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동양미술사

동양미술사

草霧 2013. 4. 12. 09:55

 

 

 

동양미술사

 

중국의 미술은 불교 사상을 바탕으로 자연적인 것과 관념적인 것이 혼연일체가 된 독특한 미술 세계를 전개해왔다.

은(殷)·주(周) 시대에는 청동기가 발달하였다. 중장하고 화려한작품으로 가득한 이 시대 조형미술의 전통은 그 이후 고대 중국미술의 지주가 되었다.

진(秦)·한(漢) 시대에는 옛 무덤의 벽화와 만리장성이 축조되어 그때의 생활상과 뛰어난 기술을 알 수 있다.

남북조(南北朝) 시대에는 인도로부터 불교 미술이 전래되어 돈황에 석굴 사원이 축조되었고 불교 조각이 성행하였다. 중국 미술에 있어 돈황의 석굴미술은 동서 문화 교류를 고찰하는 실마리를던진다. 돈황의 석굴은 서역을 지나 돈황에 도착한 소조 미술을 중국 본토에 정착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며, 색의 농담에 의한 음영법이 서방에서 전래되어 중국 회화계에 영향을 주었다.

수(隋)·당(唐) 시대는 불교 미술의 전성기이며 중국 미술의 황금기이기도 하다. 북종화와 남종화가 등장했으며 전통적인 중국조각의 성격이 정립되었다. 당대(當代) 수묵화는 서방회화의 채색대신 먹을 사용하였고, 단순히 대상을 감각적으로 본뜨는 것이아니라 대상의 생명을 본뜨는 정신을 으뜸으로 여기는 근본정신이 확립되었다.

1. 선사시대  (先史時代)
중국에서 예술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조형물이 출현한 것은 신석기시대 후기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인류의 생활은 있었다. 북경 주구점에서 발견된 북경원인은 40∼50만년 전에 불을 사용했다. 용골산 원인동에서 출토한 석기는 10만점에 달하여 작은돌조각이 상당수지만 정교한 첨두기가 있다. 구석기 후기로 가면 붉은 조개껍질의 윗부분을 갈아 구멍을 뚫은 것, 새들의 뼈를 작게갈라서 갈아 선각(線刻)한 것 등이 있었다.

신석기 시대는 석기가 주로 생산도구로 쓰인 데 반해 토기는 주로 생활용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토기의 제작이야말로 본격적인 미술의 창조였다. 
 
2. 은과 주시대
중국의 미술은 오늘의 하남성을 중심으로 황하 유역에서부터시작되었다. 시기상으로 보면 은(殷)과 주(周) 시대는 중국의 청동기 문화에해당한다. 은(殷, B.C.1300년경)시대와 주(周,B.C.1000년경)시대는 옥기(玉器), 토기, 동기(銅器)등의 형태가 다양하고 정교하다.
 
(1) 은(殷), 주(周)시대 건축과 조각
은(殷)시대 초기부터 흙을 다져서 만든 토단 위에 목조의 궁전건축이 지어졌다.은(殷)시대 중기 유적이 있는 정주에서는 흙을 다져서 만든 성벽이,후기 안양에서는 깊은 도랑이 발견되었다. 상형 문자를 통하여지상 건축물에 나무로 된 지붕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주(西周) 시대에는 기와가 출현한다. 또 은(殷)시대 후기의 것으로 그릇의 발이라고 생각되는 호랑이, 올빼미 등의 모양을 한 대리석 환조가 있는데 양식화 경향이 강하다. 같은 시기에 코뿔소나 숫양, 송아지, 코끼리 등의 모양을 본 딴 연옥(軟玉)의 소품이나 청동기가 있는데, 이것들은 각 동물의 특징을 잘 포착하고 있다.

중국 최초의 우수한 기법과 괴기하고 미려하게 새긴 도안 무늬는 다른 시대에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이다. 주로 자연신교 사상에서 나타난 구름, 비, 번개, 물결무늬등과 다복안락을 표시하는 괴기하고도 복잡한 무늬와 용,호랑이, 부엉이, 꿩 등의 동물 무늬등은 전아한 고전미를 보여준다. 
 
(2)은(殷), 주(周)시대 회화와 공예
은(殷)시대 후기에 깊은 통 모양의 그릇 4∼5개를 하나로 묶어서 화구(畵具)를 넣어두었던 것이 알려져 있지만, 그림 그 자체가 남아있지는 않다.
점을 볼 때 사용했던 동물의 견갑골에 사슴, 코끼리, 원숭이를선각한 회화가 약간 알려져 있는데 거침없는 선으로 이들 동물을 능숙하게 그린 것을 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은시대 초기부터 청동기가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은·주 시대의 청동기에는 이기(利器)와 병기(兵器)가 있다. 이기(利器)는 제기(祭器)로서 주기(酒器)·식기(食器)·수기(水器)·악기(樂器)로 분류되지만 각각 여러 종류의 다양한 기물이 있으며, 예술적으로 매우 뛰어나 세계의 청동 제품 가운데에서도 최고 수준이다.
주나라 때에 청동은 길금(吉金)이라고 불렸으며, 그러한 기물들에 새겨진 문자, 즉 금문(金文)은 그 시대의 역사나 예악을 연구하는데귀중한 사료로 쓰이고 있다.
도기·도자기 가운데는 대개 회색의 무유도(無釉陶)가 널리사용되었지만, 녹갈색 또는 등록색의 회유를 칠한 경도(硬陶)가만들어져 후대 청자의 선구를 이루었다.
은(殷)나라 때에 칠은 무기류나 목관에 바르는 정도였으나, 서주시대(西周時代)에 이르러서는 칠기(漆器)가 그릇으로 사용된다. 동물 뼈, 뿔, 상아 등도 주걱이나 비녀, 그릇을 만드는데사용되었다.

2. 춘추전국시대 (春秋戰國時代)

춘추전국시대는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에 이른 중국고대의 변혁시대이다.
은(殷)·서주(西周) 시대의 제도를 이어받아, 토단 위에 목조건축이 지어졌다. 높은 토단 위에 몇 층의 목조에 기와를 얹은궁전이 지어졌다. 전국시대에는 동근 통기와의 앞부분에 반원형의 와당을 붙이고, 동물이나 수목 등 다양한 문양을 덧붙이는 양식이 시작된다.

 

춘추시대는 양식화된 조각으로서 목조, 칠도(漆塗), 채색한 괴수형의 분묘 수호신이 남아 있으며 자연의 모사, 생명을뛰어나게 표현한 것으로 기물을 장식하는 동물형 환조 등이 있다.
전국 시대(戰國時代)로 내려오면 그 유물에서 출토지도 확산되고 출토자료도 풍부해지는데 특히 동제(銅製) 조각에는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들이 다수 나타난다. 우선 하남성 금촌 출토의 말과 매사냥 인물상등을 들 수 있고 하남성 이현에서 출토된 동제인물상이 있는데 단순하고 꾸밈없는 조각이면서도 양감을 보이는점이 주목된다.
춘추시대 후기에서 전국시대에 걸치는 청동기의 장식에 그림자그림 형식 및 선각으로 된 회화적 표현이 남아 있어 일부회화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주제는 궁전에서 열리는 연회나 오락, 사냥, 전쟁, 귀신 등으로 주로측시형(側視形)의 표현을 하며 측면상의 여자 및 봉황, 용을 먹으로그린 전국시대의 비단그림이 유명하다.
춘추시대 전기에는 청동제의 무기로 창, 방패, 칼, 청동제 화살촉이만들어졌으며 청동 그릇은 서주 시대 후기와 같은 종류가 제작되지만 조잡하게 만들어진 것도 많다. 중기에는 문양이 점차 세밀해지면서 바탕무늬같은 것으로 변한다.
또 가죽 허리띠를 잠그는 구(鉤)와 거울이 많이 제작된다.
도기는 분묘 부장품 가운데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지만, 장례용의 명기가 많다. 진흙질 회도(灰陶), 모래가 섞인 거친 회도(灰陶),진흙질 홍도 등이 있으며 회도(灰陶)가 주류를 이룬다. 방격문(方格文), 능형문(菱形紋), 우상문(羽狀文) 등의 인문(印文)이있으며 몸통이 둥글게 부푼 항아리가 주류를 이룬다.

3.진(秦)·한(漢) 시대
이 시대는 봉건사회로서 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외래 문화의 수입과 전파 시대이다. 어지럽던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제는 분서갱유를 감행하고, 불로장생과 부귀영화를 누리려 했으나 그 치세는 짧았다.
한나라는 서양의 로마 제국과 같이 정치와 군사에서는 강하였으나 문화와 예술에는 앞 시대의 모방에 치우쳐 독창력이 적었다. 이시대에는 다양성의 통일이 조화된 사실적이고 감각적인 양식을 낳았는데, 재현적 기법과 상징 및 추상화 과정이 혼합된 것 이다.
진(秦, 기원전 221∼201)은 단명한 왕조였지만, 전대까지의 중국 건축을 총괄하여 새로운 진대 건축을 창시했다.
위수의 남쪽에 아방궁과 같은 대 건축을 한 것을 비롯하여 여산의북쪽 기슭에 대규모의 시황제 왕릉을 축조하고 만리장성 대 토목공사를 벌이는 등, 엄청난 규모의 대역사가 주목된다. 장려한 궁전에는 돌로 만든 소와 고래, 구리로 만든 기린과 용의 조상으로 더욱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진(秦)·한(漢) 시대에는 묘당의 화상석(畵像石)이나 토기,동경(銅鏡)등 시대성을 살필 수 있는 미술품이 전해지고 있다.
공예 기술의 진보도 빠뜨릴 수 없다. 동조품(銅造品)으로는 산동성 출토의 동제등잔과 하북성 만성현 출토의 등잔이 있는데 모두 인물상을 수반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특히 하북성 출토의 '장신궁등'은 한대(漢代)에 동조 인물상의 제작 기술이 높았음을 보여준다.
한(漢)대에 전하는 그림들은 모두 지하무덤에서 출토된 분묘미술이다. 따라서 무덤 안을 장식했던 벽화나 화상석, 화상전이 주요 미술품인데 회화적 표현법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지상의 것과 큰 차이는없다.
표현된 내용들은 신화와 역사적 사실, 고사, 일상생활, 유교적 주제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산둥 지방의 화상석에 표현된 인물이나자연 묘사는 그야말로 고식의 미를 한껏 보여준다.

 

 

4. 위(魏)·진(晋)·남북조(南北朝) 시대
삼국(魏·蜀·吳)시대가 지난 뒤 위(魏)가 천하를 통일하고 뒤이어진(晋)도 나라를 세웠지만 이민족의 압박에 의해 천도를 이전하여천도 이전을 서진(西晋), 천도 이후를 동진(東晋)이라 했다.
이시대의 미술은 한나라와 수·당의 전환기로서 서역적 요소가 적어지고 중국적 요소가 풍부한 과도기의 성격을 가졌다. 중국의역사가 정착기로 접어든 시기는 이 시대이며, 페르시아, 간다라 등 서방 문화의 영향까지 받아 미술의 성격이나 양식에도 많은 변화를가져왔다.
 
(1)위(魏)·진(晋)·남북조(南北朝) 시대 건축과 조각
불교 석굴이 외래 문화의 영향에 의해 발생된 것도 이 시기이다.
석굴의 조각이나 회화 중에는 제작 당시 건축의 외관이나 세부를 보여주는 것도 있는데 특히 원강(雲崗), 룽먼(龍門), 둔황(敦煌)등대규모 석굴불이 유명하다. 이 석굴불을 통하여 불교 조작과 불교벽화 부문에 서 많은 유품을 남기고 있다.
 
(2)위(魏)·진(晋)·남북조(南北朝) 시대 회화와 공예
회화는 타율적인 제약에서 해방된 문인화라는 양식을 낳았다.
이 시대에는 현실을 초월한 노장의 사상이 유행하여 사실(寫實)을 초월한 추상적인 동양화의 선을 강조하였고, 산수화를 발전시켰다.
이 때의 회화는 기존의 원시적인 상하법을 대신하여 대상을 내려다보는 부감법이 성립하고, 깊이 있는 공간 구성이 가능해졌다. 공간 처리가 분명해지고 인물도 자연스럽게 표현되기 시작한다. 아직 전경, 중경, 후경 사시에 자연스러운 진행이 없고 크기나 비례가 잘 맞지 않으며 인물들에도 개성 표현이 없는 등 고풍스러운 표현을 간직하고 있다. 주제상으로는 기존의 유교와 도교에 새로 들어온 불교가 주 배경이 되며 신화적인 색채는 퇴조한다.
한말의 서화를 겸한 사대부 화가가 출현해서 필선만으로 그리는 백묘화(白描 )가 창시되었고 문학적인 제재를 즐겨 채택하였다. 처음으로 산수화를 그리고 인물화를 특히 잘 그렸던 고개지(顧愷之)는 「여사잠도권」을 남겼고 산수화에 있어서의 시각적 현상에 주목하였다.
그는 신기론(神氣論)이란 화론(畵論)을 펴 사혁(謝赫)과 함께 동양 회화의 원류가 되었다.
남제(南齊)의 사혁(謝赫)은 「고화품록(古畵品錄)」이란화평(畵評)에서 회화의 근원이 되는 육법(六法)을 논하였다. 송병(宋炳)의 산수화는 고개지에 비해 솔직하고 간명하며, 그가발견한 '지척천리(咫尺千里)'라는 투시 원근법은 서양보다천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위(魏)·진(晋) 시대의 서예는 예서에서 해서로 이동하는 전환기였다. 동진(東晋)에서는 행·초서가 성하였고 왕희지 부자가서체를 완성하였다.
 
4.수(隋)·당(唐) 시대

중국의 수(隋, 581∼618)는 비록 3대 38년만에 단명한 왕조였으나, 오랫동안 남북으로 갈라졌던 중국의 통일을 추진하고 후세까지 남는 대사업을 시작하여 뒤이은 당의 번영에 기반을 이룩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1)수(隋)·당(唐) 시대 건축과 조각
건축이나 조각은 인도 계통의 영향이 보인다.
당의 수도인 장안에는 수나라 때 조성된 대흥궁 외에 삼내(三內)라하여 세 군데의 궁전 즉 태극궁과 황제가 상주했던 대명궁 그리고 홍경궁이 있었다.
수나라때는 문제가 즉위하자 불상을 많이 만들거나 수리하였다. 수나라때 유물로는 용문석굴의 약방동 본존과 양협시 보살, 제남 옥함산 불곡사의 수상등이 있다.
견고한 석재 구성으로 웅장한 얼굴과 체격이 특징이다.
남북조의 양식을 이어받은 수나라의 조각은 당나라 시대에들어서자 서역풍을 종합한 예술로 발전하여 소상(塑像)이 유행하였다. 불상은 팔다리와 몸의 균형이 좋고 반투명에 가까운의상으로 관능미를 나타내었으며, 육조시대의 똑바로 선 자세가움직이기 시작하였는데, 한쪽 발에 중심을 두고 허리를 약간틀어서 가슴에서 허리로 흐르는 원만하고 유려한 곡선미를 나타내고 있다.
초당 전기에는 장안에서 만들어진 명문이 있는 석불좌상이 있는데 동그스름함과 부드러운 당대의 특징이 나타난다.
석굴의 조각이 아직 남아 있고, 목조각, 도상(陶像), 소상(塑像)등이발달하였다.
 
(2)수(隋)·당(唐) 시대 회화와 공예
수나라는 회화에 있어서도 남북을 통합했다.
북조계의 화가가 남조의 양식을 흡수한다는 화북 중심의 통합이었다.
수에 이어 대제국이 된 당은 외국 미술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제적 색채가 풍부한 화풍을 낳았다. 전기에 전래된 헬레니즘의 흐름을 섭취한 굽타조 양식의 인도미술과 사산조양식의 이란 미술이 중국인에게 형사(形寫)라 불리는 새로운자연주의와 표현 기법을 가져다주었다.
이 시기는 중국 회화의 독자성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시기이며 중국미술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다. 인물, 도석, 산수, 화조가 많이그려졌으며 각기 개성적인 표현을 하게되어 각각의 유파로 발달하게 된다. 즉 남화, 북화의 개념이 확립된다.
당나라의 회화는 외래양식을 소화하는 한편 고유의 전통 양식과 융합한 이른바 종합성을 가진 회화 예술을 완성하였다.
당나라 시대에 처음으로 수묵화풍이 발생하였는데 이것은 남종문인화의 출발을 뜻한다. 초당(初唐)의 대표적 화가인 염입본(閻立本)은
「역대제왕도(歷代帝王圖)」 「직공도(職貢圖)」로 유명하다.
후기 회화의 특색은 외래 영향의 중국화와 전통의 존중인데,그러한 경향은 전기의 후반에 보인다. 사녀화, 화조화나 묵화는 측천무후 시대에 시작되고, 성당기에는 천재화가 오도현(吳道玄)이 백묘화를 부흥시켰고, 그에 입각하여 회화의 지도이념인 사의를 제창했다. 또 오도현(吳道玄)은 당대의 대표적 화가로서 불교,도교에 관한 것을 많이 그렸고, 이러한 필법이 오가풍(吾家風)이라 불리며 당대를 풍미했다. 이른바 '산수의 변혁'을 창시하여산수·수석화를 자연주의의 계열에 편입시켰다.
이사훈(李思訓)은 북화의 시조이며, 귀족적 묘법으로 금벽청록(金碧靑綠)의 산수로 유명하다.
후기의 산수화가는 수묵산수화 발전의 기초를 세운다. 특히왕유(王維)는 남화의 시조이며, 남방의 풍경을 주로 초속적인 태도로 그렸다. 선담(渲淡)의 묵법이라 하여 수묵의 멋을 십분살렸으며, 대상의 묘사보다 정감 어린 운치를 주관적으로표현하였다. 사녀화, 화조화, 산수 수석화는 공적인 목적보다 사적인 감상에 봉사하는 경향이 강한 분야이고, 후세에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수·당의 공예양식은 한나라의 제도를 답습했다.
당나라 시대의 미술 중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공예이며 그 중당경(唐鏡)과 같은 금속공예가 유명하다. 도자기 공예가발달하였고 특히 당삼채(唐三彩)가 유명하다. 유약의 변화에의하여 기물에 나타난 도안의 묘미는 현대 회화의 비구상적 표현양식과도 공통된 점을 보이고 있다.

 

 

5.송(宋)
송대는 북송시대(960∼1126)와 남송 시대(1127∼1279)로 나뉘어진다.
북송시대는 오대(五代)의 문화를 이어받아 요(遼)와 대립하고, 남송시대는 양자강 이남의 문화를 주체로 하여 금(金)과 병립하였다.
원래 중국의 회화는 도교적이거나 불교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송대에는 이러한 불교 도덕에서 해방되어 자연으로 돌아가 순수한 회화로 독립하게 된 시기이다.
 
(1)송(宋) 시대 건축과 조각
선종의 진출로 인하여 예배불상을 중시하지 않는 국가의 불교정책에 힘입어 북위(北魏)로부터 수와 당에 걸쳐 번성했던 석굴과 석불의 조상(造像)은 거의 없어졌다. 송 시대 조각의 특색은 당시불교의 서민성을 보이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유행하였다. 친근감있는 휴머니즘의 표현으로서 현실적인 여성미를 나타내었다.
 송(宋), 요(遼),금(金) 시대의 조각은 완전히 당(唐)의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우아함과 자유스러운 수법이 다소 늘어났으나 웅대함과 숭고함을 상실하여, 점차로 비속하고 섬약함에 빠졌다.
 
(2)송(宋) 시대 회화와 공예
중국에서는 '육조(六朝)의 서(書), 당(唐)의 시(詩), 송(宋)의화(畵)'라는 말이 있다. 화원이 융성한 것은 송조가 최고였으며, 한림 도화원을 설치하고 화인을 우대하였다. 북송말의 휘종과 남송초의 고종은 궁정예술가를 양성하여, 송나라의 예원을 크게 번성시켰다. 문인화예술 풍조가 유행하여 소동파(蘇東坡)와 미불과 같은 이름높은사람이 나타났다.
북송 시대에는 오대에 이어 형호와 관동의 뜻을 따르는 화가들이 많이 나타나 화북 산수의 황금시대가 도래한다. 전통적 사실주의와 신흥이상주의의 2대 화풍이 성행하였다. 전통적 사실주의는 앞 시대의 전통을 지키면서 대상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표현하는 원체화풍의 화조화와 북송 화풍의 산수화를 연결시켜 나갔다. 이는 자연을 합리적으로 포착하여 그 속의 생명감과 인간을 이어주는 자연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신흥 이상주의는 기성 형식에 거리낌 없이 마음의 이상을 자유로이 표현하는 문인·사대부·승려 등 재야의 비전문적 화가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수묵 담채화풍의 화자와 사군자, 남종문인화풍의 산수화를 아울러 성립해 나갔다. 그들의 화풍은 자연을단순하게 추상화하여 수묵화의 형식으로 이상적 세계를 개척하려했다.
이러한 양대 양식은 원말사대가를 거쳐 이사훈(李思訓)과 왕유(王維)를 시조로 하는 이른바 남북 2대 화파를 형성하게 된다. 이성의 뒤를 이어 범관, 곽희, 허도녕과 같은 화가들에 의해 더욱 다양한 화북 산수화가 나타났다.
곽희(郭熙)는 11세기 산수에 능하였으며 고원, 심원, 평원의 삼원 화법을 주장하였다. 이는 중국 회화에 있어서 원근법의 시초이다.
또 허도녕의 「추강어정도(秋江漁艇圖)」는 걸작으로 꼽힌다. 그의 그림에서 치솟은 산의 기상과 필력은 화북 산수의 백미라 할 수 있다.
강남에 자리잡았던 남송에서는 화원을 중심으로 강남 지방의 경치를 주로 그리는 직업 화가 화풍이 성행하였다. 주변 경치에 어울리는 화법을 쓰다보니 자연히 강남 산수풍의 소경(小景)산수로 회화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휘종은 제왕 화가로서 유명하다. 섬세하면서도 강한 필선으로 그린 휘종의 산수화풍은 후기의 대표적 산수화가인 마원(馬遠)과 하규(夏珪)의 예술을 낳은 원류가 되었다.
마원은 이당(李唐)의 화법을 흡수하여 자기류의 화풍을 성립시킨 화가이다. 그의 산수화풍은 일본 산수화에 영향을 주었고, 조선초기 이상좌, 강희안에도 미쳤다. 하규, 이적은 용필과 용묵이뛰어나고 각기 개성적이다.
목계는 문인화의 명수로서 당대의 대표적 화가이다. 선종 승인답게 번잡한 것에서 벗어나 마음 속의 것을 일필로 표현하였다. 그의「소상팔경도」는 기존의 준법이나 필법을 따르지 않고 간결함과 상징성으로 표현하여 한 차원 높은 수묵의 미를 살리고 있다.
송대는 중국 도자기 예술의 황금기이며 청자, 백자, 적회등 명기가 많다. 그 밖에 회고려(繪高麗)는 흑갈색 무늬가 주는 이국적 감각을 풍긴다. 당삼채(唐三彩)의 영향을 받은 송삼채(宋三彩)도 있다. 송대의 자기는 우리 나라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6. 원 시대
원은 무력으로 한민족을 정복하였으나 예술적인 독창력은 없었으므로 송의 예술을 그대로 계승하여 다음 대인 명(明)에 계승하였을 정도이다. 
 
(1)元시대의 회화와 공예
회화는 시대 양식으로서 간단하게 추출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함을 보여준다. 이런 양식, 형식의 혼란은 명시대의 절파, 오파, 원파등을생겨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원 초기의 산수화는 고극공(高克恭), 조맹부(趙孟賦)등에 의한 복고운동에서 시작되어 주로 북송 산수화가의 양식과 묘법이 연구되었다.
그러나 북송 산수화풍의 양식이나 묘사 형식을 적당히 취해 화면을 구성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는 잃어버리고 형태나 기법에 대해지나친 편집 경향만 띄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황공망(黃公望), 예찬(倪瓚), 오진(吳鎭), 왕몽(王蒙)등을 원 때의 4대가가 배출되기 전까지 계속된다.
원사가(元四家)는 오대의 동원, 복송의 거연에 기초를 두고 발전하여 필묵을 중시하고, 서법과 시문을 결합하였다. 이는 원래산수화의 주류로 명·청 양대에 걸쳐 영향이 지대했다.
원나라 시대 도자기의 경향은 전통적 사실풍에서 벗어나 비정통적사의풍(寫意風)으로 흘러갔다.

7. 명·청 시대
명대는 4세기 이상에 걸친 북방민족으로부터 해방되어 한민족의지배가 부활된 시기이다. 명은 몽고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거대한 벽돌을 사용하여 만리장성을쌓았다. 오늘날에 보는 만리장성은 명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1) 明 시대 건축과 조각
명조 300년은 건축이 발달하여 특히 궁궐 건축이 훌륭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베이징의 자금성이다. 베이징의 자금성과 태묘(太廟)는 명대 초기의 웅혼한 기풍을 잘 보여주고 있으나 많은 건축이 청대에 들어 대수리되었다.
불교 신앙은 일반 민중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갔는데, 목조천의관음상, 대원 숭선사의 소조 천수관음상, 봉성사의 나한상,칠금목조좌불은 대표적인 작품이다.
15,16세기의 것으로 북경 서산 와불사의 청동 석가열반상, 북경서산 벽사의 소조 좌불오존상, 십팔나한상이 있다.  이 시대에는 명대 초기의 위엄이 친근감있게 변하면서 사실적작풍으로 변한다. 
 
(2) 靑 시대 회화와 공예
초기의 화단은 남화 일색의 전성 시대를 이루었으나 전체적으로 내리막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기법은 섬세하나 약하고 주제는 산수는 화조와 사군자로 바뀌었다.
그러나 나름대로 독창적인 화법과 사고로 그림을 그린 왕시민, 왕감, 왕휘 그리고 명승으로 그림으로 잘 그린 팔대산인, 석계,석도등이 유명하다.
석도는 전통을 따르기보다는 실경산수를 많이 그렸다.
황산을 그린 여러 장면에는 실제의 경치에 충실하기보다는회화적으로 아름다운 구도와 먹과 멋진 조화를 이룬 담채등 무한한 변형이 이루어진다.
석도의 친구였던 팔대산인도 분출하는 창의력을 작품에 담았는데 「성난 물고기」나 「두 마리의 까투리」등을 보면 산수보다는 화조, 영모등 분야에서 재미있는 작품을 많이 남기고 있다. 그는 필력이 날카롭고 핵심을 잘 포착하여 후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중기 화단은 산수화보다 화훼, 영모 등의 화조화에 치중되었고, '양주팔괴(楊洲八怪)' 라는 괴이한 작가들은 독창적인 화풍을 보였다. 청말의 임백년, 오창석, 오역등도 좋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7. 중국 근·현대 미술 中國 近,現代 美術
중국 근대 회화는 청의 말기부터 시작되는데 그 때 궁정화가가 화단의 중심이었던 풍토에서 벗어나 각지에서 유력한 화가의 배출을 기다리는 상황이 출현하였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 제일의 개항 도시가 된 상해에서는 화가들이모여들었는데 여기에서 조지겸(趙之謙)과 임이, 오창석(吳昌碩)이있다.
임이의 영향은 청말부터 민국 초기에 걸쳐서 상해 화단 전반에나타났으며 오창석의 영향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20세기 전반에 전통 화풍을 새로운 시대에 접목시긴 화가로는 제백석(齊白石)과 황빈홍(黃賓虹)이 있다. 북경의 화단에서 명성을 얻은 제백석은 팔대산인과 석수, 오창석등의 감화를 받으며 독특한 화풍을 수립하였다.
미술학자이기도 했던 황빈홍은 당송 시대 회화의 깊은 맛을 살린 산수를 그렸다.
이밖에 20세기 전반의 동향으로는 노신(魯迅)의 제창으로 이루어지는 목각화 운동, 대중과의 의사 소통을 주안점으로 한 새로운 중국 회화로의 방향도 주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