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밥 먹고 도시여행

남한강변의 서정과 신륵사의 종소리는 천년을 깨우고, 여주 驪州 1

草霧 2013. 11. 8. 12:37

 

 

 

남한강변의 서정과 신륵사의 종소리는 천년을 깨우고

 

 

여주 驪州

 

    

 

 

 

 

명성황후 생가 - 영녕릉  - 영월루 · 창리 · 하리 삼층탑 - 신륵사 - 흔암리 유적 - 고달사지 - 남한강 이포나루 -

여주 파사산성 - 여주 계신리 마애불 - 여주

 

 

 

 

선사시대 유물은 물론 조선시대와 근대에 이르기까지 국보 및 천연기념물 등 다수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고, 이 고장의 중심부를 흐르는 남한강으로 인하여 많은 구릉지와 하천부지가 형성됨으로써 농업이 발달되어 대한민국 최고 쌀을 생산하고 있는 여주지역으로 떠났습니다.

 

여주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흐르며 이 고장의 역사와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남한강. 남한강을 제쳐두고는 여주를 말할 수 없다. 한강의 상류이며 이 고을사람들이 여강(驪江)이라 부르는 남한강은 주변의 풍정과 어우러지며 그 수려함이 하도 뛰어나 문장가들이 그냥 지나친 적이 없었다.

 

지금의 여주 땅이 비록 강이 막히고 도시가 들어서 옛 모습을 찾기 어려우나, 신륵사의 종소리는 천년을 깨우고 절 앞에 흐르는 여강은 여전히 예전의 잔영이 남아 있어 아름답다. 이 고을에 뚜렷한 지명이 나타난 것은 고구려 장수왕 64(476)의 골내근현(骨乃斤縣)이다. 그 후 황여(黃驪여흥(麗興)을 거쳐 고려 우왕과 공양왕 때는 부()에서 군()으로 승격과 강등을 거듭했다. 1469년 세종릉이 왕대리로 천장되면서 여주목으로 승격. 고쳐 불렀다.

 

여주의 농경문화는 일찍이 청동기인들에게서 발달의 기초를 찾게 된다. 1977년 서울대학교박물관의 발굴조사 때 점등면 흔암리에서 청동기시대 집터와 반월형 석도·무문토기 등을 비롯, 탄화된 벼·보리··수수 등이 발견되어 우리나라 벼농사의 전개경로를 추적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겨레의 성군 세종대왕과 북벌의 웅지를 품으셨던 효종대왕, 조선조 학자 목은 이색, 우암 송시열, 백운거사 이규보 선생의 얼이 깃든 곳이다. 또한 500년 조선왕조의 국모 여덟 분을 배출한 곳이며 의병항쟁 시 가장 치열하게 대일 항쟁을 벌여 큰 공적을 세웠던 격전지로서 외세배척의 중추적인 역할을 선도한 곳이기도 하다.

 

이렇듯 여주에는 선사시대 유물은 물론 조선시대, 근대에 이르기까지 국보 및 천연기념물 등 다수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고 지역 중심부를 흐르고 있는 남한강으로 인하여 많은 구릉지와 하천부지가 형성됨으로써 농업이 발달되어 대한민국 최고 쌀인 여주 쌀을 생산하고 있다.

    

 

 

 

오늘날 수도권과 근접한 천혜의 자연환경을 이용한 문화 관광지 및 전원생활 최적지로 각광 받고 있는 21세기 중부지방의 중추도시에서 아름다운 여주팔경과 함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남한강을 따라가는 여주역사기행

충주는 국토의 중심에 위치하며 고구려시대에는 중원경이라 불리며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고구려 중원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신립장군이 남한강을 배수진으로 왜군의 한양 진입을 차단하려 많은 희생을 치른 곳이기도 하다. 수질이 뛰어나 왕의 온천이라 불리우는 수안보 온천과 목계나루 근처의 양성온천단지가 있다.

 

남한강자락은 충주댐에 이르러 넓게 퍼지다 충주댐을 거쳐 괴산 속리산에서 발원하는 달천을 합수하여 여주를 향해 북진한다. 현재의 목계대교 근처에는 조선시대 세곡선의 출발지인 목계나루와 가흥창지가 남아 있다.목계의 시대적 변화를 지켜봤던 신경림 시인의 목계장터시비가 남아 있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 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하네

 

 

근대화로 인해 목계나루는 몰락의 기로에 서고 이로 인한 이곳 서민들의 삶의 애환이 담겨져 있는 시이다. 잠시 쉬었다 가더라도 목계의 인심을 기억하고, 말하고 싶어 했던 신경림 시인의 마음이 담아 있다. 남한강은 다시 흘러 흘러 아름다운 여주로 향한다.

 

태백에서 발원한 한강은 백두대간을 따라 서향을 하다가 안산 칠현산에서 한남금북정맥으로 갈리어 지는 산세를 따라 북쪽을 향한다. 충주의 목계를 지나 남한강은 여주부근에서 청미천과 원주의 아름다운 섬강을 받아 여주에 들어서 새로운 여강이 된다.

    

 

 

남한강의 중류에는 한강의 상류에서 쓸어 온 퇴적물이 유량과 유속에 따라 작은 하중도를 형성하게 된다. 여의도, 난지도, 밤섬, 선유도, 미사리, 여주에서는 양섬 등이 대표적이다. 강원도의 첩첩산중을 휘돌아 가던 강물은 어느덧 산을 넓직히 밀어내고 넓은 평야 사이를 달려간다. 여강은 한강이 만들어 놓은 자연스러운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더 꾸미지도 않고 수수하지만 더 화려하게 우리들을 감싸 안는다. 조선시대에 여주는 나루를 통한 교통수단과 물자수송이 주류를 이뤘고 18개의 나루가 있어 전국 물류수송의 중심지였다. 지금의 도()에 해당하는 목()으로서의 여주는 남한강의 4대 나루인 마포, 광나루, 이포, 조포나루 중 이포나루와 조포나루를 가지고 있을 만큼 물류거점지로서 한양으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남한강과 섬강이 만나는 지점에 흥원창지가 있다. 원주 인근의 평창, 영월, 정선, 횡성의 세곡을 수납, 보관하고 있다가 한양 경창으로 운송하던 곳이다. 강 건너 은담포의 고운 은빛 백사장이 햇살에 빛을 내고 뒷산자락의 절경과 함께 뽐내며 손짓을 한다. 여강에 비친 산자락은 섬강의 합수를 너그러이 받아들이며 강에 멋진 그림자를 드리운다. 명작가의 사진첩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절경이었다.

 

영릉(세종대왕릉)의 원찰이며 사나운 용마를 신력의 제압하였다는 신륵사는 깊은 산속과는 달리 강가에 세워져 있는 보기 드문 사찰이다. 남한강의 범람을 부처님의 신력으로 극복하고픈 간절한 기원에서 세워진 사찰이라 생각한다. 신륵사는 고려말 나옹선사, 목은 이색과 무학대사의 자취가 남아 있다. 그 중 나옹선사는 선()과 교()가 둘이 아님을 일컫는 불이사상(不二思想)의 토대 위에서 선을 이해하는 새로운 선풍을 일으키고 조선시대 불교 초석을 세우신 분이다. 그대 무겁지 않은가, 탐욕도 성냄도 벗어놓게라는 시가 맘을 꽂는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남한강가에서 이뤄진 성스러운 나옹화상의 다비식에 문득 오버랩되는 갠지스강의 화장모습. 성스러운 강가의 여신 품에 들고 싶어하는 인도인의 생의 마지막 절실함이 연상된다.

 

여강의 하류에 이르면 삼국시대의 항쟁에 피해 갈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인 이포나루 근처에 파사산성이 있다. 삼국시대 산 정상을 감아 싼 파사산성은 남과 여장군의 내기에서 진 여장군의 형상을 한 마애여래불이 남아 있다. 무수히 오고가는 뱃사공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여래불의 염원이 여강을 보살피고 있는 듯하다. 파사산성 정상에서 본 여강은 끝에서 끝까지 눈길을 이어준다. 근처의 이름난 천서리막국수가 여강의 유명세를 대신한다.

    

4대강 사업에서 이포보 설치를 두고 환경시민단체들과 정부, 주민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다. 허옇게 드러나는 강변의 속살들 위로 지나다니는 수 십대의 트럭과 포크레인이 내 마음도 긁어낸다. 누구를 위해야 하나, 인간일까, 자연일까........

 

여강은 강물결 따라 햇살에 반짝이는 여울들을 볼 수 있다. 강속 생물들에게 새 숨을 불어주는 역할을 충실해 주느라 쉼 없이 들거럭거리며 흘러내리는 여울. 그 옆으로 생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수많은 하중도와 넓은 모래밭, 그 하늘을 미끄러지듯이 날아가는 이름 모를 새떼, 그리고 보이지는 않지만 수풀속의 수생, 수서 생물체들이 서로의 존재를 알리며 남한강에서 한데 잘 어우러져 신명나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한강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살아있음을 느끼며 과연 남한강은 우리 조상들에게 베풀어 준 대 자연의 사랑이요, 은혜스러움이요, 너그러움임을 알게 한다. 여강은 넘어 넘어 양평으로 올라가 천()이 아닌 새로운 강()과 한 몸을 이루어 낸다.

 

 

풍광이 빼어나고 땅이 기름진 여주

여주는 산과 강과 들이 잘 조화를 이루어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하게 하기 때문에 목은 이색(1328~1396)은 이렇게 읊었다.

 

 

 

여강의 굽이굽이 산이 그림 같아서/驪江一曲山如畵

반은 단청 같고 반은 시와 같네/伴似丹靑半似詩

 

이처럼 자연 풍광이 아름답기 때문에 많은 풍류객들이 중국의 서호와 같다 하였고, 혹은 평양의 대동강과 같다 하였다. 여주는 땅이 기름져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가 많았으며 서울에서 벼슬살이하는 많은 이들이 이곳에 전장(田庄)을 두고 강을 따라 위아래에 볼 만한 누대(樓臺)를 지었다.

 

 

 

본주(本州: 여주)에는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는 집안이 많이 있으므로 즐비하게

번화한 것이 서울과 다를 것이 없고, 마을이 부성(富盛)하고 인물이 선명(鮮明)한 것이

마치 저자 가운데에서 보는 것과 같으니, 서울로 통하는 큰 고을이라 할 만하다.” (정조)

 

 

또한 서울로 통하는 모든 물자가 모여드는 곳이기에 배를 가지고 장사하여 부자가 된 자가 많았다.

 

 

 

조선시대 능묘와 석물의 보고(寶庫) 여주

 

 

 

우리군은 경기도 각 시·군중에서도 특히 양반의 고장이라고 불릴 만큼 명문대가들이 오래전부터 집성촌을 이루고 세거하면서 선산(先山)을 운영해 오던 고장이다. 그 대표적인 가문으로 여흥민씨를 비롯하여 반남박씨·경주김씨·청주한씨·원주원씨·남양홍씨·안동김씨·창녕조씨·한산이씨·이천서씨·안동권씨·청주경씨 등을 꼽을 수 있다.

 

중요묘소를 살펴보면 먼저 왕실의 외척으로는 태종의 부마 권규, 성종의 부마 임숭재, 순회세자의 장인 윤옥, 소현세자의 부마 변광보, 효종의 부마 원몽린(경기도문화재자료 제129), 숙종의 국구 민유중(향토유적 제5), 영조 계비 정순왕후의 오빠 김구주, 정조 후궁 수빈박씨의 생부 박준원(향토유적 제9), 철종의 국구 김문근, 명성황후의 생부 민치록 등이 있다.

 

그리고 고위관료로는 세조대 우의정 이인손, 연산군대 좌의정 어세겸, 명종대 좌의정 윤개, 효종대 우의정 한흥일, 현종대 좌의정 원두표(경기도문화재자료 제128), 현종대 우의정 이완(경기도기념물 제16), 현종대 영의정 홍명하, 숙종대 우의정 민진장(경기도기념물 제16), 숙종대 좌의정 민진원, 숙종대 좌의정 민정중(향토유적 제4), 경종대 영의정 김창집, 영조대 우의정 원인손, 고종대 우의정 한계원 등이 있어 조선시대의 중요인물이 거의 망라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석물로는 조하성 묘의 4각 망주석, 원만춘 묘의 글씨가 새겨진 혼유석, 민치록 묘의 밥상 모양 배설석, 이완 묘의 제주병석(祭酒甁石, 제사용 술병을 올려놓는 돌), 임원준 묘의 운문이 장식된 상석, 김수남 묘의 손잡이가 달린 상석, 윤희임 묘의 장고 모양 고석, 한효중 묘의 도자기형 촉대석, 원인손 묘의 8각 망주석에 달린 역동적인 모습의 세호(細虎)가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 설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서희 묘의 4각으로 봉분을 두른 호석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유염 묘의 꺽쇠 형태 호석, 우승규·권규 묘의 8각 호석, 임숭재·임원준 묘의 5각 호석, 원몽린·이휘조 묘의 원형 호석, 원상·민유중·민정중·민진장·윤창운·김수남 묘의 4각 호석이 있다. 이러한 호석를 두른 묘들을 통해 여주 지역 권문세가들의 당시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묘비로는 숙종이 장인을 위해 글씨를 쓴 민유중 묘표와 순조가 외조부를 위해 비문을 짓고 전액을 친히 쓴 박준원 신도비 등의 어필비가 있다. 그리고 중국 명필의 글씨를 짜깁기한 집자비로는 구양순의 글씨로 집자한 원명귀 신도비와 미불의 글씨로 집자한 원명귀 묘표가 있는데 모두 국내에서 처음 확인된 것으로 주목된다.

 

1779년 정조 임금은 능행차 여주에 들러 행궁에 머물때 청심루에 나아가 말하기를 본주(여주)에는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는 집안이 많이 있으므로 즐비하게 번화한 것이 서울과 다른 것이 없고 마을이 부성하고 인물이 선명한 것이 마치 저자 가운데에서 보는 것과 같으니 서울로 통하는 큰 고을이라 할 만하다하였으니 당시 여주의 번화함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당시의 여주는 교통의 편리함과 더불어 산세가 매우 수려하고 명당(明堂)도 많아, 유력한 권문세족들이 여러 곳에 선산을 마련하고 조상의 묘소를 모시면서 대대로 세거하여 왔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많은 유력가문의 중요인물들 묘와 뛰어난 조각의 석물들이 우리군 곳곳에 산재해 있는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구본만, 여주군향토사료관장 © 세종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