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리란칭(李嵐淸) 전각서예전
일정 : 2013.11.15.-2013.12.08.
장소 :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이미 우리시대는 붓글씨 쓰기를 지나 키보드 치기시대 한가운데로 접어들었다. 불과 이십 여년만이다. 쓰기와 치기는 그냥 서체의 변화가 아니다. 붓글씨가 축적해온 2,000여년의 역사를 자판이 갈아치운 문명의 대 전환이다.
전각을 새기고 있는 이란칭
인간이 매 글자를 일일이 만들어쓸 필요가 없다. 이미 만들어 놓은 기계글씨를 그냥 두드리기만 하면 된다. 더 이상 골치 아프게 붓을 들고 빨리 아니면 느리게, 획과 획 사이를 좁게 아니면 넓게, 글자를 크게 아니면 작게 쓸 것인가 하는 고민은 필요 없게 되었다. 물론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되는 그 편리함의 대가는 디지털 치매와 같은 고통으로 고스란히 되돌아오고 있지만.
大衆篆刻(대중전각) 6.0x5.8x4.4cm 도자기 2011년
이런 현실 앞에서 서예를 어떻게 창신시킬 것인가 하는 일은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식자층이라도 지금 서예를 소비할 일반대중은 붓도 들어보지 않았다. 당연히 앞서 언급한 자법(字法)은 물론 먹과 붓을 다루거나 보는 법이라 할 서예언어에는 문맹일 수밖에 없다. 서예가들 또한 관객보다 자신들의 서예언어를 필법으로 더 공고히 쌓고 그 속으로 빠져 들어만 간다. 서(書)의 절반인 내용, 즉 텍스트를 버리고 조형성과 기법에만 몰두해왔다. 이렇게 서예가들이 일상을 버린 지가 근 100년이 되었다.
베이징 올림픽 엠블럼, 북경오운(北京奧運) 3.0x3.0cm2005년
필자의 책상 벽에는 2008년도 베이징 올림픽 공식 엠블렘이 탈색된 채 붙어있다. 마라토너가 결승점을 통과하는 모습을 칼로 새긴 것이다. 지금 누구나 보면 ‘아, 그 작품!’ 하고 무릎을 칠 일이지만 당시에는 누구 작품인지도 모르고 이것이야 말로 앞으로 서예가 살길이라고 생각했다.
山月(산원)3.5x3.5cm 2006년, 水石(수석) 3.3x3.3cm 2006cm
방촌(方寸)의 우주(宇宙)라고 했지만 손톱만한 공간에 이렇게 간단한 획으로 올림픽을 압축하여 전 세계를 담아내다니! 이제 대중들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한 전통 전각(篆刻)을 현대디자인 어법으로 해석을 해내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동아시아의 획(劃)하나로 단칼에 근 100년간 세계문자디자인 바닥을 주도해온 서방의 라인(line)을 돌려세운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大智大勇大業(대지대용대업) 4.0x4.0cm 2007년
이제 알고 보니 그 주인공이 바로 리란칭(李嵐淸)이다. 리란칭(李嵐淸) 전각서예전은 ‘전승(傳承)과 창신(創新)’이 주제다. 특히 이것은 모든 문화가 동(東)에서 서(西)로 바뀐 우리사회가 모두 풀어야 할 화두다. 하지만 스마트폰 시대에 전각과 서예가 어떻게 돌파구를 열어갈 수 있을까 생각하면 여간 고민스럽지 않다. 그런데 리란칭은 필자를 포함한 우리시대 사람들의 이런 중압감을 오히려 쉽게 풀어 주었다. 그것은 바로 전각을 위한 전각이 아니라 ‘나의 생활을 칼끝에’ 생생하게 담아 돌에 박아내는 것이었다.
이번 전시장은 이 문제에 대한 리란칭式 풀이와 답안지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의 내용에 따라 ‘중국전각’ ‘현대중국’ ‘세계문화’ ‘생활정회(生活情懷)’ 등의 주제로 갈래 지워진 400여점이 이를 실증하고 있었다.
世宗大王(세종대왕 5.0x5.0cm) 漢拏山(한라산 5.0x5.0cm) 阿里郞(아리랑 5.8x5.8cm)
이번 한국전시를 위한 작가의 배려와 고민은 역력하다. 태극문양의 국한혼용작품인 <중국전각/中國篆刻>을 비롯하여 <世宗大王(세종대왕)> <阿里郞(아리랑)> <首尒藝術殿堂(서울예술전당_> <漢拏山(한라산)> <漢江(한강)>은 물론 개화기때 정치가이자 묵란의 명수였던 민영익의 아호 <園丁(원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더 나아가서는 이젠 서방세계에 대한 정치를 넘어선 문화적 자신감까지 배여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모차르트를 <莫札特>, 아이작 뉴턴을 <牛頓>, 발레를 <芭蕾> 따위의 한자 중에서도 붓도 아닌 전서(篆書)의 칼 ‘새김’으로 불러내고 초상화를 ‘그리고’ 붓으로 ‘쓰는’ 지점에 까지 자유자재다.
莫札特(마찰특) 2.3x2.3x5.3cm 2004년
이란칭은 예술가이전에 중국 최고위정치가임은 누구나 알고 있다. 또 전각예술계에서 손꼽는 거장이다. 하지만 우리시대 중국만 해도 최고의 정치가나 예술거장은 많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나 예술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리란칭의 경지는 정치를 예술로 하나 되게 칼로 새겨낸 데에 있다고 하겠다.(*)
.
궁핍한 시대의 빛나는 그림들 - <명화를 만나다, 한국근현대회화 100선>
전시명 : 명화를 만나다, 한국근현대회화 100선
일정 : 2013. 10. 29-2014. 3. 30.
장소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이상범 <추경산수> 1954년경 69.3x274cm 종이에 수묵담채
이중섭 <소> 1953년경 35.3x52cm 종이에 유채,에나멜
‘한국미술사의 큰 업적을 남긴 화가 57명의 수묵채색화, 유화 등 회화작품 100점을 엄선해 한국회화의 진수를 살펴본다’는 전시에 대한 예상 밖의 큰 호응은 유난히도 맑은 하늘과 아름다운 은행잎이 빛나는 깊은 가을의 정취도 한몫했다.
적어도 1970년대까지 가을의 고궁은 ‘예술의 광휘’로 가득한 공간이었으며 고달픈 일상에 우아한 향기를 들이마시게 하는 한 잔의 차와도 같은 장소였다. ‘국전’을 안고 있던 가을날의 덕수궁은 그렇게 근대에서 현대를 지나온 장년층에게는 젊은 날의 향기로 기억된다. 적어도 현대, 새로움, 동시대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작금의 전시에서 소외받은 중장년층이 이해할 수 있는 작품들을 만나게 하였다는 점에서도 이른바 틈새시장까지도 개척한 전시라는 점에서 상찬(賞讚)받을 만하다.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년경 232x172cm 캔버스에 유채
전시는 전체 4부로 구성돼있다. 1부 ‘근대적 표현의 구현’에서는 동경유학을 통해 배워온 화가들의 양산에 따른 양화단의 형성을 가늠할 수 있다.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구축된 아카데미즘 미술의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1940-50년대의 작품들은 2부에서 ‘새로운 표현의 모색’이라 규정되고 있다. 광복 후 일본을 극복하기 위하여 벌인 각고의 노력과 전후 실존을 다룬 작품들을 선택하고 있다.
오지호 <남향집> 1939년경 80x65cm 캔버스에 유채
근현대 수묵채색화의 변화양상을 ‘전통의 계승과 변화’로 파악한 3부는 케케묵은 세계라고 비판받던 수묵채색화를 어떻게 개량할 것인지 고심한 당대 작가들의 흔적을 담고 있다. 4부는 1960, 70년대의 비구상적인 경향을 ‘추상미술의 전개’로 설정하였다.
변관식 <외금강산선암추색> 1959년경 150x117cm 종이에 수묵담채
전시공간을 분류한 명제들은 ‘새로움’을 근현대 회화의 특성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노정한다. 유화라는 새로운 매체의 등장, 새로운 표현법의 모색으로 압축된다. 그 사이에 ‘전통의 계승과 변화’라는 주제를 두어 수묵채색화를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일견 상대적으로 유화에 비하여 소홀해지기 쉬운 수묵채색화에 대한 배려로 보이지만, 전시된 작품의 수에서는 당황스럽다. 구분함으로써 타자화되는 수묵채색화의 현재는 전체 100점 중 30점이라는 수에서 증명되는 듯하다.
박수근 <빨래터> 1954년경 15x31cm 캔버스에 유채
‘미술사적인 의미와 함께 미술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최우선으로 했다’는 전시 작품의 선정기준을 밝히고 있는 것은 ‘명품’이라는 수식어에 대한 부담이 컸던 때문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른바 4대가, 6대가, 10대가라고 칭하는 동양화의 거장들이 실은 1960년대 신세계화랑과 신문회관에서 있었던 <10대가전> 그리고 1989년 호암미술관의 <산수화 4대가전> 등에서 발원한 것을 알고 있으며, 전시를 통해 작품이나 작가를 규정하는 것이 미술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또한 알고 있는 때문일 것이다.
김기창 <아악의 리듬> 1967년경 86c98cm 비단에 수묵채색
한국 근현대사에서 그림은 고난의 시대를 쉬게 하고 비루한 현재를 잊게 해주는 아름다운 세계였다. 소설가 박완서는 화가 옥희도라는 인물로 가공한 박수근을 『나목』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홀연히 옥희도 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박수근의 <나무와 여인>을 화랑에서 본 작가 박완서가 의자에 기대 쉬려고 찾은 곳수궁이었다. 그는 찬란한 은행잎을 바라보고 황금빛 세례에 몸을 맡기며 ‘가을의 양광은 차라리 봄보다 따습다’고 느꼈다. 지금 <나목>을 볼 수 없는 덕수궁의 전시장을 빛나게 하는 것은, 궁핍한 시대를 잠시 기대 마음과 몸을 쉬어 가게 하였던 옥희도를 닮은 이들의 화면에 쏟아부었던 그 찬란한 빛이다.(*)
거시적 건축의 미시적 흔적들-<중국 청주(靑州) 와당> 특별전
전시명 : <중국 청주(靑州) 와당> 특별전
장 소 : 유금와당박물관
기 간 : 2013.10.18-2014.9.5
연꽃무늬 수막새, 유송~북위, 지름 14.4㎝
지금 이곳에서는 내년 9월 5일까지의 일정으로 <중국 청주 와당>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이미 국립중앙박물관에 1,800여점의 기와 유물을 기증한 바 있는 유창종 관장이 이후에도 기와 수집을 계속하여 보다 친밀하게 관객들을 맞이할 수 있는 박물관을 2008년 개관한 것이다. 이 박물관의 신은희 학예실장에 의하면, 이번 전시의 목적은 삼국~통일신라와 밀접한 교류관계에 있었던 중국 청주 지역 출토의 와당들을 모아 소개함으로써 우리 와당의 형성과정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번 전시는 같은 목적으로 앞서 있었던 <중국 양주 와당>의 후속편이다. 양주 지역이 중국 남쪽 지역으로서 우리나라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면, 이번 청주 지역은 북쪽 지역으로서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지역이다.
하나의 전시실에 진열된 와당들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작품들로 가득차 있다. 전시된 유물들은 시기적으로는 남북조시대 5세기 중반 무렵까지 이 지역을 다스렸던 남조의 유송(劉宋) 시기로부터 당(唐) 시대에 걸쳐있으며, 기종으로는 수막새 및 암막새 기와로부터 마루수막새와 장식기와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들을 접할 수 있다. 근래 기와의 연구는 문양연구 뿐 아니라, 제작기법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를 위함인지 일부 기와들을 뒤집어 전시하여 막새기와와 수키와를 어떻게 접합했는가를 보여준 것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먼저 수막새기와를 대표하는 연꽃무늬 막새의 경우, 삼국시대 고구려의 막새와 백제 막새의 중간 즈음에 위치한다고 생각되는 양식이 주목된다. 고구려의 막새처럼 연판이 마치 벼이삭처럼 생긴 날카로운 표현도 아니고, 그렇다고 백제의 막새처럼 연판이 크고 양감이 풍성한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날카로운 표현이면서도 양감이 풍부하고, 윤곽이 또렷하게 돋을새김이 되어 있는 것은 어쩌면 청주지역이 남조와 북조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발전해왔음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용얼굴무늬 수막새, 북조, 지름 12.3㎝
용얼굴무늬 보주형 마루수막새, 북조, 현존높이 33.8㎝
특히 주목되는 전시유물은 강한 돋을새김으로 용의 얼굴을 조각한 북조의 수막새기와이다. 이 기와는 박락이 심하긴 하지만, 표면에 은색 광택을 띠는 것이 특이한데, 아마도 매우 중요한 건물의 지붕을 장식했던 기와임에 틀림없는 듯 하다. 이것이 유약인지 칠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은빛 안료는 대부분 산화되어 거무죽죽한 색을 내는 것이 일반적인데, 아직도 이런 은빛이 남아있다는 것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이번 전시 도록에 실린 유창종 관장의 논고에 따르면 이러한 수막새 와당은 산동성 청주 지역에서만 주로 발견되는 유물이며, 특히 용화사지(龍華寺址)와 같은 불교사원지에서 발굴되거나 수습되는 일이 많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이를 듣고 보니 용화사지에서 출토된 특이한 형태의 중국 북제시대 불상들 중에서도 이렇게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안료가 미세하게 남아있는 사례가 발견된 적이 있음이 떠올랐다. 이들 안료의 비밀은 무엇일까?
이와 더불어 관람객을 압도하는 유물은 용의 얼굴이 새겨진 보주형 마루수막새 기와이다. 주로 팔작지붕의 내림마루 끝을 장식하는데 쓰였던 것으로 생각되는 이 기와는 불꽃을 뚫고 고개를 내밀어 입을 벌리고 포효하는 용의 얼굴을 보는 듯, 그리고 그 포효하는 소리를 듣는 듯 역동적이다. 우리나라의 사찰에서는 이러한 기와가 사용된 예를 아직까지 보지 못했지만, 내소사, 개암사와 같은 절의 법당 천정에 보이는 충량 끝을 용머리로 장식하는 기원이 사실상 이러한 용 문양 마루수막새 기와에 있음을 짐작케 하는 귀중한 유물이다. 그 외 상당한 크기의 용 얼굴 모양 기와는 남북조시대 청주 지역의 건물들이 얼마나 화려하고 웅장했을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용얼굴무늬 수막새, 수·당, 지름 16.9㎝
당 시대의 기와들은 남북조시대와 달리 상당히 감정을 절제한 느낌이 든다. 더 이상 공격하려는 모습이 아니라, 입을 다물고 정면을 응시하는 듯한 얼굴이다. 이는 상상의 동물이라기 보다는 마치 의젓한 물소의 얼굴을 보는 듯 사실적이고, 나아가 위협보다는 위엄을 느끼게 된다. 또한 전반적으로 얼굴을 앞으로 많이 돌출시켜 사실감을 강조하고 있다. 실제 이 수막새가 장식된 지붕을 본다면, 지붕골 하나하나가 마치 용이 기어내려오는 듯 보였을 것이니 그 위용이 어떠했을까?
기와는 흙으로 빚은 작은 공예품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이것들은 거대한 건축물의 중요한 구성요소이기도 하다. 특히 목조건축에서 지붕을 보호하기 위한 기와들은 점차 이런 장식성을 더하면서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다. 특히 남북조 시대와 같은 오래된 과거의 경우 현존하는 목조건축물이 없다는 점에서 당시의 건축 현황을 짐작하는데는 이와 같은 기와편이 중요한 단서가 된다. 기와의 형태를 통해 지붕의 구조는 어떠했으며, 서까래의 지름은 얼마였으며, 건축을 어떤 개념에서 이해했는가 등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기와란 작지만 거대한 역사를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