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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운동의 시기별 특징

草霧 2012. 10. 24. 12:31

 

 

한국 독립운동의 시기별 특징

 

 

 

1. 들어가며

 

한국의 독립운동은 그 과정에서 한국의 역사가 발전해 간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지역적 분파·공명 다툼·외세인식·친일파 등 과오나 한계도 적지 않았으나, 독립운동을 추진하면서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오던 군주제와 봉건제를 청산하고 근대국민국가 수립의 기초를 확립함으로써, 민족사의 획기적 전환을 이루었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통하여 내적으로는 민족의 주체의식과 민족주의를 성장시키면서 근대사회 형성의 원동력을 마련했고, 외적으로는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크게 향상시켰다.

 

 

 

2. 한국 독립운동사의 이해

 

. 독립운동의 개념과 범주

독립운동은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지지배를 극복하기 위한 일련의 민족적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거나 반식민지 상태에 있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구국운동이라 하며, 구국운동이 반식민지 상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했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독립운동이 된다. 한국 독립운동은 한말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으로 전개된 구국운동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1910년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부터 식민지 해방운동으로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고,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독립운동은 그 막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 독립운동의 목표와 이념

독립운동의 목표는 한마디로 일제에게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회복하여, 자주적이고 독립된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독립운동은 식민통치 부정단계까지는 동일한 목표하에 전개되었으나, 새로운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단계에서는 정치적 이념에 따라 그 목표를 달리하기도 했다.

 

, 한말의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은 국권회복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갖고 있었지만, 유생과 농민들이 결합한 의병전쟁은 전근대적 복벽론이었고, 개화지식인들이 주도한 계몽운동은 공화주의라는 국민국가 수립을 지향했다. 1910년대 역시, 복벽주의와 공화주의 노선의 차이가 있었으나, 이는 3·1운동을 계기로 극복되었다. 3·1운동 전개과정에서 복벽주의 노선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며, 이 운동을 통해 독립운동의 목표와 이념이 근대국민국가 수립과 공화주의로 합일되어 갔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 자유주의·사회주의·무정부주의 등 새로운 정치이념의 수용으로 목표와 이념이 다원화되었으며, 사회주의자들의 경우는 노동자·농민이 주도하는 프롤레타리아 정권의 수립을 지향하기도 했고, 심지어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자치권·참정권 획득을 목표로 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후 독립운동전선에서는 민족적 대단결을 이루는 것을 주요 과제로 삼았으며, 1920년대 중반부터 전개된 민족유일당운동이 그것이고, 이후 1945년 해방 때까지 이러한 노력과 시도는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모든 세력이 공유할 수 있는 공동의 이념과 목표를 지향한 새로운 정치이념들이 창안되었는데, 안창호의 대공주의大公主義와 조소앙의 삼균주의三均主義가 그것이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에 기초한 독립운동정당들이 결성됨에 따라 독립운동이념은 더욱 발전해갔는데, 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조선민족혁명당 등이 삼균주의를 받아들였다. 이외에 공산주의 계열인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청년전위동맹, 무정부주의 계열의 조선혁명자연맹 등의 단체 사이에 통일운동이 추진되었으며, 이러한 기초 위에 임시정부는 194111, 삼균주의를 골격으로 하는 대한민국건국강령을 제정·공포했다.

 

1940년대에는 중국 관내와 임시정부 이외에도, 중국공산당 지역인 연안의 조선독립동맹과 국내의 조선건국동맹 등이 활동했으나, 역시 임시정부를 비롯한 이들 사이에 상호연락관계를 유지하면서 해방 직전까지 통일전선을 이루려는 노력과 시도들이 지속되고 있었다.

 

. 독립운동사에 대한 이해

그동안 독립 운동사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 많은 제약이 따랐는데, 여기에는 남북분단과 냉전이데올로기가 크게 작용하였다. 가장 큰 문제는 남북한에서 독립 운동사를 축소하거나 왜곡해왔다는 사실이며, 또한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함으로써 독립운동을 이해하는데 많은 장애가 있었다.

 

따라서 앞으로는 우선, 제국주의를 상대로 하여 인류의 정의와 양심을 지키기 위한 투쟁으로 독립운동사를 좀 더 넓은 시각과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둘째, 한민족의 주체적 입장에서 이해해야 하며 셋째, 연합국의 승리와 해방 후 미·소의 한반도 점령·남북분단으로 인한 타율적 이해를 지양하고 자율적 역사의식을 지녀야 하며 넷째, 세계제패를 꿈꾸던 강력한 일제를 상대로 전개되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또한 다섯째, 성공했거나 드러난 활동에만 초점을 두어 독립운동사를 이해하는 성공사관을 지양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한국의 역사가 발전해 간 모습을 보도록 해야 할 것이다.

 

 

 

3. 한국 독립운동의 시기별 특징

 

. 한말 국권회복 운동시기

1876년 일본에 의해 개항된 조선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특히 1894년 청일전쟁과 경복궁 쿠데타를 기점으로 갑오개혁을 실시하면서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하였고, 19042월 러일전쟁을 빌미로 동학농민전쟁 이후 다시 한반도에 군대를 파견했다. 앞서 대한제국은 19041월 국외중립을 선언하였지만 일제는 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일본군 행동과 군사기지 설치 자유를 강요한 한일의정서, 정치·외교고문의 채용과 중요 외교안건에 대한 협의를 내용으로 하는 제1차 한일협약을 강요했는데, 한일의정서의 경우 5조에 이미 외교권을 제한하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어 대한제국이 반식민지로 전락해가는 단초가 되었다.

 

 한편, 일제는 세계열강들로부터 한반도 지배에 대한 승인을 얻어냈는데, 19057월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8월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9월 러시아와 포츠머스조약을 맺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의 식민지화를 가속화했고, 190511월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였으며, 19062월 통감부가 설치되었고 통감이 사실상 한반도를 통치하기 시작하여,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제의 반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

 

일제의 침략에 분노한 한민족은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는데, 황성신문은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사설을 통해 을사조약 체결 사실을 폭로했고, 시민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철시를 벌였으며, 민영환·조병세 등은 자결로 일제 침략에 항거했고, 나인영은 을사오적 암살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을사조약으로 상실된 국권을 회복하려는 국권회복운동은 크게 유생과 농민이 참여한 의병전쟁과 개화지식인들이 주도한 계몽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며, 고종 역시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여 일제의 침략과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폭로하고자 했다. 하지만 일제는 이러한 투쟁을 철저히 탄압했는데, 1907년 고종을 강제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마저 해산시켰으며, 각지의 의병들이 13도창의대진소라는 연합의병부대를 결성하여 서울탈환작전을 감행하자 대규모 토벌작전을 벌였다. 이렇게 한민족의 반일투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일제는 1910829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발표하여 한국을 완전한 식민지로 삼았다.

 

이와 같이 한민족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일제에게 국토와 주권을 빼앗기고 식민지지배를 받게 되었다. 일제의 식민지지배는 한민족 전체에게 국권상실의 고통을 준 것뿐만 아니라, 민족말살을 목표로 하여 우리 민족의 생존과 존립 자체를 위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민족이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민족적 과제는 민족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확보하는 것이었고, 일제에게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되찾아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제의 식민지지배라는 조건하에서 한민족이 해결해야 할 당면한 최대 과제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각계 각층에서 독립운동으로 전개되었다.

 

 

 

. 1910년대(독립운동체제 정비와 해외 독립군기지 개척)

한국독립운동사에서 1910년대는 세류細流와 같은 다양한 갈래의 독립운동들이 19193·1운동이라는 대하大河를 이루어 낸 시기이다.

 

일단 1910년대 일제 식민지 통치의 실상을 살펴보면, ‘식민지 통치기반의 구축으로 파악 할 수 있는데, 흔히 이 시기를 무단통치武斷統治로 부른다. 일본 국왕에게 직속되었던 조선총독은 일본 육해군 대장 출신이 임명되었으며, 그에게는 조선의 입법·사법·행정 및 군사에 관한 전권全權이 부여되었고, 헌병에게 경찰의 일반 치안권을 부여했던 헌병경찰제로 더욱 강력한 군사통치를 자행하였다. 또한집회 단속에 관한 건을 제정하고 신문지법·출판법을 확대 적용하여 출판물을 강제 폐간시켰으며, 19111차 조선교육령·사립학교규칙을 공포하면서 반일적인 사립학교를 폐쇄하고, 한국인들에게 식민지 통치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기술만을 교육하였으며,

 

1918서당규칙으로 서당도 통제하였다. 경제적으로는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일본인들의 토지소유를 합법화시키는 한편 272,000정보에 달하는 농경지를 국유지에 편입시켜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헐값에 불하하는 등 조선의 경제구조를 식민지 수탈체제의 토대로 마련하였다. 그 외 일제는회사령을 비롯한 각종 법령을 통해 민족산업을 억압했으며,조선광업령·조선어업령등으로 일본자본의 한국 진출을 적극 지원함으로써 광업과 어업을 사실상 일본인 중심으로 재편성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0년대의 독립운동은 국내와 국외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우선 국내 운동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독립전쟁론獨立戰爭論에 근거한 준비기로 과거 운동체간의 차별성과 분파성이 점차 희석되면서 독립전쟁론을 기조로 한 새로운 독립운동의 지평을 펼치기 시작했으며, 이는 국내는 물론 국외에 적용되었다. 다만 국내의 경우 독립운동론만이 유일한 방략이었던 것은 아니며, 이에 입각한 구체적 활동은 1915년에야 나타나고, 1910년대의 그것은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단계의 성격이 강했다는 특징이 있다. 둘째는 대한광복회·대한독립의군부와 같은 비밀결사를 통한 독립운동의 특징을 보이며,

 

셋째는 독립운동 참여층의 저변확대로 유림층 외에 노동자·농민·학생층의 역할이 증대되었으며, 넷째는 의병투쟁 양상의 변화로 1915년에 이르면 근왕적勤王的 의병활동은 거의 종식되고 일본인 고관이나 한일 반역자를 처단하는 독립전쟁론에 입각한 독립투쟁이 전개되었다. 다섯째는 일제의 종교탄압 및 종교계의 각성을 통한 종교적 배경을 가진 독립운동단체들의 활동으로, 대종교계열의 조선국권회복단·대한광복회, 기독교계열의 조선국민회 등은 주로 군자금을 모으고 국외 독립운동단체들과의 연대를 강화하였다.

 

여섯째는 복벽주의復辟主義가 극복되고 공화주의共和主義가 정립되었다는 점, 일곱째는 조선국권회복단과 연결된 대구의 태궁太弓상회, 부산의 백산白山상회 등 상점 경영을 통한 자금 조성과 연락망을 구축했다는 점, 마지막은 이러한 운동들이 결국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으로의 역량을 결집했다는 특징을 지닌다.

 

한편, 국외 독립운동의 경우, 첫째는 국내와 마찬가지로 독립전쟁론에 입각한 준비기였다는 점을 특징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서간도의 신흥학교, 연해주의 한민학교, 북간도의 명동학교·서전서숙, 미국의 한인소년병학교, 하와이의 대조선국민군단, 멕시코의 숭무학교 등이 그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는 합법단체 및 비밀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는 점, 세 번째는 독립전쟁론에 입각한 독립군 양성 기관의 설립, 네 번째는 독립운동의 연대와 분화를 특징으로 볼 수 있는데, 연해주에 설립된 권업회는 최재형·최홍준 세력과 이범윤·홍범도·유인석 등 의병계열, 이상설·신채호·이동휘 등 신민회 계열 등이 결합한 것이었고, 독립운동단체 간의 연대활동도 활발하였으며, 19177월 발표된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은 임시정부적 성격을 갖는 통일된 기구의 수립과 민족대동회의 개최를 주장함으로써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운동노선상의 갈등도 발생하였는데, 박용만의 독립전쟁론·이승만의 외교론·안창호의 준비론 등이 얽혀 독립운동체간의 분열과 대립을 보이기도 했으며 1918년 한인사회당이 창설되면서 국내외가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계열로 분화되기도 하였다. 다섯 번째는 국제정세의 변화를 이용했다는 점으로 전통질서를 부정한 신해혁명(1911)은 우리에게도 전제군주론을 후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으며, 1차 세계대전(1914)역시 국내외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국내 독립운동과 마찬가지로 종교인의 독립운동 참여 확대·공화주의의 확립·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으로의 역량 결집 등을 특징으로 볼 수 있다.

 

. 1920년대(독립운동전선의 확대와 민족총력항쟁)

1919년의 3·1 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 변화를 불가피하게 만들었으나 문화통치로 불리는 이 시기의 통치정책은 민족분열을 유도하고 경제수탈을 강화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 실상을 살펴보면, 우선 문관도 총독에 임명될 수 있도록 개정하였으나, 식민통치가 끝날 때까지 한 번도 문관 총독이 임명된 적이 없었으며, 보통경찰제도가 채택되었으나 기존보다 경찰의 수와 예산에 급격한 증가를 보였고,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 특고형사를 신설했으며 사복형사·밀정 등에 의한 감시가 강화되었다.

 

 또한 지방통치기관의 자문기구로 도협의회·부협의회·면협의회를 구성하여 한국인들로 하여금 참정권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인 양 선전했으나, 대부분 일본인과 한국인 지주·자본가·부유한 상인만이 선거권을 가질 수 있었고 오히려 한국인들의 친일화를 꾀함으로써 이들을 식민지 통치의 안전판으로 이용하여 민족분열을 가속화하였고, ‘산미증식계획을 내세워 한국을 식량공급지로 전락시켰으며 계획 자체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목적대로 수탈하여 소작인들의 몰락을 심화시켰다. 한편 일제 자본의 조선 투자를 확대하기 위해 회사령을 철폐하였고, 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허용했으나 이는 한국인들의 사상 동향을 감시하고 언제든 정간·폐간의 가능성이 컸다.

 

교육면에서는 일본 군국주의사상을 주입하는데 목적을 둔2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사립학교와 서당을 탄압함으로써 민족주의에 입각한 교육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고자 했으며, 실업교육을 강조하고 식민사관에 입각하여 한국사를 본격적으로 왜곡하였다. 이처럼 1920년대 일제의 통치는 지주·자본가들을 흡수함으로써 계층분화를 촉진하고 민족적 갈등을 증폭시켰으며, 이 상황에서 사회주의사상은 빠르게 한국 사회에 유입되어 농민·노동자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0년대 독립운동은 크게 전반기와 중반이후로 나뉘는데, 우선 3·1운동으로 인하여 인적·물적 자원이 확산된 것은 물론이고 사상이나 이념에서도 커다란 변화를 보였다. 소수의 선각자나 직업적 독립운동가에 의해 개척되었던 1910년대와 달리 전 민족적으로 운동이 전개되었고, 기독교·천도교·불교의 지도자들이 민족독립을 위해 종교이념의 차이를 초월하여 민족주의를 제고시켜나갔던 것은 종교이념보다 민족이념이 상위에 존재하는 한국 민족주의의 특질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편, 국내 민족 운동 진영은 일제가 인정하고 허용하는 테두리 안에서 실력을 양성하자는 민족주의 우파 또는 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일제와의 타협을 거부하는 민족주의 좌파로 나뉘었다.

 

우파는 실력양성의 논리를 내세웠는데, 주로 언론을 통한 국민 계몽과 문맹 퇴치, 민립 대학 설립 등과 같은 문화 운동의 전개, 민족 기업 설립과 물산 장려 운동의 추진 등을 통한 민족의 경제적 실력 양성이 큰 줄기를 이루었으며, 이는 약육강식·우승열패優勝劣敗의 논리에 따라 제국주의 지배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졌고, 민족주의 운동의 분열을 초래하였다. 국외의 경우, 3·1운동을 통해 표출된 독립 의지를 결집하기 위해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같은 시기 만주 길림성에서 김원봉 등이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여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사건·종로 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 등 과감한 투쟁을 전개했으며, 1920년대 초반 만주·연해주 일대에서는 봉오동·청산리 대첩이 일어나 큰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3·1운동에서 부상한 인도주의가 여러 가지 실천 논리를 찾던 가운데 사상과 방략이 만발하였는데, 사상적으로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무정부주의가 수용·확산되었으며 1925년 조선공산당의 결성을 계기로 사회주의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이렇게 정치사상의 궁극적 목표는 달리했어도, 식민지 민족이라는 현실에서 추구해야 할 일차적 목표가 독립달성에 있었으므로 독립운동계의 지향은 민족통일전선으로 모아지고 있었으며, 이에 1923년 단결을 목표로 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으나 창조파·개조파의 대립으로 무산되었다.

 

이후 독립운동계는 192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통합에 대한 요구가 높아져 만주에서는 정의부·참의부·신민부 3부체제로 정립되어갔고, 중국 관내에서는 국공합작의 영향하에 중국 국민당 방식의 통일전선이 시도되고 있었다. 국내 역시, 치안유지법 이후 공동연대를 지향했으나, 타협주의의 대두로 이에 반대하는 비타협적 세력의 결집을 가져옴으로써 민족운동이 분화되어 갔고, 그 과정에서 조선공산당과 천도교세력은 19266·10만세운동을 추진하여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세력의 연대를 보여주었다. 조선공산당은 조선공산당선언에서 6·10만세운동을 계승한 민족유일전선을 제기했고, 안창호는 민족유일당 건설을 제창하였으며, 임시정부의 홍진 역시 전 민족적 대당체大黨體 조직3대 정강의 하나로 제시하였는데, 이렇게 추진된 중국 관내의 민족유일당운동은 만주로 확산되어 3부 통합으로 전개되었다. 한편, 국내에서는 1927년 조선공산당과 비타협적 민족세력이 결합한 신간회의 성립으로 민족통일전선운동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는데, 신간회는 농민·노동·학생운동 등을 지도하면서 국내 민족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고,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은 이런 배경에서 전국 규모의 독립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신간회는 광주학생항일운동 이후 일제의 개입과 방해로 변질되면서 1931년 해체되고 말았다.

 

1920년대 독립운동은 민족총력적으로 또 다양하게 전개된 점에서 특징지어질 수 있을 것이나, 한편으로는 조직과 이념이 산만하여 정비되지 못한 아쉬움도 있었다. 그것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진영 모두 마찬가지였으며, 그러한 가운데 추진된 6·10만세운동과 신간회, 민족유일당운동, 광주학생운동은 3·1운동 이후 성장·발전해 간 독립운동의 귀중한 결실이었다.

 

 

. 1930년대(독립운동의 시련과 질적 심화)

1930년대의 세계는 경제공황에 대처한 미국·영국·프랑스의 블록경제체제와 그에 편입하지 못한 독일·이탈리아·일본·스페인의 파쇼체제에 의한 팽창정책이 대립하는 두 유형의 자본주의 구도에서 출발한다. 일본의 1930년부터 일어난 군사쿠테타와 1931년 만주침공의 역사가 그 성격을 대변해 주고 있다. 한편 사회주의 진영을 보면 경제공황이 극도에 달한 1929년부터 소련은 집단농장체제를 강화하고 세계적으로는 자본주의의 몰락을 점치면서 1920년대 민족진영과의 연합전선을 버리고 대중적 노동계급 기반에 수립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해갔다. 1930년을 전후한 12월테제·9월테제·10월서신 등의 코민테른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정책결정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세계정세의 변화가 일제의 식민통치에, 그리고 그에 따른 한국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음은 당연한 것이며, 우선 1930년대의 식민통치를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하나는 산미증식계획의 실시와 중단의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몰락한 한국 농민들의 피폐에 대한 대책이 절실했다는 점인데,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혁명적 농민조합이 활성화되면서 식민지 지배체제 자체를 위협하게 되었고 이에 일제는 체제 안정을 위한 농업정책으로조선소작조정령조선농지령등 소작관계의 조정을 꾀하는 법령을 만들었다. 특히 1933년부터는 농촌진흥운동을 실시하여 농민구제와 농가경제 갱생을 강조했으나, 이는 제국주의의 착취구조를 은폐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자급자족에 의한 지출의 절약이라는 것도 식민지 농정의 책임마저 한국 농민들에게 전가한 것과 다름이 없었고, 결국 일반 농민까지 체제 내로 포섭하고자 했던 정책임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문제는 1931년 만주사변의 발발로 일제의 대륙침략전쟁이 본격화되면서 한국이 대륙전진병참기지로 주목되어 일본독점자본의 진출이 본격화되었다. 이는 조선의 풍부한 공업원료와 수력자원, 노동력을 수탈하는 것으로 각 공업부문이 연결되지 못하고 파행적 발전을 보였으며 북부·북서부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적 편중성마저 띠고 특히 많은 한국인 자본이 몰락하였다.

 

따라서 1930년대의 독립운동은 국외의 경우, 만주사변으로 그 중심이 만주에서 중국 관내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1932년 윤봉길의 상해의거는 한중연합전선을 이루게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중국 관내에서 대일역량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이 시기 조직적 특징은 이념 중심의 정당 형태로 나타나는데, 만주의 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 관내에서의 한국독립당·한국혁명당·신한독립당·민족혁명당·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 등이 그것이었다. 1920년대 후반에 추진되었던 민족유일당운동은 1930년을 전후하여 중지되었으나, 1932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한 데 이어 5당 통합의 결실로 1935년에는 좌우익 통일전선 정당으로서 조선민족혁명당이 탄생했고, 중일전쟁을 계기로 19378월 우익 9단체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으며, 11월에는 좌익이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다. 만주에서는 괴뢰국 성립 후에도 조선혁명군의 잔류 부대가 1938년까지 활약하면서 동북항일연군의 유격부대와 공동전선을 통한 항일투쟁을 벌였으며, 코민테른 7차 대회 이후 중국공산당의 지도로 동북인민혁명군이 동북항일연군으로 발전되는 것과 함께 한인 공산주의세력은 통일전선체로서 1936년 재만한인조국광복회를 결성하였다.

 

국내에서는 신간회 해체 후 중심이 학생운동과 농민·노동자 운동으로 계승되어 갔는데, 일제의 군국주의 파쇼통치 하에 주로 비밀조직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대중투쟁은 조선공산당재건운동과 깊게 결합되어 전개되었는데, 1928년 조선공산당 해체 직후 사회주의세력은 재건운동에 착수하였고, 1932년에 이르면 혁명적 대중조직을 우선 건설한다는 방침 아래 대중운동에 투신해 갔으며, 따라서 운동의 이념도 전반기에는 계급투쟁적 성격이 강화되어 갔다. 하지만 후반기에 들면서 독립운동의 이념은 학생운동조직의 경우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민족의식이 고양되면서 좌익 편향을 벗어나고 있었다. 1930년대 국내 독립운동의 또 다른 특징은 국학운동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민족말살에 대항한 국학수호운동은 독립운동의 측면에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1930년대의 독립운동은 세계대전의 재발로 치닫는 격동의 정세 속에서 독립운동 단체들의 예리한 정세인식과 전망이 돋보였으며, 부단한 조직강화와 다양한 전술구사, 그리고 전투성의 제고라는 요구에 적절한 대응을 보였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통상적인 의미의 민족주의운동(독립군 무장투쟁, 의열투쟁, 임시정부운동, 문화운동 등)에 국한되지 않고, 노동·농민·학생운동 등 사회운동부분까지도 독립운동의 성격을 띠어 독립운동 범주의 확대, 참여 주체의 범위·규모의 확충, 이념적·사상적 기반의 확충 등의 발전을 내포하고 있으며, 단지 조국광복에만 목표를 둔 것이 아니라 민족해방 후 근대민족국가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두고 있었다. 따라서 1930년대 독립운동은 민족혁명과 민족대단결, 민족주의가 민족문제 해결의 최고 이념이고 방책이며 사상적 지주가 됨을 민족 성원 자신들에게 재인식시켜주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이러한 의미에서 1930년대의 독립운동은 여전히 민족문제의 해결을 중요한 과제로 안고 있는 우리 시대의 민족운동에 대하여 놓칠 수 없는 교훈을 주고 있다.

 

. 1940년대 전반(독립운동세력의 노선통합과 광복)

1940년대는 세계가 급변하면서 독립운동의 객관적 조건이 유리하게 조성되던 시기였다. 1937년 중국대륙을 침략한 일제는 동남아시아 일대로 전선을 확대시켜 갔고, 194112월 진주만을 습격하여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였다. 일제의 이같은 전쟁 확대는 유럽에서의 독·소전쟁과 더불어 세계대전으로 확대 발전되면서 연합국과 일제의 대결구도를 형성하였고, 연합국들은 카이로회담을 비롯하여 전후의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1940년대 전반의 민족현실은 이러한 일제의 극악적인 탄압에 의해 민족적인 것이 철저히 차단되고 봉쇄당했었는데, 이는 1930년대 후반부터 전개된국가총동원법국민정신총동원운동등으로부터 연결된다. 일제는국가총동원법에 기초한국민직업능력신고령, 공장사업장 기능자양성령등을 공포하여 노동자를 철저히 통제하고 군수산업부분에 대한 집중 노동력배치가 이루어 졌으며, 산미증식계획을 재개하여 수탈을 강화하고 징병·징용·정신대 등 각종 인적자원을 수탈하였다. 또한 한국인들의 철저한 일본인화를 통한 민족말살정책, 즉 황민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거국일치擧國一致·견인지구堅引持久·진충보국盡忠報國·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3차 조선교육령(1938)·국민학교규정(1941)·4차 조선교육령(1943)등 교육령 개정을 통해 한국인의 의식·언어·역사를 말살하는 교육과정을 만들었다. 19402월 실시된 창씨개명역시 한국인들의 혈통을 격하시키고 민족의식을 말살시킨 것이었으며, 그 외 한국인과 일본인의 통혼정책도 강제되었다.

 

이렇게 일제의 탄압이 강화될수록, 한편으로는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면서 독립에 대한 희망을 보았고, 1940년대의 독립운동은 그 세력을 재편하면서 광복을 준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며 진행되었다. 이 시기의 독립운동세력은 크게 중국 관내의 임시정부와 화북조선독립동맹, 그리고 국내 조선건국동맹의 세 그룹이었다. 임시정부는 민족혁명당을 포용하면서 구심력을 회복할 수 있었고,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은 서로의 논리를 수용하면서 1930년대 중반 이래 좌우익의 대표정당을 이루며 임시정부를 이끌었으며, 그 결과 1940년대에 조선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에 참여 할 수 있었고, 이로써 임시정부는 좌우연합 정부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또한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조선의용대가 편입되면서 중국 관내에서 무장세력의 군사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조선의용대 일부 대원의 화북 진출을 계기로 연안에서 결성된 조선독립동맹은 19427월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발전시켜 개편한 조직으로, 공산주의 색채가 짙었지만 대표성에서는 임시정부를 인정했다. 또한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이나 조선독립동맹의 강령은 전반적으로 대동소이함을 보여 1940년대 독립운동세력의 정치이념이나 목표는 대체로 민족 최대 다수의 균등’, ‘자유에 최고 가치를 두고 이를 실현·보장할 수 있는 사회질서를 수립하려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조선건국동맹은 19448월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며 여운형의 주도로 국내에서 결성된 비밀결사 형태의 조직으로, 중경의 임시정부와 연안의 조선독립동맹과 연결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며 따라서 국내외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임시정부와 조선독립동맹 역시 서로 연락원을 파견하여 통일전선을 도모했으나, 그 결실을 맺기 전에 일제가 패망함으로써 각기 광복을 맞이하고 말았다.

 

끝으로 광복군은 연합군과의 공동작전을 수행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영국군과의 공동작전을 수행하여 1944년 초 임팔전투에 투입되었으며, 미군 OSS와는 군사합작을 이루어 국내진입작전을 추진했다. 하지만 194585일 군사훈련을 마친 광복군은 출발 명령을 기다리던 중 일본의 항복 소식을 중국에서 접해야만 했고, 이렇게 해서 한국 독립운동은 막을 내렸지만 그간의 치열했던 노력의 보람도 없이 한반도가 미·소 점령군의 관할에 들어가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이렇게 진행된 1940년대 독립운동을 정리하면, 총 여덟 가지의 특징으로 나타낼 수 있는데, 첫째,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중국관내 지역으로 이동하였고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 지역으로 세력이 집결하면서 중경重慶과 연안延安이 독립운동의 중심지역할을 했다는 점, 둘째, 독립운동 세력의 재편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 임시정부와 독립동맹이 양대 세력을 이루며 주도하였다는 점, 셋째, 임시정부가 본연의 위상과 권위를 회복·민족의 대표기구이자 독립운동 최고기관으로 역할하였다는 점, 넷째, 여운형의 건국동맹에서 알 수 있듯이 국내의 독립운동이 소생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 다섯째,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들이 연결을 시도하고 있었다는 점, 여섯째, 광복군과 조선의용군 등 새로운 무장독립군이 결성되어 활동함으로써 50여년에 걸친 항일무장투쟁의 전통을 수립하였다는 점, 일곱째, 독립운동의 방략과 전략이 연합국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으로 집중되고 있었다는 점, 마지막 독립운동의 이념과 목표가 일치하고 있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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