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고개·아리랑고개·보토현·제터고개·성황당고개, 혜화문
성북구 城北區
Seongbuk-gu
시의 북부, 삼각산 남쪽에 위치한 구.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의 북부에 있는 자치구이다. 성북의 명칭은 이 지역에 있던 성북동(城北洞)에서 나왔다. 조선 영조 때 설치한 어영청의 북둔이 성곽 북쪽에 설치된 것에서 했다. 성북동은 1894년 갑오개혁 때 처음 등장했다.
원래는 한성부의 일부였으며, 1914년 3월 고양군 숭신면에 속했다가 그해 4월 경성부 동부출장소가 되었다. 1949년 고양군 숭인면의 일부지역과 동대문구의 일부지역이 합쳐져 성북구로 신설되었다. 1973년에 도봉구가 분리되어 나갔다. 구청 소재지는 삼선동5가이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숭신방(崇信坊)과 인창방(仁昌坊)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崇仁面) 1936년 경성부의 관할구역 확장으로 경성부에 편입과 한지면(漢芝面)에서 편입된 일부지역 1949년 고양군 숭인면의 일부지역과 동대문구의 일부를 합해 성북구 신설 1963년 양주군 노해면이 편입 1973년 성북구 숭인·노해출장소 관할구역이 도봉구로 분리 신설
조선시대에 들어 한양천도가 실현되자 성북지역은 수도 한성부의 성저십리 지역으로 편제되었다. 약 18km의 도성이 수축됨과 더불어 4대문 가운데 하나인 숙청문 즉, 북대문이 건립됨으로써 도성의 북쪽지역이라는 지리적 위치에 그 지명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성북구지역은 서울 한성부의 정도와 도성수축 및 숙청문 혜화문 등의 건립과 더불어 일련의 역사성을 가진다.
또한 서울 지방의 보장지지로서 쌓은 북한산성 역시 성북구의 북쪽 경계를 이루어 북한한성의 축성 또한 성북구 역사의 상징적인 일면을 장식하게 되었다. 아울러 혜화문을 지나 원산에 이르는 서울 동북방의 간선도로가 성북구 지역을 관통하고 있어 여진과의 교통로가 되었으며 나아가 병자로란의 침구로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사상이 발달하여 누원점의 도매가 활약하는 등 상업활동의 중심지역으로 성장하기도 하였으며 동활인서 등 빈민구제기관이 설치되어 운영되기도 하였다. 한편 삼선평에서는 군사의 조련이 실시되었고 성곽수비를 위한 어영청의 북창이 이곳에 있어 한성부의 안보 치안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또 정릉 의릉 등이 위치하여 왕실의 안장지로서의 기능도 하였으며, 선잠단, 영성단이 있고 북둔도화의 명승지로서 시민의 휴식처가 되기도 하였다.
갑오년의 대개혁 때는 중앙관제의 개혁에 따르는 지방관서의 관장기구와 수도 한성부의 직급조정, 수도치안을 담당하는 경무청의 설치 및 지방정부에 근무하는 문무관들의 임용제도의 개혁이 있었음에 그쳤고 지방제도를 바꾸지 못했는데, 을미년 개혁 때는 내각관제가 나온 후 지방제도를 개편하였는데 그 내용은 1. 전국을 23개의 부로 나누어 전국 337개의 군을 23개 부의 관할하에 소속시켰고 2. 종래 유수부 부 목 대도호부 군 현으로 되어있던 고을을 일률적으로 모두 군으로 하고 부에는 관찰사를 군에는 군수를 두어 행정사무를 총괄토록 한 것이다.
이때 한성부도 23부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그 아래에 다음의 11개 군을 두었다. (한성부 : 한성, 양주, 광주, 적성, 포천, 양평, 가평, 연천, 고양, 파주, 교하) 한성부가 경성부로 개칭된 것은 1906년 2월에 조선총감부를 설치한 때부터의 일이며, 일제는 1910년 10월 1일자 총독부령 제1호로 [부 군의 명칭 및 관할구역]을 공포하였는데 이때 경성부의 관할 구역은 종래의 한성부 일원이었다.
성북구는 북한산 아래에 위치해 있다. 서울특별시와 고양시와 경계를 이루는 삼각산 보현봉과 주능선 및 칼바위능선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와 성북천·정릉천 계류사이에 주거지로 발달한 지역으로 동쪽에 중랑구, 남쪽에 동대문구, 서쪽에 종로구와 접하고 있다. 구의 서북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100m 이하의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정릉천이 동부를 흐른다.
성북구는 도심과 서울 동북부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지역이며, 북한산 국립공원 및 대학 10개소가 위치하고 구면적의 70%가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요 간선도로인 미아로, 동소문로, 종암로 등이 확장되었으며 도시기반시설 확충과 주택개량사업이 활발히 추진되고 있어 가장 살기 좋은 도시, 가장 살고 싶은 지역으로 나날이 새롭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산봉우리들을 앞뒤에 두고 구릉과 계곡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많은 고갯길이 있는데, 미아리고개·아리랑고개·보토현·제터고개(안암동)·성황당고개(석관동)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성북에는 서울성곽, 북한산성과 같은 방위시설 등의 유적지가 유달리 많고 북한산 진흥왕순수비에서 보듯이 신라와 고구려의 접경지로 각종 문화유산이 많으며, 특히 병자호란 때 여진족이 한성의 부녀자를 붙잡아 갔다는 미아리고개(수유령)는 한국전쟁 때에도 많은 시민이 끌려간 곳으로 “한 많은 미아리고개”라는 노래말로 더욱 유명하다.
안감내다리 옛날 안암동에 안감이라는 채소장수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이 사람이 채소를 다 팔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대문밖 주막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어떤 점잖은 영감이 술값 때문에 주모와 실랑이를 벌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영감이 술을 마신 다음 술값을 치르려고 하였으나 돈을 가져오지 않아 야단을 맞고 있었던 것이 안쓰러웠던 안감은 대신 술값을 치러주었다.
영감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채소를 팔러 성 안에 들어오거든 자기 집을 찾아 달라며 자기 집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며칠 후 안감이 문안에 들어가 채소를 다 팔고 영감이 사는 집에 찾아갔다. 솟을대문이 있는 큰 집이었다. 그 영감이 나와서 반가이 맞으면서 주안상까지 차려 대접하고 은공을 갚겠으니 소원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였다. 안감이 사양을 해도 영감이 계속 다그치니까 안감이 안암동은 서쪽으로는 성북동에서 흐르는 개천이 있고, 동쪽으로는 영도사(지금의 개운사)에서 흘러내리는 개천이 있는데, 비만 오면 두 개천의 물이 흘러 안암동은 섬같이 되어 사람들이 고생을 하니 이 개천에 다리나 하나 놔주었으면 한다고 하였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 추구에만 집착하는데 이 채소장수는 동네를 위해 소원을 말하니 영감이 더욱 감동하여 쾌히 승낙하고 동네 앞에 다리를 놓아주었다. 이리하여 이 다리를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안감내다리, 개천을 안감내로 부르게 되었다.
쌀바위 성북동 숙청문밖에 ‘쌀바위’, 즉 미암이라는 바위가 있었는데 이 바위틈에서 쌀이 나왔는데, 기이하게도 아침, 점심, 저녁 세 차례에 걸쳐 꼭 한 되 가량 의 쌀이 나왔다. 처음 이것을 발견한 사람은 나무꾼 노인이었는데 그는 매일 여기서 쌀을 가져가서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날이 지나자 나무꾼 노인은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쌀을 더 많이 가져갈 양으로 쌀자루를 가지고 쌀바위에 가서 지키고 앉아 나온 쌀을 담고 얼마간 기다렸다가 쌀이 나오면 또 담아 쌀자루에 가득 채웠을 때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한달을 계속했던 어느날 쌀이 나오던 바위틈에서 쌀은 나오지 않고 대신 끈적끈적한 물이 흘러 나왔다. 깜짝 놀란 노인이 바가지로 바위틈을 계속 긁어보아도 담겨 나오는 건 더 이상 쌀이 아니었다.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구나!’ 노인은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다시는 쌀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동망봉 보문동과 종로구 숭인동 사이에 동망봉이라는 산봉우리가 있다. 조선 초 단종왕비 정순왕후 송씨는 단종이 어린 나이로 숙부인 세조에게 쫓겨 강원도 영월로 귀양갈 때 동대문 밖에서 눈물로 생이별을 하고 영월쪽을 바라볼 수 있는 청룡사 정문 옆에 작은 초가를 지어 정업원이라 하고 여기에 거처하였다. 왕비는 날마다 이 봉우리에 올라가서 동쪽의 영월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으므로 이곳을 동망봉이라 하였다고 한다.
노구맷돌 운수동 위에 『노구멧골』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이 마을에 사는 한 여인이 집을 나간 남편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노구메(밥)를 떠놓고 산천 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더니 그 정성으로 결국 남편이 돌아와서 잘 살았기 때문에 마을 이름이 되었다 한다.
옥녀봉 소문동과 맞닿아 있는 삼선교부터 점차 지대가 높아져 남쪽의 1ㆍ2ㆍ3가에 가서 낙산과 통하게 되는 곳이 과거에 『옥녀봉』이라 부르던 곳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세 명의 신선이 옥녀와 함께 놀았던 곳이라는 전설로 인해 붙여진 이름이다. 성북천이 흐르고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던 때에는 옥녀봉 구릉지대에서 염소들을 풀어 키우기도 했었다.
학더미 학더미라는 지명은 북바위(鼓岩) 부근 논 가운데 있던 더미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즉 옛날 이곳의 논이 매우 비옥하여 세 마지기[3斗落]에서 나는 쌀로 10여 식구가 살아갈 수 있었는데, 어느 날 욕심 많은 주인이 곡식을 더 많이 내어 먹으려고 논 가운데에 있는 큰 더미를 파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더미를 파 들어가자 속에서 학이 나와 날아가고, 그 후로는 비옥하던 땅이 박토(薄土)로 변하였다고 전해 온다.
정릉약수(정심약수)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 북쪽 골짜기에 있는 샘물은 옛날부터 위장병과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 하여 『정릉약수』로 불렀으며, 또 샘물이 석벽 뚫린 사이에서 나온다 하여 『환벽천(環璧泉)』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6ㆍ25전쟁 후에는 이 샘물 부근도 황폐하였는데, 전란에 남편을 잃고 병중에 있던 한씨(韓氏) 여인이 꿈속에서 신덕왕후의 계시를 받고 심력(心力)을 다하여 약수터를 돌보고 물을 마시면서 몸이 완쾌된 후로 약수는 다시 유명해졌다. 최근까지 『정심약수(正心藥水)』로 불리며 각처에서 온 사람들이 물을 마시고 길어 가는 사람들이 늘어나 줄을 이었으나 지금은 그 명성만 남은 채 메워지고 터만 남아 있다.
한 많은 미아리고개 미아로·보문로·종암로, 도심과 연결되는 혜화문과 동대문을 통과하여 원산으로 향하는 길이었던 동소문로와 미아로·종암로를 통해 일찍부터 교통이 발달하였으며, 정릉길과 북악터널 개통, 내부순환로와 정릉터널 개통이 이루어져 북부 서울을 동서로 관통하는 대로가 되었다. 광복과 6·25전쟁 이후 돈암동∼미아리 일대와 삼양동∼수유리 일대 등 곳곳에 불법정착지구가 형성되면서 인구집중이 되었으며, 1960년대의 도시재개발사업, 1970년대 후반부터는 거주지역으로 정착되었다. 그 후 내부순화로가 개통되고 정릉천 주변이 도시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성북뉴타운 지역 개발로 인한 새로운 면모로 변신하고 있다. 부자동네로 소문난 성북동에는 전통가옥과 외국 대사관저가 많으며, 기존에 개화된 한옥이 많던 돈암·동선·삼선동 등은 많은 부분 아파트단지로 변모하였다. 특히 성북동에는 고급단독주택들이 많고 돈암동·삼선동·동소문동 등지에는 개조된 한옥들이 많다.
고려대학교 등 7개 대학이 자리를 함께 하고 있어 지성과 교양이 가득한 고장으로 평가를 받고 있으며 수도권 지하철 4호선, 6호선 개통과 함께 도시의 다양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의정부 등 서울 북부 외곽지역과 도심을 연결하는 부도심권으로서 그 발전이 매우 기대되는 지역이다.
혜거(蕙居, 899~974) 나옹(懶翁, 1320~1376) 박은(1370~1422) 삼선동 장수마을 성북동 선유골 휴먼타운 길음동 소리마을 북한산국립공원 북악산국립공원 개운산근린공원 오동근린공원 청량근린공원 성북우정공원 아리랑아트홀 성북예술창작센터 간송미술관 성북전시관 성북구립미술관 성신여대박물관 동덕여대박물관 국민대박물관 한국가구박물관 고려대박물관 혜곡최순우기념관 선잠제향 아리랑축제 뜨락예술무대 다문화축제 산신제 해맞이달맞이행사 상설문화예술공연 성북동 북정 성곽마을 Wal 月축제
북한산 예로부터 한산, 화산, 삼각산 등으로 불리우는 북한산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경계에 있는 북한산과 도봉산을 중심으로 한 국립공원. 1983년 4월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북한산과 도봉산은 서울에 근접해 있으며 자연경관이 뛰어나다. 북한산은 최고봉인 백운대(836.5m)를 중심으로 북쪽에 인수봉(810.5m), 남쪽에 만경대(787m)가 자리한다. 도봉산은 최고봉 자운봉(739.5m)을 중심으로 남쪽에 만장봉·선인봉, 서쪽에 오봉이 있으며, 우이령(흔히 바위고개)을 경계로 북한산과 접한다. 1711년(숙종 37년) 쌓은 북한산성(사적 162호)을 비롯해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터(사적 228호), 북한산성행궁터(사적 479호), 중흥사터, 대서문, 동장대와 북한산구기리마애석가여래좌상(보물 215호), 삼천사지마애여래입상(보물 657호), 태고사원증국사탑비(보물 611호), 태고사원증국사탑(보물 749호) 등 많은 유물·유적지가 있다. 또한 상운사, 삼천사, 진관사, 승가사, 문수사, 화계사, 도선사, 천축사, 회룡사, 망월사 등 30여개 사찰이 있다. 북한산은 계곡에 물이 많고 산림이 우거져 야영지로 적당한데, 특히 송추계곡, 우이계곡 등이 유명하다. 백운대·인수봉 등과 같은 높은 암벽이 있어 암벽등반훈련장으로도 이용된다.
개운산 북한산에서 서쪽으로 뻗은 한북정맥의 끝자락 보현봉에서 형제봉과 북악터널의 위쪽인 보토현을 거쳐 328m 봉우리에서 다시 서남방의 북악 지맥과 동남방의 미아리고개 지맥으로 갈린다. 동남방 지맥은 정릉을 서쪽으로 끼고 돌아 아리랑고개와 미아리고개로 이어지며, 다시 높이 134m 개운산 봉우리를 형성한다. 산세는 남북방향으로 발달되어 동쪽으로 정릉천, 서쪽으로 성북천을 나누며 두 물줄기는 용두동에서 만나 청계천에서 합류된다.
안암동에 있어 ‘안암산’, 종암동의 진씨(陳氏) 성을 가진 사람의 채석장이 있어 ‘진석산(陳石山)으로도 불리운다. ’개운산‘은 나라의 운명을 새롭게 열었다는 뜻의 개운사 절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개운사는 태조 5년(1396) 왕사 무학이 창건하였는데 처음에는 지금의 고려대 이공대 부근에 짓고 이름을 영도사(永導寺)라 하였다. 정조 3년(1779)에 원빈(元嬪)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그 부근에 묘소를 정하고 영명원(永明園)이라고 하였는데, 절이 원묘에서 가깝다 하여 북쪽으로 옮겨 짓고 이름도 개운사로 고쳤다. 한편 『동사열전(東師列傳)』에는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영도사의 도문스님 처소에서 주로 양육되었는데 언젠가 영도사에서 노닐다가 절의 한 모퉁이에 이름을 써놓았고, 왕위에 오른 다음 절 이름을 나라의 운명을 새롭게 열었다는 개운사로 고쳤다고 전한다. 개운산 일대는 1936년 경성부로 편입되어 신흥 주택가로 각광받으면서 서쪽 기슭인 돈암동과 동선동 일대에 전차가 가설되고, 인구집중도가 높은 주거지로 변하였다. 1934년에는 오늘날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안암동 건물이 신축되었고, 1940년에는 개운산 일대가 공원지역으로 고시되었다. 광복 전에는 이 일대 울창한 산림으로 인해 인근 마을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고 낙엽이나 잔가지들은 땔감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광복과 함께 많은 월남민들이 산비탈에 정착하면서 나무를 마구 베어냈고, 6·25전쟁 때 포격으로 한때는 민둥산이 되었다. 1960년대 말부터 시작 된 조림과 식목사업으로 지금은 수령 30년~40년 된 나무들이 자라고 있으며 1982년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다양한 휴양시설과 운동시설을 확충하여 인근 주민의 휴식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다.
ㆍ개운사 ㆍ궁말(사당말) 정조의 후궁인 원빈 홍씨의 묘소인 영명원이 위치한 개운산 기슭은 조선왕실의 주거공간과 묘역으로 주목되었다. 궁리, 원리 등에는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과 그 아들 영순군이 대를 이어 살았다. 특히 궁말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희생된 태조의 제7자 무안대군 방번과 부인 왕씨를 비롯하여 광평대군과 부인 신씨, 그리고 영순군과 부인 최씨 등 3대를 제사하는 광평대군 일가의 사당이 있어 ‘사당말’로 불렸다.
ㆍ북바위 개운산 남쪽 기슭에는 커다란 북을 닮은 바위, 즉 북바위가 있었다 한다. 북바위 근처는 기름진 전답이 유명하여 임금님이 행차하여 친경을 할 정도였는데, 조선 태종 때 재상 박은은 평소 검소한 생활을 하고 가산을 생각하지 않아, 태종이 특별히 명하여 북바위논 몇 마지기를 하사하였다.
ㆍ진석산 개운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뒷산 이름이 진석산이다. 진석산 돌은 질과 색이 뛰어나서 부자나 세도가들이 집을 지을 때 반드시 이 돌을 사용했다고 하며, 옛 중앙청을 지을 때에도 일부 사용했다고 한다. 1960년 전후까지 채석을 허가했으나, 이 일대가 주택지화 됨에 따라 진석산의 채석작업도 중지되었다.
북악산 서울분지를 둘러싼 4산중 하나, 서울성곽의 기점, 북악은 서울의 주산 (主山)으로 경복궁 북쪽에 채 피지 않은 모란꽃송이 모양으로 우뚝 솟아 있다. 남산에 대칭하여 북악이라 칭했으며, 백악 (白岳)·공극산 (拱極山)·면악 (面岳)이라고도 합니다. 높이 342m. 기반암이 화강암으로된 북악산은, 인왕산 (仁王山)·낙산 (駱山)·남산 (南山) 등과 더불어 서울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입니다. 이들 산지 능선을 연결한 옛 서울의 성곽은 이 산을 기점으로 축조되었습니다.
산 능선에는 옛 성벽이 원형대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서쪽 산기슭과 인왕산과의 사이의 안부에는 서울 4소문의 하나인 창의문 (彰義門 :일명 紫霞門)이 남아 있습니다. 북악산은 노송이 울창한 경승지를 이루고 그 남쪽 기슭에 청와대가 있습니다. 창의문에서 정릉의 아리랑고개에 이르는 북악스카이웨이는 창의문, 팔각정, 풀장 등을 연결하는 관광도로로 울창한 숲과 서울시가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조망이 좋은 경승지입니다. 북악스카이웨이와 남동쪽 산기슭의 삼청공원은 좋은 휴식공간을 제공합니다.
북악산은 일찍이 고려 숙종 때 지금의 서울 지방에 남경 (南京)을 설치하고자 하여, 그 궁궐터로 명당 자리를 찾았습니다. 숙종 6년 (1101)에 최사추 (崔思諏)와 윤관 (尹瓘) 등이 추천하여 지금의 청와대 자리 쯤에 궁궐 (延興殿)을 지은 이래로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사의 중심무대가 되었습니다.
성북천 서울성곽 북쪽을 흐르는 하천, 꼬마 청계천 서울 백악의 동쪽 골짜기에서 시작돼 삼선교, 돈암동을 거쳐 청계천으로 접어드는 길이 5.08km 물길의 이름은 성북천이다. 삼청각 뒤편에 자리한 홍련사라는 절집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백악의 남동쪽 골짜기를 따라 내리 달리다 정신지체 아동을 위한 특수교육기관인 명수학교 근처에서 물길 흐름을 더 이상 잇지 못하고 아스팔트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냇가에서 빨래를 하는 아낙네들과 물 웅덩이를 찾아 다니며 수영을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성북천은 예로부터 유량이 많고 풍광이 아름답기로 이름이 높았다. 조선시대 역사서 <한경지략>은 성북천 주변을 “맑은 계곡과 언덕을 끼고 있어 봄마다 놀이를 나온 사람들이 산과 계곡을 가득 메운다”고 묘사했고, <그 남자네 집>의 박완서도 “개천에는 수양버들이 늘어져, 다른 동네 사람들까지 일부러 산책을 나올 정도로 낭만적이었다”고 적었다.
안암동에서 신설동으로 이어진 성북천의 마른 물길은 왕십리 뉴타운 앞에서 청계천과 몸을 섞었다. 역시 마른 하천으로 전락하고 만 청계천은 하류에서 상류로 물을 뿜어주는 모터의 힘에 기대 30cm로 정해진 물높이를 맞출 예정이다. 성북천 살리기는 청계천 복원을 비롯해 강남.북 균형발전 사업과도 맞물리는 만큼 주변 지역 주민들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데도 큰 의의가 있습니다. 성북천의 환경생태계가 되살아 나면, 우리 성북구는 보다 친환경적이고 살기 좋은 도시 공간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정릉천 정릉 옆을 흐르는 하천, 꼬마 청계천 북한산 기슭 정릉 계곡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10.25㎞를 흐르다 동대문구 용두동 청계천 물줄기로 합쳐지는 정릉천. 청계천을 시작으로 성북천과 홍제천 등 강북의 다른 샛강들에서도 맑은 물이 흐르고, 물풀이 우거진 옛 모습을 찾는 복원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정릉천이 감싸돌고 있는 종암 2동은 모랫말 또는 모랫골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정릉천의 물이 맑아 빨래터로 이용되었고, 상류에서 내려온 모래가 쌓여 정릉천 주변은 언제나 모래밭으로 변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정릉천은 유로연장 약 10.3km로 한강의 제 3 지류로서 지방 2급하천입니다. 북한산에서 동남쪽으로 흘러 월곡천과 만난 후 남쪽으로 흘러 청계천에 합류합니다. 월곡천과 만나는 구간 위쪽으로는 대부분 복개되어 도로로 이용되고 있으며, 하류쪽으로는 직벽 제방, 시멘트 블록 호안, 직선 물길로 정비되고 내부순환로가 하천을 따라 뻗어 있어 생물 서식공간으로서의 역할이 매우 제한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정릉천의 옛 명성을 회복하기 위해 성북구는 정릉천 6.3㎞구간을 주거지역과 조화를 이루는 친환경적 자연하천으로 조성할 계획이며, 오는 2010년 12월까지 사업을 완료할 예정입니다. 정릉천 복원 사업이 완료되면 성북구는 명실상부하게 인간중심의 환경 친화적인 도시로 탈바꿈 할 것이며 향후 우리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줄 소중한 환경 유산으로 남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북한산성(北漢山城), 정릉(貞陵), 의릉(懿陵)
문화유적으로 한성의 외곽 관방시설인 북한산성(北漢山城)이 삼각산의 주요 봉우리를 연결하며 보국문·대성문 등과 더불어 축조되어 있다. 왕릉으로 태조비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貞陵), 경종과 경종비 선의왕후 어씨의 의릉(懿陵) 등이 있다.
봉국사(奉國寺)·경국사(慶國寺), 신흥사(新興寺), 미타사(彌陀寺)·보문사(普門寺), 개운사(開雲寺)·보문사(普門寺) 등 역사가 긴 전통사찰이 있으며, 이 밖에 많은 암자도 있다. 그리고 서울성곽이 종로구와 경계를 이루며 성북동 일대에 남아 있으며, 선잠단지(先蠶壇址), 성락원 등 문화유적이 자연림과 수석(水石)이 어울려 많은 시민이 찾는 명승지로 손꼽힌다. 또 성북동에는 많은 국보 및 국보급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간송미술관이 있으며 이재준가·이태준가, 김진흥가 등도 전통가옥이 보존되고 있다.
영취사 5층석탑(靈鷲寺 五層石塔) [문화재 자료 제40호] 정각사 석가모니불화(正覺寺 釋迦牟尼 佛畵) [문화재 자료 제35호] 마포 최사영 가옥(麻浦 崔思永 古宅)[문화재 자료 제37호] 이중 전보송신기[등록문화재제432호] 무장하 케이블 접속장치[등록문화재제435호] 음향인자전신기[등록문화재제433호] 벽걸이형 공전식 전화기[등록문화재제430호] 벽걸이형 자동식 전화기[등록문화재제431호] 벽걸이형 자석식 전화기[등록문화재제429호] 동덕여자의숙 태극기[등록문화재 제384호 ] 최순우(崔淳雨 ) 옛집[등록문화재 제268호] 동선동 권진규(東仙洞 權鎭圭) 아뜰리에[등록문화재 제134호 ] 돈암장[등록문화재 제91호] (구)중앙정보부 강당 [등록문화재 제92호] 경국사 목 관음보살좌상(慶國寺 木 觀音菩薩坐像)[시도유형문화재제248호] 정각사 목 아미타불좌상(正覺寺 木 阿彌陀佛坐像)[시도유형문화재제223호] 보타사 금동관음보살좌상(普陀寺 金銅觀音菩薩坐像) [시도유형문화재제216호] 팔정사 목대세지보살좌상(八正寺木大勢至菩薩坐像)[시도유형문화재 제184호 (성북구)] 보문사 지장보살도(普門寺地藏菩살圖)[시도유형문화재 제100호 (성북구)] 보문사 대웅전신중도(普聞寺大雄殿神衆圖)[시도유형문화재 제99호 (성북구)] 보문사 대웅전영산회상도(普門寺大雄殿靈山會上圖)[시도유형문화재 제98호 (성북구)] 보타사 마애불(普陀寺磨崖佛)[시도유형문화재 제89호 (성북구)] 흥천사 명부전(興天寺冥府殿)[시도유형문화재 제67호 (성북구)] 흥천사 극락보전(興天寺極樂寶殿)[시도유형문화재 제66호 (성북구)] 삼군부 총무당(三軍府總武堂)[시도유형문화재 제37호 (성북구)] 석조미륵불입상(石造彌勒佛立像)[시도유형문화재 제30호 (성북구)] 석조팔각부도(石造八角浮屠)[시도유형문화재 제29호 (성북구)] 삼층석탑(三層石塔)[시도유형문화재제28호 (성북구)] 보문사묘승전지장보살도(普門寺妙勝殿地藏菩薩圖) [유형문화재 제100호] 보문사대웅전신중도(普門寺大雄殿神衆圖) [유형문화재 제99호] 보문사대웅전영산회상도(普門寺大雄殿靈山會上圖) [유형문화재 제98호] 보타사마애불(普陀寺磨崖佛) [유형문화재 제89호] 흥천사명부전(興天寺冥府殿) [유형문화재 제67호] 흥천사극락보전(興天寺極樂寶殿) [유형문화재 제66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舍那佛坐像) [유형문화재 제31호] 삼군부총무당(三軍府總務堂) [유형문화재 제37호] 석조미륵불입상(石造彌勒佛立像) [유형문화재 제30호] 석조팔각부도(石造八刻浮屠) [유형문화재 제29호] 목면납의고(木綿納衣袴) [중요민속자료제113-8호] 답호(답호)[중요민속자료 제113-7호] 심의(深衣) [중요민속자료제113-6호] 명주납의중치막(明紬納衣中致莫) [중요민속자료제113-5호 ] 명주누비창의(明紬누비氅衣) [중요민속자료제113-2호] 홍진종 의복(高大博物館所藏洪鎭宗衣服)[중요민속자료 제113호] 대례복 (여)(大禮服(女))[중요민속자료 제6-8호] 대례복 (남)(大禮服(男)[중요민속자료 제6-7호] 배자(褙子)[중요민속자료 제6-6호] 제복(祭服)[중요민속자료 제6-5호] 소례복(小禮服)[중요민속자료 제6-4호] 전복(戰服)[중요민속자료 제6-3호] 구군복(具軍服)[중요민속자료 제6-2호] 조복(朝服)[중요민속자료 제6-1호] 사영 김병기 일가옷(思潁金炳冀一家옷)[중요민속자료 제6호] 장위동 김진흥 가옥(長位洞金鎭興家屋) [민속자료 제25호] 상허 이태준 가옥(尙虛李泰俊家屋) [민속자료 제11호] 장교동 한규설 가옥(長橋洞韓圭卨家屋) [민속자료 제7호] 성북동 이종석 별장(城北洞李種奭別莊)[민속자료 제10호] 사영김병기일가옷(思潁金炳冀一家옷) [중요민속자료 제6호] 홍진종 의복(洪鎭宗의복) [중요민속자료 제113호] 민화장(民畵匠) [시도무형문화재제18호(성북구) ] 태평무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대금산조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판소리 (적벽가)[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매듭장 [무형문화재 제13호] 성락원(城樂園)[명승 제35호] 서울백악산 일원(서울 白岳山 一圓)[사적 및 명승 제10호]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高麗大學校中央圖書館)[사적 제286호] 고려대학교 본관(高麗大學校本館)[사적 제285호] 서울 의릉(懿陵)[사적 제204호] 정릉(貞陵) [사적 제208호] 고려대 중앙도서관 [사적 제286호] 선잠단지 [사적 제83호] 서울 한양도성 [사적 제10호]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海東八道烽火山岳地圖)[보물 제1533호 ] 서궐도안(西闕圖案) [보물 제1534호] 근사록(近思錄) [보물 제1077-2호 ] 월인석보 권20(月印釋譜卷20) [보물 제745-11호] 수선전도목판(首善全圖木板) [보물 제853호] 대동여지도(大東與地圖) [보물 제850호] 청화백자운용문호 [보물 제1064호] 경국사 목각탱(慶國寺木刻幀) [보물 제748호] 동인지문사륙-권7~9(東人之文四六-卷7~9)[보물 제710-5호] 동인지문사륙-권1~6(東人之文四六-卷1~6)[보물 제710-2호] 동인지문사륙-권1~6,10~15(東人之文四六-卷1~6,10~15)[보물 제710호] 중용주자혹문(中庸朱子或問) [보물제706호] 전문경오층석탑(傳聞慶五層石塔) [보물 제580호] 괴산 외사리석조부도(槐山外沙里石造浮屠) [보물 제579호]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 [보물 제285호]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 [보물 제284호] 금보(琴譜) [보물 제283호] 삼국유사 권3-5(三國遺事-卷3-5)[보물 제 419-4호] 청자상감포도동자문매병(靑磁象嵌葡萄童子文梅甁) [보물 제286호] 백자박산향로(白磁博山香爐) [보물 제238호] 분청사기 모란문반합(粉靑沙器牡丹紋飯盒) [보물 제348호] 분청박지화문병(粉靑剝地花文甁) [보물 제287호]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 [보물 제417호] 청자상감모자합(靑磁象嵌母子盒) [보물 제349호] 권지 4,5(卷之四,五)[국보 제149-1호]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靑華白磁鐵砂辰砂菊花文甁) [국보 제294호] 용감수경(龍龕手鏡) [국보 제291호] 청자모자원형연적(靑磁母子猿形硯滴) [국보 제270호] 동궐도(東闕圖) [국보 제249호] 혼천시계(渾天時計) [국보 제230호] 분청사기인화문태<내외호>(粉靑沙器印花文胎-內外壺) [국보 제177호]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東萊先生校正北史祥節) [국보 제149호] 혜원풍속도(蕙園風俗圖) [국보 제135호] 금동삼존불감(金銅三尊佛龕) [국보 제73호] 금동계미명삼존불(金銅癸未銘三尊佛) [국보 제72호] 동국정운 권1, 6(東國正韻) [국보 제71호] 귀면청동로(鬼面靑銅爐) [국보 제145호] 청자압형수적(靑磁鴨形水滴) [국보 제74호] 훈민정음(訓民正音) [국보 제70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瓷象嵌雲鶴文梅甁) [국보 제68호] 청자상감류죽연로 원앙문정병(靑瓷象嵌柳竹蓮蘆鴛鴦文淨甁) [국보 제66호] 청자기린유개향로(靑磁麒麟鍮蓋香爐) [국보 제65호] 정릉(사적 제208호) 의릉 선잠단터 성북동의 고택(古宅)들이 서울특별시 민속자료로 지정 봉국사·경국사·신흥사·보문사·개운사 청자기린뉴개향로(국보 제65호) 대금산조(중요무형문화재제45호) 서울성곽(사적 제10호) 장교동한규설대감가(민속자료 제7호) 경국사 봉국사 정법사 내원사 흥천사 미타사 보문사 개운사 적조사
성북100경
테마 01 선조의 숨결이 배어있는 문화유적 정릉 / 의릉 / 수연산방 / 이재준가 / 심우장 / 방생선원 / 최순우옛집 / 박목월 시비 / 윤동주 시비 / 김소월 시비 / 박재삼 시비 / 한규설 대감가 / 한옥단지 / 성락원 / 김진흥가 / 삼군부총무당
테마 02 발길 닿는 곳 마다 퍼지는 문화의 향기 성북구민회관 / 하나로거리 / 영화의거리 / 아리랑시네센터 / 은행나무길 / 전나무길 / 성북정보도서관 / 플라타너스길 / 삼청각 / 선잠단지 / 물의거리 / 북한산산신제
테마 03 삶을 일깨우는 ‘인생교과서’문화의 향기 길상사 / 길상사내 보호수 /개운사 / 대원암 / 정법사 / 경국사 / 흥천사 / 심곡안 / 봉국사 / 보타사 / 영취사 / 적조사 / 삼곡사 / 보문사 / 영불사 / 내원사 송보살터 거북바위 / 미타사 / 대한불교진각종
테마 04 젊은 인재들의 교육의 산실 대학캠퍼스 고려대학교 / 국민대학교 / 서경대학교 / 대원암 / 정법사 / 경국사 / 흥천사 / 동덕여자대학교 / 한국예술종합학교 /성신여자대학교
테마 05 현대인들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사랑방 아리랑 고개 / 미아리 고개 / 북한산삼림체험관 / 북한산 /북한산 계곡 / 북악스카이웨이 / 북한산에서 본 성북 / 성북동 저택가 / 월곡 인조잔디구장 / 애기능터 / 오동공원 / 개운산숲속의쉼터 / 삼선공원 / 아름다운 나무 / 동망봉쉼터 / 중량천자전거도로
테마 06 세련미와 고전미, 여유미의 완벽한 조화 현대백화점 / 신세계백화점 / 태극당베이커리 / 홀리데이인성북 / 장위 골목시장 / 보문재래 시장 / 길음션대시장
테마 07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성북구 명소
성북명소
성북동 옛날부터 서울의 도성 바깥지역으로 1396년(태조5) 한성부 내 동부 숭인방과 인창방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기도 고양군 승인면으로 변경되었다. 1949년에는 동대문구에 속했던 돈암동과 안암동, 종로구에 속했던 성북동, 경기도 고양군 승인면 일부를 합해 성북구가 신설되었다. 서울 동북부의 ‘허브도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성북동은 서울성곽, 북악산, 선잠단지 등 다양한 유적지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어 옛스러움의 미학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아리랑고개 아리랑은 제1의 국가! 아리랑은 민족의 노래! 이는 "아리랑"이 "민요"이상의 민족공동 의식을 대변하는 "백성의 소리"임을 말한 것이다. 아리랑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구전민요로서 세마치 장단으로 된 이 민요는 우리 민족의 정서에 적합하기 때문에 남녀노소를 초월하여 가장 널리 애창되었으며, 한말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겨레의 울분과 감정을 토하는 더 없는 수단이 되었다. 또한 일제 초기에 어떤 외국인 선교사는 "조선사람이 있는 곳에 아리랑이 있다"고 해서 "아리랑"이 생활의 일부분임을 지적했다
우리 민족의 삶 속에서 아리랑고개는 좌절과 시련의 역사, 그리고 이를 극복한 과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리랑고개는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넘던 고개였고, 눈물을 흘리며 걷던 고개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는 실존의 고개이든 상징의 고개이든 아리랑고개가 많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를 주제로 한 영화가 만들어져 민족의 염원을 상징적으로 그리기도 했습니다. 아리랑고개는 돈암사거리를 기점으로 하여 서쪽으로 동소문동 동쪼족으로 동선동을 지나 돈암동, 정릉길과 교차하는 아리랑 시장 앞까지 폭 15m, 길이 1,450m의 가로명이자 고개 이름도 된다. 아리랑 고개는 서울 시내 249개 가로명 가운데 길이 아닌 고개를 부르는 유일한 도로다.
아리랑고개의 명칭은 이름 그대로 이 도로에 돈암동에서 정릉동으로 넘어가는 유서깊은 아리랑고개(일명 정릉고개)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그 유래로 1935년 일제강점기에 요리업자들이 고급 요정을 꾸며 손님들을 끌기 위해 민요 "아리랑"의 이름을 사용했다는 설이 있으며, 또 여기에서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항거 민족정신을 형상화한 춘사(春史) 나운규(羅雲奎) 선생이 영화 "아리랑"을 촬영하였다고도 전한다. 이를 기념하여 매년 아리랑 축제를 개최해오고 있으며 1997년 아리랑고개를 '영화의 거리'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워 테마공원조성, 아리랑 시네센터, 아리랑 정보도서관 등을 설립, 전통과 역사, 문화가 살아 숨쉬는 거리로 탈바꿈하였습니다. 아리랑고개 곳곳에 쉽터와 나운규 소공원 등 휴식 공간이 조성되어 가족 나들이 장소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영화 "아리랑" 의 촬영배경인 아리랑길에 기념가로와 테마공원을 조성하는 등 영화의 거리로 특화함으로써 전통과 역사, 정신문화가 살아숨쉬는 교육, 문화, 휴식, 관광의 명소를 조성함을 목적으로 한다.
아리랑길 1.5km 돈암동 사거리 - 아리랑 고개 - 정릉길 입구 - 양종단의 출입로 도입부 (교감의 장) - 테마공연장과 공연장이 있는 전개부 (공연과 휴식의 장) - 영화기념관과 영화도서관이 들어설 정상부 (공연과 휴식의 장) 아리랑길 확장공사로 24M의 6차로 도로 설치 예쩡이며, 좌우 각 보도폭은 2.5M 아리랑 고개를 가로지르는 구름다리 조성 예정
본 영화의 거리 조성계획은 성북구 도시계획 및 도시설계에 근간을 두고 현재 아리랑길로 명명되어 있는 가로 1.5km를 계획 대상지로 설정하여 쾌적한 도시경관 조성을 기본 목표로 하고, 성북구의 도시 장기발전계획의 조종합적 개발 차원의 접근을 통해 도시가로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기능을 통합화하여 극대화시키는 전제하에 영화를 테마로 한 독특한 가로문화 공간을 체계화하는 계획을 수립한다. 현재 아리랑 고개의 가로구간을 중심으로 영화를 테마로 한 독특한 가로문화 공간을 형성하여 도시민에게 이색적인 장소 제공은 물론, 가로문화를 통한 여가 선용의 장을 마련하여 도시가로의 활약을 기대한다. 일상적인 가로의 이미지를 벗어나 적극적인 활동과 체험의 장이 될 수 있는 가로공간 조성을 통해 다양한 가로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 영화를 테마로 한 다양한 시설계획을 통해 공간 및 시설 이용의 편의성을 꾀하는 동시에 공간에 따른 소 주제와 전체적인 가로문화 조성에 따른 목표이념의 연관 전개를 일관성있게 계획한다.
미아리고개 돈암동 고개·돈암현(敦岩峴)이라고도 한다. 돈암동에서 길음동(吉音洞)으로 넘어가는 미아로에 있다. 옛날에는 되놈이 이 고개를 넘어 서울에 침입하였으므로 되너미고개라고 불렀으며, 한자명으로는 적유령(狄逾嶺)이라 하였다. 또 6 ·25전쟁 때에는 수많은 애국지사와 저명인사들이 쇠사슬에 묶인 채 이 고개를 넘어 북한으로 납치되어 갔다. 이 고개에 얽힌 사연을 내용으로 한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널리 알려진 대중가요이다.
언덕에서 쉬어간다’는 미아 서울 돈암동에서 길음동으로 이어지는 ‘미아리고개’는 우리 역사의 마디마디 등장하는 오랜 증인 같은 고갯길이다. 그때그때 불리어진 이름에서 진한 역사의 숨결이 느껴진다. 예전에는 이 고개를 ‘되너미고개’라 불렀다. 그 유래는 병자호란 때 되놈(胡人)들이 이 고개를 넘어 침입했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과 고갯길의 경사가 심해 고갯마루에 오르다 보면 다시 밥을 먹어야 된다는 뜻으로, 즉 밥을 ‘되(다시) 먹는 고개’라는 말이 변해 한자음 돈암(敦岩)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18세기 중엽으로 여겨지는 사산금표도에는호유현(胡踰峴)으로, 겸재 정선의 ‘도성대지도’, 고산자 김정호의 ‘수선전도’ 등 대부분 지도에는 적유현(狄逾峴)이라는 이름으로 쓰여 있다.
또 돈암현(敦岩峴)도 보인다. 이외에도 ‘되너미’에서 접두어 ‘되’는 ‘일이 힘에 벅차다’는 뜻을 지닌 순우리말 형용사 ‘되다’에서 온 것이라는 주장도 눈에 띈다. 어쨌든 지금의 미아리고개는 고갯길에 얽힌 힘든 역사만큼이나 어렵게 넘어야 했던 고갯길이었다. 지금의 미아리고개는 조선시대 여진족이 북쪽에서 혜화문을 통해 도성으로 입성할 때 이 고개를 이용했었다고 전해 온다. 아마 이 고갯길을 넘을 때 여진족의 마차는 가파르고 험한 고개 탓에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6·25 전쟁 당시엔 북한군 탱크가 이 고개를 지나갔다. 인민군이 패퇴할 때 북으로 끌려가던 가족을 이 고개에서 바라보았던 우리 민족의 마음 아픈 역사도 배어 있다. 작사가 반야월 선생의‘단장의 미아리고개’의 노랫말은 당시의 아픔을 바탕으로 지어졌다.
언덕에서 쉬어 간다’는 뜻의 한자어 미아(彌阿)란 지명은 조선 말 고종(高宗) 초 공식기록에 처음 나타나는데 그 유래는 확실치 않다. 다만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되너미고개(敦岩峴)를 일명 미아리(彌阿里)고개라고 부르는 까닭에 고개 이름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는 설과 미아7동에 있는 불당곡(佛堂谷)에 오래된 절인 미아사(彌阿寺)가 있어 이름도 절 이름에서 땄다는 설이 있다. 미아리고개는 예전엔 우마차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매우 경사지고 험준한 고개였으나 196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변신을 거듭했습니다. 고개 정상에 노래비, 미아리고개 유래비, 휴식처를 갖춘 소공원이 탄생하였고, ‘아리랑아트홀’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또한 도로도 8차선으로 확장되고 육교 대신 구름다리가 들어서면서 주민 편의는 물론 미적효과까지 동시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로거리 90년대에는 10대들의 천국이라는 제2의 명동거리로 돈암사거리에서 정릉으로 이어지는 아리랑고개와 미아삼거리와 연결되는 미아리 고개 방향, 문화 예술의 거리인 삼선교 혜화동 방향에 둘러싸인 강북지역의 주요 상권으로 입지를 굳혀가고 있습니다. 항상 사람이 끊이지 않는 곳, 높은 구매력을 자랑하는 성신여대입구역 돈암동 거리는 강북지역에 유명한 패션의 거리로 자리잡은지 오래입니다.
특히 4호선이 개통되면서 여대앞 까페골목에서 패션거리로 부상하면서 90년대에는 10대들의 천국이라는 제2의 명동거리로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돈암사거리에서 정릉으로 이어지는 아리랑고개와 미아삼거리와 연결되는 미아리 고개 방향, 문화 예술의 거리인 삼선교 혜화동 방향에 둘러싸인 강북지역의 주요 상권으로 입지를 굳혀가고 있습니다.
최근 하나로거리는 “담배연기 없는 성북”이라는 슬로건 아래 금연홍보의 메카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습니다. 2004년 금연홍보거리로 조성된 이후 매년 금연과 관련한 행사와 페스티벌이 개최되고 있으며 금연조형물, 금연마스코트, 대형아치 등이 설치되어 청소년과 주민들에게 금연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걷기좋은산책로 중량천 자전거 도로, 중랑천 입구 -> 중랑교 정릉잣나무숲 산책로, 정릉초 -> 안내문 알림판 -> 녹지관리초소 -> 칼바위 매표소 -> 군부대 -> 솔샘발원지 -> 잣나무 밭(운동정보게시판) -> 송죽배드민턴장 -> 입구 태조 왕비(신덕왕후) 정릉 산책로, 입구 -> 인수천 -> 백운정 -> 정심약수 -> 입구 조선경종의릉 산책로, 입구 -> 전망대 -> 계단 -> 구 중앙정보부강단 -> 입구 오동공원 산책로, 입구 -> 애기능터 -> 상곡 배드민턴장, 스마일 배드민턴장 -> 입구 서울성곽 산책로, 입구 -> 성곽길 -> 군부대 -> 북악산 도시 자연공원 게시판 -> 약수터 -> 생활체육시설 -> 북악산 도시 자연공원 게시판 -> 입구, 숙정문가는 길 제 1코스 선정 : 말바위쉼터(와룡공원) -> 숙정문 -> 곡장 -> 백악마루(정상) -> 창위문쉼터(자하문) 북악스카이웨이 산책로, 입구 -> 성가정입구 -> 북악골프장 -> 팔각정 -> 종로구 경계 개운산 산책로, 고명정보고 ->개운산 스포츠센터 -> 개운산 작은운동장 -> 고명정보고, 고대후문 -> 돌계단이용 장애인보도 -> 개운산 작은운동장 -> 고대후문
의릉 [사적제24호] 의릉은 조선 후기 경종(景宗)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宣懿王后魚氏)의 능입니다. 의릉이 위치한 곳은 천장산(天臧山) 밑으로서 옛 지명은 양주 중량포(中梁浦)입니다. 경종은 숙종의 장남으로 장희빈으로 더 잘 알려진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 장씨(張氏)의 소생으로 이름은 균, 자는 휘서(輝瑞)입니다. 숙종 14년(1688)에 태어나서 세 살 때 왕세자에 책봉되어 숙종 43년(1717) 8월에 청정(聽政)을 대리하다가 3년 후에 숙종이 승하하자 경희궁에서 즉위 하였습니다.경종의 첫 번째 왕비는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인데 세자빈으로 있을 때 세상을 떠났으므로 동구릉의 혜릉(惠陵)에 안장하였습니다. 이어서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는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구(魚有龜)의 딸로 15세 때 세자빈이 되었습니다. 경종의 즉위와 더불어 왕비로 진봉(進封)되었는데, 온유한 성품을 지니고 매사에 익숙하였으나 영조 6년(1730)에 26세로 소생없이 승하 하였습니다. 경종은 병약하여 재위 4년 만에 승하 하였는데 기록에 따르면 모두 장희빈이 사사된 후부터 질환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경종은 성격이 온유 하였으며 자녀가 없고 병이 많아 이복 동생 연잉군(延잉君:후일 영조)을 왕세자로 책봉 하였습니다.4년 동안의 경종 재위 기간중에는 집권세력이었던 소론(少論)이 연잉군의 대리 청정을 추진 하던 노론(老論) 세력을 숙청한 경종 원년(1720)의 신축옥사(辛丑獄事)와 경종 2년(1722)에 임인옥사(壬寅獄事) 등의 두 번의 옥사(이른바 신임사화)가 일어났습니다. 경종은 재위 기간동안 서양의 수총기(手銃器:소화기)를 모방하여 이를 제작하게 하고, 3남 지방 양전(量田)의 민원을 시정하게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쌍릉(雙陵)은 좌우로 조성하나 의릉은 앞 뒤로 놓아 능역을 조성 하였습니다. 이러한 전후능설제도(前後陵設制度)는 영릉(寧陵: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능)에서 처음 나타난 형식이데 이는 풍수지리적으로 생기가 왕성한 정혈(正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두 개의 봉분을 앞뒤로 놓아 능을 조성하였습니다. 영릉과 다른점은 영릉은 왕과 왕비의 두 봉분이 약간 엇비슷듬하게 배치 하였다면 의릉은 두 봉분이 앞뒤로 배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왕릉과 왕비릉은 각각 단릉(單陵)의 상설을 모두 갖추고 있는데, 뒤에 있는 왕릉에만 곡장(曲墻)을 둘러 쌍릉임을 나타내었습니다. 석물(石物)은 능 앞에 척수를 줄여 실물 크기로 조각된 문관석, 무관석이 세워져 있고 봉분은 병풍석이 없이 난간석(欄干石)만 두르고 있습니다. 그밖에 혼유석(魂遊石)ㆍ장명등(長明燈)ㆍ망주석(望柱石)ㆍ문무석(文武石)과 말ㆍ양ㆍ호랑이가 있습니다. 능석물의 배치와 양식은 명릉(明陵: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제2계비 인원왕후의 능)과 같이 규모가 작고 간소한 후릉제도(厚陵制度)를 택하였는데, 이는 <속오례의(續五禮儀)>를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의릉의 능역은 114,658평입니다. 추존된 순조의 아들 익종(翼宗)의 능도 순조 31년(1831) 8월 4일에 이곳 의릉 좌강(左岡)에 자리 잡아 연경묘(延慶墓)라 하다가 헌종 즉위년에 추존하여 수릉(綏陵)으로 높였는데 철종 6년(1855)에 동구릉으로 이장 하였습니다.
정릉 [사적 제208호] 조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의 능입니다. 처음 능지를 정한 곳은 안암동이었으나 산역(山役)을 시작할 때 물이 솟아나와 현재 중구 정동의 덕수궁 북서쪽에 능을 조성하였습니다. 신덕왕후는 황해도 곡산부 강윤성(康允成, 判三司事贈象山府院君)의 딸로 이성계와 만나 2남 1녀를 낳았고 태조 원년(1392)에 현비로 책봉되었으며, 태조 7년(1398) 8월 13일 판내시부사 이득분(李得芬)의 집에서 승하하였습니다. 사랑하던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너무 상심하여 슬퍼하다가 능터(陵地)를 친히 찾았습니다. 태조는 공신들의 주장대로 국모를 높이는 뜻에서 공신수릉제(功臣守陵制)를 채용하고 능역을 황화방 북원(皇華坊 北原, 현 정동)에 조영하였습니다. 그 동편에는 정릉의 원찰(願刹)로서 170여간의 흥천사(興天寺)를 세운 다음 자주 행행(行幸)하였고 경복궁에서 정릉의 아침 재 올리는 흥천사의 종소리를 듣고서야 수라를 들었습니다. 이 흥천사 종은 후일 종루(鐘樓)에 걸려 서울 장안의 시각을 알리기도 하였다가 현재는 덕수궁에 옮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정릉은 태종이 즉위하면서 푸대접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조선 건국 후 이방원(태종)이 건국 공신으로 왕위를 계승하고자 하던 차에 신덕왕후가 그의 소생 방석을 세자로 삼았으므로 증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덕왕후가 승하한 지 2년 뒤에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은 이복 동생 방번과 방석을 죽이고, 그의 형 방간과 싸워 이겨 왕위에 오르자 정릉을 눈에 가시로 여겼습니다. 이윽고 태조가 승하하자 이로부터 9개월 만인 태종 9년(1409) 2월에, 의정부에서 정릉이 유독 성 안에 있어서 미편(未便)하고, 중국 사신이 머무는 태평관이 가까우니 이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상소를 올렸으므로 동소문 밖 사을한리(沙乙閑里 :현 정릉)로 이장하였습니다. 태종은 능을 옮긴 지 한달이 지난 후에는 봉분을 깎아 버리고 정자각(丁字閣)을 헐어냈으며 석물(石物)들을 모두 땅에 묻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해 여름, 흙으로 만든 광교(廣橋)가 무너지자 12신상(十二神像) 등의 석물을 실어다 돌다리를 만들게 하고, 그 밖의 석재나 목재들은 태평관을 건립할 때 부속재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정릉은 돌보는 이가 없었으므로 능침이 황폐하여 아무도 신덕왕후의 능으로 보지 않았는데, 170년이 지난 선조때 신덕왕후의 후손인 강순일(康純一)이 군역 면제의 혜택을 받고자 조정에 소청하자 이를 계기로 정릉 위치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당시 아차산 일대 등을 모두 뒤졌으나 흔적이 없었는데, 조선 초 태종 때 변계량(卞季良)이 하늘에 제사 지낸 제문(祭文) 속에서 정릉에 관한 구절을 찾아내어 정릉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정릉 능침을 수봉(修封)하고 한식에 제사하는 것만으로 그쳤습니다. 그 후 현종 10년(1669)에 송시열(宋時烈)의 계청(啓請)으로 신덕왕후는 200년만에 비로소 종묘에 배향되고 능묘로 봉심(奉審)하기로 하였습니다. 또한 이경석(李景奭) 등의 계청으로 능을 수리하고, 재실(齋室)을 중건하여 수호군을 정해 주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능의 관리를 위하여 영(令) 1원과 참봉 1원을 두었습니다. 이 때에 현종은 10월 2일 교서를 발포하고 과거(科擧)를 특별히 설정하여 성대하게 경축하였습니다. 봉릉(封陵) 설재(設齋)하던 날에는 비가 정릉동 일대에만 많이 쏟아졌는데 그 당시에 주민들은 이 큰 비를 가리켜 억울한 원을 씻는 비라 해서 『세원지우(洗寃之雨)』라 하였다고 전합니다.
숙정문 [사적 제10호] http://www.bukak.or.kr 38년 만에 시민들에게 공개되는 비경 삼청터널 위에 자리한 숙정문은 남대문ㆍ동대문ㆍ서대문과 함께 서울성곽 4대문의 하나로 속칭북문(北門)이었습니다. 서울의 정북에 위치한 이 문은 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이었는데 무슨까닭인지 숙정문(肅靖門)으로 개칭되어 중종(中宗) 이후의 실록에는 모두 숙정문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4소문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과 함께 양주(楊州)와 고양(高陽)으로 왕래하는 통로로 이용되기도 한 이 문은 서울성곽의 다른 문과 같이 태조 5년(1396)에 창건되었습니다.
이문은 연산군 10년(1504)에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동쪽인 지금 자리로 이건하였는데 이때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로 된 석문(石門)만 세우고 문루(門樓)는 세우지 않은 듯합니다. 1975년 서울특별시에서 무너진 문루를 복원하려고 할 때 석문만 있었느냐 아니면 문루도 있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여러차례 토론을 거쳐, 태조 때 문루가 건축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이를 복원한 뒤 숙정문이라는 현판을 걸었습니다. 조선 초의 기록을 보면 풍수설과 음양설에 따라 숙정문을 닫아 두었거나 열어 놓기도 하였습니다. 그 예로 태종 13년(1413) 6월에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이 풍수지리학상 경복궁의 양팔이 되는 창의문과 숙정문을 통행하는 것은 지맥(地脈)을 손상시킨다는 상서(上書)가 있자, 마침내 이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의 통행을 금지하였습니다.
그 후 태종 16년(1416)에는 기우절목(祈雨節目)을 만들어 가뭄이 심하면 숙정문을 열고 남대문을 닫았으며, 비가 많이 내리면 숙정문을 닫고 남대문을 열게 하였습니다. 즉 가뭄이 심하면 먼저 종묘ㆍ사직과 명산(名山)ㆍ대천(大川)에 기우제를 지내고, 그래도 비가 오지 않으면 남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어 놓습니다. 그리고 시장(市場)을 옮기고 보신각의 종을 치는 대신 쟁(錚)을 치게 하였습니다. 이는 북은 음(陰)이요, 남은 양(陽)인 까닭에 가물면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부양하는 음양오행설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종 때의 기록에도 몹시 가물면 종로의 시장을 구리개(현 을지로 입구)로 옮기고, 남대문을 닫은 다음 북문, 즉 숙정문을 열게 한 뒤에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였습니다.
한편 조선시대 이규경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의하면, 숙정문을 열어 놓으면 서울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 지므로 항상 문을 닫아 두게 되었다고 소개 하였습니다. 이것도 숙정문이 음방(陰方)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이 있었던 것입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보면 상원(上元 : 음력 정월 대보름) 전에 민가의 부녀자들이 세 번 숙정문에 가서 놀면 그 해의 재액을 면할 수 있다는 말이 전해온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숙정문 부근의 자연풍경이 아름다워 도성의 사녀(士女)들이 자주 이곳을 찾아와 놀던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오래도록 비가 오면 숭례, 흥인, 돈의, 숙정문에 나가서 비 개이기를 비는 제사인 영제를 지냈습니다.
혜화문 [사적 제10호] 동소문으로 불리우는 성울성곽 4소문 중의 하나, 속칭 동소문으로 불리는 이문은 서울성곽 4소문 중의 하나이다. 혜화동 로타리에서 동소문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턱에 자리한 이 문은 동대문과 숙정문 사이에 위치하였다. 이 문은 4소문 중의 하나이지만 4대문과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북쪽의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으므로 함경도 등 북방으로 통하는 경원가도(京元街道)의 관문 역할을 하였습니다. 조선 왕조가 한양에 천도한 후 태조 5년(1396)에 서울성곽을 축조하고 성문을 낼 때에 혜화문은 홍화문(弘化門)이란 명칭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도성 동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동소문으로 불렀는데 조선 초 성종 14년(1483)에 창경궁을 새로 건립하면서 동문(東門)을 홍화문이라고 명명하자 동소문과 혼동되므로 중종 6년(1511)에 동소문을 혜화문이라고 이름을 고쳤습니다.
한편 조선 초에는 북방의 여진족 사신의 숙소가 동대문 옆(지금의 이화여대 부속병원 자리)에 북평관(北平館)이 있었습니다. 이들 사신이 서울에 출입할 때는 반드시 이 문을 이용하도록 하였으므로 규모가 큰 문루가 있어 위용을 과시하였습니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여진족이 세운 청(淸)나라 사신이 명나라 사신이 출입하던 서대문으로 바뀌면서부터 혜화문의 관리는 소홀해져 문루(門樓)가 무너지고 홍예(虹霓)로 된 석문(石門)만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영조는 왕 20년(1744)에 어영청(御營廳)에 명하여 무너진 문루를 복원하게 하고, 당시의 명필인 조강이(趙江履)로 하여금 『혜화문』이라고 쓴 현판을 새로 달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문의 문루의 천정에는 봉황(鳳凰)을 채색으로 그린 것이 특색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문 밖, 그러니까 지금의 동소문동, 삼선동, 동선동 일대에 참새 등이 많아 농사에 피해가 컸으므로 새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새의 왕인 봉황을 그렸다는 것입니다. 이 문은 순조 16년(1816)과 고종 6년(1869)에 보수하였는데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후에는 일체 보수하지 않았으므로 퇴색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일제는 도시계획이라는 핑계와 건축물이 퇴색하였다는 구실을 붙여 1928년에 문루를 헐어 내었고, 1939년에는 을지로 4가~돈암동간의 전차(電車)를 부설하면서 돌로 된 아치 성문마저 헐어 버려 조 선왕조 5백년간 의연히 서 있던 혜화문은 자취를 잃고 혜화동, 동소문동이라는 동명(洞名)만 전해 왔습니다. 혜화문이 훼손된 지 55년만인 1994년, 서울시에서 혜화문을 옛 모습대로 복원하여 지금의 자리에 세워 놓았습니다.
삼청각 http://www.samcheonggak.or.kr 삼청각이란 이름은 원래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집을 의미하는 太淸, 玉淸, 上淸에서 따왔다고 하지만, 산맑고 물맑고 인심 많은 山淸, 水淸, 人淸의 의미가 더 어울리는 곳입니다. 1972년에 준공된 이곳은 7.4 남북공동성명 직후에 남북적십자대표단의 만찬을 베풀었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합니다. 맑을 청이 세 개인 삼청각(三淸閣)은 이름 그대로 도심에서 가장 맑은 기운을 지닌 곳입니다. 북악산의 정기가 모인 아름다운 숲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채 지난 반세기 동안 일반인의 출입이 드물어 주변 산림이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채로 보존되어 온 덕분입니다.
가까이에는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 북촌 한옥마을, 인사동 등 가볼만한 전통문화 명소들이 산재해 있어서 한국의 전통문화의 중신지로서도 최상의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이곳이 한국의 풍요로운 전통문화와 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전통문화 체험 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한국의 명인 명무들의 공연과 국제회의나 세미나를 할 수 있는 중심건물을 비롯하여 다례, 규방공예, 가야금, 판소리 등 한국의 전통문화를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공간들, 전통찻집, 한식당, 마당극이나 여러 가지 행사를 벌일 수 있는 야외놀이마당 등 복합전통문화공간의 면모를 골고루 갖춰, 한국의 대표적 전통문화 공간으로서, 국제적 명소로서 손색없는 곳입니다.
39개의 법정동과 20개의 행정동
삼선동1가(三仙洞一街)·삼선동2가·삼선동3가·삼선동4가·삼선동5가·성북(城北)·성북동1가(城北洞一街)·돈암(敦巖)·동소문동1가(東小門洞一街)·동소문동2가·동소문동3가·동소문동4가·동소문동5가·동소문동6가·동소문동7가·동선동1가(東仙洞一街)·동선동2가·동선동3가·동선동4가·동선동5가·안암동1가(安巖洞一街)·안암동2가·안암동3가·안암동4가·안암동5가·보문동1가(普門洞一街)·보문동2가·보문동3가·보문동4가·보문동5가·보문동6가·보문동7가·정릉(貞陵)·길음(吉音)·종암(鍾巖)·하월곡(下月谷)·상월곡(上月谷)·장위(長位)·석관(石串)
성북동城北洞 혜화문과 숙정문 사이의 서울 성곽이 부채꼴 모양으로 감싼 성북동은 조선시대 도성 수비를 담당했던 어영청의 북둔(北屯)이 영조 41년(1765)에 설치된 연유로 동명이 붙여졌다. 동성 4소문의 하나인 혜화문을 나서서 왼쪽 일대의 계곡마을인 성북동은 예부터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수석(水石)이 어울린 산자수명(山紫水明)한 마을로 복숭아, 앵두나무가 많아서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온 곳이다.
삼선동三仙洞 성북천 남서쪽의 서울 성곽을 끼고 있는 삼선동은 조선시대에 혜화문 밖의 동소문동, 동선동 일대의 평평한 들판을 삼선평이라고 칭했기 때문에 연유된 이름인데, 삼선평은 이 동 남쪽의 옥녀봉에서 옥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세 신선과 놀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동선동東仙洞 미아로변 양쪽에 위치한 동선동은 1949년 돈암동에서 분리될 때, 동소문동과 삼선동에서 각각 글자를 따서 동명이 제정되었다. 조선초부터 한성부에 속했으며 1894년 갑오개혁 때에는 한성부 동서 숭신방(城外) 동문외계 돈암리였다. 그후 1936년 4월 1일 경성부 확장 때 경성부에 편입되어 돈암정이 되었고, 1943년 구제 실시로 동대문구 돈암정이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돈암정은 돈암동으로 개칭되고, 1949년 8월15일 성북구의 신설로 성북구 돈암동으로 될 때, 돈암동의 지역이 넓은 관계로 동소문동, 삼선동, 동선동, 돈암동으로 분리되면서 동선동이 되었다.
돈암동敦岩洞 동소문 밖에서 미아리고개까지 그 일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현재의 미아리 고개를 전에는 『되너미고개』라고 칭하였는데 그 고개이름을 한자로 옮겨 돈암현이란 고개이름에서 돈암동이란 동명이 되었다.
안암동安岩洞 안암동은 문헌상 서울의 오래된 동명칭중의 하나로 조선 태조 4년(1395년)부터 산수가 아름답고 빼어나 풍수지리학적으로도 많은 관심을 가졌던 지역으로 원래 "안암"이라는 명칭은 지금의 안암동3가 대광아파트 단지내 약 20여명이 앉아서 편히 쉴만한 큰 바위가 있어 이를 "앉일바위"라 부르고 그것을 한자로 안암(安岩)이라 옮겨 쓴 것이 그 유래가 되었다.
보문동普門洞 보문동3가 168번지에 소재한 普門寺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보문동은 1949년 8월 대통령령 제159호로 동대문구에서 성북구를 분리할 때 신설동의 일부지역을 편입하여 설치된 것으로 당시 관내에 있는 보문사의 이름을 따서 그 명칭을 제정한 것이다.
정릉동貞陵洞 북한산성 남장대 남쪽 일대에 위치한 정릉동(貞陵洞)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의 계비(繼妃)인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의 능인 정릉(貞陵)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정릉은 사적(史蹟) 제208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정릉동의 처음 지명은 사을한리(沙乙閑里)로 "살한리"를 한자음으로 옮긴 것으로 사아리(沙阿里)로 줄여서 부르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도성(都城) 안인 지금의 중구(中區) 정동(貞洞)에 있었으며 태종(太宗) 9년 (1409)에 이곳 성북구 정릉동(城北區 貞陵洞)으로 이장(移葬)하였다.
길음동吉音洞 삼양로 좌우편에 위치한 길음동의 동명은 정릉천의 골짜기가 길게 놓여져 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길이물골 또는 기레미골이라 하던 것을 한자음으로 고쳐 쓴 것이다. 또한 이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맑고 고와서 기분이 맑아지므로 좋은 노래소리가 들리는 동네라는 뜻에서 길음동이라 하였으며, 특히 길음3동 지역은 송천동이란 옛 이름이 있는데 예전에는 911번지 일대가 커다란 소나무가 있고 그 아래 약수터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기도 하다.
종암동鍾岩洞 종암동의 동명은 고려대학교 뒷산에 북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이를 한자로 "鍾岩(또는 鼓岩)이라고 부른 데서 연유한다. 종암동은 종암로를 중심으로 하여 왼쪽(西)은 종암1동이, 오른쪽(東)은 종암2동이 되었다가 2007년 10월 12일 동 명칭 등에 관한 조례가 개정되어 2007년 12월 30일 종암동으로 통합되었다.
월곡동月谷洞 월곡동 동명의 유래는 두가지로 전해온다. 하나는 하월곡3·4동의 산지형이 반달처럼 생겼기 때문에 월곡이란 이름을 붙였다 하고, 다른 하나는 조선 후기 미아삼거리에 신근솔이라는 솔밭이 많아 풍치가 수려했기 때문에 당시 이곳에 주막이 밀집하여 있었다. 지방에서 소를 몰고 서울로 들어올 때에는 신근솔에서 숙박을 하고 소를 매어 놓았다가 장위동 노병 도살장에서 소를 매도한 다음 돌아갔는데 소장사들이 달밤에 도착하여 잔월(殘月) 아침에 흥정했기 때문에 월곡이라는 동명이 생겼다고 한다.
장위동長位洞 우이천(牛耳川)의 서쪽과 서울 드림랜드 남쪽 일대의 위치한 장위동(長位洞)은 조선시대 초에도 장위리라 불리어 온 것으로 보아 고려조(高麗朝)때 명신(名臣)이 이 마을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하고, 또 하나는 마을 뒤에 장위산(獐位山)이 있으므로 이 산의 이름을 따서 장위동이 되었다는 추측을 하고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장위동 사람들 사이에는 『양주밥 먹고 고양굿 한다』는 말이 널리 유행되었는데 이 말은 농토는 양주에 두었고 고양에서 거주 하므로 식생활은 양주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는데서 생겼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이 곳 주민들은 대부분 농민이었으며 벼농사와 조, 수수, 고추 등만 재배되어 특산물은 없었다고 한다.
석관동石串洞 석관동은 마을 동쪽에 있는 천장산(天藏山)의 한 맥에 검정 돌을 꽂아 놓은 즉, 수수떡이나 경단을 꼬치에 꿰어 놓은 것 같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돌곶이 마을이라 부르다가 조선왕조 20대 경종의 능인 의능(懿陵)이 이곳에 안치된 뒤부터 돌곶이 능말(마을)로 불렀다고 하는데 돌곶이란 이름을 한문으로 표기하여 석관(石串)이라는 동명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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