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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양민학살의 양상과 실상
1. ‘양민학살’이라는 용어 선택에 대한 문제제기
‘양민 학살이 아닌 민간인 학살’
이제까지 우리는 다른 나라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민간인 학살이라는 개념보다는 양민 학살이라는 잘못된 개념을 사용해 왔다. 양민 학살을 굳이 사용하는 것은 거창 학살과 같이 학살당한 자들이 한 결 같이 아무런 잘못이나 죄가 없이 무고하게 희생된 ‘양민’이라는 점을 강조하자는 데 있다. 그러나 보편적 인권의 개념에서 이 구별은 용납되지 않는다. 굳이 구별하는 저변에는 양민은 학살되어서는 안 되지만 양민이 아닌 사람의 경우는, 곧 빨갱이 등은 죽여도 좋다는 암묵적인 동조가 깔려 있다.
잘못이나 지은 죄가 아무리 심하더라도 이들이 법률에 따른 정식 재판 절차에 의해 엄밀히 다루어지지 않았을 경우, 비록 전쟁의 와중이라 하더라도 이는 국가 폭력에 의한 인권의 심대한 침해 행위가 된다. 그러나 한국전쟁 전후 이 곳 남한 땅에는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는 국가의 폭력이 횡행했다. 설사 국가 보안법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 하더라도 정식 재판 절차에 의해 사법 처리 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학살하거나 처벌하는 것은 그 자체가 범죄 행위이다.
민간인 학살은 “아무런 위협이 없는데도 그저 좌익, 우익, 부역이라는 집합체의 성원(가족을 포함하여)이라는 이유 또는 혐의만으로 무고한 살인을 저지르는 행위”를 의미한다. 여기서 교전중의 살인 행위는 제외하며, 재판에 의한 처형행위는 학살에 포함시킨다. 이는 헬렌 페인이 유엔 협약의 제노사이드(genocide) 정의를 재 정의한 “한 집합체 성원들의 생물학적, 사회적 재생산의 정지를 통해 직·간접으로 그 집합체의 신체들을 멸한다는 목적으로 희생자들의 항복 또는 위협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에 의해 속행되는 행위”라는 넓은 의미의 정의 가운데 살인 행위에 국한하여 한정적으로 정의한 것이다.
그러나 공비, 통비, 보도연맹원 등을 제외시켜 ‘양민’으로 범주화하는 우리 사회의 통념을 거절하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이념을 가졌다고 해도 양민의 범주에서 제외할 수 없는 것으로 정의하여 양민의 범주를 확대하여 민간인으로 통칭한다. 그러므로 양민 학살이라는 용어보다는 민간인 학살이라는 용어가 더 정확한 사용이라 하겠다.
※ 참고 : (집단)학살이란?
국제 사회에서 정의하는 집단학살의 의미
집단 살해죄는 1948년 12월 유엔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제노사이드 협약’에 따르면, 특정 민족, 인종, 종족, 종교 집단의 전부 또는 일부를 파괴할 의도로 특정 집단 구성원을 살해하는 행위, 특정 집단 구성원의 중대한 심신상의 손해를 야기하는 행위, 신체의 전부 또는 일부의 파괴를 야기할 것을 계산하고 특정 집단의 생활 터전에 고의로 해를 가하는 행위, 특정 집단 내에서 출생을 방해하는 조치를 취하는 행위, 특정 집단의 아동을 다른 집단으로 강제로 편입시키는 행위이다.
이 집단 학살죄는 특정 집단을 완전히 절멸시켜야 범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의도를 갖고 특정 집단에 대해서 위에서 열거한 행위를 할 경우 범죄가 성립된다. 민간인 학살은 비록 제노사이드 협약에서 말하는 특정 민족, 인종, 종족, 종교 집단에 대한 집단적인 살해 등의 잔혹 행위에 꼭 들어맞지는 않지만 일부 희생 사건들은 집단 학살의 사례로 보고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피난민 등에 대해서 ‘흰 옷을 입은 사람은 모두 죽여라.’라는 명령을 했다면 이것은 집단 학살죄에 해당한다.)반인도 범죄는 대규모적이고 조직적으로 자행된 잔혹한 범죄로 인류 양심의 공통분모라는 인식 하에 가해자가 속해 있는 국가의 국내법에 범죄로 규정되어 있든 있지 않든, 전쟁 이전 또는 전쟁 중에 정치적, 인종적, 종교적 이유로 민간인에 대해서 자행한 조직적인 살인, 절멸, 노예화, 추방, 고문, 강제 임신, 강제 이주 및 기타 비인도적 행위 또는 박해 행위를 말한다. 민간인 학살 문제는 반인도 범죄이다.
2. 왜 한국전쟁 중의 민간인 학살을 재조명해야 하는가?
해방 이후 한반도의 현대사는 국가 권력과 군부에 의한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4․19 혁명 당시 시위대에게 경찰이 무차별 사격을 가했던 전력이 있으며,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당시 현장 기자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사냥’에 가까운 공수부대의 폭력이 무고한 시민들에게 행해졌다. 한반도 밖에서도 베트남전에 참전한 군인들이 ‘인간의 소행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민간인들에 대한 폭력, 학살을 자행한 사례가 있다. 현대 사회에서도 국가나 민족, 이데올로기를 겉에 내세워 집단적 폭력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려는 경향이 사회 전반에 폭넓게 존재한다.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은 이러한 국가적 집단 폭력의 정점에 있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남북한을 통틀어 최소 백만이 넘는 무고한 민간인들이 국가 폭력에 의해 희생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연구는 전쟁 이후의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극히 편향되고 일방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학살은 분명히 국가가 저지른 전쟁범죄였기 때문에 정확한 실태 파악과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마땅했다.
그러나 군사정부는 피학살자 명예회복운동을 불법시하고 주모자를 체포, 사형시키고 유가족들을 연좌제로 몰아 갖은 탄압을 가하였다. 전쟁 중 국군의 잘못을 들춰내는 사람들은 모두 반국가적 행위자로 취급되어 침묵해야 했다. 학살에 대한 연구는 상대방의 정권의 비도덕성을 강조함으로써 자신들의 정당성을 높이려는 편향된 관점에서만 이루어졌다. 군부가 전쟁 전후 자신들이 저지른 반문명적 행위를 은폐, 축소하거나 정당화함으로써 국가로부터의 폭력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설 자리가 없게 되었고, 결국 학살의 배경이 된 다양한 문제 상황들은 사회 내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전쟁 당시 학살의 사실이 축소되고 은폐되는 것은 한반도 냉전의 역사를 정리하고 통일을 준비해야 하는 21세기에 심각한 장애 요소이다. 게다가 사회 내부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서도 국가, 이념을 내세워 집단적 폭력을 정당화했던 아픈 과거를 정면으로 파헤칠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 중의 학살에 대해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폭력의 정당화와 이에 따른 반문명적 행위는 계속 되풀이될 것이기 때문이다.
3. 한국 전쟁 전에 일어났던 민간인 학살
작은 전쟁기의 민간인 학살
한국전쟁 이전에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을 작은 전쟁기의 학살이라고 하며, 한국전쟁의 리허설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한국전쟁의 시발은 엄밀한 의미에서 1950년 6월 25일이 아니라 1948년 5·10 단독정부, 단독선거를 무산시키고 미군정과 이승만과 한국 민주당 등 분단 세력에 맞서 공식적으로 무력 투쟁을 전개하여 통일을 이루려는 2·7 구국투쟁부터라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첫 단계인 작은 전쟁 기간은 주로 제주 4·3 항쟁이나 여순 항쟁과 같은 인민 항쟁, 유격대 투쟁, 38선상의 남북 충돌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이 기간에 10만 명에 가까운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민간인 학살은 주로 남부지방인 제주도, 전남, 전북, 경남, 경북 지역에서 인민 항쟁 과정이나 1949년부터 본격화된 유격대 소탕전 과정에서 구사된 견벽청야 작전 등에 의해 발생했다. 이에 대한 상황을 지역별로 포괄하여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본 발표의 주제가 ‘한국전쟁 중 민간인 학살’이므로 자세한 사건의 경과는 생략하겠습니다.)
1) 제주 지역의 민간인 학살
정부 수립 직전인 미군정기에 제주도에서 발생한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 3·1절 행사에서 발생한 경찰 폭력을 기점으로 다수의 제주도민이 사망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48년 10월 미군 주도의 군경과 서북 청년단 등에 의한 대대적인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고, 1954년 9월 21일 제주도에 내려진 계엄이 해제되기까지 무장 세력 진압 과정 중에 불법 학살이 무자비하게 자행된 결과, 당시 제주도민 전체 인구의 10%에 가까운 3만 명 이상이 무차별 학살되는 참상을 겪은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2) 전남 지역의 민간인 학살
한국전쟁 이전에 발생한 전남 지역의 민간인 학살은 주로 전남 동부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는 여순사건과 직·간접적인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 시기에 학살당한 사람들은 여순사건에 의한 민간인 피학살자들이거나 빨치산 토벌 시기에 학살된 주민이 대부분이다.여순사건 이후 전남 동부 지역에는 이른바 ‘빨치산’ 혹은 ‘반란군’으로 불리는 좌익 무장 세력들이 여러 산중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수많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빨치산’을 도와주거나 지지했다는 명목으로, 혹은 군부대의 작전에 방해가 된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인근 주민들이 학살당했다. 대체로 1948년 10월 19일부터 1950년 한국전쟁 직전까지의 상황이 그랬다. 여순사건 외에 1949년 화순군 춘양면과 이양면 등지에서도 주민들이 학살당했는데, 여순사건의 파장이 주로 전남 동부 지역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전남 중서부 지역에는 이와 관련된 사례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3) 전북 지역의 민간인 학살
6·25 이전 전북 지역의 민간인 학살은 대부분 여순항쟁과 관련이 있다. 여순항쟁과 직접 관련된 민간인 학살로는 임실에서 여순항쟁 직후 좌익 관련자로 끌려가 학살당한 사례가 있고, 한국전쟁 직전 전주 형무소에서 1,600명 중 1,300여 명의 정치범이 학살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한국전쟁 직전 우익 단체에 의해 전주 고리개재 구덩이에서 경찰에 의해 총살이 집행된 사례도 있다.
4) 경남 지역의 민간인 학살
6·25 이전 경남 지역의 민간인 학살은 주로 여순항쟁 및 보도연맹과 관련된 학살이 대부분이다. 여순항쟁 이후 지리산 일대의 경남 지역에서는 이른바 ‘빨치산’ 혹은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수많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빨치산’을 도와주거나 지지했다는 명목으로, 혹은 군부대의 작전에 방해가 된다는 명목으로 인근 주민들이 학살당했다.
1949년에서 1950년 9월까지 국군의 토벌 과정에서 학살된 민간인과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국가 보안법 관련자와 보도연맹원들까지 경남 지역에서 학살된 희생자는 최소 3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일어난 주요 사건으로는 산청, 함양, 거창, 거제 등의 지역에서 일어난 학살을 꼽을 수 있다.
5) 경북 지역의 민간인 학살
경북 지역에서는 주로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군경에 의해, 그리고 미군에 의해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주월산과 주왕산 일대의 경북 지역에는 이른바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수많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빨치산’을 도와주거나 지지했다는 명목으로, 혹은 군부대의 작전에 방해가 된다는 명목으로 인근 주민들이 학살을 당했다. 또한 독도 부근에서 자행된 미군에 의한 학살로, 한국전쟁 이전에도 이미 미군에 의한 학살 사례가 있음이 밝혀졌다.
4. 한국전쟁 중 학살의 실상
1) 한국군에 의한 학살
* 한국군에 의한 작전 중의 학살
전쟁 초반 한국군에 의해서도 광범위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한국군에 의한 학살은 미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남한 지역에 고립된 인민군, 빨치산과 국군 간에 산벌적인 전투가 전개되던 1950년 겨울에 주로 발생했다. 1951년 2월 초순 11사단 9연대가 산청, 거창, 함안 지역에 주둔하면서 인민군의 춘계 공세 이전에 빨치산을 완전히 없애겠다는 작전을 펼치게 된다. 이 명령에 따라 1대대는 함양에서 산청으로, 2대대는 순천에서 산청으로, 3대대는 거창에서 산청으로 총공세를 펼치게 된다.
이들 부대는 본격적인 학살을 벌이기 전에 공비 출몰 지역의 가옥을 태우는 작업을 했다. 이것은 1949년 겨울 이후 대규모의 빨치산 토벌, 제주도 4·3 사건 이후 제주도에서의 초토화 작전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적이 세력을 부식할 수 있는 가옥과 주거지만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태워 없애고, 굶겨 죽이고, 죽여 없애는’ 이른바 삼진(三盡), 삼광(三光) 작전이었다. 결국 9연대는 산청, 함양, 거창에서 수천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피학살자의 대다수는 전투 능력이 없는 여성, 노인, 어린이들이었다.2월 8일, 군인들이 지리산 중턱의 산청군 금서면 가현 부락에 나타났다. 이들은 마을을 포위한 뒤 집집마다 돌며 사람과 가축을 몰아내고 불을 질렀다. 가족, 베 등 돈 될 만한 물건은 따로 모은 뒤 동네 사람들을 모조리 마을 앞 산제당 골짜기로 몰아댔다. 10미터 벼랑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주민들이 발버둥대자 군인들이 달려들어 개머리판으로 내리치면서 주민들을 순식간에 골짜기로 밀어냈다.
이어 4열 횡대로 앉으라고 명령한 다음 소총으로 장전한 군인들이 주민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부락민 123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오직 6명만이 생존했다.가현 부락을 쑥대밭으로 만든 군인들은 이웃 방곡 부락으로 내려갔다. 이후 이웃의 방곡, 점촌, 자혜, 화계, 화산, 주상리에서 학살이 반복되었다. 2월 8일 하루 동안 529명으로 추정되는 주민이 군인에게 학살당했으며, 그 중 남자는 50여 명에 불과했다. 젊은 남자들은 미리 피신했기 때문에 육칠십을 넘긴 고령자가 대부분이었고, 그 중에는 10살 미만의 어린이도 100여 명 포함되어 있었다.
11사단 9연대 3대대는 2월 10일 대대장 한동석의 지휘 아래 거창군 신원면 대현리, 중유리, 와룡리에 출동했다. 이들은 먼저 청연 부락에 도착했다. 남자들은 대부분 피난을 가고, 마을에는 노인과 부녀자들만 거주하고 있었다. 군은 이 마을 주민 76명을 마을 앞의 논에 집결시킨 다음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이 날 청연 부락의 참변 소식은 이웃 여섯 개 마을에퍼졌다.
군인들은 와룡리 주민들에게 ‘공비들 때문에 위험하니 피난 가야 한다.’며 이들을 면소재지에 위치한 신원 초등학교로 몰아갔다. 가는 도중 이들은 행렬을 끊어서 뒷줄을 탄량골 골짜기로 밀어 넣고는 ‘군인 가족이 있으면 나오라.’고 한 다음, 나머지 사람들을 집단 총살했다. 이 무렵 신원 초등학교에 수용된 520명은 이웃 박산골로 몰아가 총살했다. 박산골 학살 현장에서는 오직 3명만이 생존했다. 앞의 산청에서 그러했듯이 일부 군인들은 주민들의 재산을 약탈하기도 했고, 젊은 여자들은 끌고 나가 욕을 보이기도 했다. 이들은 주민을 집단 살해한 다음에 불에 태워 흔적을 없애려 했고, 상부에는 공비를 토벌한 것으로 보고했다.
흔히 ‘거창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실제로는 거창, 산청, 함양 등지에서 발생한 2·8학살을 포함하여 주민 약 1,500명이 국군 9연대에 의해 집단 학살당한 사건이다. 이승만 정권은 이 사건에 관한 투서가 계속 날아오자, ‘공비 협력자 187명을 군법 회의에 넘겨 처형한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외국 언론들이 이 사건에 관심을 보이자 이승만 정권은 신성모 국방장관과 조병옥 내무장관을 동시에 해임하고, 관련자들을 재판에 회부했다.
1951년 7월 27일부터 12월 16일 사이에 열린 대구의 고등 군법회의에서 재판장 강영훈 준장은 “애국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국군 작전의 근본정신과 투항하는 적군을 의법 처우하는 전쟁 도의를 소홀히 하여 즉결 처분하라는 명령을 부하 부대에 하달함으로써 천부의 인권을 유린했으며, 부대장도 일부 피의자를 경솔히 총살하여 명령 범위를 이탈한 것”으로 판결을 내리고, 김종원을 징역 3년, 오익경을 무기, 한동석을 징역 10년에 처했다. 그러나 이들은 곧바로 풀려났다.
앞에서 언급한 거창, 산청 사건 이전인 1950년 겨울 소백산맥 자락인 전남 함평, 전북 남원, 순창 등지에서도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다. 남원에서는 공비 토벌 작전을 감행하던 11사단 9연대 소속 군인들이 대강면 강석리 마을을 습격하여 마을 주민 90명을 대검, 일본도, 소총으로 난자한 사건도 있었다. 여기서 70명은 총살당했으며, 19명은 일본도로 목이 잘리는 참극을 당했다.
남원에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이후 12월 6일 전남 함평에서는 빨치산이 활동하던 불갑산 지역인 월야면 정산리 동촌 마을을 시작으로 1951년 1월 12일까지 3개면 9마을의 500여 명의 주민이 토벌대의 습격으로 집단 학살당했다. 다른 전남 지역의 산악면 산정리,장성군 황룡면에서도 빨치산 토벌을 명분으로 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광범위하게 발생했다.그나마 지금까지 확인된 이상의 사례들은 규모가 비교적 크거나 한두 명의 피해자 유족들이 끈질기게 사건의 전모를 추적한 경우여서, 이렇게 알려진 것은 전체 윤곽을 보여준다기보다는 단지 우연한 계기로 밝혀진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 군, 경, 우익 단체에 의한 부역 혐의자 학살
전쟁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치안 부재 상황이다. 특히 한국전쟁처럼 전선이 계속 이동하고, 점령 담당 세력이 바뀌는 내전의 상황에서 군과 경찰, 좌우 양 민간인 간의 보복적 충돌은 거의 피할 수 없다. 사실상 한국 전쟁시 발생했던 학살 중 그 규모를 정확히 추정할 수는 없으나 가장 광범위하게 발생한 것이 ‘국가’가 바뀌는 과정에서 발생한 군경의 부역자들에 대한 보복, 좌우 양측에 가담한 민간인 사이의 사적인 보복이었다.
대체로 1950년 7월 이후 인민군이 남한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한 시기에 전쟁 이전에 좌우충돌 경험의 연장선에서 점령군의 위세에 편승한 지방의 좌익들이 미처 피난 가지 못한 경찰 가족, 우익 인사와 그 가족들을 살해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며, 그 이후 미군과 국군이 다시 그 지역에 진입하면서 인민군 치하에서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협력한 사람들을 한국의 경찰, 우익 청년단체, 혹은 우익 측 피해자들이 보복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에 다시 진입한 이승만 정권은 ‘적 치하에 부역한 자를 적발할 것’을 지시했다. 10월 4일 부역자 처리를 위한 공식 기구인 군·검·경 합동 수사본부가 계엄 사령관 아래 설치되어 부역자 검거와 처리를 전담했다. <대한 경찰전사>에는 당시 부역자를 이념적 공명과 실천을 함께 하는 적극분자, ‘반정부 감정 포지자’로서 소극적인 공산분자, 대세에 부화뇌동하는 분자, 강압 밑에 피동적으로 부역한 소극분자 등 네 가지로 분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정부 감정 포지자까지 부역자로 분류함으로써 사실상 경찰이 자의적으로 부역자로 규정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민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사실상 적극적인 부역자는 대부분 월북하고 그들의 가족이나 친척들만 남아 있었다. 따라서 부역자 검거와 처리가 사실상 사적인 보복의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다.인민군 치하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 이성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민간인과 사설 단체의 보복적 살해가 비일비재했으며, 심지어 군인과 경찰도 부역자 가족의 재산을 뺏기도 했다.
이러한 보복적 살해와 재산 탈취를 예상하여 국회 법사위는 사형(私刑) 금지법을 서둘러 제출했다. 처음에는 ‘군경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있다.’는 이승만 정부의 반대가 있었으나 결국 12월 1일 공표되었다. 그러나 이 법안이 공표될 무렵에는 이미 광범위한 사적 보복이 진행된 때이며, 이 법의 제기 자체가 당시에 부역자들에 대한 사사로운 보복이 만연했음을 역으로 보여주고 있다.
당시 자수한 사람과 검거된 사람을 포함하여 당국에 확인된 총검거자 수는 55만 915명으로 집계되었는데, 그 중에서 실제 사형 집행을 당한 사람은 수백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미군정 문정관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 그레고리 핸더슨은 당시 전국적으로 재판 없이 처형된 사람이 약 10만 명에 이른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1·4후퇴 이후 서울 지역을 다시 점령한 인민군 측은 형무소, 경찰서, 우익 단체 등에 의해 총살, 타살된 사람이 4만 3,590명에 달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경찰의 주도로 이루어진 불법적인 부역자 처벌의 대표적인 예는 고양 금정굴 학살 사건이다. 인민군이 점령했다가 국군이 다시 들어오자 좌익들에게 가족을 잃거나 피해를 본 태극단과 치안대의 우익 조직이 경찰과 함께 부역자 색출에 나서게 되었다.
고양 경찰서장이던 이무영은 가족이 인민군에게 죽었다는 이유로 부역자로 의심되는 사람을 권총으로 직접 살해하기도 했고, 급기야 1950년 10월~11월에 고양시 고봉산 기슭의 금정굴에 끌고 가 집단적으로 살해했다. 현재 금정굴에서는 여성의 유골 10구를 포함한 최소 153구의 유골이 발굴된 바 있는데, 가족들은 학살자가 최소 500명 이상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이와 같은 유형의 부역자 처벌은 인근 파주, 강화의 갑곶 나루터에서도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경기도 포천 등지에서도 광범위하게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복 지역에서 자행된 부역자 학살은 잠시 동안의 인민군 치하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던 여러 우익 청년 조직이 선봉에 섰다. 강화의 경우 대한 정의단, 일민주의 청년단, 민주청년 반공 결사대, 향토단 등이 조직되었으며, 이들이 이후 수복이 되자 강화 치안대, 국군 환영 준비 위원회, 비상시국 대책회 등으로 발전했다. 이들의 활동 중에는 ‘적색분자의 악행과 동태 조사’ 항목이 있고, 수복 후의 강화 향토방위 특공대의 활동에서 보면 ‘6·25 당시 부역 행위를 하다 북괴군과 후퇴하여 달아난 가족들의 동태를 살핀다.’는 항목이 있는데, 이들은 치안 부재의 상황에서 사실상 국가 권력의 대행자 역할을 하게 된다.
전남북 지역에서도 이러한 불법적인 부역자 처벌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조사된 바로는 나주군 봉황면, 장흥군 장평면, 담양읍 등지에서 이러한 일이 발생했다. 특히 전남 해안 지역에서는 후퇴하던 군경이 적에게 부역할 위험성이 있는 주민들을 서둘러 학살한 사례도 있다. 1950년 7월 말에서 9월 초에 이르는 동안 일명 ‘나주 부대’로 불리던 경찰 부대가 인민군 복장을 하고 동네에 들어와 환영하던 주민들을 사살한 일이 있었다.
해남, 완도 등지에서도 이러한 일이 많이 발생했다. 전국적으로 보더라도 지역의 이웃 주민들 간의 보복 살육이 가장 많이 발생한 곳이 일제 시기부터 소작쟁의가 많았던 전남 지역이다. 전북 지역도 그러했지만 전남 지역의 경우에는 국군과 인민군이 번갈아 지역을 점령하면서, 군인들이 물러간 이후 주민들 사이에서 보복 학살이 많이 발생했다. 이 보복 학살은 단순히 좌·우익 이념의 구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지역 사회에서 지주와 소작인, 양반과 상민의 신분 차별, 씨족적인 대립과 갈등이 중첩되어 진행되었다.
한편 9·28 수복 이후 국군과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상하자 북한 지역에서도 사적인 보복이 만연하게 되었다. 일부 인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부 지역에서는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하자 보복 행위가 자행되었다고 한다. 원주민으로 조직된 임시 치안대가 멋대로 보복을 하는 등 행패가 심했다는 것이다. 이승만도 이러한 보고 살해가 남한 정권의 신뢰를 무너뜨릴 위험성이 있자, 이를 제지하고 애매한 사람까지 빨갱이로 몰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역자들에 대한 마구잡이 처벌과 학살은 사실상 군과 경찰, 방첩대 등 국가 기관 종사자의 묵인과 방조 없이는 불가능했으며, 부역자는 죽여도 좋다는 암묵적인 정치적 분위기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2) 북측에 의한 학살
전쟁 초기 북은 남한점령정책의 일환으로 이른바 반혁명세력의 숙청을 도모하였다. 정치보위국을 중심으로 인민위원회, 여맹원, 민청원, 자위대 등의 사회단체들이 가세하였다. 숙청작업은 주로 북의 법령을 기준으로 이루어졌으며, 정권기관은 공식적으로 고문 등의 만행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숙청 대상의 기준만 제시되었을 뿐, 형량 구형의 구체적 기준이 일선 기관에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소한 혐의만으로도 사형이 집행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체포에 저항했다 등의 이유로 인해 ‘즉결처분’이 이루어진 경우도 대단히 많았다. 숙청의 대상은 주로 지주, 경찰, 공무원들이었으며, 보복적 차원에서 그 가족들이 희생양이 된 경우도 있었다.
‘숙청’이라는 ‘공식적’ 방법을 통한 학살 이외 북측에서 자행한 학살에는 전쟁 이전 탄압받던 보도연맹 등의 지방 좌익 세력이나 빨치산들에 의해 이루어진 학살이 있다. 실제 북한의 한반도이남 점령 기간 이루어진 대부분의 학살은 이들에 의해 보복적 차원에서 이루어져다. 인민군의 통제력이 있었을 때는 괜찮았으나 인민군이 철수하고 행정적 지배가 시작될 무렵의 치안 공백상태에서 보도연맹의 가족들이 도망가지 못한 우익들에 대해 보복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증언이 있다. 전쟁 초에 북에 의해 자행된 학살의 한 예로 전북 순창군 복흥면에서 자행된 학살을 들 수 있다.
1950년 7월 20일 108명의 우익인사, 25명의 경찰, 150명의 군인 그리고 920명의 일반인에 대해 잔혹한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다. 이들은 공무원, 마을 이장, 반공 유지, 경찰관, 군인 가족 등이었다.전쟁 초기 인민군 중심의 정권기관은 법령을 중심으로 처벌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고, 공식적으로 만행을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불리해짐에 따라 이러한 법과 재판 및 절제적 처형은 지켜지지 않았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뒤바뀌게 되자 인민군 전쟁사령부에서는 후퇴명령을 내리는 한편, 반혁명분자라는 혐의로 잡혀있던 수감자들을 북으로 후송하거나 ‘적당히 현지에서 처리’ 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학살을 허용한 것이다. 이로 인해 남한 곳곳의 교도소나 내무서 등에 수감되어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가령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1,724명의 우익인사가 모두 학살당했다. 인민군의 패색이 짙어지고 유엔군이 곳곳에 진주하게 되자 빨치산들이 유엔군을 환영한 마을 주민들을 학살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이 시기 벌어진 학살 중 가장 참혹한 사례는 전북 옥구에서 발생했다.
1950년 9월 27일부터 29일 사이 미면 미제마을 에서 우익인사 117명을 죽창, 농기구 등으로 살해하였고, 신촌마을에서 우익인사 248명이, 원당리 마을에서 30명이 동일한 방법으로 살해되었다. 신풍리 축동마을 우물 등에 우익인사 43명이 수장되었고, 신풍리 유운마을에도 우익인사 등 136명이 수장되었다. 이틀 동안 무려 574명을 학살한 것이다.미군이 38선을 넘어 진격할 때 인민군이 북으로 후퇴하면서 북한 지역에서도 많은 학살이 일어났다. 전쟁이 발발하자 북한 지역에서도 기존의 반동세력에 대한 검속을 더욱 강화하였는데, 정치보위부에서 이들을 관리하였다.
그러나 미군이 진주하자 이들이 북한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남을 것을 우려하여 결국 반혁명인사들을 학살하였다. 평양에서는 약 2천 5백여 명이, 함흥에서만 모두 약 1만 2천여 명이 살해되었다고 한다.북측에 의해 행해진 학살은 비록 원칙적 수준에서 머무르기는 했지만 초기에는 정권기관에서 고문과 근거 없는 즉결처분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리는 등 일정 부분 절제된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지방 좌익이나 빨치산 등이 보복적 차원에서 비적법성과 야만성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러한 원칙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무차별적인 학살이 이어졌다.북측에 의한 피학살자 수는 공식추계에 의하면 남자 97,680명, 여자 31,256명 등으로 합계 128,936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통계는 당시 통계국장이 시인했듯이 ‘공산당의 죄악상을 폭로하기 위해’ 상당한 자의성을 내포하고 작성된 것이 사실이다. 이 통계를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당시 북측에 의해 자행된 학살의 희생자 수가 남측에 의해 자행된 학살의 희생자 수 보다 절대적으로 적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3) 미군에 의한 학살
한국전쟁 기간 중 미군에 의한 집단 학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충북 연동군 황간읍 노근리에서의 학살이다. 1950년 7월 25일 주민 약 500여 명이 미군의 지시에 따라 피난길에 올랐다. 그런데 다음날인 26일 피난민들이 노근리에 도착했을 때 미군은 길을 차단하고 이들을 언덕 위의 철로 위로 올려 보냈다. 그 후 두세 시간 뒤에 미군 전투기 두 대가 나타나 난민들을 향해 폭격과 기총 소사를 가하는 한편, 철로의 좌우 산에서도 미군의 무차별총격이 가해졌다. 살아남은 피난민들이 철도 아래의 수로용 터널에 피신하자 여기에도 기관총 사격이 가해졌다.
당시 주민으로써 확인된 사망자는 89명에 이르나, 대다수가 신원파악이 어려운 피난민이었으므로 사망자는 더욱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노근리 학살사건에서와 같이 미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의 대상은 주로 피난민들이었다. 미군은 이들을 학살하는데 전투기나 박격포, 기관총, 소이탄 등의 중화기를 동원하였다. 영국 특파원 톰슨은 기계화병력이 “거의 무장하지 않은 적, 하늘의 항공기에 대항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사용되었다”라고 서술했다.
이러한 형태의 학살은 특수한 조건에서 특수하게 이루어 졌다기 보다는 전쟁 초기 한반도의 남쪽 전역에서 이루어졌다.미군은 직접적 사격 등을 통한 학살 이외에도 군 작전을 이유로 대규모의 민간인을 희생시키기도 했다. 1950년 8월 3일 일어난 낙동강변의 왜관교와 덕숭동 다리 폭파로 인해 다리위의 피난민 수백 명이 숨졌다.
당시 1기갑 사단장이었던 게이 소장이 ‘이 개XX들 다 날려버려’라고 하며 다리 폭파를 직접 지시했다는 증언이 있다. 게이는 훗날 북한군의 남하가 임박한 상황에서 다리 폭파가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변명하였으나 실제로 인민군이 낙동강변에 나타난 것은 나흘 후인 7일 무렵이었다. 전쟁 초기 남한 지역에서 미군에 의해 희생된 사람의 수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편의상 노근리와 같은 규모의 학살이 접수된 60여 곳에서 자행되었다고 하면 약 2천 4백여 명 정도의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추정할 수 있으나, 미군의 학살은 대부분 신원확인이 어려운 불특정 다수의 피난민들을 대상으로 대규모로 자행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민간인 희생은 이 수치를 훨씬 웃돌 것으로 보인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미군이 한반도의 북쪽에 진주함에 따라 40일간의 북한 점령기간 동안에는 남한에서와는 다른 직접적인 학살을 자행하였다. 북한 측의 공식 발표에 의하면 이 40일간의 기간 동안 약 17만 2천여 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당시 미군에 의한 학살 문제가 전 세계적인 문제가 되자 국제민주여성동맹과 국제민주법률가협회의 대표가 진상 조사를 위해 파견되었다. 이들의 보고서의 일부를 살펴보면 미군이 황해도 신천에서 밀폐된 창고에 사람들을 가두고 일체 물과 식량을 공급하지 않아 어린이들과 노인을 포함하여 수백 명이 굶어죽었고, 노동당원 가족을 죽을 때 까지 고문하여 살해했다는 등의 현장 증언 내용이 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있을 때 북한지역에 대해 이루어진 무차별 폭격 역시 수많은 민간인 희생을 낳았다. 51년 7월 정전협정이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폭격은 계속 이루어졌으며 정전이 실효된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 정각의 1분 전 까지도 지속되었다. 폭격은 북한 전역에 대해 이루어졌는데 인명살상용으로 제작된 네이팜탄과 시한폭탄을 민간건물에 까지 다량 투하함으로써 수많은 민간인 희생이 생겨났다. 가령, 동해안 최대 도시인 원산의 경우 미 해군 함정이 41일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속적으로 포격했는데 당시 원산의 상황을 미 해군 소장 스미스는 “원산에서는 길거리를 걸어 다닐 수 없다. 24시간 내내 어느 곳에서도 잠을 잘 수 없다. 잠은 죽음을 의미했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5. 학살이 이루어진 배경
1) 외재적 배경
한국전쟁 당시 이루어진 민간인 학살의 표면적인 이유를 통해 학살이 이루어진 원인을 분석해 보면 크게 군사작전으로서의 학살, 처형으로서의 학살, 그리고 사적 보복 행위로서의 학살로 구분해 볼 수 있다.
- 군사작전으로서의 학살
군사작전이라는 명분하에 학살이 자행된 전형적 사례는 전쟁 이전의 제주도 4․3항쟁의 진압 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토벌군은 게릴라들의 피난처와 물자공급원을 제거한다는 미명하에 백여 곳의 중 산간마을을 모두 불태웠고,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였다. 빨치산 활동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현지 군․경의 말단 지휘관에게 좌익이나 부역의 혐의가 가는 주민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살해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 작전 수행 중 조직적으로 민간인에 대한 학살을 정당화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작전 수행으로서의 학살은 전쟁 발발 이후 전면적으로 확대된다. 국군의 후퇴, 유엔군의 북상과 중공군의 개입 등으로 전선이 계속 변하게 되자 잔류 인민군이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격대에 의한 기습을 우려한 국군과 미군은 군사작전 수행을 위해 이들이 활동하는 지역의 민간인들까지 모두 적으로 간주, 학살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였다.
특히 전쟁초기의 남한 지역에서 미군에 의한 학살은 위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주로 공군의 폭격이나 중화기를 사용하여 자행되었다. 이러한 학살의 방식과 당시의 정황 증거들을 고려할 때 미군의 학살은 의도적으로 철저한 계획 하에 자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많은 인민군들이 군복을 벗고 마을이나 피난민 행렬에 숨기도 했기 때문에 학살은 게릴라들에 의한 지상군 손실을 줄이려는 미군 사령부의 동의하에 이루어졌다. 당시 미군 명령서에는 ‘흰 옷 입은 사람들은 모두 죽여라’, ‘의심나는 사람들은 모두 사살하라’ 등의 내용이 적혀있었으며, 현장 사령관중 한 명은 ‘전투 지역에서 발견되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하달하기도 했다.
작전 수행이라는 명분으로 국군이 자행한 학살은 잔류한 인민군 및 빨치산과 국군 간의 산발적 전투가 벌어지던 1950년 겨울에 주로 일어났다. 이른바 ‘견벽청야’, 즉 자신의 성은 견고하게 지키되 포기해야 할 곳은 철저히 파괴하여 적이 이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작전에 따라 유격대의 거점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작전이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러한 학살은 사단장 이상 군 고위층의 지시 하에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적에게 협조하는 주민은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이 각 예하 부대에 하달되어 비전투 민간인을 적으로 분류하고 작전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 처형으로서의 학살
전쟁발발 직후 남북한 모두 군이 재판권을 행사하는 계엄 상황을 선포하였다. 이 상황에서 국가권력은 초법적 권한을 가지고 적에게 협력할 ‘가능성’이 있는 민간인들조차 적으로 간주하여 물리력으로 처단할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 전시상황에서 방위체제를 확보하고 주민들의 복종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 측에서는 남한을 점령한 직후 인민재판을 통해 우익인사나 지주, 미군정에 협력한 인사 등을 처형하였으며, 퇴각시 남북한 전역에서 수많은 ‘반혁명분자’들을 ‘처리’하였다. 남한 역시 전쟁 발발 직후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이나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정당한 재판 없이 처형하였고, 전쟁 기간 내내 적에 부역한 혐의가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주민들을 군․경이 ‘즉결처분’하였다.
전쟁 상황에서 군이 치안과 재판을 담당하게 되면서, 남북한 모두 군의 명령에 기초하여 ‘잠재적 적’을 대량 학살하였다. 한국전쟁이 가진 정치 헤게모니 투쟁으로서의 성격과 계급 투쟁적 성격은 전쟁에서 상대방을 절멸시킬 것을 요구하였고, 명확한 소속의식을 가지지 못했던 양 국가의 구성원이 ‘잠재적 적’으로 간주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한국전쟁 중 국가기관에 의해 저질러진 수많은 ‘처형으로서의 학살’은 이러한 잠재적 적에 대한 의심과 공격이 무차별적으로 진행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보복으로서의 학살
사적 보복으로서의 학살 위험성은 남북한의 급격한 이념적 지형 변화와 이에 따른 사상탄압이 행해지던 때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법의 정지, 국가권력의 부재, 치안의 부재와 전선의 급격한 변화가 있었던 전시상황이 이러한 위험성이 현실로 나타나게 하였다. ‘국가’가 바뀌는 과정에서 군․경 부역자과 여기에 가담한 민간인들에 대해 보복이 대단히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전쟁 초기에는 지방 좌익들이나 국민보도연맹 피해자 가족들이 경찰, 우익인사, 우익 청년단원 등을 살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또 그 이후 국군이 진주하면서 이 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다시 인민군 치하에서 부역한 사람들에게 보복을 가하였다.양쪽의 국가권력은 공식적으로는 이러한 보복적 학살을 금지했다. 좌익 지도부는 공식적으로 사적 테러를 중지할 것을 공포하였고 김일성도 “악질반동에 대해 복수하려는 것은 극히 정당한 일이지만 아무런 법적 수속이나 심사도 없이 되는대로 숙청한다면 이것은 심각한 과오입니다”라고 밝혔다.
남한 정부는 1950년 9월 「사형(私刑)금지법」을 발표했으며, 이승만 역시 공식석상에서 “보복을 중지하고 애매한 사람까지 빨갱이로 몰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명령이 말단 지방 행정조직까지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공권력은 사적 보복을 막으려는 의지도 없었고 오히려 지방 자위대에게 공식적 역할을 부여하거나 ‘반란분자의 철저한 말살’을 위해 사적 테러행위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복적 학살은 이념적 대립과는 거의 무관하게 보복의 악순환만을 가져왔다.오히려 국가지도부에서 직접 사적 보복행위를 가하기도 했다. 가령 북한의 서울지도부 위원장을 역임했던 이승엽은 ‘간첩을 잡는다, 반동을 잡는다’는 명분하에 실제로는 자신의 친일 경력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나 자신을 반대했던 사람들을 잡아들여 살해했다고 한다.
한국전쟁기간 좌․우익간의 상호 학살은 그 출발점에서 분명히 계급 갈등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4․3 항쟁 당시 서북청년단 등의 극우 청년조직이 북한에서 당한 앙갚음을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제주도민에게 했듯이, 일정한 시점 이후 이념이나 계급 갈등적 요소는 약화되고 오직 사적인 증오만이 남게 되었다. 이러한 사적 보복은 남북한에 의해 이데올로기로 포장되었으며, 비문명적인 증오의 발현이 국가권력에 의해 정당화된 측면이 없지 않다.
2) 내재적 배경
위에서 언급한 학살의 표면적 배경만으로는 한국전쟁에서의 학살이 왜 그렇게 대규모로, 그것도 대부분이 극도로 잔인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설명하기 매우 곤란하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전쟁 당시 학살의 주체들에게 내재되어 있던 배경적 요소들을 파악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 구조적 배경
모든 전쟁이나 폭력사태, 내전에서 학살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전쟁이나 폭력은 항상 특정 목적을 위해 행해지는데, 단순히 적을 무력으로 굴복시켜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상대를 완전히 제거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주로 학살이 발생한다. 즉, 전쟁이 국가 건설이나 혁명과 결합되는 경우이다. 한국전쟁에서의 민간인 학살은 사회주의적 국가 건설과 자유주의적 국가 건설 노선의 대립, 반제․반봉건주의 세력과 이에 저항하는 친일․보수 세력 간의 대립이 극단적으로 표출되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해방 직후 한반도의 좌․우 갈등은 그렇게 심각한 양상을 띠지 않았다. 문제는 미․소의 분할점령에 의해 남과 북에서 서로 상이한 정치지형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것이 북한의 ‘혁명노선’과 남한의 ‘현상유지 노선’의 대립으로 이어지면서 양자 간 갈등이 증폭되었다는데 있다. 각 정치세력들은 상대방을 타도하고 정치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상대방에 대한 원색적 비방과 테러를 일삼았고, 이러한 공격적 행동이 보복을 통해 돌아오면서 상황을 악화시켰다.
북한 지역의 이른바 사회주의개혁 노선을 통한 반혁명세력 숙청은 그 반작용으로 서북청년단과 같은 극우 폭력단체의 형성을 촉진했고, 남한 지역에서 조선공산당의 불법화, 미군정의 좌익 탄압 등은 단순한 정치 폭력 대신 군사적 투쟁인 유격대 활동을 불러왔다. 이러한 상황이 점차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폭력과 학살은 남북에서 모두 국가 건설의 대의라는 명분하에 정당화 될 수 있었던 것이다.
- 군사문화의 전통
한국전쟁 당시 이루어진 민간인 학살은 대단히 잔인하게 이루어 진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한국 군․경이 자행한 학살은 극동지역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그것과 대단히 유사한 양상을 띠었으며 그 원인에 있어서도 일본 군사문화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일제강점기 때의 경찰과 군인이 미군정에 의해 다시 기용되어 한국군의 주축을 형성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군은 식민통치 과정에서 철저한 무자비와 폭력, 억압을 자행하는 통치방식을 택했고, 이러한 행위는 오로지 천황에게만 책임을 질 뿐 국민에게는 책임을 지지 않는 절대군주제에 의해 뒷받침 되었다. 일본군 장교들은 철저한 계급 분화와 이에 따른 지배-예속의 문화에 익숙했고, 사관학교에서의 일방적인 교육으로 인한 이념적, 국가주의적 편향성을 강하게 드러냈다.
해방 이후 한국군의 핵심을 구성했던 장교들은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았다. 이들은 군대 내의 엄격한 상하 관계와 규율에 중점을 두었을 뿐 군이 국민에게 봉사하는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은 공공연히 이념적 편향성을 드러냈는데, 가령 초대 욱군참모총장 이응준은 ‘우리의 상관, 우리의 전우를 공산당이 죽인 것을 명기하자’는 내용의 선서를 아침마다 전 부대에서 낭독하게 하였다. 많은 수의 급조된 장교들은 고등학교 수준의 지식을 갖는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들에게 군대와 국민의 관계, 군대의 근본적 존재 이유 등에 대한 성찰을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군기 역시 대단히 흐트러져 있어 장교들은 즉결 처분권을 남용하여 사소한 일에도 병사나 민간인을 총살하는가 하면, 전쟁의 위기의식으로 무인 우대의 분위기가 조성되자 작전 지역의 민간인들에게 향응을 베풀 것을 공공연하게 요구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집단적 테러를 가했다. 또한 공비토벌 작전에서 전공을 높이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고 공비를 사살했다고 보고하는 행위를 당연하게 여겼다. 사병들은 군대 내의 엄격한 지배-예속 문화에 의해 상관의 명령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여 실행했다.
- 극단적인 이념적 담론
한국전쟁에서 발생한 수많은 학살 피해자들은 대부분 이데올로기의 대립과는 무관한 노인과 부녀자, 어린아이들이었다. 이들은 ‘한 사람이 빨갱이면 그 가족이나 친족도 처벌할 수 있다’는 사고의 희생양이었다. 이러한 행위는 단순한 이데올로기 대립에 의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남북한에게 모두 상대방을 ‘반민족 집단’, ‘괴뢰’로 몰아붙이는 극단적 담론은 정치적 갈등과 폭력을 적대적으로 증폭시킨 문화적 배경을 제공하였다. 남북 모두 사용한 ‘민족담론’은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하고 전통적인 ‘가족’ 공동체를 이념적 문제와 결합시켜 극단적이고 단순한 이념의 양극화를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극단적 담론 구조는 김일성과 이승만 모두 즐겨 사용한 ‘반란’, ‘부역’이라는 용어에서 잘 드러난다. 이승만은 공산주의를 ‘반역적 사상’으로 간주하였고, ‘민중 내의 반역적 사상을 뿌리 뽑고 반도를 소탕하여 어떤 법령에건 절대복종하게 해야 할 것이다’라고 공공연히 천명하였다. 좌익 세력을 반란군으로 칭하며 이들에 대한 진압을 ‘토벌’이라고 하였다. ‘반역’이라는 담론은 왕조시대에 사용된 개념으로써 이는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으로 강요된 충성에 대한 거부 행위인 만큼 그것에 대한 ‘자유로운’ 저항 역시 허용되지 않는다.
이때부터 “반역자/민족 배반자 = 빨갱이 = 무조건 죽여도 좋다”는 극단적 담론이 형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일성 역시 ‘이승만 역도’, ‘반역자’ 등의 표현을 자주 사용하였다. 김일성은 ‘매국노’와 ‘반역자’를 동일시하고 있는데, 이는 북한이 ‘조국’을 해방한다는 명분하에 전쟁을 일으킨 것과 무관하지 않다. 결국, 남북 모두 민족담론을 중심으로 상대방을 ‘반민족’으로 모는 극단적 담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의 학살이 더욱 비참했던 이유는 이러한 극단적 담론이 전통적인 가족주의, 혈연주의와 연관되면서 연대책임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더욱 확대되면 상대방 전체를 인종적으로 상종할 수 없는 집단으로 매도하게 된다. 그렇기에 한국전쟁은 사실상 ‘혈통이 다른’ 사람들을 절멸시키는 전쟁으로 인식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의 극단적인 이념적 담론은 사실상 전통적 가족주의나 종족주의, 민족주의를 정치적으로 동원한 것이다.
6. 한국전쟁 중 민간인 학살에 대한 평가
· 한국전쟁기의 학살의 모든 과정은 식민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려는 진통, 국가 수립을 향한 일종의 정치 혁명, 그리고 그것의 연장으로서 내전과 한반도에 이해관계가 있는 미국과 중국의 개입으로 인한 국제전의 부산물이다.민간인 학살은 넓은 의미로 보면 ‘잔혹 행위’이자 ‘살인’이다. 하지만 국가가 국민에게 공권력을 부당하게 행사했다는 의미에서 다른 범죄보다도 더 큰 책임이 있는 문제이다. 또한그 의도에 있어서도 한두 개인의 범죄 행위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집단을 완전히 배제하기 위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중대 범죄 행위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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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자행된 학살은 국가의 조직적 계획과 의도, 관료적 집행 과정을 통해 고도로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수행된 것이 아니라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 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즉 권력의 장악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비록 그것이 계획적이거나 의도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한국전쟁 전후의 모든 학살은 주로 공권력에 의해 주도된 것이고, 사적 보복의 양상을 지니는 경우도 국가의 묵인, 결국 전쟁이라는 정치적 환경, 경찰과 군의 실질적 후원 아래 이루어졌다.
즉 전체 피해 규모로 보면 공권력의 직접 개입에 의한 학살이 더 컸으나 전반적으로 이 학살은 독일의 유태인 학살보다는 일제의 남경 학살처럼 공권력의 좌익 척결 의지와 가족과 친인척의 피해로 인한 증오감과 보복심에 추동된 현장적 대응이 훨씬 더 압도했다. 그래서 한국전쟁기의 학살은 피해 규모면에서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못 미친다고 해도 폭력성과 잔인성에 있어서는 다른 어떤 학살보다도 잔인했다.
여기서 잔인성은 좌우익의 갈등의 심도, 권력의 폭압성 등과 비례한다. 이승만 정권의 극도의 위기의식, 월남자를 비롯한 남한의 기득권 세력의 공포와 위기의식, 남한을 점령했다가 패주하게 된 인민군의 다급함, 지방 좌익의 복수심, 피해 입은 경찰, 우익 가족의 원한 등이 맞물려 학살은 잔인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남한의 이승만 정권 수립은 ‘극우 세력’ 즉 일제에 협력했던 구 식민지 세력의 부활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제국주의 억압 기구인 일제의 군대와 경찰이 그대로 살아남아 대한민국의 기초를 닦았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일본 군대의 문화가 일본군 출신으로 구성된 한국군에게 그대로 답습되었다. 군인과 경찰은 4·3항쟁 당시나 한국전쟁 당시에 민간인끼리 따귀를 때리도록 강요한 이후 학살하거나 강간한 이후 학살하는 등 잔인한 방법을 동원했는데, 이는 일본군이 남경대학살 당시 사용했던 방법과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공식적으로 건국 후의 한국 경찰은 과거의 일본 경찰과 달리 검을 휴대하지 않았으나 군인들은 일본도를 공공연히 소지하여 4·3 사건이나 여순사건 당시부터 민간인 처형에 사용하기도 했다. 군과 경찰의 이러한 야만적 고문과 학살 방법은 1970년대 유신 체제 아래에서와 1980년 5·18 당시에 또다시 재현된 바 있다.
7. 남은 문제들과 과제
* 한국전쟁 전후의 학살로 남은 문제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죽은 사람 - 이유 없는 죽음
· 산 사람 - 처절한 가난
· 남은 사람 - 강요당한 침묵과 단절
한국은 피학살자들을 세 번 죽인 셈이 된다. 전쟁 당시의 학살이 첫 번째이고, 60년 당시 진상규명 요구를 탄압한 것이 두 번째이며, 유가족과 자식들을 모두 ‘빨갱이’로 취급하여 80년까지 이들을 연좌제로 묶은 것이 세 번째이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60년 4.19 직후 대구에서 전개된 피학살자 유가족들의 진상규명 요구를 ‘빨갱이’ 운동으로 취급하여 이들이 스스로 작성한 자료를 모두 뺏고, 주모자를 감옥에 집어넣었다. 49년 문경지역에서 국군에게 학살당한 사람들의 호적에는 이들이 ‘공비’에 의해 학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거
창에서 국군에게 학살당한 사람들의 호적에는 ‘사유미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들추어내는 것 자체가 반국가적인 행동으로 탄압을 받아왔기 때문에, 사실을 알고 있는 당사자는 ‘생존’을 위해 침묵하였으며, 좌익의 혐의를 받지 않으려고 계속 여당만을 지지해 왔고, 그들의 자녀들은 오히려 ‘연좌제’등의 불이익을 당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리하여 생존자나 유족들은 자식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무슨 씻을 수 없는 잘못을 했기에 가족모두 죽은 것도 모자라 살아남은 사람도 이토록 고통 속에 몸부림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
한국전 당시의 대량학살은 이미 전쟁 당시 외국의 언론에 일부 알려졌고, 북한은 미군과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에 대해 당시부터 계속 공격을 취해오기는 했다. 그러나 전쟁 전후 학살은 여전히 완벽하게 은폐되어 있으며 사실이 규명되지 않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학살의 상징처럼 되어있는 베트남 미라이 촌의 민간인 학살, 90년대 이후 르완다나 코소보에서 발생한 학살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으나 한국 전 당시의 민간인학살은 외국인에게는 물론 한국인에게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한국전 당시의 학살은 군부정권이 들어서고 엄혹한 반공체제가 구축됨으로써 주로 좌익 측에 의한 우익 인사의 학살 사실만이 일방적으로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자료를 찾아보면 사실 좌익에 의한 학살의 규모나 양상 역시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사정 하에서 대한민국은 제주 4.3 사건이나 거창 사건의 경우 피해자들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국가기관의 책임이 드러난 경우에만 특별법 제정 등을 통해 마지못해 인정하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는 정도이다.
국가는 불순분자나 전쟁을 체험하지 못한 일부 전후 세력이 정치적으로 혼란을 야기하여 국정을 혼란케 할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이들의 명예회복 요구를 묵살하면서, “총력안보가 절실히 요청되는 때 국군의 신뢰도를 해칠 우려가 있는 점 등을 감안할 때, 희생자와 전 국민이 애석한 일이나 평화가 정착된 후 조치는 것이 좋을 것으로 판단한다”는 공식입장만 되풀이하였다. 중앙의 중요 언론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하고 있으며, 한국전쟁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도 이 문제는 피해갔다. 일부 기자와 작자들의 사명감에 의해 약간의 사실이 발굴되고 있으며, 최근 들어 학계에서도 약간의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 과제
1) 정부의 기본입장 정립과 국민적 공감대 형성
민간인 학살 문제는 분명히 전쟁범죄이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문제이다. 그것이 국제적인 전쟁 규범, 그리고 국내에서의 법을 위반하였다고 하더라도, 단순한 법리의 차원에서만 해결되기는 어렵다. 특히 한국전 당시 민간인 학살은 국가 대 국가의 전쟁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므로 유엔 혹은 국제적인 전쟁범 처벌 법규의 적용을 받기도 어렵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실질적인 책임자인 한국정부, 그리고 미국정부의 의지에 달려있다.
제주 4,3 사건을 비롯하여 50년 7월 14일 이후 발생한 미군에 의한 학살 사건을 비롯한 공비 토벌 과정에서의 학살사건도 당시의 군사작전권이 미군에게 있었으므로 학살의 최고의 책임 주체는 미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미군에 의한 직접적인 학살이 아닌 대다수의 학살의 경우는 당시 주권국가로서 한국정부가 존재하였으며, 이러한 작전 수행의 전 과정에 미국이 개입했다고는 보기 어렵기 때문에 한국정부가 일차적인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다. 설사 미국이 책임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미국의 시인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우선 한국의 국회와 정부, 그리고 한국인들의 집합적인 의지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정부가 보다 전향적인 입장을 취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국민적인 요구와 공감대의 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다수의 국민들이 이러한 사실에 대해 모르고 있거나 무관심한 상황에서라면, 그리고 국민들이 좌익에 대한 불법적인 학살이 불가피했다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이기는 했으나 지금 시점에서 또다시 거론하는 것이 별로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 문제의 해결은 어려워 질 것이다. 그런데 다수의 국민들이 이러한 생각을 갖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역사적 기억이 완전히 왜곡되어 왔으며, 다분히 반공주입식 일변도의 교육이나 그간의 냉전적 분위기 하에서 조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공개와 조사 작업이 선행된다면 국민의 의식이 바뀔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관한 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전체적인 진실규명이다. 언론이나 학계에서 부분적으로 조사를 실시해 왔으나 이제는 그것이 정부에 의해 주도되어야 한다. 언론, 인권단체나 지식인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서 적극적으로 문제제기하려는 노력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
2) 국회차원에서의 특위구성과 특별법 제정
이미 지난 10여 년 전부터 제주도 4.3 사건 단체들과 지역 언론은 토벌대에 의해 학살당한 3만 명의 주민 중 대부분은 비무장한 민간인이었다는 점을 줄기차게 주장하여 특별법 제정에까지 성공하였고, 거창사건의 경우 이미 사건 발생당시부터 700여명의 주민이 대부분 노약자와 부녀자였다는 점이 밝혀진 바 있다. 작년에는 AP통신에 추적에 의해 영동 노근리의 피학살자들이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이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1960년 4.19 직후 국회에서 이미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조사를 마친바 있으며, 80년대 말 이후 [말]지, [한겨레신문], [항도일보] 등에서는 전쟁 중 민간인 피학살자의 대부분은 무고한 민간인이었다는 점을 밝힌 바 있다.
한국정부는 48년에서 49년에 걸쳐서 발생한 제주도 4.3 사건과 거창, 산청 등지의 학살사건에 대해서만 특별법을 제정하여 진상규명 혹은 명예회복 작업을 추진하고 있으나 노근리 등지의 미군범죄에 관해서는 그냥 미국 정부가 하는 것을 따라가는 시늉만 하고 있으며, 나머지 지역의 학살 건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침묵하고 있다. 15대 국회에서는 전남 함평, 고양 금정리, 문경 석달동 등지의 유족들이 학살 사건에 대한 정부 측의 조사 혹은 명예회복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으나 이제 15대 국회가 종료되면서, 이 과제는 다시 16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현재 제주 4.3 사건, 거창사건 등에 한해서만 특별법에 제정되어 있다. 그러나 ‘거창사건 등’의 경우 특별법은 “유족들에게 가해진 불명예에 대하여 명예를 회복시켜 붐으로써 국민화합과 민주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제 1조의 목적에 명시되어 있듯이 진상규명과는 거리가 먼 ‘명예회복’에 치우쳐 있다. 즉 군의 공비토벌 작전은 정당한 것이고 그 과정에서 실수로 이러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인식 속에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그런데 각처의 피학살 유족들은 이미 수차례나 행자부, 국방부 등에 자기 문제의 피해사실에 대한 진상조사와 피해자 명예회복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그러나 국방부 측은 “군이 보유하고 있는 전사 자료로는 확인이 불가능하고, 국가 배상법상 손해배상 청구권의 소멸시효기간의 경과로 적절한 배상이 불가능하다”는 통보만 해 주었다. 그리고 국회차원에서의 특별법 제정이 바람직하므로 그 과정에서 필요한 일이 있다면 협조 하겠다‘는 천편일률적인 대답만 했다. 이러한 반응은 국회 혹은 정부 차원에서 전체적인 진상규명을 할 의지를 갖지 않는 데서 초래된 예상된 반응들이었다.
3) 국가의 정보 공개
미군의 폭격에 의해 피해를 본 익산, 단양, 마산, 창녕 등지의 경우나 거창, 산청 등 국군의 초토화 작전에 의해서 마을 거주민 전원이 학살당한 경우에는 피해자들이 비교적 부담 없이 자신의 억울함으로 호소해왔고, 문제해결에서도 약간의 진전이 있었다. 그러나 과정이야 어찌되었던 보도연맹 혹은 좌익의 혐의로 수감, 처형된 사람들의 경우 남은 가족들이 그 동안 ‘빨갱이’ 가족으로서 차별과 탄압을 너무 심하게 받아왔고, 여전히 정부나 주변에서도 이러한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나서지 않고 있다.
즉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는 이승만의 초법적인 명령이 그 이후 50년 동안 통용되는 동안 이들은 거의 숨죽이고 살아왔으며, 드러내놓고 자신의 피해사실을 알리지도 않을뿐더러 피해를 입을까봐 후손에게조차 발설하지 않고 살아왔다.실제 전쟁 중 민간인 학살의 가장 큰 부분은 국민보도연맹 관련 피해자나 예비검속 등으로 인한 피해자, 그리고 수복과정에서 적에게 협력한 혐의로 피해당한 부역자들이다.
그리고 국민보도연맹 관련자나 예비구금자의 거의 대부분은 적극적인 좌익운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국민보도연맹 결성이야말로 사상적인 전향을 표명한 사람들이므로 국가가 아무리 전시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을 구금하여 살해한다는 것은 국민에 대한 엄청난 배신행위이다. 그리고 설사 이들이 좌익에 동조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들을 명령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처형한 것은 범의 위반이며, 일종의 국가 범죄행위이다. 이번 경북도의회 조사팀도 이 점을 의식하여 “조심스럽고 관심 있게 접근하였다‘는 전제하여 이 부분에 대한 처리방안도 제시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정부는 국민의 알권리 보장이라는 차원에서 국가의 기밀과 관련된 극히 중요한 자료를 제외하고 전쟁 시 토벌작전 관련 각종 문서들, 군사재판에 관한 자료들, 초토화 작전에 대한 명령 지휘 계통을 확인할 수 있는 각종 자료들을 공개해야 한다. 그리고 미국이 보유하는 비밀문건 등은 각 피해자들이 각각 개별적으로 구하도록 방치하지 말고 정부가 나서서 일괄적으로 수집하여야 한다.
4) 국가의 공식적인 사죄, 피해자 명예회복
민간인 학살을 포함한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는 인간성에 반하는 죄(crimes against humanity), 집단학살 죄(genocide), 전쟁범죄(war crime)를 구성하여 국제형사책임을 지게 된다. 이러한 행위에는 개인책임 뿐만 아니라 국가책임도 뒤따르게 된다.따라서 공권력의 잘못된 행사로 무고한 민간인이 학살된 사살이 확인 되는대로 국가는 이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한다. 비록 과거정권이 저지른 잘못이라고 하더라도 국민대통합의 차원에서 현 정부가 국가를 대표해서 사죄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학살의 책임자에 대해서는 진상규명의 차원에서 그치고 처벌하지는 말아야 한다.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그들 대부분도 일종의 피해자이며, 그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적절치 않다. 따라서 민족 대화합의 차원에서 모두가 용서하고 화해해야 한다.
※ 참고 문헌
강정구,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 역사비평사, 1996
강정구, [한국전쟁 민간인학살의 양태 분석]
고양금정굴양민학살사건 진상규명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추진위원회,[양금정굴양민학살사건 진상보고서]
김동춘, [전쟁과 사회], 돌베개, 2000.
김주환엮음, [미국의 세계전략과 한국전쟁[, 청사
권영진, “6․25살상 다시 본다” [역사비평] 1990년 봄호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하)] 역사비평사, 1999.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다 죽여라 다 쓸어버려라]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주한미군 범죄백서 : 끝나지 않은 아픔의 역사 미군범죄], 개마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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