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도시의 구석진 곳

인문학 산책, 작가의 소울메이트, 편집자

草霧 2013. 9. 5. 12:35

 

인문학 산책                                                     

소설과 시를 이야기하고 문학을 이야깃거리로 삼은 적이 언제이던가. 책은 이제 사람들의 손마다 들려진 스마트폰에 영원히 밀려나는 걸까. 허영이든 뭐든 소설과 시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사람들이 넘쳐났으면 하는 것이 편집자들의 바람이다. 그 책이 무엇이든.

원미선 문예중앙 편집장

중앙일보 정강현 기자가 최근 시작한 팟캐스트 '소소한 책수다'에서 추천한 <아메리칸 스타일의 두 얼굴>이라는 책이 있다. 소위 주체적으로 인간다운 삶을 추구한다는 '미국판 강남좌파'의 백인문화를 매우 유머러스하게 비판한 책이다. 그 책의 47번째 챕터는 '인문학 학위'인데, 여기 쓴웃음을 피할 수 없는 지적이 있다. "백인들이 이런 학위를 필요로 하는 진짜 이유는 파티에서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좋은 관계도 형성하고, 일자리도 얻고, 부자들도 알게 되는 등 부수적 효과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은 '헨리 제임스를 읽은 것이 학창시절의 가장 보람 있는 추억입니다'라는 식의 말로 시작된다." 여기, 이 대목, 백인 엘리트들의 스노비즘을 한번 비웃어보자고 쓴 말을 읽으면서 나는 도리어 부러운 마음이 커졌다. 허영이든 뭐든 '소설'을 가지고 대화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모습 좀 보게 된다면 한이 없겠다는 생각과 함께.

작가의 소울메이트, 편집자

그러고 보니 문학서 만드는 일을 17년째 하고 있다. '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에 출판사에 다니며 '책 만드는 일을 한다'고 대답하면 17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김없이 받게 되는 두 번째 질문은 '책을 만든다는 건 무슨 일을 말하는 건가요'이다. 글은 작가가 쓰는 것이니까 글을 쓴다는 말은 아닐 테고, 그럼 책의 형태를 디자인하는 일이나 인쇄 감독 같은 일을 하는 거냐고 묻는다. 출판사에는 물론 북디자이너도 있고, 인쇄와 제책 담당자도 있고, 책을 내다 팔 서점들을 관리하는 마케터들도 있다. 그리고 책이 만들어지는 동안 눈에 띄지 않는 일들만 거의 도맡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편집자'라고 불린다.

나는 그 편집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지금도 수많은 편집자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떤 책을 만들 것인지 결정하고, 그에 맞는 작가를 찾고, 집필이 끝나면 그 원고를 교정하고, 책이 완성되면 그것을 독자들에게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책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면,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볼 때 헤밍웨이가 거트루드 스타인에게 원고를 들고 가서 읽어달라고 조르던 장면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중증 정서불안 환자 같던 헤밍웨이를 안심시키고, 정확한 조언을 해주던 스타인의 모습은 편집자의 한 원형이다. 카프카에게 둘도 없는 친구였던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의 원고들을 끝까지 지켜낸 이야기는 편집자란 무엇인지를 말할 때 아직도 빠짐없이 거론된다.
편집자는 작가의 소울메이트이다. 때로는 작가 자신보다 그를 더 많이 알고, 사랑하고, 이해하는 사람. 작가 혼자서는 결코 할 수 없는, 그러나 하나의 작품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꼭 해야 하는 일들을 모두 함께한다. 자기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쓰는 작가를 위해서라면 편집자는 노예도 될 수 있고, 투사도 될 수 있다. 소설이나 시를 꾸준히 읽는 독자들도 으레 책은 쓰는 사람이 있으니까 나오게 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틀렸다. 책은 만들어 팔려는 사람이 있어서 존재하는 '상품'이 된 지 오래다.

 

 

책은 작품인가, 상품인가

15세기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 이후 대량 복제물로서 책의 운명은 '찍는 자'가 결정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책을 찍는 자가 되는가는 사실 너무나 중요한 문제다. 알고 보면 우리는 지금까지 그들이 읽으라고 내놓은 책들만 읽으며 살아온 것이 아니겠는가.
출판의 기업화와 집중화가 가속되고 책의 상품성이 무엇보다 우선시되면서 하자 없는 '상품'임과 동시에 존재 의의를 갖는 책을 만드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은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한 세대의 문화적·지적 수준에 책임감을 느끼는 리더로서 책으로 남아야 할 작품들에 대하여 신뢰해도 좋은 판단을 더 많이 해왔다는 것이다. 다행 중 불행인 징후들도 없지는 않다. 얼마 전 SBS의 한 프로그램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국내 소설들의 도서 사재기 실태를 집중 취재해 방송한 적이 있었다. 그 일로 문학에 인생을 걸고 자존심을 지켜왔던 작가들은 아까운 작품들을 절판해버렸고, 관련 출판사의 대표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물론 이것은 어느 한 개인의 양심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출판 자본가로, 편집자로 책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정직하게 인정해야 할 오류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소설에서 대화거리를 찾는 사람들이 멸종되어가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좋은 소설을 만들지 못한 편집자들의 책임이다. 무작정 책이 팔려야 작가도 살고, 출판사도 산다고 억지를 부릴 문제가 아니다. 몇몇 수치의 획일적인 통제에 갇힌 대중적 선호도라는 허상만 좇아 소설과 시집을 출간한다면 결국엔 모두가 궁핍해질 수밖에 없다. 좋은 책을 만들 기회, 좋은 책을 선택해 읽을 수 있는 기회가 희박해지면 독자들은 떠나고 작가들은 침묵하고 편집자는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책으로 자기를 알리고, 자기를 알아가려는 사람들에 대한 희망을 놓을 수 없기 때문에 오늘도 수많은 편집자가 책상에 앉아 있다.icon

원미선 17년째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민음사, 이레출판사를 거쳐 현재 대중과 소통하는 대중문예지 '문예중앙'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