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밥 먹고 도시여행

제물포, 외세가 탐내던 한반도의 문, 이젠 세계로 통하는 문

草霧 2013. 10. 30. 16:38

 

 

 
외세가 탐내던 한반도의 문, 이젠 세계로 통하는 문
인천=박경덕 기자 poleeye@joongang.co.kr | 제155호 | 20100228 입력
1906년 월미도 정상에서 바라본 축항 공사 전 제물포의 모습(위). 아래는 2010년 인천항. 위 사진 중앙의 응봉산이 아래 사진에서는 왼쪽 끝 부분에 있다. 104년 동안 제물포는 바다를 메워39벽해상전39의 변화를 겪었다. [인천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제공·신동연 기자]
17일 오후 인천 제물포가 내려다보이는 월미공원 언덕. 겨울의 끝자락처럼 남아 있는 잔설 위로 갯바람이 차갑다. 그 바람을 막듯 떡 버티고 선 바위 두 개가 눈길을 끈다. 월미공원 귀환기념비와 월미도 연표를 새긴 바위다. 귀환기념비는 2001년 월미도가 군사보호구역에서 해제돼 인천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것을 기념해 세워졌다. 비석에는 140여 년 전 시작된 제물포 개항과 서구 열강의 침입, 3·1만세운동, 6·25전쟁, 현대화를 가로지른 제물포의 흔적들이 새겨져 있다. 제물포는 서양 문물의 세례를 가장 먼저 받았지만 식민지로 전락하는 조국의 운명을 가장 먼저 체험한 곳이다.

제물포가 개항한 지 어언 127년…. 제물포에서 시작된 개항도시 인천은 이제 활짝 열린 서해를 바라보며 새 꿈을 꾸고 있다. 40억 아세안을 품고 세계적인 무역도시로 우뚝 서는 것이다. 새 천년 들어 꿈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인천이 세계로 나가는 인프라를 속속 갖추면서다. 중국 시장이 열리고 인천국제공항, 송도국제도시가 건설되면서 인천은 21세기 한국을 선도할 도시로 부상하고 있다. 새 천년의 첫해인 2001년 3월 29일, 8년4개월간의 대역사 끝에 인천국제공항이 세계로 나가는 하늘 길을 열었다. 2005년 세계 공항 서비스 평가에서 ‘최고의 공항’에 뽑힌 이후 5년 연속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올해 3000만 명이 넘는 여객이 이용할 전망이다. 중국·일본의 여행객들도 많이 이용하는 명실상부한 동북아 허브공항으로 성장했다.

‘동양의 두바이’ 송도국제도시도 건설되고 있다. 1994년 첫 삽을 뜬 이 도시는 2020년까지 국제업무와 정보기술(IT)·생명공학기술(BT) 등 첨단산업 중심으로 개발될 예정이다. 24일에는 국내에서 가장 높은 65층짜리 동북아무역센터(NEATT) 전망대가 문을 열었다. 이 전망대는 국내외 투자자와 VIP들을 맞는 장소다. 안상수 인천시장은 “주요 20개국(G20) 재무차관회의의 송도 개최를 앞두고 개관한 65층 전망대는 동북아 허브도시로서의 인천경제자유구역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그만 제물포항에서 출발한 인천항도 변신하고 있다. 올해는 호화 크루즈선이 몰려온다. 연말까지 9000~7만t급 크루즈선 13척이 입항할 예정이다. 2014년까지 송도국제도시로 통합 이전되는 인천국제여객터미널 안에 크루즈 전용부두 1선석이 완공되면 명실상부한 ‘크루즈 항구’로 거듭난다. 대한민국 최대 항구인 부산항과의 격차도 줄이고 있다. 한·중 수교 이후 대(對)중국 교역이 늘면서 지난해 71만 명이 인천항에서 국제선 항로를 이용했다. 같은 기간 부산항에서 국제선 항로를 이용한 91만 명의 78% 수준이다. 2008년 국제여객 숫자가 부산항의 51%에 불과했던 데 비하면 눈부신 도약이다. 컨테이너 물동량도 급증하고 있다. 2005∼2009년 부산항의 컨테이너 물동량 증가율이 0.9%에 그친 반면 인천항은 35%나 됐다. 한·중 간 교류·협력이 확대되면 인천항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인천은 바다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를 먹고 성장한다. 제물포 시대에 비해 훨씬 넓어졌다. 공유수면 매립으로 매년 지도가 바뀌기 때문이다. 구불구불하던 리아스식 해안은 간척사업을 통해 반듯한 직선으로 변하고 있다. 인천항만공사 운영위원을 지낸 최정철 박사는 “인천 연안의 공유수면 매립 면적은 120년에 걸쳐 약 198.44㎢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여의도 면적(8.5㎢)의 23배에 해당하는 넓이다. 인천은 매립에 필요한 엄청난 양의 흙을 상당 부분 바다에서 얻고 있다. 1년 내내 준설작업을 통해 퍼내는 흙이 바로 그것이다.

인천 앞바다는 통일시대의 번영을 예고한다. 바닷속에는 수백 년 동안 임진강에서 떠내려온 북녘의 토사가 남쪽의 흙과 섞인 채 켜켜이 쌓여 있다. 인천공항과 송도국제도시를 건설할 때도 그 흙이 들어갔다. 남과 북의 흙으로 바다를 메워 세계로 비상하는 토대를 닦은 셈이다. 인천항과 인천공항, 송도국제도시는 이렇게 서로 탯줄이 얽혀 있다.

인천은 지금 한국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도시다. 지난해 전국에서 아파트 값 상승률 1위였다. 부동산 가치가 가장 많이 올랐다는 것은 도시 가치가 올랐다는 말과 같다. 하지만 급격한 개발에 따른 후유증도 보인다. 4조원의 공사비가 들어간 인천공항철도는 이용 승객이 예측치의 7%에 불과하다. 텅 빈 채 달리는 열차는 앞만 보고 달려왔던 인천을 되돌아보게 한다. 의욕적으로 추진된 송도국제도시의 건설은 지지부진하다. 외국인을 유치하기 위한 학교와 병원의 건립조차 속도를 못 내고 있다. 외국인 투자 유치는 더더욱 힘겨운 현실이다. 인천이 다시 신발끈을 고쳐 매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100여 년 전 외세가 출몰하던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던 월미도와 제물포. 그곳에 서서 서해를 바라보면 왼쪽에는 국내 최장의 인천대교(18.38㎞), 오른쪽에는 영종대교(4420m)가 손을 맞잡은 듯 인천 앞바다를 감싸고 있다. 두 손이 만나는 곳은 쉴 새 없이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인천국제공항이다. 인천공항을 징검다리처럼 연결해주는 인천대교와 영종대교, 그 위를 지나 한국은 세계로 나가고 세계는 한국으로 들어온다.
 
 

'김창수를 살려라' … 고종, 인천에 전보 띄워 사형 막아

19세기 말 개항장 제물포를 뒤흔든 풍경들

김종록 객원기자작가 kimkisan9@hanmail.net | 제155호 | 20100228 입력
일제시대 제물포항 하역장의 모습. 증기선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행인과 화물의 모습에서 활기가 느껴진다. [인천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제공]
서민들의 외식 단골 메뉴인 자장면은 인천이 원조다. 제물포 개항장의 중국인 조계지 청관(淸館)에서 1883년께 생겨났다. ‘인천 드림’을 꿈꾸며 산둥반도에서 건너온 중국인 쿠리(苦力:육체 노동자를 지칭)와 부두 노동자들이 간편식으로 먹던 게 자장면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자장면 공화춘(共和春) 원조설’에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 1912년 2월 중화민국 건립을 기념하여 ‘공화국 원년의 봄’이라는 의미로 개명한 게 공화춘이기 때문이다.

그 전신인 산동회관은 1905년에야 문을 열었다. 자장면은 그보다 훨씬 전에 만들어졌을 거라는 얘기다. 음식점·호텔을 겸한 공화춘은 1984년 문을 닫았는데 인천광역시는 조만간 ‘자장면 박물관’으로 새롭게 단장해 선보일 계획이다. 원조 논란에 관계없이 공화춘은 이미 자장면의 대명사가 됐다.

70년대까지 군부대에선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라는 외설스러운 병영가요가 유행했다. 개화기나 일제 때 마찰 성냥 한 갑이 쌀 한 되 값이나 됐다. 일본인들의 독점 탓이었다. 가난했던 시절 성냥공장에 다녔던 우리의 누이들은 성냥을 적당히 몸에 감춰 내오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러다 들키면 적잖이 수모를 당했을 터. 여하튼 1886년 인천에 일본 성냥공장이 들어선 이후 '성냥공장=인천'이 연상될 만큼 인천에선 성냥을 많이 생산했다.

서울 주재 미국 총영사 샤이에 롱(Chaille Long)은 1887년 9월 3일 뉴욕을 떠나 샌프란시스코·요코하마를 거쳐 10월 28일 제물포에 상륙한다. 그때 대불(大佛)호텔과 이태(怡泰)호텔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3층짜리 서양식 벽돌 건물인 대불호텔은 1888년 일본인 호리 리키타로가 세운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그 전부터 다른 건물에서 호텔을 운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불호텔로 향했다. 놀랍게도 호텔에서는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편하게 모시고 있었다’. 한국 최초 개신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5년 4월 5일자로 남긴 비망록이다. 이로 보아 그때 이미 어엿한 호텔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서양식 건물로 따져도 서울 정동 손탁호텔보다 4년이나 더 빠르다.

맥아더 동상이 서 있는 응봉산(鷹峰山) 자유공원은 1888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공원이다. 개항 이후 각국 조계 안에 있어 당시 각국공원으로 불렸다. 일제 때 서공원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나 1957년 맥아더 동상 제막식과 함께 자유공원이 되었다. 맥아더 동상은 인천 상륙작전의 현장 월미도를 내려다보고 있다. 월미도는 해안 매립으로 더 이상 섬이 아니다.

일본인이 경영한 인천정미소는 1889년에 세워졌다. 하지만 3년 뒤 세워진 타운센드상회의 스팀동력 정미소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정미소다. 미곡 표면에 광택이 나게끔 곱게 도정하고 돌까지 골라낼 수 있어 최상품의 쌀을 생산했다. 이곳에서 도정한 쌀은 일본과 연해주로 나가는 특등 수출품이었다. 상술이 뛰어난 미국인 타운센드는 미곡 무역으로 막대한 재물을 축적했다.

1896년 일제는 한반도 미곡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를 설립한다. 오늘날 주식거래시장과 흡사한 쌀 선물시장이었다. 쌀을 매개로 한 투기와 가격 조작이 만연해 폐해가 컸다. 인천항에 미곡을 싣고 온 한국인 지주와 상인들은 일확천금을 꿈꾸고 그곳을 기웃거리다 쪽박을 차기 십상이었다. 미두취인소는 개항장 일대를 향락의 거리로 바꿔놓았다. 요릿집·술집·여관들로 흥청거렸다(『역사문화총서』,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이광수의 장편소설 『재생』에는 인천의 미두꾼 이야기가 잘 묘사돼 있다. 실연당한 주인공 봉구가 의지하던 친구 김경훈은 미두상 김의관의 아들이다. 와세다 대학에 다니는 유학생 김경훈은 부잣집 건달로 등장한다. 미두꾼 아버지를 죽이고 돈을 훔친 그는 상하이로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이 소설에는 미두의 매수·매도 기간인 210일이 나온다. 오늘날로 치면 선물옵션 기간에 해당하는 셈이다. 청산일을 눈앞에 두면 인천 시가에는 미두꾼들로 북적댔다.

약 2주 동안 대혼란이 벌어지고 벼 100섬, 1000섬을 수확하는 넓은 땅들이 훌훌 날아가 버린다고 소설은 말하고 있다. 민족 정론지 ‘개벽’은 인천 미두취인소가 ‘피를 빨아먹는 악마 굴이요, 독소’라고 경고한다. 미두꾼 이야기는 채만식의 『탁류』에도 등장한다. 다만 무대가 인천이 아니라 군산인데 1930년대는 쌀을 매개로 한 도박이 전국적으로 확산됐음을 알 수 있다. 『탁류』에서도 주인공 초봉의 아버지 정 주사는 미두에 빠져들어 가산을 탕진한다.

1896년 개항장 재판소가 설치된다. 지방 관아에 속한 재판에 관한 사무 처리가 새로 개설된 재판소로 이관된다. 그해 8월 13일, 김구가 인천재판소로 압송돼 온다. 3월 8일 22세 청년 김구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나루에서 일본인 상인을 제거한다. 김구는 그 일본인이 국모를 죽인 미우라의 공범일 거라고 여겨 그를 일격에 쓰러뜨리고 칼을 빼앗아 난도질했다. 판결도 없이 옥중 생활을 하다가 11월 7일자 ‘독립신문’을 통해 자신(본명 김창수)이 교수형 판결을 받았음을 알게 된다. 꼼짝없이 죽을 판국이었다.

‘대군주께서 즉시 어전회의를 여셨고 의결한 결과 국제관계와 관련된 일이니 일단 생명이나 살리고 보자 하여 전화로 친칙(親勅)하셨다 한다’.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고종의 전화 한 통이 자신의 목숨을 살렸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전화는 텔레폰의 음을 따 덕률풍(德律風)으로 불렸는데 김구가 인천 감옥에 갇혀 있던 1896년 당시에는 개설되지 않았다. 2년 뒤인 1898년에야 개통됐다. 사실을 추적하자면 1894년 12월 1일부터 인천우편국에서 전보를 취급했고 고종은 전보로 김구의 사형 유보를 지시했다. 사형에 대한 중압감으로 경황이 없던 김구가 잘못 들었거나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1899년 9월 18일 오전 9시. 제물포에서 노량진까지 33㎞ 철도구간이 개통된다. 다음 날 ‘독립신문’은 기차 안에서 보는 풍경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레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차의 굴뚝 연기는 반공에 솟아오르더라. …수레 속에 앉아 영창으로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달리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마포나루까지 수로로 8시간 걸리던 길을 1시간40분으로 단축한 것이다. 시인 하이네의 말처럼 ‘철도가 공간을 살해’한 셈이다. 개통 당시 증기기관차는 하루 4회 운행했고 내국인 남자가 이용할 수 있는 2등 객실 요금은 80전이었다. 여자는 3등 객실 이용에 40전이었다.

근대 계약이민의 첫 장은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으로 떠난 노동자들이 열었다. 1902년 12월 22일 121명이 겐카이마루(玄海丸)호를 타고 인천항을 떠났다. 일본 나가사키항에 도착한 그들은 신체검사를 받고 전염병 보균자 19명이 탈락한다. 나머지 102명이 갤릭호로 갈아타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1905년 이민이 금지될 때까지 7400여 명의 이민자가 제물포항을 떠났다
 
 

중국 상점 번창, 넘쳐나는 일본인 … 조선인들 어디 있는지 의아

이방인들 눈에 비친 19세기 제물포

김종록 객원기자,작가 | 제155호 | 20100228 입력
 
‘다음 날 아침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깬 나는 부랴부랴 갑판으로 올라갔고 제물포의 경탄할 만한 광경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것은 내 평생 처음 보는 아름다운 장관이었다. 해안선과 항구를 이루는 크고 작은 섬들을 따라 아기자기한 산봉우리들이 솟아 있었고 항구 전체를 사슴동산처럼 완벽하게 감싸 안은 가운데 마침 떠오르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1888년 프랑스의 민속학자 샤를 바라(C.L.Varat)의 제물포 원경 예찬이다.

‘중국인 거주지는 수려한 관아와 길드, 공회당, 번창하는 상점들로 이어지고 있는데 폭죽소리와 징, 북소리로 분주하고 시끄러워 보였다. 확실히 무역에서는 중국인들이 일본인들을 훨씬 앞지르고 있었다. …일본인 거주지는 인구가 더 많고 넓었으며 과시적인 데가 있었다. 그들의 총영사관은 사절단을 위압하기에 충분했다. …한국인은 제물포 어디에 있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사실 난 그들을 잊어버렸다. 왜냐하면 그들의 비중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I.B.Bishop· 1832~1904) 여사는 생생한 묘사와 예리한 관찰로 정평이 나 있다. 청일전쟁 무렵 다시 제물포를 찾았을 때, 그 번창했던 중국인 거리는 ‘중세 페스트 오염 지역만큼이나 궤멸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인 거리는 최상의 활기가 넘쳤다. 은행 지점들과 거류지 사무소, 일본 경찰서, 병원, 소학교, 호텔·술집들로 번화했다.

1882년 12월 8일, 조선 외교고문으로 초빙된 독일인 묄렌도르프(穆麟德·1847~1901)가 처음 보았던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은 이방인들과 근대문물이 물 밀듯 들어오면서 국제적인 도시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제물포(濟物浦)라는 이름에 걸맞게 근대 문물이 들고 나는 포구가 된 것이다.

각국 조계지에는 많은 외국인이 모여 살게 되었다. 자치의회의 필요성이 부각됐다. 1891년 8월, 마침내 제물포구락부(사진)가 만들어졌다. 구락부(俱樂部)는 클럽(Club)의 일본식 가차(假借)다. 현재까지 보존돼 있는 건물은 나중에 독립문 설계를 맡게 되는 건축가 사바친의 초기 작품으로 사교실·도서실·당구대에다 야외 테니스 코트까지 갖춘 사교 클럽이었다. 클럽에서는 보름마다 무도회가 열렸는데 고종의 시의(侍醫) 분쉬(R.Wunsch) 박사는 제물포에 입항한 다음 날, 제물포클럽에 가서 이곳 주요 인사들과 만난다.

영국 영사, 프랑스 세관장, 독일 세창양행 대리인 등 50여 명이나 되었다. 분쉬는 서울에서 살면서도 이따금 제물포클럽을 찾아 밤을 새우곤 했다(『고종의 독일인 의사 분쉬』, 학고재). 제물포구락부는 현재 영상스토리텔링 박물관으로 거듭났다. 영국·러시아·이탈리아 등 각국 초청 행사를 열어 국제교류의 장이 되고 있다.
 

'Chemulpo'로 세계무대 첫선

시대 따라 달라진 이름, 제물포→진센→인천

강옥엽 인천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 | 제155호 | 20100228 입력
19세기 중엽 중국·일본에 진출했던 서구 열강은 조선에도 통상(通商)을 요구하면서 수도 한양의 목구멍[咽喉] 같은 인천 해안으로 밀려들었다. 서양세력의 끈질긴 진출 시도와 이를 저지하려는 조선의 해금(海禁)정책은 끝내 인천 해안에서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다.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가 그것이다. 일본은 조선 진출의 기선을 제압하려 1875년 이른바 운양호 사건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를 빌미로 맺은 '강화도조약'에 따라 1883년 인천이 개항됐다. 일본과 청나라는 물론 미·영·독·프 등이 몰려들었다. 인천이 제물포(Chemulpo)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알려진 시발점이다. 원래 제물포는 지금의 인천항 주변 중앙동·항동 일대에 있던 작은 나루를 가리켰다. 조선시대 군사용 진지 제물량(濟物梁)에서 유래한 것이다. 개항 후 서양인은 인천을 제물포, 일본인은 진센(Jinsen·仁川)으로 불렀다.

개항장에는 각국 영사관과 외국인 거류지가 들어섰다. 응봉산을 중심으로 각국의 공원이 조성되고 주변에 청국 조계, 일본 조계, 각국 공동 조계가 생겨났다. 서구식 상공업시설과 종교·교육·문화시설도 빠르게 건설됐다. 당시 제물포를 중심으로 정치·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던 외국인들의 외교활동을 이른바 ‘제물포 정략(Chemulpo Politics)’이라고 표현한 것은 인천 개항장의 비중을 드러낸다.

근대문물이 이식되면서 개항장은 국제적인 도시로 변화했다. 특히 독일계 무역상사인 세창양행의 기숙사 건물, 해관의 통역관이었던 중국인 오례당(吳禮堂)의 저택, 해관장을 지낸 존스톤의 별장, 북성동의 외국인 묘지는 조선인들이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문물이었다. 서울 정동의 손탁호텔보다 먼저 세워진 최초의 서양식 대불호텔과 경인철도(1899), 하와이 이민(1902), 팔미도 등대(1903) 등은 근대화의 상징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개항장 일대는 점차 일본색으로 탈바꿈했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천부(仁川府) 가운데 일본인 시가지는 넓어지는 대신 한국인 거주지는 줄어들었다. 나머지 농어촌 지역은 부평을 중심으로 신설된 부천군(富川郡)에 편입됐다. 각국 공동 조계와 청국 전관조계도 모두 철폐되고, 하부 행정조직은 일본식인 정(町), 정목(丁目)으로 바뀌었다.

일제는 대륙 침략정책을 추진하면서 부역(府域)을 더욱 확대했다. 병참·식량기지로 개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일전쟁(1937) 뒤 경인 시가지 계획을 마련해 일제는 경성부(京城府)의 서남단에서 인천부의 동북단에 이르는 350㎢의 지역에 7개 공단과 11개 거주지를 건설했다. 또 김포·부평평야를 절대농지로 지정했다. 개항 직후 제물포 중심의 작은 항구도시였던 인천이 거대한 항만도시가 되면서 중공업단지, 농업단지를 배후에 두는 산업도시로 변모한 것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우리 진센'을 외쳤다. 인천부의 한국인들은 주변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광복 후 미 군정 때 잠시 제물포시로 바뀌었던 인천부는 1949년 지방자치법 실시에 따라 경기도 인천시로 정립됐다(1949년 8월 15일). 시의회가 구성되고 시장은 간선으로 선출됐다. 일제 잔재와 미 군정의 과도기적 조치들이 하나씩 청산돼 갔다. 경제 안정과 발전을 위한 여러 가지 시책도 잇따랐다. 그러나 6·25전쟁은 인천에 다시 한번 시련을 안겨주었다. 인명 피해나 이념 갈등도 컸지만, 일제가 남겨놓고 간 공장과 시설로 가까스로 일구던 경제가 사실상 무너지고 만 것이다. 더욱이 인천 상륙작전을 전후한 엄청난 포격에다 휴전 후 20만 명의 이북 피란민까지 떠안아야 돼 지역사회는 설상가상의 고초를 겪어야 했다.

60∼7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통해 인천은 재도약했다. 임해공단들과 부평공단(경인공단)에 대한 집중 투자, 사회간접자본시설 확충, 편의시설 확대가 추진됐다. 인천 내항의 도크 확장(1966∼75), 연안부두 축조(1973), 경인고속도로 건설(1967∼68), 경인전철 부설(1971∼74) 등이 그런 산물이다.

그 덕에 인천과 주변 지역에선 각종 산업이 발달하고 인구가 빠르게 늘어났다. 인천시는 구제(區制)를 실시하던 68년 서울·부산·대구에 이어 4대 도시로 성장했다. 81년 인구 100만 명을 돌파한 뒤에는 인천직할시로 승격했다. 인천은 세계화와 중국의 고도성장에 힘입어 농공업도시 부평을 아우르고, 농수산과 문화관광의 보고(寶庫) 강화·옹진, 인천국제공항을 더해 미래의 한반도 허브로 뻗어나가고 있다.
 
 

한글 점자 만든 박두성,美學의 천재 고유섭

인천이 배출한 한국사의 인물들

조우성 시인·계간 '리뷰인천' 발행인 | 제155호 | 20100228 입력
숨 가쁜 개항기에 ‘근대로의 여정’에 시위를 당겨준 이는 안골 내리교회의 담임 존스(한국명 조원시) 목사였다. 그는 교회 구내에 어린이들을 모아 우리나라 최초로 초등과정의 신학문을 가르쳤다. 훗날 학교 이름을 '영화학당'이라 짓고 교사를 늘려나갔다.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인공 이길용 기자, 최초의 여성 박사 김활란 이화여대 총장, 유아교육의 선구자 서은숙 박사, 교육자 김애마 이대 사범대 초대 학장 등을 배출했다.

존스 목사는 또 사상 최초의 해외이민을 도운 주인공이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떠난 초기 이민자 상당수는 내리교회 신자였다. 이들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상하이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댔고, 광복 후 인하대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일제 강점기에 백성들의 삶은 더욱더 강퍅해져 갔다. 군국 일본의 굴절된 프리즘을 통해 ‘근대화’는 왜곡되고, 그들은 내선일체·궁성요배를 강요하며 총칼로 민족의 정체성까지 말살하려 들었다.

그 무렵인 1913년 박애의 큰 뜻을 품고 제생원(濟生院) 맹아부에 들어가 교육의 길에 나선 선구자가 있었다. 송암 박두성(朴斗星) 선생이다. 당시 맹인 교육계는 점자 교과서조차 없는 열악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일본 점자만은 가르칠 수 없다'며 한글 점자 창안을 결심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1926년 11월 ‘한글 점자’를 완성했다. 그것은 시각장애인에게 훈민정음 창제에 비견되는 복음이었다.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200여 종의 점자책을 간행하고 1963년 작고할 때까지 장애인 교육사업에 헌신했다. 생전에 점자 기념일이면 “한글 점자만은 남북 통일을 이뤘다”며 흐뭇해하곤 했다.

우현 고유섭(高裕燮) 선생은 멸실돼 가는 민족문화를 지켜내야 한다는 뜻을 품고 미술사학을 전공한 석학이다. 1927년 경성제대 문과에 입학할 시절 문학평론가 김동석, 의학박사 신태범 선생과 함께 ‘인천 3수재’로 유명했다. 그런 수재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미술사를 전공으로 택했다는 것은 남다른 풍모를 엿보게 한다. 선생의 비장한 학구열은 ‘우리 것’을 지키려는 외로운 투쟁이었다.

40세로 세상을 뜰 때(1944년 6월)까지 130편에 달하는 방대한 논문을 남겼다. 그 성과들은 오늘날 ‘한국 미술사에 흐르는 미학의 물줄기는 모두 고유섭이라는 수원지에서 흘러 나온다’는 찬사를 낳는다. 92년 새얼문화재단(이사장 지용택)은 제1회 새얼문화대상 수상자로 우현 선생을 선정했다. 인천의 명예와 자존심의 표상이 된 그의 동상은 인천시립박물관 앞뜰에 서 있다.

일제에 항거하던 이들은 일제 패망 후 곧 ‘조국 독립’을 맞이할 줄 알았지만 광복은 미 군정 체제로 이어졌다. 좌우 대립과 남북 분단 이후 일본 유학파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죽산 조봉암(曺奉岩) 역시 정치적 꿈을 펼치려 했다. 46년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라는 서신을 발표한 뒤 공산주의와 결별한 죽산 선생은 초대 농림부 장관, 국회부의장 등을 지냈다. 52년에 인천 출신으로는 최초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고, 56년 제3대 대선에선 야권 단일 후보로 출마해 무려 216만 표를 얻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죽산 선생에 위협을 느낀 당국은 느닷없이 그의 ‘평화통일론’을 트집 잡아 구속했다. 59년 대법원은 죽산에게 '북한의 공작금을 받았다'며 사형을 확정하고 그해 7월 31일 형을 집행했다. 두 차례 대선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은 현역 야당 대표의 재심 청구를 법원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학계는 이를 자유당 정권의 ‘사법살인’으로 본다.

그에 비하면 운석 장면(張勉) 박사는 행운의 정치인이다. 아버지 장기빈의 영향을 받고 자란 운석은 인천사립박문학교를 거쳐 수원농림고, YMCA영어학교, 미국 맨해튼 가톨릭대를 졸업했다. 1925년 귀국 뒤 교육자로 활동하다 정계에 입문해 제헌국회의원, 유엔총회 한국 대표, 초대 주미 대사로 일했다. 1951년 국무총리로 발탁됐지만 이듬해 사임했다. 4·19 후엔 내각을 책임진 국무총리로서 민주·자유를 지향한 정책을 펴나갔다.

그는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자 9개월 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정치정화법에 묶여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한때 투옥까지 당했지만 말년엔 종교생활에 전념했다. 조봉암과 장면은 인천이 낳은 거목이요, 한 시대를 이끈 큰 인물로 기억된다.

또 한 사람, 세인들이 존경하고 추억하는 이가 있다. 교육계의 사표 길영희 선생이다. 평북 희천 태생인 그는 경성의전 재학 시 3·1만세운동에 참여해 학적을 박탈당했다. 30세에야 일본 히로시마(廣島)고등사범을 졸업하고 교단에 섰다. 36세 때 도산 안창호 선생으로부터 감화를 받아 인천 만수동에 후생농장을 만들어 농업입국의 뜻을 키웠다. 그러다 지역 유지들의 추대를 받아 인천중·제물포고 교장을 역임하면서 민족교육 수립에 진력했다. 학생들에게 ‘민족의 소금’ ‘양심의 등불’이 될 것을 역설했던 길 선생의 교육 신념은 ‘돌대가리’란 별호를 낳았다.

하지만 그가 길러낸 제자들은 국가 동량으로 자랐다. 창씨개명을 끝내 거부한 민족주의자, 명문 인천중·제물포고를 키워낸 길영희 선생의 발자취는 크고 아름다웠다.
 
 

'ICN'브랜드로 세계를 품는다

미래도시 인천, 또 다른 100년의 비상

김용하 인천발전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공학박사 | 제155호 | 20100228 입력
 
콤팩트 스마트 시티(Compact Smart City).
도시 확장에 따른 불편을 복합적인 기능으로 해소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할 수 있는 '똑똑한 도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인천이 지향하는 미래의 도시 개념이다. 두바이가 사막의 기적을 만들었다면 인천은 바다를 메워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있다. 기존의 도심에선 기능 강화를 위한 재창조 사업을 시행하고, 송도·영종·청라 경제자유구역에선 외국 기업·외국인이 국내인과 어울려 살기에 불편함이 없는 글로벌 시티(Global City)를 만들어 가고 있다.

기존 시가지는 도시 재생사업을 통해 공원·녹지공간 확충, 자전거도로 설치, 주거지 정비 및 재래시장 활성화로 생활의 질을 개선해 나가고 있다. 경제자유구역은 유엔 국제기구, 외국 대학·병원, 생명공학기술(BT)·정보기술(IT)산업, 국제전시와 테마파크 등을 배치해 국제 비즈니스와 첨단산업, 관광·레저산업을 망라한다. 인천은 친환경도시이자 지속 발전이 가능한 도시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

올 초부터 세계의 이목이 '인천(Incheon)'이라는 도시에 집중하고 있다. 26일에는 주요 20개국(G20) 재무차관 회의가 열렸다. 올 11월 열릴 G20 정상회의를 준비하기 위한 첫 번째 실무 회의였다. 인천은 최근 10년간 세계 일류도시가 되자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국제도시 기반시설을 갖춰왔다. 지난해 가을에는 80일간의 세계도시축전 행사를 열고 인천대교(세계 5위 규모)를 개통해 발전역량을 확인했다. 다른 도시들이 글로벌 금융위기 등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에 위축돼 있을 때 인천은 도시의 장점을 개발해 왔다.

인천국제공항 개항, 지하철 1호선 개통, 개항장 문화지구 및 고인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2014 아시안게임 유치 등을 통해 기반시설을 확충하고 지역문화를 정비했다. 경제자유구역 개발은 도시공간의 변화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생각과 생활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그 결과 제물포 개항 이후 사람과 정보와 경제가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다이내믹한 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인천의 강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새로운 도시 기능을 담을 충분한 공간을 가지고 있다.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1989년 영종도, 95년 김포시 검단과 강화·옹진군의 섬들이 편입되면서 도시 면적이 3배 이상 확장됐다. 그만큼 개발 가능한 땅이 풍부하다. 여기에다 도시 기능이 다양화돼 있다. 강화도는 한민족의 역사가 숨쉬고, 옹진군에 있는 150여 개 도서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간직하고 있다. 검단은 농촌지역으로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인천은 기존의 항만을 중심으로 한 공업도시에서 역사문화도시, 해양성 관광휴양도시, 농촌도시의 면모가 추가됐다. 또 공항·항만 물류를 연계한 국제복합운송 물류기지로 업그레이드됐다.

인천은 이제 세계적인 도시브랜드다. 2001년 인천국제공항의 개항으로 '인천(ICN)'이라는 이름이 전 세계에 알려지고 있다. 전 세계 항공 스케줄에서 한국의 명칭이 'SEL'(김포국제공항의 코드)에서 'ICN'(인천국제공항의 코드)으로 바뀌었다. 지난 1월 말 현재 63개 항공사가 61개 국가, 168개 도시에 취항 중이다. 인천공항은 지난해 이용 여객이 2855만 명에 이른다.

현재 공항서비스 세계 1위, 국제화물운송 세계 2위다. 제3단계 건설(2009∼2015)이 끝나면 5개 활주로를 보유하고 항공기 운항 연간 74만 회에 화물 1000만t, 여객 1억 명의 운송 능력을 갖는다. 항만 기능도 활기를 띠고 있다. 인천항은 수도권 관문항으로 100년 이상의 노하우를 쌓아왔다. 중국 10개 해안 도시를 운항하는 카페리와 컨테이너 정기선이 취항해 환(環)황해권의 중심 항만으로 자리 잡았다.

인천은 대외 개방 도시를 지향하고 있다. 외국인 투자를 자유화한 경제자유도시로 변신하는 중이다. 인천에는 자유무역지역(Free Trade Zone)과 경제자유구역(Free Economic Zone)이 있다. 대외무역법·관세법 등의 규제에서 벗어나 다른 도시와 차별화된 강점을 갖는다.

우리는 90년대 말 아시아 지역을 휩쓴 금융위기를 극복했지만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항상 느낀다. 이러한 절박감을 반영해 정부는 한국 경제의 생존 전략으로 2003년 8월 경제자유구역을 인천에 처음 지정했다. 자유무역지역은 인천항과 인천국제공항 2개소 5.42㎢, 경제자유구역은 송도·영종·청라 3개소 209㎢에 각각 설치돼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한 신성장 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127년 전 제물포가 개항될 당시와 비교할 때 인천의 위상은 격세지감을 느낄 만큼 달라져 있다. 도시는 사람을 담는 그릇이다. 그릇의 기능과 디자인은 시대에 따라 진화한다. 인천은 바로 도시의 진화를 말해주는 좋은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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