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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역사유적답사기-헌인릉에서

草霧 2013. 10. 23. 13:08

 

 

 

 

서초역사유적답사기-헌인릉에서

 

사이버기자 서재삼

2013년 10월 9일은 567째 맞는 한글날이다. 23년 만에 다시 찾은 공휴일이나 딱히 할 일도 없고 파란 하늘에 이끌려 대모산에 올랐다.

 

최근 대모산 남쪽 내곡동 헌릉 인근에서 보금자리주택 건설을 하다 조선전기 왕릉 관련 시설이 발견되어 주목을 받았다. 조선실록에 의하면 이 유적지는 세종대왕이 왕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아버지 태종 곁에 자신과 왕비의 능지를 정하고, 4년 후 승하하신 영릉이라고 한다. 서초구가 세종구가 될 뻔했는데, 그 후 예종 때 풍수지리상 불길하다하여 현재의 경기도 여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조왕릉은 27대 왕조 왕과 왕비 묘소를 포함하여 총 40기이다. 원래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에는 사대문 100리 밖에 두어야한다고 했으나 현재 서울의 행정구역이 넓어져 서울시로 편입된 왕릉은 능에서 묘로 격하된 연산군묘를 포함하여 9기의 왕릉이 있다.

 

 

 

 

헌릉은 조선 3대왕인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이다.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태조 이성계와 신후왕후 사이의 5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태종은 부친이 두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와 낳은 8번째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번과 방석을 죽였다. 조선 최초의 왕비가 된 신덕왕후의 묘는 원래 현재 중구 정동 영국대사관 자리인 취현방에 정릉으로 위치했다. 태조는 인근에 홍천사라는 절을 세워 넋을 위로하였고 경복궁에서 매일 바라보며 눈물지었다 한다.

아버지의 반란을 진압한 태종은 계모 신덕왕후의 격을 후궁으로 강등하고, 능의 격도 묘로 강등시켜 돈화문 밖 현 성북동으로 이장하였다. 또 정릉을 지키던 신장석을 거꾸로 세워 청계천의 광통교를 세울 때 석축으로 써서 시민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 그 후 현종 때 신덕왕후는 왕비로 복위되고 묘소도 현재의 정릉으로 복원시켰다.
 
태종은 부친의 능도 유지와 달리 신덕왕후와 합장을 하지 않고 단독으로 모셨다고 한다. 그러나 태종은 정도전, 하륜 등 개국 공신들을 축출하고 자신의 처남인 민무기, 무질형제를 포함 외척들을 내쫒아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여 조선의 기틀을 마련했다. 무엇보다도 셋째 아들인 충령에 왕위를 양위하여 지금 우리들이 한글을 쓰게 했다.

헌릉에서 서쪽에 위치한 인릉은 잘난 아들 세종 덕에 칭송을 받는 아버지와 달리, 개혁군주 정조를 아버지로 두었기에 그 그늘 속에 후세에 무능하다는 평을 듣는 비운의 왕 23대 순조와 순원왕후의 능이다.

 

 

 

순조는 아버지 정조와 수빈 박 씨 사이에 태어났으나 어릴 때 총명하여 정조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훌륭한 군주의 재목이라 주위의 칭송 받았다. 순조는 부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11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증조할아버지인 영조가 66세에 재가했던 51세 차이의 당시 15세 이던 정순황후가 대왕대비가 되어 수렴청정을 했다.

 

그 후 순조는 천주교를 금하고 신유사옥을 벌여 손자 정조의 세력을 말살한 철의 여제 정순황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어 15세 때 친정을 하였다. 그러나 시파와 벽파의 당쟁과 할머니 혜경궁 홍씨와 어머니 효의왕후 등 대비들의 비호로 자신의 뜻을 펴지 못했다. 더욱이 전염병과 기근으로 민심이 피폐해지고 홍경래난 등 사회적 혼란이 일어나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 후 병약하던 순조는 효명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지병이 도저 45세로 사망했다. 순조의 사후에는 장인인 김조순이 주축이 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60여 년간 시작되고, 쇄국으로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조선은 망국의 길에 들었다.

 

주택 건설의 굉음 속에 두 선조께서 잠에서 깨어나 상전벽해가 된 아파트단지를 보시면 얼마나 놀라실지 걱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