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국민의 의무는 재미다.

종교계 친일인사, 해방 후에도 교권 중심세력으로 활동

草霧 2013. 11. 21. 16:08

 

 

 

종교계 친일인사, 해방 후에도 교권 중심세력으로 활동

    

 

 

 

 

살아서도 죽어서도 권력과 명예를 누린 친일종교인들

 

 

불교계 이종욱 전 총무원장 애국자로 둔갑해 현충원에 안장

 

개신교 친일파, 미 군정과 이승만 비호 아래 교계 지배

  

 

 

노기남 대주교, 일제를 위한 미사진행과 신사참배 앞장서

천주교의 경우는 일제 치하에서는 교세가 미미했기 때문에 친일인사가 적은 편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천주교 최초의 주교이자 대부였던 노기남 주교의 친일행적은 한국천주교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남아 있다. 그는 근대 한국천주교의 지주이자 산 증인이며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명동성당 보좌신부로 일하던 1936년 로마 교황청이 천주교 신자들에게 신사참배를 해도 좋다는 지침을 내리자 "신앙적인 아무런 가책 없이 신사참배를 행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신사참배에 앞장섰다.

 

노기남 주교는 로마 교황청의 훈령에 따라 천주교 단체의 책임자로서 매월 첫주를 애국주일로 정해 무운장구기원 미사를 진행했고 매월 1일에는 신자들과 함께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에 참배했다. 1938년에는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결성되자 천주교 실무책임자로 임명돼 교구 내 40여 개 성당을 돌면서 신자들에게 황국의 국위 선양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면서 근로보국대로 출동해 보국작업을 행할 것, 위문봉지나 위문금을 수집하여 군사후원 연맹에 보낼 것을 권장했다.

 

1940년 천주교 국민총력 경성교구연맹이 결성되면서 이사장이 된 노기남 주교는 신자 전원이 참여하는 애국반을 조직해 전시체제에 총동원하기로 하고 성탄절과 같은 교회 최대의 명절에도 시국강연회나 좌담회, 군국주의 영화 상영 등을 개최해 황국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도록 했다. 1942년에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더욱 드러내고자 군용기를 헌납하기로 결정하고 매월 11전씩 헌금하고 그해 말까지 모금하기로 한 금액을 6월 말까지 완납하도록 했다.

 

1943년에는 징병과 학병 독려를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전시종교보국회에 천주교회의 대표의원으로 참여한 그는 전선으로 나가는 천주교신자들을 위해 미사성제를 거행하고 특별 강복을 하기도 했다. 해방 후 노기남 주교는 <경향신문>을 창간하고 1948년 대구교구장 서리를 지냈으며 1962년 대주교 및 서울대교구장이 되어 로마에서 개최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석하고, 1967년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났다. 그는 여러 공로(?)를 인정받아 1959년 프랑스 최고문화훈장, 1963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1965년 이탈리아 문화훈장을 받았다.

 

노기남 주교의 친일행적에 대해 반민족문제연구소와는 별도로 지난 7월 초 정부산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노기남 주교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한다'는 통지서를 천주교 서울대교구에 통보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92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하는 공문을 보냈다.

 

서울대교구는 "(위원회 결정은) 형식적 조건에만 일방적으로 치우치는 바람에 형식보다 중요한 실질적 내용, 즉 일제 협력 행위에 나서게 된 현실적 동기, 행위 주체에 대한 정체성, 행위의 상대적 정도 등을 전혀 감안하지 않았다"고 반박하면서 "당시 노 주교 행동은 개인의 사적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천주교회 수장'으로서 교회와 교인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행위였다는 점에서 다른 친일 행위자들과 분명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서울대교구는 또 노기남 대주교가 1946년 명동성당에서 공개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영회'를 개최하였으며, 이 대회에 김구 주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참석한 것을 들어 "노 주교가 반민족적 인물이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사례"라고 주장했다. 2월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도 2005년 모 집회에서 노기남 주교의 행위는 "본의에 의한 자발적 행동이나 적극적인 친일은 아니며 단지 한국의 천주교회 대표로 나선 것일 뿐"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 백찬홍 (유영모, 함석헌 선생을 기리는 재단법인 씨알 운영위원)

    

 

 

 

3·1운동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에는 왜 천주교 사제가 없을까

내 어린 시절 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던 것이 3·1운동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천주교 사제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불교에서는 한용운 스님이, 천도교에서는 아예 손병희 교주가, 심지어 개신교조차 목사들이 보이는데 우리 천주교는 뭐했나 싶어, 어린 마음에 타종교 친구들 사이에서 열등감으로 속상해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안중근 의사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또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자연스레 그 때 그 시절 한국천주교회의 현실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면서 ‘33인 명단에 대한 의문점을 풀었던 그 시기였다. 기억의 뿌리란 또 얼마나 무서운가. 일제 때 한국천주교회의 교단적 친일행위의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거기엔 이 땅을 선교지역으로 삼아 속속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한 선행학습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제국주의 출신의 선교사들에게 일제 식민지 정책은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오히려 그에 저항하는 조선인들의 움직임이 사마귀가 수레를 막는 것(螳螂拒轍)과 같이 무모한, 시대의 흐름을 거역하는 철없는 짓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들에게 지도받아 사제가 되고 교회의 지도층에 오른 자들이 달리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 몇몇의 깨어있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그들은 이미 제국의 신민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안중근 의사와 같은 깨어난 평신도는 그 시절 우리 교회에 부담스러운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우리 민족은 물론이고 세계평화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대한의군 참모중장이자 특파독립대장인 안중근을 받아줄 가슴은 그 시절 교회 그 어디에도 없었다. 심지어 사형선고를 받고 임종을 앞둔 안중근 토마스의 영혼에 영원한 안식을 기원해 줄 입술조차 교회 안에는 없었다. 가롯 유다조차 나그네 무덤에라도 묻혔는데 그는 묻힐 무덤조차 없었고, 결국 이제껏 그의 무덤은 행방불명이다.

 

뮈텔 주교를 비롯한 선교사들에 의해 휘둘린 그 시절 한국천주교회는 민족현실에 어두운 눈 먼 이방인처럼 되었고, 기어이 역사의 죄인이 되고 말았다. 뮈텔 주교가 독립운동하는 신자 명단을 일제에 넘겨주었다거나, 안중근 집안에 세례 준 빌렘 신부를 성무 정지시키고 그마저 교황청에서 반대하자 이번엔 아예 본국으로 추방시켰다는 이야기는 차라리 눈감고 싶어지는 목불인견의 추악한 과거사이다.

 

일제시대의 교회로 회귀하는 듯한 교회의 현주소

물론 한국천주교회도 대희년을 앞둔 지난 1999123, 역사적인 과거사 반성 문건인 <쇄신과 화해>를 주교회의 명의로 발표하고 각 교구 주교좌성당에서 참회예식을 통해 역사와 민족 앞에 교회 구성원들이 소홀했던 점과 잘못들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했다.

 

그러나 그 이후 우리 교회는 보수화의 물결 속에 자신을 맡기며, 다시 민족과 역사 현실에 대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않는다는 삼불(三不)원숭이와 같았던 일제시대의 교회로 회귀하는 모습이다. 동일한 재개발 문제지만 교회 지도층의 가슴에는 전혀 다르게 와 닿은 가좌동성당과 용산참사, 이는 지금 우리 교회의 현주소를 그대로 알려주는 서글픈 좌표이다. 여기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눈길은 어디 있는가. 이런 점이 대희년에 행한 반성의 진정성을 의심케 하며, 원죄의 뿌리가 얼마나 질긴지 실감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과연 그 원죄의 뿌리는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깊어져 교회가 이데올로기의 앞잡이 되어 반공멸공의 꼭두놀음을 하는 잘못을 다시 저지르게 만든다. 이번에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른 장면 씨가 단독정부 수립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한 사실은 눈여겨 볼 일이다. 이처럼 원죄는 유전되는 것이고, 그러기에 원죄인 것이다.

 

가톨릭의 불편한 진실, 뮈텔 일기

프랑스 선교사 뮈텔 주교(1854~1933)는 한국 가톨릭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 가운데 한명이다. 그는 구한말과 일제 때 무려 43년 동안 한국 가톨릭의 수장이었다. 그는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189084일부터 선종한 1933114일까지 일기를 썼다. 200자 원고지 3만장 분량이다. 그래서 뮈텔은 교회 행정가 뿐 아니라 교회 사학자로 꼽힌다.

 

그의 일기는 한국교회사연구소 설립자인 고 최석우 몬시뇰(천주교 고위 직급중 하나)1984년 번역에 착수해 지난 200812월 마무리 지었다. 번역된 뮈텔의 일기와 편지 등 뮈텔문서는 고종 황제와 일제 식민통치자들과의 은밀한 만남과 교회 안팎의 일들, 정치·사회적 사건까지 세세히 담겨있다. 앞으로 근대사 연구에 주요 사료로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일제 때 다른 종교와 달리 대표적인 친일 종교의 한계를 드러냈던 한국 천주교가 1970년 이후에는 민주화와 인권 등 역사의 주역으로 활약한 자신감이 냉철한 내부 성찰의 자양분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뮈텔 주교 일기를 통해 본 한국 천주교회와 근대사회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연다. 뮈텔은 구한말 한국 천주교 부흥의 1등 공신이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의 천주교 신자 자격을 박탈해 종부성사(죽기 전에 주는 천주교 의식)마저 거부하고, 안중근의 동생 안명근이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꾀하고 있는 사실을 일제 아카보 장군에게 밀고(1911111일 일기)하는 등의 친일 행적으로 논란이 된 인물이다. 지난해 3월 안중근의사 순국 100돌 추모 미사에서 정진석 추기경이 뮈텔주교의 당시 행위를 옹호하는 발언을 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뮈텔과 한국천주교의 친일

 

 

 

그들은 나를 붙잡고 그들의 나라가 이렇게 학대 받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음을 설명하려 했다. 어떤 학생들은 울기도 하고 발을 구르기도 하고 정말로 무서운 모습이었다. 마침내 그들에게 질서를 지키도록 간청했고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차라리 신학교를 떠나라고 했다.”

 

뮈텔이 19193·1운동 직후 서울 용산 대신학생들을 만나고 난 뒤 쓴 일기다.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보고한 문서에서 선의의 소수 애국자를 제외하면 자칭 의병들의 대부분은 약탈자이거나 산적들인 것이 틀림없다고 한 뮈텔은 만세시위에 참가한 대신 학생들을 퇴학시키며 천주교인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원천 봉쇄했다. 이 때문에 3·1운동 뒤 상해임시정부에선 내무총장 이동녕의 명의로 천주교인들에게만 보내는 천주교 동포여라는 공포문에서 전 한족이 다 일어나 피를 흘리며 자유를 부르짖을 때 어찌 30만 천주교 동포의 소리는 없느냐고 참여를 호소하기도 했다.

    

 

뮈텔은 구한말 일본군의 약탈과 악의에 분개를 느끼곤 했으나, 선교를 최우선 시했기에 지배자와 충돌하지 않고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정교 분리를 내세우다 일본 세력과 연계됐다.”

    

 

 

 

당시 선교사들의 한국 인식

뮈텔은 한국어와 한국식 한자에 능통했지만 그의 일기엔 한국인이 부재한다. 일기에 프랑스인이나 외국인 천주교 신자들, 한국과 일본의 고급 관리들이 무수히 등장하지만, 한국인 신자들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성직자를 제외한 한국인과의 식사를 묘사한 기록도 없다.

    

 

 

프랑스 신부가 한국 법정에 출두하게 되면 조선 사람의 눈에 한 유럽인이 조선 법정의 재판권에 굴복한 것처럼 보여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겠는가라고 하는 등 (뮈텔은) 한국인들에 대해 차별적인 우월의식이 있었다면서 뮈텔과 프랑스 선교사들은 동양의 미개한 지역에 와서 봉사한다고 생각해 한국인 성직자마저 동역자로 인식하지 않았다. ”

 

김정환 내포교회사연구소 소장은 교세가 크게 확장돼오던 천주교가 1920년대 위기에 봉착한 원인으로 김명제 신부가 뮈텔에게 보낸 편지를 제시했다. 김 신부가 신부들뿐 아니라 주교까지 조선 교우들에게 막 대한다고 반발합니다. 왜 그들은 인사를 받지 않는가, 인사를 받아도 왜 베네딕도 회원이나 프로테스탄트(개신교도)처럼 하지 않는가?”라는 편지글로 미루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의 국가관

뮈텔 일기에는 1914년 유럽에서 발발한 1차 세계대전 상황에서 선교사들과 국가의 관계가 잘 나타나 있다. 김 소장은 뮈텔이 조선대목구장으로 취임한 189017천여 명에 불과했던 천주교 신자가 191455천여 명으로 크게 성장했던 한국 천주교가, 1914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프랑스 선교사 33명 가운데 11명이 징집돼 전쟁터에 나가면서 그들이 돌아온 1919년까지 현상 유지에 급급했다고 보았다.

 

또 개신교의 교세가 커가며 위기의식을 느낀 한국 천주교가 독일의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을 초청해 교육사업을 펼치려 했으나 1차 세계대전 발발로 독일의 수사들이 일본의 적성국 국민으로 분류돼 가택연금돼 기술학교도 운영하지 못하고, 적성국인 프랑스와 독일의 선교사들끼리 갈등이 심화되자 원산대목구를 분리해 독일 베네딕도회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뮈텔과 유럽의 선교사들은 한국 신자들의 독립운동 등 현실참여를 봉쇄하고 오직 신앙만을 강조했으나, 정작 자신들의 국가적 위기 때는 다르게 행동했던 사실을 뮈텔의 일기에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노기남 대주교, 연극으로 친일했다

 

 

"교회의 생존 위해 타율적 협력한 것 .. 다른 종교단체들도 다 친일했다"

 

"신사참배 허용으로 '교회 정체성' 훼손 안돼.. '민족 정체성'만 상실되었을지도 몰라"

이날 쟁점이 되었던 노기남 대주교의 일 식민지시대 말기 행적에 대한 발제에서 이장우 연구실장(한국교회사연구소)은 발제 서두에 <경향신문>과 최석우 몬시뇰(전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의 말을 빌어, 노기남 대주교를 "한국인 주교로 한국 가톨릭 자립화와 토착화의 기틀을 다진 한국 가톨릭의 대부"라고 소개하며, 이게 "노기남 대주교에 대한 적합한 평가"라고 밝혔다.

 

덧붙여 이장우 실장은 노기남 대주교는 "단순히 '많은 사제들 가운데 한 명의 사제'가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천주교회를 상징하고, 더 나아가 식민 조선인들의 지도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자리매김 되면서 고난과 오욕이 자욱한 역사의 행로 한가운데에 우뚝 설 수밖에 없었다"고 칭송했다.

 

노기남 대주교, '민족'을 절대적 판단잣대로 보면 안돼.. 천주교회 입장에서도 봐야

그럼에도 한국사회 안에서 노기남 대주교를 "당위론(當爲論)이나 시비론(是非論)의 입장에서" 다루고, 심지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노 주교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것은 "하나같이 '민족'을 절대시하여 '도덕적 심판의 준거이자 역사적 판단의 잣대'로 삼았던 결과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비판하며, '일제'라는 외부의 강압과 간섭과 통제 아래서 교회가 '자기 정체성'을 지켜내고자 어떻게 반응했는지 "당시 천주교회의 입장"에서 살피겠다고 밝혔다.

 

이장우 실장에 따르면, 19421210일 노기남 대주교의 서품식 때, 노기남 대주교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따라 조선 천주교회의 운명이 좌우될 수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고 추측했다.

 

이어 <대조봉대(大詔奉戴)와 교구장 취임에 제하야>라는 노기남 대주교의 서품식 답사에서, 노 주교가 "이제 우리 손으로 우리 교회를 유지하고, 유지할 뿐 아니라 발전시켜야 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무엇보다도 열심한 가톨릭신자가 되고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어야 한다... 비록 약간 어렵고 불편할지라도 공연한 비판이나 한탄을 말고 일치협력하야 무언복종하라."고 하면서, 조선총독부의 시책에 아무런 말 없이 협력할 것을 요구했다고 밝히면서, "이처럼 표면상으로 일본 정부와 조선 총독부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따를 것을 천명하였고, 교구장으로 착좌한 직후에는 미나미 지로 총독과 경기도지사, 헌병 사령관을 차례로 찾아가서 굴욕적인 대접을 받으면서도 취임인사"를 한 것은 "그들이 천주교회에 위해를 가할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한편 이장우 실장은 조선총독부의 천주교회에 대한 강압적 상황을 드러내기 위해, 1942년 서울교구에 프랑스인 대신 일본인 교구장을 앉히려던 조선총독부가 노기남 대주교의 교구장 임명 사실을 알고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으며, 천주교회를 압박하기 위해 미인가 상태로 있던 용산신학교를 폐쇄한 사례를 들었다.

 

또한 노기남 대주교가 군대용으로 징발하려던 대신학교 건물을 일제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대신학교 건물에 재빨리 성모병원 분원을 개원한 사실을 들어 "이처럼 노기남 대주교는 조선 총독부의 정책에 마냥 순응하였던 것이 아니라 당시의 강압적인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천주교회의 존속을 위해 최선을 다하여 묘책을 짜내고, 차선책이라도 찾아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조선 천주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해 나가고자 하였다"고 변명했다.

 

교회 정체성 유지 위해 일제에 순응했다고..

그러나 이장우 실장의 발제에 앞서 발표한 같은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양인성 연구원이 '노기남 신부의 경성대목구장 착좌에 관한 연구'에서 밝힌 바와 같이, 원 라리보 주교 대신에 서둘러 한국인인 노기남 신부를 교구장으로 임명한 것 역시, 본방인 성직자를 양성해 자치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제1 목적에 따른 것이며, 일본인보다 파리외방전교회에 호의적인 한국인 신부를 선택한 것이고, 한국인 신부들과 신자들의 반발을 고려한 결정이었음을 감안할 때, 일제에 대한 저항의 움직임과는 전혀 상관없는 조치였다.

 

또한 노기남 대주교와 교회의 관심사는 오로지 "교회를 유지하고, 유지할뿐 아니라 발전"시키는 것이며, 이 차원에서 대신학교 역시 빼앗기지 않으려 노력할뿐, 나머지 영역에서는 철저히 일제 순응적 태도를 유지했음에도, 이장우 실장은 이를 두고 "교회 정체성을 유지"하는 일로 간주하고 있다. 여기서 교회 정체성이란 교회정신이나 복음과는 상관없이 교회체제와 재산을 유지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말인지 의문이 든다.

 

신사참배 문제와 관련해서도, 이장우 실장은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것은 당시 일본의 '국체'(國體)를 부정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자신의 죽음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파괴를 각오하지 않는 한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변호했다.

 

조선 천주교회는 19261115<천주교요리>를 공식문답으로 반포하여 신사참배 불가를 공식 선언하였으나,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면서 '국체명징'(國體明徵)을 내세워 식민지 조선에서도 신사참배가 본격적으로 강요되면서 1935년 연례교구장 회의에서 신사참배를 허용키로 하고, 19364<경향잡지>를 통해 신사참배를 공식 허용했다. 그해 526일에는 신사참배는 종교행사가 아니라 애국적 행사이므로 허용한다는 포교성 훈련이 발표되고, 612일에는 <한국교회 공동지도서>의 내용을 수정해 신사참배를 허용했다.

    

 

 

신사참배 허용, 풍전등화 위기 속 현실적인 타협일 뿐

한편 신사참배 허용은 일제에 대한 투항과 친일을 약속하는 상징적 행위였으며, 조선 총독부의 신사(神社)정책을 수용하면서 천주교회는 그 정체성을 상실해 갔다는 윤선자 교수 등의 지적에 대해, 이장우 실장은 "과연 그 당시 현실 속에서 조선 천주교회가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할 힘이나 명분이 있었을까" 물으며 "만일 이를 거부한다면, 교회의 존립은 순식간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그런 까닭에 '애국'을 내세운 국가의례일 뿐이라는 일본 정부의 명분을 받아들여 현실적인 차원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으리라 여겨진다"고 말했다.

 

이어 천주교회가 신사참배를 받아들여서 '교회의 정체성'이 상실되어 간 것이라는 데 의문을 제기하며, 오히려 '조선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했다고 봐야 하며, "그렇다 하더라도 신사참배가 과연 그 당시 식민지 조선인들의 '민족 정체성'을 얼마나 상실시켰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 했다. 사실 별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말미에 이장우 실장은 신사참배 허용 문제를 그 무렵 사실상 허용된 조상제사 문제와 연결시켜, 이와 다를 바 없는 게 아니냐는 뉘앙스를 풍겼다.

 

이어 이장우 실장은 노기남 대주교 등이 일제의 경찰과 충돌을 피하고 종교행사를 순조롭게 치르기 위해, 불가피하게 먼저 신사에 가서 참배하고 경찰서장이니 군수를 예방하고, 국민의례를 하고, 황국신민화 운동에 대한 훈화라는 "귀찮고 까다로운, 또 마음에 없는 형식적 절차"를 거쳤으며, 노기남 대주교는 일본말을 못해서 동성상업고 교장이던 장면이 대신해 주었다는 말과 함께 "비록 총독부의 강압적인 강요로 그들의 황국신민화정책에 표면상으로는 충실히 부응할 수밖에 없었지만, 진정한 협력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총독부의 전시동원체제에서 천주교회는 1939514일 종교단체로서는 가장 먼저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을 조직했으며, 노기남 신부(당시 종현[명동]성당 보좌)는 이사장인 원 라리보 주교를 대신해 각종 회의에 참석하고 서울교구의 40여 개 본당을 순회하며 시국강연을 했지만 "천주교회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모든 종교단체가 총독부의 강압적인 총동원정책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그 당시에는 모든 종교가 일제에 협력했다... 천주교도 그중에 하나일 뿐

19401110일에는 노기남 신부를 이사장으로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으로 개편하였는데, 23일 회의에서 각 지방교회 연맹 조직, 성탄 때 시국강연회나 영화회 주최, 매월 첫번째 일요일을 '교회 애국일'로 정하여 예식 거행, 신사참배 실시, '국민서사'의 보급 등을 결의했다.

 

1942년부터는 노기남 신부가 서울교구장이 되면서 남상철이 경성교구연맹의 새 이사장으로 선임되어, 노기남 주교는 회장으로 대내적인 사무를 총괄하고, 남상철이 대외적인 사무를 보게 되었다. 이 시기 <경향잡지>19412월부터 <국민총력>란을 신설해 정기적으로 매달 총력연맹의 실천사항을 게재하고, 경성교구연맹은 군기 헌납을 위해 매월 11전씩 납부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장우 실장은 이 모든 것은 "어쩔 수 없이 응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반복하며 "말하자면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협력'이 아니라 조선 총독부의 강압적인 강요에 의한 '타율적인 협력'이었다"고 강변했다.

 

발제를 마무리하면서 이장우 실장은 "조선 천주교회가 조선 총독부의 정책을 어쩔 수 없이 동의하고 이행하였던 것은 천주교회의 '발전을 위한 도움'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천주교회의 '존속''유지'를 위해 협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며, "이는 노골적으로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던 '식민 조선인''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 제국주의자의 강요에 어떻게 '굴욕적인 타협'을 하였는지에 대한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 이장우 실장은 교회의 친일행적뿐 아니라 일제 식민강점하 친일분자들의 친일행적에 대해서도 '노골적인 생존의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변호한 결과가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같은 상황에서 다르게 처신했던 많은 종교인들과 독립운동가들은 '생존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는 말인가? 게다가 천주교회가 '발전을 위한 도움'을 기대해서 친일한 것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노기남 대주교가 서품식 답사에서 "우리 교회를 유지하고, 유지할 뿐 아니라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한 것은 빈말이었는지 의문이 남는다.

    

 

 

 

노 대주교에 협조한 엄창섭, 남상철과 장면 등 친일전력자의 공로도 다시 평가해야..

이날 이장우 실장의 발제에 대한 논평을 맡은 노용필 교수(한국사학연구소)는 이장우 실장의 발제문을 "교회사 연구의 수준을 한층 드높였다"고 칭송하며, 노기남 대주교의 <대조봉대와 교구장 취임에 제하야>라는 서품식 답사 내용을 두고, 노기남 대주교는 "이제 우리 손으로 우리 교회를 유지하고, 유지할 뿐 아니라 발전시켜야 한다"는 말을 강하게 말하고, 그 다음으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열심한 가톨릭신자가 되고.."라는 말을 강조하였고, "교우들도 그것을 가장 또렷이 들었을 것"이라며, 나머지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어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는 기억에도 없었을 것처럼 현장을 본 사람인 양 소설같은 논평을 가했다. , 공식문서만 보지 말고 그 이면을 살피라고 강권하며 노기남 대주교가 회고록에서 "마음에도 없는 대동아 전쟁 필승을 강조하고, 황당무계한 황국신민화운동을 역설해야 하는, 실로 연극적인 답사"라고 말한 심정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노용필 교수는 "노기남 대주교의 성무수행에 대한 협조자로서 기꺼이 살았던 이들에 대해서도 이제는 눈길을 줄 때가 되었다", 1945년 대신학교 설립 인가를 받을 수 있게 해준 학무국장 엄창섭, 1942년부터 국민총력 경성교구연맹의 이사장이 되어주었던 남상철, 그리고 노기남 대주교의 입장을 보호해준 박규철 신부의 협조와 희생을 충분히 평가해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노기남 대주교의 수족이 되어 준 장면 박사를 두둔했다. 게중에 남상철과 장면은 노기남 대주교와 마찬가지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