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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 서울대학교와 신림동 고시촌, 관악구 冠岳區

草霧 2013. 11. 20. 15:59

 

 

 

 

관악산, 서울대학교와 신림동 고시촌

 

 

관악구 冠岳區

    

 

 

 

Gwanak-gu (Guanyue)

 

 

서울특별시의 남서부에 있는 구

조선시대 경기도 시흥군 동면(東面)이었는데, 1963년 서울시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영등포구 관할하에 있다가 1973년 관악구로 분리·신설되었으며, 1980년 동작구가 분구되었다. 구청 소재지는 봉천동이다. 관악이란 이름은 갓()을 세워놓은 듯한 큰 산()의 모습이란 뜻에서 유래했다.

 

1963년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영등포구로 편입

1968년 영등포구의 직할로 편입

1973년 관악구가 분리 신설

1980년 관악구에서 동작구가 분구 신설

    

 

구면적의 38%를 차지하는 관악산 일대는 대부분 개발제한구역

동쪽으로는 서초구, 서쪽으로는 구로구와 금천구, 남쪽으로는 경기도 안양시와 과천시, 북쪽으로는 동작구와 영등포구에 접해 있다. 구명은 분구될 때, 이 지역의 명산인 관악산(冠岳山)에서 따왔다

 

 

 

 

관악산을 주봉으로 하여 서쪽으로 호압산(虎壓山), 동쪽으로 우면산(牛眠山)이 연결되어 있어 과천시·안양시와 경계를 이룬다. 남태령은 서울과 과천을 잇는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으며, 관악산에서 발원한 도림천은 대부분이 복개되어 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1960년대 상경인구와 철거민의 정착촌 전형을 이루었던 관악구

구 전체가 관악산 북쪽 사면에 위치하며 그 사이에 흐르는 도림천 사이로 주거지가 발달해 있다. 서쪽으로 금천구, 동쪽으로 서초구, 북쪽으로 동작구, 남쪽으로 과천시·안양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관악산을 중심으로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된 지역이 넓으며, 인접한 영등포구·구로구가 대단위 공업지역인 데 비해 공장지역이 형성되지 못하고, 이 지역의 유휴노동력을 대상으로 하는 소규모의 전자·섬유·가발·농약공장 등이 각처에 분산되어 있다. 도심지역에 견줄 만한 큰 상업권이 형성되어 있지는 않으나, 봉천동사거리와 신림동사거리가 서울대학교와 연계되어 상업중심거리로 발전하고 있다.

 

1965년 이후 서울시의 도시재개발사업에 따라 봉천동·신림동을 중심으로 철거민 정착촌이 형성되었고, 그후 다시 재개발사업이 실시되었다. 1975년 관악산 기슭으로 서울대학교가 옮겨옴에 따라 철거민에 의해 심어진 어두운 이미지는 점차 대학가의 활기찬 이미지로 변모했다.

 

서울 도심부와의 거리가 가깝고 교통수단이 잘 정비되어 있으며, 남부순환로와 지하철 2호선의 개통으로 강남·영등포 지역 등과의 연결이 더욱 신속·원활해졌고, 낙성대길·은천길·난곡길 등이 구 내외를 동서남북으로 연결하고 있어 교통의 요충지를 형성하고 있다.

    

 

 

 

옛날 관악산이 벼슬산 으로 불렸다는 전설

먼 옛날 선비들은 관악산을 들어가 공부를 하면 과거에 급제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관악산을 벼슬산 이라 전해진다. 1970년 관악산 자락에 서울대학교가 들어섰다. 신림동을 중심으로 고시생의 발길도 이어졌다. 이 후 관악구는 명실공의 대한민국 최고의 교육도시로 불렸다.

 

한남정맥이 수원 광교산에서 북서쪽으로 갈라져 한강 남쪽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우뚝 솟아오른 산이 관악산이다. 검붉은 바위로 이루어진 관악산은 그 꼭대기가 마치 큰 바위기둥을 세워 놓은 모습으로 보여서 갓 모습의 산이란 뜻의 갓뫼(간뫼)’ 또는 관악(冠岳)’이라고 했다. 관악산은 옛 지도에는 관악으로 많이 나온다. () 자체가 산()을 뜻하기 때문에 옛날에는 그 뒤에 다시 자를 덧붙이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운악·북악·치악 등이 모두 그와 같은 예들이다. 이렇듯 관악의 산이름은 그 형상이 마치 관처럼 생겼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처음의 산이름은 주위 산세에서 으뜸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역사속의 관악산

 

 

 

 

관악산은 옛날부터 개성 송악산(松岳山), 가평 화악산(華岳山), 파주 감악산(紺岳山), 포천 운악산(雲岳山)과 함께 경기도 오악(五岳)의 하나였다. 빼어난 수십개의 봉우리와 바위들이 많고, 오래 된 나무와 온갖 풀이 바위와 어울려서 철따라 변하는 산 모습이 마치 금강산과 같다 하여 소금강(小金剛)’ 또는 서쪽에 있는 금강산이라 하여 서금강(西金剛)’이라고도 한다. 일찍이 고려 숙종 원년(1069) 김위제가 지리도참설에 의해 남경 천도를 건의할 때 삼각산 남쪽을 오덕구(五德丘)라 말하며, 그 남쪽의 관악은 모양이 날카로와 화덕(火德)에 속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관악산은 서울의 조산(朝山)으로 일찍이 역사무대에 등장했으며, 남쪽 봉우리 삼성산 중턱에 있는 삼막사에는 몽고항쟁 때 적장 살리탑을 살해한 기념으로 세웠다는 삼층석탑이 있다. 물론 관악산은 그 이전 한강을 중심으로 백제·고구려·신라 삼국이 쟁탈전을 펼치고 당군(唐軍)을 축출할 때 그 지형상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서쪽 끝 봉우리에 해당하는 호암산에는 삼국시대에 쌓은 석축 산성이 있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조선후기 기록인 연주암지(戀主庵誌)에는 신라 문무왕 17(677) 의상대사가 관악사와 의상대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강감찬과 관악산에 얽힌 전설

관악산은 그 북쪽 기슭 낙성대에서 출생한 고려의 강감찬과 관련한 전설도 많이 지니고 있다. 그가 하늘의 벼락방망이를 없애려 산을 오르다 칡덩굴에 걸려 넘어져 벼락방망이 대신 이 산의 칡을 모두 뿌리째 뽑아 없앴다는 전설도 있고, 작은 체구인 강감찬이지만 몸무게가 몹시 무거워 바위를 오르는 곳마다발자국이 깊게 패었다는 전설도 있다. 이 전설들을 뒷받침해 주듯 관악산에서는 칡덩굴을 별로 볼 수 없고, 곳곳의 바위에 아기 발자국같은 타원형 발자국들이 보인다.

 

 

관악산의 풍수

관악산은 서울 경복궁의 조산 또는 외안산(外案山)이 되는데, 산봉우리의 모양이 불과 같아 풍수적으로 화산(火山)이 된다. 따라서 이 산이 바라보는 서울에 화재가 잘 난다고 믿어 그 불을 누른다는 상징적 의미로 산꼭대기에 못을 파고,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옆 양쪽에 불을 막는다는 상상의 동물인 해태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 태조는 화환(火患)을 막기 위해 무학의 말에 따라 이 산에 연주(戀主원각(圓覺) 두 사찰을 세웠다고 한다. 서울의 숭례문을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과 관악산을 잇는 일직선상에 위치하게 해서 관악산이 덜 보이게 한 것 등은 불기운을 막기 위한 풍수적 의미라고도 한다. 관악산의 한 봉우리인 호암산 능선에는 통일신라 때 판 것으로 추측되는 산상 우물(한우물)도 있는데, 이것도 관악산의 불기운을 누르기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관악산은 풍수로 보아 서울 남쪽에 있는 불산(王都南方之火山)’이다. 조선이 개국되자 왕궁터를 정하는데 관악산을 정면으로 하면 궁성을 위압하여 국가가 평안치 못하다는 무학과, 남쪽에 한강이 있어 무방하다는 정도전의 주장이 양립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나 불산이라는 데는 같은 의견이다. 그래서 불의 산인 관악산의 불기운을 끊는다는 풍수설에 따라 숭례문(崇禮門) 바로 앞(남대문로 51번지로 추정됨)에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팠다. 연못 뿐만 아니라 서울의 모든 성문의 현판이 가로인데 반하여 숭례문은 세로로 되어 있는데, 이는 이 불의 산에서 옮겨 붙을 서울의 화재를 막기 위함이었다. ‘()’는 오행의 ()’가 되고, 또 오방(五方)으로 보면 ()’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은 불꽃이 타오를 상형문자이기에 崇禮는 세로로 세워야 불이 타오를 수 있고, 또 타오르는 불을 막아낼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당동백요지·봉천동마애미륵불·강사상신도비

 

 

 

 

봉천동에 낙성대(落星垈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와 낙성대 유지가 있어 고려시대에 거란군을 물리친 강감찬의 행적을 살필 수 있는 산 교육장이 되고 있다. 또 중구 회현동에 있던 구 벨기에 영사관이 남현동으로 옮겨져 있으며, 신림동 굴참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관악산을 중심으로 자운암(慈雲庵관음사(觀音寺약수암(藥水庵) 등의 암자가 곳곳에 위치한다.

 

 

서울 남현동 요지 - 사적 제247

서울 구 벨기에영사관 - 사적 제254

서울 신림동 굴참나무 - 천연기념물 제271

낙성대 삼층석탑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9

정정공강사상묘역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04

효민공이경직묘역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05

강감찬생가터(낙성대)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

처용무(중요 무형문화재 39)

관음사

자운암

약수암

성주암

강감찬 장군 (9481031)

강홍립 장군 (15601627)

신위선생 (17691845)

정정공 강사상 (15191581)

효민 이경직 (15771640)

관산 조철호 (18901941)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미술관(구 벨기에영사관)

낙성대공원

강감찬장군 사적비문

낙성대 전통야외소극장

낙성대 전통혼례식장

서울특별시 과학전시관

서울대학교

서울대박물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서울대미술관

관악산호수공원

호림박물관

미당 서정주의 집

청룡산 유아숲체험장

낙성대 인헌제

 

관악구에 또 하나의 자랑 바로 계절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 관악산입니다. 예로부터 경기금강 또는 소금강이라고 불렸고 경기오학 중 일 학으로 손 꼽혔던 산이 바로 이 관악산인대요 오늘날에도 수많은 서울시민들이 즐겨 찾는 휴식처로 서울에 명소가 됐습니다. 관악산은 행정구역으로는 관악구 금천구 과천시와 안양시 4개 지역에 걸쳐있는데요 그중 관악산의 59%가 이곳 관악구에 위치하고 있고 이는 관악구 전체면적이 약 38%를 차지합니다. 그래서 관악구를 대표하는 산이라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런 이유로 관악구의 많은 유산들이 관악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관악산 북쪽 중턱 등산로를 따라가다 보면 거대한 절벽바위를 만나게 된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이곳에 미륵불좌상이 새겨져있다. 얼굴에 정면이 보이는 일반 마애불과 달린 봉천동의 마애미륵불은 정면 바위면 에 얼굴에 3/4 보이도록 비스듬히 앉아있다. 불상의 오른편 새겨질 글로 조선 인조 8년인 163년 박산회 부고 시주에 이해 조성됐음을 알 수 있다. 느씬한 체구 타원형의 어깨들은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미래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불 이 불상은 미륵신앙이 유행했던 조선후기 사회상을 대변해주는 대표적인 불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구보적 신앙이 인식이 강하지만 그 옛날 역사 속에서 호곡신앙의 성격이 무엇보다 강했습니다. 당시 불교는 왕들의 고문역할을 하기도 했고 왕권 강화를 위해 쓰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왕들은 국가의 안녕을 위해 절을 세우고 기도를 올리곤 했는데요. 이런 불교의 호국 신앙적 사상이 담긴 절을 비보사찰이라고 부릅니다. 전국에 3,800여개의 비초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요. 그 중 하나가 이 곳 관악산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관악산 주봉에서 북동쪽으로 뻗어있는 마지막 봉오리 신라 제51대 진성여왕 9년에 도선 국사가 창건한 비보사찰인 관음사가 있는 곳이다. 관음사 입구 300여년을 서 있던 느티나무가 먼저 사람들을 반갑니다. 천여 년 동안 기도의 도량으로 사용되던 관음사 이곳은 철종 141963년 철종의 장인인 영원부원군 김무근의 시주에 이해 개축되었다. 1975년 진선당 박종학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다시 중건을 시작 해웅전 용왕덕 종각 즉심시불의 비문석탑을 세우면서 지금의 절이 됐다. 세간의 소리를 듣고 있다가 구제해준다는 관세보살을 모시고 있어 불리게 된 이름 관음사 고려 말 조선 초 문신 변계량은 관음사의 새벽을 이렇게 노래했다.

 

 

 

 

관악산 남녘 청계산 그늘에

절 하나 우뚝 긴 숲 위에 의젓해라

간밤 퍼붓던 비눈 주린 범인 양 으르렁대더니만

해뜰녘 조질대는 그윽한 산새 소리

구름은 창 밑에서 되어나는데

줄사철덩쿨 얼크러졌고

바위 모롱에 길은 구비지고

소나무 노송나무 우거졌어라

해근스님 평안하시려만 멀리 생각나서

밤마다 꿈속에서 산중을 찾고는 하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그전과 같지 않더라

    

 

 

 

관악구 남현동에 주택가 한 켠 지금은 수풀로 우겨져 있는 이곳은 백제시대 토기를 굽던 가마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사당동에 속해 있어 사당동 백제요지로 이름 지어졌다. 19734월 이 곳에서는 백제토기 조각들이 불에 탄 흙과 재에 섞여서 발견됐다 아쉽게도 가마는 파괴된 상태였다. 한강변에서 발견된 유일한 백제토기 가마터 이곳은 붉은 색의 점토가 많고 주변 계곡과 한강수은을 이용할 수 있어 질 그릇 생산지로 적합한 곳이었다. 추정된다. 현재 백제유지는 사유지 밭에 위치하고 있어 발굴되지 않은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2004년 문을 연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인데요. 벨기에영사관으로 잘 알려진 이곳은 현재 서울시가 임대해 미술관으로 쓰고 있습니다. 사실 이 건물은 현대 건축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남현동 남부순환로 4거리 고풍스러운 외형을 자랑하는 지금의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으로 쓰이고 있는 구 벨기에영사관이다. 지하 1층 지상 2층에 구 벨기에영사관은 전면 현관으로 뻗은 중복 도를 중심으로 그 좌우에 방들에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다. 수평아치로 이루어진 층 석재와 붉은 벽돌로 적절히 사용한 외벽 장식 그리고 이오니아식 발코니 석조기둥은 고전적인 건축양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실내에 위치하고 있는 벽난로 역시 이전당시 파손된 조각을 기초로 원형을 재연 복원했다. 고전주의적 건축양식과 기존 건물을 이전 복원해낸 벨기에영사관은 19771122일 사적 제254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8대왕인 현종 때 거란은 고려를 자주 침략해 왔고 강동육주를 내놓으라는 것을 거절하자 현종 9년 거란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이 때 나이 70 한 장군이 병사 20만을 이끌고 귀주에서 거란과 싸워 승리했는데 바로 그분이 강감찬이었습니다. 관악구를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관악구 봉천동에 주택가 사이 강감찬 장군이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낙성대 유지가 있다. 어느 날 밤 한 고을에 큰 별이 떨어졌다 당시 그 고을을 지나가던 중국 사신이 이것을 보고 그 집을 찾았더니 그 집 부인이 아들을 낳았더라. 그가 바로 강감찬이었다. 후세를 이곳을 이름하여 별이 떨이진 곳 낙성대라 하였다. 고려시대 금천이라고 불린 이곳은 그의 출생지임을 나타내기 위해 사리탑식 삼층석탑을 세우고 후세에 전해왔다. 이 후 오랜 시간 이 터에는 잡초만 무성해 장군에 유적임을 알지 못했다. 1973년 이르러서야 낙성대를 건립 강감찬 장군의 탄생지를 성역화 했다. 지금 낙성대 유지에는 2미터 높이에 유허비가 남아 이곳이 강감찬의 생가였으면 기록하고 있다.

     

낙성대는 강감찬장군에 애국충정을 기르고자 낙성대 유지 일대를 공원으로 정비한 곳이다. 이곳이 1974년의 일이었다. 당시 경내에는 5만 그루에 나무가 심어졌고 공원 입구에는 큰 연못을 파서 구름다리를 놓았다. 공원 동쪽에 사당을 지었는데 이 사당이 강감찬장군의 영정이 모셔진 안국사이다. 안국사는 외산 문이 안 국문을 지나 내산문 안에 간출된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짝 지붕 건물이다. 고려시대 대표적인 목조건물인 영주 구석사 무량 수지를 본 따 지은 것이다. 안국사 경내에는 고려시대에 건립된 또 하나의 문화유산이 있습니다. 낙성대 내에 있는 낙성대 3층 석탑이 바로 그것인데요. 원래 이 탑은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봉천동 218번지 지금의 낙성대 유지에 있던 것을 낙성대 공원이 조성 되면서 지금 이곳으로 옮겨져 왔습니다. 낙성대 3층 석탑에 첫 층 탑신 앞면 강감찬 낙성대라는 명문을 발견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강감찬 탑 강강찬 낙성대 탑으로도 불린다. 이 탑은 13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자재는 화강암 높이는 4.48미터다. 이 탑을 연유해서 이 곳 옛 마을을 탑꼴이라고 했고 옛날 사람들은 장군을 성신이라 받들고 그 위업을 추모해왔다. 탑 맞은편에는 사적비를 세워 고려 장군 강감찬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마을의 고목을 선앙신이라고 해서 제를 올리는 신앙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시골마을에서는 오래된 나무에 정성을 올리는 모습을 볼 수가 있는데요. 이런 고목들은 몇 백 년 세월동안 마을에 수호신 역할을 하면서 우리나라에 역사적 부침을 지켜봐 왔을 겁니다. 물론 그 나무에 얽인 전설 하나쯤은 간직하면서 말이죠. 이 곳 관악구 신림동에도 강감찬 장군의 전설을 품고 있는 고목 한 그루가 있습니다. 먼 옛날 고려장군 강감찬은 이곳을 지나가 지니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꽂았다 그리고 천여 년이 지난 지금 그의 지팡이는 큰 그늘을 가진 아름드리나무로 자랐다. 관악구 신림동 굴참나무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다. 아파트 숲 옆에 자리 잡고 있는 신림동 굴착나무는 참나뭇과에 낙엽교목이다. 높이 18미터 둘레 19미터로 수령이 1000년 정도라 전한다. 예전에는 이 나무에 매월 정월대보름 마을에 평화를 비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자라온 신림도 굴착나무는 1982114일 천연기념물 제271호로 지정됐다.

 

18세기 조선후기 문예부흥의 산실 규장각 이 곳은 학문 연구와 도서 수집 민 간행을 통해 조선의 문화를 화려하게 꽃 피었던 곳이다. 또한 조선 22대 국왕 정조가 그의 개혁정치를 준비했던 곳이기도 하다. 정조는 규장각을 왕실도서관에서 정치개혁의 중심지로 그 기능을 확대시켰으며 이곳에서 왕실에서 권위회복을 꿈꾸었다. 그로부터 220여년이 지난 규장각 도서들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1992년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분리 현재 위치로 옮겨줘 독립된 기구로 환생하게 되었다. 규장각은 대표적인 유산을 꼽자면 단연 조선왕조실록입니다. 이 책은 조선 태조에서부터 철종에 이르기 까지 25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책인데요. 이것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역사기록물이며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물입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은 규장각 지하 서고에 그 원형이 유지 보관되고 있다. 이외에도 규장각에는 조선왕조실록을 포함 다섯 종의 국보와 7종의 보물 등 수많은 서적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상설 전시실을 운영 한국문화를 이해하는 산교육에 장이 되고 있다.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 내에 위치하고 있는 서울대박물관 이곳은 역사유물 44백여 점 민속유물 25백여 점 기타 고고학 발굴 유물을 포함 대학 박물관중 소장유물의 질과 양에서 으뜸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이중 발해 유물은 국내 유일에 고고 미술자료로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열녀암 (烈女巖)

관악산 제2광장에서 서울대 등산로를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에 열녀암이라는 바위가 있다. 옛날에 아낙이 남편과 아들, 딸을 낳고 잘 살고 있었는데 이를 시기한 악한이 아낙의 주인 남자를 찾아와서 사냥하러 가자고 유인하여 먼 곳으로 가서 살해하고 돌아와서 열녀를 유혹하여 보았으나 열녀는 유혹을 완강히 물리쳤다. 한편 남편이 살해된 사실을 모르고 아이를 등에 업고 아낙은 관악영산을 근거로 하여 넓죽한 망부대에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도하였다. 이 갸륵한 정성에 감동되어 복두꺼비와 바둑이가 열녀를 다른 짐승으로부터 지켜주는 동안 열녀는 쉬지 않고 기도를 계속하여 지성이면 감천으로 천지인삼덕(天地人三德)이 상응하여 천추에 맺힌 한이 서린 화석으로 변하여 오늘에 이르도록 구전되어 오고 있다.

 

살피재

동작구 상도1동 숭실대학교 밑 로타리에서 봉천동으로 넘어가는 청림동 현대아파트 앞 고개를 살피재라 하였다. 그 연유는 고개는 높고 험한데 백성들의 생활은 고달프고 어려움이 많아 슬프다는 뜻으로 슬피재라 하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음이 변하여 살피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호리목고개

동작구 상도2동 대림아파트에서 살피재로 넘어가다가 오른쪽 성현동 은천초등학교쪽 호리목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호리목고개라 하였다. 호리목 마을은 오늘날 성현동지역으로 지형이 호리병처럼 생겼다 하여 명칭이 붙여졌다.

 

까치고개

남부순환로의 관악구 봉천동과 남현동 사이의 고개를 까치고개 혹은 가추재라 하고, 한자로 작현(鵲峴)이라 한다.예전 이 고개가 숲이 울창하여 까치가 많이 서식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쑥고개

청룡동에서 서림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쑥고개라 한다. 그 명칭 유래는 이 고개가 소나무숲이 울창하여 숯을 굽던 가마가 있어 주민들이 생계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고개이름을 숯고개라 하였는데, 세월이 흘러 쑥고개로 변하여 지금까지 불리어오고 있다.

 

남태령

사당사거리에서 경기도 과천시쪽으로 뻗어서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가 되는 고개를 남태령이라 한다. 이 고개를 남태령으로 부르게 된 연유는 어느 해 정조가 융릉으로 가는 길에 이 고개마루에서 잠시 쉬던 중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고개의 이름을 물었다. 이 때 과천현 이방이 이 고개이름은 본디 여우고개라고 불리어졌으나 그런 요망스런 이름을 신하로서 감히 아뢸 수 없어 삼남대로 상에서 첫번째로 맞이하는 큰 고개이므로 남태령입니다라고 이후부터 부르게 되었다 한다.

 

새실고개

지금의 관악구청에서 서울대학교로 난 고개를 새실고개라 하였다. 고개 가까이에 새실마을이 있었다. 이 길이 바로 관악로의 옛길이 된다.

 

연주암(戀主庵)

연주암은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85-1번지인 관악산 연주봉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관악산을 즐겨 찾는 이들에게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찰이며, 해발 629m의 기암절벽 정상에 위치한 연주대와 함께 관악산의 명소로 손꼽힌다.

 

연주암은 연주암중건기등의 자료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관악산에 의상대를 세우고 수행하였으며, 677년에 그 아래에 관악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대웅전 앞에 있는 3층석탑이 고려 후기 양식을 나타내고 있음을 볼 때, 창건 연도가 꽤 오래된 고찰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연주암이라는 사찰 이름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그 첫 번째는 고려말의 충신이었던 강득룡·서견·남을진 등이 고려가 멸망하자 관악산 의상대에 숨어 살았으며, 여기서 멀리 개성를 바라보며 고려왕조를 그리워했으므로, 연주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조선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과 둘째 효령대군이 태종이 셋째인 충녕대군, 즉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유랑길에 나섰다가, 관악사를 찾아와 수행을 하면서 40칸 규모의 건물을 새로 지어 궁궐이 잘 보이는 현재의 위치로 거처를 옮겼다는 것이다. 이후에 사람들이 두 대군의 심정을 기리는 뜻에서 의상대를 연주대로, 관악사를 연주암으로 각각 부르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연주암에는 현재 대웅전과 삼성각, 그리고 종각 등의 전각과 2동의 요사가 세워져 있는데, 대부분 근대 이후에 들어와 세워진 것이다. 절벽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연주대는 경기도 지방기념물 제20호로 서울 근교에서 보기드문 절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처음 이름은 의상대사가 이 곳에서 수행하였다고 하여 의상대라고 불리었다가, 이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에 연주대로 이름이 바뀌어진 듯 하다.

 

삼막사(三幕寺)

삼막사는 연주암·염불사와 함께 이른바 관악산 3대 사찰로 꼽히고 있으며, 또한 조선시대에 서울 근교 4대 명찰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서울 남쪽 지역에서 가장 이름난 수찰(首刹)이기도 하였다.

 

삼막사는 신라 문무왕 17(677)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신라의 원효·의상 두 고승과 윤필거사(潤筆居士, 또는 尹弼이라고도 함) 등 세 분이 이 곳에 띠집을 엮어 수행처를 마련한 것이 그 시초라는 것이다. 이는 1771년 설암이 작성한 삼성산삼막사사적에 기록되어 있다. 한편, 범우고의 금천조에는 고려말에 지공·나옹·무학이 삼막사를 창건하였으며, 이들의 상이 사찰에 봉안되어 있었다고 되어 있다. 여하튼 이 지역 일대의 다른 사찰에서도 원효·의상·윤필거사, 또는 지공·나옹·무학 등과 얽힌 설화가 널리 전승되고 있다는 사실은 삼성산이라는 역사지리적 배경이 관계된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삼 막사는 창건 후 신라말에 도선국사가 잡초만 무성하던 빈 터에 사찰을 중건하고 관음사라 이름하였다가, 후에 도선국사의 문도들이 삼막사라고 불렀다. 고려 충목왕 4(1348)에 나옹선사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머물렀다. 충정왕 1(1349)에는 중국에 있던 지공스님이 제자인 나옹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찾아온 이후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선풍(禪風)이 크게 일어났다. 조선 태조 때 나옹의 제자인 무학대사가 동서남북의 각 방향에서 서울을 외호하는 4개 사찰을 선정할 때 삼막사는 남쪽에 해당하는 사찰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사찰이 거의 불에 탔으나 대웅전만 소실을 면하였다. 그후 중건·중수가 계속되었으나, 1990년에 화재가 발생하여 대웅전이 전소되고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것으로 평가되던 범종을 비롯하여 불상·불화 등도 모두 소실되었으며, 이후 계속 중창불사를 일으켜 규모를 갖추어 가고 있다.

 

삼막사 경내에서 서북쪽으로 약 700m 거리에 칠성전이 세워져 있으며, 칠성전의 내부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4호인 마애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삼존불은 1763년이라는 조성 연대가 뚜렷하여 조선 후기의 불상 및 조각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또 칠성전 서북편에는 경기도 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된 남근석과 여근석이 있어 출산과 관련된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염불사(念佛寺)

염불사는 삼성산 남쪽 중턱 수십폭의 돌병풍을 둘러친 듯 웅장하고 가파른 암벽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관악산의 명소 가운데 하나이다. 염불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첫째는 고려 태조가 926년에 후백제를 공격하러 가기 위해 삼성산 밑을 지나던 중, 산모퉁이에 오색구름이 영롱하게 서려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사람을 보내 그 연유를 알아보았더니 그곳에 능정대사가 앉아 좌선삼매에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태조는 대사의 법력에 몹시 탄복하여 그곳에 사찰을 세우도록 명하였으니, 절 이름은 안흥사로 이 절이 염불사의 전신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원효·의상·윤필 등의 세 성인이 창건하였다는 설로, 세 분이 염불을 하던 정토였기 때문에 염불암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염불사는 1407년 조선 태종이 풍수지리상 관악의 지맥을 누르기 위해 관악산 내의 사찰을 중건할 때 중창되었다. 그후 여러 전각이 중건되었고 1956년에 이르러 6·25전쟁을 겪으면서 퇴락했던 사찰을 중수하였다. 현재의 염불사는 모두 1910년 이후에 지어진 건물들이다.

 

관음사(觀音寺)

관음사는 관악구 남현동 519-3번지 관악산 북동 기슭, 남태령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예로부터 서울 근교 사찰 가운데 영험있는 관음 기도도량 중의 하나였다. 관음사는 1943년 이후에 쓰여진 봉은사본말사지(奉恩寺本末寺誌)에 의하면 신라 진성여왕 9(895) 도선대사가 세운 비보사찰(裨補寺刹) 중의 하나라고 전한다. 조선 초기에 쓰여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변계량이 관음사의 절경을 읊은 시가 수록되어 있어, 이 무렵까지 관음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영조 때 쓰여진 여지도서에도 관음사가 보인다. 예로부터 관음사 아래에 있는 승방벌이라는 마을과 그 앞에 승방교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관음사는 작은 규모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철종 14(1863) 8월에 행념이 당시 철종의 장인인 영은부원군 김문근의 시주를 받아 다시 고쳐 지었다. 1975년에 중창을 발원하여 7년여 동안 여러 건물을 차례로 중수하였다. 관음사 입구에는 수령 300여년의 느티나무가 있어 지정보호수로 관리되고 있다.

 

자운암(紫雲庵·慈雲庵)

관자운암은 관악구 대학동 194-1번지 관악산 북쪽 기슭 서울대 북쪽 산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서쪽에서 관악산 연주봉을 향하여 올라가는 계곡을 자하동(紫霞洞)이라 한다. 신위는 시내를 따라 백옥같은 언덕으로 가는 길은 익숙하여, 시와 선으로 자운암에서 입정하네"로 시작하는 자운암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호압사(虎壓寺)

호압사는 금천구 시흥동 관악산의 한 봉우리인 호암산의 동쪽 산중턱에 위치해 있다. 이 절은 태종 7(1407)에 태종이 이 절이 있는 삼성산이 호랑이 형국을 하고 있어 과천과 한양에 호랑이로 인한 재난이 많다는 술사의 말을 듣고, 호랑이의 살기를 누르기 위하여 절을 창건하고 호압사라 하였다 한다.

 

호압사 창건에 대해서는 또 다른 설화가 전해진다. 조선 태조가 경복궁을 건설할 때 호랑이 형상에 가까운 한 괴물이 나타나 궁궐 건설을 방해하였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태조에게 한 노인이 나타나 한강 남쪽 관악산의 한 줄기를 가리켜서 바라보니, 바로 호랑이 형상의 한 산봉우리가 한양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 산봉우리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태조가 그 꼬리 부분에 절을 지은 것이 바로 호압사라는 것이다.

 

헌종 7(1841) 4월에 의민이 상궁 남씨와 유씨의 시주를 얻어 법당을 중창하였고, 1935년에 주지 만월이 약사전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약수암(藥水庵)

약수암은 관악구 삼성동 318번지의 관악산 북쪽 기슭에 있다. 약수암은 어느 때인지 모르나 김처사라는 사람이 이곳에 초가를 짓고 수도하던 것이 절의 시작이라 한다. 그후 고종 17(1880)에 명성황후가 법당을 건립하여 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절은 1923년경 화재로 초가집은 전부 타버리고 법당은 절반이나 타 없어진 것을 다시 고쳐 지었다. 현재는 승가대학 부속사찰로 되어 있는 비구니 도량이다.

 

백제요지(百濟窯址)

관악구 남현동(198041일 이전은 사당동 지역) 538-1번지의 관악산 줄기의 한 야산 동쪽 경사면에 위치한 백제요지(가마터)1976년 사적 제247호로 지정되었다. 거의 파괴된 형태로 현재 발굴되지 않은 상태로 보전되고 있다. 밭으로 사용되던 약 200평의 이곳에는 흑토기가 깔려 있었고, 격자문(格子文)과 자리무늬(繩蓆文)의 토기호 파편이 산재되어 있었다. 이 토기편들은 백제 중기후기에 속하는 것으로, 이곳이 한강변에 자리잡은 백제시대의 유일한 가마터였음을 알 수 있었다.

 

낙성대(落星垈)

관악산 북쪽 기슭 관악구 낙성대동 산 48번지에 위치한 낙성대는 고려시대 명재상이었던 강감찬이 태어난 곳으로, 성역화하고 공원으로 조성하여 시민에게 개방하고 있다. 그런데 강감찬의 본래 출생지는 지금 공원터의 동북쪽 약 100m 정도에 위치한 봉천동 218번지 14호와 19호 지역이다. 그가 출생할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고 하여 이 생가터를 낙성대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1973년 당시 박정희대통령이 강감찬 생가 일대를 성역화하여 길이 보전하라는 지시에 따라, 서울시에서 이곳 일대 약 1만평을 물색하여 이듬해 610일에 준공하여 공원으로 지정하였다. 공원의 총 면적은 9,500평이고 성역화 지역은 3,500평이다. 공원 동쪽에 사당을 지어 안국사(安國祠)’라 하고 영정을 모셨으며, 정면에는 외삼문인 안국문과 내삼문을 세웠고, 문안에 낙성대 3층석탑을 옮겨와 안치하였다.

 

특히 조경시설에 역점을 두어 공원 경내에 5만그루의 나무를 식재하고, 공원 입구에 큰 연못을 파서 구름다리를 설치하였으며, 성역화 지역 내에도 낙성교를 두었다. 따라서 광장과 놀이마당 등 휴식처가 마련되고, 관악산 기슭이라는 지리적 위치의 이점과 조화되어 사시사철 찾는 사람이 많아 서울 남부지역의 명소가 되고 있다.

 

낙성대 3층석탑(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은 봉천동 218번지의 본래의 낙성대터에 있던 것을 1964년에 보수하여 1973년에 현재의 낙성대를 정화하고 옮긴 것이다. 원위치에는 높이 2m의 유허비(遺虛碑)를 세워놓고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호로 지정하였다. 관악구에서는 1988년 이후 9·10월이면 낙성대 인헌제라 이름한 제례의식과 민속놀이 등 문화행사를 개최한다. 이 행사는 강감찬 장군의 위업을 기리며, 주민화합과 향토애를 고취시키기 위한 축제이다.

 

봉천동 마애미륵불

관악산 북쪽 중턱의 상봉약수터에 있는 서쪽으로 향하여 우뚝 솟은 바위에 조선시대의 불상으로는 보기 드문 걸작품인 마애미륵불이 새겨져 있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9호로, 전체높이는 153cm이며 재료는 화강석이다.

 

불상의 오른쪽 두광 높이에 彌勒尊佛’ 4자가 크게 새겨져 있고, 그 옆에 崇禎三年庚午四月日’ 9자와, 그 밑 연꽃자리 가까이에 大施主 朴山會兩主라는 글자가 3자와 5자의 2줄로 새겨져 있다. 이 명문이 있어서 이 불상이 미륵보살이며, 인조 8(1630)에 이룩된 것을 알 수 있다.

 

삼성산 천주교성지

관악구 삼성동 산 57-14 장군봉 북쪽 기슭에 위치한 삼성산 성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최초의 서양인 선교사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땅 신부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다.

 

이들 세 성인은 1839년 기해교난(己亥敎難) 때 새남터에서 효수형으로 처형된 후 4년동안 노고산에 묻혔다가 1843년 삼성산으로 이장된 후 1901년까지 약 60년동안 이곳에 묻혀있었다. 다시 190111월에는 명동 주교좌 성당에 유해가 안치되었다. 그후 1970년 천주교회측에 의해 이곳이 성인들의 묘지였음이 확인되었고, 1989910일 이들의 유해를 이곳에 다시 옮겨 모셨다. 바로 옆에 질 좋은 약수가 항시 넘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곳이다.

 

 

 

 

 

법정동 기준 3개동, 행정동 기준은 21

봉천(奉天남현(南峴신림(新林) 3개동

낙성대동 · 난곡동 · 난향동 · 남현동 · 대학동 · 미성동 · 보라매동 · 삼성동 · 서림동 · 서원동 · 성현동 · 신림동 · 신사동 · 신원동 · 은천동 · 인헌동 · 조원동 · 중앙동 · 청룡동 · 청림동 · 행운동

   

 

 

 

 

 

봉천동

봉천은 이 마을이 관악산 북쪽 기슭에 있어서 관악산이 험하고 높아 마치 하늘을 받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데서 이름을 삼았다고 한다. 현재 9개의 행정동으로 되어있다.

 

당곡

당곡은 봉천동 714번지 일대의 자연부락으로 보라매동 중심에서 볼 때 북쪽에 있으며 지금의 당곡초등학교와 당곡시장 뒤편마을이다. 당곡이란 이름은 옛날 이곳이 골짜기였으며 제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해서 유래된 말이다.

 

화다리

화다리마을은 은천동에 위치한 마을로 당곡마을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맨 처음에는 활다리 마을로 불리워지다가 화다리로 변했다. 옛날 강감찬 장군이 뚝방에서 봉천천을 건너 장군봉 쪽으로 다리를 놓고 활을 쏘았던 곳으로, 마을 뒷산을 궁교산이라고 함은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호리목

호리목은 성현동에서 은천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 지금의 현대시장 일대이다. 지형이 호리병처럼 오목하게 생긴 데서 이름이며 일명 호리목이라고도 하였다. 이곳에서 상도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을 능고개라 하였는데 상도동으로 넘어가자마자 양녕대군묘가 있기 때문이다.

 

박재궁

박재궁은 지금의 중앙동 봉천 중앙시장 부근에 있던 마을이다. 재궁이 있었다 하여 박지궁 또는 박자궁이라고도 한다. ‘재궁은 지방의 분묘나 무덤을 지키려고 그 옆에 지은 집을 가리킨다. 박재궁 뒷산을 넘어 상도동으로 넘어 가는 고개를 어리골 고개라 불렀으며, 관악로 고개는 살피재 고개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인적이 드물고 해가 지면 도적들이 행패때문에 여러 사람이 모여 살피면서 넘어야 한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막골

산막골은 현재 봉촌11동에 해당되었으며 산골로 막을 두른 것처럼 아늑한 골짜기였다. 이곳 산막골 골짜기에는 약수터가 많이 있어 1970년대까지도 인근 주민들의 식수와 약수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오염으로 찾아볼 수 없다. 이곳에서 낙성대 쪽으로 안산이라는 동산이 있었는데 현재 인헌초등학교 자리이다.

 

독적골

독적골은 현재 행운동에 있는 원당초등학교 부근의 자연부락으로 예부터 이곳에서 옹기를 만들어 쌓아 두고 팔았다는 데서 옹적골이라는 마을 이름이 변해서 생긴 명칭이다. 독적골 마을 북쪽으로 넘어가는 길을 지루레라 불렀으며 이 길을 따라 살피재를 넘으면 상도동이다. 현재 독적골 앞을 지나 탑골을 거쳐 서울대 후문을 통해 관악산으로 올라가는 도로이다.

 

새실

새실은 지금의 관악구청 일대인 낙성대동 1597번지 인근에 있던 마을이다 새실이란 이름은 청룡종합시장 부근에 이미 있었던 청능말보다 새실이 늦게 생긴데서 붙여진 것이라고도 하고, 또한 마을 입구에 3백년이 넘는 느티 나무와 향나무가 있었는데 예전부터 이 나무들이 참새들의 근거지로 새들의 보금자리가 된 것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원당

원당은 행운동 낙성대역에서 장미원아파트를 지나 사당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부근의 마을이며 원댕이라고 하였다. 예전에 사당이 많이 있었다 하여 사당동이라 칭하였고, 원당은 사당 윗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

 

탑골

탑골은 현재 낙성대동 218번지 일대의 자연부락으로 약30여 호의 민가가 있었다. 이 마을은 강감찬 장군의 출생지이다. 지금은 낙성대라 하지만 고려시대부터 삼층석탑이 이곳에 있어 예로부터 탑골이라 불려왔다.

 

안골

안골마을은 낙성대동 1608번지 일대이며, 골짜기 안이 분지형으로 바람 한점없이 아늑한 골짜기라는 데서 이름 붙여진 자연부락으로 농가5호가 있었다 한다.

 

청능말

청능마을은 현재 청룡동 1574번지부터 1584번지 일대의 청능산 밑에 있는 자연부락으로 지금의 청룡종합시장 부근에 해당한다. 옛날에 능이 있었다고 하여, 강감찬 장군이 말을 타고 이 마을 뒷산을 지나다가 유달리 푸른 것을 보고 능자리로 좋은 곳이라 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국사봉

국사봉은 보라매동과 동작구 상도동에 접해있는 궁교산(해발179m)으로, 여기에는 이름에 얽힌 두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양녕대군이 이 산에 올라 멀리 경복궁을 바라보며 나라와 세종의 일을 걱정했다고 해서 붙여진 국사봉(國思峰), 조선을 창건하는데 기여한 무학대사가 사자암이라는 절을 궁교산에 지었는데, 그를 국사로 보고 사자암의 뒷산을 국사봉(國師峰)이라고 불렀다는 견해가 있는데, 무학대사는 왕사였지 국사였다는 기록이 없어 후자(國師峰)보다는 전자(國思峰)가 더 타당하다고 적고 있다.(참고자료:서울의 산1997,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장군봉

청룡동과 서원동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118.5m의 산인데, 강감찬 장군이 활쏘기를 하던 곳이라고 하며, 또 어느 장군이 거처하던 곳이라고도 하여 장군봉이라 불리어오고 있다.

 

 

남현동

원래는 사당동이었지만 관악구에서 동작구를 분할하면서 사당1동의 관악지역을 남현동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남쪽의 고개마을이라는 뜻으로 고개는 남태령을 가리키는 말이다.

 

남성동

남성동은 지금의 관악구 남현동과 동작구 사당동을 관할하던 행정동 이름이다. 이 지역이 196311일 시흥군 신동면에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편입되면서 신동출장소 남성동사무소가 설치되었다가 1970518일 사당1동과 사당2동으로 분동되면서 동이름이 없어졌다.

 

승방벌(심방뜰)

남현동 관음사 아래에 있던 마을 이름 또는 들이름이라고 한다. 이곳 심방뜰의 원래 이름은 승방평으로 승방뜰 또는 심방뜰이라 불렀고, 승려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살피재

동작구 상도1동 숭실대학교 밑 로타리에서 봉천동으로 넘어가는 청림동 현대아파트 앞 고개를 살피재라 하였다. 그 연유는 고개는 높고 험한데 백성들의 생활은 고달프고 어려움이 많아 슬프다는 뜻으로 슬피재라 하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음이 변하여 살피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호리목고개

동작구 상도2동 대림아파트에서 살피재로 넘어가다가 오른쪽 성현동 은천초등학교쪽 호리목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호리목고개라 하였다. 호리목 마을은 오늘날 성현동지역으로 지형이 호리병처럼 생겼다 하여 명칭이 붙여졌다.

 

까치고개

남부순환로의 관악구 봉천동과 남현동 사이의 고개를 까치고개 혹은 가추재라 하고, 한자로 작현(鵲峴)이라 한다.예전 이 고개가 숲이 울창하여 까치가 많이 서식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쑥고개

청룡동에서 서림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쑥고개라 한다. 그 명칭 유래는 이 고개가 소나무숲이 울창하여 숯을 굽던 가마가 있어 주민들이 생계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고개이름을 숯고개라 하였는데, 세월이 흘러 쑥고개로 변하여 지금까지 불리어오고 있다.

 

남태령

사당사거리에서 경기도 과천시쪽으로 뻗어서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가 되는 고개를 남태령이라 한다. 이 고개를 남태령으로 부르게 된 연유는 어느 해 정조가 융릉으로 가는 길에 이 고개마루에서 잠시 쉬던 중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고개의 이름을 물었다. 이 때 과천현 이방이 이 고개이름은 본디 여우고개라고 불리어졌으나 그런 요망스런 이름을 신하로서 감히 아뢸 수 없어 삼남대로 상에서 첫번째로 맞이하는 큰 고개이므로 남태령입니다라고 이후부터 부르게 되었다 한다.

 

새실고개

지금의 관악구청에서 서울대학교로 난 고개를 새실고개라 하였다. 고개 가까이에 새실마을이 있었다. 이 길이 바로 관악로의 옛길이 된다.

 

 

신림동

본시 서원리, 신림리, 난곡리로 나뉘어졌으나, 1911427일 신림리로 통합되었으며, 196311일자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신림동으로 되었다. 신림리란 마을은 관악산 기슭이어서 그 일대에 숲이 무성하다 하여 생긴 이름으로 현재 11개의 행정동으로 되어 있다.

 

복은말

보그니마을이라고도 하는데 현재 서림동 118번지 일대 지금의 신성초등학교 뒤편을 말한다. ‘복은말이란 이름은 옛날 이 마을에 돈많은 부자들이 살았다 하여 복이 숨어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원신림

신림동이라고 하는 고유명사의 동명은 이곳을 맨 처음 신림이라 칭한 삼성동을 일컫는 말이었다. 원신림은 삼성동에서 신원동으로 넘어가는 길 아래에 있던 마을이다. 1911년 신림리, 서원리, 난곡리가 통합되자 이곳을 포함한 일대를 양산리라 부르기도 하였다.

 

서원동

서원동은 서원말. 뜻은 서원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서원이라는 이름은 고려시대에 서원저이라는 작은 청자가 있었는데 강감찬 장군이 송도에 왕래할 때 자주 머물렀다고 하는데서 연유한다.

 

난곡

난곡은 지금까지도 널리 불리는 옛 지명이지만 그 유래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조선시대 명장 강홍립 장군이 유배되어 은거할 때 난초를 많이 길렀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은정골

은정골은 관악산 입구 주차장에서 성불암을 지나 관악산으로 오르는 골짜기이다. 옛날에 은이 나왔다 하여 은정골이라 한다. 채광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대략 대학동 208번지의 훨씬 위다. 현재는 금호아파트 및 건영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다.

 

합실

삼성동 335,336 번지 주변일대로 지형이 큰조개모양을 하고 있어 합곡이라 적었던 것을 소리와 뜻을 옮겨 합실이라 하였다.

 

자하동

자하동은 대학동 서울대학교 정문 동쪽 운동장 부근에 있던 마을로 서울대학교 종합 캠퍼스 공사때 마을 위쪽에 있던 107만평의 관악골프장과 함께 서울대학교 부지에 편입되었다. 이곳은 의성 김씨가 수백년간 터전을 닦아온 곳으로 조선조 말 시..화 로 이름을 떨친 신위의 아호인 자하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관악산 둘레길이란?

15km(6~7시간 소요)

까치산생태육교 ~ 낙성대공원 ~ 관악구청~ 관악산공원 ~ 돌산 ~ 삼성산성지 ~ 난우공원 ~ 신림근린공원

 

무장애 숲길 등반코스

 

1코스 : 880m : 관악산 제2광장 화장실 책읽는 쉼터(진입광장) 잣나무쉼터 순환형 숲길(1구간) 바위쉼터 등반형 숲길 전망쉼터

 

2코스 : 1,020m : 2광장 화장실 책읽는 쉼터(진입광장) 잣나무쉼터 순환형 숲길(2구간) 도토리쉼터 바위쉼터 등반형 숲길 전망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