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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산 봉국사

草霧 2013. 7. 24. 11:20

 

 

고찰(古刹)은 주로 명당 터에 자리 잡고 있던데…

삼각산 봉국사

 

사종민 | 2012.07.05

 

 

[서울시 하이서울뉴스] 삼각산 봉국사(奉國寺)라 하여 처음에는 산 속에 있는 줄 알았는데 막상 가보니 대로변에 사찰 일주문이 있었다. 문을 지나면서 경내는 아마도 대로의 빈번한 차량 통행으로 소음이 심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기우였다. 산새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하고 아늑하였다. 고찰(古刹)은 언제 보아도 신기한 것이 참으로 명당 터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풍수지리로도 명당이겠지만 어쩌면 먼 앞날을 내다보고 이렇게 대비책을 잘 세웠을까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절을 건립할 때는 의미와 의도가 있다. 봉국사도 원대한 꿈과 이상을 가지고 세상에 출현하였다. 세대를 거듭하면서 주요 사찰로 자리매김하였고, 시대의 아픔과 질곡을 고스란히 간직하면서 호흡하고 성장하였다.

 

태조 4년(1395) 조선 개국 공신인 무학대사가 나라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약사여래를 봉안하고 약사사(藥師寺)로 창건한 것이 시초이다. 세조 14년(1468)에 왕실의 시주로 사찰을 중창하였다. 이후 숙종 10년(1669)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명복을 비는 왕실의 원당(願堂)으로 약사사를 지정하면서 '나라를 받든다'는 뜻에서 봉국사라 고쳐 불렀다.(그러나 정작 조선시대를 거쳐 대한제국 시기까지 약사사가 정식 명칭인 듯하다. 19세기 중반에 간행된 「도성도」와 1900년에 제작된 「경성부근지도」에는 약사사로 표기되어 있고 경술국치(1910)이후에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대략 1900년대 초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한 가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인근 신흥사(新興寺)와의 관계이다. 봉국사나 신흥사는 신덕왕후의 묘인 정릉과 불가분의 관련이 있다. 봉국사는 정릉의 원당이고, 신흥사는 정릉의 능침(陵寢)사찰이다. 원당은 죽은 사람의 진영(眞影 : 초상화)과 위패를 모시고 고인의 명복을 기원하는 법당을 의미하며, 능침사찰은 왕릉을 수호하는 사찰로서, 그 경비를 조달하는 임무를 갖고 있다. 봉국사가 원당의 역할을 하였기에 왕실 가족의 위패를 모신 경우가 실제 있었다. 숙종 17년(1691) 4월 어린나이에 요절한 숙종의 누나이자 부왕(父王) 현종(顯宗)의 장녀 명선(明善)과 차녀 명혜(明惠)공주의 원당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후의 기록은 남아 있는 자료가 없어 알 길이 요원하다. 다만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불탄 사찰을 이듬해 중창하였고, 1898년 명부전을, 1913년 칠성각을 중건하였다는 단편적인 사실만 확인될 뿐이다.

 

 

봉국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산실(産室)로 기억되고 있다. 1920년 5월 6일 당시 월정사(月精寺) 스님인 이종욱(李宗郁)을 불령(不逞)승려로 체포되었다. 일제의 표현을 빌자면 정책에 불만을 품고 이른바 반체제 행동을 일삼은 승려를 말하는데, 실제로 이종욱은 1919년 3·1운동 이후 4월에 결성된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의 지령으로 귀국하여 국내 승려를 규합하여 의용승군(義勇僧軍)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 기획을 하다가 발각되었던 것이다.

 

이때 봉국사 백성욱(白性郁), 범어사 김법린(金法麟)스님 등과 계획을 하였다. 백성욱과 김법린은 불교 중앙학림(中央學林) 출신이었다. 중앙학림에는 독립운동단체인 민단본부가 있었고, 만해 한용운은 중앙학림 출신 젊은 승려를 신뢰하여 3·1운동 전날인 2월 28일 유심사(惟心社)로 백성욱, 김법린 등을 불러 3·1항쟁의 참가를 독려하였으며, 당일 날 한용운의 집에서 독립선언서 3천 장을 중앙학림 기숙사로 보내 학생 40여 명에게 배포도록 하였다. 1920년 12월에는 경성사립중앙학교 출신인 김교상(金敎爽)이 대한독립단 국내지부 설치 기도사건으로 체포되었는데 김교상의 은거지가 바로 봉국사였던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당시 봉국사는 독립운동의 거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일제 당국으로부터 받았을 고초와 고난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때 활약한 백성욱은 승려의 신분으로 독일로 유학가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후 한국 불교계를 지도하였으며, 해방 후 내무부장관과 동국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전각은 만월보전, 명부전, 천불전, 광응전, 독성각, 일음루 등이 있는데 중심 건물은 만월보전(滿月寶殿)이다. 만월보전은 약사여래와 관련이 있다. 약사여래는 동방의 유리광(琉璃光)세계 주불(主佛)로서, 여래의 모습을 읊은 게송(偈頌)에 보면 동방세계는 만월(滿月)로 지칭하고 있다. 따라서 약사여래로 대표되는 전각이라 할 수 있다. 고종 2년(1898)에 중건된 명부전 내부에는 지장삼존과 시왕, 여섯 명의 판관·녹사, 두 명의 인왕상이 있으며, 중앙의 지장불화는 1885년에 조성한 것으로 절에서 가장 오래된 성보문화재이다. 일음루(一音樓)는 2층의 누각 건물로 2층에는 종각이 있고, 1층에는 천왕문(天王門)이 있어 경내에 이르는 통로이다.

 

성북구 정릉로 202(정릉동 637)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본사 조계사의 말사이다. 지하철 4호선 길음역에서 171, 1114, 7211번 버스를 타고 봉국사 앞에서 하차하거나, 110A, 153, 1213번 버스를 타고 봉국사 앞에서 하차하면 바로 일주문이 보인다. 경내에 승용차 주차가 가능하다.

 

■ 봉국사 찾아가기

글/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청계천문화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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