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세상 쳐다보기

금요일은 反 미쓰비시 데이

草霧 2013. 11. 20. 13:14

 

 

 

 

 

 

첨부파일 불매선언운동선언지.pdf

 

첨부파일 2013겨울방학특강001.jpg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상급학교에도 갈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양금덕(현재 84세. 광주광역시 거주) 할머니가 당시 일본인 교사와 교장의 거짓말에 의해 일본으로 강제동원 된 것은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5월경. 패색이 짙어진 일제는 전시 노동력 조달을 위해 13세, 14세의 어린 초등학교 또래 소녀들까지 그 희생양으로 삼았다.

 

 당시 전남 나주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던 양금덕 할머니는 일본인 교장과 담임선생으로부터 “일본에 가면 상급학교에도 진학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며 일본에 갈 것을 권유받았다. 배고픈 시절,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는 제안은 배움에 목마른 어린 소녀들의 호감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동원 대상은 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거나, 막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사 일을 돕고 있던 13~15세의 어린 소녀들이었다. 심지어 12살 어린 아이들까지 있었다. 목적은 일제의 전시 노동력 조달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원활한 의사소통이 필수적이었다. 일찍부터 일본어 교육을 강요받은 초등학교 재학생이나 초등학교 학력을 이수한 사람들이 적절했던 것이다.

 

 목포, 나주, 광주, 순천, 여수 등 전남지역 5개 도시에서 동원된 이들은 여수에서 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뒤, 이어 대표적 공업도시인 나고야의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에 배치됐다. 그리고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굶주림과 혹독한 감시 속에 하루 8~10시간 동안의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나고야는 일본 최대의 군수공장이 밀집해 있던 지역으로, 미쓰비시중공업은 당시 군용 항공기(정찰기)를 이곳에서 제작하고 있었다. 양 할머니와 같이, 나고야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로 동원된 사람은 광주전남에서 150여명으로, 당시 충남지역에서 동원된 사람 150여명을 포함, 약 300여명에 가까운 어린 소녀들이 인력수탈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군수공장에서의 노동은 혹독했다. 불과 13~15세의 어린 소녀들에게 육중한 선반, 비행기 기체 등이 몸에 맞을 리 없었다. 키가 닿지 않아 사과궤짝을 놓고 그 위에 위태롭게 서서 페인트칠을 해야 했으며, 찬 겨울 장갑하나 없이 맨손으로 철판을 만지고 찬물에 부품을 씻느라 손등은 퉁퉁 붓고 갈라져 있었다. 열악한 작업 환경과 강요된 할당량 때문에 그만큼 부상도 많았다. 김성주(84. 경기도 안양시) 할머니의 경우 선반 작업 중 사고로 손가락이 잘리기도 했다.

 

 특히 배고픔이 문제였다. 반찬이라고는 된장국이나 단무지 한 쪽이 전부였다. 허기를 견디다 못한 소녀들은 물로 헛배를 채우기도 했고, 심지어 길가에 이름 모를 잡초를 뜯어 허기를 달래기까지 했다. 거기다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심해 자칫하면 구타의 대상이 되었다.

 

 1944년 12월 7일 정오 무렵, 도난카이(東南海) 대지진이 나고야 일대를 강타했다. 나고야 미쓰비시 공장도 예외가 아니었고, 일본인을 포함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런 가운데 전남 출신 6명의 소녀들이 건물더미에 깔려 현장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1945년으로 접어들면서 패전의 기운이 일본 본토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어린 소녀들은 연합군의 폭격을 피해 다니느라 또 다른 고역을 겪어야 했다. B-29 소이탄 공격을 피하기 위해 한밤중에 들로 산으로 도피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공포에 떨며 밤새 눈 한번 부치지 못한 몸들이었지만 다음날은 여지없이 작업장으로 나서야 했다.

 

 약속했던 임금은 지급되지 않았다. ‘다달이 적금을 해서 나중에 지급하겠다’는 식이었다. 일본이 패망할 무렵에는 ‘조선에 돌아가 있으면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 모두 거짓이었다.

 

일제에 의해 정신대로 끌려나온 전라북도 지역의 어린 소녀들이

'전라북도여자근로정신대'라는 깃발을 앞세우고 기념사진을 찍은 모습~

 

1944년 6월경 나고야 미쓰비시 중공업 숙소에 도착한 여자근로정신대의 모습

 

광주전남,충남지역에서 동원된 어린 소녀들이 미쓰비시 중공업 

기숙사 사감으로부터 지시사항을 듣고 있는 모습.

뒤를 돌아보고 있는 소녀의 앳된 모습이 눈길을 끈다.

 

 

군대처럼 중대 소대 분대로 편제되어

여자항공대(미쓰비시 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 소속임을 알 수 있음) 깃발을 들고 

나고야의 아쯔타 신궁으로 일본인 인솔자에 의해 신사참배하러 가는 모습        

                                                              

 

조선여자근로정신대원들의 신사참배 모습

 

 

태평양전쟁의 말기인 1944~45년 사이, 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거나 13~15세의 어린 나이에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시켜준다”는 회유에 의해 강제동원 돼, 미쓰비시중공업 등 군수회사 등에서 강제노역 피해를 당한 피해자들말한다

 

이들은 광복을 맞을 때까지 굶주림과 감시 속에서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으나, 광복 68년이 되도록 임금은 물론 그 어떠한 사죄나 배상도 받아내지 못하고 있다.

 

특히, 광복 후 고국에 돌아왔지만 일본에 다녀왔다는 이유만으로 ‘군 위안부’로 오인받아 사회적 편견과 멸시를 받았다. 많은 경우 결혼 후에도 파혼의 아픔을 경험하거나 아직도 주위에 차가운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등 정신적, 육체적 고통, 생활고의 문제로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고 왔고 지금도 겪고 있다.

 

그동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국제적 관심은 조금씩 확대되어 갔지만 그에 비해,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에 대해서는 사회적 관심은커녕 그 존재 자체에 대해 관심을 둬 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 등 전범기업을 상대로 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명예회복 투쟁, 특히 후생연금 탈퇴수당금 ‘99엔’(한화 약 1,200원) 지급 파문을 계기로 최근에서야 ‘근로정신대’ 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1944년 12월 도난카이 지진으로 희생된 분들의 추모비.

조선여자근로정신대로 동원되어 나고야 미쓰비시 군항공기제작소에서 강제노역하던중

당시 지진으로 희생된 우리나라 전남출신 6명의 이름을

일본의 '나고야근로정신대소송지원회' 회원들이 찾아 같이 기록하였다. (1988년)

 

 

 

일본, '징용 조선소' 세계유산 추천 강행

 

 
한국전쟁 특수 등으로 일본 전후 부흥기를 맞은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 1955년 10월9일 촬영. <<연합뉴스DB>>

 

한국 반발에도 추진…'인류보편적 가치' 논란 예상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일본이 한국의 반대에도 조선인 징용자의 한(恨)이 서린 근대화 시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하기로 했다.

일본 정부가 세계유산조약과 관련한 정부기관 연락회의에서 기타큐슈(北九州)시의 야하타(八幡) 제철소 등 메이지(明治) 시대 일본 산업혁명 유산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하기로 20일 공식 결정했다고 일본 언론이 보도했다.

나가사키 조선소처럼 아직 가동 중인 시설과 미쓰비시 해저 탄광이 있던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 등 8개 현의 28개 시설·유적을 추천하기로 했다. 일본은 이달 중에 잠정 추천서를 제출할 예정이며 2015년에 세계유산위원회가 등록 여부를 심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