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 이승철 | 2013.10.04
[서울톡톡] "다른 왕릉과 똑같아 보이는데 여긴 왜 능이라고 하지 않고 원이라고 부르지요?"
"그러게 말이에요, 봉분의 크기나 석물, 정자각 등 다를 게 별로 없어 보이는데요."
동대문구 청량리에 있는 영휘원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5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두 사람이 묻는 말이다. 명성황후의 무덤이었던 홍릉을 찾아왔다가 멀리 금곡으로 옮긴 것을 알고 바로 옆에 있는 영휘원을 찾았다고 한다. 그들은 왕릉은 많이 둘러보았지만 원소는 처음이라고 했다.
지하철 1호선 청량리역 2번 출구를 나와 북쪽으로 15분쯤 걸으면 오른편 길가에 영휘원(永徽園)과 숭인원(崇仁園)이 자리 잡고 있다. 묘역 입구에는 그리 넓지 않은 마당가 담장 밑에 '사적361호 영휘원(숭인원포함)'이라 새긴 표지석이 서 있고 그 옆에 매표소와 출입문이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편 바로 앞에 커다란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맨 앞에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고, 정자각 뒤로 여느 왕릉과 전혀 다르게 보이지 않는 커다란 무덤이 보인다. 정자각 오른편에는 비각도 세워져 있다. 바로 숭인원이다. 숭인원은 대한제국 의민황태자(영친왕)의 장남인 원손 이진의 무덤이다. 이진은 영친왕과 이방자 사이에서 1921년 8월에 태어나 그 이듬해 5월에 죽었다. 태어난 지 불과 10개월 된 아기로 죽었지만 원손의 무덤이어서 숭인원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안쪽으로 조금 더 걸어들어 가면 비슷한 규모와 형태를 갖춘 또 다른 무덤이 나타난다. 영휘원이다. 영휘원은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귀비 엄씨의 원소(園所)다. 순헌귀비는 증찬성 진삼의 딸로 1854년(철종 5)에 태어나 아직 어린 나이인 1859년에 입궁하여 명성황후를 모시던 상궁이었다. 1896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본군들에게 살해당하고 아관파천 할 때부터 고종을 모셨다. 1897년 영친왕을 낳고 1903년 귀비로 책봉되었다. 1911년 7월 20일, 58세의 나이로 죽었다. 위패는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칠궁에 봉안되고 시신은 이곳에 묻혀 영휘원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이 지역은 본래 대한제국 황실의 묘역으로, 을미사변 때 시해당한 명성황후가 묻혔던 곳이다. 명성황후 능을 홍릉(洪陵)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 일대를 홍릉이라 일컬었다. 1919년 3월 남양주시 금곡동에 고종황제와 함께 합장하기 위해 옮겨졌다.
그럼 능과 원은 어떻게 다를까? 조선시대 무덤은 무덤에 묻힌 주인공의 신분에 따라 능(陵)과·원(園)·묘(墓)로 구분했다. 능은 오직 왕과 왕비의 무덤만을 일컫는 이름이다.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무덤 이름이다. 왕을 낳은 후궁의 무덤도 원이라 한다. 영휘원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왕을 낳은 친부모였지만 대원군의 경우는 특이하게 능호를 얻지 못했다. 그것은 훗날 왕으로 추존이 되었으면 능호를 받았을 터인데, 대원군은 왕으로 추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외의 왕실가족은 일반 사대부나 백성들의 무덤처럼 묘라 불렀다.
능과 원은 무덤 속 주인공 신분의 차이 외에 무덤 형식에 있어서도 조금 차이가 있다. 왕릉의 묘역시설은 곡장(무덤 뒤쪽을 둘러싼 작은 담)과 봉분의 병풍석, 난간석, 그리고 코끼리, 호랑이 말 조각상, 혼유석, 장명등, 망주석, 문인석과 무인석, 홍살문, 정자각, 비각, 제실, 우물, 사초지가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왕릉보다 한 등급 아래인 원은 봉분과 곡장, 상석, 정자각, 재실 등 대부분이 능과 같은 형태를 갖추고 있으나 그 규모가 조금 작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면 봉분의 병풍석과 난간석이 대부분 생략되었다. 특별히 문인석과 무인석 중에서 무인석은 왕릉에만 설치할 수 있는데, 이것은 군대는 오직 왕만이 거느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오백 년의 도읍지인 서울과 주변에는 수많은 왕릉과 원소들이 산재해 있다. 왕실의 무덤인 왕릉과 원소들을 둘러볼 때 어떻게 서로 다른가를 비교하며 살펴보면 우리 역사와 문화, 왕실 무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