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능 (陵) - 5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1) 제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長陵, 휘릉徽陵, 소경원昭慶園, 영회원永懷園
왕릉은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42기 (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기,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園)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墓)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기(능40, 원14, 묘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능3, 원4, 묘5)입니다
사후에 왕(王)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기(基) 폐위(廢位)된 묘(墓) 2기(基) 황제릉(皇帝陵) 2기(基) 왕릉 35기
1. 추존이라는 미명으로, 역사세우기
추존(追尊)왕 ‘함길도 8릉’
2. 왕조, 문을 열다
제1대 태조 (太祖, 1335-1408)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 貞陵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제2대 정종 (定宗, 1357-1419) _ 후릉 厚陵
제3대 태종 (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제4대 세종 (世宗, 1397-1450) _ 영릉 英陵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제5대 문종 (文宗, 1414-1452) _ 현릉 顯陵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제6대 단종 (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제7대 세조 (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추존(追尊)왕 덕종 (德宗, 1438-1457) _ 경릉 敬陵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제8대 예종 (睿宗, 1450-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제9대 성종 (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 懷墓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3. 왕조, 산을 넘다
제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제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 泰陵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제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 孝陵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제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순창원 順昌園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제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순강원 順康園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제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제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 長陵, 휘릉 徽陵, 소경원 昭慶園, 영회원 永懷園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제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제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제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제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제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 綏吉園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 懿寧園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제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 孝昌園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제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제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제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제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제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제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長陵, 휘릉徽陵, 소경원昭慶園, 영회원永懷園
제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長陵, 휘릉徽陵
계획적인 쿠데타로 왕권 잡아 극적이고 고단한 삶을 살다
인조(仁祖, 이종, 1595-1649, 재위 27년), 인렬왕후 한씨(仁烈王后 韓氏, 1594-1635), 1731년, 경기 파주 203호, 파주삼릉 비공개릉, 파주장릉은 제한공개릉입니다.
仁祖(이종 ; 1595-1649, 재위 27년)와 비 인열왕후 한씨(仁烈王后韓氏 ; 1594-1635)의 長陵은 본래 경기도 파주시 운천리에 인열왕후릉을 먼저 조성하고 인조 승하후 곁에 인조의 능을 조성했다가 영조(英祖) 7년(1731년)에 현 위치로 옮겨와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으로 다시 조성되었습니다.
장릉은 조선 16대 인조와 그의 원비 인열왕후의 합장릉이다. 한 차례의 천장을 치렀는데, 처음에 만든 석물을 새 능으로 옮길 때 옛 능의 병풍석, 난간석 등이 새 능과 규모가 맞지 않아 그대로 이전하지 못하고 새로 만들었다. 따라서 장릉에서는 처음 조성한 석물과 천장할 때 새로 조성한 석물이 함께 어우러져 17세기, 18세기의 왕릉 석물을 동시에 볼 수 있다. 병풍석에 기존의 구름문양과 십이지신상을 대신하여 모란꽃과 연꽃 문양을 새긴 것이 특이하다.
1635년(인조 13) 12월 9일 인렬왕후가 승하하자 능호를 장릉이라 하여 이듬해 4월 12일 파주 운천리의 언덕에 능을 조영하였다. 인조는 장릉을 조영하면서 오른쪽에 미리 자신의 능을 마련해 두었다가 승하 후 그곳에 묻혔다. 그러나 후에 화재가 일어나고 뱀과 전갈이 능 주위로 무리를 이루고 석물 틈에 집을 짓는 등 변이 계속되었다. 따라서 1731년(영조 7년) 8월 30일 천장을 결정하고 현재의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로 옮겼다.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 상석(床石), 장명등(長明燈) 등은 합장릉으로 천장(遷葬)할 때 다시 만들어졌고, 병풍석과 장명등에는 모란과 연꽃의 화문(花紋)으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선조대(宣祖代)의 국가적 치욕을 겪은 후에 또 다시 외적(外敵)으로 인해 몽진(蒙塵)과 치욕의 항복을 한 인조(仁祖)는 반정(反正)의 바탕으로 왕위에 오른 국왕이었기에 반정 세력들의 힘을 거부하기 곤란한 상황이 많았습니다.
반정에 따른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은 평안병사(平安兵使) 이괄(李适)의 난으로 공주(公州)까지 피신을 했고, 친명배금(親明排金)의 정책으로 정묘(丁卯), 병자(丙子)호란(胡亂)의 치욕을 당하는 등 권력의 출발부터가 순탄하지 못함으로 인해 입은 폐해는 극도에 달했습니다.
1627년 정묘년에 후금(後金)의 3만여 군사들에게 한양(漢陽)을 내주고 강화도로 피신한 인조는 자신들이 오랑캐라 지칭하며 업신여기던 그들에게 형제(兄弟)의 의(義)를 맺어 화의했고, 또 다시 1636년 병자년에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청의(淸衣)를 입고 치욕적인 군신(君臣)의 의를 맺는 관계로까지 변화되는 상황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굴욕을 당했으니, 뛰어난 외교적 수단을 발휘한 광해군대(光海君代)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인열왕후 한씨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한준겸(韓浚謙)의 딸로 태어나, 1610년 인조가 능양군(綾陽君) 시절에 혼례를 올렸다가 반정(反正) 후 왕비에 책봉됩니다. 슬하에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효종(孝宗), 인평대군(麟平大君), 용성대군(龍成大君)의 4남을 두었는데, 용성대군 생산 후에 일종의 산후병으로 42세의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소현세자(昭顯世子) 역시 청(淸)나라의 볼모를 끝내고 돌아온 직후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어 인조는 다음 세자로 차남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정해 다음 대(代)의 효종(孝宗)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합니다.
삼전도(三田渡)에서의 굴욕의 항복, 두 왕자{소현세자(昭顯世子), 봉림대군(鳳林大君)-효종}와 척화파(斥和派) 삼학사(三學士 ; 오달제,윤집,홍익한) 등을 볼모와 포로로 내어주고, 심지어 청(淸)의 요구에 의해 삼전도에 대청황제 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까지 세우는 등 굴욕의 예를 계속한 인조(仁祖)였기에 임란(壬亂) 이후 변화되는 세계 정세를 적극 대처하지 못한 조선조의 안타까움을 되새겨 봅니다.
인조(仁祖)는 선조(宣祖)와 인빈김씨(仁嬪金氏) 사이의 셋째 아들인 원종(元宗)과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 사이에서 1595년(선조 28) 11월 7일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태어났다. 1607년에 능양도정(綾陽都正)으로 봉한 다음 능양군(綾陽君)으로 봉해졌다. 1623년(광해군 15) 이서(李曙)·이귀(李貴)·김류(金瑬) 등 서인일파가 광해군(光海君) 및 집권당인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낸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3월 13일 경운궁(慶運宮)에서 즉위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북파는 왕권의 확립을 위해 서인·남인 등의 의견을 무시하고, 소북계의 지지를 받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며,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는 등 무리수를 두었었다. 그러나 인조는 즉위 초기부터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반정의 총지휘자로 추대되었던 김류가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었다는 이유로 소극적으로 행동하자 이괄(李适)은 이를 비난했다.
그러자 1624년 1월에 문회(文晦)·허통(許通)·이우(李佑) 등이 이괄과 그의 아들 이전(李旃)·한명련(韓明璉)·정충신(鄭忠信)·기자헌(奇自獻)·현집(玄楫)·이시언(李時言)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했다. 이괄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아들을 압송하러 온 관원들을 죽이고 한양으로 압송되던 한명련을 구하고 난을 일으켰다. 반군이 진격해오자 인조는 공주(公州)로 피난을 떠났고, 반군은 경복궁에 주둔하며 선조의 아들 흥안군(興安君)을 왕으로 추대하였으나 이괄이 2월 15일 이천(利川)에서 부하장수에게 죽임을 당함으로써 난은 끝났다. 난이 실패한 뒤 후금(後金)으로 도주한 잔당이 조선을 침공할 것을 후금의 태종에게 요청하자 태종은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구실로 1627년 1월 조선을 침공해오는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났다.
인조는 강화도로,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피난을 떠났으나 후금의 화의 제의로 전쟁은 끝났다. 국호를 청(淸)이라 고친 청 태종은 1637년 1월에 다시 조선을 침공해오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그 해 1월 30일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의식이 거행되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고, 홍익한·윤집·오달제 등 3학사는 청나라로 끌려가 참형을 당하는 등 조선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일을 당해야 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인 1635년(인조 13) 12월 9일에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가 창경궁(昌慶宮) 여휘당(麗暉堂)에서 승하하여 파주 북쪽 운천리에 있는 부윤 이유징(李幼澄)의 무덤을 옮긴 후 이듬해인 4월 11일에 서향(卯坐酉向)으로 장사를 지내고 능호를 장릉(長陵)이라 하였다.
1645년(인조 23) 봄에는 소현세자가 연경(燕京)에서 돌아왔으나 곧 승하하여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1649년(인조 27) 5월 8일에는 창덕궁(昌德宮)의 대조전에서 인조가 승하하였다. 인열왕후의 장사 때 미리 준비해둔 옆자리에 같은 해 9월 20일에 인조를 장사지냈다.
장지(葬地) 선정 시에 대사헌 조익(趙翼)이 “인열왕후를 장사지낼 때 이간을 제외한 다른 지관들은 그 곳이 좋지 않다고 말하고, 그 뒤로 길흉도 분간되지 않고 의혹도 풀리지 않았는데 그대로 그 자리에 인조를 모신다면 크게 후회할 일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지관들을 불러 모아 다시 장지를 살펴본 뒤 각기 소견을 말하게 한다면 길흉을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상언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1731년(영조 7)에 능침(陵寢) 사이에 뱀이 가끔 나타나거나, 똬리를 틀고 있고, 능을 처음 개광(開壙)할 때에 땅속에 뱀이 있었으나 개의치 않고 장사를 지냈다는 소문이 있어 그 해 8월 30일 교하(交河) 구읍(舊邑) 남향(子坐午向) 언덕으로 이장을 하였다. 장릉은 혈처 뒤의 내룡(來龍)이 힘이 있고, 왕자(王字)의 형상이라는 평가가 당시에 있었다. 그러나 주산과 안산이 또렷하지를 못하고, 혈처 앞에 펼쳐진 명당은 오른쪽으로 치우쳐있으면서 앞은 텅 비어 허전한 느낌이 든다. 바로 나만의 색깔이 없어 다른 사람의 손에 휘둘리고, 후손의 복록은 고르지 못할 자리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인조(仁祖:1595-1649, 재위 27년)와 비 인열왕후 한씨(仁烈王后韓氏 ; 1594-1635)의 장릉(長陵)은 본래 인열왕후 한씨가 산후병으로 42세의 생을 마감하자 경기도 파주시 운천리에 인열왕후릉을 먼저 조성하였다. 그러다가 1731년 (영조 7) 에 사갈(뱀과 전갈)이 낭자하게 석물 틈에 집을 짓고 있어 현 위치인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 25-1번지로 옮겨 왕과 왕비를 합장으로 다시 조성하였다. 그러나 비공개 왕릉이라 주위엔 장릉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없다.
선조대(宣祖代)의 국가적 치욕을 겪은 후에 또 다시 외적(外敵)으로 인해 몽진(蒙塵)과 치욕의 항복을 한 인조(仁祖)는 반정(反正)의 바탕으로 왕위에 오른 국왕이었기에 반정 세력들의 힘을 거부하기 곤란한 상황이 많았다. 반정에 따른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은 평안병사(平安兵使) 이괄(李适)의 난으로 공주(公州)까지 피신을 했고, 친명배금(親明排金)의 정책으로 정묘(丁卯), 병자(丙子)호란(胡亂)의 치욕을 당하는 등 권력의 출발부터가 순탄하지 못함으로 인해 입은 폐해는 극도에 달했다.
1627년 정묘년에 후금(後金)의 3만여 군사들에게 한양(漢陽)을 내주고 강화도로 피신한 인조는 자신들이 오랑캐라 지칭하며 업신여기던 그들에게 형제(兄弟)의 의(義)를 맺어 화의했고, 또 다시 1636년 병자년에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청의(淸衣)를 입고 치욕적인 군신(君臣)의 의를 맺는 관계로까지 변화되는 상황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굴욕을 당했으니, 뛰어난 외교적 수단을 발휘한 광해군대(光海君代)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처음의 능은 건원릉의 석물제도를 본떠 십이지신상과 구름무늬를 부조한 병풍석, 장명등, 석수 등을 상설했는데 천장하면서 병풍석과 혼유석, 난간석, 장명등을 새로 만들었다. 이외의 석물은 그대로 옮겨놓았으므로 장릉은 17세기와 18세기의 석물이 공존하는 셈이다.
명분에 사로잡혀 전쟁을 겪은 인조
인조(仁祖, 이종, 1595-1649, 재위 27년) 인조는 임진왜란 때인 1595년(선조 28) 11월 7일 왕실의 피난처였던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서인 세력과 손잡고 공빈 김씨 소생의 삼촌인 광해군을 물러나게 한 인조반정을 통해 1623년 3월 13일 즉위하였다. 정묘화란, 병자호란 등의 변란과 강화도로의 피신 사건, 남한산성에서의 삼전도 사건으로 청과의 외교관계가 악화되었으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에 볼모로 보내는 등 혼란스러운 정국을 이끌었다. 1649년(인조 27) 5월 8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55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반정은 짧고 굴욕은 길다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지 못한 왕
능양군의 무력정변의 배경 인빈 김 씨와 그녀의 소생들을 총애했던 선조였지만 임진왜란과 그밖의 여러가 지 이유로 광해군에게 세자자리에서 밀린 인빈김씨와 그녀의 소생들 은 항상 불만을 갖고있었다. 후에 광해군이 왕권강화 차원에서 그녀 의 소생중에 가장 위험한 존재로 지목했던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한 능 창군을 신경희 사건과 연루시켜 사사하고 인목대비마저 유폐시키자 능 창군의 맏형인 능양군은 영창대군을 지지하고 인목대비를 따르고 있 던 서인들과 함께 역모를 도모한다.
인목대비의 광해군 폐위 에 관한 합당한 이유 세가지 첫째 선왕을 독살하고 형과 아우를 죽이고 어머니인 자신을 유폐시켰다는 것.
왕으로 등극후의 수습 정묘호란, 병자호란
새로운 문화형성 1645년 청에 볼모로 잡혀갔던 정두원과 소 현세자가 돌아오면서 화포, 천리 경, 과학 서적, 천주교 서적 등을 가져오고, 송인룡 등이 서양의 역법 인 시헌력을 수입하여 새로운 문화 형성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이 시 기에 '황극경세서', '동사보편', '서연비람' 등의 책들이 간행되었 고, 송시열, 송준길, 김육, 김집 등 우수한 학자들이 배출되어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인렬왕후 한씨(仁烈王后 韓氏, 1594-1635)
16대 인조의 원비인 인열왕후는 서평부원군 한준겸의 딸로, 1594년(선조 27) 7월 1일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인 1610년(광해군 2) 가례를 올리고 청성현부인으로 봉해졌으며, 1623년 인조 즉위 시 왕비로 책봉되었다. 소현세자, 효종, 인평대군, 용성대군을 낳았는데, 42세인 1635년(인조 13) 12월 9일 용성대군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창경궁 여휘당 산실청에서 승하하였다. 능은 장릉으로 인조 와 함께 경기 도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에 있었으나 영조 때 파주군 탄현면 갈현리 로 옮겨졌다.
예송논쟁의 정점에 선 여인 오래 살아 역사의 흠이 되다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 趙氏, 1624-1688), 1688년, 경기 구리 193호. 동구릉(東九陵)
휘릉은 1688년(숙종 14) 조성된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이다. 능침은 3면의 곡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병풍석은 두르지 않았다. 18대 현종 비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을 조영한지 5년 뒤에 다시 조영한 능이므로 석물의 형식과 기법이 거의 비슷하다. 난간석에는 십이지상을 새겨 열 두 방위를 표시하였다. 또한 능침 앞에 놓인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이 5개이다. 태조에서 세종에 이르는 왕릉의 고석은 모두 5개였다가 세종 영릉 이후 4개로 줄었는데, 휘릉에 와서 다시 초기의 형식을 따르게 된 것이다. 고석에는 귀신을 물리치길 바라는 뜻에서 도깨비를 새겨놓았다.
능침 주변의 석양과 석호는 아담한 크기에 다리가 짧다. 석양은 다리가 너무 짧가 배가 바닥에 거의 닿을 정도이다. 한 단계 아래의 문석인과 무석인은 모두 2.4m에 이르는 큰 키를 자랑한다. 문석인은 이목구비가 마멸되어 윤곽만이 남아 있으나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고, 무석인은 목이 없이 얼굴과 가슴이 붙어 있고 이목구비가 커서 답답한 느낌을 주지만 우직하고 우람한 무인의 모습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1688년(숙종 14) 12월 16일 16대 인조 계비 장렬왕후의 휘릉을 조성하였다.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양주 조씨는 1688년 8월 26일 창경궁 내반원에서 춘추 65세로 승하하였다. 8월 27일에 소렴하고, 9월 1일에 대렴하였다. 12월 15일에 발인하였다. 숙종실록 14년 12월 15일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장렬 왕후의 발인에 총호사(摠護使)가 재궁을 받들고 빈양문으로부터 명정전을 경유하여 나가서 진발하였는데, 모시고 따라간 문무 백관은 모두 걸어서 따르고 임금은 소여를 타고 흥인문 밖에까지 곡하며 따라가서, 노제소에서 절하고 하직하고 돌아왔다. 발인 다음날인 12월 16일 봉릉하였다.
인조(仁祖)의 계비(繼妃)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趙氏 ; 1624-1688)의 휘릉(徽陵)은 그녀가 4대의 왕대를 살아 숙종대(肅宗代)에 승하함으로 해서 현종(顯宗)의 숭릉(崇陵)에 이어 유사한 형식으로 조성되어 동구릉(東九陵) 소재 태조(太祖)의 건원릉(建元陵) 서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봉분(封墳)에는 병풍석(屛風石)이 없이 난간석(欄干石)만 설치하였고, 상석(床石)의 받침 고석에는 악귀를 쫓는 귀신 얼굴을 조각해 놓았습니다.
인조 비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가 1635년(인조 13)에 승하하자 인조(仁祖)는 영돈녕부사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막내딸을 1638년에 왕비로 책봉하였는데 그 가 훗날 장열왕후(莊烈王后)이다. 장열왕후는 조창원과 완산부부인(完山府夫人) 최씨(崔氏) 사이에서 1624년(인조 2년) 11월 7일 충청도 직산현 관아(官衙)에서 태어났다. 가례를 행할 때 인조의 나이는 44세였고 장열왕후는 15세였다. 인조가 1649년(인조 27)에 승하를 하니 차자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그가 효종(孝宗)이다.
효종은 장열왕후를 자의(慈懿)라는 존호를 1651년(효종 2)올렸으며, 1659년에 즉위한 현종(顯宗)은 공신(恭愼)이란 존호를 1661년(현종 2)에 더 올렸다. 숙종(肅宗)은 1676년(숙종 2년)에 휘헌(徽獻)이라는 존호를 더 올린 후 1686년(숙종 12)에는 강인(康仁)이라는 존호를 또 올렸다. 이와 같이 장열왕후는 4대의 왕을 거치면서 왕실의 어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1686년 여름에 병이 나자 여러 산천(山川)에 기도하고, 죄수를 사면하고, 하늘에 부르짖어 기대하고 빌었지만 1688년(숙종 14) 8월 26일 창경궁 내반원(內班院)에서 65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그 해 12월 6일 건원릉 서쪽 언덕(酉坐卯向)에 장사 지내고 능호를 휘릉(徽陵)이라 하였다.
항상 ‘후비(后妃)가 국정(國政)을 맡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여성으로서 스스로 성스러운 행동을 하려고 힘썼으나 본의 아니게 복제(服制)와 예송(禮訟)의 대상이 되어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의 당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예송이란 상복을 입는 기간을 문제로 일러난 논쟁으로 1659년(己亥年) 5월 4일 효종이 승하하자 계모인 장열왕후의 복제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되는데 이것이 기해예송(己亥禮訟)이다. 효종은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일찍 세상을 떠나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성리학에 근거한 예론(禮論)에서는 아들이 부모보다 먼저 죽었을 때 그 부모는 죽은 아들이 적장자(嫡長子)인 경우는 3년 상(喪)을 그 이하 차자일 경우에는 1년 상을 입도록 하고 있다.
인조는 장자인 소현세자가 죽은 뒤 그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차자인 봉림대군이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효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어 왕통이 적장자(적장자가 유고시 적장손)가 잇는 관습에서 벗어나 기해예송의 배경이 되었다. 송시열(宋時烈)을 중심으로 한 서인들은 1년 상을 주장한 데 반하여, 윤휴(尹稶)·허목(許穆)·윤선도(尹善道) 등을 중심으로 한 남인들은 차자로 출생하였더라도 왕위에 오르면 장자가 될 수 있다는 허목의 차장자설을 내세우며 장열왕후는 3년의 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조(仁祖)의 계비(繼妃)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趙氏 ; 1624-1688)의 휘릉(徽陵)은 그녀가 4대의 왕대를 살아 숙종대(肅宗代)에 승하함으로 해서 현종(顯宗)의 숭릉(崇陵)에 이어 유사한 형식으로 조성되어 동구릉(東九陵) 소재 태조(太祖)의 건원릉(建元陵) 서쪽 언덕에 위치한다. 봉분(封墳)에는 병풍석(屛風石)이 없이 난간석(欄干石)만 설치하였고, 상석(床石)의 받침 고석에는 악귀를 쫓는 귀신 얼굴을 조각해 놓았다.
26살의 나이에 인조가 승하해 대비(大妃)가 되었는데, 10년 후 다음 효종(孝宗)까지 승하하고, 그후 현종(顯宗)에 이어 숙종대(肅宗代) 까지 대왕대비로 지내는 기구한 인생을 보냈지만, 슬하에 소생(所生)은 없었다. 생전에 특이한 점은 그녀로부터 야기된 사건인 관념적인 권력의 암투로 알려진 복상문제(服喪問題)에서 발단이 된 예송(禮訟)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송시열 등의 서인(西人)과 윤휴 등의 남인(南人)의 대립이 표면화된 것은 바로 인조의 차남(次男)이었던 효종(孝宗)의 상(喪){1659년}에 장렬왕후가 몇 년의 상복(喪服)을 입어야 하는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서인(西人)의 기년설(朞年說-1년)과 남인(南人)의 삼년설(三年說-3년)의 1차 대립에 이어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상(喪){1674년, 현종15년}에 역시 서인(西人)의 대공설(大功說-8개월)과 남인(南人)의 기년설(朞年說) 2차 대립은 결국 서인(西人)에서 남인(南人)에게로 권력의 이동을 가져왔으나 다소 소모적인 논쟁으로 부정적인 평가도 내려지곤 합니다.
하지만 송시열(宋時烈), 김집(金集) 등의 뛰어난 유학자들이 배출되어 후기 성리학(性理學)이 완숙한 경지에 이르는 시기이기도 했기에 단순하게 당쟁(黨爭)의 논리로만 평가해서는 당대의 흐름을 올바로 평가할 수 없을 것입니다.
휘릉의 수리 종료를 보고하지 않은 승지 홍인호(洪仁浩, 1753∼1799)를 파직하다
『정조실록』 1793년(정조 17) 5월15일 휘릉의 정자각. 1793년(정조17)이 정자각의 수리 완료 보고가 되지 않았다 하여 승지 홍인호가 파직당하는 일이 있었다. 이때에 휘릉(徽陵)의 정자각을 수리해 고치는 역사가 있었다. 역사를 끝냈다는 서계가 승정원에 이르렀는데도 승지가 상이 재계하는 중이라는 이유로 받아두고 아뢰지 않았는데, 상이 경연의 신하들을 통해 듣고서는, 일의 관계됨이 막중하므로 재계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여기어 승지 홍인호(洪仁浩)를 파직하고 급히 그 계본을 찾아오게 하여 호조 판서와 능관(陵官) 등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위의 기사에 따르면 정자각의 수리 공사 완료가 늦춰졌다는 이유로 승지가 파직을 당하였다. 이는 당시 왕릉의 관리가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졌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부분이다.
조선 왕릉은 유교를 국교로 천명했던 조선시대에 있어 왕조의 근간을 지탱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공간 가운데 하나였다. 중요한 가치를 지닌 대상인 만큼 조선 왕실은 별도의 국가 관리기관을 마련하여 능역 별로 철저하게 관리하였고, 이러한 덕분에 조선 왕릉은 오늘날까지 그 형태를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
홍인호(洪仁浩) 1753년∼1799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원서(元瑞)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다산 정약용의 6촌 처남이다. 1774년(영조 50)진사가 되었고, 1777년(정조1) 병과에 급제하였다. 교리, 부교리, 중화부사, 승지 등을 거쳐 1791년(정조 15)에 대사간이 되었으며 이후 여러 번 대사간을 역임하였다.1798년(정조 22)에는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고,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왕명으로 각 도의 『형옥결안(刑獄決案)』을 편교하였으며, 그의 동생 홍의호(洪義浩)가 이를 『심리록(審理錄)』으로 증수, 간행하였다. 1798년(정조 22)에는 강원도 관찰사로서 관내 부세 징수의 문제점을 소상하게 논의하고 지방 수령들의 가렴주구의 실상을 자세히 보고하였다.
① 3면이 곡장으로 둘러싸인 능침에는 병풍석이 없고 12칸의 난간석을 둘렀으며, 현종 비 명성왕후의 숭릉 5년 뒤에 조영한 능이라서 석물의 형식과 기법이 숭릉과 거의 비슷하다. 석양과 석호는 그리 크지 않으며, 석양의 다리가 너무 짧아 배가 바닥에 거의 닿아 있다. ②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은 건원릉의 형식을 따른 5개로 되어 있으며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귀면(鬼面)이 새겨져 있다.
휘릉 예송논쟁에 휘말려 살다 간 불우한 여인
인조 계비(繼妃)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 趙氏, 1624-1688)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딸로 인조 2년(1624년)에 태어난 장렬왕후(莊烈王后)는 열다섯 살의 나이{1638년, 인조 16년}로 인조의 정비(正妃) 인열왕후(仁烈王后)가 용성대군(龍成大君)을 낳은 후 승하하자 계비(繼妃)에 책봉되었습니다. 그러나 26살의 나이에 인조가 승하해 대비(大妃)가 되었는데, 10년 후 다음 효종(孝宗)까지 승하하고, 그후 현종(顯宗)에 이어 숙종대(肅宗代) 까지 대왕대비로 지내는 기구한 인생을 보냈지만, 슬하에 소생(所生)은 없었습니다.
생전에 특이한 점은 그녀로부터 야기된 사건인 관념적인 권력의 암투로 알려진 복상문제(服喪問題)에서 발단이 된 예송(禮訟)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송시열 등의 서인(西人)과 윤휴 등의 남인(南人)의 대립이 표면화된 것은 바로 인조의 차남(次男)이었던 효종(孝宗)의 상(喪){1659년}에 장렬왕후가 몇 년의 상복(喪服)을 입어야 하는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서인(西人)의 기년설(朞年說-1년)과 남인(南人)의 삼년설(三年說-3년)의 1차 대립에 이어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상(喪){1674년, 현종15년}에 역시 서인(西人)의 대공설(大功說-8개월)과 남인(南人)의 기년설(朞年說) 2차 대립은 결국 서인(西人)에서 남인(南人)에게로 권력의 이동을 가져왔으나 다소 소모적인 논쟁으로 부정적인 평가도 내려지곤 합니다.
하지만 송시열(宋時烈), 김집(金集) 등의 뛰어난 유학자들이 배출되어 후기 성리학(性理學)이 완숙한 경지에 이르는 시기이기도 했기에 단순하게 당쟁(黨爭)의 논리로만 평가해서는 당대의 흐름을 올바로 평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장렬왕후는 인조의 계비이다. 1624년(인조 2) 인천부사이던 한원부원군 조창원의 딸로 태어났으며, 15세의 나이로 1638년(인조 16) 12월 2일 인조의 계비로 간택되어 어의동 본궁에서 가례를 올리고 왕비로 책봉되었다. 1649년(인조 27)에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26세의 나이로 대비가 되었으며, 1651년(효종 2) 자의(恣懿)의 존호를 받았다.
1659년(효종 10) 효종이 죽자, 효종에 대한 복상(服喪)문제로 서인, 남인 간에 대립이 생겼는데, 서인의 승리로 기년복(朞年服)을 입었다. 1674년(현종 15) 며느리인 효종비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죽자 다시 복상문제가 일어났다. 서인은 대공설(大功說), 즉 9개월 복상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기년설, 즉 1년 복상을 주장하였는데, 이번에는 남인이 승리하여, 서인이 조정에서 물러나고 조대비는 1년 복상을 하였다. 자의대비는 효종, 현종, 숙종 대까지 4대에 걸치는 동안 왕실의 어른으로 지내며 천수를 누리다가 1688년(숙종 14) 8월 26일 65세로 소생 없이 창경궁 내반원에서 승하하였다.
어린 나이에 인조의 계비로 궁에 들어와 남편을 일찍 여읜 장렬왕후는 효종, 현종, 숙종 3대의 왕이 인조의 뒤를 잇는 동안 자의대비라는 이름 아래 왕실의 어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복제와 예송의 대상이 되어 서인과 남인의 당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성리학에 근거한 상례에 따르면 맏아들이 죽었을 때는 부모가 3년 상의 상복을 입고, 차남의 상에는 1년 동안만 상복을 입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1659년(효종 10) 5월 4일 인조의 둘째 아들인 효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 조씨가 상복을 얼마동안 입어야 할 것인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게 된다. 서인은 1년 상복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은 아니지만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자의 대우를 하여 자의대비가 3년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립한 것이다. 이 논쟁은 결국 장자와 차자의 구별 없이 1년복을 입게 한 규정에 따르는 것으로 결말지어졌고, 이로 인해 1년복을 주장했던 서인이 논쟁에서 승리한 셈이 되어 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자의대비의 며느리이자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이 논쟁이 다시 불거졌다. 이를 2차 예송논쟁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서인은 역시 인선왕후를 둘째 아들 며느리로 여겨 9개월 상복을 주장했고, 남인은 중전이므로 첫째 아들 며느리 대우를 하여 1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 현종은 남인의 주장을 채택하여 서인 정권을 몰락시키고 남인 정권이 세력을 잡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한원부원 군 조창원의 딸로 1635년 인조의 정비 인렬왕후가 죽자 3년 뒤인 1638 년 15세의 어린 나이로 44세인 인조와 가례를 올렸다. 1649년 인조가 죽자 대비가 되고 1659년 효종이 죽자 다시 대왕대비가 되었다. 이 때 그녀가 입어야 할 상복이 정 치 문제화되어 서인이 만 1년만 착복 하면 된다는 기년설을 주장하여 그 절차대로 복상을 치렀다. 하지만 이듬해 남 인 허목 등이 대왕대비의 복상은 3년을 착용해야 한다는 3 년설을 제기하여 서인을 공격했다. 이에 서인의 거두 송 시열은 효종 이 맏아들이 아니고 둘째 아들이므로 복상은 1년만 착용하면 된다는 기년설을 다시 주장했고, 남인 윤 후 등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였으 니 맏아들이나 다름없다고 반박하며 3년설을 주장했다. 결국 이 복상 문제는 양당간의 정치 쟁점으로 떠올랐고 송시열 등의 주장에 따라 기 년설이 받아들여짐으로써 남인 의 입지가 약해지고 서인의 입김이 강 해졌다. 하지만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 장씨가 죽자 다시 이 복상 문 제가 대 두되어 남인은 기년설을, 서인은 대공설(9개월설)을 주장하였 는데, 이 때는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되어 서인 정권이 몰락하고 남인 이 정권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1688년 6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능은 휘릉으로 현재 경기도 구리시에 있다.
소현세자 이야기, 아버지의 견제 받던 왕자의 비명횡사
인조의 맏아들이며 이름은 왕, 어머니는 인렬왕후 한씨이다. 1625년에 세자 에 책봉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 는 전주로 내려가 남도의 민심 을 수습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해에 강석기의 딸과 혼인하였다. 1637 년 병자호란 당시 삼전도에서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이 있자 자청하여 봉림대군 및 척화파 대신들과 함께 심양 에 인질로 잡혀갔다. 그는 이 후 8년 동안 심양에 머무르면서 단순한 인질이 아닌 외교관의 소임을 도맡아 청이 조 선에 무리한 요구를 하면 담판을 짓거나 막기도 했 다. 때문에 청은 조선과의 문제를 그와 해결하려 했고, 이는 결 과적 으로 조선의 왕권이 둘로 나누어지는 양상을 가져왔다. 이같은 외교 솜씨를 발휘하는 한편으로 소현세자는 서 양 문물에 심취하여 천주교 신부인 아담 샬 등과 친교를 맺고 지냈으며, 그를 통하여 서양의 천문 학, 수학 등을 접하였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소현세자의 이같은 활동을 친청 행위로 규정하고 그를 비 난했다. 당시 조정은 대부분 친명반 청 세력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 기 때문이다. 인조 역시 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만큼 소현세자 를 좋아하지 않았고 급기야는 그가 조선 국왕으로서 부적격하다는 판 단을 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인조가 총애하던 후궁 귀인 조 소용과 세 자빈의 사이가 좋지 않아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 다. 소현세자가 9년 동안의 인질 생활을 청산하고 1645년 귀국하였을 때 인조는 그를 무척 박대한다. 인조는 소현세자 가 철저한 친청주의 자가 되어 돌아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현세자가 청에서 가져온 서 양 문물조차도 수용하지 않는 용렬한 모습을 보인다. 입국 후 2달 뒤 인 4월 23일 소현세자는 갑자기 병으로 드러누웠고, 와병한 지 3일 만 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이 때 그의 온 몸은 새까맣게 변해 있었 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에 따라 일부 학자 들은 그가 인조에 의해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가 34세의 혈기왕성한 나이로 죽은 이듬해 세자빈 강씨도 인조로부터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세 아들도 제주도로 귀양가 두 명은 병에 걸려 죽었다. 이 사건 이후 인 조는 손자를 죽였다는 세상의 비난을 피하고 자 그들을 돌보던 나인을 장살시켰다. 소현세자는 죽은 후 경기도 고 양시에 묻혔는데, 처음에는 이 무덤을 소현묘라고 하였으나 고종 때 에 이르러 소경원으로 격상되었다.
볼모로 잡혀간 것도 모자라 아버지의 견제까지 받다 결국 비명횡사하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소현세자를 볼모로 떠나보내게 된 인조는 “매사에 힘써 행하되 격노하지 말고 또 처신을 가벼이 하지 말라”는 당부를 건네며 눈물로 세자를 전송했다. 소현세자는 당장의 곤경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을 뿐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깊게 고민할 분별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분별력 결여로 인해 치러야 할 대가는 가혹할 정도로 참혹한 것이었다.
적국 청나라의 볼모가 되다
이제 속국이 된 조선에 청나라는 두 번 다시 조선이 배신하지 못하도록 보다 확실한 안전 방편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즉 세자를 비롯한 왕자는 물론 대신의 자식들도 볼모로 삼아 청나라로 데리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척화파의 반발은 격렬했으나 거절할 재간이 있을 리 없었고 결국 소현세자가 자청하는 형식을 빌려 청의 요구를 수락했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소현세자를 볼모로 떠나보내게 된 인조는 “매사에 힘써 행하되 격노하지 말고 또 처신을 가벼이 하지 말라”는 당부를 건네며 눈물로 세자를 전송했다. 소현세자는 당장의 곤경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을 뿐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깊게 고민할 분별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분별력 결여로 인해 치러야 할 대가는 가혹할 정도로 참혹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알 리가 없는 소현세자는 전송자의 눈물을 뒤로 하고 청나라로의 길을 떠났다. 이때 그의 나이 스물여섯으로 죽음을 맞이하기 8년 전의 일이었다.
드디어 그해 3월 그리운 고국 땅을 밟게 된 소현세자였지만 그를 맞이한 것은 인조의 싸늘한 반응이었다. 인조의 냉담한 태도에 소현세자는 낙담과 원망이 뒤섞인 마음으로 무거운 발길을 옮겨야 했다. 하지만 자신이 이번에 귀국하게 된 진짜 속사정을 알았더라면 귀국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설사 귀국했더라도 서둘러 심양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세자가 일시귀국하기 바로 전 해인 인조 17년(1639) 7월 청나라로부터의 불길한 소문이 전해져 왔다. 청나라 조정이 세자를 신임해 진작에 왕으로 세우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는데 이를 접한 인조는 그날부터 혹시라도 청나라 조정이 자신을 심양으로 소환하지 않을지 걱정하며 대책을 강구했다. 그래서 나온 대책이 중병이 들어 거동이 불편해 심양으로 불러도 갈 수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세자가 한양에 오는 바람에 자신의 병이 위중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고 청나라가 정말 소환할 작정이라면 자신만 심양으로 끌려가면 되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으니 인조는 사색이 되어 좌불안석이었고 마음은 분노로 끓어올랐던 것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세자가 환영받을 리 만무한 이야기였다. 이를 계기로 인조는 소현세자를 언제라도 자신의 자리를 대신 차지할 수 있는 위험인물로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소현세자의 이런 행동은 이후로도 그칠 줄을 몰랐다. 인조 19년(1641) 12월, 소현세자의 생활비를 대주던 청나라 조정이 지급중단을 결정하고서 이후부터는 자체적으로 해결하라고 통고해왔다. 살길이 막막해진 소현세자는 결국 청나라가 제공한 토지를 경작해 모자란 생활비를 충당하기로 결심했다. 조선인 포로를 고용해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어 수확한 곡식을 가지고 심양관에서 현지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많은 이문을 남기게 되었다. 이를 둘러싸고 심양관의 안주인인 세자빈 강빈姜嬪이 적극적으로 관여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는 그대로 조선 한양궁궐에 있는 인조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사농공상의 신분질서가 엄연해 장사꾼을 멸시하던 조선시대에,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장차 조선의 국왕과 왕비가 될 세자?세자빈이 오랑캐를 상대로 돈벌이를 했다는 사실은 망신 정도가 아니라 망조가 든 이야기나 다름 없었다.
인조는 마음 같아서야 당장에 세자와 세자빈을 궁궐로 끌고 와 폐위시키고 싶었지만 청나라 조정이나 황실과 두터운 친분이 있는 세자를 일개 속국의 왕인 인조가 어찌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이미 인조의 마음속에 세자는 자식이 아니라 강력한 정적이 되어 있었다.
한편 인조 23년(1645)으로 들어서자 이제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차지하게 된 청나라 조정은 더 이상 소현세자를 붙잡아둘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판단했다. 청나라 조정은 봉림대군은 볼모로 남긴 채 소현세자만 영구 귀국하도록 허락했다.
청나라 조정과 황실은 명나라 정벌 때 획득한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와 진귀한 물품을 아낌없이 나누어주며 귀국준비를 도왔다. 또 아담 샬은 조선에 천주교 전파를 결심한 소현세자의 태도에 고무되어 서양문물과 천주교 포교관련 물품을 챙겨주고자 애썼다.
엄청난 양의 귀국선물이 들어오는 것은 보고는 마음이 들뜨게 된 소현세자는 그만 자신이 끌려온 처지라는 것을 잊은 채, 그의 귀국행렬을 금의환향으로 꾸몄다. 이제까지 늘 손을 벌려 고생을 시켰던 조선 백성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거니와 나무라는 듯이 자신을 싸늘하게 바라보는 부왕 인조에게 자기가 능력을 발휘하여 그동안 조선이 청나라에 빼앗겼던 것을 되받아오게 되었다는 성과도 과시할 겸 금의환향 행렬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인조 23년(1645) 2월, 세자의 귀국을 학수고대하던 조선 백성은 세자의 귀국행렬을 보고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심양에서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토로하는 소현세자였고, 정말 그런 줄 알고 세자의 무리한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보내주었건만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행렬은 장탄식이 절로 나오는 허탈감과 배신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심양에서 데려온 명 황실의 환관과 궁녀들은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중원의 주인이 되었음을 과시하는 전리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세자가 의도했던 것과 달리 “오랑캐 다 되었다”는 소리를 듣기에 딱 좋은 귀국행렬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던 인조 23년(1645) 4월 23일 소현세자가 병환이 들어 어의 박군이 진찰했는데 학질(말라리아)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다음 날인 4월 24일부터 인조가 친히 명을 내려, 의관으로 특채된 지 석 달밖에 되지 않은 이형익李馨益에게 침을 놓아 학질을 치료하게 했다. 침시술을 시작한 지 사흘 만인 4월 26일 소현세자가 급서했다. 학질은 모기를 매개체로 감염되는 질병으로 온대지방에서는 주로 여름에 발생하는데 아직 더위가 찾아오지 않은 음력 4월에 감염된 것도 이상한 이야기였고 일반적인 치료방법을 물리치고 침술로 치료하게 했다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례적인 일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궁궐 전례상 설령 사망률이 높은 전염병 때문에 왕이나 세자가 사망하게 되더라도 치료를 담당했던 의관은 그 죄를 물어 처벌하게 되어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인조는 이형익에게 죄를 묻기는커녕 두둔하기까지 했다. 또 세자의 장례관련 의례도 턱없이 간소화시켜 사흘 만에 장사를 지내게 했고 염을 하는 자리에 신하가 참여하는 것을 금했다. 3년간 입어야 할 자신의 상복착용 기간을 줄이고 또 줄여 7일로 했고 1년간 입어야 할 백관의 복제도 석 달로 단축시켰다.
이러던 차에 세자의 염습에 참여한 종실 친척으로부터 “온몸이 전부 검은색을 띠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와 검은 천으로 세자의 얼굴 반쪽만 덮어놓았는데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을 정도여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는 목격증언이 나오자 독살 가능성을 의심하는 소문이 돌았으나 왕실 내의 일이기도 해 얼마 지나지 않아 잠잠해졌다.
고양(高陽) 600년 역사를 살펴본다
지난 태종 13년(서기 1413년)에 이르러 고봉(高峰)과 덕양(德陽)을 합쳐 ‘고양’현 이라는 지명이 탄생했다고 기록 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이 문헌상 처음 등장한 것이 조선왕조실록 태종13년 3월 23일 2번째 기사기록이다. 이날 태종은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고양에 현감을 설치하고 원당리(현재 주교동)에 고양의 치소(治所)를 두었다.
당시 고양현의 경계는 동쪽으로 양주까지 6리, 서쪽으로 교하까지 30리, 남쪽으로 한강까지 15리, 북쪽으로 원평(지금의 파주)까지 15리로 경계를 표시하고 있다. 이전 삼국시대에는 ‘달을 성현’, ‘개백현’으로 불리다가 고려시대 때 ‘고봉’, ‘행주’로 불렸었다. 고려시대에는 고양지역이 양주의 속현으로 있었다. 1413년 이후 고양은 어느 지역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 행정지역으로 탄생해 600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고양은 1413년 이후 600년 가까이 조선시대에 어떠한 역사 문화적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알아본다. 조선시대 고양은 교통의 요충지, 군 병력의 요충지, 권문세가 묘역이 자리한 곳 등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지금의 일산동구 산황동에 있는 650년 수령의 느티나무는 무학 대사가 한양 천도 계획중 명당자리에 심은 3본 중 1본이라고 한다. 내년 600년을 맞이하는 고양이 잎이 위로 피면 풍년이 든다는 이 나무처럼 번영하기를 기대해본다.
조선시대 고양지역은 교통의 요충지로서 우선 어수선한 조선왕조 초기 수도인 한성과 고려왕조의 수도였던 개성을 연결하는 교통의 길목으로 역할을 했다. 고양시향토문화재 정동일 위원은 “태조 이성계의 왕비인 신의왕후의 묘가 개성인근에 있었는데 한양에서 개성으로 참배를 갈 때 머무르던 곳이 바로 고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당시 중국 명나라나 청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 서북 로의 첫 관문으로서 고양이 중요한 위치로 중국으로 가는 사신은 보통 한양을 떠나면 고양-개성-평산-황주-평양-의주-압록강-산해관-북경의 육로 3100리에 50일의 일정을 잡고 중국과 명나라를 오고 갔다고 한다.
이와 반대로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에도 한양에 들어오기 전 중국 사신은 반드시 벽제관(현재 고양동)에서 하루를 묵었다고 한다. 이때 임금이 사신을 맞이하는 관인을 보내 사신의 노고를 위로하고. 사신 일행의 여비는 국내 경유지 인근 고을의 부담이었기 때문에 사신의 일행이 지나는 길목에 있었던 고양현감은 부담이 컸을 것이다.
사신 일행의 핵심은 보통 정사·부사·서장관의 세 사람인데 이들은 현재 서울 서대문구에 있던 홍제원에서 관인들의 전송을 받으며 중국이 향을 향해 떠났는데, 그 첫 정착지가 고양의 벽제관이었다.
한편 군사요충지로서의 고양을 증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 북한산(현재 효자동)의 북한산성이다. 지금 남아 있는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37년(1711)에 축조된 것이다. 임진왜란 때 도성을 적에게 내어준 것과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저항하다가 치욕적인 항복을 당한 역사에서 효종은 북벌계획을 구상했고, 북한산성은 그 구상의 현실적 재현이었다. 그러나 축성 반대론도 만만치 않아 숙종 때에야 본격적 축조가 이뤄진 것이다. 북한산성은 1711년 2월 축성하기로 결정하고, 4월 3일에 착공하기에 이르렀으며, 6개월의 공사로 10월 19일에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고 수록하고 있다. 이 공사는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3군문 군사 외에 한양의 주민들도 동원되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 이전 고양지역에서 숯돌 고개(현재 서울 갈현동) 전투, 벽제관 전투가 일어난 것으로 보아도 수도 한양의 외곽수비 근거지였던 고양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는 서울을 지키기 위한 요충지 였다. 정동일 위원은 “한양 도성을 지키기 위해 배수진을 친 곳이 고양이었고, 행주대첩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고 말한다. 왜군들이 한양으로 압박해 들어왔지만 서울 인근 부대 하나를 쳐부수기 위해 왔다가 오히려 대패하고 돌아간 곳이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도록 고양이 행주대첩의 현장을 지닌 곳이라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으나, 세종 때 군사훈련장이 되었고, 연산군 때는 수렵장이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세종 이후 조선시대 왕이 친히 말을 타고 여러 신하들과 실시하는 군사 훈련 성격의 수렵대회 장소로 고양이 이용되었다고 한다. 군사훈련 때 왕을 따르는 수많은 관료와 병정들이 동원되므로, 이 일대의 벼와 곡식이 병정들에게 짖 밟히는 등 농민들의 설움이 많았다고 한다.
그후 연산군 시절에는 고양이 군사훈련보다 수렵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덕양구 대자동 산 10-2번지에 위치한 연산군 금표 비( 현재 고골마을. 碑石)에는 ‘금표 내에 들어온 사람은 (당시 벌률인)’ 기훼제서율’의해 처참한다.‘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금표 비는 1980년대 중반 성종의 증손인 금천군 이변의 자손들이 이 인근에서 묘역 정화 사업을 벌이던 중 발굴되어 이곳에 세워진 것이다.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이 금표 비는 연산군 10년인 1504년 연산군이 지금의 고양을 비롯해 파주와 양주. 광주와 시흥. 김포 등 도성외곽 경기도 일원에 세운 경계 표시로 왕과 호위병사 궁녀만 출입이 허용되었다고 한다. 그는 “백성들이 만약 금표 지역으로 들어가면 국가 물건을 훼손한 사람으로 여겨져 처참하게 처형당했다”고 말했다. 일반 백성이 이 경계 안에 들어서면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리고 조선시대 고양은 왕릉을 비롯한 권문세가의 묘역으로 더할 수 없는 좋은 위치에 있었다. 고양이 권문세가 묘역으로 선호된 이유는 당시 한양 도성에서 100리 내에 왕릉을 마련하게 되는 예에 따라 양주와 광주·김포 등과 더불어 그 대상이 되었다. “세종의 부인인 소헌왕후 심씨가 52세의 나이로 죽자 지금의 서초구 내곡동 인근에 묘를 정했는데 이곳으로 향하던 장례행렬이 한강을 건너던 중 배가 뒤집혀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한다. 이후 한강 이남보다 이북에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 많이 생기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소헌왕후 심씨와 세종의 묘는 지금의 여주 영릉에 합장묘로 위치해있다.
고양에는 일단 양주의 동구릉 다음으로 큰 왕릉 군을 형성하고 있으며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인 서오릉과 서삼릉이 존재하고 있다. 국가사적 198호인 서오릉은 덕종과 소혜왕후의 경릉, 8대 예종과 계비 인순왕후의 능인 창릉, 19대 숙종과 제1계비인 인현왕후와 제2계비인 인원왕후의 명릉,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의 능인 익릉, 21대 영조와 정성왕후의 능인 홍릉을 일컫는다. 국가사적 200호인 서삼릉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능인 희릉, 인종과 부인 인성왕후 박씨의 능인 효릉, 철종과 그의 비인 철인왕후의 무덤인 예릉을 말한다.
특히 서삼릉 경내에 위치한 소현세자, 의소세손, 문효 세자의 무덤인 3원과 46묘, 태실 54기이 모아져 있다. 원래 왕릉에는 후궁, 왕자, 공주의 묘를 쓸 수 없는데도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은 일제가 멸망한 조선왕실의 무덤을 집중 관리한다는 명목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고양에는 인조의 장자로 개혁군주의 소질을 보였으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소현세자의 묘인 소경원, 태종의 넷째아들로 역시 젊은 나이에 요절한 성녕대군 묘 등을 비롯하여 왕자·빈·후궁·왕녀들의 묘가 수십 기 흩어져 있다. 권희, 이무, 신광한, 황치신, 김주신, 김명원, 민순 등 조선시대 명신들의 묘역 수백 기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 문화재청이 관리하고 있는 조선시대 원은 13기입니다.
원 13기에는 소령원(제21대 영조 사친 숙빈최씨), 순강원(추존 원종 사친 인빈김씨), 수길원(추존 진종 사친 정빈이씨), 휘경원(제23대 순조 사친 수빈박씨), 순창원(제13대 명종 1남 순회세자와 공회빈윤씨), 소경원(제16대 인조 1남 소현세자), 영회원(제 16대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 빈 민회빈강씨), 의령원(추존 장조 1남 의소세손), 효창원(제22대 정조 1남 문효세자), 수경원(추존 장조 사친 영빈이씨), 영휘원(영왕 사친 순헌귀비엄씨), 숭인원(영왕 1남 진), 영원(영친왕과 비)이 해당됩니다.
구황실재산중영구보존재산지정의건 [제정 1962.10.25 각령 제1005호]
제2조 (단, 전, 묘, 원, 궁등) 조경단 (전라북도전주시덕진동1가) 경기전및조경묘 (전라북도전주시풍남동) 종 묘 (서울특별시종로구훈정동) 창경원 (서울특별시종로구와룡동) 창덕궁 (서울특별시종로구와룡동, 원서동) 경복궁 (서울특별시종로구세종로) 덕수궁 (서울특별시서대문구정동) 칠 궁 (서울특별시종로구궁정동)
제3조 (릉, 원, 묘) 정 릉 (서울특별시성북구정릉동) 의 릉 (서울특별시성북구석관동) 융건릉 (경기도화성군안용면안녕리) 헌인릉 (경기도광주군언주면내곡리) 선정릉 (경기도광주군언주면삼성리) 장 릉 (경기도김포군김포면풍무리) 홍유릉 (경기도양주군미금면금곡리) 광 릉 (경기도양주군진접면부평리) 태강릉 (경기도양주군노해면공덕리) 사 릉 (경기도양주군진건면사능리) 온 릉 (경기도양주군장흥면일영리) 동구릉 (경기도양주군구리면인창리) 장 릉 (경기도파주군탄현면갈현리) 공순영릉 (경기도파주군조리면봉일천리) 영녕릉 (경기도여주군능서면왕대리) 서삼릉 (경기도고양군원당면원당리) 서오릉 (경기도고양군신도면용두리) 장 릉 (강원도영월군영월면영흥리) 수경원 (서울특별시서대문구신촌동) 영휘원 (서울특별시동대문구청량리동) 순강원 (경기도양주군진접면장현리) 휘경원 (경기도양주군진접면부평리) 소녕,수길원 (경기도양주군백석면영장리) 영회원 (경기도시흥군서면노온사리) 흥원 (경기도파주군임진면운천리) 영빈묘 (경기도양주군진접면장현리) 경빈이씨묘 (경기도양주군진접면내각리) 연산군묘 (경기도양주군노해면방학리) 안빈묘 (경기도양주군진건면송능리) 광해군묘 (경기도양주군진건면송능리) 성묘 (경기도양주군진건면송능리) 대빈묘 (경기도광주군오포면문형리) 귀인묘 (경기도포천군서면선단리) 준경묘 (강원도삼척군미로면활기리) 영경묘 (강원도삼척군미로면하사전리) 숙의묘 (서울특별시서대문구홍제동) 회묘 (서울특별시동대문구회기동) 귀인김씨묘 (경기도양주군구리면인창리) 명빈묘 (경기도양주군구리면아천리)
제4조 (고적) 태조고황제비 (전라북도전주시교동) 태조고황제비 (경기도양주군진접면내각리) 북한산이궁지 (경기도고양군신도면북한리) 청랭포단종유적 (강원도영월군남면광천리)
폭풍한설보다 더 맵고 차게 죽어 간 소현세자 빈 강씨의 능, 경기 광명 슬픈 이야기
민회빈 강씨의 전설
온신 초등학교에서 동남쪽으로 1.5km쯤 떨어진 애기능으로 알려진 민회빈 강씨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이곳은 영회원이라고도 하며 소현세자의 부인인 민회빈 강씨의 슬픈 삶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조선 인조 임금 때, 북쪽 오랑캐가 우리 나라를 두 차례에 걸쳐 쳐들어 온 병자.정묘호란의 난리가 있었습니다.
이 난리에서 우리 나라가 어려운 처지에 놓이자 인조 임금은 청나라와 화해를 하고자 그들이 요구하는대로 소현세자와 세자빈인 민회빈 강씨,그리고 봉림대군 등의 왕자와 신하들을 인질로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 간 왕자와 강빈(민회빈 강씨)은 낯선 땅에서 갖은 어려움을 겪으며 생활했습니다.
길고 긴 8년의 인질생활이 이어질 때 청나라 임금은 세 왕자를 우리 나라로 돌려 보내기로 하고 위로잔치를 열었습니다. 이 잔치에서 임금은 "오랫동안 고국을 떠나 있느라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이제 왕자들을 조선으로 돌려보내기로 했으니,무엇이든 소원이 있으면 말하라. 한 가지씩의 소원은 내가 직접 들어 주리라."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갑작스런 청나라 임금의 태도에 미심쩍어 하던 소현 세자는 "폐하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돌보아 주시니 고맙기 그지 없습니다.
저는 폐하께서 아끼시는 용연 벼루를 갖고자 합니다.""좋다. 이 벼루는 내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나 그대에게 주리라.""봉림대군, 그대도 소원을 말하라." 하자 대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폐하,저는 저희와 함께 끌려 온 우리 백성들을 함께 돌려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에 청의 임금은 몹시 기분이 상했으나 자신이 한 말이 있는지라 어쩔 수 없이 허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리하여 고국을 떠난지 8년만에 조선의 왕자들은 끌려간 백성들을 이끌고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왕자들이 돌아오자,인조는 크게 기뻐하여 왕자들을 맞았습니다."내가 부족하여 너희를 지금껏 고생시켰구나.청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하며 두 아들을 위로하고 그동안의 이야기로 밤을 새웠습니다. "청의 임금은 어떠하냐?""예, 그는 매우 교활한 사람이었습니다.
저희가 돌아올 때에는 청에 반대하지 못하도록 잔치를 베풀고 소원을 들어 주겠다 하더이다. 그래서 저는 끌려간 백성을 돌려 보내 달라고 하여 같이 돌아오게 되었나이다.""아주 장한 일을 했구나.세자는 어떤 소원을 말했더냐? ""예,저는 청의 임금이 가장 아끼는 용연이라는 벼루를 받아 왔나이다.""예끼,이 못난 놈아. 겨우 벼루를 달라 했더란 말이냐.이 벼루나 받아라." 벼루에 맞은 세자는 비명을 지르며 이마를 감싸쥐었습니다.세자의 이마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세자는 이후 시름 시름 앓더니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볼모로 끌려 간 청에서의 8년 세월,돌아온 내 나라에서 하늘처럼 믿었던 세자의 죽음,강빈은 가슴을 저미는 슬픔의 세월을 살게 되었고 말 수도 점점 줄어 갔습니다.
궁궐에서는 이지경인 강빈을 시기하는 일이 생겼습니다.인조의 귀여움을 받은 조귀인이 그를 모함한 것입니다. "민회빈이 저를 죽이려고 허수아비를 만들어 저주한다 하더이다.""세자가 죽은 일로 임금님을 원망한다 하더이다."이 같은 소문이 꼬리를 잇자,인조 임금은 민희빈 강씨에게 벌을 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민회빈을 궁궐에서 내어 쫓고 서민으로 삼아라.""민회빈에 사약을 내려 죽이도록 하라.""세자의 자식을 제주도로 귀향보내 세상과 멀리하게 하라" 민회빈은 사약을 받고 지난 세월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세자와의 사랑,볼모로 끌려 간 청에서의 8년세월,그리고 자식들과의 슬픈 이별들의 생각으로 강빈은 가슴이 저며 오는 설움을 참으며 말했습니다. 살아서 효를 다하는 것도 자식의 도리 이옵고,부모가 죽으라 하면 그 뜻에 따르는 것도 효이오니 기꺼이 사약을 받겠습니다.강빈은 억울함과 슬픔을 안은 채 젊은 나이로 슬픈 삶을 마쳤습니다. 이후 숙종 임금은 강빈의 억울함을 알고 다시 세자빈으로 부르게 하고,고종 임금 때에는 묘소를 영회원 이라 높이 부르게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인평대군
인조의 셋째 아들로 이름은 요, 자 는 용함, 호는 송계이다. 1630년 인평대군에 봉해졌으며 1637년 심양 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 후 1650년부터 네 차례 에 걸쳐 사은사로 심양을 다녀왔다. 시, 서, 화에 모두 능했고 제자백 가의 사상에도 정 통하였다. 1645년 소현세자를 따라 조선에 왔다가 3 년 뒤에 본국으로 돌아간 중국인 화가 맹영광과도 친분이 두터 웠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으로는 '산수도', '노승하관도', '고백도' 등이 있 다. 이러한 미술품 이외에 '송계집', '연행록', '산행록' 등의 저서 가 남아 있다. 사후에는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경이 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대, 517년, 1392 - 1910 ]
원(園) 13기(基)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호)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王)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기(基) 익종(翼宗) 一 수릉(綏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一 융릉(隆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一 영릉(永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一 장릉(章陵 : 사적 제202호)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一 경릉(敬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墓) 2기(基) 제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一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호)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제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一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호)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기(基) 제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一 유릉(裕陵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제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一 홍릉(洪陵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시
왕릉 35기 제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一 예릉(睿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一 경릉(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제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一 인릉(仁陵 : 사적 제194호)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제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一 건릉(健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二 홍릉(弘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一 원릉(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二 혜릉(惠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一 의릉(懿陵 : 사적 제204호)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三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二 익릉(翼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一 명릉(明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제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一 숭릉(崇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一 영릉(寧陵 : 사적 제195호)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二 휘릉(徽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一 장릉(長陵 : 사적 제203호)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二 성묘(成墓 : 사적 제365호)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一 목릉(穆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一 강릉(康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一 효릉(孝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三 희릉(禧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二 온릉(溫陵 : 사적 제210호)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一 정릉(靖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三 회묘(懷墓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二 순릉(順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一 선릉(宣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路)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二 공릉(恭陵 : 사적 제205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一 창릉(昌陵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7대 세조(第七代 世祖) 一 광릉(光陵 : 사적 제197호)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二 사릉(思陵 : 사적 제209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一 장릉(莊陵 : 사적 제196호)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제5대 문종(第五代 文宗) 一 현릉(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4대 세종(第四代 世宗) 제3대 태종(第三代 太宗) 제2대 정종(第二代 定宗)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三 정릉(貞陵 : 사적 제208호) : 서울 성북구 정릉2동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二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一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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