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이승에서 꿈꾸기

『치즈와 구더기』- 종속 계급의 문화

草霧 2013. 2. 8. 00:00

 

치즈와 구더기- 종속 계급의 문화

 

미시사란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일반화시키고 뭉뚱그려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을 짚어보면서 그 속의 역사적 의미를 찾는 분야라고 볼 수 있다. 본서는 메노키오라는 사람에 대한 기록을 이용해서 그 사람의 인생을 글로 완성시켜 나가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예전의 기록이 모든 것을 보여주지는 않으므로 많은 부분 저자의 상상력과 능력으로 메워 넣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소설과도 같은 성질을 가진다. 또한 이 책은 소설 같은 역사서일 뿐 아니라 추리소설이기도 하다. 서문에서도 그렇듯 이 책은 문학과 역사의 가운데에 위치한 책이라 한다.

 

본서는 메노키오가 이단적인 사상을 가지게 된 계기와 종교재판을 받는 상황을 묘사해놓았는데, 메노키오의 발언은 두 가지 목적에 의해서 자꾸 모순을 일으키게 된다. 첫째로는 자신의 생각을 마을 사람들이나 재판관에게 이해시키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계속 믿어왔던 기독교로부터 내쳐지고 싶지 않은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가지 상충되는 바람으로 인해 그의 발언은 재차 번복된다. 저자는 메노키오의 이런 언행과 거기에서 생겨나는 모순을 심도 깊게 파악하였다. 또한 그는 보통의 농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고차원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으며 사상에 대한 굶주림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식인이라고 하기에는 모자란 점이 많았다. 그는 지식인들처럼 책에서 정보를 얻었고 민중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기기보다는 말로 전파하며, 기본적으로 수탈당하는 농민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지식인도 전형적 농민의 모습도 아니었기 때문에 숱한 반목을 거듭하였다.

 

메노키오에 대한 재판이 이례적으로 길어진 이유는 아마 그가 자신의 사상을 교회의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들이 흥미를 가졌을 수도 있을 것이고, 자꾸 모순되는 증언들로 인해 그가 교화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바로 처형시켜야할 사람인지 판단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1차 재판에서는 주홍글씨같은 낙인을 찍고 마을을 벗어나지 않는 조건으로 풀려나지만 2차 재판에서는 결국 사형에 처해진다. 어찌 보면 그가 시대를 앞서나가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으나. 그 시대를 거시적으로 봤을 때 그는 절대 주류가 아니었다. 그래서 아마도 많은 역사책에서는 이런 부분이 많이 생략되고 있는 것이다.

 

메노키오가 논쟁의 쟁점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의 큰 역사적 사실, 즉 인쇄술의 발명과 종교개혁을 들 수 있다. 인쇄술은 메노키오에게 그의 문화적 배경인 구비 전통과 서적들을 비교할 수 있는 가능성과 자신에게서 생겨난 여러 사상과 환상들이 뒤섞인 것을 풀 수 있는 언어를 제공하였다. 또한 종교개혁은 메노키오 자신이 바란 대로 교황, 추기경, 그리고 영주들에게 스스로의 견해를 직접 피력할 수는 없었지만, 마을의 신부와 주민들 그리고 이단 심문관들에게는 이를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기록문화에 대한 지배계층의 독점과 종교문제에 대한 성직자들의 독점이 종식되면서 드러난 거대한 단절이 강력하게 표출되는 상황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층 계급의 문화에 속하는 일부 인물들의 열망과 민중문화에 속하는 이들의 열망이 일치될 가능성은 반 세기 이전 마르틴루터가 봉기한 농민들과 그들의 요구를 비난한 당시에 이미 결정적으로 봉쇄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그 이후에도 재침례교도들 처럼 박해받은 일부 소수만이 추구하였다. 카톨릭교회에 대한 대항, 종교개혁, 동시에 교회 내부의 위계질서의 경직화, 대중에 대한 가부장적 교화, 민중문화의 소멸, 소외된 소수와 이단 집단들에 대한 폭력적인 배제 등으로 특정 지어지는 시대에 변화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던 메노키오158251세의 나이에 이단 혐의로 피소되고, 이후 투옥과 방면을 여러 번 반복하다가, 급기야는 1599년 말 화형을 당하였다. 그는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신성, 마리아의 처녀성, 교황과 교회의 권위를 부정할 뿐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 그리스도, 천사 그리고 인간까지 모두 혼돈 속에서 창조되었다는 자신만의 우주 생성론을 주장하였다. 이와 더불어 그는 성직자의 역할이 실천적이고 교육적인 데 있어야 하는데, 당시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직책을 남용하여 가난한 농민을 착취한다고 비난하였다.

 

메노키오는 카톨릭의 교리가 가르치는 대로 세상과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태초에 모든 것은 흙, 공기, 물 그리고 불이 뒤섞여 있는 혼돈이었다. 이 혼돈으로부터, 마치 우유에서 치즈가 만들어지듯, 물질 덩어리가 형성되어 구더기가 나타났는데 이것이 천사라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 치즈와 구더기는 앞서 언급했던 메노키오의 우주관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메노키오의 이러한 생각은 그 당시 로마카톨릭의 관점에서 볼 때 이단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가 논쟁의 쟁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읽고 쓸 줄 알았으며당시 접할 수 있었던 책들을 읽고 스스로 이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본서의 핵심은 저자가 메노키오를 통해서 그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런 과정에서 진즈부르그는 메노키오가 읽은 문헌을 살펴봄과 동시에 그 당시 그에게 영향을 끼쳤을 여러 종파와의 관계를 분석하였다. 그러나 메노키오는 당시 마르틴 루터의 사고를 그대로 수용한 것도 아니며, 그가 읽은 책들이 자신을 심문한 재판관과 똑같었을지라도 나름대로 독특하게 해석하였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메노키오의 독자적 사고방식은 지금까지의 역사학이 경미하게 치부한 민중문화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주인공의 이단적인 사고와 독창성은 개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 같은 사고를 가능하게 한 지속적이고 심층 구조적인 민중 문화가 뒷받침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저자는 메노키오의 재판 기록에서 찾아낸 것은 사료상의 진실 여부가 아니라, 사료의 담론 속에 억압된 민중 문화이다.

 

저자가 메노키오라는 주인공을 통해 민중문화의 구조를 탐색하는 방법은 이른바 실마리 찾기혹은 정황적 실례로서 사료를 정황 증거로 삼아 역사의 진실을 규명해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주변적이고 무관해 보이는 세부적 특징들에서 전체 구조체와의 연관을 추론해나가는 방식이다. 저자의 이러한 방식은 미시사의 주요 특징으로 부각된다. 미시사의 전제는 보통 사소하고, 부차적이라고 생각되는 세부사항들이 보다 높은 차원에 도달하도록 해주는 열쇠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한 시대의 역사현실에 대한 전체적 시각을 갖기 위해서는 보는 대상 자체도 부분이 아닌 전체이어야 한다는 것으로, 작은 것이나 일상적 현상으로부터 전체와의 연관관계나 본질적인 구조들을 발견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직접 경험할 수 없는 복잡한 현실을 구성하는 상상력이 역사가들에게 요구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산업화 이전의 유럽에서는 피지배계층 즉 종속 계급의 문화처럼 구전 전통에 의존해야 하는 문화는 흔적을 남기지 않거나, 그 흔적들이 변형된 형태로 존재 할 뿐이었다. 따라서 메노키오 사건과 같은 제한적인 사례에는 하나의 징후적인 가치가 존재한다. 그 가치는 지금에서야 비로소 그 중요성이 인식되기 시작한 한 가지 문제를 강력하게 시사한다. 즉 이것은 중세와 중세 이후 유럽 상류층 문화의 상당한 부분에 걸쳐 퍼져있는 민중적 기원에 대한 것이다.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새로운 노력은 유럽의 각지에서 서로 다른 형태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농촌에 복음을 전하려는 예수회의 노력과 신교 즉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형성한 가족단위의 종교 조직화는 하나의 단일한 경향으로 집중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에 따라, 탄압차원에서는 마녀 재판이 강화되고 부랑자와 같은 소외 집단들에 대한 통제가 엄격하게 실시되었다. 메노키오의 사례는 바로 이러한 민중문화의 말살과 탄압을 배경으로 벌어진 사건이었다.

    

메노키아가 읽은 모든 책의 목록은 알 수 없으나 그가 체포된 당시에 이단 심문관의 대리인은 그의 집을 수색하였고, 그 과정에서 몇 권의 서적들이 발견되었지만 의심이 가거나 금지된 서적들이 아니었기에 목록이 작성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읽은 책들의 목록과 재판과정에서 언급된 서적들의 다음과 같다.

 

1. 속어로 씌어진 성서, 2. 성서의 약술기, 3. 성모의 루다치리오또는 성모의 로사리오, 4. 성인들의 전설, 5. 최후심판의 역사, 6. 맨더빌의 기사, 7. 잠폴로, 8. 연대기 보유, 9. 마리노 카밀로 데 레오나르디시스가 페사로 시에서 저술한 이탈리아의 曆書,10. 검열을 받지 않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11. 한 증인이 코란이라고 증언하였지만 제목과 저자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책. 本書 12. 서적 편(P.129~133)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