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역사탐방 24탄
4 · 19 혁명 ~ 5·16 군사정변 (1960년~1972년)
http://cafe.daum.net/cultureSpice 문화양념통 오늘의 역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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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227 이준열사 유해 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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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4.19혁명(1960년 4월) ~ 10월 유신(1972년 12월) 이전의 내용을 구글, 다음, 네이버, 위키백과에서 발췌하여 사진과 글을 요약한 것이다. 또한, 관련 유적지를 소개하여 역사탐방에 도움이 되고자 작성한 내용이다. 작성한 날이 공교롭게 박정희 사망과 일치하나, 본 내용은 이념이나, 12월 대선과도 관련 없음을 명시하며,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참고로 추후, 2탄으로 10월 유신(1972년 12월)과 박정희 사망을 다룰 예정이다.
한국의 군정기 (1945년 ~ 1948년 8월)
한국독립당(1930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1946년 )
제주도4·3사건 (1947년~1954년)
5·10 총선거(1948년 5월)
대한민국 제헌국회 (大韓民國 制憲國會 1948~1950) - 이승만, 신익희, 김동원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48년 8월 )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 (1948년)
남북협상(1948년)
여수·순천사건(1948년)
국회프락치사건(1949년)
농지개혁 (1949년 ~ 1951년)
한국 전쟁 (1950~ 1953~현재)
대한민국 (1948년 ~ 현재)
이승만(李承晩 1875년 4월 ~ 1965년 7월)
제1공화국 (1948년 7월~1960년 4월)
4·19 혁명 (1960년 4월, 4월혁명)
장면 (張勉, 1899년 8월 28일 ~ 1966년 6월 4일)
제2공화국 (1960년 6월 15일부터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朴正熙, 1917년 11월 14일 ~ 1979년 10월 26일)
5·16 군사정변 (1961년 5월 16일)
제3공화국( 1961년 군정 후 1963년 ~ 1972년 10월 )
제4공화국 (1972년 10월유신 ~ 1979년 10.26사건)
10.26사건 (1979년 10월)
최규하 정부(1979년 10월 ~ 1980년 8월)
12·12 군사 반란 (1979년 12월 12일)
5·17 쿠데타 (1980년 5월 17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980년 5월 18일)
제5공화국 (1980년 ~ 1987년)
노태우 정부 (1987년 ~ 1993년)
6월 항쟁 (1987년 6월 10일 ~ 6월 29일)
6·29 선언 (1987년 6월)
2부 비운의 공화국
제2공화국 (1960년 6월 15일~ 1961년 5월 16일)
1960년 6월 15일부터 1961년 5월 16일까지 불과 11개월간 존속했던 대한민국의 두 번째 공화 헌정체제이다. 제2공화국 체제는 1960년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된 후, 허정 과도정부(1960년 4월 27일 - 6월 14일)를 거쳐 6·15 개헌에 의해 설립된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한 내각제 기반의 헌정체제이다. 대통령은 윤보선, 국무총리는 장면이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후, 민주당이 주도한 국회는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를 권력 구조의 핵(核)으로 헌법을 개정하였다. 이 헌법에 따라 총선거가 실시되어 민주당의 장면 내각이 들어섰다. 민주당 정권은 자유주의 정치이념을 기반으로 경제개발계획을 통한 산업입국을 꾀했으나, 장면의 민주당 신파와 윤보선의 민주당 구파 사이의 정치적 갈등으로 이러한 계획을 구체화할 정치적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고 4·19 혁명을 계기로 분출된 각계 각층의 요구에도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였다. 장면정권은 군사반란의 조짐을 보고받고도 미국에 기댄 안이한 판단으로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사반란세력에 속수무책으로 정권을 탈취당하였고, 결국 제2공화국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붕괴되었다.
1960년 6월 15일 내각제 개헌안 통과
의원내각제, 국민의 기본권 보장 강화, 국회 양원제, 지방자치제 실시
국무총리에는 4월 27일 이후 내각수반
2. 장면 정부 (1960~1961)
1960년 8월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 당선
장면의 민주당 신파와 윤보선의 민주당 구파 간 파벌 갈등 특히, 공무원 인사와 국군통수권을 대립
1960년 10월 11일 국회의사당 점거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사반란세력이 벌인 5·16 군사쿠데타로 붕괴 이후 1963년 12월 27일 제3공화국이 출범하기 전까지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군정(軍政) 체제로 들어간다.
개혁에 대한 소극적인 대처
제4차 헌법개정으로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법'이 제정
남북 평화통일 운동을 전개
장면정권은 이러한 다양한 사회적 요구와 들뜬 분위기에 적절히 대응하고 관리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구파의 윤보선 대통령은 제2공화국 정부가 각계에서 분출된 자유화 요구로 정권 초기현상을 겪고 있는 와중에 명목상의 국가원수임에도 공공연한 간섭과 비난성명으로 장면정권에 부담을 주는 등 제2공화국 정부의 정치기반은 취약했다. 또한, 연이어 벌어지는 시위를 정부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자 사회혼란에 대한 우려도 커졌다.
특히, 국군통수권을 두고 벌인 두 사람의 권력다툼은 군사반란의 빌미로 작용했다.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국무총리 장면은 수녀원으로, 대통령 윤보선은 자기에게는 '군통수권이 없다'며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와 주한 미국 대리대사가 요청한 쿠데타 저지 목적의 병력동원 허가를 거부함으로써 군사반란을 사실상 방조하는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모습을 보여 헌정질서 중단을 초래케 했다.
한일국교정상화 교섭을 재개
1961년 2월 27일 국토건설단 창단
국토건설본부(國土建設本部) 또는 국토건설단(國土建設團)은 대한민국 국무총리 장면이 미취업 대학생과 인력을 구제할 목적으로 1961년 3월 창립하였다. 그러나 5·16 군사 정변 이후 당초의 국토개발과 일자리 확충이라는 설립 취지가 변질되어 불량배들과 군 미필자의 강제 징집 목적으로 활용되다가 1962년 12월 해산되었다.
5월 18일 박정희의 주도로 비상통치기구인 국가재건최고회의 발족 (의장: 장도영, 부의장: 박정희).
5월 19일 대통령 윤보선, 하야 발표
5월 21일 국무총리 장면, 내각총사퇴 발표.
1962년 3월 23일 대통령 윤보선 하야
3. 박정희 군정 (1961~1963)
3부, 군사 쿠테타에서 계속을 참조하세요.
허정 (許政, 1896년 4월 8일 ~ 1988년 9월 18일)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정치인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의 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을 보좌하였다. 1928년에는 교포신문인 삼일신보를 창간, 발행하다 귀국, 충남의 형석광을 매입, 광업과 상업에 종사했다.
광복 직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으나 호헌동지회와 민주당 결성에는 불참했다. 이승만 내각에서 1948년 교통부 장관·1950년 사회부 장관·국무총리 서리를 거쳐 1952년 무임소 장관에 재임중 부산정치파동으로 사퇴했다. 1957년부터 1959년까지 제9대 서울특별시장을 지내고, 1959년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일본에 다녀온 뒤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고 1960년 4월 외무부 장관에 발탁되었다가 4·19 혁명 이후 내각 수반과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냈다.
1960년 4월 27일부터 1960년 6월 16일까지, 1960년 6월 22일부터 1960년 8월 12일까지 대통령 권한대행이었으며 1960년 4월 27일부터 1960년 6월 15일까지 내각수반이었다. 6월 15일부터 8월 18일까지는 제6대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지내기도 했다. 1963년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하였으나, 후보단일화를 위해 사퇴하였다. 이후 박정희 정권 기간 중에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제5공화국 때는 정계원로로서 자문역할을 하기도 했다. 4·19 혁명 이후 이승만에게 하야를 권고하기도 했다.
대한인 공동회
대한인 동지회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삼일신보
흥업구락부
조선어학회 사건
한국민주당
신탁통치반대운동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미소공동위원회
제헌 국회의원과 헌법 기초위원
호헌동지회와 민주당 불참
제9대 서울특별시장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
혼란 수습와 이승만 망명 주선
부정선거 후유증 수습
1962년 3월 정치활동정화법와 정계복귀
이승만 박사 환국추진회의 결성
산책데모
국민의 당 창당와 야당 정치인
5대, 6대 대통령 선거후보
정계 은퇴와 국정 원로로 국토통일원 고문, 국정자문회의
4.19 사태는 혁명으로 보고 싶지 않다 '4월의 사자들'의 민주회복을 위한 투쟁은 의거였고 결코 혁명은 아니었다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 허정은 이승만 정권의 연장을 의미했다. 혁명의 불길을 개혁의 성격으로 전환시키면서 사회를 안정시켰다는 기여를 지적할 수 있다.
역사학자 이병도는 그가 4·19 혁명 당시에 내각의 수반 내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다난한 시국을 수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70]고 평가하였다. '어수선한 판국의 수반으로서의 우양은 각료, 기타 부하들을 잘 통솔하여 과오없이 뒤처리에 진력하였고, 특히 공명한 총선거를 치른 후 민주당 내각에 정권을 넘겨주었다. 가히 공성명수, 신퇴(功成名遂, 身退)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라 하겠다.'
작가 박종화는 '정계의 거성'(巨星), '한국 근대 정치사의 산증인'이라고 평가하였다.
유진오는 '빛나는 경력을 가진 정계의 거물이라면 보통은 마주 앉으면 어째 거북함을 느끼는 것이 보통인데, 우양은 남에게 그러한 냄새를 풍기지 않는 분이다. 소탈하다고 할까, 학자 타입이라고 할까, 옛날 선비풍이라고 할까, 우양은 그런 인품의 분이다.'라고 평가했다.
4.19 혁명 당시 국민적 동의 없이 독단적으로 이승만을 출국시킨 것과 3.15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등 미약한 대처를 했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http://gonews.kinds.or.kr/BEFORE_90_IMG/1988/09/19/19880919DAM01.pdf
http://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89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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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7KOR_A1896_1_0014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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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尹潽善, 1897년 8월 26일 ~ 1990년 7월 18일)
대한민국의 정치가이자 제4대 대통령, 독립운동가, 공무원, 정당인, 사회운동가이다. 국회의원과 1948년 12월 15일부터 1949년 6월 5일까지 서울 시장을 지냈고,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1960년 8월 13일 ~ 1962년 3월 23일)을 역임하였다. 1960년부터 1962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1960년부터 1961년까지 장면(張勉) 국무총리가 실권을 맡았고 1961년부터 1962년까지 박정희(朴正熙) 장군이 실권을 맡았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일시적으로 참여하였고, 신규식의 권고로 영국 유학을 다녀왔다. 미군정기와 제1공화국의 야당 정치인이었으며 국회의장 이승만의 비서관과 서울특별시장, 상공부 장관,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거쳐 제2공화국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대통령 사퇴성명을 발표했다가 민주당 정권이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군부에서 대통령직에 있어달라는 요구를 수락, 사퇴성명을 번복했다.
1962년 3월 하야 이후부터는 반독재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였으며, 박정희를 군부 내 좌익 프락치라고 규정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제5대 대통령 선거과 제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기도 하였다. 이후 한일회담 반대운동, 민주회복국민선언, 명동구국선언 등에 참여하였으며, 군사정권하에서 여러번 기소와 재판에 회부되었다. 조선 선조 때의 문인인 윤두수의 후손으로 대한제국의 관료 윤웅렬의 종손이며 윤치호의 종질이다. 자칭타칭 '정신적 대통령', '영국 신사', '재야 대통령'으로도 불렸다.
그는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이기도 했고, 허정, 이갑성과 함께 3.1절과 광복절 기념식 때 늦게까지 초대된 독립운동가 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5·16 군사 정변 협력 논란이 양립하고 있다. 5·16 군사 정변을 방조했다는 의혹을 받아왔으나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중 박정희의 라이벌이었으며, 3공과 유신시절 내내 민권투쟁에 앞장섰고, 김영삼·김대중이 등장하기 전까지 야당을 이끌었으며 '선명야당'을 강조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태평양 전쟁과 창씨 개명 거절, 은둔생활
국민대회 준비위원회
한국민주당
정부수립과 제헌의원 낙선
서울시장 재임
각료 사퇴와 야당화
이승만과의 결별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
민주당 최고위원
집권 1년차, 1960년 12월 30일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직접 이름을 개칭
집권 2년차, 국무총리 장면의 권한이던 인사권 문제에 개입
5.16 군사 정변 직후,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국헌 준수를 서약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만큼, 지금 병력 동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의무의 포기가 하닌가'하고 힐책하였다. 계엄령 사후 추인과 정변지지성명 발표 요구 거절
군정기간 중 (1962~1963), 1961년 5월 19일 햐야선언과 번복, 1961년 5월 19일 대통령직 사퇴 발표
대통령직 사퇴, 안국동 사저에 칩거
1963년 3월 박정희가 군정연장을 발표하자, 산책데모
야당 활동과 민주화 투쟁
민정당(民政黨) 창당과 후보 단일화 과정
5대 대선과 사상 논쟁
제3공화국 시절, 대선 출마와 낙선
윤보선 암살 미수 사건
박정희와 대결, 월남 파병 반대
1964년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상을 굴욕, 매국외교로 규정, 한일협상 반대운동을 시작
민중당(民衆黨) 고문
1965년 6월 국회의원직 사퇴
1964년 6월 박정희 정권의 한일 협상에 반대하여 일으킨 운동이었다. 1964년 6월 3일 박정희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여 당시 절정에 이른 한일국교정상화회담 반대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6월 3일에 선포한 계엄은 7월 29일 해지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매년 6.3 항쟁을 남조선 청년학생봉기이라고 부르면서 기념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인 이명박이 청년시절 이 시위에 참여했었다.
서울대 문리과 학생회장 김덕룡의 선언문을 비장한 선언문
한일회담 반대 운동
유진산과의 갈등 그리고 신한당 창당
제6대 대통령선거 재출마와 낙선
박정희와의 대결과 갈등
장준하
제4공화국 시절, 유신 이후 야당 지도자 3.1 구국 선언, YMCA 위장 결혼 사건 등 민주화 운동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자에 김대중이 선출과 국민당 창당
인민혁명당 사건 1964년, 1974년
10월 유신 1972년
민주회복국민회의의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1976)
1974년 민주회복국민선언
김상진 할복 자살 사건1975년
민주구국헌장 1977년
1978년 1월 6일 재야인사들과 곧동으로 옥중에 수감중인 민주인사를 위문하는 성명서를 발표
10·17 민주국민선언과 10.26 전후
1979년 3월 1일 민주주의국민연합
김영삼 제명 파동
1979년 5월 신민당 총재상임고문후 사실상 정계은퇴
최규하 정부 시절 YMCA 위장결혼식 사건
제5공화국 협력
민청학련 관련자 구명운동
1986년 민족사바로잡기국민회의 의장
노태우 공개 지지 선언
1990년 7월 18일에 93세의 나이로 사망, 가족장
1961년 5·16 군사 정변 당시 장면 내각에 반발하여 군사정변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던 점 등으로 외면되거나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 오다가, 2000년 이후 박정희 19년에 맞선 야당 정치 지도자들 중의 한사람이라는 점이 감안되어 재평가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의 사저를 이승만의 이화장이나 김구의 경교장, 김규식의 삼청장, 박헌영의 혜화장에 비교하여 '안동궁'(安東宮)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중 취임기념우표와 기념주화가 없는 유일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박정희 집권 16년간 비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제3공화국 당시 박정희의 대선 경쟁자이자 박정희의 제3공화국, 제4공화국 16년 동안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정통 야당을 고수하며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인사로도 평가된다. 인혁당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의 복권 운동을 벌인 점은 학생운동가들로부터 높이 평가받는다.
그가 추진하려던 경제개발 계획에 관련하여 '경제정책 프레임은 비록 미완이었지만 박정희 정권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꽃을 피워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내는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도 있다. 반박정희 투쟁에 있어서의 그의 비타협적인 자세는 원칙을 고수하는 민주주의자, 합리주의자라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으나 반면에 융통성이나 타협능력이 부족하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내지 못하고 군부에 정권을 넘겨주었던 나약한 정치인으로도 그려진다.
친일파 집안의 덕으로 학창시절과 어렵지 않은 환경에서 수학한 것을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정대철은 '그가 내심 5·16 쿠데타를 지지했다. 그렇지만 겉으로는 지지성명 요구를 거부하는 등 반대했다는 기록도 남겼다. 노회한 정치인의 처세라 아니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5ㆍ16쿠데타가 일어난 지 1년이 되는 시점에서 당시의 한 신문은, 쿠데타 주체의 한 사람이었던 유원식의 말을 인용해 윤보선은 이미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 군인들과 교감하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쿠데타를 승인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폭로했다. 이러한 폭로는 "올 것이 왔구나"라는 해석을 둘러싼 논쟁을 일으켰다. 5·16 군사 정변을 방조, 묵인했다는 의혹과 비판은 계속 제기되고 있다.
서중석은 민주당 신파의 지도자였던 장면 국무총리가 일을 못하게 된 큰 이유가 윤보선이 딴지를 걸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승만 정권 말기의 자유당의 장기집권을 비판했고 박정희와 제3공화국 유신 체제에 정면도전하였으며, 1970년대 내내 인혁당 사건, 크리스찬 아카데미, 김상진 할복 사건, 명동구국민주선언, YMCA 위장 결혼식 사건 등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를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또한 수시로 내사를 당하고 감시인이 따라붙는 등의 고초를 겪었던 점 등을 높이 평가해 왔다. 그러나 제5공화국 이후에는 협력적으로 변하면서 재야인사 및 신민당계 인사들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허정에 의하면 윤보선은 혁명정권과 한 동안 같이 일한 사람인 만큼, 혁명 세력과 대결하는 야당 대열에 복귀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생각이었다.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매카시즘 공세를 일으키다가 되려 역공세당했다는 비판적인 지적도 있다. 결국 박정희는 당선되었는데 여기에는 윤보선의 '매카시즘 공략'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6대 대선 당시 윤보선은 민중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선 출마를 고집하여 또다시 야당의 분열을 일으켰다
그의 정치관은 흑백 양자택일이었기 때문에 일단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도무지 타협을 모르고 한 길로만 내달렸다.
5·16 군사정변에 대한 의혹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올것이 왔다.라는 말을 하여 유행시켰다. 당시 국방부장관인 현석호는 이를 두고 '잊혀지지 않는 말'이라 했다. 민주당 신파 계열과 일부 재야 운동가들은 그의 이 발언을 문제삼았다.
대한민국 5대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했으나, 자신을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정신적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게 되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71182.html
http://www.rokps.or.kr/profile_result_ok.asp?num=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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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eoul.go.kr/v2007/seoul/mayor_his/mayor.html
장면 (張勉, 1899년 8월 28일 ~ 1966년 6월 4일
일제강점기의교육자·종교가·번역가·출판인·문인이자대한민국의종교가·외교관·교육자·정치인이다.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적지는 경기도 인천이며 직계 조상들이 거주했던 원적지는 평안남도 중화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천주교 선교 사목 활동과 언론 활동, 용산신학교, 동성상업고등학교, 계성국민학교, 혜화유치원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광복 이후 정계에 투신하여 1946년 민주의원 의원,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 1948년 대한민국의 제헌 국회의원[1]에 당선되었으며, 1948년 12월 7일부터 12월 12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제3차 UN 총회에 한국대표단 수석대표로 파견되어 국제사회에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얻어냈다.
1948년 제3차 UN 총회 한국 대표단 수석대표와 1951년 10월 제6차 UN 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다녀왔으며, 대통령 바티칸특사를 거쳐 제1대 주미 한국대사 등을 지내고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미국군과 UN군의 한국전 참전을 호소하여 성사시켰다. 1950년 8월과 9월 UN 안보리에서 ‘한국 전쟁은 내전이며 남한의 북침’이라는 소련 측의 주장을 논파하기도 하였다. 1950년 11월 23일부터 1952년 4월 23일까지 제2대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1960년 8월 19일부터 1961년 5월 17일까지 제7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1956년 5월 15일부터 1960년까지 대한민국의 제4대 부통령이었다. 1946년 과도입법의원 의원 재직 중에는 국대안(국립대학교 설치안)을 발의하여 성사시켰고, 공창제 폐지를 주창하여 가결시켰다. 1948년 UN 총회에 대한민국의 승인을 요청하는 한국 대표단의 수석대표로 회의에 참석하여 국제사회에 대한민국을 승인받고 귀국하였고, 한국 전쟁 때는 UN과 국제사회에 대한민국을 도와줄 것을 호소하여 지원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호헌동지회의 조직과 민주당 결성에 참여하였다. 군사정권에 실각한 이후 1990년대부터 재평가 여론이 나타나고 있으며 1999년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장면은 청렴하고 깨끗한 정치가라는 평가와 무능하다는 비판이 공존하고 있다. 영문명은 존 면(John Myeon)이라 했다. 일제 강점기의 창씨개명은 ‘다마오카 쓰토무’(玉岡 勉)이다.
신탁통치반대운동
미소공동위원회
민주의원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정부 수립, 외교 활동 (1948 ~ 1949)
대한민국 정부 승인 노력
초대 주미대사 부임 (1949 ~ 1950)
외교 사절 활동 (1950)
한국 전쟁 파병 노력 (1950 ~ 1951)
UN에서의 설득 작업
제2대 국무총리 시절 (1950 ~ 1952)
UN 총회 참석
귀국과 국무총리 취임
신병치료와 국무총리 사퇴
신당 조직 운동 (1953 ~ 1954)
호헌동지회와 민주당 창당에 참여 (1954 ~ 1955)
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 선거 와 부통령 선거 출마와 당선
명목상의 참의원 의장
제4대 부통령 재임 (1956 ~ 1960)
장면 부통령 피격사건 (9·28 사건 1956년)
1956년 9월 28일 대한민국의 제4대 부통령 장면(張勉)이 서울 시공관에서 김상붕 등의 총에 피격된 사건이다.
3·15 부정선거와 부통령 재선 실패
4·19 전후와 민의원 당선
제7대 국무총리 시절 (1960 ~ 1961)
제2공화국 국무총리 취임과 인사 개편
정국 수습, 인사 개혁
국토건설사업
갈등과 개각
부정축재법과 정치자금 문제
4.19 관련자들 명예 회복 노력
군사 정변 직전와 국무총리 사퇴
야당 정치인과 신앙활동 (1961 ~ 1966)
1962년 이주당 사건의 배후 의혹
1966년 6월 4일 사망과 국민장, 천주교혜화동성당 포천묘원 안장
운석기념회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정치 부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언론과의 갈등
민족일보는 2월 8일에 체결된 한미경제원조협정이 2월 28일 국회에 통과되기까지 7회에 걸쳐 사설을 통해 집중타를 가하였다. 민족일보는 곧 제2공화국의 언론 탄압이라며 다시 공세를 퍼부었다
5·16 군사 정변 관련
국립묘지 이장 논란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과 수호에 발군의 역할을 한 외교관이며 1948년 9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UN에 대한민국 정부 승인을 성사시킨 것과 1950년 6월부터 한국 전쟁 당시 미국과 국제 사회를 설득하여 미군과 UN군의 한국 전쟁 참전을 이끌어낸 점이 높이 평가된다. 단독정부 수립이후 남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승인을 이끌어냈고, 6·25 전쟁 시 미군과 유엔군의 파병을 이끌어내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국공로자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로 의원내각제를 실시하였다는 평가와, 정부수립 후 최초로 민주적 선거절차에 의한 정권교체라는 의미를 둘 수 있다.
“급변하는 정치적 현실 속에서 이익의 조직화를 이루어 내는 능력을 갖고 있던 이승만과는 달리 안정적인 정치 상황 속에서만 장기적인 정책을 입안하고 수행하는데 적합한 행정적 인물이다. 그는 경제와 외교 분야에 상당한 의욕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건국의 주도자로서 국제사회에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 자리매김한 외교적 성과에 있다” 또 “해방과 함께 그는 입법위원회 의원, 제헌의원으로 활동했으며 대한민국의 정통성 확립을 위해 제3차 유엔 총회에 한국 수석 대표로 참가, 대한민국의 국제 승인을 이끌어냈다”
“장면 박사야 말로 이 나라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속죄양이었다.” 한국 현대사가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국민경제를 발전시키며, 분단을 극복하려는 방향성을 갖는다고 한다면, 그 방향성을 제대로 지킨 제2공화국 정부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는 평가도 있다.
1999년에 ‘운석 장면 박사 탄신 100주기 추모미사’
14대 대통령 김영삼은 “박정희는 역사적 죄인으로 쿠데타가 없었으면 그가 나라를 잘 이끌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당시 냉전논리적 반공 이데올로기는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남한의 지식인들 대다수의 지지를 얻었던 정치적 이념”이었으며, 장면은 “남한에 대한 국제적 승인과 6.25 전쟁시 유엔군의 파병을 이끌어내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국공로자”
해방 이전에는 정치적으로 무관심하던 교회가 해방 이후에 적극적인 정치참여에 나서게 되었으며, 장면이 가톨릭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5·16 군사 정변을 막지 못한 일로 무능하다, 나약하다는 평가가 있다. 정치적으로 부패하였다는 평가가 있으나 이는 장면 내각 출범 직후 18일 만에 5·16 군사 정변이 모의되고 있었으므로 논리상 타당하지 않은 평가라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도망한 지 5일째에 모습을 나타내어 학생들의 선혈로 얻어진 한국 사상 유일한 민주주의 정권을 너무도 간단히 박정희 앞에 내밀어 그것을 이양하는 서약서에 서명하였다”
'실제로 장면 정부는 국민이 데모할 수 있는 자유를 터놓았으며, 정치적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국민에게 보여주었다. 얼마 안 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 기간에 우리 국민이 경험한 민주주의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민주주의의 방향에 대한 지표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장면 정부의 긍정적인 면모는 한국 국민의 정치의식의 성장에 관계된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선상의 것이지 장면 정부와 장면 개인에 대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윤보선과의 비교
장면은 쿠데타를 막지 못한 역사의 죄인이란 죄의식 속에 참회하다가 죽어간 반면, 윤보선은 ‘올 것이 왔다’던 쿠데타세력의 박정희 후보와 1963년과 67년 두 차례 대결했으나 패배했다며 대조적으로 평가하였다. 또, “현실적으로 대통령에 대한 꿈을 접었을 무렵인 1980년대에는 전두환 정권에 협력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박정희와의 비교
만약 장면 총리가 책임성이 강한 지도자였다면 개인의 안위를 위하여 수도원으로 피신할 것이 아니로,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연락해야 했을 것이고, 그의 각료와 자신을 지지하는 장성들에게도 연락하여 사태를 저지하는 방향으로 노력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신뢰하는 미대사관측과 주한미군사령부와 연락을 취하여 보다 높은 차원에서 사태해결책을 찾았어야 했을 것이다.
박정희는 장면에게 유리하였으되 그에게는 불리했던 조건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역사를 그의 편으로 바꾸어 놓았고, 20년 강압통치의 신화를 만드는 장을 열었다.
이승만은 자신이 대통령직을 내놓을 경우, 자신 대신 대통령이 될 인물로 장면과 조병옥을 꼽았다.
그는 임기응변과 가식을 극도로 싫어하였는데, 고지식한 성격과 원리원칙을 고집하는 스타일은 일부 동료 정객이나 시민들에게 거부감을 주기도 했다.
소급입법 적용 반대
사회주의 사상은 부분적으로는 수용해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공산주의에는 부정적이었다
자유주의관
제1공화국 당시 대선출마, 내각제 개헌 의혹
여성 편력
국토건설단
친일파 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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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군사 쿠테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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