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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朝鮮王陵] 능(陵) - 4 (2) 추존왕 원종 (元宗) _ 장릉 章陵

草霧 2013. 8. 8. 14:11

 

 

 

신들의 정원

 

 

역사의 숲을 산책하다

 

 

조선왕릉

 

    

 

[ 朝鮮王陵 ,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 - 4

 

 

 

 

(2) 추존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원종20090814-8.JPG

 

 

왕릉은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왕릉은 42(북한소재 2기 포함), 원은 13, 묘는 64기이다.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라 일컫는다. 광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세조의 능인 광릉 이외에 2기의 원이 더 있다. 휘경원과 순강원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120(40, 14, 66) 중 현재 비공개하고 있는 지역은 사적 12곳임(3, 4, 5)입니다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폐위(廢位)된 묘() 2()

황제릉(皇帝陵) 2()

왕릉 35

 

 

 

 

1. 추존이라는 미명으로, 역사세우기

 

추존(追尊)함길도 8

 

2. 왕조, 문을 열다

 

1대 태조 (太祖, 1335-1408) _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 정릉 貞陵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2대 정종 (定宗, 1357-1419) _ 후릉 厚陵

 

3대 태종 (太宗, 1367-1422) _ 헌릉 獻陵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4대 세종 (世宗, 1397-1450) _ 영릉 英陵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5대 문종 (文宗, 1414-1452) _ 현릉 顯陵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6대 단종 (端宗, 1441-1457) _ 장릉莊陵, 사릉思陵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7대 세조 (世祖, 1417-1468) _ 광릉 光陵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추존(追尊)왕 덕종 (德宗, 1438-1457) _ 경릉 敬陵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8대 예종 (睿宗, 1450-1469) _ 창릉昌陵, 공릉恭陵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9대 성종 (成宗, 1457-1494) _ 선릉宣陵, 순릉順陵, 회묘 懷墓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3. 왕조, 산을 넘다

 

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_ 연산군묘 燕山君墓

 

11대 중종(中宗, 1488-1544) _ 정릉靖陵, 온릉溫陵, 희릉禧陵, 태릉 泰陵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12대 인종 (仁宗, 1515-1545) _ 효릉 孝陵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13대 명종(明宗, 1534-1567) _ 강릉 康陵, 순창원 順昌園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14대 선조 (宣祖, 1552-1608) _ 목릉 穆陵, 성묘 成墓, 순강원 順康園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4. 조선, 또 다시 위기를 맞다

 

15대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_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追尊)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5. 왕조, 반석을 다지다

 

16대 인조 (仁祖, 1595-1649) _ 장릉 長陵, 휘릉 徽陵, 소경원 昭慶園, 영회원 永懷園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6. 조선, 당쟁에 휩싸이다

 

17대 효종 (孝宗, 1619-1659) _ 영릉 寧陵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18대 현종 (顯宗, 1641-1674) _ 숭릉 崇陵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7. 환국정치로 왕권을 다지다

 

19대 숙종 (肅宗, 1661-1720) _ 명릉明陵, 익릉 翼陵, 대빈묘大嬪墓, 소령원昭寧園

명릉明陵 | 차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20대 경종 (景宗, 1688-1724) _ 의릉懿陵, 혜릉惠陵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8. 조선, 르네상스를 맞다

 

21대 영조 (英祖, 1694-1776) _ 원릉元陵, 홍릉弘陵, 수경원綏慶園, 수길원 綏吉園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추존(追尊)왕 진종(眞宗) _ 영릉永陵

 

추존(追尊)왕 장조(사도세자 莊祖) _ 융릉隆陵, 의령원 懿寧園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22대 정조(正祖, 1752-1800) _ 건릉健陵, 휘경원徽慶園, 효창원 孝昌園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9. 조선,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23대 순조 (純祖, 1790-1834) _ 인릉仁陵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추존(追尊)왕 익종 (翼宗, 문조 文祖) _ 수릉綏陵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24대 헌종 (憲宗, 1827-1849) _ 경릉景陵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25대 철종 (哲宗, 1831-1863) _ 예릉睿陵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10. 오백 년 왕조, 문을 닫다

 

26대 고종황제 (高宗, 1852-1919) _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 흥원 興園

홍릉洪陵 | 망국에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27대 순종황제 (純宗, 1874-1926) _ 유릉裕陵, 영원英園, 숭인원 崇仁園, 회인원 懷仁園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2) 추존왕 원종 (元宗, 1580-1619) _ 장릉 章陵

   

 

 

 

살아생전 숨죽이고 아들 덕에 왕으로 추존되다

 

 

 

장릉 章陵

 

 

  

원종20090814-8.JPG      

 

원종 (元宗, 이부, {定遠君}, 1580-1619), 인헌왕후 구씨(仁獻王后 具氏, 1578-1626),

1627, 경기 김포 풍무동, 202

 

추존왕 원종(元宗) 장릉(章陵) 큰이미지

 

 

추존왕 원종(元宗) 장릉(章陵) 첫번째 작은이미지추존왕 원종(元宗) 장릉(章陵) 두번째 작은이미지추존왕 원종(元宗) 장릉(章陵) 세번째 작은이미지

 

 

 

추존왕 원종(元宗) 장릉(章陵)16대 인조(仁祖)의 아버지인 추존(追尊)元宗(이부:{定遠君} ;1580-1619)과 인헌왕후 구씨(仁獻王后具氏 ; 1578-1626)章陵은 사후에 추숭(追崇)된 능이기에 쌍분(雙墳)의 형식으로 다소 소략하면서도 위풍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봉분(封墳)의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은 생략했으나 봉분 밑 부분에 얕은 보호석(保護石)을 두르고 있어 대원군(大院君)의 묘제(墓制)가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래 원종은 광해군대(光海君代)에 승하했는데, 인조 즉위후 대원군(大院君)으로 추숭되어 현재 위치에 흥경원(興慶園)으로 조성되었다가 인조 10(1632)에 원종(元宗)으로 추존되어 인헌왕후릉(仁獻王后陵)과 함께 장릉(章陵)으로 능호(陵號)를 정하고 개수(改修)를 한 것입니다. 1637(인조 5)에는 능원에 불이 났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주변의 금정사(金井寺)는 장릉의 원찰(願刹)로 자리잡아 오고 있습니다.

 

선조(宣祖)의 후궁들 중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소생에는 4명의 군()이 있었는데, 셋째 정원군(定遠君)이 인조(仁祖)의 아버지로 후에 원종(元宗)으로 추존됩니다. 선조의 다섯 번째 아들이기도 했던 정원군은 자신의 세 아들 중 능창군(綾昌君)을 신경희 등이 왕위에 추대하려던 일이 수포로 돌아가{1615(광해군 7)} 능창군이 유배되어 사사(賜死)되는 일을 겪는 등 불우한 일생을 보내다가 161940세의 나이로 승하해 양주군에 안장되었습니다. 3년 뒤 인조가 즉위한 후 대원군으로 추존되고 다시 원종(元宗)으로 추존되고 시호를 공량(恭良)이라 하여 장릉(章陵)으로 천장해 왕릉의 규모로 자리잡게 됩니다.

 

    장릉-장릉 홈페이지를 찾아주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인헌왕후 구씨(仁獻王后具氏)는 좌찬성(左贊成)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 구사맹(具思孟)의 딸로 태어나 3{인조, 능원(綾原),능창(綾昌)}을 두었으나 남편의 생존시에는 자식의 죽음을 보는 등 불우하게 지내다가 인조의 즉위를 말년에 보면서 기쁨을 찾아 부부인(府夫人)에 진봉되고 인조 10{1623)에 원종(元宗) 추존과 함께 왕후로 추봉되었으나 역시 49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정원군(定遠君)과 함께 추존되어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시호를 받게 됩니다.

 

선조(宣祖)의 적자(嫡子)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이 너무 늦게 탄생한 것이 권력의 혼란을 야기시킨 원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광해군대의 역사는 내적 모순이 자연발생적으로 폭발한 필요불가결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산141-1장릉(章陵)은 인조의 아버지로 추존된 원종과 그의 비인 인헌왕후의 능이다. 쌍릉으로 조영되었다.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 없이 호석(護石 : 봉분 주위를 둘러 막는 돌)만을 두르고 있는데, 이는 왕이 아니었던 왕의 아버지, 즉 대원군의 묘제를 따른 것이다.

 

문석인은 머리에 복두를 착용하고 공복을 입은 채 석마와 나란히 서 있으며, 무석인은 장군의 형상으로 투구와 갑옷을 입고 있다. 문무석인 모두 무표정한 얼굴에 위엄이 서려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르는 길인 참도가 다른 능과는 달리 약간의 경사진 계단식 형태이다. 정자각이 상대적으로 조금 높은 곳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정자각 동측에 자리한 비각은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각으로, 비문을 통해 능의 주인공과 그의 생전 행적을 알 수 있다. 홍살문 안의 비면에는 조선국 원종대왕 장릉 인헌왕후 부좌(朝鮮國元宗大王章陵 仁獻王后左)’라고 쓰여 있으며, 1753(영조 29)에 세워졌다. 근처에는 장릉의 원찰인 금정사(金井寺)가 자리하고 있다.

    

 

원종은 1619(광해군 11) 1229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이듬해 2월에 양주군 곡촌리에 장사지냈는데, 그로부터 3년 뒤 큰 아들 능양군(인조)이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아들이 왕위에 오름에 따라 대원군에 봉해졌으며, 묘가 원으로 추숭되어 흥경원(興慶園)이라 하였다.

    

 

1626(인조 4) 114일에는 경희궁 회상전에서 원종의 부인이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같은 해 518일 김포 성산의 언덕에 안장하고, 원호를 육경원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1년 후 흥경원을 이곳 성산으로 천장하여 쌍릉을 조영하면서 원호를 흥경원이라 합칭하게 되었다. 1632년 이귀(李貴) 등의 주청에 따라 다시 원종으로 추존하여 능호를 장릉이라 하고 석물을 왕릉제로 개수하였다.

 

관련사진선조 13년(1580)년 6월 22일 경복궁(景福宮) 별전(別殿)에서 인빈김씨(仁嬪金氏)가 세 번째 아들을 낳았는데 임금은 그를 1587년(선조 20)에 정원군(定遠君)으로 책봉하였다. 정원군은 1590년(선조 23)에 능안부원군 구사맹(具思孟)의 딸과 결혼을 하여 능양군(綾陽君), 능원군(綾原君), 능창군(綾昌君)등 아들 셋을 낳았다. 정원군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있어 선조(宣祖)의 사랑을 받았고, 어머니 인빈김씨의 무덤과 집터에 왕기(王氣)가 서리고, 관상이 범상치 않다는 소문 때문에 이복(異腹) 형(兄)인 광해군으로 부터 감시와 견제를 받았다. “나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하게 지낸 것을 알겠고, 날이 저물면 오늘 하루가 다행히 잘 지나간 것을 알겠다. 내가 바라는 것은 우리 집 창문아래에서 죽어 지하에 있는 선왕(宣祖)을 빨리 따라가는 것뿐이다.”라고 할 정도로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능창군이 옥사(獄死)를 하고, 1617년(광해군 9)에는 왕기가 서린다는 새문동(塞門洞) 집터를 광해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당시에 성지(性智)가 이미 인왕산 아래에 터를 정해주어 새로운 궁궐을 짓고 있었음에도 정원군의 집터에 또 다른 궁궐을 광해군은 짓게 하였던 것이다. 한꺼번에 3개의 궁궐을 동시에 짓는 작업이 이루어지자 제조(提調)와 낭청(郎廳)의 관원(官員)이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헐어버린 민가가 수천 채나 되었다. 능창군의 죽음과 집터를 빼앗긴 정원군은 술로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은 병이 들어 1619년(광해군 11) 12월 29일 40세의 나이로 승하하고 말았다. 광해군은 장례기간 단축을 재촉하고, 사람을 시켜 조문객을 감시하니, 유족들은 불안해서 제대로 된 장지(葬地)를 고를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결국은 처가(妻家) 선산인 남양주시 금곡동에 묻히게 되었다.

 

 

1623년 3월 13일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을 폐위(廢位)하여 강화도(江華島)로 귀양을 보내고, 경운궁(慶運宮)에서 능양군이 조선 16대 왕으로 즉위하니 그가 인조(仁祖) 임금이다. 왕위에 오른 인조는 아버지를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으로, 어머니는 계운궁(啓運宮)으로, 정원대원군의 무덤을 흥경원(興慶園)으로 추봉하였다. 계운궁은 1578년(선조 11) 4월 17일에 태어나 한때 자신의 집터였었던 경덕궁 회상전(會祥殿)에서 1626년(인조 4) 1월 14일에 승하하였다. 대신과 상지관(相地官)들이 김포(金浦) 객사(客舍) 뒷산을 장지로 추천을 하니, 인조는 다른 지관들을 불러 확인을 한 후 그 해 5월 18일에 계운궁을 남향(癸坐丁向)으로 장사를 지내고 원호(園號)를 육경원(毓慶園)으로 정하였다.

 

망주석
망주석
무인석
무인석
문인석
문인석
석호
석호
석마
석마
석양
석양
장명등
장명등
혼유석
혼유석
능침 전경
능침 전경
정자각
정자각
비각
비각
수복방
수복방

 

한편 흥경원 이장을 추진하던 중에 정묘호란(丁卯胡亂)이 발발하여 중지하였다가 이듬해인 1626년 8월 27일에서야 계운궁 오른쪽에 이장(子坐午向)을 하고, 원호를 육경원과 합하여 흥경원으로 정하였다. 1632년(인조 10)에는 정원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여 원종(元宗)으로, 대원부인(大院夫人)을 왕비로 추존하여 인헌왕후(仁獻王后)로, 능호는 장릉(章陵)이라 하였다.

 

 

 

장릉의 산세(山勢)를 보면 명당(明堂)은 굽어져 있고, 청룡과 백호는 끝으로 갈수록 높아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만 주작(朱雀)과 조산(朝山)인 계양산(桂陽山)이 비교적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고, 계양산에서 뻗어온 산줄기가 다시 계양산을 바라다보는 회룡고조(回龍顧祖)의 산세를 가졌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주택(住宅)이나 무덤 앞에 펼쳐진 넓은 공간을 풍수(風水)에서는 명당이라 한다. 그 명당의 모양에 따라 주택에 살고 있는 사람이나 무덤의 후손들에게 좋고 나쁨의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 조선시대 잡과(雜科) 지리학(地理學) 고시과목의 하나였던 『명산론(明山論)』에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좋은 모양의 명당을 10종류, 나쁜 모양의 명당을 20종류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장릉 앞에 펼쳐진 명당과 같은 모양을 ‘마치 놀란 뱀이 꾸불거리며 달아나는 모습’과 같다하여 ‘곡(曲)’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명당이 ‘곡’이면 ‘그 후손이 생이별을 한다.’는 내용도 덧붙여 설명하고 있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망료위
망료위
참도(신도, 어도)
참도(신도, 어도)
홍살문
홍살문
장릉 저수지 전경
장릉 저수지 전경
장릉 전경
장릉 전경
비문
비문

 

    

추존왕 원종의 태묘 합제에 반대하는 이들을 유배 보낸 것에 대한 정언(鄭蘊, 1569 ~ 1641)의 상소

 

 

추존왕 원종의 신위가 모셔진 종묘 영녕전의 설경 

 

인조실록1634(인조 12) 821일의 기사는 다음과 같은 정온의 상소를 싣고 있다. “예기아버지를 여의고 갑자기 존귀해졌을 때 아버지를 위하여 시호를 짓지 않는다.’ 하였고, 선유(先儒) 여중(呂中)아버지의 벼슬이 낮을 경우 자신의 벼슬을 기준으로 시호를 지으면 안되고 그 당사자에게 합당한 시호를 만들어야 하니, 이는 자신의 벼슬로써 그 아버지에게 가할 경우 높이려 했으나 도리어 낮추는 꼴이 되어 부모를 공경하는 도리가 못되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전하께서 시호를 추증하는 일도 이미 지당한 도리가 못되는데, 곧장 열성(列聖)의 지위에 올리려 하신다면 그것은 예경(禮經)의 본의가 아니리라 생각됩니다.

 

역사의 창
역사의 창
장릉
장릉

 

 

(중략) , 전하께서는 오늘날의 일이 과연 어떻다고 여기십니까. 삼사는 이목을 맡은 관직인데 거의 다 쫓아내었고, 정원은 후설(喉舌)을 맡은 자리인데 오래 전에 가두어 버렸으며, 대신은 고굉(股肱)을 맡은 직책인데 내팽개치듯이 버렸습니다. 바르게 논하는 자들을 근거 없는 논의를 한다 하고, 아첨하여 영합하는 자들을 정직하다 하여, 시비가 전도되고 사정(邪正)이 구분되지 않고 있으니, 이른바 충성스럽고 아름다운 행실이 자취를 감추고 아첨과 간사함이 풍미하고 있다.’는 상황과 불행히도 가깝다 하겠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선뜻 깨닫고 서슴없이 길을 바꾸어 예경(禮經)의 지극한 가르침을 따르고 역대의 득실을 귀감으로 삼아 속히 예에 맞지 않는 예를 중지시키고 유배하라고 한 명을 거두어 들이소서.”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갔으나 안에 두고 답하지 않았다.

 

장릉의 여름 소경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의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하고 태묘(太廟)에 합제(合祭)하려고 하자, 여러 언관들이 이를 강력히 반대하여 이들을 유배보냈다. 정언은 이러한 인조의 결정을 번복시키기 위해 위와 같은 상소를 올린 것이다.

 

 

 

 

정온(鄭蘊, 1569 ~ 1641)

조선 중기 문신이다. 『덕변록』과 『망북두시』, 『망백운가』를 지어 애군우국의 뜻을 토로하였고, 인조반정으로 석방, 헌납에 등용되었다. 이어 사간 · 이조참의 · 대사간 · 경상도 관찰사 · 부제학 등을 역임했다.

 

 

 

 

 

장릉의 숲 이야기 

 

장릉과 자연. 장릉의 남쪽으로는 연을 가득 심어놓은 연지가 있다.

 

 

 

1. 산림으로 둘러싸인 곳의 왕릉

조선 16대 인조의 아버지 원종이 잠들어있는 장릉은 경기도 김포시에 위치한다. 김포는 평야로 이루어져 산이 매우 드문데, 특히 도심권 내에서는 장릉이 위치한 장릉산이 유일하다. 장릉을 비롯한 조선 왕릉의 주변은 산세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으며 강한 폐쇄성과 안정성, 중층성을 확보하고 있다. 장릉과 자연. 장릉의 남쪽으로는 연을 가득 심어놓은 연지가 있다.

 

2. 왕릉의 공간을 조영하는 법칙

관련사진능역 내의 공간도 조선 왕릉만의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왕릉은 보통 봉분이 있는 성역 공간과 정자각 등 제사를 지내기 위한 시설들이 위치해 있는 제향 공간으로 나뉘는데 이 두 공간은 높낮이에 차이를 두었다. 따라서 봉분이 있는 성역 공간에 서면 아래의 제향 공간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반대로 아래쪽의 정자각 부근에서는 정자각, 비각, 수복방 등의 부속건물과 우거진 수풀 등 때문에 위쪽 능침이 있는 성역 공간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는 능역에서 가장 상위개념의 공간인 성역 공간의 폐쇄성을 높이기 위한 설계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자각 쪽에서 잘 보이지 않는 위쪽을 바라보면서 조선 왕릉의 성역으로서의 신비감, 권위성, 엄숙성을 느끼게 된다.

 

3. 조선 왕릉과 그 부근의 나무 이야기

장릉을 빠져나오면 그 부근으로는 울창한 장릉 숲이 펼쳐져 있다. 이 숲은 자생한 수풀과 사람이 심은 인공림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장릉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조선 왕릉에서는 인공으로 숲을 조성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며 조성된 산림은 철저하게 관리되었다.

    

 

능을 조영할 당시 심었던 나무의 종류는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숲에 남아있는 나무들과 1920~ 30년대에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의하면 능의 좌우 및 후면에는 소나무를 심었다. 한반도에는 약 5000년 전부터 현재와 같은 소나무림의 경관이 성립되어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삼림에서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하였으며,양화소록(養花小錄)에 의하면, 소나무가 풍수사상에 의해 선정된 명당자리에 심는 가장 중요한 수목으로 취급되었다고 한다. 한편 능의 전면인 남쪽의 낮은 지대에는 오리나무를 주로 심어 무성한 숲을 이루게 하였다.

 

추존왕 원종이 잠들어있는 장릉의 원경. 

 

4. 역사의 숲 조선 왕릉

조선 왕릉의 주위로는 장릉 숲 이외에도, 광릉 숲, 헌릉 오리나무 숲 등 푸르게 조성된 숲들이 산재해있다. 우리는 이 숲을 거님으로서 맑은 공기와 푸른 시야의 자연을 만끽할 뿐 아니라 수백 년 전 조선의 역사를 산책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게 된다.

 

 

 

 

 

 

왕이란 이름은 물려주기도 하고, 올려 바치기도 하네

 

장릉 - 추존. 원종과 인헌왕후

 

 

추존 원종(元宗, 이부, {定遠君}, 1580-1619)

 

원종은1580(선조 13) 622일 경복궁 별전에서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1590(선조 23) 11세에 가례를 올렸다. 어릴 때부터 용모가 남다르고 태도가 신중하였으며,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남달랐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피난길에 올라 험난한 시기를 겪고 1595(선조 28) 겨울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1608년에는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로부터 7년 후 원종의 셋째 아들 능창군을 황해도 수안군수 신경희가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무고로 인하여 커다란 옥사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능창군은 강화도로 유배당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원종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그 후 원종은 몸져누워 1619(광해군 11) 1229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원종은 임진왜란 때 부왕 선조를 모시면서 험난한 일을 겪었으나, 나이가 아직 어렸음에도 의연한 태도로 이에 대처하여 모두가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 중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전란의 한가운데에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이 때 신하들에게 명하여 정원군(원종)을 영변으로 데려가 왜적을 피하도록 하였다. 그 때 정원군이 영변에 이르러 울면서 말하기를, “이곳에 온 것은 내가 살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임금님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왜적의 형세가 날로 성하고 임금의 행차는 날로 멀어지니,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된다면 임금과 신하가 죽음과 삶을 같이 하지 못할 것인데, 이 몸이 간들 어디로 가겠습니까?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선조는 이를 전해듣고 가상히 여겨 정원군을 다시 불러왔으며, 그 뒤로 정원군은 선조 곁을 떠나지 않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를 옆에서 모셨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종결되고 서울에 돌아오자, 1604(선조 37)에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에 봉해졌다.

 

   

 

 

문화재청 김포 장릉 관리사무소 : http://jangneung.cha.go.kr/n_jangneung/index.html
  엔하위키 정원군 원종 : http://rigvedawiki.net/r1/wiki.php/%EC%A0%95%EC%9B%90%EA%B5%B0#fn2
  위키백과 인헌왕후 : http://ko.wikipedia.org/wiki/%EC%9D%B8%ED%97%8C%EC%99%95%ED%9B%84

 

 

 

인헌왕후 구씨(仁獻王后 具氏, 1578-1626)

 

인헌왕후는 능안부원군 구사맹의 딸로 1578년(선조 11) 417일 태어났다. 1590(선조 23) 정원군(훗날 원종)과 가례를 올리고 연주군부인에 봉해졌다. 첫째 아들인 능양군이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1623(인조 1)에 연주부부인으로 진봉되었다. 그러나 셋째 아들 능창군이 역모에 휘말려 유배 후 스스로 목숨을 끊고, 이에 충격을 받은 남편이 일찍 세상을 뜨는 등 불행한 일이 잇달아 일어나자, 1626(인조 4) 114일 경희궁 회상전에서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훗날 이조판서 이귀의 주청으로 부군인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인헌왕후로 추봉되었다.

 

 

    

 

 

현황(現況)

    

 

 

 

 

조선조 王室世系表 [ 27, 517, 1392 - 1910 ]

 

 

() 13()

숭인원(崇仁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영원(英園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영휘원(永徽園 : 사적 제361)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수목원 내

효창원(孝昌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휘경원(徽慶園 : 사적 제360)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의령원(懿寧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수경원(綏慶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수길원(綏吉園 : 사적 제359)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소령원(昭寧園 : 사적 제358)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영회원(永懷園 : 사적 제357) : 경기(京畿) 광명시(光明市) 노온사동(勞溫寺洞)

소경원(紹慶園 : 사적 제200)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순강원(順康園 : 사적 제356)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순창원(順昌園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사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왕릉(王陵) 5()

익종(翼宗) 수릉(綏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장조(莊祖) 융릉(隆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

진종(眞宗) 영릉(永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원종(元宗) 장릉(章陵 : 사적 제202) : 경기 김포시 김포읍(金浦邑) 풍무동(豊舞洞)

덕종(德宗) 경릉(敬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폐위(廢位)된 묘() 2()

15대 광해군(第十五代 光海君) 광해군묘(光海君墓 : 사적 제363)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0대 연산군(第十代 燕山君)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 : 서울 도봉구(道峰區) 방학동

 

황제릉(皇帝陵) 2()

27대 순종(第二十七代 純宗) 유릉(裕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26대 고종(第二十六代 高宗) 홍릉(洪陵 : 사적 제207) : 경기(京畿) 남양주(南楊州)

 

왕릉 35

25대 철종(第二十五代 哲宗) 예릉(睿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4대 헌종(第二十四代 憲宗) 경릉(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23대 순조(第二十三代 純祖) 인릉(仁陵 : 사적 제194) : 서울 서초구(瑞草區) 내곡동(內谷洞)

22대 정조(第二十二代 正祖) 건릉(健陵 : 사적 제206) : 경기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홍릉(弘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21대 영조(第二十一代 英祖) 원릉(元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혜릉(惠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20대 경종(第二十代 景宗) 의릉(懿陵 : 사적 제204) : 서울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대빈묘(大嬪墓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익릉(翼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용두동

19대 숙종(第十九代 肅宗) 명릉(明陵 : 사적 제198)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용두동(龍頭洞)

18대 현종(第十八代 顯宗) 숭릉(崇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7대 효종(第十七代 孝宗) 영릉(寧陵 : 사적 제195) : 경기 여주시(驪州市) 능서면(陵西面)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휘릉(徽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6대 인조(第十六代 仁祖) 장릉(長陵 : 사적 제203) : 경기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성묘(成墓 : 사적 제365)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眞乾邑)

14대 선조(第十四代 宣祖) 목릉(穆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13대 명종(第十三代 明宗) 강릉(康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2대 인종(第十二代 仁宗) 효릉(孝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태릉(泰陵 : 사적 제201) : 서울(Seoul) 노원구(蘆原區)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희릉(禧陵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온릉(溫陵 : 사적 제210) : 경기(京畿) 양주시(楊州市) 장흥면(長興面)

11대 중종(第十一代 中宗) 정릉(靖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三成洞) 테헤란로

9대 성종(第九代 成宗) 회묘(懷墓 : 사적 제200) : 경기 고양시 덕양구(德陽區) 원당동(元堂洞)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순릉(順陵 : 사적 제205) : 경기 파주시 조리읍(條里邑) 봉일천리(奉日川里)

9대 성종(第九代 成宗) 선릉(宣陵 : 사적 제199) :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Teheran)

8대 예종(第八代 睿宗) 공릉(恭陵 : 사적 제205) : 경기(京畿) 파주시(坡州市) 조리읍(條里邑)

8대 예종(第八代 睿宗) 창릉(昌陵 : 사적 제198) : 경기(京畿)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7대 세조(第七代 世祖) 광릉(光陵 : 사적 제197)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와 포천군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사릉(思陵 : 사적 제209) : 경기(京畿) 남양주시(南楊州市) 진건읍(眞乾邑)

6대 단종(第六代 端宗) 장릉(莊陵 : 사적 제196) : 강원(江原)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5대 문종(第五代 文宗) 현릉(顯陵 : 사적 제193) : 경기(京畿) 구리시(九里市) 인창동(仁倉洞)

4대 세종(第四代 世宗)

3대 태종(第三代 太宗)

2대 정종(第二代 定宗)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정릉(貞陵 : 사적 제208) : 서울 성북구 정릉2

1대 태조(第一代 太祖) 제릉(齊陵) :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 판문군(板門郡) 상도리(上道里)

1대 태조(第一代 太祖) 건원릉(健元陵 : 사적 제193)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왕릉(朝鮮王陵)의 계보

 

    

 

 

 

 

목조-덕릉 효공왕후 이씨-안릉

익조-지릉 정숙왕후 최씨-숙릉 , 손씨

도조-의릉 경순왕후 박씨-순릉, 조씨

환조-정릉 의혜왕후 최씨-화릉, 이씨, 정빈 김씨

태조-건원릉 신의왕후 한씨-제릉 신덕왕후 강씨-정릉

정종-후릉 정안왕후 김씨-후릉

태종-헌릉 원경왕후 민씨-헌릉

세종-영릉 소헌왕후 심씨-영릉

문종-현릉 현덕왕후 권씨-현릉

단종-장릉 정순왕후 송씨-사릉

세조-광릉 정희왕후 윤씨-광릉

예종-창릉 장순왕후 한씨-공릉 안순왕후 한씨-창릉

성종-선릉 공혜왕후 한씨-순릉 폐비 윤씨-회묘 정현왕후 윤씨-선릉

연산군-연산군묘 폐비 신씨-연산군묘

중종-정릉 단경왕후 신씨-온릉 장경왕후 윤씨-희릉 문정왕후 윤씨-태릉

인종-효릉 인성왕후 박씨-효릉

명종-강릉 인순왕후 심씨-강릉

선조-목릉 의인왕후 박씨-목릉 인목왕후 김씨-목릉

광해군-광해군묘 폐비유씨-광해군묘

인조-장릉 인렬왕후 한씨-장릉 장렬왕후 조씨-휘릉

효종-영릉 인선왕후 장씨-영릉

현종-숭릉 명성왕후 김씨-숭릉

숙종-명릉 인경왕후 김씨-익릉 인현왕후 민씨-명릉 인원왕후 김씨-명릉

경종-의릉 단의왕후 심씨-혜릉 선의왕후 어씨-의릉

영조-원릉 정성왕후 서씨-홍릉 정순왕후 김씨-원릉

정조-건릉 효의왕후 김씨-건릉

순조-인릉 순원왕후 김씨-인릉

헌종-경릉 효현왕후 김씨-경릉 효정왕후 홍씨-경릉

철종-예릉 철인왕후 김씨-예릉

고종-홍릉 명성황후 민씨-홍릉

순종-유릉 순명효황후 민씨-유릉 순정효황후 윤씨-유릉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