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능 (陵) - 4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1) 제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왕릉은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42기 (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기,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園)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墓)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기(능40, 원14, 묘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능3, 원4, 묘5)입니다
사후에 왕(王)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기(基)
폐위(廢位)된 묘(墓) 2기(基)
황제릉(皇帝陵) 2기(基)
왕릉 35기
1. 추존이라는 미명으로, 역사세우기
추존(追尊)왕 ‘함길도 8릉’
2. 왕조, 문을 열다
제1대 태조 (太祖, 1335-1408)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 貞陵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제2대 정종 (定宗, 1357-1419) _ 후릉 厚陵
제3대 태종 (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제4대 세종 (世宗, 1397-1450) _ 영릉 英陵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제5대 문종 (文宗, 1414-1452) _ 현릉 顯陵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제6대 단종 (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제7대 세조 (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추존(追尊)왕 덕종 (德宗, 1438-1457) _ 경릉 敬陵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제8대 예종 (睿宗, 1450-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제9대 성종 (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 懷墓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3. 왕조, 산을 넘다
제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제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 泰陵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제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 孝陵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제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순창원 順昌園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제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순강원 順康園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제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제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 長陵, 휘릉 徽陵, 소경원 昭慶園, 영회원 永懷園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제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제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제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제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제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 綏吉園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 懿寧園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제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 孝昌園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제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제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제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제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제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제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1) 제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악행과 치적이 교차하니 당쟁에 희생되어 폐주되다
광해군묘 光海君墓
광해군(光海君, 이혼, 1575~1641), 문성군부인 유씨(文城郡夫人 柳氏, 1576-1623),
1641년, 경기 남양주 363호
조선조의 두 번째 폐위(廢位) 임금 광해군(이혼 ; 1575-1641, 재위14년)과 문성군부인 유씨(文城郡夫人 柳氏 ; ?-1623)의 광해군묘는 연산군묘(燕山君墓)와 동일하게 군묘(君墓)의 형식으로 간촐하게 조성되어 있는데, 근방에 단종(端宗)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사릉(思陵)이 있고 일반인은 찾아보기도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두 봉분(封墳)에 각각 비석(碑石)이 있고 망주석(望柱石)과 장명등(長明燈), 그리고 문인석(文人石)만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조선 제15대 임금인 광해군(光海君 : 1575~1641)과 문성군부인 유씨(文城郡夫人柳氏)의 묘역이다.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로 후궁 공빈 김씨의 소생이며, 이름은 혼(琿)이다. 의인왕후 박씨가 소생이 없자, 선조는 적자가 없어 세자책봉을 미루고 있었으나 춘추 40세를 넘기며 마냥 미룰 수 없고, 임진왜란으로 피신하면서 평양성에 머무를 때 분조(分朝:비상사태로 임시로 조정을 분리하는 일)해야할 상황에 이르러 대신들의 주청을 받아들여 1592년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본래는 맏아들인 임해군이 세자가 되어야 했지만 성질이 난폭해 군왕의 기질이 없다 하여 둘째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후에 인목왕후가 계비가 되고,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는 광해군을 폐하고 적자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지병이 악화돼 서거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했다.
광해군은 1608년 2월 재위를 향한 우여곡절과 긴 여정 끝에 34세에 왕위에 올랐다. 재위 중에는 임진왜란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회복하는데 힘썼고 또 동북아의 국제정세가 급변하는 과정에서 표면적으로는 명나라와 협력하는 체하면서 세력이 큰 후금에게는 명의 강요 때문에 출병했다며 그들과 우호를 다지겠다는 양면계책을 쓰는 등거리 실리외교를 펼쳐 나라를 지켰다. 한편 후금의 침략에 대비해 대포를 주조하고 국방을 강화하는 등 실리적 정치관을 펼쳤다.
왕권강화와 민생안정책을 펴 당쟁 종식과 정치적 안정에 노력하여 1608년 선혜청을 설치하고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였으며 1611년에 양전을 실시하여 국가의 재원 확보하고 전화로 손실된 경희궁,인경궁 등을 중건하였고, 서적간행에 박차를 가하는 등 문화면에서도 훌륭한 치적을 많이 남겼다. 이 때 전화로 손실된『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을 다시 간행하고, 『국조보감』을 재편찬하여 정사운영의 방향을 확립했고,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네 곳의 사고(史庫)를 대신해 적산산성에 사고를 설치했다.
한편 이 시대에는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이 나와 문학과 의학부분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뤘다. 그러나 광해군의 실리적이고 과단성 있는 정책은 인정반정으로 중단되었다. 왕권강화를 위한 과정에서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역모로 몰아 죽이는 등 많은 인명을 살상하였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는 등 패륜행위를 일삼았다는 반정의 명분을 제공, 이귀,김자점,김류,이괄 등 서인 세력들에 의한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선조(宣祖)는 왕비 의인왕후(懿仁王后)에게 후사(後嗣)가 없어 후궁이었던 공빈김씨(恭嬪金氏)의 소생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생산해 권력의 암투가 벌어지는 단초(端初)가 되었습니다. 결국 선조는 승하 직전 당시 적자(嫡子) 영창대군이 2살밖에 안되어 왕위를 광해군에게 물려주게 됩니다. 이것이 뒤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싹이 되었던 것입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전후 복구 사업에 전념했던 광해군은 창덕궁(昌德宮) 등 궁궐을 중수(重修)하고 대동법(大同法)도 실시했으며, 특히 그의 북방외교 정책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안으로는 형이었던 임해군(臨海君)과 이복(異腹) 영창대군을 유배 후 살해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 등의 실정으로 반정(反正)의 싹을 키우고 말았습니다. 특히 영창대군을 교동에서 살해할 때, 방안에 가두고 불을 때어 질식해 죽게 함에 이르러서는 실정이 이미 정도를 넘어선 뒤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23년 광해군의 폐위를 논의하고 칼을 씻었다는 세검(洗劍)의 유래를 낳기도 했던 능양군(綾陽君 ; 仁祖)을 포함한 반정군(反正軍)은 광해군을 강화로 유배시키고 인목대비로부터 능양군을 왕위에 오르게 함으로써 반정을 성공하게 됩니다.
조선조의 두 번째 폐위(廢位) 임금 광해군(1575-1641, 재위14년)과 문성군부인 유씨(文城郡夫人 柳氏 ; ?-1623)의 광해군묘는 연산군묘(燕山君墓)와 동일하게 군묘(君墓)의 형식으로 간촐하게 조성되어 있으며, 근방에 단종(端宗)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사릉(思陵)이 있으나 찾아가는 길에 표지판이 없어 일반인은 찾아가기가 어렵게 되어 있으며, 다른 왕릉을 찾아가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사릉을 조금 지나면 조그만 개울 위를 지나는 다리가 하나 나오는데 그 다리 옆에서야 안내판이 하나 붙어있다. 그 중에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영락동산 영락교회 공원묘지이다. 그 방향으로 계속 올라가다 보면 돌문처럼 생긴 곳에 영락동산 안내문이 또 보인다. 그곳으로 들어가서 산길을 좀 더 올라가면 교회묘지 못가서 산중턱쯤에 있는 것이 광해군과 부인 유씨의 묘역이다.
광해군묘는 군묘 형식에 따라 간소하게 만들어졌다. 3면의 곡장 안에 광해군과 부인 유씨의 봉분이 나란히 있고 그 앞에 상석이 각각 놓여 있다. 석수는 없고 비석 두 개와 사각장명등 양 옆으로 망주석과 문인석이 한쌍씩 설치되어 있을 뿐이다.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 김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1575년(선조 8)에 태어났다. 공빈 김씨 소생의 맏아들 임해군이 있었으나 성질이 난폭하하다고 보류하고 ,그의 아우인 광해군을 임진왜란때 피난지에서 세자로 책봉했다. 1592년(선조 25) 4월 30일의 일이다.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은 임진왜란, 정유왜란 중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1594년 명나라에 세자 책봉을 주청했으나 장자인 임해군이 있음을 이유로 거절당하고, 1606년(선조 39)에는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김씨가 영창대군을 출산함으로서 선조 유일의 적통인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으려는 소북파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가 나뉘어지는 등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는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그러나 병이 위독해진 선조는 이제 두 살밖에 안된 영창대군 대신 광해군에게 왕위를 이어받게 하라는 교서를 내렸다. 이 교서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의 손에 들어가 소실될뻔 했으나 결국 발각되어 선조의 승하 바로 다음날인 1608년 2월 2일 광해군은 34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전란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과단성 있는 정책을 폈다. 서적을 편찬 간행하여 임진 왜란 후의 사고(史庫)를 정비하고 성지와 병기를 수리, 호패(號牌)를 실시하는 등 내치에 힘썼고, 밖으로는 국경방비와 외교에 힘썼다.
그 무렵 만주에서는 여진족의 세력이 커져서 후금을 건국하고 명나라와 전쟁을 시작했다. 임진왜란때 우리나라를 도운 바 있는 명나라는 원병을 요청했다. 명나라를 돕자니 후금의 힘이 너무 강해 어떻게 보복을 당할지 모르겠고 외면하자니 신의의 문제가 걸렸다. 명나라와는 오랫동안 군신의 예로 지내왔던 관계였으므로 당연히 원병을 보내야 할 입장이었다. 그러나 진퇴양란의 어려움 속에서 광해군은 기막힌 양면 외교정책을 실시했다. 도원수 강홍립.김경서 등과 함께 군사 1만명을 명나라로 보내 연합하게 하고 일부러 싸워 패한뒤 후금에 투항케 하여 후금의 침략을 모면케 하는 등, 명과 금 양나라에 미움을 사지 않는 양단정책으로 난처한 외교를 잘 처리하였다.
광해군은 소실된 서적의 간행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등을 다시 간행했고 <국조보감>, <선조실록>을 편찬했으며,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도 광해군 당시에 나온 책이며, 적상산성에 사고를 창건하고, 창덕궁을 중수(重修)하였으며, 인경궁. 자수궁. 경희궁 등을 세웠다.
이렇게 나름대로 전후 복구사업에 온 힘을 기울였으나, 즉위 무렵 대북파의 흉계에 빠져 형이었던 임해군(臨海君)과 이복(異腹)동생 영창대군을 유배후 살해하고, 5년 뒤에는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 등의 실정으로 반정(反正)의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또한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초당적인 정국을 운영하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광해군 재위 15년 내내 정권을 독점한 대북파(大北派)에 대한 서인들의 불만도 간과 할 수 없는 반정의 원인이다 . 마침내 이귀. 김유. 최명길. 김자점 등에 의해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인정전 후, 경원궁에 억류됐다가 광해군으로 강등되고 강화로 유배되었다. 그후 다시 제주도로 옮겨져 1641년(인조 19) 7월 1일 67세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광해군은 제주까지 유배지가 옮겨졌지만 그곳에서 67세의 천수(天壽)를 다했다. 그것은 아마도 반정세력이 광해군을 살해할 명분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부인 유씨(柳氏)도 역시 강화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목숨을 다하고 현재의 위치에 안장되었다.
광해군은 인조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오랫동안 패륜아로 혹은 폭군으로 기록되었으나, 그의 탁월한 외교능력과 정치 등 그의 업적이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묻혀 정치적 희생양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는 폐위된 후 강화를 거쳐 제주도에서 18년간의 유배생활을 하다가 1641년(인조 19) 춘추 67세로 서거(逝去)하였는데 초연한 자세로 유배생활을 보냈다고 전해지고 있다.묘역이 이 곳 송능리에 안치되 것은 광해군이 죽기 전에 “자신을 어머니 묘 발치에 묻어달라”고 유명하여 조정에서 공빈김씨가 묻힌 성묘 아래쪽 오른편 능선에 장사지냈다. 부인 류씨는 인조반정으로 폐출되어 1623년(인조 1) 유배지인 강화에서 서거하였다.묘역은 곡장 안으로 문성군부인 류씨와 쌍분으로 남향하고 있는데 왼쪽이 광해군, 오른쪽이 부인의 묘이다. 폐위되어 군의 장례(葬禮)에 준하였기 때문에 간소하게 조성되었다.
광해군묘는 조선 15대 임금이자 두 번째 폐위 임금인 광해군과 그의 부인 문성군부인의 묘이다. 쌍분인데, 오른쪽이 문성군부인 유씨의 묘이다. 연산군묘와 동일하게 군묘(君墓)의 형식으로 간소하게 조성되어 있으며, 두 봉분에 각각 비석과 상석이 있고. 장명등 그리고 망주석과 문석인 1쌍이 설치되어 있다.
제주도로 유배지가 옮겨진 광해군은 그곳에서 67세의 천수를 다하고 1641년(인조 19) 어머니 무덤 발치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 때문에 1643년(인조 21) 제주도에서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에 위치한 지금의 묘소로 옮겨졌으며 건너다보이는 곳에 어머니의 묘소인 성묘가 자리한다.
광해군(光海君)은 선조(宣祖)와 공빈김씨(恭嬪金氏, 1553∼1577) 사이에서 1575년에 태어나 판윤 유자신(柳自新)의 딸과 결혼을 하였다. 정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가 아들이 없었으므로 조정에서는 공빈의 장남인 임해군(臨海君, 1574∼1609)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성격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선조 또한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장남인 신성군(信城君, 1578∼1592)을 총애하여 세자 책봉이 지연되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피난을 떠난 선조는 평양에서 서둘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의인왕후의 승하로 왕비가 된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가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을 낳자 왕위계승을 둘러싼 붕당간의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광해군은 적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적자인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을 것을 주장하는 소북파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가 크게 대립하였다. 그런 가운데 병이 위독해진 선조가 어쩔 수 없이 광해군에게 선위하는 교서를 내렸으나, 소북파인 영의정 유영경이 교서를 감추었다가 대북의 정인홍 등에게 발각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어 1608년 2월 2일에 즉위한 광해군은 왕권강화를 위해 천성이 난폭하여 백성들에게 패악을 끼치면서 끊임없이 왕권을 노리는 임해군을 진도로 유배시켜 사사하고, 인목왕후의 부친 김제남(金悌男, 1562∼1613)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한다는 이유로 처형한 후 부관참시까지 하였다. 1614년에는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하였다가 사사하였고, 능양군(綾陽君, 인조)의 동생 능창군을 폐서인하여 유배지에서 목을 매어 자결하게 하였다. 1618년에는 인목왕후를 폐위하여 경운궁에 유폐시키는 일을 저지른 일이 인조반정의 결정적인 명분을 제공하게 된다. 1623년(광해군 15) 3월 13일 이서, 이귀, 김유 등 서인일파가 주동이 되어 광해군을 폐위하고,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능양군이 직접 이끈 병사들이 창덕궁을 쉽게 점령하였다. 인목왕후는 광해군이 “일국의 국모를 지낸 자신을 유폐하고, 가족은 처형하였으며, 형제를 죽이고, 무고한 백성들을 죽였고, 민가 수천 호를 철거시켜 궁궐을 창건하는 토목공사를 일으켜 부역이 많고, 수탈이 극심하여 백성들을 어렵게 만드니 국가의 위태로움이 이루 말할 수 없다.”는 등의 죄상 36개 항목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왕조실록이 전주사고 본만 남고 전소되자 선조의 지시로 다시 인쇄하여 춘추관, 마니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에 보관토록 하였는데, 광해군은 후금(淸)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묘향산 사고에 보관중인 실록을 적상산성 내에 실록전을 건립한 후 옮겨 보관하도록 하였으며, 전쟁으로 없어진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 여러 서적을 다시 간행하였고,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게 하는 공물제도가 부담이 불공평하고 수송과 저장에 불편이 많아 쌀로 납세를 하게하는 대동법을 제정하였다. 또한 호패법과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재원확보에 노력했으며, 선조 말에 시작한 창덕궁 재건공사를 1608년에 끝내고, 경덕궁, 인덕궁, 자수궁을 중건하여 전쟁으로 파괴된 도읍지를 복구하였다. 외교 면에서도 만주에서 크게 성장한 후금의 존재를 인정하는 중립외교정책을 편 점 등은 현대에 와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부분이다.
왕위에서 쫓겨난 광해군과 세자 부부는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문성군부인 유씨가 그 해 10월 8일 화병으로 승하하자 양주 적성동(현, 남양주 진건읍 송릉리)에 같은 해 윤10월 29일에 장사(亥坐巳向)를 지냈다. 한편 제주도로 유배지를 옮긴 광해군은 1641년(인조 19) 7월 1일 67세를 일기로 승하하자 제주도에 안장하였다가, 1643년 10월 4일 생모 공빈김씨의 무덤이 바라다 보이는 문성군부인 오른쪽으로 이장(亥坐巳向)을 하였다. 광해군 무덤역시 연산군과 마찬가지로 왕을 지냈지만 폐위되었기 때문에 왕자군의 예로 장사를 지내 능호가 아닌 묘호를 사용하여 광해군묘라 하고, 석물도 일반 서민의 무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설치되어 있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곡절 많은 삶을 산 불운한 왕
폐주 광해군 (光海君, 1575 ~ 1641)
광해군은 1575년(선조 8) 선조와 공빈 김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곧 세자로 책봉되었다. 1608년 즉위한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국토와 문화재 복구사업에 전념했다. 창덕궁 등 궁궐을 중수하고, 대동법을 실시했으며, 특히 당시의 국제정세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북방외교정책은 광해군 최고의 치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광해군은 형이었던 임해군과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유배 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는 등의 실정으로 반정의 싹을 키웠다. 특히 영창대군을 방안에 가둔 채 불을 때어 질식사시킨 일은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에 충분했다.
1623년 능양군(인조)을 포함한 반정군은 광해군을 폐위하여 강화로 유배시키고, 인목대비의 윤허를 받아 왕위에 올라 반정을 성공시켰다. 제주도로 유배지가 옮겨진 광해군은 그곳에서 67세의 천수를 다하고 1641년(인조 19) 세상을 떠났다.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려 애쓴 광해군
국경 밖 적지의 지도는 어떻게 그려졌나?
어사 발령을 거부한 박정길
시계가 없는 백성
50세가 되어야 벼슬길에 나갈 수 있다
한지 군복 만들기 운동
황금기와와 청기와의 재료로 사용된 염초(화약)
신종 전염병 대책과 허준의 의학서 발간
안질로 폐위되다
역사는 준엄한가, 너그러운가, 애석한가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609 | 1년 | 4월, 임해군(臨海君) 살해됨 | 1617 | 9년 | 8월, {선조실록(宣祖實錄)} 간행 |
8월, 창덕궁(昌德宮) 중수(重修) | 1618 | 10년 | 1월, 대비 호 깍아 서궁(西宮)이라 칭함 |
1610 | 2년 | 4월, 중궁 유씨(中宮柳氏) 왕비로 책봉 | 8월, 허균 등을 참형(斬刑) |
8월, 허준 <동의보감(東醫寶鑑)> 찬진 | 1619 | 11년 | 3월, 도원수 강홍립 금나라 군대에 항복 |
1614 | 6년 | 2월, 강화부사 영창대군(永昌大君) 죽임 | 1620 | 12년 | 7월, 금나라 10여명을 제외한 포로 석방 |
1615 | 7년 | 11월, 능창군 교동 안치(安置)후 죽임 | 1622 | 14년 | 1월, 승군(僧軍)을 모집케 함 |
1616 | 8년 | 12월, 일본에서 담배{南靈草) 들여옴 | 1623 | 인조 |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 일어남 |
세자책봉의 음모와 정철 의 퇴출
광해군의 험난한 등극
왕권안정에서의 피바람
인조반정의 명분 제공
1611년에 는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이 이언적, 이황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자 성 균과 유생들이 유생들의 이름이 올 려져 있는 청금록에서 정인홍의 이 름을 삭제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광해군은 이 사태에 직면하자 강경 한 입장을 보이며 유생들을 모두 성균관에서 쫓아내는 조처를 취한 다. 이 때문에 그는 등극 초기부터 유생들과 등을 지고 만 다. 그리 고 이듬 해 1612년 이른바 '김직재의 옥'으로 소북파 인사 1백여 명 이 숙청당하는 대옥사가 발생한다. 이 옥사는 김경립이 군역을 회피하 기 위해 어보, 관인을 위조한 서건에서 시작되었는데 모진 고문과정 속에 사건이 겉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결국 역모사건으로 결론이 나 고 말았다. 1613년에는 다시 '칠서의 옥'이 발생하여 인목대비의 아버 지 김제남이 사사되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전락시켜 강화에 위리안치 (집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조치)했다가 증 살(방 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그 열기로 죽게 하는 것)시키는 한 편, 선조의 유명을 받든 일곱 신하들을 삭직시킨다.
이 후 1615년 능창군 추대사건이 발생해 능창군(인조의 아우)는 물론 이에 연루된 신경희 등이 제거된다. 능창군 은 정원군의 셋째 아들로 일찍 이 임진왜란 중에 죽은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한 인물이었다. 그는 어 릴 때부터 총명 하고 기상이 비범하여 광해군과 대북 세력의 경계를 받아왔다. 당시 죄수 소명국이란 자가 무고하기를 그가 신경 희의 추 대를 받아 왕이 되고자 한다고 함에 따라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되 고 이후 살해당할 위험에 처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으로 신경희는 사형당하고 양시우, 김정익, 소문진, 김이강, 오충갑 등은 유배되었다. 그래 서 이 사건을 '신경희의 옥사'라고도 한다. 1617년 에 이르러서는 폐모론이 대두하여 이항복, 기자헌, 정홍익 등의 폐모 반대론자들을 유배시키고 이듬해인 16 18년에 인목대비의 존칭을 폐하 고 서궁에 유폐시킨다. 이로써 광해군과 대북파는 왕권을 위협하던 모 든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많은 인명 을 희생시키고 패륜 행위를 일삼음으로써 오히려 반정의 명분을 제공 하고 말았다.
민생안정
능양군의 반정
폐위 그 이후
광해군 폐위 후 광해군과 폐비 유씨, 폐세자 질과 폐세자빈 박씨 등 네 사람 은 강화도에 위리안치 되었다. 이들을 강화도에 유폐시킨 것은 그곳 이 감시하기에 용이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정 세력은 이들 네 사람을 한 곳 에 두지 않았다. 광해군과 유씨는 강화부의 동문 쪽 에, 폐세자와 세자빈은 서문 쪽에 각각 안치시켰다. 이들이 안치되어 울타리 안에 갇혀 살기 시작한 지 두 달쯤 후에 폐세자와 세자빈은 자 살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기이하다. 당시 20대 중반이던 이들 부부는 아마 강화도 바깥 쪽과 내통을 하려고 한 것 같다. 세자 질은 어느 날 담 밑에 구멍을 뚫어 밖으로 빠져나가려다 잡히게 되는데 그의 손 에는 은덩어리와 쌀밥, 그리고 황해도감사에게 보내는 편 지가 있었 다. 짐작컨대 그는 은덩어리를 뇌물로 사용해 강화도를 빠져나가려 했 던 것 같다. 그리고 황해도감사에게 모종의 내용을 담은 편지를 전달 하려 했을 것이다. 세자 질이 황해감사에게 전달하려 했던 편지의 내 용이 무엇인지 는 알 수 없지만 추론컨대 자신을 옹호하고 있던 평양 감사와 모의를 하여 반정 세력을 다시 축출하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이 때문 에 인목대비와 반정 세력은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고 이 사실을 전해들 은 세자 질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세자빈 박씨도 이 사건으 로 죽었다. 박씨는 세자가 울타리를 빠져나갈 때 나무 위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세자가 빠져나가는 것을 돕기 위해 망을 보고 있었던 것 으로 사료된다. 하지만 세자가 탈출에 실패하여 다시 안으로 붙들 려 오는 것을 목도한 그녀는 놀라서 그만 나무에서 떨어졌고, 이후 스스 로 목숨을 끊었다. 이렇게 해서 장성한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광해군 은 1년 반쯤 뒤에 아내 유씨와도 사별하게 된다. 폐비 유씨는 한 때 광해군의 중립 정책을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고 하면서 대명 사대 정 책을 주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광해군이 폐 위되자 궁궐 후원에 이틀 동안이나 숨어 있으면서 인조반정이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몇 몇 인사들의 부귀영 화를 위한 것이라고 비판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그녀는 나름대로 성리학적 사상에 기반한 가치관이 뚜렷했던 여자였 다. 그러나 유배 생활이 시작되면서 그녀는 화병을 얻고 말았다. 도저 히 자신이 당한 현실이 믿기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리하여 유배 생활 약 1년 7개월 만인 1624년 10월에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아내마저 죽자 광해군의 가족은 박씨 일가로 시집간 옹주 한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 만 광해군은 초연한 자세로 유 배 생활에 적응해서 그 이후로도 18년을 넘게 생을 이어간다. 이 과정 에서 그는 몇 번에 걸쳐 죽을 고비를 넘긴다. 광해군으로 인해 아들 을 잃고 서궁에 유폐된 바 있던 인목대비는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 어 있었고, 인조 세력 역시 왕권에 위협을 느긴 나머지 몇 번이나 그 를 죽이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반정 이후 다시 영의정에 제수된 남 인 이원익의 반대와 내심 광해군을 따르던 관리들에 의해 살해의 기도 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는 광 해군의 재등극이 염려스러워 그를 배에 실어 태안으로 이배시켰다가 난이 평정되자 다시 강화도로 데려왔다. 1636년에는 청나라가 쳐들어 와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고 공언하자 조정에서는 또다시 그를 교동 에 안치시켰으며, 이 때 서인 계열의 신경진 등이 경기수사에게 그를 죽이라는 암시를 내리지만 경기수사는 이 말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보 호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 조선이 완전히 청에 굴복한 뒤 그의 복 위에 위협을 느낀 인조 는 그를 제주도로 보내버렸다. 광해군은 제주 땅에서도 초연한 자세 로 자신의 삶을 이어갔다.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 하고 자 기는 아랫방에 거처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의연한 태 도를 보였다. 심부름하는 나인이 '영감'이라고 호칭 하며 멸시해도 전 혀 이에 대해 분개하지 않고 말 한마디 없이 굴욕을 참고 지냈다. 이 렇듯 초연하고 관조적인 그의 태도가 생명을 오래도록 지탱시켰는지 도 모른다. 또 그 긴 세월 동안 그는 다시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 는 일념으로 묵묵하게 희망을 안고 기다렸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애석 하게도 그는 1641 년 귀양생활 18년 수 개월 만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 다. 그의 나이 67세였다.
광해군과 대북파의 정적제 거
대북파 가 영창대군 지지파인 소북파를 몰아내기 위해 꾸민 첫번째 사건은 1612년 일어난 '김직재의 옥'이었다. 이 사건은 황해도 봉산군수 신률 이 병역 회피를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한 김경립을 체포하면서 시작 된다. 신률은 그 를 체포한 후 유팽석을 고문하여 김경립이 모반을 획 책하기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했다는 내용의 자백을 받아내 고 다 시 김경립을 문책하여 거대한 역모 사건 계획을 자백 받기에 이른다. 김경립이 자백한 내용을 요약하면 8도에 각각 대장, 별장 등을 정하 여 불시에 한양을 함락시키고 대북 세력 및 광 해군을 축출한다는 것 이었다. 게다가 김경립의 아우 김익진의 입을 통해 팔도도대장으로 내 정된 사람이 김백함이라 는 자백이 나오자 사건은 급속도로 확대되었 다. 김백함이 팔도도대장으로 내정되었다는 진술을 받아낸 대북파는 김직재와 김백함 부자는 물론 김직재의 사위 황보 신 및 그 일족을 모 두 체포하여 모진 고문을 가한다. 이 고문 과정에서 김백함은 아버지 김직재의 실직에 불만을 품고 모의를 했다는 자백을 강요받았으며 고 문을 이기지 못해 결국 모든 내용을 시인하게 된다.
또한 김 직재는 자신이 역모의 주동자이며 연흥부원군 이호민, 전 감사 윤안 성, 전 좌랑 송상인, 전 군수 정호선, 전정언 정호서 등 일군의 소북 파 인사들과 모의하여 특정한 날을 잡아 도성을 무너뜨리려고 했다고 허위자백하기 까지에 이른다. 이 사건은 소북파의 거두이자 선조의 유 명을 받든 일곱 신하 중 하나였던 박동량의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옥사 로 이어졌고 그들 역모 세력이 추대하려던 왕이 선조의 아들 순 화군의 양자인 진릉군 이태경이라고 함에 따라 그도 처형되었으며, 그 들과 관련이 있는 대부분의 인사는 모두 숙청되었다. 이 옥사로 김직 재, 김백함 부자가 처형당하 고 김제, 유열 등 1백여 명의 소북파 인 사들이 대거 숙청당했다.
칠서의 옥과 계축옥사
1613년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수백 냥을 약탈한 강도 사건이 발생했 다. 이 때 그 범인 일당은 영의정을 지 낸 박순의 서자 박응서, 심전 의 서자 심우영, 목사를 지낸 서익의 서자 서양갑, 평난공신 박충갑 의 서자 박치의, 박유량의 서자 박치인, 북병사를 지낸 이제신의 서 자 이경준, 서얼 허홍인 등 권력가들의 서자 일곱 명이었다. 이들은 허균, 이사호, 김장생의 이복동생 김경손 등과 사귀면서 스스로를 죽 림칠현 또는 강변칠우라고 칭하는 무 리였다. 이들은 광해군이 왕위 에 오르자 서얼의 차별을 없애달라는 상소를 한 바 있는데 이것이 거 부당하자 불만을 품고 1613년 초부터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에서 당을 조직한다. 이들은 윤리가 필요 없는 집이라는 뜻의 '무륜당'을 짓고 그곳을 근거지로 소금장수, 나무꾼 등으로 행세하며 전국에 출몰하여 화적질을 일삼다가 새재에서 상인들을 죽이고 돈을 약탈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 때 피살된 상인의 노비가 이들의 뒤를 미행하여 근 거지를 알아내고 포도청에 고발함으로써 이들은 일망 타진되었다.
하지만 이 '칠서의 옥'은 단순한 강도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이첨 등 대 북파의 중심 세력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창대군을 몰아낼 계획을 세 우게 된다. 이이첨과 그의 심복 김개, 김창우 등은 포도대장 한희길, 정항 등과 모의하여 이들 서얼 출신 화적들이 자금을 모아 영창대군 을 추대하려 했다는 자백을 얻어낸다. 이러한 자백은 칠서 중에 하나 인 박응서가 광해군에게 비밀 상소를 올리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박응 서는 이 상소문에서 자신들을 1608년에 명나라 사신을 저격한 바 있으 며 이를 통해 사회 혼란을 야기시키고 한편으로는 군자금을 비축하고 무사를 모아 사직을 도모하려 하였고, 성사된 뒤에는 영창대군을 옹립 하고 인목대비 로 하여금 수렴청정을 이루려 하였다고 했다. 이 상소 문의 파장은 대단했다. 박응서의 상소 이후 대북 세력은 서양갑을 국 문한 끝에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 이 자신들의 우두머리이며 인목 대비 또한 영창대군이 장성하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모의에 가담하기로 했 다는 자백을 얻어내게 된다.
이 사건 으로 종성판관 정협을 비롯하여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안 위를 부 탁받은 신흠, 박동량 등의 일곱 대신 및 이정구, 김상용, 황 신 등의 서인 세력 수십 명을 하옥시켰다. 또한 이 사건의 취조 과정 에서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양자로 삼았던 의인왕후의 능에 무당을 보내어 저주 했던 일이 발각되기도 했다. 그래서 김제남은 사 사되고 그의 세 아들도 화를 당하였으며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 안 치되었다가 이듬해 강화부사 강항에게 살해되었다. 이 사건으로 영의 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을 비롯한 서인, 남인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 고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계축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흔 히 '계축옥사'라고 한다.
대북파의 능창군 제거작업
신경희 는 당시 수안군수로 재직 중이었는데 1615년 그가 양시우, 소문진, 김 정익 등과 함께 모반을 획책하고 있다 는 소명국의 말에 따라 이들에 게 역모 혐의가 씌워진다. 그리고 이 때 이들이 추대하려고 한 사람 이 바로 능창군이 라는 자백을 얻어내고 능창군을 유배시켜 죽여버린 다. 이 때 죽은 능창군은 후에 반정을 통해 왕이 된 능양군(인조) 의 동생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능양군이 반정을 도모하게 되는 직접적 인 원인이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북파는 정권을 독점하게 되자 1618년, 5년 전의 계축옥사를 다시 거론하며 이를 빌미로 인목대비를 폐위시켜 서 궁에 유폐시킨다. 이 과정에서 이이첨 등의 강경론자들 은 인목대비를 사사시킬 것을 간언하지만 광해군의 반대로 실현에 옮 기지 못한다. 이 후 이이첨은 몇 번에 걸쳐 인목대비 암살 계획을 세 우기도 하지만 다른 대신들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이렇게 해서 광해군은 왕권을 위협하던 세력들을 거의 모두 제거했고 대북파 의 이이첨, 정인홍 등은 세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홍길동전'의 대강
이 소설 의 시대적 배경은 세종 때로 주인공 홍길동은 홍 판서의 서자로 등장 하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상이 뛰어나고 무술이 남달랐으나 신분 이 미천하여 한을 품게 된다. 이에 홍판서 가족들은 길동의 비범한 재 주가 장래에 화를 불러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객을 시켜 그를 죽이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길동은 길을 떠나 도적 두목이 되 고 활빈당을 조직하여 의적 생활을 하게 된다. 홍길동의 의적 행위에 대한 소문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전 국 각처에서 같은 이름의 도적들 이 나타나 어명으로 잡아들인 홍길동만 해도 3백 명에 달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길동을 체포하지 못한 조정은 홍판서를 시켜 그를 회유하 기에 이르고 타협안으로 그를 병조판서를 제수하게 된다. 길동은 한 때 병조판서를 지내다가 다시 남경으로 떠날 것을 결심하고 고국을 떠 나게 되는데, 남경으로 가는 도상 에서 산수가 수려한 율도국을 발견 하고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요괴를 퇴치한 후 율도국 왕이 된다. 이 후 아버지의 부음을 전해듣고 일시 귀국하여 3년상을 마친 후 다시 율 도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왕으로 살게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폐비 문성군부인 유씨 (文城郡夫人 柳氏, 1576-1623)
판윤 유자신의 딸로 태어나 선조 때에 광해군의 부인으로 간택되어 길례를 올렸다. 그 뒤 광해군이 세자에 책봉되자 왕세자빈이 되었으며 그 후 광해군이 34세로 즉위하자 왕비로 진봉되었다.
1623년 3월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켜 왕으로 즉위하면서(인조반정) 유씨도 남편 광해군과 함께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그 해 6월 아들 질과 며느리 박씨가 탈출기도 실패 후 자결하는 사건이 있었으며, 결국 같은 해 10월 8일 폐위된 지 7개월여 만에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경기도 양주 적성에 장사지냈으며, 폐비인 까닭에 능은 조성되지 않았다. 부인 유씨(柳氏)도 역시 강화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목숨을 다하고 현재의 위치에 안장되었습니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대, 517년, 1392 - 1910 ]
원(園) 13기(基)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호)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王)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기(基)
익종(翼宗) 一 수릉(綏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一 융릉(隆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一 영릉(永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一 장릉(章陵 : 사적 제202호)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一 경릉(敬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墓) 2기(基)
제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一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호)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제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一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호)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기(基)
제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一 유릉(裕陵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제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一 홍릉(洪陵 : 사적 제207호)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시
왕릉 35기
제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一 예릉(睿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一 경릉(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제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一 인릉(仁陵 : 사적 제194호)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제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一 건릉(健陵 : 사적 제206호)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二 홍릉(弘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一 원릉(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二 혜릉(惠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一 의릉(懿陵 : 사적 제204호)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三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二 익릉(翼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제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一 명릉(明陵 : 사적 제198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제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一 숭릉(崇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一 영릉(寧陵 : 사적 제195호)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二 휘릉(徽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一 장릉(長陵 : 사적 제203호)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二 성묘(成墓 : 사적 제365호)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제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一 목릉(穆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一 강릉(康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一 효릉(孝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四 태릉(泰陵 : 사적 제201호)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三 희릉(禧陵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二 온릉(溫陵 : 사적 제210호)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제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一 정릉(靖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三 회묘(懷墓 : 사적 제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二 순릉(順陵 : 사적 제205호)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제9대 성종(第九代 成宗) 一 선릉(宣陵 : 사적 제199호)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路)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二 공릉(恭陵 : 사적 제205호)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제8대 예종(第八代 睿宗) 一 창릉(昌陵 : 사적 제198호)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제7대 세조(第七代 世祖) 一 광릉(光陵 : 사적 제197호)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二 사릉(思陵 : 사적 제209호)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제6대 단종(第六代 端宗) 一 장릉(莊陵 : 사적 제196호)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제5대 문종(第五代 文宗) 一 현릉(顯陵 : 사적 제193호)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제4대 세종(第四代 世宗)
제3대 태종(第三代 太宗)
제2대 정종(第二代 定宗)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三 정릉(貞陵 : 사적 제208호) : 서울 성북구 정릉2동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二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제1대 태조(第一代 太祖) 一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호)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