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시대와 청교도주의, 독립혁명
15세기 말 포르투갈이 인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여는데 성공한 이후 스페인이나 프랑스 영국 등 여타 유럽강대국들도 이에 동참하였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지나 신대륙을 발견하였고(1492~1504) 이것은 중남미의 대서양 연안 지대를 탐사한 아메리고 베스푸치에(1499~1501) 의해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스페인은 이 지역으로 진출하여 멕시코(1519~1521), 페루(1532)를 정복하여 중남미 지역은 스페인의 영토가 되었다. 또한 스페인은 북미에도 탐험대를 부내 플로리다부터 미시시피 강에 이르는 지대와 멕시코부터 캔자스에 이르는 지대를 탐사하여 스페인의 영유권을 선포하였다. 이러한 스페인의 활동은 절대왕정체제의 과도기에 있던 영국과 프랑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스페인에 이어 신대륙의 탐험과 정복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튜더왕조를 창건한 영국의 헨리7세는 존 캐벗을 신대륙에 파견하여 뉴펀들랜드부터 체서피크 만에 이르는 북미의 대서양 연안 일대를 탐사하여(1497~1498) 영유권을 주장하였고, 프랑스는 자크 카르티에를 파견하여(1534) 미국과 캐나다 사이에 흐르는 세인트로렌스 강 일대를 탐사하여 캐나다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하였다. 16세기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 또한 이런 탐사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영국인 헨리 허드슨을 보내 찾은 뉴욕 지방의 강을 찾아 허드슨 강이라 칭하고 이 강 어귀에 뉴 암스테르담을 건설하여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16세기 후반 헨리 8세의 절대왕정 확립과 종교개혁의 분쟁 이후 그의 딸 엘리자베스가 즉위하여 반세기 동안 방치되었던 신대륙 진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험프리 길버트 경의 건의를 받아들여 신대륙의 식민사업 착수를 허가하였지만 뉴펀들랜드(1578~1583)와 노스캐롤라이나(1584~1587)의 식민지 건설에 실패하였고 다시 1606년 함께 뜻을 모은 귀족, 젠트리, 상인들이 북아메리카 식민지 건설 사업을 국왕 제임스 1세에 허락을 받아내서 런던회사와 플리머스 회사를 조직하였다. 런던회사는 1607년 104명의 이주민을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으로 식민지를 만들었고 초창기의 시행착오와 위기를 거쳐 점차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플리머스회사 또한 처음 메인지방에 식민지를 건설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회사의 권리를 뉴잉글랜드회사에 넘기게 되었다. 이때 제임스 1세의 비국교도 탄압정책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에 망명했던 청교도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하여 런던회사를 통해 케이프 코드에 상륙하여 정착하였다.
이후 약 100년이 지나 영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북미의 식민지는 모두 13개가 되었다. 북부에는 청교도가 주체가 된 매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코네티컷 하트퍼드 뉴헤이번 등이 있으며, 중부에는 뉴욕, 뉴저지, 펜실베이니아, 델라웨어, 남부에는 버지니아, 메릴랜드, 캐롤라이나 조지아 식민지등이 있었다.
영국의 초기 식민지 정책은 국왕의 권한은 강력하고 식민지에서 상, 하 의원으로 구성된 의회가 있었지만 그 권한은 별 볼일 없었다. 이러한 의회의 권한은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을 거치는 동안 강화되었지만 국정참여의 권리가 있는 것은 귀족과 상층시민들 뿐이라는 그 한계는 넘어서지 못했다. 명예혁명 이후 1696년에는 영국의 모든 식민지를 관할하는 통상식민원이 설치되어 식민통치에 대한 정책을 건의하고, 본국 의회의 법률을 시행하였기에 이곳에 종속된 식민지 총독은 행정, 사법을 장악하여 총독과 식민지의회 사이에 잦은 마찰이 생기게 되었다.
식민지에 대한 영국의 경제정책은 중상주의에 바탕을 두고 본국의 경제적 이익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식민지의 항해, 통상, 공업에 대해 여러 가지 제약을 가하였다. 하지만 1733년에 제정된 당밀법이나 제조 공업법을 보았을 때 이러한 법이 식민지의 경제성장을 억제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고 나름대로 식민지 경제발전에 유리한 면도 있었으며 또한 1721년 이후 영국의 재상 로버트 월폴의 ‘유익한 태만’ 정책 하에 식민지는 발전을 해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인의 90%가 농업에 종사하였기에 식민지 경제 기반은 당연히 농업이었으며 이는 기후나 지형, 토지정책의 차이에 따라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발전하였다.
식민지 사회에서의 대지주와 대상인은 영국의 ‘귀족’같은 지위를 차지하여 정치, 경제적으로 주도적 역할을 하였지만 중산층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성직자들이나 법률가들도 사회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식민지 사회가 영국사회와 구별되는 큰 특징은 계급의 유동성이었는데 계층 간 차이는 유럽처럼 고정불변한 것은 아니었기에 능력에 따라 사회의 하층에서 상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었다.
식민지 시대에는 인디언들이나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에 직, 간접적으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식민지인과 인디언의 전쟁은 1622년 버지니아에서 최초로 일어났다. 이후 1643년 매사추세츠, 플리머스, 코네티컷, 뉴헤이번 등 4개 식민지가 뉴잉글랜드연합을 결성하는 등 수십년에 걸쳐 전쟁이 일어났지만 이보다도 더 강력한 적은 캐나다로부터 5대호 지방을 거쳐 미시시피 강을 따라 세력을 뻗친 프랑스였다.
이들은 영국과는 달리 인디언들과 우호적은 관계를 맺고 이들과 규합하여 영국의 식민지를 수시로 습격하는 등 안전을 위협했고, 유럽에서 아우크스부르크 연맹전(1689~1697)이 일어나 식민지에서도 결국 윌리엄 왕 전쟁(1689~1697)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영국은 위트레흐트 조약에 의해 노바스코샤와 뉴펀들랜드 및 허드슨만 일대의 지방을 확보하게 되었다. 또한 영국은 조지아 식민지와 플로리다 지방의 경계분쟁에 의해 스페인과 젠킨스의 귀 전쟁(1739~1742)을 벌이게 되었다. 이후 유럽에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이 일어나자 프랑스는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조지 왕 전쟁(1744~1748)을 일으켰으며 전후 프랑스와 인디언 연합전쟁(1754~1763)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1760년 이후 왕권강화를 하고 있던 조지3세의 영국은 식민지와의 이해관계에서 40여년 동안 유지해왔던 ‘유익한 태만’ 정책을 버리고 중상주의 정책을 강화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생긴 본국과 식민지간의 잦은 충돌들은 영국과 식민지를 서서히 분리시켜 나갔다.
1764년 제정된 설탕법이나 통화법, 인지세법, 병참법, 타운센드법 등은 식민지의 반발을 크게 샀으며 결국에는 영국상품 불매운동을 촉발시켰고 이에 따라 영국에서도 상공업자들이 경제적 피해를 입게 되어 본국에서 또한 이러한 법들을 반대하는 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 1773년 제정된 차세법이 식민지에서 엄청난 반발을 사게 되었고 결국에는 보스턴 차 사건으로 인해 다음해 영국정부는 식민지에 보복한다는 탄압법을 발표하였다. 이 법은 보스턴항구 폐쇄법, 사법행정법, 매사추세츠 통치법, 병참법 등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제정된 퀘백법은 식민지인들에게 서부로의 진출을 막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조지아를 제외한 12개의 식민지로부터 55명의 대표가 그 해 9월에 필라델피아에 모여 영국의 보복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고 이 회의를 제1차 대륙회의라 칭한다.
영국의회는 다음해 2월 식민지를 반란 상태로 여겨 증원군 파견을 국왕에게 건의 했으며 그해 4월에 영국군과 매사추세츠 민병대가 충돌하여 미국 독립전쟁에 돌입하게 되었고 첫 교전은 식민지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후 벙커힐 전투와 보스턴 포위 작전을 거치면서 보스턴에 주둔해 있던 영국군과 친영 인사들을 캐나다로 퇴각시켰고 이런 와중에 13개의 식민지는 각자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였으며, 1776년 7월 정식으로 독립선언서를 공포하였다.
독립전쟁이 지속되던 중 프랑스와 스페인의 개입과 유럽에서는 영국해군의 해상봉쇄작전으로 피해를 입은 나라들의 무장중립동맹으로 영국이 국제적으로 고립되었고 결국엔 1781년 10월 버지니아의 요크타운에서 영국군에게 승리를 거두었고 1783년 9월 3일, 비로소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이른바 파리 조약을 거쳐 완전한 독립을 인정받게 되었다.
미국은 전쟁에 보급하기 위한 곡물이나 군수물자에 대한 수요가 전쟁 이후 확연히 줄어들게 되자 불경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러한 불황 속에서 연합회의의 무능으로 인해 뉴햄프셔에서 폭동이 일어나는 등 무질서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국민 일부에서는 연합회의 대신에 새로운 중앙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연합헌장을 폐기하여 만든 새로운 헌법의 비준을 통해 새로운 중앙정부가 세워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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