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암나루
강서구 江西區
Gangseo-gu (Gangseo-Gu)
서울특별시의 서부에 있는 구.
조선시대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陽東)·양서면(陽西面)에 속했던 지역으로 1963년 서울시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영등포구 관할하에 있다가 1977년 강서구로 분리·신설되었으며, 1988년 양천구가 분구되었다. 동쪽으로는 영등포구와 양천구, 서쪽으로는 인천광역시 계양구와 경기도 김포시, 남쪽으로는 양천구와 경기도 부천시, 북쪽으로는 마포구와 경기도 고양시와 접해 있다. 구청 소재지는 화곡동이다.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영등포구 양동·양서출장소의 관할 1968년 양동출장소가 양서출장소 통폐합 1977년 강서구로 분구 신설, 목동·신정동·신월동 지역에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조성 1988년 양천구 분리 독립
한강의 서쪽에 위치해서 강서라고 이름을 지었다. 한강 하류연안의 김포평야에 속하며 한강변에 작은 구릉을 이루고 있다. 구의 북서쪽은 한강의 범람원지대이며, 남동쪽으로는 편마암이 오랜 침식을 받아 이루어진 파랑상의 구릉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구릉지 위에 개화산(開花山:131m)·매봉산(118m)·우장산(雨裝山:94m), 수명산(壽命山, 117m), 궁산(宮山, 75m), 까치산(87m) 등의 낮은 잔구(殘丘)가 곳곳에 산재한다. 가양천(加陽川)·안양천(安養川)·방화천(傍花川)이 북류하여 한강으로 유입하며, 특히 방화천은 한강의 역조수위(逆潮水位)를 이용한 관개수로가 발달해 있다.
지역 내부는 주택지역·공업지역·농촌지역·개발제한구역·녹지지역 등의 경관으로 뚜렷하게 분화되어 있다. 1963년 정부가 서울 인구를 강남으로 유치하려는 시도로 화곡동에 10만 단지 주택지를 조성한 이후 서울시 서부의 최대 주택지역을 이루고 있다.
허준과 겸재 서울시에 편입되기 전까지는 전형적인 농촌지역이었으나, 1968년 화곡동에 택지조성사업이 실시되면서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고, 도시적인 토지이용 패턴을 보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임야와 농경지 및 개발제한구역이 많아 김포평야 주변의 가양동·방화동·외발산동 일대에서는 농촌경관이 나타난다. 주택지역은 화곡동 전지역과 내발산동 전지역에 형성되어 있다. 한편, 우리나라 항공교통의 중심지인 김포공항이 있어서 교통량이 많은 곳이다. 김포공항과 도심을 잇는 공항로는 1980년 성산대교가 개통됨으로써 강서구와 경기도 김포시를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생활도로가 되었다. 또한 경인고속도로·남부순환도로가 이곳을 통과하며, 까치산 터널의 완공으로 공항로와 경인고속도로가 직결됨으로써 주변의 교통이 매우 원활해졌다. 특히 화곡동은 영등포구와 김포공항의 중간에 있는 지역으로 제2한강교(지금의 양화대교)의 개통과 더불어 도심과의 거리가 단축되었을 뿐만 아니라, 김포공항·부천공업단지·영등포지역과의 접근성이 좋아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의성(醫聖), 허준(1537~1615)과 허준박물관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정선(1676~1759)과 겸재기념관 약사사 정승이 심은 은행, 느티나무 양천향교 소악루 양천고성지 공항정 호국충혼비 허가바위 광주바위
국가지정문화재5개, 서울시 지정문화재7개 등, 등록문화재 1개, 문화재자료 1개 등 총14개의 지정문화재 개화동에 있는 약사사(藥師寺) 경내에 3층석탑(三層石塔: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9호)과 석불(石佛: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0호)등 양천고성지(陽川古城址)이 있다. 가양동에는 1411년에 창건한 양천향교지(陽川鄕校址:서울특별시 기념물 제8호)와 역대 양천현감들의 선정비(善政碑)가 있다.
양천고성지(陽川古城地) 사적 제 372호 김덕원(金德遠, 1634~1704)묘 출토의복(出土衣服) 조선중기 상류사회의 복식 연구의 귀중한 자료 보물 제672호 진산세고(晋山世稿) 세계 최초의 화훼재배 전문 기술 서적 보물 제1290호 약사사(藥師寺) 석불 입상 둥글고 친근한 모습의 고려말기의 석불 서울시유형문화재 제40호 약사사(藥師寺) 3층석탑 고려중기 탑파건축의 변천과정을 알게 하는 귀중한 자료 풍산심씨 문정공파(豊山沈氏 文靖公派) 묘역 서울시유형문화재 제77호 양천향교(陽川鄕校)터 조선시대 교육의 산실 서울시기념물 제8호 신찬벽온방, 질병사(疾炳史) 자료로서의 가치 보물 제1087-2호 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 권6 보물 제1236-2호 서울 양천고성지 - 사적 제372호 약사사삼층석탑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9호 약사사 석불입상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0호 풍산심씨문정공파묘역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7호 미타사 석불입상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49호 양천향교터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8호 허가바위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1호 구 양천수리조합 배수펌프장 - 등록문화재 제363호
약사사의 약수터는 주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이한 것은 이 산의 이름이 개화산이라서 그런지 약수 역시 꽃물이 오르는 5~6월이 되면 달짝지근한 물맛을 내는데, 이때 약수의 효능이 가장 좋다고 알려져 있다. 이때쯤이면 약수를 받기 위해 물통을 몇 개씩이나 들고 한강을 건너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고 한다. 이 약수가 개화산의 이름에 맞추어 봄철에 맛을 내는 것인지 약사사의 약사여래가 물맛을 달게 하는 것인지 알수가 없다. 서울시유형문화재 제39호
허가(許歌)바위, 양천허씨의 발상지 서울시기념물 제11호 탑산 아래 위치한 천연적인 바위동굴로 옛날 석기시대 사람들이 살았으리라 짐작되는 혈거동굴로서 지금의 올림픽대로가 건설되면서 육지로 변하였다. 이굴에서 양천 허 씨의 시조인「허선문」이 태어났다 설화 때문에 이곳을 양천 허 씨의 발상지라고 부른다.
의성,허준(1537~1615) 허준이미지 허준 선생은 우리나라 한의학을 대표하는 의성(醫聖)으로, 자(字)는 청원(淸源),호는 구암(龜岩)이며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1537년 경기도 양천(지금의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서 아버지 허론과 어머니 밀양손씨 사이에 태어나(양천 허씨의 시조인 허선문의 20세손)1615년 8월 77세에 세상을 떠났다. 허준이미지 선조 7년(1575년)에 내의원 취재시(取才試)에 장원 급제하여 종8품 봉사 의관을 시작으로 내의원 의관과 당상관 등을 거쳤다. 선조 39년(1606년)에 의관 출신으로는 가장 높은 숭록대부에 봉해졌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국토는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기아와 질병에 허덕였는데, 나라에는 많은 약초들이 생육하고 있어 그 약초들을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는 이름으로 분류하라는 왕의 명을 받들어 허준은 선조 29년(1596년) 양예수, 이명원, 정작, 김응탁 등과 함께 이를 책으로 엮기 시작하였다. 정유재란으로 이 책의 편찬이 중단되자 선조는 허준에게 혼자서 펴내도록 명하였다.
당대 최고 명의로서 경륜과 궁중 의서 500여 권을 참고하여 14년만인 광해군 2년(1610년)에 25권 25책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하였다. 『동의보감』은 그 학술적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실용적 가치와 역사적 의의도 크다. 2009년 7월 『동의보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겸재 정선(1676-1759) 정선이미지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은 수백여 점의 작품을 남긴 조선시대 대표적인 화가이다. 그는 1740년 12월 양천현령(지금의 강서구청장)으로 부임하여 만 5년동안 지금의 강서구 일대를 중심으로 한 한강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그려 강서지역을 진경산수의 산실로 만들었다. 정선은 우리나라의 실재하는 풍경을 직접 여행을 통해 가장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전달해낼 수 있는 진경산수화풍을 확립시켜 한국 회화사의 새로운 전통을 수립한 인물이다. 그의 진경산수화는 양천현령으로 근무하였을 때 원숙한 경지에 올라, 진경시의 대가인 이병연과 시화를 교환하며 《경교명승첩》과 같은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남겼다. 이때 그렸던 그림으로는 양천현아, 종해청조, 개화사, 이수정, 소악후월, 목멱조돈 등이 있다.
상산(常山) 김도연 (1984~1967) 1894년 강서구 염창동(당시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염창리)의 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독립운동가로, 또 정치가로 평생을 조국에 헌신하였다. 1913년 일본 긴조중학 졸업, 1919년 게이오대학 이재학부를 수료하였다. 동경 유학 시절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여 백관수등 동경유학생들과 함께 1919년 2월 8일 동경조선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2ㆍ8독립선언을 하여 2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화가, 회산(繪山) 김종태(1906 ~ 1935) 1906년 4월 8일 김포(지금의 강서구 마곡동)에서 태어나 1925년 19세에 김포민전공립 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경성사법학교를 졸업하고 주료보통학교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선생은 기질이 괴팍하고 자유분방했다고 한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
독특한 표현방식을 체득하였다. 당시 서양 화단에 팽배해 있던 서구 조형방식을 받아들이고 모방하는 데에 급급했던 상황에서 과감히 벗어나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이루었다. 아울러 미술가의 현실의식과 향토미를 강조하였으며, 서양화의 표현양식을 전통회화와 접목하여 독특한 조형세계를 구축하였다. 작품_노란저고리 20대에 화단에 등단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1926년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이라 함)에 첫 입선을 한 후선전을 중심으로 많은 상을 받았다. 1927년에서 1933년 사이에 1932년 한해만 거르고 여섯 차례 특선을 하여 1935년 한국인 작가로는 최고라 할 수 있는 추천작가가 되었다. 선생은 살아있는 동안 두 번 개인전을 열었는데 평양에서 개인전을 하던 중 갑자기 장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떴다. 선생은 혈혈단신으로 오로지 그림만 그리다가 29세의 짧은 생을 마친 것이다. 선생은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여 작품 수는 100여 점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이나(선전에 출품한 작품은 모두 22점이다) 대부분의 작품은 행방을 알 길이 없으며 남아있는 작품은 겨우 4점뿐이다.
김응남 1546(명종 1년)~1598(선조 31년) 본관(原州), 호(斗巖) 별칭 자 중숙(重叔), 시호 충정(忠靖) 제주목사로 재임 당시 선정을 베풀었다는 기족이 되어 있다. 다사헌 대사간 부제학 이조참판 한성부판윤을 거쳤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겸 부체찰사가 되어 병력을 통솔하였으며 그후, 우의정을거쳐 좌의정에 임명되어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전후의 정국을 수습하였다.
방화근린공원(후문) ~ 약사사 ~ 개화산 전망대 ~ 봉화정 ~ 아라뱃길 전망대 ~ 숲속쉼터 ~ 신선바위 ~ 호국충혼비 ~ 미타사 ~ 하늘길 전망대 ~ 심정쉼터 ~ 방화근린공원 ~ 벚꽃길 ~ 꿩고개근린공원 ~ 서남환경공원 ~ 강서한강공원
<제1코스> 구암공원 → 허가바위 → 허준박물관 → 양천향교 → 겸재정선기념관 <제2코스> 약사사 → 방화근린공원 → 서남물재생센터 → 서남환경공원 <제3코스> 겸재정선기념관 → 양천향교 → 소악루 → 양천고성지 <제4코스> 허준박물관 → 구암공원 → 허가바위 → 공암나루터
한강의 역사를 찾아서 10대 코스
․광나루길 : 광나루한강공원~광나루터~아차산고구려역사문화홍보관~아차산성 ․송파나루길 : 잠실한강공원~잠실어도~송파나루터~삼전도비~석촌동고분 ․뚝섬나루길 : 뚝섬한강공원~뚝섬나루~살곶이다리~전관원터 ․노들나루길 : 이촌한강공원~한강철교~노들나루~사육신묘~용양봉저정~효사정 ․서강나루길 : 망원한강공원~서강나루~광흥창~공민왕사당~밤섬부군당 ․양화나루길 : 망원한강공원~양화나루~잠두봉~외국선교사묘지~망원정 ․선유도길 : 선유도한강공원~시간의정원~녹색기둥의 정원~온실 ․공암나루길 : 강서한강공원~공암나루~광주바위~허가바위~허준박물관 ․겸재정선길 : 강서한강공원~양천향교~소악루~겸재정선기념관 ․한강 옛 나루터길 : 여의도한강공원~반포~뚝섬~여의도한강공원(선상코스)
법정동 13개 기준, 행정동 기준은 22개 화곡(禾谷)·염창(鹽倉)·등촌(登村)·가양(加陽)·마곡(麻谷)·내발산(內鉢山)·외발산(外鉢山)·공항(空港)·방화(傍花)·개화(開花)·과해(果海)·오곡(五谷)·오쇠(五釗), 우장산동(雨裝山洞) 등
염창동 조선시대에 소금보와 창고가 있었기에 염창동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서해안의 염전으로부터 채취해 온 소금을 서울로 운바하는 소금배의 뱃길 어귀인 이곳에 소금보관창고 (염창동 103번지 근방)를 지었기 때문에 염창동이라는 동명이 유래되었다. 염창에는 서해안과 남해안의 염전에서 만든 소금을 뱃길을 이용해서 한강 하구까지 들여오는데 일단 한강하구에 진입한 때는 마포근방까지도 가게되지만 소금의 경우는 자칫하면 물에 녹는 경우가 많았고 이곳이 소금을 보관하기에 좋은 장소였으므로 이곳에 소금을 내려놓고 다른 물품들은 마포까지 배로 운반되었다.
등촌동 등촌중학교 앞에 있던 등촌리가 오늘날 등촌동이 되었다. 이 마을 지형이 산등성이로 구성된, 즉 등마루로 이루어졌다고하여 생긴 지명이다. 옛날 등촌동 주민은 산마루에 자리잡아 비교적 나무가 많고 초생지 또한 많아 나무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는 주민들이 많았는데, 이렇듯 서울 근교의 평화롭던 농촌마을에 틈이 없을 정도로 주택이 들어선 오늘의 모습을 이루기 시작한 때는 1975년이후로 지방에서 서울로 이사오는 인구가 점점 늘어나자 서울시에서 인구증가에 따라 한강 남쪽 주택개발사업을 추진한데서 비롯되었다.
화곡동 땅이 기름져 골짜기 사이마다 벼가 잘되므로 벼가 익어가는 골짜기 마을이란 뜻의 화곡동이라고 불리워졌다. 땅이 기름져 벼가 잘되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누렇게 익은 벼가 마치 황금물결의 계곡처럼 물결치는 풍경을 이루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능동, 반곡리, 역촌리, 화곡리라는 4개 마을이 모여 화곡동이 되었다. 능동은 속칭 능꿀이라 불리는 현 화곡4동 신정여상 근방의 봉제산 기슭에 몇가구가 살던 마을이며, 반곡리는 원촌말,김촌말,박장말이 있었던 강서성모병원 근방의 현 화곡3동과 5동에 걸쳐 형성된 원씨,김씨,박씨,장씨 등이 살던 부락을 말하며, 역촌리는 강서구청앞 우장산 기슭에 있었던 역말자리로 추씨집안 마을을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된다.
가양동 조선조 양천현의 행정지 중심으로서 양천현아가 있었고 또 양천향교가 지금도 남아있다. 우리구에서 문화유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으며 우리구 역사의 중심지이다. 가마동과 고양리가 합쳐지면서 '가(加)'자와 고양리의 '양(陽)'자를 따서 동이름이 비롯되었다. 즉 가마동은 고양리와 함께 가양동의 동명이 유래된 곳인데 가마동의 유래는 지금의 (주)세원공장 언저리에 옛날 삼밭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양동은 조선시대에는 우리고장의 중심지역에 해당하였다.
발산동 수명산(파려산,발산)이 마치 밥주박을 엎어놓은 형국이라 하여 발산이라 불리웠으며 산 안쪽마을을 내발산동, 산 바깥마을을 외발산동이라 하였다. 발산동에 있는 수명산의 모습이 마치 밥주발을 엎어놓은 모양과 닮았다고 하여 발산이라고 불렸다. 이발산 (수명산)을 중심으로 서쪽은 외발산동이라 하고 동쪽은 내발산동이라고 한다. 내발산동은 우장산의 산록에 발달한 마을로서 원당리와 내발산리 2개의 마을이 합쳐서 형성된 동이다.
공항동 원래 송정리였으니 김포비행장이 들어서면서 공항동이라 하였다. 공항동의 원래 지명은 소나무가 울창한 동네라해서 붙여진 송정리(松亭里)였다. 조선시대까지는 경기도 양천구누 가곡면,납어리,송정리,소율리였으니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 제111호로, 납어리,송정리,소율리를 한데 묶어 김포군 양서면 송정리가 되었다. 그 후 김포공항이 들어서면서 공항동으로 지명이 바뀌게 되었다.
방화동 사시사철 꽃향기가 퍼지는 개화산 옆에 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방화동이라는 동명이 생겼다. 방화동은 산의 형국이 꽃피는 모양을 하고 있는 개화산 옆에 발달한 마을이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다. 방화1동은 북쪽에 한강이 있고 연안에 농경지가 발달하였으며 한강건너로 행주산성과 마주보는 행주나루가 있던 동네이다. 현재의 방화동은 대한제국까지 경기도 양천군 삼정면 정곡리,치현리,능리로 각각 불리우던 부락이었다.
개화동 꽃이 활짝핀 모양이라는 개화산 아래에 발달한 마을이므로 개화동이라했다. 방화동은 산의 형국이 꽃피는 모양을 하고 있는 개화산 옆에 발달한 마을이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다. 방화1동은 북쪽에 한강이 있고 연안에 농경지가 발달하였으며 한강건너로 행주산성과 마주보는 행주나루가 있던 동네이다. 현재의 방화동은 대한제국까지 경기도 양천군 삼정면 정곡리,치현리,능리로 각각 불리우던 부락이었다.
마곡동 옛날 이 일대에 삼을 많이 심었던 동네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이 일대에 삼을 많이 심었던 동네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마곡동은 조선 초기까지 양천현이었따가 인조때 양천군으로 양천군 군내면의 후포리와 마곡리를 합하여 마곡동이라 했다. 마곡동의 현재 행정동은 가양1동이다.
과해동 강서구의 서쪽 끝에 있는 동으로 서울의 가장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과해동은 강서구의 서쪽 끝에 있는 동으로 서울의 가장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의 형국이 오이줄기가 바다쪽으로 뻗은 모양이라 해서 과해(瓜海)라 하가가 음이 같은 과해(果海)로 지명이 바뀌게 되었다.
오곡동 다섯골짜기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쇠동 옛날 이곳에 쇠노를 만들던 다섯사람이 도망와서 살게 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장산동(雨裝山洞) 우장산이란 이름의 유래는 옛날 가뭄이 자주 들어 농사가 되지 않을 때 양천현감이 검두산과 원당산 두곳에 기우제단을 차려놓고 천신에게 기우제를 지낸데서 유래한다. 기우제를 지낼때는 세 번에 걸쳐 지내는데, 세 번째 기우제를 드리는 날에는 비가 잦아지게 되므로 비옷을 준비한다 하여 우장산이라 하였다. 우장산은 화곡동의 진산(鎭山)이며 강서구의 중심이 되는 명산이다. 우장산은 2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는데 북쪽 봉우리를 검두산(또는 검덕산, 검지산, 검둥산)이라고 하며 서남쪽(화곡동 뒷산)산을 원당산이라고 하나, 오늘날에는 2개의 산을 합쳐 우장산(雨裝山)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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