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도시의 구석진 곳

서원에 대한 이해

草霧 2013. 11. 6. 19:00

 

 

서원에 대한 이해

    

 

 

 

성리학을 공부했던 중등교육기관으로 서원과 향교가 있었습니다. 서원은 우리나라의 선현을 배향하고 유생들을 가르치던 조선의 대표적인 사학교육기관입니다. 종종 서원과 향교를 구분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서원은 선현을 모시고 유생들을 교육시킨다는 점에서 성균관, 향교와 성격이 같습니다, 그러나 관학이 아닌 사학이라는 점과, 중국 선현은 배향하지 않고 우리나라의 선현만을 배향했다는 점에서 성균관, 향교와 크게 다릅니다.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제향을 위하여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자치 운영기구였습니다.

 

서원의 주요 교육은 성리학 본래의 성격과 같이 자신을 도덕적으로 완성시키기 위한 것이며 가장 중요한 목표였습니다. 이를 위해 서원의 원생들은 소학부터 읽기 시작하여 대학」「논어」「맹자」「중용」「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등의 순서로 배웠다. 이렇게 하여 윤리학적 체계를 갖춘 다음 서원에 따라서 가례」「심경」「근사록」「사기등을 읽어 뜻을 넓히는 교육을 하였습니다.

 

서원의 효시는 중종 38(1543) 풍기 군수 주세붕이 고려 말의 학자 안향을 배향하고 유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설립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입니다.

 

그 뒤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와서 이를 보고 중국 백록동 고사(古事)처럼 조정에서 사액(賜額)과 전토(田土)를 주도록 건의함에 따라 명종은 1550(명종 5) 이를 권장하는 뜻에서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친필로 쓴 액(:간판)과 서적을 하사하고 학전(學田노비를 주면서 이들 토지와 노비에 대한 면세·면역(免役)의 특권을 내려 이것이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이후 서원의 설치는 전국에 미쳐 명종 이전에 설립된 것이 29, 선조 때는 124개에 이르렀고, 당쟁이 극심했던 숙종 때 설치한 것만 300여 개소에 이르러 1도에 8090개의 서원이 세워졌으며, 국가 공인의 절차인 사액의 청원에 따라 사액을 내린 서원도 늘어나 숙종 때만 해도 130여 개소에 이르렀습니다.

 

초기의 서원은 인재를 키우고 선현·향현을 제사지내며 유교적 향촌 질서를 유지, 시정(時政)을 비판하는 사림의 공론을 형성하는 구실을 하는 등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하였으나 증설되어감에 따라 혈연·지연관계나 학벌·사제·당파 관계 등과 연결되어 지방 양반층의 이익집단화하는 경향을 띠게 되고 사액서원의 경우 부속된 토지는 면세되고, 노비는 면역되기 때문에 양민의 투탁(投託)을 유인하여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서원은 양민이 원노(院奴)가 되어 군역을 기피하는 곳이 되어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군정의 부족을 초래하였고 불량유생의 협잡소굴이 되는가 하면 서원세력을 배경으로 수령을 좌우하는 등 작폐도 많았습니다.

 

또한 면세의 특권을 남용한 서원전의 증가로 국고 수입을 감퇴시켰으며, 유생은 관학인 향교를 외면, 서원에 들어가 붕당에 가담하여 당쟁에 빠져 향교의 쇠퇴를 가속시켰습니다.

 

서원의 폐단에 대한 논란은 인조 이후 꾸준히 있었으나 특권 계급의 복잡한 이해 관계 때문에 손을 대지 못하고 1657(효종 8) 서필원은 서원의 폐단을 논하다가 파직되기도 하였습니다. 효종·숙종 때는 사액에 대한 통제를 가하고 누설자를 처벌하는 규정까지 두었으나 잦은 정권 교체로 오히려 증설되었습니다.

 

1738(영조 14) 안동 김상헌의 원향(院享)을 철폐한 것을 시발로 대대적인 서원 정비에 들어가 200여 개소를 철폐하였으나 그래도 700여 개소나 남아 있었으며 이 중 송시열의 원향이 36개소나 되어 가장 많았고, 유명한 것으로는 도산서원·송악서원·화양서원·만동묘 등이 있었습니다.

 

1864(고종 1)에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서원에 대한 일체의 특권을 철폐하여, 서원의 설치를 엄금하고 그 이듬해 5월에는 대표적인 서원인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폐쇄한 이후 적극적으로 서원의 정비를 단행하여, 사표(師表)가 될 만한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습니다.

 

대부분 서원의 공간구조는 향교와 비슷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서원의 건물배치는 유생들의 교육 및 기거와 관련된 공간이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공간보다 앞에 위치했습니다. , 서원건물 배치의 전형은 전교당, 홍교당 등으로 불리는 강당을 중심에 두고, 그 양옆에 동재와 서재가 서로 마주보고, 강당 뒤에 선현의 위패를 봉안하는 사우(祠宇)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서원(書院)의 개황(槪況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는 관학(官學)인 국자감(國子監), 성균관(成均館), 향교(鄕校)와 그리고 사학(私學)인 경당(), 서재(書齋, 書室, 書堂)2원적 조직으로 발달하여 왔으니 태학과 향교에는 문묘(文廟 : 공자(孔子)를 정위(正位)에 모시고, 4(四聖)을 배향(配享)하며 선현(先賢)을 종향(從享)하고 선유(先儒)를 종사(從祀)하여 석전대제(釋奠大祭)를 거행하는 전무(殿)와 재(:재학생의 기숙사) 그리고 강당은 모두 갖추었지만 사학기관에는 문묘가 없이 겨우 재()와 강당만 갖추었는데 조선왕조시대에 서울에 설치했던 사부학당(四部學堂)은 관학기구였지만 문묘는 설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조선왕조 중엽부터 서원(書院)이라는 사설교육기관이 생겨났으니 지역에 연고가 있는 어진 선비를 추모하는 사우(祠宇)를 세우고, 또한 재()와 강당을 지어 학생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이와같이 사()와 재()가 갖추어 있는 곳을 서원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서원은 사()와 합쳐 사원(祠院)이라고도 불렀으며 지방유림들이 힘을 합쳐서 세우고 스스로 서원전(書院田)도 마련하였기 때문에 서재나 서당에 비교해서 상당히 그 규모가 컸으며 또한 임금이 사액한 서원은 나라에서 재학생의 학비를 보조하여 노비와 책과 토지를 주었으므로 국가공인의 교육기관이 되어 성균관(成均館)에 종속하게 되었다.

 

서원이라는 말의 유래는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 13(서기725)에 경전(經典)과 서적을 모아서 소장하고 정리편찬할 목적으로 처음 세웠으니 여정전서원(麗正殿書院), 집현전서원(集賢殿書院)이 그것이다. 그러나 당나라 때에는 서적만 수집 편찬했는데 송()나라에 와서 조성(曺誠)이 서원을 세우니 조정에서 응천서원(應天書院)이라고 사명(賜名)함에 이르러 주자(朱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재건하고 학생을 가르쳤기 때문에 서원이 유명하게 되어서 이후 도학자(道學者)들이 많은 서원을 세워 학생을 교육했다.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는 중종(中宗) 38(서기1543)에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이 고려시대의 명유(名儒) 안향(安珦, 安裕)선생이 옛날에 거처하던 곳인 백운동(白雲洞)에 사원(祠院)을 세우고, 주자(朱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채용하여 학생들에게 독서와 강학(講學)의 편의를 주며 그 이듬해 백운동서원이라고 명명한데서 비롯하였다. 그리고 명종(明宗) 5(서기1550)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이 풍기군수로 와서 임금에게 건의하여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사액(賜額)과 함께 노비, , 결전(結田) 등을 받았고, 또한 서원의 노비와 결전에는 면역과 면세의 특전까지 얻어 사액서원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정의 서원장려정책에 고무되어 각 지역의 유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서원을 세웠으니 명종 이전에 설립된 것이 29개소, 선조(宣祖)때에는 124개소로 늘었으며 숙종(肅宗)시대에는 1개 도()80~90개소를 헤아렸다. 이에 인조(仁祖) 22(서기1644)에 서원설립을 정부의 허가제로 만들어 서원을 새로 설립하는 곳은 미리 예조(禮曺)에 보고하여 조정에서 논의한 다음에 허락을 받아 세우게 하였고, 또한 서원의 원장(院長)은 관찰사가 선임토록 하였으며 서원의 기숙생 정원도 20명 내외로 한정하였다.

 

숙종(肅宗) 2년에는 서원의 기부금품 모집을 금지시켰고, 숙종 36년에는 서원의 하재생(下齋生)의 정원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한 유현(儒賢)의 서원은 30, 사액서원은 20, 사액을 받지 못한 서원은 15명으로 한정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 서원의 첩설(疊設)을 엄중히 금지하였다.

 

영조(英祖) 14(서기1738)에 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 사사롭게 건립한 사우(祠宇)와 서원 및 묘()를 모두 철거하였다. 그리하여 정조(正祖)새대에 650개소의 서원이 번창했는데 전국 360여개소의 향교에 비하여 수적으로 월등할 뿐만 아니라 서원의 학생에게도 과거에 응시하는 자격을 주었기 때문에 서원의 인기가 대단하여 현실정치를 비판하고 공론(公論)을 주도하는 중심으로 떠올랐으니 그 가운데 유명한 서원은 도봉서원(道峯書院), 화양서원(華陽書院)이었다.

 

그리하여 대원군이 섭정하자 고종(高宗) 8(서기1871)에 서원철폐령(書院徹廢令)을 반포하여 전국에 사액서원(賜額書院) 47개소만 남기고 도봉서원, 화양서원, 만동묘(萬東廟)를 비롯하여 600여소의 사원을 훼철(毁撤)하니 윤리도덕의 산실로 300여년간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건설을 주도했던 사설교육기관이 크게 위축되었으며 충효절의(忠孝節義)와 예의염치(禮義廉恥)를 숭상하는 산림학자양반문화(山林學者兩班文化)가 점점 몰락하게 되었다.

 

애당초 대원군이 서원을 정리한 목적은 관학(官學)을 외면하고 사학(私學)을 선호하는 당시의 풍조를 우려하여 서원을 없애므로써 학생들을 관학(官學)으로 유도하려고 했지만 서원의 철폐로 식어버린 교육열은 관학까지 더욱 멀리하여 학교가 피폐하고 교육이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으니 인위적인 교육개혁의 위험성을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시에 남겨둔 사원(祠院)은 경기도에 12개 사원이었으니 개성에 숭양서원(崧陽書院), 여주에 대로사(大老祠), 포천에 용연서원(龍淵書院), 과천에 노강서원(鷺江書院), 김포의 우저서원(牛渚書院), 파주에 파산서원(坡山書院), 양성에 덕봉서원(德峰書院), 용인에 심곡서원(深谷書院), 과천에 사충서원(四忠書院), 강화에 충열사(忠烈祠), 광주에 현절사(顯節祠), 고양에 기공사(紀功祠)이었다.

 

충청도에는 5개 사원이었으니 연산에 둔암서원(遯巖書院), 충주에 충열사(忠烈祠), 청주에 표충사(表忠祠), 홍산의 창열사(彰烈祠), 노성에 노강서원(魯崗書院)이었고, 전라도에는 3개 사원이었으니 태인에 무성서원(武城書院), 장성에 필암서원(筆巖書院), 광주에 포충사(褒忠祠)이었다.

 

경상도에는 13개 사원이었으니 순흥에 소수서원(紹修書院), 현풍에 도동서원(道東書院), 선산에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에 남계서원(藍溪書院), 경주에 서악서원(西嶽書院)과 옥산서원(玉山書院), 예안에 도산서원(陶山書院), 안동에 흥암서원(興巖書院)과 병산서원(屛山書院), 동래에 충열사(忠烈祠), 고성에 충열사(忠烈祠), 거창에 포충사(褒忠祠), 진주에 창열사(彰烈祠)이었다.

 

강원도에는 3개 사원이었으니 금화에 충열사(忠烈祠), 철원에 포충사(褒忠祠), 영월에 창절사(彰節祠)이었고, 황해도에는 4개 사원이었으니 평산에 태사사(太師祠), 해주에 청성묘(淸聖廟), 장연에 봉양서원(鳳陽書院),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이었다.

 

평안도에는 5개 사원이었으니 영변에 삼충사(三忠祠), 정주에 표절사(俵節祠), 평양에 무열사(武烈祠), 영변에 수충사(酬忠祠), 안주에 충민사(忠愍祠)이었고 함경도에는 1개 서원이었으니 노덕서원(老德書院)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원들도 왜적치하에 과거제도가 없어지고 신교육제도가 등장함에 따라 사양길로 접어들었고, 을유광복(乙酉光復) 이후에도 강토가 분단되고 동족상잔의 6.25동란을 거치면서 교육기능은 완전히 사라졌으며 겨우 봄 가을의 향사(享祀)만 유지해 오다가 근래에는 문화재 보존의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보수공사를 하며 성역화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리하여 소수서원과 도산서원 그리고 대로사(大老祠) 같은 기존의 서원은 모두 성역화하여 각 지역의 향교(鄕校)와 더불어 충효도덕(忠孝道德)을 고취하여 새 시대의 정신수련도장이 됨과 동시에 민족교육문화의 명소가 되어서 학생들은 물론 외국인까지 참배하고 있으며 이미 훼철된 서원도 복원하고 있는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은 현대식 건물로 거대한 수련원을 지었으며 정읍의 고암서원(考巖書院)은 옛날의 모습으로 중건(重建)하였고, 대전의 남간정사(南澗精舍)는 규모를 확대하여 성역화 공사를 마쳤다. 그리고 서울의 도봉서원(道峰書院)은 재건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재건을 추진 중이다.

    

 

 

서 원

서원은 조선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제향(先賢祭享)을 위하여 사림(士林) 에 의해 설립된 사설고등 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자치(鄕村自治)운영기구이다.

 

서원의 기원은 중국 당()나라 말기부터 찾을 수 있지만 정제화(定制化)된 것은 송() 나라 때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 수서원(修書院) 등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주자(朱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열고 도학(道學) 연마의 도장(道場)으로서 보급한 이래 남송(南宋),(),()을 거치면서 성행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1542(중종37)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 말 유학자 안향을 제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이곳 순흥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뒤에 소수서원 (紹修書院)을 창건한 것이 그 효시이다.

 

우리나라의 서원은 그 성립과정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기는 하였으나 기능과 성격 등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중국의 서원이 관인양성(官人養成) 을 위한 과거준비기구로서 학교의 성격을 고수하였음에 비하여 우리나라의 서원은 선례후학(先禮後學)의 기치아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함양하여 인격을 닦던 사림(士林)의 장수지처(藏修之處) 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사회적 기구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서원의 전개

조선시대 서원은 중종에서 명종까지 초창기, 선조에서 현종까지 발전기, 숙종에서 영종 초까지 남설기(濫設期), 서원이 정리되기 시작하는 영조 17년 이후의 쇠퇴기 등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초창기에는 선현을 봉사하고 유생들의 학문연구와 덕성함양을 위한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하였으며 그 건립이나 운영에 있어서는 향촌 자치제를 지향하였다.

 

배향(配享)기준도 학문이 깊고 사문(斯文)에 공이 있는 자로 공론에 합당한 분이어야 가능하였다. 따라서, 국가에서 도사액과, 함께 전답, 노비, 서책 등을 내려 장려하였다.

 

이후 집권세력에 의해 자파세력 확대에 서원이 이용되면서 그 설립이나 사액과에 정치권력이 작용하고, 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에 희생된 의사의 봉사(奉祀)가 성행되면서 점차 남설이 사회문제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서원의 남설은 현종말부터 시작하여 숙종대에 오면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이는 이시기가 남·서 인간에 정쟁(政爭)의 격화가 크게 작용하였지만 여기에 서원을 통한 자기존립(自己存立)을 모색하였던 지방사람들의 이해관계가 결부되면서 더욱 확대되었다.

 

이 때문에 서원은 교육적 기능이 약화되고, 사현 위주로 전환되면서 가묘적(家廟的) 성격을 가지는 사우(祠宇)와 구별이 모호해졌으며 양조 초에는 서원·사우를 합하면 약 700개소나 되었다.

 

이러한 서원의 폭발적 남설은 정치적 사회적 폐단을 심화 시켰으며 따라서 영조 이후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국가적 차원의 강력한 제재를 받게 되었고 대원군 집정시인 1871년에는 마침내 학문과 충절이 뛰어 난 인물을 기준하여 11원의 원칙에 따라 27개의 사액서원(賜額書院)20개의 사액사우(賜額祠宇)만 남기고 모두 훼철(毁撤)되었다.

 

 

 

 

서원의 교육

서원의 강학(講學)과 사현(祠賢).제향(祭享)의 두 가지 기능이 결합된 형태이다. 그러나 설립당시에는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이 일차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서원은 당시 쇠퇴의 기미를 보이던 관학(官學)인 성균관과 향교에 대신하여 양반들의 교육활동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특히 서원은 사설이었기 때문에 관학인 향교교육이 과거와 법령의 규제에 얽매인 것과는 다르게. 학문의 자율성이 존중되어 출세주의(出世主義) 공리주의(功利主義)가 아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 인격고시(人格考試)를 시켰던 민족교육의 산실이었다.

 

교육내용은 사서오경(四書五經)등 성리학이 중심이었으며 이를 통하여 우주의 본질과 이성의 탐구라는 내면적 학문연마에 주력하였다. 한편 과거를 위한 공부도 본업은 아니었지만 중시하였다. 그러나 유학의 원리에 어긋나 는 이른바 이단(異端)에 관계되는 서책은 철저히 금지하였다.

 

교육방법은 배운 글을 소리 높여 읽고 의리(義理)를 문답하는 강()이라는 전통적인 교수방법을 택하였으며 평가는 4내지 5단계로 하였다 유생들의 입원자격은 소수서원의 경우 생원. 진사를 우선으로 하였으나 향학열이 있는 자를 허락하였다.

 

이들 정해진 인원수는 없었고, 다만 서원 경제력과 관련하여 상주 유생수는 규제하였다. 그러나 문묘(文廟)에 배향돤 인물로서 사묘(祠廟)에 다시 모신 사액서원(賜額書院)인 경우30명까지 허락하였으므로 소수서원도 10명 내지 30명의 범위 내에서 유생을 뽑았었다.

 

 

 

 

서원의 사회적 기능

서원은 사림의 강학(講學) 장수처(藏修處)로서 성립되었지만 16세기 이후 사림이 정치.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부터 그들의 중요한 근거로 자리 잡았으며 향학시행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하여 지방민의 교화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후 서원은 명분과 의리의 성리학적 이념에 크게 좌우되었던 붕당정치(朋黨政治) 하에서 향촌 사림의 여론을 수렴하는 일차적 거점으로서 그 역할을 더욱 증대하게 됨으로써 유림들의 여론인 사론(士論).공론(公論) 조성의 집 약소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한편으로 서원은 동성부락(同姓部落)의 발달과 함께 동족집단 내부의 상호 결속과 사회적 지위 유지의 필요성에 따라 그 중심 기구로서 사회적 역할을 증대시켜 나갔다.

 

서원은 문중네 현조(顯祖)의 제향을 통한 향중(鄕中)에서의 벌족(閥族)으로서의 사회적 지위 유지, 문중자체의 교육과 교화를 통한 문중 내의 윤리질서의 유지 등을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내려오면서 서원은 당쟁 및 문중의 시비에 휘말리고 또한 대민작폐(對民作弊)의 온상으로 변모되어 사회 문제화되자 국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서원과 성리학

고려 말 안향이 전래한 성리학이 새로운 학풍을 이루면서 전성기를 맞이하기는 16세기에서였다 당시 잦은 사화(士禍)에 선비들은 정계진출 포기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쓰게 되므로 서원은 이러한 선비들의 활동무대가 되었으며, 또한 서원이 거의 성리학 위주의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성리학이 서원을 기반으로 크게 전성기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때에 우리나라 성리학의 쌍벽을 이루고 있는 이 퇴계와 이 율곡이 태어났으며 한편으로는 서원이 참 교육의 장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우선 인간의 존재와 본질을 행동적인 면보다는 이념적인 면을 추구하는 기()보다는 이()를 우위로 하는 이퇴계의 주리적(主理的)인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해 이율곡은 이념적인 것보다는 실천적 원리로 이()는 기()의 작용에 내재하는 보편적 원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기적(主氣的)인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중요시함으로써 훗날 논쟁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지만 성리학이 여태까지 공허한 관념에서 벗어나 역사적, 사회적 현실과 연관을 가지도록 영향을 주었으며 실학사상으로 전개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서원의 도서관 기능

서원은 그 설립의 일차적인 목적이 교육과 학문연구에 있었으므로 교육문고로서 도서의 수집·보존의 역할도 함으로써 사립교육기관의 도서관 구실을 하였다.

 

서원이 도서관 역할을 하였음은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에서 입증되고 있다. 주세붕은 이 서원을 세우면서 캐낸 구리그릇 300여 근을 팔아 경사자집(經史子集) 등의 성리학 서를 구입하였다.

 

그 뒤 사액서원으로 발전하면서 국가로부터 때때로 많은 서적을 하사 받았으며, 서원에서도 자비로 서적을 구입하기도 하였고 또한 각 서원과 문중에서 간행된 서적을 보내옴으로써 소수서원은 1600년경에 1071678권을 소장하고 있었다.

 

서원은 이러한 지방의 도서관 역할뿐만 아니라 서적을 직접출판하기도 하여 지방출판문화의 중심지로서 문화창달과 지식보급에 큰 역할을 하였다.

 

서원에는 출판을 전담하는 간소(刊所)가 있었으며, 간행된 책은 주로 교육용과 서원의 배향 된 인물의 문집과 유고(遺稿) 등이었다.

 

간행된 서책은 다른 서원 및 각 문중과 홍문관·규장각 등에 배부되었다. 정조 20(1796)에 편찬된 서유구의 "누판고"에 의하면 이때까지 78개 서원에서 167종의 책이 출판되었다고 한다.

 

 

 

 

서원의 운영

서원은 원장(院長).유사(有司)로 대표되는 원님(院任)의 책임 하에 운영되는데. 서원이 사립교육기관이었기 때문에 원중(院中)의 유림이 모여서 자치적으로 원임을 선출하였으며. 원장. 유사의 임명에 특별한 자격규정은 없으나 한 고을을 대표할 수 있는 명망있는 인사로 선출하는 것이 관례였다. 원장은 원사(院事)를 총괄하며 서원을 대표하는 책임자이고, 유사는 원종 대 소사를 운영해 나가는 담당자였다.

 

이외에도 유생교육을 담당하는 강장(講長) 훈장(訓長) 및 직일(直日).조사(曹司).공사원(公事員) 등이 서원운영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원내 중대사 및 각종 결정사항은 유생들의 모임인 유회(儒會)에서 결정되었다. 이와 같이 서원의 운영은 원장. 유사가 책임지고 있었지만, 지방관의 영향력도 적지 않았다.

 

초기서원의 규모와 제도를 실질적으로 규정한 퇴계도 서원 운영의 자치성을 강조하였지만 경제적 문제 등은 지방관이 담당하여야 한다고 하여 서원과 관과의 유기적 관계를 강조하였다.

 

이는 서원이 사립교육 기관이지만 기본적으로는 국가의 문교정책을 대행하는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원운영을 위하여 원규(院規)가 재정되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원임. 원생의 자격과 선출절차. 교육목표. 교육내용. 서원운영에 관한 사항들이 수록되어 있다.

 

 

 

 

서원의 제향의식

서원의 양대 기능 가운데 하나가 제향(祭享) 기능이다. 특히, 후기에 오면 교육기능이 약화되면서 제향 기능은 더욱 증대되었다. 향례(享禮)에는 매달 삭망(朔望)에 알묘(謁廟)하는 향알(香謁)과 정월초에 행하는 정알(正謁)또는 세알(歲謁) 3.9월 초정일(初丁日)에 행하는 춘추 향사가 있다.

 

춘추향사는 원장. 유사가 3일전에 입제(入祭)하면서 시작되는데. 행사주관은 선출된 헌관(獻官). 집사(執事)가 담당하였으며 그 절차는 문묘향사에 버금 가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친다. 특히 이 때 서원 정문 출입은 복인(服人)이나 예복을 갖추지 않은 사람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 향사에는 지방관(地方官)을 포함하여 원근(遠近)에서 선비들이 많이 참석하였는데 이러한 향사의식은 유교적 질서를 그대로 반영함으로써 유교보급과 정착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성균관(成均館) .향교(鄕校)와는 달리 중국의 성인을 배제하고 우리나라서 학문과 충절이 뛰어난 분을 서원의 주향(主享)인물로 기린 것은 신제(愼齊) 주세붕(周世鵬)이 회헌(晦軒)안향(安珦)을 높인 이래 일종의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