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용어 해설 2
위화도 회군(威化島 回軍) 고려 말 우왕 14년(1388) 5월, 요동 정벌의 명을 받고 출병했던 이성계(李成桂)가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군대를 되돌린 사건. 명(明)이 쌍성 총관부 관할 밑에 있던 철령 이북의 땅을 그들의 직속령으로 만들겠다고 통보해 오자 최영(崔瑩) 등은 즉각 출병을 주장하였고, 이성계 등은 이른 바 4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워 반대하였다. 결국 최영등의 주장에 따라 요동 정벌군이 파견되었으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 일파를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그의 아들 창왕을 세웠다. 이 사건은 이성계 일파의 정치적․군사적 실권 장악과 고려 왕조 멸망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4불가론> 1.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함은 옳지 않다. 2. 여름에 군사를 일으킴은 옳지 않다. 3. 거국적으로 원정군을 일으킬 경우 왜구가 침입할 우려가 있다. 4. 장마철이라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 지고 대군이 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
신진 사대부 고려 후기 권문 세족의 횡포를 비판하면서 새로 등장한 사회 세력. 사대부(士大夫)란 사(士 교양인, 독서인)와 대부(大夫 관료, 관인 신분)의 합성어로서, 학문적 교양과 정치적 실무 능력을 갖춘 학자적 관료를 의미한다.
신진 사대부들은 대부분 신분적으로는 향리, 경제적으로는 중소 지주나 자작농 등 중간층 출신자들이었다. 그들은 구질서를 비판하는 진취적 성향이 강하였다. 권문 세족의 농장이 확대되고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면서 그들 신흥 관료들에 대한 토지와 녹봉 지급이 불가능해지자 자연히 신구 세력의 대립과 갈등이 심해졌다. 그들은 나중 위화도 회군 후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고, 이어 전제 개혁(과전법)을 통해 자신들의 생활 기반 및 새 왕조 개창의 경제 기반을 구축하게 된다. 신진 사대부들은 또 새로운 사회를 이끌어 가기 위한 이념적 기반으로서 성리학을 수용하였으며, 대외 정책에는 친명적이어서, 친원적인 권문 세족과 대립하였다.
신진 사대부는 최씨 정권 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공민왕 때 과거를 통하여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다. 그리고 공민왕이 권문 세족을 누르고 개혁을 시도할 때 그 측근 세력으로 참가하면서, 권문 세족과 대립되는 또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부각되었다.
공민왕의 개혁 정치가 좌절되고 우왕이 즉위한 후, 신진 사대부 세력은 고려 왕조 존속 하에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온건파와 역성 혁명을 주장하는 혁명파로 분열되었다. 그중 혁명파는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신흥 무인 세력과 농민 군사 세력을 끌여 들여 결국 고려 왕조를 타도하고 조선 왕조를 건설하는 주체 세력이 되었다.
대비원, 혜민국(大悲院, 惠民局) <대비원> 고려 시대의 환자 치료 및 빈민 구휼 기관. 수도 개경에 동․서의 양 대비원을 두었다. 그 임무는 환자의 치료가 주된 것이었으나, 주린 자와 무의탁자를 수용하여 옷과 음식을 주어 구휼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동․서 활인서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혜민국> 고려 시대 가난한 환자에게 무료로 약을 제공하던 의료 기관. 조선 시대에는 혜민서(惠民署)로 이름이 바뀌었다.
보(寶) 일정한 기금을 만들고 그 이자로 사업 경비를 충당하던 일종의 공공 재단. 공공 사업의 경비 충당이 목적이었다는 점에서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계(契)와 다르다. 고려 시대에 가장 성행하였다.
학교를 위한 학보(學寶), 빈민 구제 및 질병 치료를 위한 제위보(濟危寶), 팔관회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팔관보(八關寶), 불경 간행을 위한 재단인 경보(經寶)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취지에서 출발한 보(寶)였지만, 성종 때 최승로의 시무 28조에 보이듯이 이 보(寶)가 점차 고리대(高利貸) 사업으로 변질하여 민간 수탈의 폐단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민전(民田) 백성들이 조상 대대로 경작해온 사유지. 전시과의 토지가 국가의 관직에 복무하는 관료나 직역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지급한 수조지(收租地 조를 받는 땅)인데 반해, 고려 시대에는 이와 계통을 달리하는 광대한 민전이 있었다. 따라서 민전은 전시과와 함께 고려 시대 토지 제도의 근간을 이루었다.
민전은 사적 소유권이 보장되어 있는 토지로서 소유주는 양안(量案토지 대장)에 명시되어 소유권을 국가에 의해 보호받았다. 따라서 매매나 증여, 상속 등 토지의 관리 처분권도 소유주의 자유 의사에 맡겨져 있었다. 민전은 그 수확물의 일부를 국가에 조세로 납부해야 했으며, 국가 재정의 주요 부분이 이곳에서 거두어들이는 조세로 충당되었다. 민전의 수조율은 수확물의 10분의 1이었다고 이해되고 있다.
윤작법(輪作法) 같은 경작지에 일정한 연한 동안 몇 가지의 작물을 돌려짓는 농사법. 돌려짓기라고도 한다. 농업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에는 1년에 한 번, 한 가지 작물을 경작하고 한 해 또는 두 해를 쉬었으나(휴경하였으나), 점차 농업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고려 시대에는 2년 3작(2년 동안에 3가지 작물을 돌려지음)의 윤작법이 행해졌다. 이것은 2년 4작, 즉 이모작의 전단계라 할 수 있다. 이모작은 조선 초에 등장한다.
양명학(陽明學) 명(明) 대 왕수인(王守仁)이 완성한 유학의 한 학풍. 그의 호를 따서 양명학이라고 한다. 성리학이 선지후행(先知後行 먼저 알고 뒤에 행함)이라 하여 지나친 주지주의(主知主義)에 빠진 데 대해 양명학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내세워, 알았다고 하여도 행하지 못하였다고 하면 그 알았음은 참 앎이 아니니, 앎이 있다면 곧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지(知)와 행(行)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고 하면서 실천을 강조하였다. 양명학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고, 하나의 학파를 이룬 것은 17세기 말, 18세기 초의 소론 출신 정제두(鄭齊斗)에 의해서였다. 그는 강화도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여기서 강화학파가 성립되었다. 양명학은 한말 일제 시대 박은식(朴殷植), 정인보(鄭寅普) 등의 국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주자가례(朱子家禮) 송(宋)의 주자가 만든 가정의 의례서(儀禮書) 고려 후기 성리학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유교 의식의 보급을 위해 채택하였다. 즉, 재래의 각종 의례가 불교 의식에 입각한 것을 사대부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주자가례를 본떠 행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부모상에 3년상을 치르도록 하였으며, 가묘(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를 세워 조상에 대한 제사를 받들었다.
편년체, 기전체, 기사본말체(編年體, 紀傳體, 紀事本末體) <편년체> 사실(史實)을 연(年), 월(月), 일(日) 순서로 기록하는 서술 방식. 공자(孔子)의 "춘추(春秋)"가 그 효시이다. 송(宋) 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은 대표적 편년체 역사서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국통감(東國通鑑)", "조선 왕조 실록(朝鮮王朝實綠)" 등이 편년체 역사서이다.
<기전체>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 비롯되었다. 사기는 본기(本記 황제의 업적), 세가(世家 제후의 전기), 서(書 제도 문물, 후대에는 지 志로 바뀜), 표(表연표), 열전(列傳 각 분야의 저명한 개인의 전기)으로 구성되었다. 이중 본기(紀)와 열전(傳)만 있으면 기전체의 기본 요건은 갖추게 된다. 따라서 기전체는 인물 중심의 종합적 역사 서술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 바 정사(正史)는 반드시 기전체로 편찬되어야 했으며, 이에 따라 기전체를 정사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사기", "한서(漢書)" 등 25사가 기전체로 편찬된 정사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삼국사기"와 "고려사"가 이에 해당한다.
<기사본말체> 사건의 명칭을 제목으로 내걸고 그 사건과 관련된 기사를 모두 모아 그 사건의 발단과 결말을 기술하는 방법이다. 편년체가 사건 발생 연대순 기록이라면, 기사본말체는 사건 경과 중심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남송(南宋)의 원추(袁樞)가 쓴 "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이 그 최초의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 후기의 이긍익(李肯翊)이 쓴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이 이 체제로 쓰여졌다.
삼국사기(三國史記) 현존하는 우리 나라 역사서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으로, 고려 인종 23년(1145)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의 역사서이다. 이른 바 기전체(紀傳體)의 정사(正史)로서, 본기(本紀)․지(志)․표(表)․열전(列傳)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합리적인 유교 사관에 입각하여 역사를 서술하였다.
삼국유사, 제왕운기, 동명왕편(三國遺事, 帝王韻記, 東明王篇) 고려 후기에는 한국의 고대사를 자주적인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새로운 경향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무신 정변 후의 사회적 혼란과 대몽 항쟁의 위기를 경험한 지식인들의 민족적 자주 의식의 표현이었다. 고종 때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동명왕편과 충렬왕 때 일연(一然)이 저술한 삼국유사, 이승휴(李承休)가 쓴 제왕운기 등에 자국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강렬한 자각 의식이 나타난 것이 그것이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는 그 성격이 판이하였다. 즉, 사대적인 유교 사관에 입각하여 편찬된 기전체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에 비하여, 삼국유사는 불교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설화와 야사를 많이 수록하고, 특히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받드는 자주 의식이 간직되어 있었다. 이는, 제왕운기가 역시 우리 나라 역사를 단군으로부터 서술하였고, 또 동명왕편에서 동명왕을 고구려 건국의 영웅으로 추켜 올려 커다란 긍지를 가지고 서사시를 지은 것과 동일한 민족 의식의 표현이었다.
국자감(國子監) 고려 성종 11년(992) 개경에 설치한 국립 대학. 국자학, 태학, 사문학은 전공이 유학으로서 교과 과정은 같았으나, 입학자의 신분이 달랐다(귀족이나 행리). 율학, 서학, 산학은 전공이 각각 법률, 글씨, 산수 통계 등 기술학(잡학)으로서, 8품 이하의 관리 및 평민의 자제가 입학할 수 있었다.고려 국자감의 특색으로는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신분별로 입학 자격에 제한이 있었다. 둘째, 평민 자제도 입학이 가능하였다. 셋째, 기술학도 교육하였다. 말에 국자감은 성균관(成均館)으로 개칭되면서 유학만 교육하였고, 명칭과 교육 과정이 조선 시대로 계승되었다.
사학 12도(私學十二徒) 고려 문종 때 개경에 있었던 12개의 사립 학교 학생들을 말한다. 사학을 처음 일으킨 사람은 최충(崔沖)이었다. 그는 9재 학당이라 하여, 즉 9개의 전문 강좌를 개설하였다. 최충의 후학 지도가 탁월하여 많은 과거 합격자들을 배출하자, 이것이 당시의 유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켜 다른 고관들도 다투어 사학을 창설함으로써 이른바 사학 12도, 또는 12공도(公徒)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따라서, 귀족의 자제들은 국자감보다는 사학으로 몰리게 되었고, 관학 쇠퇴와 문벌귀족 세력의 강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서적포, 7재, 양현고(書籍鋪, 七齋, 養賢庫) 사학의 발달로 관학이 더욱 쇠퇴하자, 숙종, 예종 등은 여러 가지 관학 진흥책을 시도하였다. <서적포> 숙종 6년(1101) 국학(국자감)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국자감 안에 설치한 서적 출판소. 관학을 부흥시키기 위한 방책이었으며, 이 곳에서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7재> 예종이 국학의 진흥을 위해 국학 안에 설치한 전문 강좌로서, 최충의 9재를 본 뜬 것이었다.
<양현고> 예종이 국학에 설치한 장학 재단. 국학의 진흥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하였다.
주심포, 다포(柱心包, 多包) 고려 시대 목조 건축은 통일 신라 시대부터 사용되어 온 주심포 양식과 고려 후기 원나라로부터 도입된 다포 양식 등 두 가지가 혼용되었는데, 이 두 양식의 차이는 공포(拱包 지붕의 무게를 받치기 위한 짜임새)의 배치 방법에 있다. 주심포 양식은 기둥 위에만 공포를 짜 올리는 방식인데 반해, 다포 양식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짜 올리는 방식이다. 따라서, 주심포집은 지붕의 무게가 공포를 통해 기둥에만 전달되기 때문에, 자연히 그 기둥은 굵고 배흘림이 많은 경향을 보이는 대신, 간소, 명쾌하다. 그 반면, 다포집은 지붕의 무게가 기둥과 그리고 그 사이사이의 공포를 통해 벽체에 분산되므로, 주심포집과는 달리 중후, 장엄한 모습을 띠게 되고 배흘림도 약화된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현존 最古의 목조) 부석사 무량수전은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주심포 양식의 목조 건축물이다. 안변 석왕사 응진전은 고려 말기의 대표적인 다포 양식의 목조 건축물로서 조선 시대의 다포 양식에 영향을 끼쳤다.
호패(號牌) 조선 시대, 16세 이상의 남자가 차고 다니던 신분을 나타내는 패. 호패 사용의 목적은 호구(戶口)를 분명히 해 민정(民丁)의 수를 파악하고, 직업과 계급을 분명히 해 신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가장 중점을 둔 것은 군역과 요역의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여자에게는 해당되지 않았지만, 16 세 이상의 남자는 왕족, 관료에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신분에 관계없이 차고 다니도록 하였다. 그 결과, 백성들은 호패를 받기만 하면 바로 호적과 군적에 올려져 국역을 부담하여야 하였으므로 호패를 위조, 교환하거나 여러 방법을 써서 호패를 받지 않으려 하였고, 반대로 국가는 호패를 차고 다니지 않거나 위조한 자는 경우에 따라 극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호패의 재료와 기재 내용은 신분에 따라 달랐다. 재료는 신분에 따라 상아․녹각․나무 등이 있었고, 기재 내용은 3 품 이상 의 관리는 관직, 3 품 이하의 관리는 관직․성명․주소, 일반 서민은 성명․주소․얼굴색․수염의 유무 등을 기재하였다. 호패는, 서울은 한성부, 지방은 관찰사와 수령이 관장하였고, 본인이 죽었을 때 관가에 반납하도록 되어 있었다.
언관, 3 사(言官, 三司) 언관이란 간관(옳지 못한 일을 고치도록 말하는 관리)을 일컫는 말로써 조선 왕조의 정치는 언관의 기능을 강화시킨 것이 주요 특징이었다. 고려 시대에도 어사대와 중서 문하성의 낭사(대간)가 언관의 기능을 맡아 전자가 관리의 규찰을, 후자가 국왕에 대한 간쟁을 수행하였으나, 역시 언관의 기능이 강화된 것은 조선 시대의 일로서, 이것은 유교 정치 사상에 이념적 바탕을 두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사헌부(고려의 어사대 계승), 사간원(고려의 낭사를 독립시켜 만든 기관)을 양사(또는 대간)라 하였고, 여기에 홍문관을 합쳐 3사(三司)라 하여, 이들 기관에 언관의 기능(서경과 간쟁권)을 부여하였다. 언관 제도의 강화, 발전은 왕권의 견제와 권신(權臣)의 대두를 막고, 관료 체제의 균형과 안정을 도모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들 삼사는, 중대사의 경우, 합계(合啓 합동 상소)하는 일이 많아, 그 위세를 더욱 높이기도 하였다.
경연(經筵)제도 경연은 국왕이 정치에 도움이 되는 새로운 지식을 얻거나, 자성(自省)의 기회를 가지기 위해 학식이 많은 신하들과 경서나 사서를 읽고 토론하는 자리이다. 이것은 중국의 송나라에서 시작된 제도이다. 우리 나라에 이 제도가 받아들여진 것은 고려 중기로서, 이 때는 간헐적으로 행해지다가 공민왕 무렵에 다소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신하측으로부터 이 제도를 상설화시키려는 노력이 줄기차게 추구되어, 나중에는 왕의 정사의 태반이 이 자리에서 이루어질 정도로 그 비중이 높아졌다. 경연은 주로 홍문관에서 담당하였다.
유향소, 경재소(留鄕所, 京在所) <유향소> 지방 양반의 자치 기관이었다. 부․군․현 단위로 구성되었는데, 그 우두머리를 좌수(座首)라 하였으며, 그 밑에 약간 명의 별감(別監)을 두었다. 유향소의 임무는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를 규찰하며, 풍속을 교정하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향청(鄕廳)이라 하였다.
<경재소> 중앙 정부가 지방의 유향소를 통제하기 위해 서울에 설치한 기구였다. 중앙 정부의 고관이 출신 지방의 경재소 임원이 되었다. 선초에는 이를 통해 유향소를 중앙에서 직접 통제할 수 있어, 향촌 자치를 허용하면서도 중앙 집권을 효율적으로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조․성종 대에는 중앙의 훈신․척신들이 연고지의 경재소를 관장하면서 지방 관리와 결탁하여 불법을 자행하였고, 유향소까지 장악하자 지방 사림들이 반발함으로써 사화(士禍)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후 수령의 권한 강화로 유향소의 지위가 격하됨에 따라 경재소도 선조 때 폐지되었다.
불씨잡변(佛氏雜辨) 정도전(鄭道傳)이 저술한 불교 배척론서. 불교의 교리에 대한 반박과 함께 불교 맹신으로 자신과 국가를 그르친 사례를 들면서, 4개 항목에 걸친 불교 배척론을 전개하고 있다. 정도전의 불교에 대한 철학적 비판은 불교의 교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기반한 것은 아니고 유교적 편견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억측과 독단이 많다. 다만 성리학이 전래된 초기에, 성리학의 이기론적 입장에서 자기 나름대로 불교의 교의를 파악, 비판함으로써, 이후 조선 유학자들의 불교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를 결정지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정군, 보인(正軍, 保人) <정군> 실제로 군역에 복무하였던 정규 군인을 말한다. 정병(正兵)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양인 개병 원칙에 따라 모든 정남(丁男)은 군역의 의무를 졌는데, 그 수행 방법에는 실제로 군역에 종사하는 정군이 되거나, 그 정군에게 경제적 지원을 담당하는 보인(保人)이 되는 것 등의 두 가지가 있었던 것이다.
<보인> 정군을 경제적으로 돕던 장정을 말한다. 봉족(奉足)이라고도 하였다. 정군이 필요로 하는 무기 구입과 왕복 여비 등의 경비를 부담하고, 농사일을 돌보아 주는 방법으로 정군을 도왔다. 공식적으로는 1년에 포 2필을 부담하였다.
진관 체제(鎭管體制) 세조 때부터 시행되었던 지역 단위 방위 체제. 각 도마다 지역적 특성에 따라 1~2곳에 주진(主鎭), 그 아래에 3~13개의 거진(巨鎭), 그 밑에 여러 개의 진(鎭)을 두어 전국의 모든 군․현을 지역 단위 방위 체제로 편성한 것이다. 이 체제의 장점은 전국을 방위 체제로 조직화한 데에 있다. 그러나 그 방위망이 너무 광범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무력함이 드러나 그 기능을 상실해 갔다. 이것은 체제 자체가 대규모 전투에 약한 체제인 데다 군사들의 경제적 기반이 허약하였고, 군사 지휘관을 문관 출신의 수령들로 겸임시켰기 때문이었다. 16세기에 제승 방략 체제(制勝方略體制)로 바뀌었다.
제승 방략 체제(制勝方略體制) 필요한 방어처에 병력을 동원하는 체제로서 16 세기에 시행되었다. 즉, 적의 침입이 있을 때, 수령은 각각 인원을 동원해 자기의 진을 떠나 배정된 지역으로 가서, 중앙에서 파견되는 도원수, 순변사, 방어사 등의 지휘를 받게 되는 체제였다. 지역 단위 방위 체제인 진관 체제가 붕괴된 후, 대규모 전투에 대처하기 위해 채택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군사를 방어 지역에 집중함으로써 후방 부대가 없어, 최일선이 무너질 경우 국가 방어가 어려워지는 단점이 있었다. 바로 이것이 임진 왜란 당시, 전쟁의 초기 단계에서 패배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역원제(驛院制) 전국에 500여 개소의 역이 있었는데,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는 주요 도로에는 대략 30리마다 역을 두었다. 역에는 마필과 역정(驛丁)을 두어 공문의 전달, 공무 여행자에 대한 마필의 제공, 숙식의 알선 등을 하였다. 원(院)은 교통의 요지인 역에 설치한 국립 숙박업소로 원주전(院主田)을 지급받아 원주(院主)가 이를 운영하며, 공무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였다. 각 역의 역마를 사용하는 데는 마패라는 증명이 필요하였다.
조운제(漕運制) 조세로 징수한 미곡, 포 등을 해상 운송하는 제도를 말한다. 조운이 제도화된 것은 고려 초기부터였다. 교통 수단이 발달하지 못하였던 당시에는 육운(陸運 육로 운송)보다 수운(水運 수로 운송)에 의존하여 조세를 수송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국가에서는 조세미의 수송을 위해 군현의 관할 창고에 조세미를 모으고(출발 지점과 도착 지점에 있는 창고가 조창이었다), 매년 일정 기간의 기한을 정하여 중앙의 경창(京倉)에 수송하였다. 황해안에 주로 설치되었던 조창은, 대동법이 실시된 후 세곡(稅穀)의 수송량이 급증한 후기에는 경상도에도 3개를 더 설치하였다.
향교, 4학(鄕校, 四學) 향교는 지방에 설립된 국립 중등 학교였다. 고려 시대부터 설립되었는데, 조선의 태조는 즉위 초부터 권장하여 고을마다 하나씩 세우게 하였다. 서울에 있는 것을 4학(四學 : 사부 학당)이라 하였다. 양인의 자제로서 서당을 마치고 15, 6세가 된 학생이 입학하였다. 수업 연한은 없었고, 수학 후 과거 시험의 소과(小科)에 응시하였다.(서당⇀향교(4부 학당)⇀소과) 향교는 임진 왜란으로 황폐해진 데다, 16세기 이후로 세워진 서원에 눌려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은 크게 쇠퇴하였고, 문묘의 제사 기능만 남게 되었다.
취재, 천거(取才, 薦擧) <취재> 하급 관리나 서리를 뽑기 위해 실시했던 간단한 특별 채용 시험. 과거를 치르지 않고 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이었으나, 과거보다 격이 낮아서 중요한 자리로 승진하기는 어려웠다.
<천거> 학덕(學德 : 학문과 덕행)에 의해 고관의 추천으로 관료에 임용되는 제도. 중종 때 조광조의 건의로 설치된 현량과가 대표적 보기이다. 천거제는 고려 시대에 광범하게 시행된 바 있다. 조선에서는 기존 관리를 대상으로 하였으며 천거를 통해서는 고위 관직에 오르기 어려웠다.
조광조, 기묘 사화 조광조는 중종 때 등용되어 큰 신임을 얻었다. 조광조는 유교로써 정치를 근본으로 삼아, 왕도 정치를 실현하겠다는 유교적 이상 정치를 이룩하기 위해 여러 시책을 시도하였다.
조광조는 공납의 폐단을 처음으로 거론, 시정코자 하였고, 향약을 최초로 전국적으로 보급코자 하였다. 그리고 미신을 타파하고, 도교 행사를 폐지하여 유교적 사회 질서를 바로잡으려 하였다. 소격서와 초제가 폐지된 것은 이 때였다. 또, 종래에 폐단이 많았던 과거 제도를 대신하여 현량과(賢良科)라는 천거 제도를 실시하여 다수의 사림을 등용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훈구파와 반목 대립이 심해졌다.
중종 반정 때 공신의 작호를 받고, 공신전과 노비를 받은 자가 지나치게 많았는데, 조광조 일파가 그 부당성을 논하여 공신 76명의 작호와 공신전, 노비의 몰수를 주장한 이른바 위훈(僞勳) 삭제 사건을 계기로 공신들의 반격을 받아 몰락을 초래하고 말았다(기묘사화)
소격서, 초제(昭格署, 醮祭) 조선 초기에는 고려 시대에 잦았던 도교 행사를 줄여서 재정의 낭비를 막는 한편, 소격서(昭格署)를 두어 도교의 제천 행사를 맡아 보게 하였다. 소격서는 나중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의 건의로 폐지되었다. 도교의 제천 행사가 초제(醮祭)인데, 마니산 초제가 대표적인 것이었다.
마니산 초제는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塹城壇)에서 하늘에 제사하던 도교 행사였다. 참성단에서의 초제는 도교 신앙과 민간 신앙이 결합되어 민족 의식을 높이는 기능을 하였다. 소격서가 폐지되면서 소격서에서 행하던 초제는 중단되었으나,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의 제천 행사는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사민 정책, 토관 제도(徙民政策, 土官制度) <사민 정책> 세종 때를 전후하여 4군 6진의 개척으로 북방 영토를 확장하면서 이를 유지하기 위해 추진된 이민 정책. 예컨대, 세종 15년에는 함경도 남부의 빈농 2200호를 차출하여 경원과 영북진에 이주시켰고, 또 삼남 지방의 희망자도 이주시키면서, 양인의 경우에는 토관(土官)직을 수여하고, 향리와 역리는 그 역을 면제해주고, 천인은 양인으로 승격시켰다. 세종 때만 네 차례에 걸쳐 6진 지역으로의 이주가 추진되었고, 4군 지역에는 양민이나 유이민의 이주 이외에 범죄자나 부정한 관리 등을 이주시키기도 하였다.
<토관 제도> 평안도․함경도․제주도 지방의 토착민에게 주던 특수한 향직(鄕職)이 토관이었다. 변경 지방의 토착적인 유력 세력을 포섭하여 안으로는 효율적인 지방 통치와 군사 조직의 강화를 도모하고 밖으로는 이민족과의 연결을 막고자 하는 회유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다. 세종 때 널리 토관 제도를 시행한 것은 그 궁극적 목적을 영토의 보전에 두고, 지방 사회의 유력한 인사들을 통해 지방의 지배와 군사적 요지의 방어를 강화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향약(鄕約) 유향소(향청)의 기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유교주의적 도덕 규약을 정하고 지방의 자치적인 유교주의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송의 주자가 만든 여씨향약(呂氏鄕約)이 우리 나라 향약의 모범이 되었다. 향약은 유교적 이상 정치를 추구하던 조광조가 처음으로 그 보급에 적극 노력하였다. 향약은 유향소와 밀접한 관계에 있어서, 향약의 임원인 약정, 부약정, 직월 등은 유향소의 좌수, 별감, 유사 등이 겸하기 마련이어서 그 조직 체계를 거의 같이 하였다.
납속책, 공명첩(納粟策, 空名帖) <납속책> 조선 시대, 국가 재정의 궁핍을 메우기 위해 실시한 정책의 하나로서, 쌀이나 돈을 바칠 경우 그에게 적합한 상이나 관직을 주거나, 역(役)․형벌을 면제해 주든지, 또는 신분을 상승시켜 주던 제도였다. 납속은 조선 전기에도 실시된 사례가 더러 보이나, 제도화된 것은 아니었다. 납속은 임진왜란 중 군량미 조달을 위해 대대적으로 실시하였으며, 전후에도 복구 사업을 위한 재정 확보를 위하여 계속 실시함으로써 제도화되었다. 특히, 현종․숙종 때 남발되었는데, 이는 양반 의 증가 등 신분제의 동요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공명첩> 납속의 대가로 받는 명예 관직 임명장이었다. 공명첩을 사들이는 백성들은 정부로부터 공명첩에 명시된 직위를 합법적으로 취득하는 것이었으므로, 조선 후기 신분제의 변화를 촉진시킨 요인이 되었다.
향도, 계, 두레 모두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촌락 공동체 조직들이다. <향도(香徒)> 민간 신앙과 불교, 도교가 혼합된 독특한 신앙 공동체였다. 상장(喪葬)과 같은 어려운 일을 서로 돕고, 농사일을 서로 거들어 주며, 질병을 서로 구제하고, 마을을 공동으로 방위하는 기능을 가졌다. 또, 향도는 주기적으로 모여서 연회를 베풀고, 남녀 노소가 한데 어울려 식음과 가무를 즐기기도 하였다.
<계(契)> 삼한(三韓) 이래로 전해 오는 민간 협동체이다. 상호 부조, 취미, 공동 유희, 제례 등 여러 가지 목적의 다양한 형태의 계가 존재해 왔다. 신라 시대 여자들이 길쌈내기를 하는 가위(嘉俳), 화랑들의 향도(香徒), 고려 시대의 동갑계(同甲 契), 의종(毅宗)의 문무계(文武契), 조선 시대 정여립(鄭汝立)의 대동계(大同契) 등이 그 보기이다.
<두레> 원시적 유풍을 지니고 내려오는 민간 협동체. 주로 조선 후기에 발생한 농민 공동 노동 조직을 가리킨다. 이앙법(移秧法)의 보급으로 단기간에 많은 노동력을 투입할 필요가 생김에 따라 촌락 단위로 조직되었다. 두레마다 기(旗)가 있고, 유흥으로는 농악을 즐겼으며, 인접한 촌락의 두레와 두레 사이에는 조직의 선후와 세력의 우열에 따라 형두레, 아우두레라 하여 기(旗)로써 예의를 표하였다. 향촌 사회에서 양반의 횡포를 억제하고 농민의 권익을 옹호하는 기능도 있었다.
환곡, 사창(還穀, 社倉) <환곡> 흉년 또는 춘궁기에 곡식을 빈민에게 대여하고, 풍년 또는 추수기에 이를 반납케 하는 것으로서, 고구려의 진대법, 고려의 의창 제도를 계승하여 조선 시대에 시행하였던 진휼 제도(賑恤制度)이다. 그런데, 환곡을 빌어 간 농민이 도망하거나 사망하는 경우에는 회수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이에, 원곡의 감소를 보충하기 위하여 원곡의 10분의 1을 이자로 붙여 회수하도록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자 곡이 국가 수입의 일부로 책정되고, 거기에다 환곡의 이자가 수령의 각종 경비에서 중요한 수입원이 됨에 따라 그 이율이 점차 높아지게 되어 차츰 고리대의 성격을 띠어 갔다. 이제 환곡은 본래의 취지를 상실하고, 관청의 과세, 이식을 위한 수단으로 변하였다. 나중에는 백성의 필요 여부를 불문하고 강제 대부를 자행하였으며, 그 이식도 더욱 높아졌다. 거기에다 탐관 오리의 횡포가 더해져 19세기에는 이른 바 삼정의 문란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이 바로 이 환곡의 폐단이었다.
<사창> 사창제는 원곡을 관청에서 배당 받아 관청의 감독하에 민간이 운영하는 방법이었다. 원래 세종 때 대구 지방에서 처음 시행하였던 것인데, 허술한 관리가 문제되어 성종 때 폐지된 바 있었다. 그러다 흥선 대원군이 환곡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고종 4년(1867) 전면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즉, 사창을 큰 마을 단위로 설치하고, 그 마을에서 인망이 두텁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을 사수(社首)로 삼아 운영의 책임을 지게 하였던 것이다. 사창제의 실시로 환곡제의 실시 때 나타났던 폐단이 완전히 없어지거나 농민 생활의 향상에 큰 도움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종래 저질러졌던 부정이 크게 줄어들었고, 원곡이 보존되었으며, 이자도 효과적으로 거두어들여져 국가 재정 수입에 크게 보탬이 되었다.
북학(北學) 운동 북학이란 17~18세기 청(淸)에서 일어난 실사구시(實事求是 : 사실에 토대하여 진리를 구하는 일)의 학문을 우리 나라에서 일컫는 말인데, 조선 후기 18세기에 일어난 북학 운동은 바로 이 북학을 배우자는 운동이었다.
17세기말에서 18세기에 이르러 청의 국력이 신장되고 문물이 발달하자 무조건 청을 오랑케로 배척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로운 문물 제도와 생활 양식 등은 받아들이자는 주장이 일어났다.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박지원, 홍대용 등이 이런 주장을 하였는데, 이들을 북학파라 하였다. 북학파란 말은 박제가의 저서인 <북학의>에서 비롯되었다. 북벌 운동이 명분론에 입각한 것이라면, 북학 운동은 현실론의 입장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북학파는 중농적 실학자들과는 달리 상업을 중시하고 대외 무역의 활성화, 새로운 기술의 도입과 생활 개선을 제창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양의 과학 기술과 자연 과학의 도입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북학론은 19세기 후반, 개화 사상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강홍립 사건 광해군 10년(1618) 후금이 명의 변경을 위협하자, 명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조선에 공동 출병을 요구해 왔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명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이를 거절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세력이 점차 커져가고 있는 후금과 적대 관계를 가지는 것도 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일단 강홍립(姜弘立)을 5도 원수(元帥)로 삼아 출병시키면서 정세를 보아 싸우거나 항복하게 하였다(현실론의 입장). 조․명 연합군이 대패하자 강홍립은 왕의 밀명에 따라 후금에 투항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이 사실을 모르고 그의 관직을 박탈하였다. 그는 후금군에게 계속 억류되어 있다가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 후금군을 이끌고 입국하여 강화를 주선하고 국내에 머물렀으나 역신(逆臣)으로 몰려 관직을 박탈당하였다(명분론의 입장). 그의 사후 관직이 회복되었다.
가부장적 가족 제도 가족 집단의 장(長)인 가장은 호적 제도나 그 밖의 공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호주로 일컬어지며, 가족 공동체의 지휘 통솔자이다. 따라서, 가족 집단의 질서는 가부장제적인 권위에 의해서 유지되었다.
가부장적 가족 제도에서는 조상 숭배에 입각한 가(家)의 영속성을 중시하며, 가장이 가족을 대표하고, 모든 면에 통제적 기능을 가지며, 가부장을 정점으로 존비(尊卑), 장유 유서(長幼有序), 남녀 유별의 상하 위계 질서가 확립되고, 사회 전체가 이것을 지지, 승인해 주며, 가부장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가산(家産)이 있다. 따라서, 가족은 가장의 허락을 거치지 않고 임의로 가산을 처분하거나, 또는 그의 동의 없이 가산에 부담이 될 계약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면․리제(面里制) 면․리제는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어 있다. 즉, "5호(戶)를 1통(統), 5통을 1리(里), 몇 개의 이를 합쳐 1면(面)으로 하고, 통에는 통주(統主), 이에는 이정(里正), 면에는 권농관(勸農官)을 둔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 전기에 있어서의 면의 편제는 군현마다 방위에 따라 동․서․남․북의 4개 면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때의 면은 인구의 다소나 면적의 대소와는 관계없었다. 면의 권농관이나 이의 이정은 유력한 사족(士族)으로 선임되어 수령의 정령을 집행하도록 하였다. 수령이 수십 개의 면․리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권농관이나 이정의 협력없이는 곤란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지방의 말단 촌락에까지 중앙의 명령이 침투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권농관과 이정의 역할에 달려 있었다. 결국, 정부의 촌락 사회 지배는 수령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진 셈이었다. 한편, 조선 후기에 이르면 면․리제가 수취 체제와 관련되고, 오가작통법이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사족들이 권농관이나 이정의 자리를 기피하게 되고, 이 자리는 일반 양인이 담당하게 된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다섯 집(家)을 한 통(統)으로 조직하여 관리하던 제도인데, 조선 전기에 실시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전국적으로 실시된 것은 조선 후기 숙종 때였다.
하나의 면(面)은 여러 개의 이(里)로 구성하고, 하나의 이는 다섯 개의 통(統)으로 구성하며, 하나의 통은 5호로 구성하여, 통에는 통주(統主), 또는 통수(統首)를 두어 조직을 강화하였다. 표면적인 목적은 농경을 서로 도우며, 어려울 때 서로 부조하기 위한 것이라 하였으나, 실제의 목적은 농민이 유망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있었다. 즉, 공물과 역 부담자의 동태를 파악하고 연대 책임을 지우기 위한 것이었다.
과전법(科田法) 과전법은 수조권(收租權)에 입각한 토지 지배의 전통이 반영되어 있는, 전근대 사회의 전형적인 토지 제도였다. 즉, 토지의 원래의 수조권자인 국가와 그 수조권을 나누어 받은 개인 (주로 양반 관료)을 전주(田主)로, 또 실제의 토지 소유자인 농민을 전객(佃客)으로 규정함으로써, 소유자인 농민을 경작자처럼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과전법의 가장 큰 목표는 수조권을 개인에게 나누어 주는 사전을 축소하고 국가 수조지인 공전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었다. 현직 및 퇴직 관리에게 지급하는 핵심적인 사전인 과전을 경기 지방의 토지로만 한정하여 분급한 것도 사전을 축소하려 한 노력의 하나였다. 그러나 사전 개혁의 대상이었던 여말의 대규모 농장 중에서 수조권이 국가에 넘겨진 것은 권문세족의 농장 뿐이었고, 당시 새로 등장한 정치 세력과 지방 토호의 토지는 보호되어 수조권에 의해 지배되던 토지들이 사유지로 변해 갔다. 거기에다 세습이 가능한 사전인 공신전․별사전 등은 경기 지방 이외에 있는 토지로도 분급되어, 사유지로 변할 가능성을 늘 안고 있었다. 한편, 과전법 추진 세력은 자신들의 지지 세력이었던 농민들에 대한 배려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공전․사전을 가리지 않고 수조권자에게 내는 조(租)는 1결당 생산량의 1/10에 해당하는 30두(斗)로 한정하도록 하였다. 과전은 사망시 국가에 반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합법적으로 세습이 허용되는 공신전이 증가한 데다, 과전도 차츰 수신전(守信田)․휼양전(恤養田)의 명목으로 세습되어, 차츰 신진 관료에게 줄 토지가 부족해졌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세조 때는 과전법을 직전법(職田法)으로 개혁하여 현직 관리에게만 과전을 지급하도록 하였고, 그 뒤 성종 때는 토지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관수 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하기도 하였으나, 양반 지주들의 농장 확대를 막지는 못하였다. 명종 때(16세기 중엽)는 마침내 직전법마저 폐지되고, 관리들은 녹봉만 받게 되었다. 이제 사적 소유권과 병작 반수제에 입각한 지주 전호제가 일반화되었고, 이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수조권에 입각한 토지 지배는 소멸되고, 소유권에 입각한 토지 지배가 확산되어 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양전, 양안(量田, 量案) 조세를 부과하기 위해 토지를 측량하는 것을 양전이라 하였다. 즉, 전답을 측량하여 소유 관계를 확인하고, 이를 토대로 과세의 기본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양전을 하였던 것이다. 양안은 이 때 작성된 토지 대장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리고 양안에 누락된 토지를 은결(隱結)이라 하였다.
조선 시대에 양전은 20년마다 시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엄청난 경비를 제대로 충당할 수 없는 재정 궁핍, 행정력 미비, 정치적 문란 등의 원인으로 거의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실시되는 경우도 대개는 지방 단위의 소규모로 행해졌다. 그 결과 토지 제도는 문란해지고, 때때로 민란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전국 규모의 마지막 양전은 고종 연간인 1898년에서 1904년 사이에 실시되었다.
수신전, 휼양전(守信田, 恤養田) <수신전> 과전(科田)을 받은 관리가 사망하였을 때 그 미망인에게 물려 주던 토지로서, 경제력이 없는 사대부의 처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처였다. 자식을 두고 수절하 는 경우에는 과전 전부(나중 2/3)를, 자식 없이 수절하면 과전의 반(나중 1/3)을 지급받았다. 개가하거나 사망하면, 국가에 반납하였다. 그러나 지급 후에는 환수가 어려워 사실상 세습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과전법이 직전법으로 바뀌면서 폐지되었다.
<휼양전> 과전을 받은 관리 및 그 부인이 사망하였을 때 그 미성년 자녀에게 과전 전부를 물려 주던 토지로서 수신전과 같은 성격의 토지였다. 성년(20세)이 되면 국가에 반납해야 하였으나, 수신전과 마찬가지로 사실상 세습되었다. 역시 직전법이 시행되면서 폐지되었다.
병작 반수제(竝作半收制) 가장 일반화된 농장 경영 방식이다. '병작'이란 토지가 없는 농민이 토지를 많이 갖고 있는 사람(지주)의 토지를 빌려 경작한다는 뜻이고, '반수'란 거기에서 나오는 소득물을 반씩 나눈다는 뜻이다. 여말 선초의 과전법에서, 공․사전에 대해 1/10의 수조율을 적용하고 반수를 금지하면서 병작 반수제는 없어 진 듯하였으나, 실제로는 여전히 널리 행해졌었다. 특히 16세기 이후 양반 지주의 토지 집적이 활발해지면서 병작 반수제는 더욱 확산되어, 예종 대에는 관청의 둔전에도 적용될 정도였다.
족징, 인징(族徵, 隣徵) 공납이나 군포 등의 부담을 피하여 도망한 사람이 있을 경우, 그 친척에게 대신 납부하게 한 것이 족징, 이웃 사람에게 대신 납부하게 한 것이 인징이었다. 이것은 농민들의 경제 생활을 더욱 피폐하게 하였고, 다시 농촌을 떠나게 하는 악순환을 가져왔다.
연분 9등법, 영정법(年分九等法, 永定法) 세종 때부터 실시한 전세 부과의 기준법으로서, 풍흉의 정도를 9등급으로 나누어 지역 단위로 징수한 일종의 정액(定額 : 액수가 미리 정해짐) 세법이다. 원래 과전법에서는 토지의 품질을 3등급으로 나누어 적용하되 손실 답험(損實踏驗 : 전주'田主'가 실제로 경작 상황을 조사함)을 통해 수조율을 정하는 정률(定率 : 비율이 미리 정해짐) 세법으로 운용되었다. 그러나 이 답험 방식은 공정하게 이루어지기가 어려웠다. 여기저기에 흩어진 전답을 일일이 답사하여 점검할 수도 없었고, 답험관의 자의성을 막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연분 9등법은 이를 시정하기 위해 제정, 시행되었다.
연분 9등법은 ① 연분은 작황에 따라 상상년(上上年)의 1결 당 20두에서 등급 당 2두씩 체감하여 하하년(下下年)의 4두까지로 했고, ② 각 군현의 수령이 심사하여 정한 연분을 관찰사에 보고하면 각 도의 관찰사가 중앙에 보고하고, 중앙에서는 이를 심사하여 정한다는 내용이었다.
16세기 지주 전호제의 확대와 공물․요역․군역 등 다른 수취 체제가 가혹해지면서 연분의 등급은 수령이나 관찰사의 보고보다 낮게 정하는 것이 관행으로 되어가다가, 16세기 후기에 이르면서 연분 등급은 대개 하하년의 1결 당 4두로 거의 고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 조선 후기 인조 때의 영정법(永定法)에 의해 풍흉에 관계없이 1결 당 4두로 확정되었다.
방납(防納)의 폐단 공납 제도의 운영 과정에서 나타난 폐단. 방납이란 지방에서 납부할 공물(貢物)을 중간에서 관리들이 대신 납부하고 농민으로부터 대가를 받는 것이었다.
방납은 선초부터 행해졌는데, 처음에는 백성들의 편의를 도모하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관리와 결탁한 상인들이 방납권자(防納權者)가 되어 백성들의 희망 여부나 물품의 종류에 관계없이 공납의 의무를 자의로 대신한 다음, 비싼 대가를 강제로 징수하여 엄청난 사리를 취하게 되고, 이에 따라 백성들의 부담은 크게 가중되었다. 방납자는 공정가(公定價)의 규정이 없는 것을 기화로 백성들에게 터무니없이 비싼 대가를 수탈하였던 것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적정한 토산물을 부과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방납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기도 하였으나, 폐단이 시정되기 어려웠다. 16세기 조광조(趙光祖)는 방납의 폐단을 처음으로 거론하였다. 이이(李珥)․유성룡(柳成龍)등은 공물을 쌀로 내게 하는 수미법(收米法)의 실시를 주장하였으나, 방납으로 이득을 취하고 있던 관리와 부담이 늘어날 것을 우려한 양반들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가서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을 보게 되는데, 대동법은 수미법의 정신을 구체화한 것으로서 공납 제도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조처였다
수미법, 대동법(收米法, 大同法) 수미법이란 각 지방의 토산물을 현물로 바치는 공납(貢納)을 현물 대신 쌀로 통일해 바치자는 주장이었다. 현물 수납은 운송․저장에 불편한 데다, 또 그 지방에 나지 않는 것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 방납의 성행을 가져왔고, 이 방납으로 말미암아 국민 부담이 부당하게 가중되자, 이의 시정을 위해 이이(李珥) 등이 주장하고 나선 것이 수미법이었다. 그러나 그 당장에는 채택되지 못하였고, 나중에 이원익 등의 건의로 대동법이란 이름 하에 경기도부터 시행되기 시작하여, 숙종(18세기초) 때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대동법은 조선 전기 호구(戶口)를 단위로 부과․징수하던 공물과 진상(進上) 등을 전세화(田稅化)하여 토지 1결 당 쌀 12 두의 대동미를 징수하고, 이를 각 관청에 나누어 주어 필요한 물품을 사도록 한 제도였다. 산간 지방에서는 쌀 대신 베(대동포)나 돈(대동전)으로도 받았다.
대동법의 시행으로 국가의 수입이 증대되었다. 그리고 토지의 결 수를 기준으로 하여 부과하였기 때문에 농민들의 부담은 줄어 들었고, 양반 지주들의 부담은 늘어났다. 또 국가 수요 물품의 납품을 담당하는 공인(貢人)의 등장으로 유통 경제가 활발해지고 상업 자본이 발달하였으며, 수공업 생산이 활기를 띠는 등 산업 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 왔다. 상공업 발달과 대동미의 현금 납부(금납화)는 상업 도시의 발달과 화폐 유통의 촉진을 가져 오기도 하였다. 한편, 별공과 진상이 남아 있어 현물 징수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대동법은 공납을 전세화한 것으로 토지 소유의 정도에 따라 차등을 두어 과세하였으므로 합리적인 세제라 할 수 있다. 또, 종래의 현물 징수가 쌀․베․돈으로 바뀌게 됨에 따라 조세의 금납화가 이루어졌다는 데에도 의의가 있다. 더욱이 대동법의 실시는 상품 및 화폐 경제의 발달을 가져와, 장기적으로는 원래의 의도와는 반대로 양반 중심 신분 질서와 경제 질서를 붕괴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잉류(仍留) 조세는 모두 현물로 납부되었다. 그런데 평안도와 함경도는 국경에 가깝고, 더욱이 평안도는 사신의 내왕도 잦은 곳이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받은 조세는 현지에서 군사비와 사신 접대비로 쓰도록 하였다. 이것을 잉류라 하였고, 잉류가 적용되는 지역이 잉류 지역이었다.
대립․방군수포(代立․放軍收布)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에 걸쳐 군역의 요역화 현상과 함께, 군역 의무 수행의 일반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 중앙군의 경우 대립제(代立制)였고, 지방군의 경우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였다. 대립이란 사람을 사서 군역을 대신시키는 것인데, 그 대가로 지불하는 삯이 대립가(代立價)였고, 대개는 보인(保人)에게서 받은 조역가(助役價)로 충당하였다. 처음에는 번상해야 할 정군(正軍)의 편의에서 대립이 이루어졌지만, 점차 한양의 서리나 관속들이 대립시킬 유민이나 공․사노비를 대기시켜 놓고, 대립가를 높게 책정하여 중간 이득을 취할 목적으로 대립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립가는 갈수록 높아지고, 이를 피해 도망하는 농민들이 잇따르면서 농촌은 점차 황폐해져 갔다.
방군수포의 경우도, 부득이한 사정으로 번상이 어려우면 일 개월마다 베 3필 또는 쌀 9말씩 납부하게 한 예에서 보듯이 처음에는 군사들의 편의를 도모한 점도 있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점차 지휘관의 사리 축적에 이용되면서, 이렇게 거두어들인 재물은 모두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첨절제사․만호 등과 그 휘하 관속들의 개인 소유가 되었다. 이것은 지방군의 감독권이 지휘관에게 전적으로 맡겨져 있었고, 특히 대역인(代役人)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쉽게 자행될 수 있었다. 그 결과 비록 제도적으로는 진관 체제를 갖추고 있었으나 지방군으로 남아 있는 군사는 얼마 되지 않았고, 이들조차 화기를 다룰 줄 몰라 국방 체제는 허술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립제나 방군수포제는 모두 불법적인 것으로서 그 폐해가 커지자 대립․대역의 대가로 납부해야 할 군포의 양을 국가가 정해 주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군적 수포제(軍籍收布制)였다.
군적 수포제(軍籍收布制) 조선 전기의 농병 일치 군역 제도가 16세기 이후 대립․방군수포(代立․放軍收布)의 성행으로 무너지고 그 폐해가 커지자, 정부가 대역(代役)의 대가로 납부해야 할 군포의 양을 정해 준 것이 군적 수포제이다. 즉, 지방 수령이 관할 지역의 장정으로부터 연간 군포 2필을 징수하여 중앙에 올리면, 병조에서 이것을 다시 군사력이 필요한 지방에 보내어 군인을 고용하게 한 제도였다. 장정 1인의 연간 군포 2필은 쌀 12말에 해당하며, 당시 전세(田稅)의 약 3 배에 달하는 무거운 것이었다.
한편, 군역은 원래 양인 개병 원칙에 따라 모든 양인 장정에게 부과되었는데, 군적 수포제가 실시되면서 양반은 군포 부담에서 제외되고 군역은 상민(常民 : 좁은 의미의 양인)만이 부담하는 양역(良役)으로 변질되었다. 이제 군포의 부담 여부는 양반과 상민의 신분을 구별짓는 기준이 되었으며, 이로써 농민들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다.
공장안(工匠案) 관청에 등록된 장인(匠人)들의 명부. 중앙의 경공장(京工匠)은 한성부에 등록하였고, 지방의 외공장(外工匠)은 각 도의 병영이나 해당 관청에 등록하여야 했다(장인 등록제)
관청 수공업자들이 줄고, 독립 자영 수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공장안은 장인세(匠人稅) 징수 대상자 명부로 변하였다. 정조 때에는 공장안 자체가 폐지되었다(장인 등록제 폐지).
시전, 육의전(市廛, 六矣廛) <시전> 한양의 간선 도로(종루)에 상가를 조성하여 상인을 유치하고, 수도민의 수요를 충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선조 이후에는 세금을 납부하는 대신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조달하고 정부의 잉여 물품을 처분하는 등의 국역을 부담하게 하였다. 그 중 국역 부담이 큰 6개 시전을 육의전이라 하였다. 시전 상인들은 같은 상품을 판매하는 상인들끼리 조합을 결성하여 상권을 보호하였다. 17세기에는 사상(私商)의 활동이 커지면서 이들을 규제하고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이라는 특권을 지니게 되었다. 원래 금난전권은 육의전에만 부여되었으나, 나중 일반 시전에까지 확대되었다가 18세기 말 사상의 번창으로 결국 육의전을 제외한 나머지 시전의 금난전권은 폐지되었다.
<육의전> 시전 중에서 비단․무명․명주․모시․종이․어물 등 가장 수요가 많은 6종류의 상품을 취급하는 상점을 말한다. 육의전은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인 금난전권을 인정받는 대신에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임시 부담금과 궁궐의 수리 및 도배를 위한 물품과 경비를 대고, 왕실의 결혼이나 제사, 사신 파견 때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국역을 부담하였다. 이것은 정부와 육의전 상인이 결탁하여 관리의 부패를 조장함으로써, 결국 상업의 자유로운 발전을 저해하였다.
이러한 금난전권은 18세기 후반, 일반 시전의 경우는 폐지되고 육의전만 지니고 있다가, 마침내 갑오개혁(1984) 이후 누구에게나 자유로운 상업권이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금난전권(禁亂廛權) 조선 후기,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 상인들의 특권으로서,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말한다.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가진 시전 상인이 그 권리를 갖지 못한 사상(私商)이나 다른 시전 상인(즉, 난전 亂廛)으로 하여금 그 상품을 취급하지 못하도록 단속할 수 있는 권리로서, 그들의 상업 활동과 이익을 침해하는 상행위를 규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17세기 사상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이들을 규제할 목적으로 처음에는 육의전에, 나중에는 모든 시전에 부여한 특권이었다.
그러나 시전 상인들이 금난전권을 과도하게 행사하여 물가가 상승하는 등 부작용이 일어나자, 정부로서도 더 이상 사상의 성장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금난전권을 점차 완화시키다가, 정조 5년(1791)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철폐하기에 이르렀고, 이로써 사상이 합법화되었다.
장시(場市) 전국 각 지방에 장시가 형성되어, 일반 교역은 장시를 통해 행해졌다. 지방에서는, 특히 삼남 지방에서는 기근과 재난이 장시 형성의 계기가 되었다. 재난과 기근으로 물자의 교역이 요구됨에 따라 지방의 소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자연 발생적으로 장시가 열리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과중한 부세와 군역을 피하여 이농한 농민들이 모여들었다.
장시가 처음 생겨난 것은 15세기 말 전라도에서였으며, 16세기 중엽에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18세기 중엽에는 1천여 곳에서 열렸다. 장시는 5일장이 일반적이었다.
장시는 인근 주민들이 농산물과 수공업 제품을 서로 교환하고 보부상이 물화를 판매 하는 교역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산물의 집산지였으며, 판소리 등이 행해지는 오락의 장소였고, 또한 정보 교환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조선 후기 서민의 의식 수준 향상에도 이바지한 바 컸다.
보부상(褓負商) 보부상은 관허 행상단으로서 보상(褓商)과 부상(負商)을 통칭하는 말이다. 장시와 장시를 연결하여 옮겨 다니면서 상품을 판매하였다. 보상은 상품을 보자기에 싸서 들거나 혹은 멜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시장이나 촌가의 마루 위에 끌러 펴 놓고 판매하였으며, 부상은 상품을 지게에 얹어 등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판매하였다.
보부상의 유래는 고대의 기록에도 나타날 정도로 그 기원이 오래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건국과 더불어 합법적 단체권을 가진 부상청(負商廳)을 설치하였으니, 보부상은 국가의 보호하에 육성된 관허 상인이었다. 이들이 국가의 대사나 위기가 있을 때에 사역하여 보국한 예는 많다. 왜란과 호란 때 군량과 무기를 운반하여 외적을 물리치는 데 공헌하기도 했고,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에서 프랑스 군을 무찌를 때도 동원되었으며, 동학 농민 운동 때는 관군 편에 동원되어 동학군과 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선대제(先貸制) 선대제란 조선 후기 수공업자들이 상인으로부터 주문과 함께 원료와 대금을 선불로 제공받고, 생산한 제품을 그 상인에게만 판매하던 생산 방식을 말한다. 이 경우 수공업자는 독자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자기 자본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물주(物主)인 상인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특히, 종이․화폐․철물․자기 등의 제조 분야에서 선대제가 성행하였다.
수공업에서의 선대제는 농업에서의 경영형 부농이나 상업에서의 도고의 존재와 함께 조선 후기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싹으로 주목된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독자적으로 상품을 생산․판매하는 독립 자영 수공업자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경영형 부농 경영의 합리화를 통해 부를 축적한 조선 후기의 부농(富農)을 말한다. 농민들은 많은 농지를 적은 노동력으로 일구어 소득을 늘리는 법(광작, 이앙법 이후에 활발)과, 적은 토지에 소득이 높은 작물(상품 작물)을 재배하여 수익을 늘렸다. 전자의 방안을 흔히 광작이라 하는데, 한 집에서 넓은 토지를 스스로 경작하는 방식이었다. 이앙법과 견종법으로 노동력이 절감되어 농민 1인당 경작 면적이 넓어지니까 가능하였다. 후자의 방안으로 농민들은 고소득을 보장하는 인삼, 담배, 목화, 채소, 과일, 약재 등의 상품 작물을 재배하였다. 서울 근교에서는 채소 재배가 성하여 농민들의 소득을 높여 주었다. 광작이나 상품 작물 재배에 필요한 노동력은 임노동자의 고용으로 해결하였다. 농업에서의 경영형 부농의 존재는 상공업에서의 도고나 선대제와 함께 조선 후기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싹으로 주목된다. 경영형 부농은 부를 축적한 후 신분 상승에 노력함으로써 봉건 사회 해체기의 새로운 변혁 세력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도고(都賈) 도고란, 조선 후기에 상품을 매점하거나 독점하는 상행위 또는 그러한 상행위를 하는 상인을 말한다. 독점적인 도매업의 방법을 써서 물품을 상대적으로 싼 값에 사들여 비싼 값에 판매하였다. 박지원(朴趾源)의 한문 소설 허생전(許生傳)에 등장하는 허생의 상행위가 당시의 전형적인 도고 행위였다.
도고 상업은 조선 후기 대동법 실시에 따른 공인 자본의 발달, 상업 인구의 현저한 증가, 금속 화폐의 전국적 유통, 그리고 대외 무역의 발달 등을 배경으로 하여 나타났다.
시전 상인이나 공인 등은 그들이 가진 상업상의 특권을 바탕으로 도고로 성장하였다. 경강 상인․송상․만상․내상 등 지방 상인들도 정부와의 관계 및 자신들의 우세한 자본력을 이용하여 조직적이며 대규모적인 도고 상업에 종사하였고, 이를 통해 막대한 자본을 축적해 갔다.
상업에서의 도고의 존재는 농업에서의 경영형 부농이나 수공업에서의 선대제와 함께 조선 후기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싹으로 주목된다.
결작(結作) 양역 변통론에 따라 균역법을 시행하면서,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대신 부족 군포 보충 방법의 하나로 마련한 토지 부가세가 결작이다. 즉,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여타 6도의 지주에게 토지 1결당 쌀 2두 또는 5전의 돈을 징수한 것이다. 처음, 해안 지방에는 쌀(결미 結米)로 거두고, 내륙 지방에는 돈(결전 結錢)으로 징수하였으나, 나중에는 모두 돈으로 통일하였다. 결작은 군역의 일부가 전세화(田稅化)되었다는 점과 양반층에게도 군역의 일부가 부과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아 볼 수가 있다.
공인(貢人) 공인은 대동법 실시 이후에 나타난 어용적 조달 상인이다. 즉, 각종의 공물을 쌀로 대납케 하는 대동법을 실시하면서, 정부는 필요한 물품을 공인을 지정해 조달하게 하고 그 값을 공가(貢價)로 미리 지급하였는데, 이 조달 상인을 공인이라 하였다. 대개 종래 공납과 관계를 맺고 있던 시전 상인, 경주인(京主人), 공장(工匠) 등이 공인으로 지정되는 일이 많았다.공인은 관청으로부터 공가를 받아 필요한 상품을 사서 관청에 납품하였고, 국가에 대한 국역(國役)으로세금을 바쳤다. 이들이 조달 물품의 구입을 위해 서울의 시전 및 각 지방의 여각, 객주와 거래하면서 상업 활동이 활성화되었다. 그리하여 시장권이 확대되고, 아울러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을 촉진시켰으며, 사상(私商)의 활동을 자극하기도 하였다. 더 나아가, 풍부한 자본(공인 자본)을 바탕으로 생산에도 참여하여 수공업 발전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양역 변통론, 호포법(良役變通論, 戶布法) 양역(군포)의 페단이 심화되면서, 견딜 수 없게 된 농민들은 유망(流亡 - 떠돌아 다니거나 도망감)하거나 피역(避役 - 군역을 피하려고 애씀)으로 저항하였다. 농민의 유망과 피역은 봉건 국가로서는 국가 기반을 잃는 위기를 초래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지배층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그 대책을 모색하게 되었다. 즉, 농민의 유망을 법제적으로 막는 호패법이나 오가작통법을 강화하는 한편, 양역(군포)의 폐단을 변통(變通 - 잘 처리하여 해결)하는 논의를 하였던 것이다.
양역 변통 논의는 숙종 때 본격화되었다. 먼저, 양반에게서 천민까지 모두 군포를 내게 하자는 호포론(戶布論)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봉건적 양반층은, 양반과 상민이 같을 수가 없다고 하여 맹렬히 반대하여 채택되지 못하였다. 호포론을 수정하여 모든 정남에게 군포를 부과하자는 정포론(丁布論)이 제시되었으나, 이것도 양반들의 이해와 엇갈려 폐기되었다. 토지 결수에 비례하여 군포를 부과하자는 결포론(結布論)도 제기되었으나 이 역시 부유한 양반 지주, 토호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논의는 영조 때 보다 구체화되어 마침내 균역법의 시행으로 낙착되었다. 즉, 감포론(減布論)에 따라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이면서 결포론의 취지에 따라 결작(토지 1결당 2두)을 부과하기로 하였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군역의 부담이 어느 정도 고르게 되었다고 해서 '균역법'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한편, 호포론은 그 정신이 나중 고종 때 흥선 대원군에 의하여 호포법으로 달성되었다. 즉, 대원군은 양반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종래의 군포를 호포로 개칭하여 이것을 양반에게도 징수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이제까지 과세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양반들도 집집마다 2냥(二兩)씩의 군포전을 납부하게 됨으로써 조세 균등화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된다.
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 양역 변통론에 따라 균역법을 시행하면서,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대신에 국가의 부족 군포 보충 방법으로 마련한 것으로 결작의 징수, 잡세의 국고 전환 외에 선무군관포의 징수가 있었다. 선무군관포란 종래 부유한 양민으로 뇌물을 써서 교생(校生 - 향교 학생), 원생(院生 - 서원 학생)을 칭탁하여 군포를 부담하지 않고 있던 자를 선무군관이라 하여 합법적으로 지위를 인정해 주고, 그 대신 그들로부터 징수한 군관포를 말한다. 이들 선무군관에게는 매년 무과를 통해 합격자에게는 그 해의 선무군관포 부담을 감해 주기도 하였다. 선무군관포의 징수는 불법적으로 군포 면제의 혜택을 받아 온 일부 상류층에게 군포를 징수하였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직파법, 이양법(直播法, 移秧法) <직파법> 볍씨를, 뿌린 땅에서 그대로 키워 수확하는 벼 재배법. 우리 나라의 경우, 선초(15세기 초)까지는 수리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주로 직파법이 이용되었으나, 그후 점차 이앙법으로 이행되어 갔다.
<이앙법> 모내기법이라고도 하는데, 못자리에서 모를 키워 논으로 옮겨 심는 벼 재배법이다. 선초에는 경상도 등 일부 남부 지방에서 이루어졌고, 조선 후기에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갔다. 이앙법은 직파법에 비해 제초 작업(잡초 뽑기, 김매기)에 필요한 노동력을 약 80%까지 절감시킴으로써 1인당 경작 능력을 크게 높여 주었다. 그에 따라 광작이 가능해져, 결과적으로 농민층의 분화(分化)를 가져 오기도 하였다. 이앙법은 또 직파법에 비해 보다 정교한 농법이므로 단위 면적당 수확량을 증가시켜 주었고, 벼․보리의 이모작을 가능케 하여 농민의 소득 증대에도 이바지하였다. 정부는 당초, 가뭄 피해를 우려하여 이앙법을 금지하였다. 우리 나라의 기후 특성상 모내기 철에는 비가 잘 내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당시 위정자들로서는 대규모의 수리 시설을 하기 위한 의지도 없었고, 국가 재정도 따라 주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앙법의 보급은 소규모의 보(洑 - 둑을 막아 흐르는 냇물을 모아 두는 아주 작은 규모의 저수지)를 축조하는 등, 전적으로 잘 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 농민들의 자구적(自救的)인 몸부림의 결과였다.
견종법 밭농사에서 이랑과 이랑 사이의 고랑(골)에 씨를 뿌리는 파종법. 조선 후기 17 ~ 18세기에 널리 보급되었다. 견종법은 배수가 잘 안 되는 단점이 있으나, 수분의 보존이 쉽고, 보온 효과가 높으며, 종자가 바람이나 빗물에 쓸려 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초 작업에서 노동력을 절감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 따라서 보리, 밀 등 겨울 작물에 적합하다. 조선 후기 밭농사에 있어서의 견종법은 논농사에 있어서의 이앙법과 함께 농업 생산력 증대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광작(廣作) 조선 후기, 이앙법의 보급에 따라 농민들의 경작 능력이 향상되면서 많은 토지를 직접 경영하던 영농 방법. 이앙법은 노동력의 절감을 가져 왔고, 그에 따라 한 사람이 경작할 수 있는 경지 면적은 종래에 비해 4배로 늘어 났다. 자작농이나 소작농은 소작지의 확대를 통해서 광작 경영을 도모하였으며, 지주들도 소작을 주지 않고 직접 광작 경영을 시도하였다. 이 때 필요한 노동력은 임노동자로 충당하였다.
광작의 유행은 농민의 계층 분화를 초래하였다. 즉, 광작을 통해 경영의 합리화를 이룩한 농민은 이른바 경영형 부농으로 성장해 간 반면에, 소작지를 얻기도 어려워진 농민들은 농촌과 도시의 임노동자나 노비로 전락하였으며, 또 일부는 도시로 나아가 상공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실록, 사고(實錄, 史庫) <실록> 역대 제왕의 정치를 편년체로 기록한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고려 시대부터 실록이 편찬되어 7 대실록 등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고, 조선 역대 왕의 실록인 조선 왕조 실록만이 전하고 있다. 실록은 왕의 사후에 편찬되는데, 실록 편찬의 기본 자료는 춘추관의 사관이 작성한 사초와 시정기였다. 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실록청을 설치하였고, 실록이 완성되면 실록청은 해체되었다. 완성된 실록은 사고에 넣어 보관하였다. 역사 기록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실록은 한번 사고에 들어가면 사관 이외 에는 아무도 볼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다만 후대 군신들의 귀감을 삼기 위하여, 실록을 토대로 역대 임금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정치만 골라서 누구든지 볼 수 있도록 따로 편찬한 것이 국조보감(國朝寶鑑)이었다.
<사고> 실록 및 주요 서적을 보관하던 고려․조선 시대의 서고(書庫). 조선 시대에는 왜란 이전에 춘추관․충주․성주․전주의 4대 사고가 있었는데, 그 중 춘추관․충주․성주 사고는 임진왜란 중 소실되었다. 광해군 때, 남은 전주 사고본을 토대로 다시 춘추관․태백산․오대산․묘향산․강화 등의 5대 사고를 갖추었다. 그 후 이괄의 난 때 춘추관 사고가 없어졌으며, 묘향산 사고는 적상산(赤裳山)으로 옮겼고, 강화 사고는 마니산에서 정족산(鼎足山)으로 옮겼다. 사고 옆에는 수호 사찰을 두고 승려들로 하여금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훈련도감(訓鍊都監) 훈련도감은 조선 후기 중앙군인 5군영의 핵심 군영으로, 임란 중에 설치되었다. 포수(砲手 - 총과 대포로 무장), 사수(射手 - 활로 무장), 살수(殺手 - 창과 칼로 무장) 등 삼수병으로 편성되었는데, 모두 급료를 받고 복무하는 장번 급료병(長番給料兵 - 직업군인, 용병)이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5군영 가운데 훈련도감만 용병제가 채택되었으나, 나중에는 나머지 군영들에도 모두 용병제가 적용된다. 훈련도감의 삼수병 양성에 필요한 경비는 토지 1결당 2.2 두씩 삼수미를 징수하여 조달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 국왕에 의한 중앙 집권적 전제 정치는 법치주의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으며, 그 정치를 실현하는 최대의 도구, 즉 국가의 정책을 실현하는 수단이 법이다. 따라서, 통일적 법전 편찬은 정치의 필연적 요쳥이었다.
성종 때 완성, 반포된 경국대전의 편찬은, 이로써 조선 왕조 통치의 법적 기초, 즉 통치의 규범 체제가 확립되었다는 데에 커다란 의의가 있다. 이것은 법치주의를 표방한 태조의 의지가 계승, 발전된 것으로, 세조 ~ 성종의 시기에 판례법, 관습법 등 우리 고유의 법을 성문화함으로써 중국법의 무제한적 침투에 대한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경국대전은 조선의 기본 법전으로서, 6 전(典 : '전'이란 태종 때 정해진 법전 편찬 준칙에 의하면 '영구히 시행되지 않으면 안될 법규'이다) 즉, 이․호․예․병․형․공전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吏)전은 관제와 관리의 임명, 호(戶)전은 재정 및 민사, 예(禮)전은 과거, 제례, 외교, 교육, 병(兵)전은 군제와 군사, 형(刑)전은 형벌, 노비, 재판, 공(工)전은 도로, 교량, 도량형 등을 각각 규정하고 있다.
칠정산(七政算) 세종 때 이순지(李純之) 등이 왕명에 의해 편찬한 역서(曆書)인데, 내편(內篇)과 외편(外篇)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 후기 원(元)의 수시력(授時曆)과 명(明)의 대통력(大統曆)이 들어왔으나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지 않아 <칠정산 내편>을 펴낸 것이다. 내편은 중국식이라는 뜻으로, 원의 수시력의 원리와 방법을 이해하기 쉽게 해설한 것이고, 외편은 서역(西域 : 아라비아)의 회회력(回回曆)을 연구하여 해설해 놓은 것이다.
중국의 역서가 베이징(北京 북경)을 기준으로 측정한 결과를 사용한 데 반하여, <칠정산 내편>은 한양을 기준으로 동지와 하지 후의 일출․일몰 시각과 밤낮의 길이를 관측한 값을 기록하였다. 이렇게 우리 나라의 위치에서 천체 운동을 계산해 낼 수 있는 체계를 완성함으로써, 당시 우리 나라는 중국․아라비아에 이어 세계 최고 수준의 천문학을 성취할 수 있었다.
성학십도, 성학집요(聖學十圖, 聖學輯要) <성학십도> 이황이 왕(선조)에게 올린 상소문으로서, 선조가 훌륭한 임금이 되기를 바라면서 임금의 도리를 그림으로 설명한 것이다. 성리학의 심오한 근본 원리와 수양의 방법을 종합 정리하였다. 우리 나라 유교 철학의 최고봉인 이황의 마지막 업적이었으며, 그의 사상의 결정을 보이고 있는 저술이다. <퇴계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성학집요> 이이가 왕(선조)에게 바친 책. 윤리와 정치를 일체로 보고 치자(治者)의 덕을 강조하는 동양의 전통적인 입장에서, 유학의 여러 고전 가운데서 요긴한 대목을 뽑아 체계화하고, 거기에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 것이다. 이것은 왕조 시대의 경세(經世)의 학으로서 가장 널리 읽힌 고전의 하나였다. <율곡전서>에 수록되어 있다.
도첩제(度牒制) 도첩은 국가가 승려에게 그 신분을 인정해 주는 증명서인 동시에, 군역을 면제해 주는 증명서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도첩제의 엄격한 시행은 그 목적이 군역의 면제자인 승려의 수를 억제하는 한편, 승려의 질적인 향상도 아울러 꾀하려는 데 있다. 세조는 도첩제를 조정하여 전보다 자격을 완화해, 승려가 되려면 교종이나 선종의 본산(本山)에서 치르는 시험에 합격한 후 포 30필을 바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완화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무도첩 승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강제로 군적에 편입시키는 강권을 발동해야 하였다. 성종 때에는 도첩제 자체를 폐지하여 국가에서 승려가 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승려가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동문선(東文選) 성종 때 서거정(徐居正)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시문집. 신라에서부터 선초에 이르기까지의 작가 약 500 명의 시문(詩文) 4,302 편을 수록하였다. 삼국 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의 한문학 자료를 집대성하여 우리의 민족 문화를 정리하려 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서거정은 서문에서 "우리 나라의 글은 송(宋)이나 원(元)의 글이 아니요, 곧 우리 나라의 글이다."라고 하여, 우리의 문학 전통을 중국의 것과 나란히 두어 독자적인 것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동문선은 우리 문화를 주체적으로 인식하려 했다는 점에서 통일 신라 시대의 화랑세기(김대문), 고려 말의 동명왕편(이규보) 등과 함께 연결을 지을 수가 있다.
붕당 정치(朋黨政治) 붕당 정치(朋黨政治)란 조선 후기, 학연과 지연을 같이 하는 사림(士林)끼리 붕당을 조성하고 국왕의 신임을 얻어서 국정을 주관하는 정치 형태를 말한다.
붕당 정치는 공도(公道)와 공론(公論)을 존중하는 사림의 정치 이념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이 정상적으로 운영되던 17세기에는 인사권, 예송 논쟁 등을 둘러싸고 붕당끼리 대립하면서도(주로 서인과 남인) 비판 세력의 공존을 허용함으로써 관료들의 정치 비판 기능이 커지고, 개인의 의견보다는 집단 의사라 할 수 있는 공론이 정치를 주도하게 되어 정치의 부패가 그만큼 줄어드는 측면도 있었다. 이러한 점은 붕당 정치가 서양에서의 민주적 정치 운영에 입각한 정당 정치와 비슷한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17세기 말(숙종) 이후 권력의 독점적 추구와 외척 세력의 개입으로 붕당 정치가 변질되면서 붕당 간의 대립은 권력의 장악에만 집착하였고, 마침내 일당 전제화 추세가 되면서 점점 적대적 관계로 변해 갔다. 즉, 경신환국(숙종 6, 1680)으로 집권한 서인은 윤휴, 허적 등 다수의 남인을 주살하였고, 이에 다시 기사환국(숙종 15, 1689)으로 정권을 장악한 남인은 서인의 송시열, 김수항 등을 제거하여 보복하였다. 이어서, 갑술환국(숙종 20, 1994)으로 다시 집권한 서인은 남인을 철저히 숙청하였던 것이다.
경신환국(庚申換局) 조선 숙종 6년(1680),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게 된 사건. 현종 15년(1674), 이른바 제2차 예송에서 승리하고 득세한 남인이 권력을 강화하자 숙종은 남인을 견제하기 시작하였다(숙종의 편당적 조처). 군권(軍權)을 빼앗아 서인에게 주는 등, 숙종이 남인을 멀리하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자, 서인은 당시 영의정인 남인의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과 인평 대군(麟坪大君, 인조의 셋째 아들, 효종의 동생)의 세 아들인 복창군(福昌君), 복선군(福善君), 복평군(福平君) 등이 반역을 꾀한다고 모함하였다. 숙종은 복창군 등 3형제와 허견, 허적, 윤휴를 사사(賜死)하고 나머지 남인들은 파직, 유배, 옥사시켰다. 이후 정권은 서인에게 넘어갔으며, 남인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붕당 간의 대립은 보복과 살육으로 전개되어 갔으며, 붕당 정치는 변질되어 비판 세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일당 전제화의 추세를 띠게 된다.
벽파, 시파(僻派, 時派) 장헌 세자(莊獻世子, 곧 사도 세자 思悼世子 - 영조의 아들이며, 정조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여 대립하게 된 정파(政派). 즉, 벽파는 장헌 세자의 근실하지 못함을 비판하면서 영조의 조처를 지지하였고, 시파는 영조의 덕이 없음을 비난하고 장헌 세자를 동정하였다. 벽파는 대개 노론 강경파였고, 시파에는 당시 불우했던 남인과 소론이 많았는데 일부 노론도 가담하였다.
시파․벽파의 분립(分立)이 표면화된 것은 정조의 탕평책이 시행되면서부터였다. 정조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탕평책을 통하여 종래의 노론 우위의 정국에 변화를 일으켜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하였을 때, 이에 대해 지지를 표명한 정파가 시파였으며, 반대의 입장을 드러낸 정파가 벽파였던 것이다. 시파․벽파의 분립으로 남인․북인․노론․소론의 붕당은 명색만 남게 되고, 정계는 시파와 벽파 등 두 개의 정파로 개편되어 사사건건 정치적 대립을 일삼게 되었다. 정조는 자연히 시파와 가까웠다. 그러나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가 즉위, 영조의 계비 김씨가 섭정하게 되자, 친정인 경주 김씨가 노론 벽파였으므로 벽파가 시파를 누르게 되었다. 순조 1년(1801)의 신유박해(辛酉迫害)는 천주교 탄압도 탄압이지만, 시파 가운데 천주교 신도가 많은 점에 착안하여 벽파가 시파를 숙청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작용하였던 사건이었다. 순조 3년 수렴 청정이 끝나게 되자, 이번에는 시파가 벽파에 반격을 가하였다. 이처럼 순조 이후의 시․벽파의 대립은 왕권이 약화된 상태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정권의 우위를 유지하기 위한 맹목적인 투쟁으로만 일관하였고, 붕당 정치의 긍정적인 측면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비변사(備邊司) 처음 중종 때 삼포왜란(三浦倭亂)을 계기로 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이때는 지변사 재상(知邊事宰相 - 변방의 사정에 밝은 고위 무관)을 중심으로 국방을 담당하는 임시 기구였다. 그러다가 명종 때 을묘왜변(乙卯倭變)을 계기로 상설 기구가 되었다. 그러나 구성은 여전히 지변사 재상 중심이었고, 따라서 기능도 군무 협의에 국한되었다. 그러다가 선조 때 임진왜란을 계기로 그 구성과 기능이 크게 강화되었다. 즉, 구성을 보면 3정승으로부터 공조(工曹)를 제외한 5조 판서, 군영의 대장들, 유수, 대제학, 군무(軍務)에 밝은 현직․전직 고관 등 당상관(堂上官) 이상의 문․무 고관이 대거 참여하였고, 이에 따라 기능도 강화되어 군무뿐만 아니라 정치․외교 및 일반 정무까지 처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비변사는 임란 후에도 존속되었다. 이렇게 비변사의 구성과 기능이 확대, 강화됨으로써 최고 정무 기관이었던 의정부는 사실상 유명 무실해졌고, 왕권도 약화되었다. 조선 후기 왕권의 약화를 초래한 정치 기구가 비변사였다. 비변사는 나중 고종 때 흥선 대원군이 왕권 강화 차원에서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부활함으로써 사실상 폐지되었다.
예송 논쟁(禮訟論爭) 예송 논쟁이란 예법에 대한 송사와 논쟁으로서 예론(禮論)이라고도 한다. 당시,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하는 사림 사회에 있어서 예(禮)의 문제는 바로 모든 사회 질서의 기본적인 규범이었으므로, 예론을 중심으로 한 붕당 상호 간의 대립은 곧 정통성에 관련하여 필연적인 것이었다.
예송 논쟁은 효종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제1차 예송, 1659). 효종의 상(喪)에 효종의 계모로 인조의 계비인 자의 대비(慈懿大妃), 즉 조 대비(趙大妃)가 갖출 복제(服制)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효종이 차남으로서 왕위에 오른 때문이었다. 이 때, 실권을 잡고 있던 송시열 등 서인은 효종이 비록 왕위에 오른 임금이라 하더라도 차남이기 때문에 1년 기한의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윤휴 등 남인은 현재적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성리학을 탄력적으로 이해하여 효종이 비록 차남이었어도 대통을 이었기 때문에 종통(宗統)으로서 3년 기한의 대공복(大功服)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때는 집권당인 서인의 주장인 기년설이 채택되었다.
그 후, 이번에는 효종비의 상을 당하여 또다시 조대비의 복제 문제가 제기되었다(제2차 예송, 1674). 이 때, 서인은 전날과 같은 논리로 9 개월의 대공설을 주장하였는데, 이에 대해 남인은 역시 같은 논리로 기년설을 내세워 서인을 적극 공격하였다. 이번에는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남인이 득세하는 계기가 되었다.
장용영(壯勇營) 정조 15년(1791) 수원(水原)에 설치하였던 군영으로 국왕의 친위군이었다. 아버지 사도 세자(思悼世子)가 참화를 당한 뒤 왕세손에 책봉되었다가, 신변의 위협 속에서 즉위한 정조는 영조의 뜻을 이어 탕평책을 실시하려 하였다. 그것은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고, 강화된 왕권의 기반 위에서 나름대로의 정치를 펴고자 하는 것이었으니, 이에 남인 시파를 중용하고 진보적 지식인 및 서얼 계층을 기용하여 자신의 정치 세력으로 삼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규장각을 설치하여 정책 자문 기구로 삼고, 수원성을 새로이 수축하여 자신의 세력 근거지로 삼는 한편, 이 곳에 친위군 성격의 장용영을 설치하여 붕당들의 세력 기반이었던 기존의 군영에 대항하여 자신의 군사적 기반을 구축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측근이었던 채제공(蔡濟恭)을 수원 유수로 삼아 장용영 도제조로서 지휘권을 가지도록 하였다. 지휘관으로는 대장, 영장 등이 있었고, 군병의 총 수는 1만 2천여 명이었다. 장용영은 나중 순조 2년(1802) 총리영(總理營)으로 개칭되었다.
규장각(奎章閣) 정조가 즉위한 직후(1776) 궁중에 설치하였던 왕립 도서관으로서, 역대 국왕의 시문, 서화, 선보(璿譜 - 왕실의 족보) 등을 보관, 관리하였다. 내각(內閣)이라고도 하였다. 규장각은 단순히 학문 연구와 도서 편찬의 일만이 아니라, 국왕의 정책 자문 기구로서의 역할이 컸다. 초기에는 홍국영(洪國榮)의 지휘 아래 정조의 적대 세력을 숙청하는데 앞장 섰으며, 정세가 안정되자 진보적 학자들을 모아 학문을 연구하고 정치를 논하는 등 문물 정비에 힘썼다. 결과적으로 규장각은 외척과 환관을 눌러 왕권을 신장시키고 붕당의 비대화를 막았으며, 문예와 풍속을 진흥시키는 등 왕권 강화에 활용되었다. 특히, 검서관(檢書官)에는 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서이수(徐理修) 등 유능한 서얼 출신 학자들도 기용함으로써 정조의 서얼허통(庶孼許通 - 서얼의 관직 진출 제한을 푸는 것)의 의지를 보이기도 하였다.
통신사(通信使) 조선 후기 일본에 파견한 사신이 통신사이다. 개항 후에는 수신사(修信使)라고 하였다. 한편, 개항 이전 일본에서 조선에 파견하는 사신은 일본 국왕사라 하였는데, 이들의 서울 입경(入京)은 허용되지 않았고, 그들은 동래에만 머물도록 제한되었다. 통신사 일행은 3백 명에서 5백 명 내외로, 일본의 수도 에도까지 가서 국빈으로 대접받았다. 통신사의 영접은 바쿠후(幕府)의 가장 크고 성대한 의식이었다. 이 사실은 통신사의 일기와 통신사가 갈 때마다 일본측에서 그려 놓은 통신사 행렬도를 통해 확인된다. 통신사는 조선의 선진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기유 약조(1609, 임진왜란 후의 국교 재개 조약) 이후 모두 13 차례의 통신사가 파견되었다.
삼정(三政)의 문란 조선 후기(특히 18․9 세기), 국가 재정의 근본을 이루었던 세 가지 수취 행정이 삼정(三政)인데, 삼정은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 등이었다. '삼정의 문란'이란 그 수취 행정이 관리의 부정 부패로 잘못 운영된 것을 말한다. 그 결과 농촌 경제는 황폐화되고 말았고, 19세기에는 전국 각지에서 민란의 봉기를 야기하였다. 전정은 토지에 대한 세무 행정인데, 당시 토지에 대한 기본적인 세금으로는 전세(1결당 4두), 삼수미(1결당 2.2두), 대동미(1결당 12두), 결작(1결 당 2두) 등이 있었다. 전정의 문란상을 보면, 경작하지 않은 땅이나 토지 대장에 없는 땅에 징세한다든지, 정액 이상의 세를 징수한다든지 하는 경우가 많았다.
군정은 군포 징수 행정인데, 균역법 실시 이후로는 원칙상 장정 1인당 연간 포1필씩을 거두었다. 군정의 폐단으로는 족징(族徵 - 도망지의 군포를 일가 친척들에게서 징수하는 것), 인징(隣徵 - 도망자의 군포를 이웃에게서 징수하는 것), 백골징포(白骨徵布 - 죽은 사람에게 군포를 부과하여 식구들에게서 징수하는 것), 황구첨정(黃口簽丁 - 어린이의 나이를 높여 장정으로 취급하여 식구들에게서 군포를 징수하는 것) 등이 있었다.
환곡은 춘궁기에 가난한 농민들에게 국가의 미곡을 빌려 주었다가 가을에 10%의 이자(모곡 耗穀)를 가산하여 징수하는 이른 바 춘대추납(春貸秋納) 업무였다. 19세기에는 환곡의 폐단이 가장 심하였다. 예를 들면, 강제로 빌려 주고 이자를 받는다든지, 재고가 있는 것처럼 꾸며 놓고 실제로는 횡령 착복한다든지, 정해진 것보다 높은 이자를 징수한다든지, 쌀에 겨 등 이물질을 섞어 빌려 주고 회수할 때는 이자까지 가산하여 전액 쌀로 징수한다든지 하는 것 등이었다.
삼정의 문란은 농민의 몰락을 가속화하였으며, 국가 재정을 어렵게 만들어 봉건적 통치 체제 그 자체를 위협하였다. 정부는 암행 어사를 파견하여 탐관 오리를 처벌하고, 특별 관청인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폐단을 막으려 하였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19세기 세도 정치의 폐단에 따른 삼정의 문란은 농촌 경제의 파탄을 초래하게 되었고, 전국 각지에서의 광범위한 민중 봉기(민란, 홍경래의 난과 임술 봉기 등)를 불러 일으켰다.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라고도 하는데, 산수의 모습을 실제의 경치 그대로 그린 산수화를 말한다. 종래의 산수화는 작가에 의해 주관적으로 추상화되고 이념화되었는데, 조선 후기에 자의식이 성장하면서 한국 고유의 산수를 개성있게 묘사하기 시작하였다.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사람은 18세기 초의 정선(鄭敾)이었다. 그는 각지를 직접 답사하면서 한국의 산이 주로 중량감있는 바위산임을 인식하고, 이를 사실적으로 그려 내는 화풍을 창안하여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하였다..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금강전도(金剛全圖)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권반, 향반, 잔반(權班, 鄕班, 殘班) 조선 후기 양반의 증가는 양반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양반의 계층 분화를 초래하였다. 즉, 양반이라 해서 다 같은 것이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다양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붕당정치의 변질과 함께 양반 관료들의 정치적 대립과 분열은 더욱 가열되었고, 그로 말마암아 극소수의 집권 세력이 형성되는가 하면, 정계에서 탈락, 소외되는 절대 다수의 몰락 양반도 생겨났다. 이 때, 권력을 장악한 소수의 양반 가문이 권반인데, 흔히 벌열(閥閱)이라고도 하였다. 한 편, 정치 권력에서 탈락, 소외된 절대 다수의 양반들은 그 처지에 따라 다시 향반과 잔반으로 나뉘어졌다.
양반들은 관직에서 물러나면 대개 낙향하기 마련이었다. 향반은 토반(土班)이라고도 하였는데 향촌 사회에서 토호적인 경제 기반을 가지고 어느 정도 행세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몰락 양반의 대부분은 잔반으로서 양반의 체통을 유지할 수도 없었으며, 빈궁한 생활이나마 일을 하지 않고서는 생계조차 영위하기가 어려운 처지였다. 몰락 양반은 자연히 현실 사회에 비판적이었다. 그리하여 새로이 보급된 서학, 동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으며, 실학이나 양명학을 연구하기도 하였고, 민중의 항거에 호응하기도 하였다.
향안, 향회(鄕案, 鄕會) <향안> 유향소(留鄕所)를 운영하던 지방 양반의 명부. 이 향안에 등록된 구성원을 향원(鄕員)이라 하였는데, 향원이 되어야 비로소 양반으로서의 대우를 받아 지배 신분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
<향회> 향안에 등록되어 있는 향원들의 모임. 양반의 지방 지배 기구인데, 향원 가운데서 뽑힌 향임(鄕任 - 간부)들의 모임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사족(士族 - 곧 양반)의 공통된 이익을 지키고, 수령의 권한을 견제하고, 향리층을 통제하였으며, 향민들에게 지배력을 행사하였다. 사족이 한 고을을 지배할 수 있었던 실질적인 최고 기구였다. 향회는 조선 후기 양반 지배 체제가 무너지면서 18세기 후반에는 수령의 단순한 부세(세금 부과) 자문 기구로 성격이 바뀌어 갔다. 그와 함께 구성원에 부농층이 참여하게 되면서, 사족들과 향촌 지배권을 놓고 이른 바 향전(鄕戰)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향전(鄕戰) 조선 후기 향촌 사회에서 향권(鄕權 - 향촌 사회 지배권)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던 여러 가지 형태의 대립. 그 기본적 성격은 향권을 장악하고 있던 기존의 사족 (士族 - 전통 양반) 세력에 대항하는 새로운 사회 세력, 특히 부농층(富農層 - 부를 축적하고난 다음 신분 상승에 성공한 신흥 양반)의 도전이었다. 향전은 향촌 사회의 권력이, 기존의 지배층으로부터 당시 성장하고 있던 새로운 사회 세력으로 옮겨가고 있었던 사실을 반영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백두산 정계비(白頭山 定界碑) 조선 숙종 38년(1712), 조선과 청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백두산에 세운 비석. 백두산 일대의 만주 지방은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였는데, 청이 이 곳을 중심으로 건국한 뒤 그들의 근거지라 하여 신성시하고 주민의 거주를 금지하였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우리 조상들이 지리상 가까운 이 지역을 개척, 거주하는 경우가 점차 많아졌다. 이에 청은 조선에 경계를 분명히 하자고 하여, 목극등(穆克登)을 파견하니, 조선에서도 박권(朴權) 등을 보내 함께 답사하고 백두산 기슭에 정계비를 세웠다. 정계비는 백두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약 4 km 떨어진 해발 2,200m 지점에 세워졌는데, 그 비문에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이라 하여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을 국경선으로 한다고 하였다. 뒷날 19세기 후반, 토문강을 청은 두만강, 조선은 송화강의 상류라고 해석하여 간도를 각각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간도 귀속 문제'가 야기되었다. 그후 융희 3년(1909) 일본은 청과 간도 협약을 체결하고, 우리의 영토였던 간도 전역을 중국에 넘겨 주고 말았다. 이 비는 1931년 만주 사변 직후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
정감록(鄭鑑錄) 조선 후기(특히 19 세기),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던 대표적인 비기(秘記 - 예언서)로서 국가의 운명과 백성의 존망에 관해 예언하고 있다. 이(李)씨의 조상 이심(李沁)이 정(鄭)씨의 선조 정감(鄭鑑)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쓴 것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실제 작자나 편자는 알 수 없다.
정감록은 궁극적으로, 조선은 멸망하며 정(鄭)씨 성을 가진 진인(眞人)이 나타나서 계룡산(鷄龍山)을 수도로 하여 8백년 왕조를 세울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따라서 정부의 금압을 받았다. 그러나 민간 신앙으로 널리 퍼져 나가 동학 사상 형성의 주요 요인의 하나가 되었으며, 철종 때의 임술 민란 등 19세기 여러 농민 봉기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미륵 신앙 불교 신앙의 한 형태로서, 먼 장래에 미륵불이 나타날 것이며, 그 때에 이 세상은 낙토(樂土)로 변할 것이고, 미륵불은 부처님이 미처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모두 구제해 준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적 이상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 말(궁예), 고려 말, 조선 후기 등 사회가 혼란하고 민심이 불안할 때 주로 유행하는 경향이 있었다. 조선 후기의 현실은 흉년, 질병, 재해 등으로 절망적인 상황이었고, 그리하여 민중은 가난과 불안과 고통으로 허덕이고 있었다. 민중들은 이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여 자연히 이상 사회의 도래를 약속하는 미륵 신앙에 쉽게 귀의하였다. 심지어 일부 무리들은 살아 있는 미륵불을 자처하고, 광제 창생(廣濟蒼生)을 내세우며 민심을 현혹하기도 하였다.
강화 학파(江華學派) 양명학의 전래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16세기 말 이미 양명학의 저술인 전습록(傳習綠)이 전해졌고, 이황이 이에 대한 비판을 한 바 있었다. 성리학의 열기로 그 연구가 뚜렷하지는 못하였으나 성리학의 교조성에 반발한 일부 학자들은 이에 관심을 보였으니, 남언경(南彦經), 이항복(李恒福), 이정구(李廷龜), 신흠(申欽), 최명길(崔鳴吉), 장유(張維) 등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드러내 놓고 양명학을 논하지는 못하고 은밀히 전승하였는데, 그것은 양명학이 정통 성리학자들로부터 사문난적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양명학이 학문적 체계를 수립하고, 하나의 학파를 이룩한 것은 17 기 말, 18세기 초의 소론 출신인 정제두(鄭齊斗)에 의해서였다. 그는 맹자의 이론을 바탕으로, 양명학적 심학관(心學觀)을 구체화하고 체계화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주자와 대립된 입장에서 심즉리(心卽理)설을 제시하고, 일체의 학문이 양지(良知)를 파악하는데 집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학설의 체계화와 아울러, 후진의 양성에도 힘을 기울여 강화(江華)를 근거지로 하여 이광사(李匡師) 등 많은 제자를 두어 강화 학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광사는 이긍익(李肯翊) 등으로, 다시 이면백, 이시원을 거쳐 19세기 말에는 이건창(李建昌), 김택영(金澤榮), 박은식(朴殷植) 등(한말 국학자)으로 그 학맥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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