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세상 쳐다보기

이수나루 · 동재기나루 · 잠원나루, 서초구 瑞草區

草霧 2013. 12. 2. 19:33

 

 

 

이수나루 · 동재기나루 · 잠원나루

  

서초구 瑞草區

 

 

 

Seocho-gu (Ruicao)

 

 

서울특별시의 동남부에 있는 구.

원래는 경기도 과천군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시흥군 신동면으로 개편되었고, 1963년에 서울시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영등포구 관할하에 있다가 1975년 신설된 강남구에 속했으며, 1988년 강남구로부터 분리·신설되었다. 면적은 약 47로 서울특별시에서 가장 넓다. 1988년에 강남구에서 분리되었다. 구명은 분구될 때, 이 지역의 중심지인 서초동(瑞草洞)에서 유래했다. 구청 소재지는 서초동이다.

 

 

조선시대 경기도 과천군

 

1914년 시흥군 신동면

1963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편입

1973년 성동구

1975년 성동구에서 강남구가 분리 신설

1988년 강남구에서 서초구가 분구 신설

 

 

 

 

 

 

 

 

 

옛날 서리풀이 무성했다하여 한자어 상초리(霜草里) 혹은 서초리(瑞草里)에서

서초의 지명은 옛날 이곳이 서리풀이 무성했다하여 이를 표현한 한자어 상초리(霜草里) 혹은 서초리(瑞草里)에서 유래했다. 또는 물이 서리어 흐르는 벌판이란 뜻으로 서릿벌이라 불렸는데 이것이 변해 서리풀이 되었다고도 한다.

    

서초구는 서울특별시 한강 이남의 중앙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강남구, 서쪽으로는 동작구와 관악구, 남쪽으로는 경기도 과천시와 성남시가 인접하고 북쪽으로는 한강 건너 용산구와 마주하고 있다. 강남대로를 경계로 강남구, 동작대로 및 현충로, 남부순환로를 경계로 동작구, 관악구, 반포대교 및 한남대교 등을 경계로 용산구, 남태령을 경계로 경기도 과천시와 경부고속도로 및 청계산을 경계로 경기도 성남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북쪽은 한강을 끼고 있으며, 서쪽은 반포천(盤浦川)을 경계로 동작구, 동쪽은 강남대로를 경계로 강남구, 남쪽은 과천시·성남시와 접해 있다. 한강 변을 따라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이루어져 있으며, 저구릉지에는 바둑판식으로 규칙적인 간선도로망을 갖춘 신개발도시로 터전을 잡았다.

 

구의 남쪽으로는 청계산(淸溪山)을 주봉으로 인릉산(仁陵山대모산(大母山구룡산(九龍山우면산(牛眠山) 등이 자연경계를 이루고 있다. 북쪽의 한강 연안에는 충적층이 발달되어 있다. 서쪽으로는 반포천(盤浦川)이 동작구와 경계를 이루며 북류하고, 양재천(良才川)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탄천(炭川)에 합류하여 한강에 유입한다. 서울시에 편입되기 전까지 양잠업이 성했고, 근교농업의 중심지로 채소 및 화훼 재배가 활발했다. 서초동과 원지동 일대의 꽃시장은 오늘날에도 유명한 화훼재배 중심지로 남아 있으며, 양재동에는 꽃과 관상수를 전문 판매하는 현대식 화훼유통단지가 문을 열었다. 양재동·내곡동·신원동·우면동 일대는 개발제한구역으로 젖소·사슴·돼지 등의 사육과 근교농업이 이루어지는 농촌경관이 나타난다.

 

한강 연안으로 충적층이 발달한 잠원동 일대는 사질토(砂質土)에서 잘 자라는 뽕나무를 많이 가꾸었는데, 조선시대부터 양잠을 장려해 국립양잠소격인 신잠실(新蠶室)이 설치되었다. 한때 화훼재배단지로 유명하였다. 특히 강남종합고속터미널 주변과 지하상가, 화물터미널 주변, 강남대로 변은 대규모 백화점을 비롯한 상업유통 중심지로 번창하고 있다. 그리고 강남구와 더불어 학군이 좋은 지역과 주민소득이 높은 지역으로 알려졌다. 국립중앙도서관·서울메트로·서울시공무원교육원·법조단지·학술원·예술원·예술의전당·국립국악원 등 주요 기관이 있다. 구의 남북으로 경부고속도로가 통하고, 강남종합고속버스터미널·남부시외버스터미널·화물터미널 등이 위치함에 따라 우리나라 최대의 교통 요지이자 물류처리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이 구는 1965년 서울특별시의 부도심으로 계획되어 1968년에 토지구획사업이 시행됨에 따라 개발이 시작되었다. 1967~82년에 반포동·잠원동·서초동·양재동·염곡동·우면동의 일부를 포함한 영동제1토지구획정리사업이, 1971~82년에 서초동을 포함한 영동제2토지구획사업이, 1972~82년에 방배동·서초동의 일부가 포함된 영동제2추가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행되었다. 이에 따라 1973년에 반포주택단지가 조성되어 반포동을 중심으로 방배동·서초동·잠원동 등지에 많은 현대식 아파트가 건립되었다. 또한 서초동 일대에 법원·검찰청이 들어서 한국의 중심 법조단지를 이룰 뿐만 아니라 건너편에 서초경찰서·조달청·학술원·예술원·국립중앙도서관 등도 자리잡고 있다. 또한 양재동 4거리를 중심으로 남부순환도로를 따라 서초구청·외교안보연구원·우면산배수지·서울특별시공무원교육원·한국산업개발연구원 및 예술의 전당 등이 들어서 공공업무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사평나루

1960년대까지 사평나루를 이용한 도강(渡江)만이 강북을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고, 말죽거리를 지나 과천을 통과하던 옛 경부가도(京釜街道지금의 선암로)가 간선도로의 역할을 했으나 영동의 개발이 진행되면서 반포대교·동작대교 등이 가설되어 도심과 직접 연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경부고속도로가 통과하고, 반포동에 서울고속버스터미널, 서초동에 서울남부터미널, 양재동에 한국트럭터미널이 위치해 있어 한국 최대의 교통량을 처리하고 있다. 지하철 2·3·4호선과 남부순환도로·강남대로·우면로·반포로·방배로·동작대로 등의 주요간선도로가 연계되어 있다.

 

반포대교·한남대교·동작대교 등으로 강북과 연결되어 도심과의 교통이 원활하며 올림픽대로·신반포로·사평로·서초로·사임당길·효령로와 도곡동길·남부순환로 등이 동서로 횡단하며, 강남대로·반포로·방배로동작대로 등이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다. 또한 지하철 2·7호선이 구의 동서방향을 가로지르며, 지하철 3·4호선이 남북방향을 잇고 있어 원활한 교통망을 형성하고 있다.

 

 

 

 

 

방배동 먹자골목

방배동은 먹자골목으로 유명하다. 1976년부터 한자리를 지켜온 레스토랑 "장미의 숲"1980년대 방배동을 "최고의 카페촌"으로 부상케 한 대표적인 곳이다.

 

카페 "밤과 음악사이"1970~80년대 가요와 인테리어를 하고 있으며, 통골뱅이와 김치찌개가 대표적인 안줏거리이다. "멋쟁이 카페"들로 명성을 날렸던 방배동은 청담동에 그 명성을 내준 대신 요즘은 먹자골목으로 유명하다.

 

이 일대는 아귀찜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많다. 또 근래에는 새롭게 치장한 소규모카페들도 하나둘 생겨나며 먹자골목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도당터

원지동 419-7번지에는 마을의 길흉화복을 기원하며 산제를 지냈던 도당터가 있다. 현재는 산제를 지내고 있지 않지만 30년 전만 하더라도 23일간 무당을 불러 제사를 지냈으며, 산제의 비용은 동민의 추렴으로 충당하였다. 현재 이곳은 어린이 놀이터가 설치 되어 있다.

 

미륵당

원지동에서 청계산 등산로로 진입하는 고속도로 굴다리 입구 오른편에는 15.2정도의 미륵당(원지동 362-4,5번지)이 세워져 있다. 이 안에는 목탁과 제기가 갖추어져 있고 크기가 2m정도 되는 백 색 입상인 미륵불이 모셔져 있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3호 인 이 미륵불은 원터마을의 수호신으로 1년에 한번씩 주민들이 동제를 지내고 있다. 원래 이 미륵불은 아주 신비한 영험이 있어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마차를 동원하여 이 미륵불을 일본에 반출하려다 실패한 일이 있었다. 사람들이 미륵불의 영험을 믿고 계속 몰려들자 일본인들은 미륵불의 배꼽을 쪼아내었는데, 그 후 부터 미륵불은 영험한 능력을 상실했다고 전한다.

 

효자문

우면동 27-11번지에는 경주 이씨 석탄(石灘)선생의 11대손인 당령공에게 그 생전에 영조가 친히 내린 효자문(홍살문)이 있다. 당령공은 6세때 일가집 잔치에 가서 어머니께 갖다 드리려고 과일을 옷 속에 간수하는 것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그의 효심에 감탄하였고, 27세때 에는 부친이 발에 쑥뜸을 뜨게 되자 부친의 아픔을 모른체 할 수 없 어 자기 발등에도 똑같이 뜸을 뜨게 하였다. 37세 때에는 모친이 열병에 걸려 위독하게 되자 모친의 변을 맛보아 병세를 판단하는 등 세인은 흉내도 내지 못할 효행으로 일생을 살았다고 한다.

 

문화유씨4정문

신동아아파트 자리에 홍문앞자리라고 불리는 들이 있었는데, 여기에 조선중기의 명신 충숙공 유관(柳灌: 1484-1545)4정문이 있다. 이는 충열녀충비의 정문으로 충신은 본인, 효자는 유관의 아들 유광찬, 열녀는 유광찬의 부인 신씨, 충비는 유관의 여종 갑이 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문이었다. 유관은 중종때 이조판서평 안도관찰사를 거쳐 인조 때 우의정좌의정이 되었다가 명종이 즉위 하면서 윤원형이기 등 소윤(小尹)의 모함으로 일어난 을사사화에서 윤임유인숙 등과 함께 삼흉(三兇)으로 몰려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죄목으로 처벌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절도유배형에 처해져 서천으로 귀양갔지만 온양에 이르러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에 아들 광찬이 아버지의 유해를 모시고 오다 천안서 죽자 그 부인 신씨는 이들 두 시체를 천신만고 끝에 천안에서 한양으로 모시고 와 장사지 냈다. 또한 여종 갑이는 주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유관을 무고했던 우의정 정순붕 집안의 노비로 들어가 전염병을 퍼뜨려 원수의 가족 들을 몰살시켰다. 즉 갑이는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의 뼈를 구해다가 정순붕의 베개 속에 넣어 병을 전염시켰다는 것이다. 이를 기리기 위해 영조 때 세워진 4정문은 1973년 경기도 안산시 와리로 이전되 었다.

 

반포동 은행나무

무궁전연립주택 앞에 있는 이 은행나무는 높이 19m로서 수령이 300년 정도 되었다. 과거 사평로 동쪽 서래마을 주민들의 추천으로 마을의 평온과 안정을 빌 동제를 올리던 곳으로 지금은 지역주민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고 있다. 1972년에 서초구 보호수로 지정, 관리되고 있 는 이 나무는 지역주민 정서함양뿐만 아니라 주민단합의 교훈을 전 하는 곳이기도 하다.(반포동 535-21)

 

언구비

언구비(彦九碑)는 지금의 영동시장 네거리에 반포동과 논현동에 걸 치 비석 9개가 있어 유래 된 이름이다. 조선조 순조 11년 세도정치 로 크게 나라가 혼란해지자 도둑이 창궐하여 민가 의 피해가 극심하 였다. 이때 의협심이 강한 무명의 아홉 선비가 주동이 되어 의병을 일으켜 도둑을 물리치고 민가를 보호했다. 주민들은 이 공을 후세에 남기가 위해 이 비를 세웠는데, 이처럼 그 넋을 전해온 덕분에 오늘 날 반포동이 풍요롭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비석은 일제 말기 에 소실됐다.

 

동작진

반포동 서쪽 끝 동작대교가 놓여있는 곳 부근은 동재기나루터, 즉 동작진(銅雀津)이 있었다.이 동재기나루터는 조선시대 서울에서 과 천수원평택을 거쳐 호남으로 내려가거나 서울 로 들어오던 사람 들이 배를 타고 건넜던 교통의 요지였다. 이수천(梨水川) 입구에 해 당하는 동작진은 예전에는 수심이 깊어 나루위에 모노 리탄(毛老里 灘)과 기도(碁島)가 있었다. 이곳은 인근 노량진 관할하에 있었는데, 호남호서 지방의 과객(科客)과 사대부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었으나 사선(私船) 몇 척만이 운용되어 교통이 불편하였다.

 

즉 한강의 각 나루도 규모와 위치에 따라 구분되었는데, 한강진노량진양화진은 가장 중요한 나루로서 관에서 관리하는 관진(官津)인 반면, 뚝섬이나 광나루동작진 등은 민간에서 나룻배를 운영하는 사진(私 津)이었다. 이들 나루 중 가장 험한 곳은 동작진이었으며, <조선 왕 조실록> 에는 동작진에서 나루를 건너다가 배가 침몰하여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기록이 많다.

 

영조 4(1728) 소현세자의 적파 손(嫡波孫)인 밀풍군 탄()을 왕으로 추대하며 발생한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나루의 관리를 철저히 하고자 별장(別將)이 파견되었으 며, 영조 22년 노량진의 나룻배 3척을 배급받게 됨으로써 나루터로 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857년 철종은 이곳에 주교(舟橋)를 만들어 인릉을 찾기도 하였으며, 금세기까지 명맥을 유지하였다. 한편 도성에서 과천에 이르는 길목으로서의 동작진은 "춘향전"에서 이 도령이 춘향을 찾아 갈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 역졸을 거느리고 가만히 숭례문을 내달아 칠 패 팔패 돌모루 백사장을 지나고 동작강 얼른 건너 남태령 뛰어 넘어 과천에 이르르니..." (반포동 2-1번지)

 

대성사

서초동 산 140번지 일대에 백제불교초전법륜성지(百濟佛敎初傳法輪 聖地) 전통 사찰 우면상 대성사는 예술의 전당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백제 제15대 침류대왕 원년인 384년도에 서역 인도승인 마라난타 대사가 동토 중국 동진(東晋)을 거쳐 해동백제의 서울인 남한강변 한주(漢州)에 오니 침류대왕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맞이하여 궁중에 지내게 하면서 설법을 들었다. 그런데 마라난타(摩羅難陀) 대사는 서역 인도와 동토 중국 동진을 거쳐 해동 백제로 오는 동안 음식과 기후가 맞지 않아 수토병(水土病)으로 고생하였는데, 우면상 생수를 들고 수토병이 나았다.

 

그리하여 궁중에서 자리를 옮겨 우면 산에 대성초당(大聖草堂)을 창건함으로써 이곳 우면산 대성사는 백제불교초전법륜성지가 되었고, 마라난타대사는 백제불교초전법륜 성사가 되었다. 또 통일신라시대에 원효대사, 의상대사, 현욱선사, 심희 선사 등과 고려시대의 보조국사 지눌, 태고왕사 보우 등과 조선시대 무학대사, 보우대사 허응, 환성 지안 대사 등이 이 절에 머물렀다.

 

한편, 근세 조선독립 기미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중 불교계 대표였던 백용성 큰스님이 한일합방 경술치욕을 당했을 때 하동 지 리산 칠불선원 조실로 있다가 1911년도부터 191931 독립운동 당시까지 만해 한용운 대사를 앞세워 천도교 손병희 교주, 기독교 장로회 길선주 목사, 기독교 감리회 이필주 목사 등과 교류하여 천도교, 기독교, 불교도가 합심하여 민족중흥과 종교중흥을 발원한 성지 이다. 이 우면산 대성사는 한국전쟁 당시 소실된 것을 1954년도에 중건한 자그마한 암자인데, 1997년부터 총 임야 면적 52,800위에 대웅보전과 요사채 등의 복원 불사가 시작되고 있다.

 

나홍좌묘

서초고등학교 남쪽 삼성주택 단지의 아래쪽에 나홍좌의 묘가 있었으 며, 이를 나 대상의 묘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주택이 들어서면서 묘 가 이장되고 동신아파트 서쪽에 서 있던 묘비는 매몰되었다. 나홍좌 의 본관은 안정(安定), 자는 제백(濟伯)으로 원래 문인이었으니 평소 그는 식견과 도량이 넓고, 인품이 온화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한편 나홍좌는 현재의 중고 남산동 남산초등학교 근처 에서 살았는데, 그래서 이 부근을 나대장촌이라 불렀으며, 옛지명으로 나동이라는 지명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정역신도비

서초동 법원단지와 그 남쪽 일대는 조선 태종때 대제학을 지낸 정역 이 처음 자리잡고, 이후 해주 정씨가 모여사는 집성촌이 되어 정곡 (鄭谷)마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정역은 효령대군의 장인이었으며, 고려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지낸 인물이다. 조선개국시에는 병을 이유로 낙향하였다가 한성부윤, 형조판서, 호조판서, 대제학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성품이 근검하고 덕망이 높아 왕실과 인척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교만하지 않아 태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의 묘는 이곳에 있다가 경기도 여주로 이장되었고, 현재는 정역의 신도비만 서초동 1701번지 서초로변 법원단지 입구에 세워져 있다

 

명덕신지

서초동에는 예부터 많은 자연부락이 있었는데 서초동은 명달리와 서 초리가 합치면서 이루어 졌다. 명달리는 후에 명덕리(明德里)로 칭하기도 했으며 상명달리, 하명달리, 산밑, 궁너머라는 4개의 자연부락이 있었다. 서초역과 서울고등학교 사이의 야트막한 야산 아래 지은지 2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기와집이 있었다(서초동 1497-19). 이 곳은 옛날에 하명달리로 불리었던 마을이었고, 이 집은 조선시대 이름을 알 수 없는 목사(牧使)를 지낸 분의 사당이다. 특기할 만한 일 은 이 집에 조선 후기 김조순이 쓴 "명덕신지(明德新址)"라는 목간 판이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이 명덕리임을 증명하고 있다.

 

김조순은 정조9(1785)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순조의 장인으로 순조를 30년간 보좌 하였다. 그러나 후에 소실인 나합(羅閤)에 빠져 국사를 제쳐두는 폐단이 있었으며, 그의 집권으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현재 김조순이 쓴 이 목간판과 가옥은 보존되고 있지 않다.

 

정도전의 묘

지하철 양재역에서 서남쪽으로 약 300m떨어진 우면산 끝자락 서초 동 산23-1번지에는 여러기의 묘가 있는데, 이중 하나가 조선 개국 공신 삼봉 정도전의 묘소로 추정되고 있다. 풍수지리학상으로 학이 날개를 펴고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는 명당으로 묘소는 학의 머리 부분에 있다. 이곳이 정도전의 묘소로 추정되는 이유는 각종 문헌자료와 구전으로 전해져내려온 이야기 때문이다. [동국여지지] 과천현편에는 "정도전묘재현동십팔리(鄭道傳墓 在縣東十八里)", "양재역 재 동십오리(良才驛 在東十五里)"라는 구절이 있고, <봉화정씨족보> 에도 "정도전묘광주사리현(鄭道傳墓廣州四理縣)"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 마을 사람들로부터 대대로 전해 오는 구전에의하면 정도전의 묘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1989년 한양대학교 박물관의 발굴 조사가 있었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제1호분은 우선 신분이나 계급이 높은 지배계층의 분묘형태를 띠고 있으며, 두꺼운 회벽과 그곳에 서 나온 유물이 조선초기의 백자라는 것이었다.또한 목관에 안치되어 있는 피장자의 유해는 머리 부분만 남아 있고 다른 부위는 발견 되지 않았다. 이것은 [태조실록]14권에 "정삼봉이 참형되었다"는 기록과 일치하고 있어 피장자가 정도전일 가능성이 충분하였다. 유학의 대가인 정도전(1337~1398)1392년 조준, 남은 등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고,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일을 추진하는 등 조선의 1등 개국공신으로 군사, 외교, 성리학, 행정, 저술 등 다방면에 걸쳐 새로운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척불숭유를 국시로 삼게 하여 유학의 발전을 기하였다. 태조9(1938) 이방원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참수되었다.

 

분토골

분토골은 서울교대 남쪽에 있었던 마을로 마을 인근에서 고운 흙이 나온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이곳은 일명 부곡(富谷)동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전에 이 마을이 부유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우면두레

우면동에는 예부터 우면두레라는 민속놀이가 있어서 공동작업을 하고 단결과 화합을 이루었다. 우면부락은 약 270여년 전부터 우면산 동남쪽 아래에 윗우마니, 아랫 우마니 등 12개 마을로 형성된 촌락으로서 현재는 성촌, 형촌, 송동, 식유촌 등 4개 마을이 있다. 우면두레는 이 마을에서 농사를 지을 때 주민이 일하고 함께 즐기던 민속이다.

 

우면두레는 꽹과리장구호적 등 농악대 10명과 영감소리꾼일꾼지게꾼새참꾼으로 구성된 농부 60명 등 총 70여명이 출연하는 12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면두레 12마당은 입장달팽이놀이마을싸움씨름모찌기한마당모심기새참놀이김매기논밟기새쫓기마무리 한마당으로 구성된다.

 

그 내용은 먼저 농자천하지대본이라 쓴 농기를 선두로 농부들이 2개 마을로 나뉘어 마을기를 들고 농악에 맞춰 춤을 추며 입장한 후 둥그런 원을 그리며 달팽이 놀이를 하며 위, 아래우마니 두 부락간의 단결을 상징한다. 이어서 윗우마니와 아랫우마니의 동네싸움이 벌어지며 싸움이 끝나지 않자 마을대표로 힘센 장정을 내세워 씨름으로 결판을 내고, 함께 모찌기를 한다.

 

다음 선소리꾼의풍등가농요에 따라 농부들이 후렴을 부르면서 모심기를 하고 새참을 먹은 후 다시 선소리꾼의 농요에 따라 김매기를 한다. 이어 뒷짐을 지고 논밟기를 하며 논 주위를 맴돌며 새 쫓는 동작을 힘차게 펼친 후 마무리 한마당으로 농악대와 농부들이 흥겨운 농악과 춤으로써 신명나게 놀고 풍년을 기원하며 끝을 맺는다.

 

 

 

서울 속 작은 프랑스 "서래마을"

반포4동 방배중학교 앞 일대 "서래마을"은 일명 "서울 속 작은 프랑스"라고도 한다.

 

1985년 한남동에 있던 프랑스학교가 이곳으로 이사하면서 자녀 교육을 위해 프랑스인이 모여들어 자연스레 작은 프랑스가 형성됐다.

 

 마을에 들어서면 프랑스 국기인 삼색기를 상징하는 빨강, 파랑, 하양으로 곱게 채색된 삼색 보도블록을 볼 수 있다. 서래마을은 한국인에겐 와인바를 비롯해 이국(異國) 풍취를 느낄 수 있는 이색 명소 정도의 느낌이었다.

 

최근에는 한국-프랑스 수교 120주년을 기념한 몽마르뜨 공원이 들어섰고, 갤러리도 문을 열었다.

 

 

 

 

 

 

 

 

 

산림청 산사태 예보 묵살 논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이영희 무형문화재93

성창순 무형문화재5

이기춘 무형문화재86- 가호

양재시민의숲

윤봉길의사 기념관

박물관, 국악 박물관 외교 박물관 전기 박물관 관문사 성보박물관 분재 박물관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도서관

대한민국예술원

국립국악원

예술의전당

외교사료관

대한민국지역홍보센터

전시장/미술관, 예술의전당 서예관/디자인관/미술관 치우금속 공예관 한원미술관

문화원/공연장

횡성서초수련원

태안서초휴양소

 

 

 

양재천

양재천은 원래 한강으로 직접 유입되는 한강의 1차 지류였으나 한강연안개발사업과 주변일대의 개발로 직강화되면서 탄천으로 유입되는 유역변경 및 유로변경이 인위적으로 이루어진 하천이다. 특히 양재천의 관리구역이 과천시, 서초구, 강남구 등 3개 지자체로 분할되어 있어 상류에서 하류까지 동일한 관리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2000년도에 지자체간 환경 행정의 협조체제를 구축하고, 인접 지자체간 하천 환경문제로 인한 갈등을 사전에 조정하며, 하천환경 관리사업의 효율적 집행 등을 목적으로 과천시, 성남시, 서초구, 송파구, 강남구,용인시 등 6개 지자체가 탄천, 양재천, 환경행정협의회를 구성하고 양재천 살리기 사업의 행정적 지원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 양재동에는 한양과 삼남 지방을 이어주는 역참(驛站)으로 양재역(良才驛)이 있었는데, 한국지명총람에는 쓸 만한 인재들이 모여 살아 양재동(良才洞)이라 했다.”고 한다. 양재천은 양재동을 관류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옛 이름을 살펴보면 동국여지승람에는 공수천(公需川), 대동여지도에서 상류는 공수천(公須川), 하류는 학탄(鶴灘, 학여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양재천은 구룡산과 관련한 설화를 가지고 있다. 구룡산에는 원래 용 10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이들이 하늘로 승천하다가 그 중 한 마리가 임신한 여자를 보고 놀라서 양재천에 떨어져 죽고 나머지 9마리만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산 이름이 구룡산이 되었다 한다.

 

 

청계산 淸溪山

이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맑아 청계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라고 짐작될 뿐 확실한 기록은 없다. ‘과천읍지’(1899) 산천조에 청룡산이라고 쓰고 있는데 이는 관악산을 백호산이라고 부른데 대하여 청계산이 좌청룡에 해당된다는 풍수설에 따라 청룡산이라고 부르게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다만 청계산이란 이름은 이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맑아 우선청계라는 이름이 붙고 그러한 내를 지닌 산이어서 나온 이름이 아닌가 짐작될 뿐이다. 이 산의 주봉은 망경대(望京臺)에서 흐르는 물줄기 하나가 서쪽 막계동 골짜기를 이루는데 이것이 한자식 표기가 莫溪淸溪인 점으로 미루어 내 이름에 따라 붙여진 산 이름일 것으로 보인다. 청계산은 淸溪山외에 淸鷄山淸淸山 등으로도 나오지만 이는 기록한 이의 잘못이 아닌가 여겨진다. 청계산 북동쪽 기슭은 신사시대 주민들의 생활근거지로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고인돌이 산재해 있으며, 고려 멸망 후 이색, 길재, 조윤 등 고려 유신들이 은거했던 곳으로, 청계산의 주봉을 망경대라 부르는데, 이는 고려가 망한 뒤 고려 유신 조윤이 청계산 정상에서 송도를 바라보며 세월의 허망함을 달랬다는 데서 유래하고 조선 말기에는 노년의 추사 김정희가 긴 유배생활에서 돌아와 부친의 여막을 지키면서 살았던 곳이다.

 

 

 

 

 

 

망경대 수종폭포 청계사 천개사 미륵당

1코스 원터골 입구원터골 약수터깔딱고개헬기장매봉

2코스 원터골 입구천개사길마재 정자매봉

3코스 청계골 입구청계골 약수터길마재 정자헬기장매봉

4코스 개나리골 입구옥녀봉산토끼 옹달샘헬기장매봉

5코스 양재화물터미널옥녀봉헬기장매봉

 

 

 

구룡산

서초구 염곡동과 강남구 개포동 일대에 위치한 산으로, 산을 자세히 보면 9개의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염곡동을 감싸안은 구룡산(九龍山)은 옛날 임신한 여인이 용 10마리가 하늘로 승천하는 것을 보고 놀라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1마리가 떨어져 죽고 9마리만 하늘로 올라가 구룡산이라 불리게 되었고, 하늘에 오르지 못한 1마리는 좋은 재목, 좋은 재산인 물이 되어 양재천(良才川)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정상보다 낮은 이 산의 주봉(主峰)은 국수봉(國守峰)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 전부터 정상에 봉수대(烽燧臺)가 있어 국가를 지킨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이 곳에는 바위굴이 있어 봉수군(烽燧軍)이 기거했다고 한다. 세종대왕 초장지(初葬地) 헌인릉

 

 

우면산

우면산은 높이 293m로 서초구 우면동·서초동, 양재동 등지의 도심에서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입니다. 산모양이 소가 졸고 있는 모양이라 하여 우면산이라 이름이 붙여졌으며 우면산의 남쪽 기슭은 청동기시대 유적인 지석묘가 있어 이 지역이 오래 전부터 우리 조상들의 삶의 터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등산로는 남부순환도로 예술의 전당 뒷편 대성사로 오르는 길과 남부터미널 입구에 있는 서초약수터로 오르는 길 등 여러 가지 코스가 있습니다. 산행길이 짧고 평탄해 주말이나 새벽에 오르기 좋은 산입니다. 산행 시간은 2시간 정도 걸립니다. 북쪽 기슭에 예술의 전당과 대성사가 있습니다.

 

 

이수나루 · 동재기나루 · 잠원나루

문화유적은 헌·인릉, 청권사부묘소, 성안상공신도비, 대성사목불좌상, 원지동석불입상및석탑과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전적문화재가 있으며, 조선 초기에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잠실동뽕나무는 조선시대에 잠원동에 설치했던 신잠실과 함께 당시 양잠업이 성행했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도곡동에는 산신제당 등이 있어, 토착 주민의 동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내곡동에 헌인릉(獻仁陵사적 제194)

방배동에 청권사부묘소(淸權祠附墓所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

서초동에 성안상공신도비(成安尙公神道碑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0)

대성사목불좌상(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2)

승방평 (僧房坪)

양재동산말

헌릉/인릉 사적(史蹟) 194

원지동 석불입상 및 석탑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3

원지동원터

원지동고인돌유적지

충현정묘

월산대군(14541488) 이정 태실 서울특별시 기념물 30

성정승(成石, 13571414)묘소

형촌회화나무 서울특별시 보호수로 지정(22-28)

식유촌회화나무 서울특별시 보호수로 지정(22-5)

효령대군(13961486) 이보묘역

성안공 상진(14931564)묘역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0

천년향 서울특별시 보호수로 지정(22-3)

정역(?1425) 신도비

대성사목불좌상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2

원지동석불입상 및 석탑 서울시 유형문화재 93

대성사목불좌상 서울시 유형문화재 92

성안공상진묘역 서울시 유형문화재 60

잠실리뽕나무 서울시 기념물 1

헌릉인릉 사적 194

월산대군 이정 태실 서울특별시 기념물 30

언구비

용허리

사도감터

주흥동 周興, "고 김주용선생 기념비(故 金周容先生 記念碑)"

 

 

효령대군 이보묘역 서울시 유형문화재 12

고대 중국에 있어서 은나라가 쇄하고 주나라가 신흥할 때이다. 주나라의 태왕은 아들이 셋인데 장자는 태백, 차자는 우중, 셋째는 계력이다 계력이 아들 창을 낳으니 성덕이 있는지라, 태왕이 상나라를 칠 생각이 있었는데 태백이 따르지 않으니 대왕이 마침내 왕위를 계력에게 전하여 창에게 미치게 하고자 하니 태백이 이를 알고 곧 우중과 함께 도망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태왕이 셋째인 계력을 세우고 나라를 전하여 창에 이르러 3분된 천하의 둘을 얻으니 이가 문왕이다. 문왕에 이어 아들 발이 왕위를 계승하여 상나라를 이기고 천하를 얻으니 이가 무왕이다. 이렇듯 주왕실의 천하를 이룬 그 공이 태백과 우중 형제의 양보함에 근원하고 있음이다. 또 우중은 오나라에 거하면서 머리를 깎고 몸에 문신하여 옷을 벗어 장식하였다. 그리고 숨어 살면서 홀로 착하게 하니 도의 맑음에 합한것이요. 방언하여 스스로 폐하였으니 도의 권도에 합한 것이었다."

 

이처럼 태왕의 차자인 우중이 처신한 것이 청도함에 맞았고, 스스로 폐한 것은 권도함에 맞았다는 이 고사를 효령대군에 비유한 것이다. 일찍이 효령대군은 형인 양녕대군과 함께 아우인 세종에게 손양으로 처신하여 청도함에 맞았고 불교에 귀의함으로써 스스로 폐한 것은 권도함에 맞음이니 이러한 행동을 칭송하는 뜻에서 청권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서울시는 1972청권사부묘소라는 이름으로 청권사와 효령대군 묘역을 지방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하였다.

 

이수나루터

옛날 배나무골과 물골(갯말)의 개천이 합쳐지는 곳으로, 잠원나루 주변의 반포리(현재 반포1, 3), 사평리(현재 잠원동) 주민들이 이수(梨水)를 건너 삼남대로(지금의 동작대로)로 왕래할 때 건너던 간이나루터였다. 1925년 을축년(乙丑年) 대홍수때 갯말 주민들이 현재의 방배동 입구로 이주하여 새 마을을 형성하였는데 이를 "새말"이라고 하였다. 한편 이수나루에는 배물다리(梨水橋)가 있었으나 1970년 이수지구 택지개발 때 철거하고 이수교(30m, 연장 60m)를 건설하였다.

 

동재기나루터

수원, 과천 등에서 남태령(南泰嶺)을 넘어 삼남대로(현재의 동작대로)를 따라 도성(都城)으로 왕래하던 사람들이 한강을 건널 때 이용하던 나루터로 예전에는 이수천(利水川) 입구에 있어서 수심이 깊었다고 한다. 이 나루는 호남, 호서지방의 과객과 사대부들의 왕래가 빈번하였지만 당시에는 사선(私船) 몇척만 있어서 불편했으나 영조때(1728) 이인좌의 난(1728. 3. 15)을 계기로 나루관리를 전담하는 별장(別將)이 파견되었고, 노랑진에서 나룻배 3척을 이관하여 나루터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철종때 주교(舟橋)를 만들어 내곡동에 있는 선왕(순조)인 인릉에 참배하러 갈 때 건너다님으로써 더욱 번성했으나 1917년 한강인도교, 1984년 동작대교(40m, 연장 1,330m) 가설로 나루터의 역할이 쇠퇴하였다.

 

반포서래섬

한강에 제방(堤防)을 쌓기전 이 일대는 서래마을 뒤 청룡산에서 한강 모래사장으로 작은 개울들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고 하여 "서릿개(蟠浦)"라고하였으나 음이 변해서 지금의 반포(盤浦)로 부르게 되었다. 1972년 이수택지개발 계획에 의거 한강에 제방(堤防)을 쌓았으며, 1973년 대한주택공사가 이곳에 대단위 아파트를 건립하면서부터 현재 반포동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다.

 

잠원나루터

잠원(蠶院)이란 잠실리의 ""자와 신원리의 ""자를 따서 붙여진 것으로 지금의 잠원변전소와 신반포 16119동 사이길을 따라 한강에 이르는 곳을 말하며, 여기서 나룻배로 한강 북쪽에 있는 용산구 점말과 서빙고로 갈 수 있으므로 일명 "점말나루" 또는 "서빙고나루"라고도 하였다. 특히 한남대교 북단에 있는 한강진(漢江鎭)은 신라시대부터 한강을 건너는 교통요충지이며, 조선시대에는 제1의 도선장(渡船場)으로 송파, 노량진과 더불어 경강3진의 하나였다. 잠원나루는 국왕들이 헌인릉, 선정릉 행차시 도강(渡江)하였고, 도성(都城) 사람들의 봉은사 왕래시 많이 이용하였으며, 연산군 때에는 청계산 수렵(狩獵)을 즐기기 위해 부교(浮橋)가 가설(架設)되기도 하였다. 한편 1969년에 건설된 한남대교(27m, 연장 915m)가 경부고속도로에 이어진 것은 옛날 한강진에서 이곳을 지나 말죽거리, 원지동을 거쳐 삼남지방(충청, 영남, 호남)으로 이어지는 옛길의 재현(再現)이라고 할 수 있다.

잠실리뽕나무 서울특별시 지방기념물 제1

조선 초기에 심어진 이 뽕나무는 가슴높이 둘레 1.4m1973. 1. 26 서울특별시 지방기념물 제1호로 지정(1973. 1. 26)되었다. 당초 원줄기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서 자랐으나 지금은 가지 중간부분이 잘린 고사목(枯死木)으로, 이 나무가 잠실리 뽕나무로 불리게 된 것은 조선시대 이 일대가 뽕나무 밭으로 여기에 신잠실이 설치되었기 때문인데 잠실은 견사(絹絲)를 만들기 위해 잠종(蠶種)을 받아서 뽕잎을 먹이고 누에를 치는 곳을 말한다. 이곳에 잠실을 설치한 시기는 용재총화(?齋叢話) 기록에 의하면 성종과 연산군 재위(在位)때로 추정되며, 잠실을 관장하는 잠실도회(蠶室都會)는 당초 중국의 예에 따라 궁중(宮中)에 잠실을 설치하여 중전과 세자빈이 뽕나무를 기르고 누에치는 일의 공들임을 익힘으로써 백성(百姓)들에게 길쌈시범을 보이고자 한 것으로 이곳은 뽕나무 묘목재배, 잠종보급 및 잠업강습소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대한잠사회에서 주변에 뽕나무 3주를 심어 함께 관리하고 있다.

 

말죽거리

말죽거리에 대한 지명유래는 제주에서 보내온 말을 이곳에서 최종 손질하고 말죽을 먹인 곳이라는 설과, 조선시대 공무로 여행하는 자들에게 마편(馬鞭)과 숙식(宿食)을 제공하는 양재역이 있었고 이곳에서 여장(旅裝)을 풀고 말에게 죽을 먹였기 때문에 붙여졌다는 설, 이괄(李适)의 난 때 피난을 가던 인조임금이 이곳에서 유생(儒生) 김이(金怡)등이 쑤어 올린 팥죽을 말 위에서 들었기 때문에 붙여졌다는 설, 병자호란때 인조임금이 청나라의 침입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피하자 청군은 산성을 포위한 후 이곳을 용골대가 지휘하는 우익군의 병참기지로 삼고 청군의 기마병들이 교대로 이곳에서 말의 피로를 회복시키고 말죽을 끓여 먹였다는 설 등이 있다.

 

이러한 양재역은 조선시대 역원(驛院)제도에 따라 30리마다 대로변에 설치되었던 주요역으로 중앙과 지방의 공문전달, 관물, 세공수송, 관리사행의 마편급여와 숙식제공, 변경군정의 보고와 민정시찰, 비행관리의 규찰 등을 담당하였으며 또한 교통의 요충지로 사상(私商)들의 상업활동이 활발하였던 지역이다.

 

남태령

우리나라에는 많은 지역에 여시골 즉 여우고개라고 불리는 고개가 있는데, 이는 그만큼 인적이 드물고 산세가 험해 여우의 출몰이 심했던 까닭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여우고개는 남태령(南泰嶺)이었다. 이 고개를 여우고개라고 부르게 된 것은 호랑바위가 있는 골짜기에 여우가 많이 출몰하므로 여우골이라 하였는데, 옛날 천년묵은 여우가 사람으로 변신하여 이 고개에 나타났다는 데서 유래한 설이 있다. 남태령은 서울과 과천의 경계이며 관악산과 우면산 사이의 고개로 18세기 말 효성이 극진한 정조임금이 수원에 있는 선친 사도세자 능()을 자주 참배하러 다녔는데, 어느날 이곳에서 잠시 쉬어 갈 때 "이 고개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자 과천현 이방 변씨가 엉겁결에 "남태령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에 그를 시기하던 자가 "이 고개 이름은 본래 여우고개인데 어찌 거짓을 고하느냐?" 라고 힐책하자 "고개 이름은 본래 여우고개이지만 신하로서 임금께 그와 같은 상스러운 말을 여쭐 수가 없어 서울에서 남쪽으로 맨 처음 큰 고개이기에 남태령이라 했습니다"라고 아뢰니 정조가 이를 칭찬하였으며, 그 후부터 남태령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남태령이라는 말은 광해군 때 만들어진 춘향전에 이미 나오고 있으므로 정조 이전에 불리어졌으리라고 생각된다.

 

우면산성뒤골

우면산 서쪽자락에 위치하며 성뒤마을로 가는 계곡으로 옛날 이곳에 큰 성()이 있었으며, 그 성을 사이에 두고 아래성뒤(下城後)마을과 윗성뒤(上城後)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당초 부자들이 많이 거주하였으나 남태령 주변에서 활개를 치는 도둑들 때문에 기존 주민들은 모두 이주하고 이 계곡은 도둑들의 소굴이 되어 일명 "도둑골"로 불려졌다고 한다. 현재 이곳은 전원마을에서 우면산을 오르는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으며 인근에는 서초전자고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도구머리

옛날 남태령(南泰嶺)을 넘어서 도성(都城)으로 들어가는 들머리 입구(入口)에 있던 마을이라는 뜻에서 "도구두(都口頭)"라고 하였으며, 인근에 "도구머리고개", "빈도구머리터" 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방배(方背)라는 말은 우면산을 등지고 있는 동리(洞里)라는 설과, 한강을 등진() 모서리()란 설이 있어서 도구머리와 유사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현재 이 일대에는 이수초등학교와 방배2동주민센터가 위치하고 있으며 인근 도구머리길 입구에는 새우촌 근린공원이 잘 가꾸어져 있다.

 

마뉘꿀고개

서초동의 서초역과 반포동 조달청 사이에 있는 고개를 마뉘꿀 고개라고 불렀는데 이는 조달청 부근에 옛날 마뉘골이라는 마을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뉘꿀이라는 말은 고갯마루를 의미하는 속칭으로 일제시대에는 매곡동 (梅谷洞)이라고 표기하였는데, 옛날 이 고개 주변에는 숲이 우거지고 골이 깊어 호랑이가 출몰한 적도 있으며, 산적(山賊)들의 소굴이 되어 함부로 넘나들지 못했다고 한다.하지만 지금은 반포로가 관통하며 좌우로 서초경찰서와 검찰청이 위치하고 있다.

 

장안말고개

법원종합청사와 삼풍아파트 사이의 고개를 "장안말고개"라고 불렀는데, 이는 옛날 장안마을이 지금의 삼풍아파트 단지 남쪽기슭에 있었기 때문이며, 이 마을에는 조선조 제4대 세종대왕의 4남인 임영대군(臨瀛大君)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 오고있다. 현재 이 고개 주변에는 법원종합청사와 삼풍아파트 등이 접하고 있으며, 과거 붕괴된 삼풍백화점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임영대군(14181496)은 이름이 구()이고 시호는 정간(貞簡)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닦는데 힘써 왔으며 신무기인 화차제작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1코스서초구 자연에서 느끼는 Healing~”[양재천 와인의 거리, 양재시민의 숲, 쇼핑센터]

2코스강남역 즐기기”(강남역, 헬스케어의료기관, 금연구역 )

3코스 “Go to 서초안의 작은 France"[서래마을, 서래글로벌빌리지센터, 몽마르뜨공원, 고투쇼핑몰, 호텔(메리어트호텔, 팔레스 호텔) ]

4코스맛과 멋 그리고 쉼표가 있는 거리”(서초 토요문화벼룩시장, 허밍웨이길, 카페골목, 방배사이길)

5코스 오감만족 한강나들이”(자전거도로, 달빛무지개분수, 한강공원, 서래섬 유채꽃축제 등)

추가코스 서초의 문화거리”(예술의 전당, 국립국악원

 

 

01.이수나루터

02.동재기나루터

03.반포서래섬

04.잠원나루터

05.잠실리뽕나무

06.주흥동

07.언구비

08.용허리

09.전기박물관

10.사도감터

11.말죽거리

12.윤봉길의사기념관

13.양재동산말

14.헌릉, 인릉

15.원지동미륵당

16.원지동원터

17.원지동고인돌유적지

18.문화예술공원

19.충현정묘

20.태봉

21.성정승묘소

22.형촌회화나무

23.분재박물관

24.석유촌회화나무

25.남태령

26.우면산성뒤골

27.승방평

28.도구머리

29.효령대군묘소와사당

30.성안산공신도비

31.서초동향나무

32.마뉘꿀고개

33.국립중앙도서관

34.장안말고개

35.정역신도비

36.대성사복불좌상

37.예술의전당

 

 

문화재 http://www.seocho.go.kr/site/sd/page.jsp?code=sdc030030010

문화행사http://www.seocho.go.kr/site/sd/page.jsp?code=sdg040030000

서초갤러리http://www.seocho.go.kr/site/sd/page.jsp?code=sdc060010000

서초역사문화탐방http://www.seocho.go.kr/site/sd/page.jsp?code=sdc020010000

서초책사랑방http://lib.seocho.go.kr/

향토문화http://www.seocho.go.kr/site/sd/page.jsp?code=sdc030010000

반포종합운동장http://www.seocho.go.kr/site/sd/page.jsp?code=sdc040020090

우면산http://www.seocho.go.kr/site/sd/page.jsp?code=sdc010190000

우면산생태탐사http://umpark.seocho.go.kr/

청계산http://www.seocho.go.kr/site/sd/page.jsp?code=sdc010170010

문화원/공연장http://www.seocho.go.kr/site/sd/page.jsp?code=sdc010120000

양재천http://yr.seocho.go.kr

    

 

 

 

 

법정동 기준 10개동, 행정동 기준 18

서초(瑞草잠원(蠶院반포(盤浦방배(方背양재(良才원지(院趾우면(牛眠염곡(廉谷내곡(內谷신원(新院)

 

 

 

서초(瑞草)

서초동은 옛날 이곳에 서리풀이 무성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일명 상초리, 서리풀이라고도 했다. 서초동은 원래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동면 서초리와 명달리로 칭해오던 곳 이었는데 일제강점기 구역확정때 시흥군 신동면 서초리로 칭하게 되었 고, 광복후 1963년 서울특별시 구역확장에 따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서초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1당산마을

당산마을은 당골마을과 마산마을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으로 당꿀로도 불린다. 현재 남부터미널이 있는 남쪽 남부순환도로변에 10여 호의 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는 옛날산제를 지냈던 당이 있다.

 

2사도감마을

사도감마을은 현재 영동중학교 일대를 말하는데 옛날 사또가 머물렀기 때문에 사도감이라고 불렸다. 이와 연관되어 양재역 부근에 사도감고개가 있었고 그 밖에도 사도감개울, 사도감들, 사도감다리 등도 있었다.

 

3왕촌

반포대로와 남부순환도로가 만나는 지점인 서초동 1451번지 일대에는 왕촌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은 고려가 멸망한 뒤 왕씨가 정착하여 500년 동안 거주해 온 곳이다. 조선 건국 후 왕씨가 멸족을 당하게 되자 태조 이성계의 꿈에 고려 태조 왕건이 나타나 자신의 후손들을 더 이상 멸족시키지 말고 보살펴 달라고 부탁을 하여 이성계가 특명을 내려 왕씨들을 더 이상 처형시키지 말고 찾아서 잘 살게 해 주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때 왕미란 사람이 이곳에 정착하였으며, 서초동 산 127번지에 그의 아들 왕효곤을 비롯하여 100여 기의 왕씨 선조의 묘가 있었으나 1971년 도시계획사업에 따라 모두 이장되었다. 개발 전까지만해도 20가구의 왕씨 가문이 살고 있었다.

 

4장안말

서초동 삼풍아파트 남쪽 일대를 장안말이라 부르는데, 이 마을에는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왔다. 세종 10(1428) 임영대군에 봉해졌고, 세종 21년 여색에 빠졌다 하여 일시 직첩을 빼앗기기도 하였다. 문종 1(1451) 왕의 직접 지도로 신무기인 화차를 제작하였으며, 그 후 세조를 보좌하여 조정과 백성을 위해 노력했다. 정곡은 현재 법원단지와 그 남쪽 일대를 말하는데, 옛부터 정씨가 모여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입구에 자연석 2개에 '鄭谷(정곡)'이라 정중만의 글씨로 새긴 것을 세워 놓았는데 현재 이 돌은 반포로 변 해주 정씨 대종친회 건물 앞에 옮겨져 있다.

 

잠원(蠶院)

잠원동은 이곳에 조선초에 국립양잠소격인 잠실도회가 설치되어 잠실리라 부르던 것을 서울에 편입될 때에는 이미 현 송파 구에 잠실동이 있었으므로 중복을 피해 잠실리의자와 인근 신동 면 신원리의자를 따서 잠원동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잠원동의 연 혁을 살펴보면 조선말까지는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잠실리와 사평리로 부르던 곳이다. 그런데 일제때인 1914년 경기도 구역확정 때에 시흥군 신동면 잠실리로 칭했다. 이후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잠원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1사평장터

오늘의 설악아파트 1동 북쪽, 한신아파트 337동 동쪽 잠원로 부근에는 지금부터 60여년전까지 사평장터가 있었다. 이곳은 지형이 높아 돈대마당이라고도 불리던 곳인데 그 동쪽에는 200년 된 느티나무만이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2한강나루

한남대교가 설치되어 있는 곳은 원래 한강진이 있던 곳으로 예전부터 수상교통의 길목이었다. 일찍이 신라 때는 북동이라하여 이곳에서 큰 제사를 지냈으며 고려때는 사평도라하여 진선이 배치되어 교통편을 제공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한강 제1의 도선장으로 송파·노량진과 더불어 경강 3진을 이루었다. 한강나루 북쪽에는 양진단이 있어 나라에서 봄·가을로 사고예방을 위하여 제사를 지냈으며, 부근에는 제천정이란 정자가 있어 이곳을 중심으로 선비들이 자연을 즐겼다. 한편 한강나루의 진선으로 관선 10척이 있었다. 세종때 삼전도를 신설하면서 1척을 이관하 여 9척으로 운행되다가 15척으로 늘어나기도 하였다. 한강진은 삼전도와 더불어 대모산 기슭의 헌·인릉과 나루 동쪽의 선정릉으로 가는 길목으로 역대왕들의 도강이 있었고 봉은사에 불공을 드리기 위한 도성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다. 연산군 때는 청계산 수렵을 위한 부교가 가설되기도 했으며,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부교를 설치하여 도성을 함락하려고 하자 의병들이 이를 파괴하여 작전을 교란시키기도 하였다. 현재 한남대교가 경부고속도로에 이어지는 것은 옛날 한강진을 건너 삼남으로 이어지는 옛 길의 재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3옛 지명의 유래

현재 농가공산품판매센터(잠원동 65-32번지)부근에는 할떡거리 마을이 있었는데, 이는 옛날에 떡 하나로 다투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는 양반이 묻혀 있다는 양반산소가 현재 잠원동 천주교 성당 뒤쪽에 있다. 원단동 이란 마을 위치는 확실치 않으나,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풍수 설에 따라 남산의 누에를 먹이기 위한 뽕나무를 마을에 많이 심었고, 세조가 이곳에 원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또한 옛날에 활을 쏘았던 시장 터가 있었고, 예날 황새가 앉았다하여 황샛물이라는 우물이 있었는데 물이 잘 나왔다고 한다.

 

반포(盤浦)

반포동은 이 마을로 흐르는 개울이 서리서리 구비쳐 흐른다하여서릿개곧 반포(蟠浦)라 하다가 훈이 변하여 반포(盤浦)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 일설에는 홍수 피해를 입는 상습침수지역이므로 반포라고 불렀다 한다. 반포동은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상반포리·하반포리 지역이었으나 일제때 경기도 구역확정에 따라 시흥군 신동면 반포리로 부르게 되었다. 그후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반포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1게루지 마을

현재 주공아파트 3단지에는 고모래산이라는 야산으로 게루지마을이 있었고 천주교인의 공동묘지였다.

 

2별바위 터와 말무덤 터

옛날 어느 임산부가 산기가 있어 친정인 마포로 가다가 진통이 심해 견딜 수가 없어 길옆 갈대밭에 들어가 혼자 아기를 낳았다. 그러나 태를 끊을 수가 없어 어려워 할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흰 도포를 입은 노인이 나타나 일러주기를 "태는 갈대잎으로 끊으면 되나 아기가 걱정이다"라고 하며 당부하기를 "뒤에 말탄 병사가 쫒아 올텐데 그가 아기는 어떻게 낳았으며, 태를 어떻게 잘랐느냐고 추궁할 것이니 그때 가대로 잘랐다고 말하지 말아라" 만일 말한다면 아이를 죽일 것이다."하고 일러주고는 하늘로 사라졌다. 곧이어 말탄 병사가 뒤쫓아와 산모에게 추궁을 하자 산모는 할 수 없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병사는 즉시 아이를 죽였다. 이 때 하늘이 시커멓게 변하면서 아기가 죽은 뒤편 큰 바위에서 무수히 많은 왕벌이 쏟아져 나오더니 그 병사를 향해 날아가 병사와 말을 쏘아 죽였다. 그 후 벌이 나온 큰 바위를 벌바위라고 불렀다. 현재 이 곳에는 반포전화국이 자리하고 있다. 한편 방사를 태우고 온 용마가 벌에 쏘여 죽은 것을 안타까이 여긴 마을 사람들은 용마를 정성껏 묻어 주었는데, 그 자리가 바로 반포동 1번지 경남쇼핑센터 옆이다.

 

3서래마을

사평로 동쪽 팔레스호텔 뒤쪽에는 예부터 이곳에 살아온 20여호의 원주민들이 있는데, 이 일대를 서래마을 또는 서애마을, 서릿마을이라고 부른다. 서래마을이란 명칭은 마을 앞의 개울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 해서 불리게 되었다 한다. 또 서애라는 마을 이름은 매곡동(현 조달청이 위치한 곳에 있었던 마뉘꿀이라는 마을) 사람들이 이 마을이 자기네 서쪽 물가에 있고, 뒤에 깎아지른 듯한 산이 있으므로 불렀던 이름이다. 서래마을은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남쪽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서 의이죽으로 요기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서래마을은 원래 반포 15차 한신아파트가 지어져 있는 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피해를 입고 이주해와 형성되었다.

 

4원곡마을

둥근말이라고도 불린 원곡마을은 산 모퉁이에 둥글게 이어져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인데 현재의 강남성모병원 뒤쪽이다. 현재 이 병원의 기숙사 자리는 전에 빙고꿀이라고 불리던 곳인데, 이곳은 골짜기가 깊어 겨울에 언 얼음이 늦봄까지도 녹지 않아 이같은 이름이 생겼다한다.

 

방배(方背)

방배동의 유래는 관악구와 서초구와의 경계에 솟은 우면산을 등 지고 있는 동리라는 뜻을 방배라한데서 연유한다. 방배동 의 연혁을 살펴보면, 조선시대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방배리였 으나 일제때인 1914년 경기도 구역 확정때에 이 지역은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방배리가 되었다. 이후 1963년 서울특별시의 구역확장에 따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방배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위치는 서초 구의 서쪽 끝에 있는 동이며 서울에서 과천에 이르는 도로와 남부순환 로가 교차하는 곳에서 우면산에 이르는 지역이다.

 

1남태령

우리나라에는 어디를 가더라도 여시골(엽시골), 즉 여우고개라 불리는 고개가 흔하게 널려 있다. 이는 예전에는 그만큼 인적이 드물고 산세가 험해 여우의 출몰이 심했던 까닭이었다. 한양에서도 인근 경기도로 나가는 관문에는 곳곳에 여우고개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여우고개는 다름아닌 오늘날의 남태령이었다. 남태령은 서울과 과천의 경계로 관악산과 우면산 사이의 고개이다. 18세기 말 효성이 극진했던 정조는 수원에 있는 선친사도세자의 능을 자주 참배하러 다녔었는데, 어느날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다 "이 고개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자 과천현 이방 변씨가 "남태령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에 그를 시기하던 이가 "이 고개이름은 본디 여우고개로 불리는데, 왜 거짓말을 아뢰느냐''''고 힐책하자 이방 변씨가 "이 고개 이름은 본래 여우고개이나 신하로서 임금께 여우고개와 같은 상스러운 말을 여쭐 수가 없어 서울에서 남쪽으로 맨 처음 큰 고개이기에 남태령이라 했습니다."하고 아뢰니 정조가 이를 칭찬했다고 한다. 그 후 이 고개를 여우고개에서 남태령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에 이 고개를 여우고개라 부르게 된 것은 호랑바위가 있는 가까운 골짜기에 호랑골과 여우골이 있어 여우가 많이 출몰한다고 해서 명명되었다는 설과, 예날에 천년 묵은 여우가 사 람으로 변신하여 이 고개에 나타나기도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한편 남태령이 란 이름이 붙게 된 시기에 대해 광해군 때 만들어진 춘향전에 이 남태령이 이미 나오고 있 으므로 정조 이전에 불려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2방배동 고분

방배동에는 고분이 있었는데, 이 고분에서 1970년대에 조선 초기의 목우 6점이 출토되었다. 높이 7~8cm의 목우들은 출토 당시 부분적으로 부식된 곳도 있었으나 거의 완전한 형태였으며, 원래 채색을 한 듯 약간의 채색 흔적이 남아있다. 6개중 5개는 인물상으로서 3개는 여인상이고, 2개는 남자상이다. 남자 한 사람은 평정건을 쓰고 한 사람은 변발을 하고 있어서 고려 후기 몽고의 영향으로 풀이된다. 옷도 남자는 두루마기 같은 포를 입고 있고, 한 여자는 머리에 몽수를 쓰고 두 여자는 고려말에 유행했던 얹은 머리를 하고 있으며, 길이가 긴 저고리와 치마를입었다. 나머지 한 개는 마상으로서 균형이 잘 잡히고 사실적인 표현에다 나무결을 잘 살린 작품이다. 이 고분은 방배동의 개발로 인하여 현재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3방배동 옛지명의 유래

이 지역은 근래에 신흥주택가로 발전한 곳이지만 지금도 남아 있는 자연부락 명칭들을 통해 옛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천씨가 많이 살았다 하여 천촌말이라 불렀고, 그 뒤에 있는 골짜기를 뒷굴, 그 뒷골에 있는 논을 뒷굴논, 천촌말 고개 너머의 벌을 뒷벌, 천촌말과 사궁말앞 벌을 앞벌, 천촌말 근처의 산개천둑을 갤둑이라 하였고 거꾸로 넘어간다 하여 가꿀고개, 논이 깊어 구레논, 쪽박 엎이 놓은 것 같다하여 쪽박산, 산 아래로 뱅돌아간다 하여 뱅도래미, 새로 생긴 마을은 새말, 옛날에 큰 마을이 있었던 터는 새텃말, 뱀장어가 많아 장앗들, 치달은 골짜기라하여 치골, 호랑이가 살았다는 호랑바위, 돌 한쪽으로 건너던 다리로 임금의 거동하던 길을 쪽다리,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달라고 하여 이복촌(이북굴)이라고 불렀다.

 

양재(良才)

양재동은 어질고 재주있는 사람이 많이 산다하여 지은 동명으로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동면의 양재동이라 칭해오던 것 을 일재때 경기도 구역확정에 따라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양재리로 정하고 광북후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양재동이라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곳은 예전에 교통의 요지로 말죽거리로 애칭되었으 며, 상업활동이 활발하던 지역으로, 양재천 연안의 농경지가 있어 벼농사가 행해졌던 중심지였는데,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택지로 조성되었다.

 

1양재동

옛부터 말죽거리라는 애칭으로 불리면서 양재역, 양재원이 있었던 교통의 요지로 조선시대에는 사상들의 상업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주요 상업지역이었다.

 

2말죽거리

말죽거리는 현재 지하철 3호선 양재역 부근을 말하는 데, 이곳 주민들에 의하면 말죽거리라고 불리게 된 내역은 3가지 설로 전한다고 한다. 조선초 공무로 여행하는 이들에게 마편과 숙식을 제공하는 양재역이 있었고 근처에는 주막도 적지 않았다. 즉 먼길을 걸어 입경하려는 여 행자들 또는 남쪽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말에게 죽을 끓여 먹이고, 자 신도 주막에서 여장을 풀었다해서 이곳을 말죽거리라 불렀다고 한다. 또다른 설로는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피난을 가는 길에 이곳에 이르러 유생 금이 등이 쑤어올린 팥죽을 말 위에서 드시고 갔기 때문에 유래 되었다고 한다.

 

그 밖에 다른 설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군의 침입을 피하기 위해 남 한산성에 들어가자 청군은 산성을 완전히 포위하였고, 이 때 이곳은 청군 장사 용골대가 지휘하는 우익군의 병참기지에서 말의 피로를 회 복시키고 마죽을 쑤어 먹였다하여 말죽거리라 칭하였다고도 한다. 말죽거리에 있었던 양재역은 조선시대에 시행된 역원제도에 따라 설치 된 주요역이었다. 양재역은 다른 역과 마찬가지로 중앙과 지방의 공문 전달, 관물·세공의 수송, 관료 여행의 마필 급여와 숙식의 제공, 변경 군정의 보고 및 민정시찰, 비행관사의 규찰 등을 담당했다. 역은 30마리마다 대로변에 설치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 양재역도 대로변에 있었음이 확실하다. 또한 조선초 명종이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왕의 모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 함으로써 국권을 좌우하게 되었을 때, 이를 비방한 글이 당 시 양재역 벽에 붉은 글씨로 씌여졌다. 이로 인해 일어났던 정미사화는 일명 [양재역 벽서의 옥]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말죽거리는 양재전철역과 고속도로 양재인터체인지, 만남의 광장이 연계되어 서울의 관문 역할을하고 있다.

 

3양재역

말죽거리에 있었떤 양재역은 조선시대에 시행된 역원제도(驛阮制度) 에 따라 설치된 주요 역이었다. 양재역은 다른 역과 마찬가지로 중 앙과 지방의 공문 전달, 관물·세공의 수송, 관료사행의 마필 급여와 숙식의 제공, 변방 군정의 보고 및 민정시찰, 비행관리의 규찰 등을 담당했다. 역은 30리마다 대로변에 설치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 양재역도 대로변에 있었음이 호가실하다. 오늘날에도 이 곳에 지하 철 양재역이 설치되어 이 지역 교통 편리에 큰 몫을 하고 있는 것도 전날의 내력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또 이 양재역은 정미사화(丁 未士禍)와 관련이 있다. 조선초 명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왕의 모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함으로써 국권을 좌우하게 되었다. 명종 2(1547) 9월 부제학 정언각이 어느날 그의 딸을 전라도에 전 송하기 위해 양재역까지 갔다. 그런데 벽을 보니 붉은 글씨로 "위에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등이 권력을 농락하여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그대로 서서 기다리게 되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아니한가"라고 씌어 있었다. 그는 크게 놀라 왕에게 보고하였다. 이 때 이기·정 순붕 등이 "이것은 지난 번 을사사화의 뿌리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이 다"라고 주장하여 봉성군(鳳城君) 등을 처형하고 송인수·이언적 등 20여명을 유배시켰다. 이로써 사람들이 다시 화를 입어 이를 정미사 화라고 하고, 일명 "양재역 벽서의 옥()"이라고도 부른다.

 

4거여마을

현재 양재2동사무소가 위치한 곳을 가리키는 말로 원래는 이곳 지형이 게모양을 닮았다하여 게리라고 불리다가 거여, 거여리로 바뀌었다. 이곳에는 1958년 북방식 지석묘 6기가 발견됐으나 도 시계획에 밀려 지금은 흔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 지석묘의 원래 위치는 양재천 남방 100m지점이라 한다. 또한 이곳에는 융 수군수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우면(牛眠)

우면동은 우면산 아래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유대된 동명 으로 이 동의 위치는 서쪽은 방배와 남쪽은 양재천 경계 로 과천과 접하고 북쪽은 양재동과 접하는 곳으로, 270년 전부터 윗우마니, 아랫우마니 등 12개 마을로 형성된 동이었으나 1970년대 초 경부고속도로 건설이후 시작된 강남지역의 개발과 아울러 현대식 양옥이건립되고 여러 연구기관이 들어서게 되었다.

 

1우면산

우면산 능선을 남태령에서 출발하여 경부고속도로와 인접 한 곳까지 거리 약 6km2시간~2시간 30분이 걸린다. 우면산 중턱과 계곡에 있는 약수터를 잇는 산책로가 있다. 산중턱 길을 따라 작은 계곡과 고개를 넘어가면 덕우산악회 약수터가 있는데, 이 곳에서 올라가면 동서남북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에 올라서게 된 다. 이 곳에는 잔돌로 쌓아 놓은 소망탑이 있다. 이 전망대에 서면 북 쪽으로는 바로 아래 산기슭에는 예술의 전당이, 그 앞으로 반포대교를 건너 남산쪽으로 뻗은 대로의 양쪽으로 강남과 강북의 시가지와 한강, 그리고 북한산·수락산·불암산·아차산이 넓게 펼쳐져 보인다. 서쪽과 남쪽으로는 관악산과 청계산이, 동쪽으로는 대모산과 구룡산이 둘러서 있다. 전망대에서 휴식을 취한다음 서초약수터나 공무원교육원 태극약수터를 거쳐서 양재동으로 하산할 수 있다.

 

2이존오 사당

우면동 49번지에는 고려 공민왕때 언관(言官)을 지낸 석탄 이존오 (石灘 李存吾)의 사당이 있다. 이존오(1341~1371)는 고려말 정몽주 와 함께 과거에 급제하여 공민왕때 관직에 올랐다. 당시 신돈(辛旽) 이 국정을 그르치고 있어도 그의 권세에 눌려 사람들이 아무 말도 못하자 신돈을 몰아내고 국정을 바로 잡자는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왕과 용상이 나란히 앉아 있는 신돈의 무례함을 정면으로 힐책하여 신돈이 황급히 아래로 내려앉은 일도 있었다. 그는 그 일로 좌천되 어 전라도로 귀양가게 되었고, 석탄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137131세로 별세하였다. 그가 죽은 후 공민왕은 그의 충성심을 깨닫게 되어 성균관 대사성으로 추증(追贈)하였다. 이 사당에는 석탄선생의 아들인 경절공도 함께 모시고 있다.

 

3태봉

우면동 형촌마을 옆에 있는 나지막한 봉우리를 태봉(우면동 291- 1번지)이라고 하는데, 이 곳은 조선시대 원산군의 태를 묻은 곳 으로 알려져 있다. 커다란 돌 항아리 내에 태를 담은 백자 항아 리를 넣어두었다고 전해지나, 일제 때 일본인들이 도굴해 현재는 돌 항아리만이 남아 있다. 10여년전 일본의 한 미술관련 잡지에는 이와 관련하여 "이 항아리는 2개밖에 없는 희귀한 항아리로 조선 시흥군 신동면 우면리에서 갖고 왔다"라고 게재되어 있어 당시의 지명과 일치하고 태봉의 유래와 백자의 존재도 사실인 것 으로 확인되었다. 이 일대는 우면산에 둘러싸여 있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원지(院址)

院趾洞朝鮮時代 공용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역과 함께 설치되었던 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院址라고 하던 것이 잘못 표기되어 院趾洞이 되었다 한다.

원지동은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동면 신원동으로 칭해왔다. 그런데 일제 때인 191431일 전국의 행정구역을 임의로 조정하면서 이곳을 시흥군 신동면 신원리라고 칭했다. 그리고 광복 후 196311일 법률 제1172(1962.11.21 공포)로 서울특별시 행정구역을 확장함에 따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면서 현재의 신원동과 분리하여 바람골, 양수리, 원터마을의 3개 부락을 원지동이라 칭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1973년 서울특별시 영동출장서 관할이 되었고, 1975년 성동구로부터 분리, 신설된 강남구에 속하였다가 다시 1988년 서초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다.

 

1청계산

지하철 양재역에서 옛골행 버스를 타고 원지동 미륵당이 있는 원터 입구나 옛골에서 하차하여 계곡길을 따라 올라 간다. 약수터를 거쳐 낙엽송 사이에 있는 제1야영장에 도착하여 오른 쪽 등산로를 따라가면 옥녀봉에 이르고, 왼쪽으로 가면 망경대로 향한 다. 청계산의 주등산로는 미륵당이 있는 원터 마을을 거쳐 청계사 약 수터쪽으로 제1야영장에 올라 휴식을 취한 후 좌측 산중턱으로 길마재 대피소고개에 이르는 길이다. 청계산 등산로에는 청계사, 관현사 등의 사찰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옛날 한양으로 올라오는 과객들이 둘 러앉아 피로를 풀며 술을 마셨다는술바위라는 이름의 큰 바위들도 만나 볼 수 있다.

 

2바람굴

원지동은 현재 서초구의 남쪽 끝 청계산 옥녀봉 아래 계곡마을인 데, 탄천의 지류인 여의천이 흐르고 있다. 이 개천을 조금 거슬 러 올라가면 세원에서 경부고속도로 밑을 통과하는 청계산 입구에 조그만 마을 바람굴이 있는데 이곳은 산이 높고 바람이 세게 분다고 하여 이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3양수리마을과 술바위

원지동 관현사 입구에는 현재 유원지 주차장이 들어선 곳에 옛날 양씨와 수씨가 살았던 양수리마을이 있었다. 지금은 폐동되어 단 지 그곳 골짜기와 들판이름으로만 불리는데 지금은 묘를 쓸 수 없지만 이 골짜기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이 마을 입구 경부고 속도로 옆에 술바위란 유명한 바위가 있는데, 이는 옛날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선비들이 여기에 앉아 술을 마시고 쉬어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이 마을 왼쪽에는 개드락이라는 골짜 기가 있고, 위쪽으로는 청계산 제2야영장이, 그 오른쪽에 장사바 위와 넙적바위가 있다.

 

4삼남도로

원지동과 신원동의 경계가 되고 서울에서 성남시로 통하는 2차선 포장도로가 있는데 이것이 삼남도로이다. 조선시대에 삼남으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던 이 길은 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길 로 달래고개를 넘어 너더리(板橋)를 거쳐 용인이나 수원으로 오 갔었다.

 

5원터마을

삼남도로를 가다보면 청계산 제1야영장과 청계산기도원 입구가 나타나는데, 여기가 원터(院基)마을이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 여행자를 위한 원()이 세워져 있었던 관계로 원터라 불려진 것 이다. 원지동 400번지에 일대에 원이 있었는데, 1970년대 취락구 조 개선사업으로 석축이 없어지고 현재는 비닐하우스가 세워져 있다. 이 원터마을은 경부고속도로가 놓임에 따라 주민들의 일부 가 이전하였고 옛 농촌주택은 현대식 주택으로 바뀌었다.

 

내곡(內谷)

내곡동은 옛 언주면의 일부로서 본촌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안골·안말로 불리우던 것이 한자명으로 내곡동이라 된 것이다. 현재의 위치는 강남구 남쪽의 구룡산, 대모산의 성남시와 분계되는 인릉산 사이에 형성된 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현재 안골을 위시하여 샘마을, 능안마을, 헌인마을, 홍씨마을, 신흥마을 등의 자연부락이 산재해 있다.

 

1내곡동

옛 언주면의 일부로 본촌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안골, 안말로 불리던 것을 한자명으로 내곡이라 부르게 된 것이 동명의 유래인데, 일명 양지말이라고도 칭한다. 조선시대에는 이 곳에 헌·인릉이 있어 주택이 들어설 수 없었으며, 수목이 울창하여 호랑이·여우 등의 짐승이 출몰하던 지역이었다. 내곡동을 둘러 싸고 있는 산 중에 인릉산은 내곡동고 성남시와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으로, 내곡동 산 13-1번지에 헌릉·인릉이 자리잡고 있어 산 이름이 되었다.

 

2샘마을

내곡동의 샘마을은 1972년에 창경궁·창덕궁 인근의 종로구 와룡동 철거민들이 집단으로 이주함으로써 형성된 마을이다. 원래는 박석고개 왼쪽에 정착했으나 1979년 취락구조개선사업 때 헌릉로 현재 신흥마을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

 

3어둔골

·인릉 입구 박석고개에서 남쪽으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신흥마을이 있다. 이름 그대로 광복 후 월남민들의 개척단이 이룩한 새로 생긴 마을이다. 원래 이곳은 어둔골이라 하였는데 나무숲이 우거져 낮에도 밤처럼 어두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옛날에 호랑이도 자주 출현하였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전국에서 제일 품질이 뛰어난 수제양털이불 생산업체가 들어서 있다.

 

염곡(廉谷)

九龍山이 감싸안은 廉谷洞은 이 곳 지형이 염통(심장)과 같이 생겼서 염통골 또는 한자명으로 영통곡(靈通谷), 염곡동(廉谷洞)이라 하였다. 조선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彦州面 廉谷洞으로 칭해왔다가 1914년 염통골의 이름을 다서 광주군 언주면 廉谷里라 칭하였고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염곡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1973년 서울특별시 영동출장서 관할이 되었고, 1975년 성동구로부터 분리, 신설된 강남구에 속하였다가 다시 1988년 서초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다. 500여년 전부터 全州李氏가 거주를 시작했고, 20여년 이후 거주한 新羅 眞骨 창녕(昌寧) ()씨들이 90여 가구로 번창한 집성촌으로, 마을전체가 돌담이며 감나무가 많은 마을이다. 구룡산 전설에 따라 아홉개의 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물맛이 좋았다고 한다. 8군데가 매몰되고 , 현재는 염곡마을 북동쪽에 구룡산 제1약수라는 옛날 옻우물만이 남아 있다. 이 옻우물이란 약수 이름은 옻이 오른 사람이 이 우물 물을 마시거나 우물 울로 씻어내면 옻이 깨끗하게 낫는다는 설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탑성골(塔谷)은 옛날에 탑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염통골에 속한 마을이며, 염곡리는 피난골이라고도 부르는데 6·25 전쟁 당시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염곡동 언남공원에 570년된 느티나무 서울시지정 보호수22-1, 22-2 가 있어. 이곳에서 주민들이 국가의 안녕과 마을에 악귀를 멀리 쫓아내고 풍년을 기원하며 제를 지냈다 한다. 1978년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전 가옥이 현대식 주택으로 변모되었지만 예전의 전원 모습을 그래로 지니고 있는 동이다.

 

1염곡동

염곡동은 이곳 지형이 염통과 같이 생겼으므로 염통골 또는 한자명으로 염통곡, 염곡동이라 하였다. 염곡동의 현재 위치는 동쪽은 내곡동과 접하고 서쪽은 양재동에 닿아 있다. 그리고 북쪽은 구룡산을 경계로 강남구 포이동과 분계되어 있고, 남쪽은 야산을 경계로 신원동과 잇대어 있다.

 

2탑성골

탑성골은 염통골 남쪽 헌릉로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버스정류장 이름도 탑성골로 되어 있다. 탑곡은 옛날 이곳에 탑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 마을에는 경주 이씨가 11대 이전부터 살기 시작하여 아직도 몇 가구가 살고 있다.

 

3옛날 옻우물

과거 염곡동에는 아홉마리 용이 승천했다는 구룡산 전설에 따라 아홉개의 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물맛이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1978년동에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8군데가 매몰되고 현재는 염곡마을 북동쪽에 구룡산 제1약수라는 옛날 옻우물만이 남아 있다. 이 옻우물이란 약수 이름은 옻이 오른 사람이 이 우물 물을 마시거나 우물 울로 씻어내면 옻이 깨끗하게 낫는다는 설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4염통골

염통골 또는 염통곡으로 알려진 염곡동은 집성촌으로 창녕조씨가 많이 거주하고있고 전주 이씨도 몇 거주하고 살고 있는데 전주 이씨는 420여년 전부터 거주하기 시작했고 그후 20년 늦게 창녕 조씨가 거주하기 시작했다. 1978년 취락구조 개선사업 이전까지는 조씨가 80~90여호 있었으나 지금은 많이 떠나갔다.

 

신원(新院)

신원동은 조선시대 원터 아래쪽에 새로 조성된 마을이므로 새원이라 하던 것을 한자명으로 신원동이라 한 것이다. 신원동의 연혁을 살펴보면 이곳은 조선시대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신원동, 신저도 지역이었다. 그러나 일제 때인 191431일 전국의 행정구역을 전면 조정하면서 이 때 이곳을 광주군 언주면 신원리라 칭하였다. 광복후 196311일 법뷸 제1172(1962.11.21 공포)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신원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원동의 행정동 변천관계를 살펴보면, 이 동은 1962년말까지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관할이었다. 196311일에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는 서울특별시조례 제276호에 의해 신설된 성동구 언주출장소 관할의 탑곡동사무소는 신원동과 함께 염곡·내곡동의 행정을 담당하게 되었고, 1975년 성동구로부터 분리, 신설된 강남구에 속하였다가 다시 1988년 서초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다. 지역적으로는 서초구의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에는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있고, 도로변에는 화훼단지가 조성되어 꽃과 관상수를 재배하는 100여개의 화원이 자리잡고 있다. 신원동의 지정 보호수인 수령 100년의 느티나무는 이 마을 사람들 뿐아니라 서울 시민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1신원동

조선시대 공용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개 위해 역과 함께 각 요로에 설치되었던 원의 터 아래쪽에 새로 조성된 마을로 "새원" 이라 하던 것을 한자명으로 신원동이라 한 것이다.

 

2평촌

신원동의 근본이 되는 마을로 본촌이라 하고 또 마을이 벌판에 있으므로 벌말이라고도 한다. 평촌은 벌말을 한자로 바꾼 이름이다. 이 벌말 438번지 13호에는 김진사댁이 있었는데 전에 과거를 보던 선비들이 이 사랑방에서 숙식을 하고 갔다 한다. 취락구조개선 사업으로 대부분 성남으로 이사 가고 지금은 원주민이 반으로 줄었다. 벌말은 김해 김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으며 6·25동란 때 인민군이 크게 패한 격전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