에서 운영하던 남서울직업학교를 구로3동성당에서 인수하여 운영하던 야학이었다.

 

최상남 씨는 “40~50명의 학생이 한 반이었는데 4~5개 반까지 있었어요. 학생들은 청소년부터 40~50대까지 다양했고요.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 수업을 들었죠. 교사들은 현직 교사도 있었고 대학생도 있었고요. 대부분 차비만 받거나 아니면 무료 봉사로 학생들을 가르쳤어요.”라고 회상했다. 그런데 남서울직업학교 때는 경찰서에서 운영했기 때문에 회사에서 학생들의 편의를 잘 봐 줬지만 성당에서 운영하기 시작하자 오히려 학생에게 불이익을 주었고, 학생들이 견디지 못하자 결국 1989년에 폐교하기에 이른다.

 

[구로공단은 사라졌지만 야학은 여전히 소외 계층의 배움터]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야학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1994325일자 경향신문에는 호황 누리던 벌집빈방 수두룩-유흥업소 폐업 속출, 야학도 시들이란 기사가 실렸다. “[중략]…… 최근 변화의 바람은 인력난 및 고임금 등을 이유로 중국이나 동남아 등 해외로 진출하는 업체들이 늘어나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 지난 92, 93년 두 해 동안 구로공단에서 중국이나 동남아 등 해외로 생산 공장을 옮긴 업체는 42개나 된다 ……[중략]……1980년대 민주화 바람을 타고 늘어났던 노동 관련 단체와 야학이 문을 닫고 있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변화이다. ‘노동자대학’, ‘노동종합학교등 노동자 교육 프로그램이 폐쇄되고 50여 명 이상이 북적대던 각 야학도 참가 학생이 없어 속속 문을 닫고 있다.”는 내용이다.

 

현재 구로동에는 섬돌야학한 곳이 남아 있다. 섬돌야학은 원래 종교 단체가 운영하던 곳이었는데, 1991년 이선권 씨가 인수했다. 섬돌야학에서는 현재 주부와 청소년 10여 명이 수업을 듣고 있다. 섬돌야학 대표 이선권[1971년생] 씨는 예나 지금이나 야학은 배움의 기회를 놓친 사람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곳이죠. 올해부터는 국가 지원금도 끊겨 교사들의 자비로 운영하고 있지만 여전히 소외된 이들의 배움터라는 데는 변함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공영 주택과 간이 주택의 구로동 이야기

2010, 구로구 구로3동은 고층 빌딩과 아파트로 이뤄진 삭막한 회색 도시다. 이런 곳에서 1961년에 지어진 공영 주택 600동과 간이 주택 275, 1962년에 지어진 공익 주택 275동에 대한 이야기를 찾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듯싶었다. 그런데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공영 주택과 간이 주택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는 사람들의 증언이 나왔는데, 지난 2006년 완공되어 가장 최근에 지어진 두산아파트가 바로 공영 주택과 간이 주택을 재개발한 곳이라는 이야기였다.

 

두산아파트 공사가 지난 2002년부터 시작됐으니 2002년까지는 사람들이 1960년대 초반에 지어진 주택에서 그대로 살았다는 얘기다. 두산아파트의 재개발사가 바로 구로동 공익 주택의 재개발사라고 말해도 될 만큼 밀접했기에 필자는 두산아파트 재개발을 추진했던 주민자치위원장 이인엽[1955년생] 씨를 만나보기로 했다.

 

[한 지붕 열두 가구]

이인엽 씨에 따르면, 구로3동 지역에는 19611120일부터 1962년까지 공영 주택과 간이 주택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당시는 서울 청계천 등 도심 지역을 정비하던 때였다. 새로 길을 닦고 도시를 정비하느라 6·25전쟁 이후 우후죽순으로 들어선 판잣집을 정리했던 것이다. 지금의 구로3동 지역에 형성된 간이 주택에는 주로 청계천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다. 당시 정부에서는 함석지붕을 대고 흙으로 벽을 쌓은 집을 지어 줬다. 20여 평[66.12] 남짓하던 한 채의 집에 벽을 칸칸이 나눠 열두 가구를 이주시켰다.

 

이런 집들이 구로3동 지역에 빼곡하게 들어섰다. 초창기에는 전기와 수도가 없었다. 물론 화장실도 없었다. 구로3동 전 지역을 통틀어 공동 화장실이 6개에 불과했다. 1970년대가 되어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물은 공동 우물에서 길어 와야 했고 화장실은 조금 늘어나 10여 개가 됐다.

 

이인엽 씨는 그래도 1970년대가 구로동 간이 주택에서 제일 살기 좋았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좁은 집이었지. 문 열면 앞집이 뭐하는지도 다 보이고, 벽을 툭툭 치고 이리 와서 술 한잔해.’라고 부르기도 했지. 그래서 골목에 누가 결혼하고, 누가 돌아가시면 다들 내일처럼 도와주고 같이 기뻐하고 슬퍼했어.”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구로3동 주택가의 모습도 변하기 시작했다. 한 지붕 아래 열두 가구씩 거주했던 집들도 떠나는 집, 합쳐지는 집 등등 여러 가지로 변했다. 이사 간 자리엔 어디선가 이사를 왔다. 당시 열악한 환경과 좁은 집이라 저렴하게 거래됐던 곳이다. 그래서인지 서울 어디선가 사업을 하다 실패했다는 사람, 혹은 알코올 중독에 빠져 전 재산을 탕진한 사람, 빚쟁이를 피해서 도망 온 사람 등 독특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변화하는 공영 주택과 간이 주택]

결국 한 지붕에 열두 칸이던 집이 서로 합쳐지기를 반복하면서 여러 채를 터서 사용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하지만 1970년대 대부분의 주택들은 옆으로 확장하지는 못하고 지붕 위에 기둥을 세우고 2층으로 확장을 했다. 확장의 사유는 다양했다. 아이들이 자라서 공간이 모자라는 경우도 있었고, 당시 구로공단의 공장 기숙사가 부족하니, 한 층을 더 올려서 세를 주는 경우도 많았다.

 

좁은 집을 위로 올리려니 특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방 안 천장에 구멍을 뚫어 천장 문을 내리면 사다리가 됐다. 그 위로 올라가면 2층 방이다. 집 안에 사다리를 놓지 못하는 사람들은 집 밖에 사다리를 놨다. 나무 사다리도 많았고 좀 더 튼튼하게는 철제 사다리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2002년 철거 직전의 주택은 골목이 좁았다. 사람이 우산을 쓰고 다니지 못할 만큼 좁았다. 어찌하여 이렇게 좁은 골목을 만들었을까?, 좀 더 넓게 공간을 갖고 지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때 이인엽 씨에게 들은 답변은 의외였다.

 

앞에서도 기술했듯이, 1960년대 초에 만들어진 주택이 워낙 좁다 보니 사람들이 집을 골목 쪽으로 늘렸다는 것이다. 벽을 터서 조금 밖으로 넓히면서 주방을 만들었고, 대문을 터서 밖으로 넓히면서 거실이 됐다는 것. 오른쪽 집, 왼쪽 집, 모두 같이 집을 늘려 대니 자연스럽게 골목이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렇게 30년이 흐르면서 어른 한 명 지나기조차 좁은 골목이 만들어졌고, 2층인지 3층인지 밖에선 구분할 수도 없는 주택들이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6천 평[19834.71] 주택가에 화장실이 열두 개]

지금의 남구로역 4번 출구에서 1번 출구 사이, 한신아파트 자리에서 구로남초등학교까지의 자리 대부분에 공영 주택과 간이 주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면적으로는 약 6천 평[19834.71]에 달했다. 놀라운 것은 여기에 화장실이 고작 열두 개밖에 없었다는 것. 아침 일과가 바빴던 동네 사람들은 아침 밥상에서 숟가락 놓기 무섭게 화장실 앞에서 줄을 서야 했다. 워낙 경쟁이 치열했다. 많은 사람이 몇 안 되는 화장실을 써야 하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도 전기와 수도는 1970년대에 들어왔다. 마을의 공동 수도는 유료로 운영되기도 했는데, 초창기엔 물 한 번 떠 가는데 얼마씩 돈을 내기도 했다.

 

또한 좁은 골목의 복잡한 동네에 화장실마저 공동으로 쓰고 있으니 화장실 주변은 우범 지역이기도 했다. 이인엽 씨에 따르면, 1970~1980년대 공동 화장실 주변에선 성범죄가 자주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 성범죄 피해자는 어디 가서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할 만큼, 피해를 입은 그 사실 자체가 부끄럽고 수치스런 일로 치부되었다. 이 때문에 성범죄 피해를 당한 가족들은 사유는 말하기 어렵고 급하게 이사 간다.”는 얘기만 남기고 조용히 떠나기도 했다. 여자아이를 가진 부모들은 아이가 밤에 화장실에 간다고 하면 같이 따라 나서는 게 일과였다.

 

그때의 주택들이 2002년 대한민국에서 월드컵이 열릴 때까지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가장 큰 주택 밀집 지역의 경우 2002년 두산아파트로 재개발되면서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아직도 남구로역 4번 출구 언덕 밑에는 두세 동의 공영 주택이 남아 있다. 또 빌라촌이 되어 버린 구로3동 안에도 아직 재개발하지 않은 단층의 공영 주택 일부가 남아 있다. 심지어 화장실이 없는 집을 위해 공동 화장실이 아직도 빌라촌 한가운데에 남아 있기도 하다.

 

문학 작품 속에 녹아 있는 구로공단 노동자의 삶

구로동에 다세대 주택이 많은 이유

구로동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

구로동 최고의 전성시대, 구로디지털단지[서울디지털산업단지]

디지털 기업들이 구로에서 생존하는 방법

 

격동의 시기, 구로와 함께한 사람들

구로를 지켜 온 사람들

주민이 쓴 공영 주택 재개발의 기록

부산 사람의 구로 생활 40

 

얻은 데로 베풀며 살아야죠

기업과 주민이 하나 되는 장()

구로에서 얻은 것, 사랑으로 되갚겠습니다

구로구에 들어선 문화 공간

 

들어온 사람들, 떠나가는 사람들

15년간 구로동으로 출근한 이야기

첫 직장이 있던 구로동으로 또다시 돌아온 사연

변화하는 구로의 모습

 

 

천수답 농사짓던 가리봉동

1789(정조 13)인 기유년(己酉年)에 전국적으로 일제히 실시됐던 호구 조사 결과를 기록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따르면, 지금의 구로구 인근 지역인 금천현은 6개 면 41개 리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 동면(東面)에는 독산리·가리산리·문교리·난곡리·장내리·신림리·봉천리·상도리·성도화리·서원리가 속해 있었으며, 호수는 332, 인구는 1268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가리산리가 지금의 가리봉동이다.

 

1795(정조 20) 금천현이 시흥현으로 바뀌면서 가리산리는 시흥현 동면에 소속되었다.그리고 1895(고종 32) 시흥현이 인천부에 소속된 시흥군으로 바뀌면서 시흥군 동면의 가리봉리로 바뀌었다.다음 해인 1896(정조 21) 84일 인천부가 폐지되고 칙령 제36호에 따라 13도제가 시행되면서 시흥군은 경기도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즈음 가리산리에서 가리봉리로 이름이 바뀐 듯하다.

 

1912년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가리봉리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가리봉리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9631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해 시흥군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가리봉동과 독산동 일부를 합쳐 가리봉동의 와 독산동의 자를 따서 가산동이라고 했다.

 

1975101일 대통령령 제7816호에 의해 가산동은 다시 가리봉동과 독산동으로 분리되었는데, 당시 가리봉동은 인구 33045명이 사는 지역이었다.가리봉동은 198071일 서울특별시 조례 1413호에 의해 가리봉1동이 가리봉1동과 3동으로 분리되어 3개의 동으로 이뤄졌다.

 

199531일에는 금천구가 신설되면서 구로구에서 가리봉동의 일부가 금천구로 나누어졌다.이때 가리봉1동의 일부와 가리봉2동의 대부분이 금천구로 편입됐고, 가리봉3동은 온전히 금천구의 소속으로 편입되었다. 금천구와 구로구 가리봉동의 경계는 남부순환도로를 기준으로 나뉜 것이다. 현재의 가리봉동은 약 0.43로 동서로 넓게 뻗은 모양을 하고 있다.

 

[‘가리봉지명에 얽힌 이야기]

1991년 한글학회가 편찬한 한국땅이름큰사전에 따르면 가리봉이란 지명은 경기도 광주시, 전라남도 함평군, 강원도 원주시와 인제군에서도 나타난다. ‘가리봉이란 주위의 작은 봉우리가 이어져 마을이 된 데서 유래했다는 설과, 고을[]과 같은 의미인 또는 가리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가리는 갈라졌다는 뜻인데, 구로구의 전체 지형이 바짓가랑이처럼 갈라진 것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도 여겨진다.

 

한국땅이름큰사전에 따르면 옛날에는 가리봉1리를 택하’, ‘무아래’, ‘모아래라고도 불렀다고 한다.뒷산이 청룡혈이어서, 청룡이 물을 먹기 위한 큰 저수지가 있어서 저수지의 아랫마을, 곧 택하라 했는데,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저수지는 없어지고 논이 됐다고 전한다.

 

구로동 의 소식을 많이 전하는 구로구의 지역 신문 구로타임즈2006125일자 기사에 가리봉1동의 옛 지명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청룡이 파서 마시던 물에서 유래했다는 김윤영 기자의 기사에서 가리봉동은 산업 단지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밤나무골, 사당골, 석바탱이, 큰논배미, 모아래 등 훈훈한 옛 지명이 말해 주듯 호박밭이 넓게 펼쳐진 몇 가구 살지 않은 한산한 농경 지역이었다.”라고 묘사되고 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온 땅이름 모아래]

가리봉동은 넓은 농지가 있어서 벼농사에 적합했고 수확도 좋아 여러 채의 기와집이 대를 이어 살아가는 기름진 땅이었다. ‘모아래는 지금의 가리봉1동 지역을 말하는데 500년 동안 대를 이어가며 가리봉동에 살아온 박명재[1932년생] 씨의 집도 바로 모아래에 있었다.

 

구로구지에는 모아래에 대해 “40여 세대가 모여 살면서 유래된 마을이며 원래 청룡 한 마리가 잠을 자고 있던 청룡혈의 산이었으나 갈증이 난 용이 물을 먹기 위해 사방을 둘러보던 중 자기가 잠을 자던 산 아래쪽 땅 속으로 물이 흐르고 있음을 알고 못을 파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저수지가 생겨났고 이 저수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그 아래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못아래마을이라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구로구지모아래라고 표기하고 있는 곳을 가리봉동 주민 중에는 어떤 이는 모아래라고 부르고 어떤 이는 무아래라고 알고 있었다. 가리봉동 경로당을 돌아보며 들은 명칭은 글자로 전해지기보다는 어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이라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다. 어찌됐든 마을 노인들이 기억하는 모아래[또는 무아래]는 기름진 땅이었다.

 

박명재 씨는 우리 집안 밀양박씨가 여기서 500년을 살았어요. 그래서 기록으로 지명이나 유래 같은 게 남아 있을 것 같았는데 내가 아무리 찾아도 그런 기록을 찾을 수 없었지요. 아마 무슨 이유가 있어서 기록들이 없어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모아래를 지나 시흥 가는 길]

박명재 씨가 어렸을 때인 1940년대에는 가리봉동 근처에서 번화가로 꼽히는 곳은 지금의 영등포나 시흥 지역이었다. 영등포와 시흥 모두 기차역이 있어서 각종 교역의 장이자 경제 활동이 가능한 지역이었다. 가리봉동에서는 양쪽 모두 십리 길이었는데, 시흥으로 가려면 모아래에서 말미를 지나야 했고, 영등포로 가려면 모아래에서 도림천을 넘어 영등포까지 갈 수 있었다.양쪽 모두 마차가 겨우 다닐 만한 좁은 길이었는데, 이 길을 따라 가리봉동 사람들은 시흥과 영등포에 있는 학교와 일터, 시장을 다녔다.

 

[언덕 너머 마을 골말]

한글학회가 1991년에 발간한 한국땅이름큰사전을 찾아보면 골말이라는 이름이 수백 개가 나온다. 서울과 경기도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 골말이라는 지역이 존재하는데, 사전에는 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3동 지역에도 골말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직접 만나본 가리봉동의 주민들은 현재의 가리봉2동 지역을 지금도 골말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경로당 이름도 골말경로당이다.골말경로당에서 만난 노인들은 여기가 골짜기 끝이라 골말이라 불렀다고 하더라구.”라며 예전부터 전해진 명칭을 알려 줬다.

 

그런데 골말이란 명칭은 대부분 곡촌이나 곡동이라는 이름으로도 함께 불린다. 가리봉동의 골말역시 곡촌이란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었다. 골말경로당에서 만난 윤묘병[1927년생] 씨는 명동’, ‘남산’, ‘새말과 같은 명칭들이 전국에서 나타나는 것과 비슷한 이유로 골말역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했다.

 

윤묘병 씨는 일제 강점기에도 가리봉동 언덕 너머에 있는 산골 마을을 골말이라 불렀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골말은 당시 습기가 많고 장마가 지면 물이 차는 동네였다고 한다. 또한 당시 복숭아나무를 많이 심었던 지역이었다고 기억해 냈다. ‘골말은 주로 초가집이 많고 생활수준도 지금의 가리봉1동보다 열악했다고 경로당에서 만난 노인들은 전했다.

 

[개발로 사라지는 지명들]

박명재 씨는 지역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아쉽다며 옛 기억을 더듬었다. “지금 삼화인쇄소 자리 옆으로 보면 좁은 길이 있어요. 거기를 사당골이라고 불렀어요. 아마 사당이나 뭐가 있었나 봐요. 나도 사당을 보진 못했으니까 무척 오래 전에 사라진 것 같네요. 또 지금의 남구로역 4번 출구 앞에. 거기가 옛날에는 집이 없고 그냥 고개였어요. 낮은 고개. 거기를 석밭고개라고 불렀지요.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 노인들이 많아요. …… 왜 거기를 석밭고개라고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지나가면서 돌을 던져 놓는 거 있잖아요? 요즘도 산에 가면 많이 하는 그런 거. 그게 거기 있었거든요. 그래서 석밭고개라 불렀는지도 모르겠어요.”

 

박명재 씨의 증언을 바탕으로 찾아본 결과 1965년 한글학회에서 발간한 한국지명총람서울 편에 석바탱이라는 지명이 나왔다. 책에는 대촌마을의 일부분으로 서쪽 귀퉁이에 있으며, 매사냥할 때 석단을 고이었다 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석바탱이고개석바탱이마을 뒤 고개라는 설명도 있어 이곳이 석밭고개, 석바탱이고개라고 불렸던 근거를 찾을 수 있었다.

 

이렇듯 옛날부터 내려오는 마을 이름도 있지만 동네 사람들이 잠시 부르던 명칭들도 있었다. 박명재 씨의 기억으로는 1940년대 가리봉동을 대촌또는 백오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것.당시 인근 지역에선 드물게 50~60호의 가구가 모여 사는 큰 마을이란 뜻이다. 박명재 씨는 이런 건 행정 구역으로 부르는 이름은 아니지만 당시 동네 사람들은 여러 가구가 모여 사는 가리봉동을 대촌(大村)이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박명재 씨가 기억하는 지명들 중에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도 있었다. 한국지명총람서울 편에는 가리봉동 2리를 대촌이라고 적고, 가리봉동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마을이라고 표시하고 있다.지금의 남구로역 4번 출구 앞을 보고 석밭고개라고 부르는 사람이나 가리봉동을 보고 대촌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동네 경로당에서도 거의 없었다.이를 두고 박명재 씨는 사람들이 다 떠나가고 늙어서 죽으니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전했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살아온 마을에는 대부분 신령하다고 믿고 있는 산이나 바위 혹은 나무가 있다. 산을 넘을 때 잘 보살펴 주기를 기원하는 바람에서 돌탑을 쌓기도 하고 바위를 향해 기도를 하고 지나기도 한다. 구로구 가리봉동에도 신성하다고 알려진 나무가 있다. 지금의 가리봉2동 지역에 위치한 측백나무가 바로 그것이다.마을 노인들은 측백나무라고 부르지 않고 큰 상나무라고 부른다. ‘상나무향나무의 강원도 사투리인데, 구로구 지역에서는 측백나무를 상나무라고 부르고 있었다.

 

[주택으로 둘러싸인 측백나무]

가리봉동의 측백나무는 영일초등학교 근처에 있다. 주택가에 둘러싸여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다. 행정 구역으로는 가리봉213-175번지. 차 한 대 들어갈 수 없는 좁은 골목길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노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나무가 있는 이곳은 골말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그런데 노인들의 증언이 엇갈린다. 이곳을 잔디고개라고 소개하기도 하고 조마고개라고 소개하기도 한다.

 

조마고개는 한글학회가 1965년에 발간한 한국지명총람에 따르면 무아래혹은 모아래라고 불리던 마을 뒤 등성이 너머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산이 용마혈(龍馬穴)인데, 옛날 오랑캐들이 근처에 진을 치고 혈을 끊어서 정기가 없어진 산의 고개, 곧 조마(弔馬)의 뜻으로 불린 고개라고 한다.가리봉동에 공장이 들어서기 전인 1950년대만 해도 이곳은 가리봉동의 끝자락이었다. 골말에서 고개를 넘어 무아래[또는 모아래]’라 불리는 현재의 가리봉1동으로 넘어가는 길 언덕에 측백나무가 자리했다.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온 윤재병[1932년생] 씨는 우리 집에서 영등포로 가려면 언덕을 넘어야 하는데 신성한 곳이라 해서 함부로 장난치거나 그러질 못 하게 했어.”라고 말했다. 시집을 오거나 사람이 죽어서 상여가 나갈 때도 그 언덕을 넘지 못하게 하고 빙 돌아가게 했었지.”라고 말을 이었다. 윤재병 씨를 비롯한 마을의 노인들은 이 언덕은 어릴 때부터 신성한 곳이라고만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기원제를 지낼 만큼 영험한 거야]

가리봉2동에서 평생을 살아온 윤묘병[1927년생] 씨는 측백나무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했다. “원래는 한 그루가 더 있었는데 피란 갔다 돌아오니까 없어진 것 같아. 아마 전쟁 때 불에 타 버렸거나 뽑혔겠지. 그런데 예전에는 저 나무에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그랬다 하더라구. 그것 말고도 그냥 사람들이 오고 가면서 밥 한 공기 올려놓기도 했고 물 떠다 기도하고 지나가기도 하고 그랬지.”

 

윤묘병 씨의 기억에 따르면, 측백나무에 제를 지내는 날이 아니더라도 주민들이 오고가며 젯밥을 놓고 기도하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고 했다. 구로구에서는 20041227일 가리봉동 측백나무를 구로구 보호수로 지정했다. 높이 15m, 흉고 둘레 2.5m로 전국 최고령 측백나무라는 이유에서다.가리봉동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정월 대보름과 가을 추수기에 측백나무 앞에서 고사를 지냈던 전통을 되살리기 위해 지난 2003년부터 매년 10월에 공식적인 기원제를 드리고 있다.

 

가리봉동 측백나무제라고 명명한 기원제는 보통 오후 4시쯤 시작하는데, 측백나무 앞에서 향을 피우고 잔을 올려 신을 부르는 강신(降神)과 축문을 낭독하는 독축(讀祝), 절을 올리는 참신(參神) 순서로 제를 올리고, 인근의 영일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지역 주민을 위한 다과회를 즐기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20091027일에도 측백나무 기원제가가 행해졌다.

 

윤묘병 씨는 나무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도 해 주었다. 가리봉2동 골말 지역은 예부터 물이 많아 습한 지역이었다는 것. 그래서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뱀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윤묘병 씨의 집에도 큰 뱀이 나타나서 쫓아내느라 고생을 했다고 한다. 윤묘병 씨는, 마을에 뱀이 많아서인지 측백나무에도 큰 뱀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나무를 훼손하면 재앙이 온다는 소문도 있는데,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에 나무가 훼손되지 않고 지금까지 마을 한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가리봉의 옛이야기

옛 기록에 남아 있는 가리봉동

사라져 가는 옛 마을 이름들

큰 상나무 앞에서 지내는 측백나무제

농촌 마을 가리봉

공장이 들어서며 먹을거리도 늘어나

안양천의 둑과 가리봉교회

도시 노동자의 거주지

남구로역에서 시작하는 가리봉동 나들이

기록과 예술의 장, 가리봉동

가리봉동 중국 음식점 이야기

농촌 마을에서 다문화 도시로, 50년간의 변화

개발과 재개발, 농촌에서 빌딩숲으로

농촌에서 빌딩숲으로 가리봉동 개발 이야기

IMF 시대 가리봉동 이야기

벌집촌의 사람들

대중문화와 문학 속에 비춰진 가리봉동

벌집에서의 하루

대를 이어 운영하는 벌집 이야기

 

다문화 도시

벌집에서 살고 있는 중국 동포의 코리안 드림

가리봉동 재개발을 바라보는 시각들

 

다문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가리봉 사람들이 살아온 모습

벌집은 부동산에 내놓지 않아요

구로공단에 찾아든 십대의 가리봉 드림

윤재병 할아버지의 70만 원

고향 전답 팔아 차린 식당

재개발이요? 다들 입장이 달라요

 

작은 중국, 가리봉동

가리봉에서 이어지는 한족과 조선족의 갈등

가리봉에서 만난 탈북자와 귀화한 중국인

가리봉동 화합의 상징 자율 방범대

 

 

전설을 간직한 서울의 가장자리, 수궁동

 

 

 

수궁동 은 궁동과 온수동을 합친 행정동이다. 1980년대 빌라 단지가 들어서기 전까지 두 마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먼저 안동권씨와 전의이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던 궁동의 옛 모습을 떠올려 본다. 정선옹주의 궁이 있었다 하여 궁골로 불리던 마을에는 여러 개의 뜸[한동네 안에 몇 집씩 따로 모여 있는 구역]이 형성돼 있었다.

 

1915년부터 궁동에서 터전을 일궈 온 이혁진[1906년생] 씨는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밭과 길을 사이에 두고 가옥이 5~6채씩 모여 있었지. 양지말, 음지말, 불당골 등 이름도 다 있었고…….”라고 말한다. 2000년대 궁골길과 궁동터널, 작동터널이 생기면서 궁동의 지형은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돼 버렸다. 이에 수궁동 주민자치위원회는 마을의 원래 모습을 기억하고자 옛 지명을 표기한 그림 지도를 제작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마을 버스길이 된 오류천 복개 도로를 따라]

그렇다면 그림 지도로 되살아날 옛 궁동은 어떤 모습일까. 마을길을 따라 발맘발맘 걸음을 옮겨 본다. 궁동 입구는 온수역에서 약 1.5떨어진 곳에서 시작된다. 온수역 8번 출구에서 나와 오류고가차도 방향으로 약 1.5를 걸어와야 한다.

 

우남푸르미아파트와 오류고가차도 밑을 지나 궁동의원이 보이는 골목에 다다른다. 궁동 입구다. 마을버스 6613번이 다니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옛 오류천을 복개한 도로다. 궁동의 뜸은 옛 오류천을 따라 드문드문 자리했었다. 지금은 오류천 물길 그대로 마을버스 길이 됐다. 수궁동 새마을금고가 보이는 골목에 접어든다. 궁동종합사회복지관까지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넓었던 길은 어느새 좁은 골목으로 변해 간다. 번성교회 앞 골목 다보사로 들어가는 팻말 앞쪽이 옛날 장승거리.

 

S자로 흐르던 오류천 물길이 이쯤에서 좁아졌는지 길 또한 좁아진다. 권창호[1950년생] 씨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오류천을 따라 난 길이 주요 도로였어요. 장승이 서 있던 이곳을 지나다 보면 문중 어르신을 꼭 만나게 돼 인사를 드려야 했죠.”라고 말했다. 장승거리를 지나 궁동종합사회복지관이 보이는 곳까지 걷는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와 관음사 가는 길이 보인다. 관음사가 자리 잡은 청룡산 자락의 북쪽은 예부터 절이 있었다 하여 불당골이라 불렸다.

 

[집성촌이 살던 곳, 양지말과 음지말]

오류천 복개 도로인 궁동길을 걷다 보면 빌라 속에서 단층 한옥을 볼 수 있다. 50~200년 된 한옥 서너 채가 궁동에 여전히 남았다. 1360년부터 청룡산 자락 아래 터를 잡고 살던 전의이씨 집성촌이었기 때문이다. 와룡산 자락에 자리 잡은 안동권씨 마을 양지말과 대조적으로 전의이씨 마을은 음지말이라 불렸다. 음지말이 위치한 청룡산에는 전의이씨 문중 묘가 현재도 잘 관리되고 있다.

 

음지말에서 산을 넘어 양천구 신정3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수렁고개 또는 수룬고개라고 불렸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개국 일등 공신인 양경공 정희계에게 내린 사패 땅 20만 평[0.66]이 있다 하여 댓골이라고도 한다. 댓골은 큰골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손오공 건물이 보인다. 건물 쪽으로 방향을 틀어 나오면 궁골길이 모습을 드러낸다. 옛 궁골저수지와 논, 밭이 있던 자리다. 길을 건너 궁동생태공원으로 향한다. 이 일대 서서울생활과학고등학교 자리가 바로 정선옹주 궁이 있던 궁골이다. 현재는 표지석으로만 옛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궁동생태공원 서북쪽에는 정선옹주 묘역과 안동권씨 문중 묘가 자리하고 있다. 20109월 구로구는 정선옹주 묘역과 안동권씨 가문의 신도비 등을 역사 교육 프로그램으로 활용하기 위해 안내판을 설치했다. 이곳을 중심으로 와룡산 아랫자락은 양지말이라 불렸다. 이 일대 서쪽 골짜기의 옛 지명은 배밀이다. 골짜기에 일군 논, 밭 모양이 뱀 같아서 혹은 뱀이 자주 보여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배밀을 따라 산을 올라가면 원각사가 보인다. 예부터 와룡산 자락 절이 있던 터를 절안이라 불렀다. 양지말에서 북쪽으로 와룡산을 넘으면 부천시 여월동으로 갈 수 있다. 옛 사람들은 이 고개를 성짓골이라 불렀다. 양지말은 남쪽으로는 온수동과 이어진다. 와룡산 남쪽 갈매삭새고개가 온수동과 궁동을 잇는 옛 고개다’‘수궁동 은 궁동과 온수동을 합친 행정동이다. 1980년대 빌라 단지가 들어서기 전까지 두 마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예부터 더운 물이 나왔다는 온수동의 옛 지명을 따라 길을 나선다.

 

[온수골 길을 따라 가는 한옥 여행]

온수동 옛 지명을 찾아가는 여행은 온수역 5번 출구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온수역 5번 출구에서 나와 온수버스종점이 있는 온수삼거리로 향한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난 온수골길을 따라 걷는 것이 시작점이다.온수교차로와 온수동 새마을금고를 지나 온수골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드문드문 오래된 빌라 건물이 눈에 띈다. 이곳에서 한옥이 오롯이 남아 있는 온수골을 만날 수 있다. 온수골은 제주고씨와 진주유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곳이다.

 

현재 온수골길 60-6번지 일대에 한옥 10여 채가 남아 있다.온수골에서 온수현대힐스테이트아파트로 넘어가는 고개는 도당제고개라 일컬었다.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도당산 당집에서 정월 대보름마다 잡귀를 물리치고 마을의 평안을 비는 도당제를 지냈다. 몇 십 년 전까지도 주변 마을 사람들이 도당제고개를 영험하게 여겨 상여나 가마는 넘을 수 없었다고 한다. 온수골 뒷산에 오르면 약수터가 나온다. 능안이라 불리던 곳이다. 이곳에서 부천시 오정면 작리로 통하는 고개는 화개고개라 일컫는다. 2000년 초까지 사람들이 이 인근에서 온천수를 찾으려는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학교로 변한 삭새고개]

길을 내려와 다시 온수역 8번 출구 쪽으로 걷는다. 온수초등학교와 우신중학교·우신고등학교가 차례로 보인다. 원래 이 일대는 터골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터골은 1640년경 전주이씨 이양(李暘)이 낙향해서 터를 잡은 곳으로, 터골 뒷산에는 전주이씨 선영이 있다. 이양은 세종의 열세 번째 아들인 밀성군(密城君)의 둘째 아들 춘성군(春城君)5세손이다. 우신중학교·우신고등학교 길을 따라 언덕을 오른다. 여기서 지금의 세종과학고등학교 자리까지 긴 골짜기를 삭새고개라고 불렀다. 삭새고개는 온수동과 궁동을 넘나드는 경계이기도 했다.

 

현재는 고개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우신중고등학교의 동쪽 산은 건너짝산이다. 궁동 산18번지 21호 일대다. 봉우리 높이는 57.9m, 산 동쪽은 앞골이라 불린다. 길을 더 올라 서울정진학교까지 걷다 보면 서남쪽으로는 온수현대힐스테이트아파트가 보인다. 이 일대는 갈골또는 갈매로 불리던 곳으로, 2009년 온수현대힐스테이트아파트로 재개발되기 전까지 온수연립단지가 있던 곳이다.

 

온수연립단지가 들어서기 전인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은 골짜기가 습하고 갈대가 많았다 하여 갈매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북쪽 산은 갈마산이라 불렀다. 1988년 신설된 수궁동은 온수동과 궁동을 관할하는 행정동으로, 온수동의 와 궁동의 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궁동은 세조의 일곱 번째 딸인 정선옹주의 궁이 있었다 하여 붙은 지명이다. 그렇다면 온수동의 지명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까.

 

[임금에게도 숨긴 온천수]

전국의 호수(戶數)와 인구수를 기록하여 1789(정조 13)에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수탄면(水呑面) 내에 온수동리(溫水洞里)와 궁리(宮里)가 명시돼 있다. 온수동리는 더운 물이 나왔다는 온수골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와 관련해 세종실록(世宗實錄)83의 세종 20[1438] 118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부평도호부를 현으로 강등했는데, 임금께서 부평에 온천이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 조정의 신하를 여러 차례 보내어 찾아보라고 했던 바, 그곳 아전과 백성이 숨기고 말을 듣지 않으므로 도호부를 폐하고 현으로 강등했다…….” 평소 피부병과 안질로 고생하던 세종은 평산과 이천, 온양 등지의 온천을 즐겨 찾았다. 그러던 중 한양과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온천욕 할 곳을 찾다가 지금의 온수동으로 사람을 보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주민들이 온천을 숨겼다는 데 있다.

 

당시 온천수가 나왔다는 온수골은 지금의 초원교회에서 태영렉스빌 일대를 일컫는 옛 지명이다.온수동 주민 동귀원[1954년생] 씨는 여기가 온천이 있었다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온천이 있다고 소문이 나면 피부병 환자는 물론이고 나병[한센병] 환자들이 몰리니까 아예 온천 구멍을 막아 버린 거예요. 그걸 아직까지 못 찾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조선 전기 온천욕을 하기 위해 피부병 환자며 나병 환자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어 주민들이 불쾌감을 느낀데다 뜨거운 물이 논에 극심한 피해를 주자 주민들이 온천수의 맥을 흙과 돌로 막고 나라에 온천수가 나오는 것 자체를 비밀에 부쳤다고 한다. 이 온천수를 찾지 못한 세종이 부평부사를 문책하고 부평도호부를 부평현으로 강등시켜 버린 것이다.

 

[유황 온천의 맥을 찾는 사람들]

아휴~ 말도 마세요. 온수동에 온천 구멍을 100개도 넘게 파 봤지. 온천 개발하다가 빈털터리 돼서 나간 사람도 많아요.”라는 온수동 주민의 말처럼 역사적으로 온수골 인근에서 온천 맥을 찾으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1920년에는 일본 사람들이 온천수를 찾으려다 실패했고, 해방 후인 1969년과 1970, 1985년에도 계속해서 온천수 개발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결국 온천 구멍을 찾지 못한 채 온수골에는 빌라들이 들어섰다.

 

1991년 온수골 뒷산 자락에서 온천 개발을 한 김철수[가명, 1925년생] 씨는 “1m 넘게 땅속을 파내려 가니까 섭씨 31도의 온천수가 나오더라고. 물에서 삶은 달걀 냄새가 나는 걸 보고 유황 온천인 걸 알았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온천을 개발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와룡산 일대가 그린벨트 지역으로 묶인데다 지하철 7호선 온수역이 지하를 관통하면서 온천 구멍을 막아야 했다. 2000725일에는 수맥 탐사 전문가 유준혁 씨는 궁동 189번지 교통안전공단 부지에서 온천수가 나올 확률이 높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마을 주민들 역시 온천 나오면 우리 마을 부자 되겠지.”라며 기대심을 내보이기도 했지만 2010년 현재까지 온천수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온수동의 온천 전설은 무한한 가능성을 안은 채 여전히 온천 맥을 찾는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은 조선 태종의 둘째 딸인 경정공주가 살던 궁이 있어 작은공주골이라 불렸다. 한자로 소공주동(小公主洞). 한 음절을 줄여 현재는 소공동이라 부른다. 이처럼 공주나 옹주가 살던 집으로 인해 마을 이름이 정해진 곳이 바로 구로구 궁동이다. 필자는 궁동에 있는 의 흔적을 찾기 위해 서서울생활과학고등학교에 세워져 있는 궁골[宮谷] 유허비로 향했다.

 

[안동권씨 집안으로 출가한 조선의 옹주]

서서울생활과학고등학교 2관 앞, 정문에서 안쪽으로 약 50m 지점에 궁골 유허비가 있다. 유허비에는 궁골[宮谷]: 조선조 제14대 선조대왕의 7녀 정선옹주(貞善翁主)가 이곳 안동권씨 가로 출가하여 옹주궁이 있었던 곳임[현재 좌측 능선에 옹주 묘소가 있음]”이라고 적혀 있다.

 

정선옹주[1594~1614]는 선조의 후궁(後宮) 정빈 민씨의 소생이다. 정빈은 어질고 예를 갖춘 사람이었으며, 정선옹주 또한 공손하고 부녀자의 덕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정선옹주가 출가한 안동권씨가문의 인물로는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냈던 권철(權轍)과 그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의 공을 세운 도원수 권율(權慄)이 있다. 또 정선옹주의 부군 권대임(權大任)[1595~1645]은 용모가 수려하고 공부를 잘했을 뿐만 아니라 명필가였다고 한다. 권대임의 할아버지 권협(權悏)은 선무공신으로 예조판서를 지내고 충정공(忠貞公)을 하사받았다.

 

[궁궐 같은 집이 있던 마을]

궁궐 같은 집이 있었다는 궁골이란 마을 이름은 정선옹주 궁과 관련이 있다. 옹주가 출가하자 세조는 지금의 궁골 일대를 사패지로 하사했다. 사패지[사전(賜田)이라고도 하며, 왕이 내려 준 논밭을 말함]는 보통 당대 혹은 2~3대를 이어받을 수 있도록 했지만 대부분 기한이 지나도 국가에 반납하지 않고 자손 대대로 사패지를 이어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패지의 면적에 대해서는 사방십리또는 밤에 촛불을 켰을 때 그 불빛이 비치는 곳까지 전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규모가 상당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세조 때 이미 세도가로 자리 잡은 안동권씨 가문에 옹주가 시집을 오자 사패지에는 으리으리한 옹주궁이 들어섰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대광실이었던 집을 보며 사람들은 그 집이 궁궐 못지않다 하여 궁마을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옹주궁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권창호[1950년생] 씨는 어른들로부터 옹주궁이 700여 평[231] 규모에 50칸 대궐이었다고 들었어요. 6·25때 가족들이 충북 괴산으로 피난을 다녀왔는데, 그 사이 집이 다 전소됐다더군요.”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역사의 한 장으로 남은 옹주 묘]

궁동 주민들에 따르면 서서울생활과학고등학교가 들어오기 전 정선옹주가 살던 집은 밭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권창호 씨는 밭을 일구면서 기왓장, 옹기 조각 등 유물이 나오기도 했어요. 집이 으리으리했다고 하는데 사진 한 장 남은 게 없으니…….”라고 말끝을 흐렸다.

 

현재 궁동에는 옹주궁 터 옆 궁동 산6-1번지 정선옹주 묘역이라 불리는 곳에 권협 공으로부터 5대에 걸친 안동권씨 문중 선영이 남아 있어 궁궐 같던 마을의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20109월 구로구는 정선옹주 묘역 일대를 정비해 휴식 역사 공간으로 꾸미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수궁동 주민자치위원회와 함께 묘역 일대를 정비하면서 정선옹주의 부군 권대임의 업적을 적은 신도비를 복원하고 안내판을 설치했다. 또 각종 역사 지역 알기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해 청소년을 위한 학습 공간으로도 꾸밀 예정이다. 구로구 관계자는 묘역이 궁동생태공원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친환경적인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고 역사도 배울 수 있는 명소로 육성하고, 문화재 지정을 위한 활동을 펼칠 계획이라고 밝혔다.

 

옛 지명 따라 다시 그리는 마을 지도-궁동

옛 지명 따라 다시 그리는 마을 지도-온수동

더운 물이 나왔다는 온수동의 전설

정선옹주가 살던 곳, 궁골

하늘에서만 보이는 천혜의 분지

생태 공원이 된 궁동저수지

물길이 지나는 곳에 사람이 만나고

나지막한 산은 트래킹 코스

와룡산, 청룡산에 깃든 풍수지리사상

 

온수동과 궁동을 합해 수궁동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자연 환경

옛 풍경을 간직한 도시 마을

서울 속 농촌 풍경

텃밭 농사와 주말 농장을 가꾸며

마을 명물이었던 오류골 참외

집성촌의 전래 행사

대동계로 운영됐던 수궁골 도당제

궁동 두 문중의 전통 제례

 

느리게 변하는 마을

경인로의 주막에서 연립 주택 단지로

사통팔달로 뚫린 마을 길

10여 채 한옥이 오롯이 남은 온수골 이야기

고도 제한과 그린벨트로 묶인 수궁동

풍치지구 수궁동의 자연 환경

서서울생활과학고등학교 학생들의 이야기

16대를 이어 온 집성촌 사람들

안동 권씨와 전의 이씨

와룡산 자락에 안동권씨, 청룡산 자락에 전의이씨가 터 잡고

수름언덕 수름상회 권이홍 씨 이야기

새로운 세대가 열리는 곳

40년 지기지우, 이근수 씨와 변만식 씨

궁동의 산증인, 이혁진 할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