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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말살기 일제의 황민화정책과 민족주의자들의 변절과 협력의 논리

草霧 2013. 9. 3. 12:00

 

 

민족말살기 일제의 황민화정책과 민족주의자들의 변절과 협력의 논리

 

 

                                                            이 명 화(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한국인과 그 역사에 깊은 정신적 상흔을 남긴 친일파문제는 이제 개인적인 친일행적을 파헤치는 현상적인 단계를 넘어 식민지 지배정책의 차원에서 구조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광복후 신국가 건설에서 최대 쟁점이 되었던 친일파 처벌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채 가해자로써 반민족적 행위를 자행했던 친일파들은 반성보다는 자기 변명으로 일관하였고, 사회는 아무런 거부감없이 이를 용인해왔다. 광복후에 여전히 사회의 지도적 지위를 점하였던 그들의 자서전이나 전기물 어디에도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는 기록을 남긴 이들이 없다. 어두운 과거는 묻어버리고 고백 아닌 자기 과시만으로 일관한 기록들과 일제의 일방적 보고기록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민족주의자에서 하루아침에 친일파로 전락하게 된 인간적 고뇌와 친일의 논리가 부재된 채 행위만이 남아 더욱 더 파렴치한이 되었다. 친일파의 변절의 논리를 밝힌다는 것은 우리 근현대 역사를 해명해 주는 중요한 문제이며 오늘날 한국의 현실과 직결된 문제로서 깊이있는 연구가 요구된다.

 

일제는 1929년 세계대공황을 겪으면서 정치, 경제적 위기에 빠졌고 여기에 광주학생운동 등 민족광복운동이 고조되자 식민지통치에 큰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탈출하고자 일본내에서는 군부구데타가 일어나 군사적 파쇼체제를 갖추었고 조선에서 식민지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어 대륙침략을 시도한 일제는 1931년 만주침략, 1932년 상해침공,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도발, 침략전쟁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조선은 일제의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재편되어 사회는 철저히 통제당하였고 침략전쟁에 필요한 인력과 물력을 수탈당하였다.

 

이와같은 상황의 민족말살기에 민족주의자들의 변절은 새삼스럽다기보다는 이미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로 독립의 길을 포기한 자들의 순차적인 행보였다. 해외의 독립운동계에서는 일제가 만주침략으로 국제사회에서 더욱 고립을 초래했다고 진단하고 전면 투쟁을 결의했지만 국내에서는 일제의 전승 소식만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가운데 국제정세와 전쟁상황이 왜곡되어 알려지자 투쟁을 포기하고 일제에 동조하는 자들이 속출하였다. 민족운동가들 중에는 일제에 비타협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민족의 독립을 절대의 지상과제로 여기고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이 있는가 하면 언론.종교.문화계 인사들로서 주로 실력양성론과 자치론의 노선을 갖고 있던 민족주의자들 중에는 대륙침략을 일제의 국력확대로 해석하고 일제로의 종속의 길로써 민족의 장래를 보장받으려 하였다. 이들 후자의 대부분은 사상적으로나 계급적으로 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제의 집요한 위협과 선전공작에 동요하였거나 일찍이 심정적으로 변절되어 간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직업적 친일분자들과 야합하여 일제에 충성을 다짐하며 내선일체를 부르짖는 나팔수가 되었고 그 행각은 민족말살기 동안 집단적 최면상태로 빠져 죄의식은 커녕 파렴치한 친일의 논리를 구축해 나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일제가 식민지 정책차원에서 민족운동가에게 가한 물리적 재제와 함께 민족운동가들을 회유하고 협박했던 논리는 무엇이며 민족을 배신하고 일제에 협력하던 친일파들의 성향과 논리는 무엇인가 ?

민족운동가들의 탄압과 전향운동의 전개

만주침략을 단행한 일제는 침략전쟁을 '동양영원의 평화확보'와 '대이상을 향한 매진'이라 하면서 '一般은 이제 다시 우리 국력의 위대함에 畏敬'하고 있다고 선전하였다. 그러면서 민족주의자들에게 독립의 가능성과 전망에 대한 회의를 조장하고 자포자기를 유도하며 전향운동에 한층 열을 올렸다. 전시 비상체제에서 조선인의 민족성을 유지해 둔채 탄압책만으로 통치질서를 유지하면서 전시총동원체제로 들어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일제는 위협과 회유로써 사상 '전향'을 유도하여 민족운동을 포기하게 하고 이를 통치선전에 적극 활용하고자 하였다. 일제시대 '전향'이라 하는 것은 이전의 자신의 정신적 신념이나 사상적 경향 또는 처지를 바꾸어 천황제 권력에 자발적으로 승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의 전향이란 反帝運動에서 이탈하여 혁명사상을 단념하고 체제를 인정하는 것이며, 민족운동가들의 전향이란 민족의 독립을 포기하고 일제의 내선일체의 일본화의 길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일제는 친일파를 동원하여 전향선전을 하거나 조선인에게 공포심을 주어 위협함으로써 전향을 유도하였다. 일제가 위협 수단으로 이용한 것은 식민지법률이었다. 즉 일제는 1932년에 [思想犯人에 對한 留保處分取扱規定]을 공포하여 장기간 치안유지법 위반 피의자의 행장을 감시하에 두고서 전향을 강요하였다. 1936년에는 [朝鮮思想犯保護觀察法]을 공포하고 기소유예, 형집행유예, 또는 체형언도를 받았거나 형집행을 마친 자, 가출옥을 허락받은 자들 중 의연히 '불온사상'을 품고 있다고 판단되면 비전향자, 또는 준전향자, 기타 전향하였어도 재범의 위험이 있다고 판단되는 전향자 모두를 계속 감시하였다. 그럼에도 일제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941년 2월 12일에는 [朝鮮思想犯豫防拘禁令](제령 8호)을 공포하였는데, 전향공작이 실패할 때는 예방구금소에 수용하여 改悛시킨다는 내용으로 비전향 정치범을 형기말료 후에도 계속 투옥시키는 법적 조치를 마련하였다. 이처럼 강도를 더해 간 식민지 악법은 사상범의 경우 일본보다도 법형을 무겁게 과하여 법적용에서 민족차별을 하는 등 조선인의 전향을 강제, 유도하였다. 한편 회유책으로써 무정부주의자, 농민조합, 노동동맹, 민족주의운동 등의 경력이 있는 자들을 사상전향 대상자로 파악하고 관할 고등계 주임과 주재소경찰관으로 하여금 사찰하도록 하고 끈질기게 접촉하면서 전향을 설득하였다. 이들에게 직업 소개 및 알선 등 생활 대책을 마련해주고, 공공사업에 참여케 하였으며 지방중견청년양성 강습소에서 정신교육 및 직업교육을 수강하도록 배려하는 등 전향을 유도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역전향을 하지 못하도록 일체의 사상단체를 철저히 취체, 해산시켰으며 대신 친일파들을 동원하여 어용적 사상전향단체를 조직하여 전향대상자를 사상적으로 굴복시켜 일본인이 될 것을 강요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 및 민족주의자들의 전향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대중에 대한 소위 '사상정화운동'에 이용하였다.

사상전향단체로서 처음으로 조직된 것은 1934년 12월 26일 경성에서 조직된 [昭道會]로, 각지에 사상선도위원회가 만들어저 전향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총독부 학무국 촉탁으로 일찍이 황민화운동에 기수가 된 친일파 李覺鍾의 주도하에 1935년 2월에는 [白岳會]라는 어용단체가 천황하사금, 총독부와 도지방비, 府지방비 등에서 자금보조를 받아 조직되어 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족자결주의자들 중 사상과 노선을 청산하고 전향한 자들을 회원으로 입회시켜 전향운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백악회는 1936년 9월 20일에 [大東民友會]로 확대 개편되어 이전 전향자의 '보호구원'이라는 기만적 구실을 벗어던지고 '일본정신을 기본으로 한 국가주의의 새로운 지도이념을 구성하고 이를 개편하여 적극적으로 사상운동을 일으킬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적극적인 자세로 전환하고 엄격한 자격심사를 통해 회원 175명을 확보하고 내선일체, 황민화운동에 동원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 일제는 조선인에게 단순한 민족주의에서의 이탈만이 아닌 '일본인으로서의 의식을 자각적으로 파악하는 것, 단지 반국가적 사상을 방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보 전진하여 일본인이 되는 일'이라고 하며 전향은 사상범이나 일부 전향대상자만이 아니라 모든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여 민족의식을 완전히 해소시키고 '일본정신의 체득'을 주입시킨다는 이른바 대중적인 '전면적' 전향시대를 열었다. 그리하여 1938년 무렵 결사단체들이 모두 해체되거나 전향한 상황에서 일제는 민족운동의 탄압이라는 방어적 자세에서 황민화 사상의 적극적 주입이라는 공격적인 자세로 전환하였다. 1938년 7월에 일제는 [時局對應全鮮思想保國聯盟]이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내선일체의 강화철저, 애국적 총후활동의 강화, 사상국방전선으로의 적극적 참가협력, 국책수행으로의 철저한 봉사, 후진전향자의 誘掖선도'라는 행동강령을 정하고 전시국가총동원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외에는 전향이라고 할 수 없는 친일분자들에 의한 많은 어용전향단체들이 만들어져 황민화, 전시동원을 조선 민중에게 선동하였다.

 

한편 1939년 8월 초순에는 각도의 고등외사 경찰과장들이 협의하여 각도에 [思想淨化對策要綱]이라는 대책안을 마련하고 '공산주의, 민족주의, 불령사상을 근본적으로 배제청산하여 전민중으로 하여금 신동아건설의 위업에 매진하고 있는 제국의 결의와 실력을 재인식시키고 진실로 황국신민이라는 자각에 기초하여 일본정신의 振起 앙양을 도모'한다는 취지하에 실행상의 주의요강과 대책 요강 등을 각도에 시달하였다. 여기서 온건 교화단체와 특수단체를 조성하고 학생생도 및 청소년을 지도에 철저히 기할 것 등이 제시되었고, 일제가 사상적으로 경계해야 할 인물을 구분하여 (1.요시찰, 요주인 인물 2. 전향자 3. 비전향자 4. 사상사건검거자 5. 사상전과자 등으로 구분) 이에 대한 지도와 감시 대책을 구체적으로 수립하여 대대적인 소위 사상정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전쟁협력단체의 결성과 일제로의 충성맹세와 운동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당국은 조선인전향자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았다. 일본인의 사상전향은 일본인 '본연의 국민성을 目醒시키는 것이지만 조선인의 전향은 일본의 국제적 정의와 위력에 畏服한 결과'로 라고 보고 '조선인의 경우는 항상 민족문제가 주요 관심이고 그 목적 관철의 수단으로서 공산주의운동이 取入되고 또한 일방적 개인적 경제생활의 불평을 풀기 위하여 운동에 참가하는 자가 많다'고 하여 조선인에게 진실한 전향을 기대하기 어려우며 일본정신을 파악, 체득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변절자들은 일제의 의심의 눈초리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충성경쟁을 보이며 반민족적인 행위를 가일층 감행하였다.

<민족말살기 인력수탈 법령과 전향단체>

 

1937년 육군특별지원병제도

1938년 2월 조선육군지원병령 공포

1938년 3월 국가총동원법 제정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결성

1938년 7월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결성

1938년 8월 조선방공협회, 전향자회의 결성

1939년 국민징용령

1940년 10월 국민총력조선연맹 결성

1940년 12월 황도학회 결성

1941년 1월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결성

1941년 8월 임전대책협의회 결성

1941년 8월 흥아보국단 결성

1941년 9월 흥아보국단과 임전대책협의회 통합, 조선임전보국단 결성

1941년 12월 조선임전보국단 결전 부인대회

1943년 학도동원령

1944년 징병령

1944년 여자정신대근무령

1944년 6월 언론보국회 결성

1945년 2월 대화동맹 결성

1945년 6월 대의당 결성

일제와 변절자들의 내선일체 논리의 차이

일제하에서 시기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식민지 통치의 목표는 동화주의의 완성에 있었다. 일제는 그간 동화주의의 다른 표현으로 일시동인, 내선융화 등의 용어로 식민지 차별을 무마해 왔다. 그나마 우가끼(宇垣一成) 총독이 부임하면서 내건 내지연장주의는 자치론의 논쟁마저 불식시키고 1936년 8월 5일 부임한 미나미(南次郞)총독에 의해 [반도인을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만든다는 내선일체론으로 대체되었다. 내선일체는 조선인의 무의식구조까지 황민화하는, 강요가 아닌 자발적 황민화의 수준이었다. 전시체제에 총체적으로 전력해야 할 시기에 조선인의 민족성을 유지한 채 동화정책만으로는 조선의 민족운동을 누룰 수 없고, 더욱이 군사적, 경제적으로 조선을 통치하기가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조선적인 모든 것을 말살하여 황민화로써 통치하는 길만이 일제의 대륙침략정책에 부응하는 통치책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일제가 주장하는 [내선일체]의 논리는 '"내지와 조선은 멀리 신화시대부터 깊은 관계가 있고 인종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동일동근'이며 내선일체를 함으로써 '반도는 대일본제국의 일부이며, 반도의 과거 역사와 문화가 반드시 반도민중을 진실로 행복한 상태에 있었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에 일본이 갖는 높은 문화에 오히려 융합동화하여 이와 동일한 입장을 갖고 더욱 진실되게 반도의 빛나는 장래를 획득'시킨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내선일체론의 주요 강조점은 조선과 일본은 공동운명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일본과 동체가 되어 난국타개에 노력해야 하고 설사 조선이 일본에서 독립을 한다해도 곧 백인통치로 들어가 더 큰 고난을 당하니 일본과 승리를 위해 매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인은 한민족을 대륙침략 전쟁의 희생자가 아닌, 일본민족과 함께 아시아제민족을 서구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광복시켜야 할 주체라고 도치시켜 아시아 지역의 민족광복문제와 한국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지배 모순관계를 기만하고 호도하였다. 

 

반면에 친일파들이 주장하는 내선일체론의 기반은 민족적 열등감에서 출발한다. 이는 그간 일제가 조선민족에게 꾸준히 전파시키고 세뇌시켰던 식민사관과 식민지 교육의 효력이기도 하다. 민족말살기 친일파들은 민족의 장래보다는 자신들이 느끼는 열등감에서 벗어나 일본족으로 대접받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일제가 조선인을 차별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의 근거로서 강제병합 초기부터 식민지통치의 차별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걸었던 이른바 '민도의 차이'을 여전히 읊조리며 '민도의 차이'만 극복하면 내선일체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변절자들은 '민도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몸을 바쳐 황국신민이 되어야 했으며 그것이 차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변절자들은 자신은 물론 동족에게 아무런 권리 주장도 없이 일본인과 똑같은 충성과 헌신만이 내선일체의 길이라고 요구하였다. 이광수 같은 이는 식민지 통치에 대한 조선인의 불평은 자기인식 착오에서 오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조선인이 일본인과 동일한 수준에 오를 때 민족적 차별이 삭감될 것이며 조선인 개인 전체가 황국신민으로 완성되기 전까지 특별대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내선일체는 조선적인 것을 버리고 일본적인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일본인들에게도 식민지민에 대한 무차별과 평등은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내선일체와 황민화정책을 추진했던 南次郞 총독은 조선인들에게 '내선일제의 궁극의 자세는 내선의 무차별, 평등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떠들었지만 완전한 평등은 있을 수 없다고 여러차례 밝힌 바 있고, 1942년 총독을 사임하고 일본으로 돌아가 천황임석하에 열린 추밀원회의 석상에서 조선은 '최근 수천년에 걸쳐 일국을 형성해왔기 때문에 그 사상, 인정, 풍속, 관습, 언어 등을 달리하는 이민족임은 엄연한 사실'이라고 언명하고 '정부와 국민과 현지 위정자는 이 엄연한 사실을 솔직진솔히 또한 바로 인식'하여 정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즉 일본인들은 조선인에게 일본인이 되기를 강압하였지만 내심 조선인은 일본인이 될 수 없다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인들에게 일본국민으로서 의식을 갖고 민족적 문제가 있어도 일본을 신뢰하는 길만이 민족을 위하여 최대한의 행복이라는 일방적인 내선일체의 논리 아닌 억지를 강압하였던 것이다.

 

중일전쟁을 [東亞新秩序確立] 혹은 [聖戰]이라 하면서 물자와 인력을 전쟁에 최대한 동원하고자 혈안이 되어 일본인과 같은 의무로서 강제연행과 지원병, 징병을 강행하였는데, 특히 내선일체의 논리는 일제의 전시 강제 인력동원을 하는데 최대한으로 이용되었다. 황민화 내선일체의 논리는 다름아닌 권리는 없이 일본인과 똑같이 병역을 비롯한 전쟁동원의 의무만을 지우는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결국 조선인은 아무런 권리없이 천황에 대한 무한의 충성과 죽음까지도 강요하였고 권리없는 의무의 강요는 조선인들을 질식시켰다.

 

여기에 일제의 지주적, 자본가적 통치지배정책에 자신들의 종속적 발전의 길을 일치시키고 있었던 조선의 부르조아계급층은 이미 자신들의 경제적, 계급적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일제 통치권력과 타협하고 있던 차에 일제의 내선일체화의 논리는 변절자들의 반민족적 행위에 대한 자기위안이 되어주었고 전향의 논리를 제공하였다. 민족부르조아 계층은 일제의 대륙침략을 시장개척과 서양 제국주의로부터의 아시아 광복으로 해석하고 일제의 전도(前途)와 민족전도, 정확히는 자신의 전도를 동일시하였다. 변절자들은 일본인들조차 실현성이 없다고 본 완전한 무차별과 평등의 내선일체에 매달려 자신이 확실히 전향하였다는 증거를 보이기 위해 일제에 충성을 맹세하고 조선인은 더 이상 식민지민이 아니며 일본인과 평등하게 될 수 있다는 망상으로 동족은 물론 자신마저도 기만하였다.

민족주의자들의 성향과 변절

한때 민족운동에 종사하던 변절 친일파들은 그 성향과 변절 시기에 따라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사회적 명망을 갖은 엘리트로서 3.1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일제의 기만적인 문화통치정책에 매몰되어 식민지체제 안에서 민립대학설립운동, 물산장려운동 등 개량적 민족운동을 통해 민족의 실력양성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던 이들로, 민족운동계의 비난으로 입지가 좁아지자 점차 친일화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이다. 대표적인 이는 윤치호, 최남선, 이광수, 김성수, 최린 등이다. 일제는 민족성을 강하게 띨 경우를 제하고는 식민지법의 범위내에서 총독부의 허가를 받고 진행되는 한, 그들의 민족운동을 체제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둘째, 일제가 식민지 통치 강도를 더해가자 민족운동을 전개하면서도 독립에 항상 회의를 품고 일제의 압력이 거세질수록 더욱 회의하여 급기야 만주사변을 계기로 조선의 독립은 불능하다고 판단하고 변절한 자들이다. 대표적인 이는 서춘, 박희도, 양주삼, 유진오 등이다. 이 당시 민족주의자들을 제외하고 친일활동을 전개했던 인물들은 거의가 변절자가 아닌 직업적 친일분자들이다. 일제는 1930년대로 들어오면서 일체의 민족주의운동을 총독부 관제운동으로 흡수해 버리자 그나마 타협적이며 식민지법의 범위에서나마 민족주의를 고수하였던 민족주의운동가들은 점차 일제가 내던져준 낚시밥을 물고 자신들의 변절을 '민족을 위한 선택'으로 자위하면서 반민족적인 길로 들어섰다.

 

셋째, 비타협 민족주의의식을 갖고 있거나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였거나, 만주침략 이후 이미 심정적으로는 변절하였으나 행동으로 표출되지 않았던 자들로, 1937년 이후 황민화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일제의 정신적, 신체적 억압과 협박을 받는 가운데 폐쇄된 정보에 의한 그릇된 정세판단 아래 사상과 신념을 포기하고 이른바 확실히 '전향'을 표방하여 자신의 영달을 꾀하며 조국과 민족을 배신한 이들이다. 대표적인 이로는 박인덕, 장덕수, 정인과, 정춘수, 이종린, 윤치영, 백관수, 신흥우, 유억겸, 주요한, 김활란 등이다. 일제는 이 시기에 개인적 전향은 일단락되었다고 보고 다음 단계로 이른바 보편적 전향운동이라 하여 민족주의 성향을 갖고 있는 단체나 천도교, 불교, 기독교 등 교단의 조직적인 전향을 획책하였다.

 

전향자들의 운동 노선과 경향을 보면 실력양성론과 자치론을 주장하던 이들이 대부분이다. 실력양성론자들은 식민지통치에 대한 직접투쟁이 아닌 교육진흥과 산업발달을 도모하여 민족의 실력을 키우는 것을 우선으로 하여 장래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자는 노선을 갖고 있는 자들이다. 실력양성주의자들 중에는 일찍이 일본 내지는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지식인층이 많다. 이들 중에는 민족의 독립을 절대의 가치로 여기고 사회주의운동 및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투쟁을 전개한 이들도 있으나 신교육과 선진 문화를 경험한 부르조아 지식인들은 양육강식의 제국주의 논리에 함몰되어 전면대결과 무장투쟁으로는 일제를 이길 수 없다는 패배주의에 빠지게 되면서 개량주의적 실력양성과 자치론으로 민족운동의 방향을 선회하였다. 부르조아 지식인들은 독립문제보다는 근대화, 실력양성 문제를 우선하여 민족의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일제의 동화주의와 다른 민족의 논리를 갖지 못하였고, 그들의 근대화지상주의는 조선의 독립이 불가능한다는 패배주의에 빠지게 될 때 강자에 의존하여 근대화하는 길만이 민족의 장래를 위하는 길이라는 그릇된 판단을 하게 하였다. 일단 친일의 길에 들어선 그들은 끊임없는 민족차별과 식민지 수탈의 회의 속에서도 민족문제를 외면하고 현실순응이라는 대세로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권력에 기생하여 일신의 영달을 꾀하였다.

 

자치운동은 당장의 조선의 독립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식민지당국이 허용하는 범위내에서 민족의 권익을 확충하고 정치적 수련을 쌓아 먼저 조선의회를 건설하여 내정에서 독립하고 이어 민족의 독립을 기도하자는 운동이다. 자치운동은 최린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 신파가 중심세력이 되어 전개되었다. 자치론자들의 변절과정의 전형은 최린을 통해서 볼 수 있다. 33인의 민족대표이며 천도교 신파의 지도자인 최린은 이미 1930년이전부터 일제의 통치를 현실로 인정하고 있었다. 1932년 천도교 대도정에 추대된 그는 1933년 4월 정기대회에서 천도교는 정치적 목적이 있는 단체가 아님을 천명하면서 자치론 주장을 포기하였다. 정치적 신념에 의한 포기가 아니라 일제가 내지연장주의로 통치방침을 바꾸고 일체의 자치론쟁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최린은 발빠르게 1933년 말 경 소위 [대동방주의]를 제창하여 일제의 전시체제에 부응, '현하 국제정세 아래서 동아제민족은 강국일본을 맹주로 매진해야 하고 특히 조선에서는 내선융합, 공존공영이 민족갱생의 유일한 방도'라고 제창하였다. 1934년 4월에 중추원참의에 취임한 그는 그 해 6월에 동경에 가서 일본의 조야인사들을 방문하고 신궁과 어릉을 참배하고 돌아와 8월에 '신생활의 확립, 신인생관의 확립, 내선일가의 결성, 노동신성의 체행, 성경신의 실천'이라는 강령을 내세워 전시체제하의 식민지 정신지배운동을 적극 지원하기 위해 [時中會]를 조직하였다. 시중회가 결성되자 천도교 구파는 최린을 맹공격하였고 상해 한국국민당에서는 임시정부공보 58호의 [토최린서]를 게재하여 통렬히 비난할 정도로 그의 친일행위는 민족의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최린은 광복후 반민특위 재판에 회부되어 다음과 같이 진술한 바 있다. "합방시부터 기미독립운동까지는 어떻게든지 독립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였고 둘째 단계로는 일본놈이 만주를 침략하려고 할 때부터 피고인의 시각은 다소 변하여져서 민족을 보존하여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일본까지 들어가서 일본의 동태를 살피고 또한 일본이 만주를 침범할 때 머지않아 동아에 변동이 올 것을 생각하고 고민끝에 될 수 있는대로 민족의 보존을 더 소중히 생각했다."라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실력양성운동은 개량주의자들만의 주장은 아니었다. 도산 안창호는 독립전쟁을 통해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하고 이 과정에서 실력양성을 주장하였으며 사회주의자들도 민족의 실력양성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민족문제와 식민지통치문제를 외면하고 무조건 실력양성으로 문제를 희석시키려 했던 일제의 의도에 따라 움직였던 민족개량주의의 실력양성론과 자치론인 것이다. 이점에서 우리 민족운동은 구분하여 검토해야 할 것이다. 1926년 7월 8일 안창호는 상해 3.1당에서 임시정부 존립 각단체통일을 위한 연설회에서 자치론과 실력양성론의 허구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여 식민지 통치의 본질을 통찰한 바 있다. 

 

"……자치제가 시행되기에 이르렀을 때에 있어서의 현상은 여하한가를 말하건대 한국내에 거주하는 일본인 내지 일본동화자 만으로 정권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한국에 있어서의 지면(地面)의 대부분은 그들의 손에 있고 그리고 국내의 경제 또한 그들의 수중에 있으므로 장래 독립할 기회가 있어도 자치를 얻는다는 것은 절망일 것이다. 또 일파에서는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칭하나 이것 또한 불가하다. 실력 지력 경험이 부족한 아민족은 가령 일본정부가 간섭하지 않는다 해도 일본인 자본가와 경쟁할 수 없다. 하물며 우리에게 실력과 문화의 진보를 할 기회를 주지 않을 때에 있어서랴. 이제 한국내의 토지의 대부분은 일본인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불쌍한 우리 동포는 동으로 일본의 공장에서 혈한(血汗)을 흘리고 북으로는 만주의 황야에서 방랑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음은 실력양성 주창자의 이상을 웅변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민족말살기 민족운동계의 동향과 전향

1929년에 개시된 세계대공황의 여파는 농업공황으로 이어져 자작,소작농민이 몰락하고 농촌은 피폐해졌다. 이로 인해 많은 농민단체가 결성되어 소작쟁이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으며 반제반봉건의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일제는 만주침략을 개시하여 위기 국면을 타개하고자 하였고 제국주의 경제권을 만주까지 확장시켜 조선 부르조아층을 만주경제권으로 끌어들여 이들을 침략전쟁의 파트너로 삼았다.

 

한편 조선의 장래는 농촌에 달려있다고 판단하여 일찍이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은 식민지 모순이 첨예하게 들어나는 농촌을 중심으로 하여 자신들의 운동역량을 강화하고자 제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좌익계에서는 혁명적 농민조합을 조직하여 일제의 식민농정 반대, 토지혁명, 일제타도의 경제.정치투쟁에 나섰으며 민족주의자들은 총독부에 농촌구제대책을 촉구하고 농촌개량과 계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일제는 고양되는 농민운동과 체제변혁의 기도, 제도개선의 요구를 지배체제의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좌익계열의 농민운동에 대해서 철저히 탄압하였고 아울러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엄중한 취체를 가하여 공산당재건운동에 쐐기를 박았다. 이로써 공산주의운동이 침체되자 상대적으로 민족주의계열의 민족운동이 명맥을 이어가 동아일보와 동우회, 기독교와 그리고 천도교 교단 등의 민족주의계열에서 농촌계몽운동, 문맹퇴치운동 등의 활발한 농촌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민족주의자들의 농민운동이란 동우회의 지도자인 이광수가 동회의 민족운동론으로 제시한 3대기초사업 중에 '인테리겐자의 결성'을 운동의 원천으로 꼽고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민족주의계열은 농민층을 주체적인 운동세력이 아닌, 계몽의 대상으로만 파악하고 농촌이 안고 있는 모순과 문제를 식민지경제구조가 낳은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보지않고 농민층과 농촌의 내부 문제로만 인식하였다. 따라서 이를 계몽하는 것에 중점을 둠으로써 농촌과 농민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주지 못하였다. 더욱이 생산조합, 소비조합,협동조합 등과 각종 농민조직이 만들어져 정치성과 사회성을 띤 조직운동으로 발전해 나가자 총독부에서는 이를 위기의 눈으로 감시하고 농촌계몽운동에 대해서도 여타 개량주의운동을 체제안으로 포섭하였듯이 총독부가 주도하는 농촌진흥운동과 자력갱생운동으로 흡수하였다. 민중을 계몽과 구원을 차원에서 계도하는 것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하고자 한 민족주의자들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며 이러한 운동성은 쉽게 일제의 체제운동으로 흡수되어 버렸던 것이다. 여기에 체제개혁을 주장하는 어떤 경우의 운동일지라도 예외없이 탄압함으로써 민족주의자들의 농촌운동도 무기력해지고 말았다.

 

이런 차에 민족분열책과 총독부 교화운동에 적절히 이용하며 일면 방관적 태도를 보였던 일제는 실력양성론과 자치론의 개량주의 운동에 대해서도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조금이라도 띠고 있으면 노골적인 탄압을 가하고 내선일체의 민족말살을 획책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통치스타일의 변화라기 보다는 식민지통치의 본질이 그대로 표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는 1938년 현재 '선내 요주의 단체에 대한 조사'를 통해 각 단체와 그 인원의 성향에 대해 세밀히 파악하였다. 일제의 조사에 의하면 조사된 단체의 반수는 사변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갖고 하등 활동을 하지 않으나 반수는 국방헌금, 출정장병영송, 동방요배, 국기게양, 신사참배, 시국강연회, 전승기원제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조사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1938년 당시 조선에 존재한 운동결사는 시세방관단체 아니면 친일단체였다는 결론이다. 당시 일제의 조선인에 대한 취체 정도는 학교에서 선생이 학생들에게 "우리 조선인을 일본국민이라 칭하여 황국신민의 맹세를 제창하게 하는 것은 조선인의 羞恥다. 우리 조선인은 조선인임을 자각하여 조선어를 열심히 배워 성인이 된후 조선을 일본과 같이 세계에 과시하여 훌륭한 독립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한 것만으로 치안 방해죄로 검거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시세하에서 민족주의자들까지도 완전 전향을 보장받기 위하여 일어난 사건이 [동우회]와 [흥업구락부] 사건이다. 공산주의의 취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일제는 이제 개량주의 온건단체로 분류하여 그다지 경계를 하지 않았던 양단체를 민족혁명단체로 규정하고 완전히 해체시키는 작업에 들어갔다.

개량주의 민족주의자들의 최후?동우회와 흥업구락부의 전향?

1931년 신간회가 해소된 이래 민족주의계열로서 조직적인 운동을 전개한 단체로는 [동우회]와 [흥업구락부]가 있었다. 동우회는 미주 흥사단의 지부인 상해원동임시위원부의 지소인 [수양동우회]가 1929년 11월에 수양이라는 두자를 빼고 개칭된 것이다. 원동위원부가 도산의 직접 주도하에서 혁명운동과 흥사단운동을 아울러 전개한데 비하여 국내 동우회는 실력양성과 개조운동이 주된 활동이었다. 운동노선을 둘러싸고 수양동우회 내부에서는 '수양단체로서는 청년투사를 획득할 수 없으므로 실력양성주의를 버리고 정치적 훈련투쟁을 거쳐 직접적 혁명운동을 단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수렴되는 등 내부에서부터 혁명운동으로의 전환을 강력히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개정약법 제2조에서는 '본회는 신의있는 조선청년을 규합훈련시키고 신조선건설의 역량을 증장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한 '신조선건설'의 문구를 '신문화건설'로 후퇴하여 일제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활동을 하였다.

 

당시 동우회는 학계,언론계,산업계 등에서 활약하는 부르조아 계층의 명망있는 인사들이 회원으로 가입하였지만 이들 부르조아계층은 일본 식민지통치를 보완해주는 계층이었으므로 일제는 그들을 큰 위협세력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는 대륙침략의 정세와 황민화운동 시기에 좀더 확실하게 전향을 보장받고자 동우회를 '저 상해임시정부 기타의 민족주의단체와 같이 급진적은 아니지라도 진정 조선독립을 열망하는 동지를 획득하고 그 실력을 양성하고 영구적 사업으로 활동을 계속하여 왔으며……'라고 운운하며 동우회를 신간회 해소 이후 가장 유력한 단체로 부각시켜 억압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동우회가 표면 수양단체를 가장하여 교묘히 당국의 취체를 면하고 이면에서는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執拗한 운동을 계속해 왔다고 경계하면서 탄압의 구실로 1936년에 총독부에서는 동우회 이사회 소집통지서를 일본어로 쓰고 회의도 일본어로 진행하라고 요구하였다. 동우회에서는 일제의 태도 변화에 대한 대책을 숙의하는 과정에서 1937년 6월에 동우회회원들이 총검거되었다. 당시 181명이 체포되고 1심,2심을 거쳐 41명에게 치안유지법 및 제령7호 위반의 유죄판결이 내렸다. 그러나 단원들의 전향으로 4년만인 1941년에 전원 무죄로 판결받았다.

 

[흥업구락부]는 Y.M.C.A 총무인 신흥우가 1921년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제1회 태평양교육대회에 한국대표로 파견되었을 때 이승만을 만나 동지회의 자매단체를 구상하였다가 1925년에 가서야 이상재,장두현,이갑성,유억겸,오화영,구자옥,신흥우가 모여 조직한 결사이다. 신흥우 신문조서에 의하면 "흥업구락부라는 명칭에서 대업을 일으킨다고 하는 것은 즉 조선독립의 의미"라고 진술하고 있듯이 실력에 의하여 어떤 시기에 조선의 독립을 실현을 조직 목적으로 하였다. 1938년 2월 서대문서에서 연희전문학교 좌익교수들의 '경제연구회' 결사사건을 취조하던 중 유억겸 방에서 동지회와 밀접한 연락이 있음을 증빙하는 문서가 발견되었고 윤치영,구자옥을 취조하던 중에 흥업구락부 조직이 발각되면서 1938년 5월 20일부터 관계자 54명이 검거되었다. 

 

흥업구락부의 주요 회원은 종교계, 교육계, 언론계의 인물들로 동우회 회원들과 별다른 구분이 없는 성격상 동일 집단이다. 그러나 이 양 단체는 각각 안창호계열의 미주 흥사단과 이승만계열의 동지회를 모단체로 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뚜렷한 노선상의 혹은 방략상의 차이없이 대결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처럼 양 단체의 반목은 지식분자들의 자유주의,개인주의의 한계를 보게 한다. 검거된 동우회와 흥업구락부 단원들은 모진 고문과 위협, 그리고 일제의 회유에 굴복하여 전향을 선언하였다.

 

동우회는 단원들의 명의로 1938년 6월 18일에 '전향' 성명서가 발표되었고 흥업구락부는 그해 9월 3일자로 전향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들의 전향성명서의 내용은 거의 동일한 문장인 것으로 보아 자발적인 성명이라기 보다는 총독부가 작성한 원안에 그대로 서명하였거나 혹은 강압에 의해 작성되어 발표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성명서 발표로 조선 민족주의 결사단체의 마지막 보루였던 동우회와 흥업구락부는 완전히 일제에 굴복하게 되었으며 민족주의를 포기하고 황국화로 나가게 된 완전한 전향이 된 셈이다. 일제는 동우회와 흥업구락부의 검거로 경성의 민족주의단체는 거의 박멸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전향운동은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국외에서도 진행되어 한인들이 유력하게 활동하고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일제는 한인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동요의 기색이 있는 자들을 회유와 위협으로 비밀리에 포섭하였다. 만주침략 이후 포섭공작은 더욱 극성해져 어제의 동지가 밀정이 되어 일제로부터 독립운동가 요인을 암살하고 독립운동가 사이를 이간, 중상모략하라는 지령을 받고 암약하는 자들이 많았다.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단원들은 상해를 떠나 임시정부와 함께 중경으로 이동하였다. 상해 주둔 일본군과 일본 영사관경찰은 중경과 미주지역에서 활약하고 있는 단원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상해에 잔류한 단원들을 위협하여 전향을 강압하였다. 이 결과 단원 53명의 명의로 1940년 7월 16일자로 해소성명서가 발표되었다. 그 내용은 국내 동우회 전향의 소식을 듣고 원동지부는 자발적으로 해산할 것을 결정하며 과거의 잘못된 사상을 일소하고 대일본제국의 황국신민으로서 전향한다는 선언이었다. 아울러 일제는 재류조선인 보호무육사업에 충당한다는 명목으로 원동위원회의 소속 재산(남경의 토지와 은행예금)을 무조건 차압하다고 고시하였다. 중경에 있었던 단원들은 본인들은 모르게 자신의 명의를 도용하여 발표된 해소성명에 접하고 당장 반박 성명을 발표하여 이를 부인하였지만 해소 성명서는 인쇄되어 중경과 미주, 조선 각 방면으로 전파되었고 한글신문에까지 발표하여 각지의 흥사단원들을 비롯한 민족운동계에 깊은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공작은 이미 총독부에 의해 자행된 국내 수양동우회, 흥업구락부사건과 같은 수법으로 일제가 노리는 전향운동의 효과였던 것이다.

종교적 믿음마저 배신한 종교계의 전향

3.1운동이 종교계가 중심이 되어 전개된 것으로 보아도 종교 교단의 지도력과 조직력을 능가하는 결사는 없었다. 일제는 3.1운동이후 한국 민중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종교계의 친일화획책에 심혈을 기울여 투자하였다. 총독부가 1938년에 내선일체 강화를 위한 시설계획을 제시한 중에 유, 불, 기독교, 기타 유사종교(천도교?필자)로 하여금 일본정신에 합치되게 노력할 것이라는 방침 선언은 그간 종교계의 친일화를 도모하던 사업의 결실을 거두고자 한 조처였다. 종교계의 거물로서 민족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의 주구가 된 이로는 천도교의 최린, 이종린, 불교계의 이종욱 등이 있는데, 일제는 이들에게 교권을 장악하게 하는 반대급부로 충성을 요구하였고 이들은 자신들의 출세 댓가로 신자들을 전쟁동원 황민화운동에 내몰았다.

 

종교계의 대량 전향은 1937년 천도교 인사 7천명이 검거되었다가 전쟁협력을 약속한 것이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계는 1938년 동우회와 흥업구락부원의 전향이 기독교인들의 전향을 부추겼으며 이들의 경쟁적인 일본교회종속화 과정은 바로 한국 기독교의 부끄러운 역사이다. 일찍이 선교사들에 의해 근대교육을 받아 민족의식을 각성한 기독교인중에는 독립운동에 종사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일제가 정책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신사참배 거부를 통해 일제에 항거하였다. 기독교계의 신사참배 거부가 황민화에 큰 장애가 되자 일제는 집요한 탄압과 회유공작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고, 일제는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이며 예배행위가 아니고 조상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것일 뿐이다.'라는 논리로서 참배를 거부하는 기독교계의 학교와 교회를 폐쇄시키는 강경책을 썼다. 그리고 기독교의 일본화운동을 전개하여 친일분자들을 교회에 포진시켜 교단과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전향운동을 벌리었다.

 

윤치호, 양주삼 등이 지도자로 있었던 조선기독교연합회가 1935년 세계연맹으로부터 탈퇴하여 일본기독교 연맹 산하로 들어가면서 기독교의 친일화는 활발히 진행되었다. 천주교교단에서는 1936년 5월 로마 교황청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신사에 참배해도 좋다는 훈령을 내려 신사참배를 허용한 바 있으며 감리교에서는 1936년 6월에 감리교 총리사 양주삼이 총독부 좌담회 참석후 일제의 요구에 순응하기로 결정하였으나 감리교 내부에서 문제가 제기되자 1938년 9월에 신사참배는 국민의식이지 종교가 아니므로 어떤 종교를 신봉하든지 신사참배가 교리에 위반이나 구애됨이 추호도 없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여 일제의 주장을 대변하였다. 장로교에서도 1938년 2월에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이래 전국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였다. 이와같이 종교 교단의 신사참배 결정은 일제의 치밀한 계획과 강제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일제 식민지통치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을 약속한 것으로 전향의 선언과도 같은 것이다.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끝까지 투쟁하다가 순교하거나 옥고를 치른 이들이 많았지만 교단의 변절자들은 기독교의 탄압을 면하고자 했다는 구실아래 일제 권력에 의존하여 과잉충성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확고히 다져나갔다.

 

한편 기독교계 친일어용단체의 등장은 교회를 더욱 분열시키고 교도의 친일화를 획책하였다. 1938년 5월 기독교단의 지도자들이 망라되어(정춘수, 김종우, 김우현, 차재명, 이명직, 윤치호, 양주삼, 이동욱 등) '경성기독교연합회'를 조직하여 종교보국을 선언하였고 동년 7월에는 '조선기독교연합회'로 확대 개편하면서 기독교계에서는 '일본적 기독교의 수립'이라는 슬로건 아래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하고 서로 앞다투어 충성 경쟁을 하였다. 1939년 장로교 제 28회 총회에서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결성하기로 의결한 후 각 노회별로 지부연맹을 만들어 부일협력에 나섰으며 1939년 10월에는 한국감리교회를 일본 감리교회에 종속시키기 위한 일선감리교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정춘수가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39년 9월 조선감리교 제4대 감독으로 피선된 정춘수는 1940년 10월 총리원 이사회에서 경찰당국의 위임장을 제시하면서 이사들을 위협하는 가운데 감리교혁신안을 통과시켜 감리교의 일본화와 전쟁협력을 선언하고 나섰다. 기독교계의 변절은 그들의 종교적 믿음보다도 황민화가 종교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종교적 양심을 저버린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는 신념에서 온 정신적 전향이라기 보다는 제국주의의 이해를 대변했던 조선 기독교의 뿌리없는 신앙과 순교정신이 없는 연약한 인테리의 패배의식과 시세 편승, 기회주의에 다름아니다.

 

이는 흥업구락부사건으로 체포된 신흥우의 신문조서를 통해 그 면모를 보게 된다. '조선기독교의 진영은 민족주의자의 온상이었는데 시대의 변천과 민심의 추이는 어느 때까지나 그런 어리석음을 허용하지 않게 됩니다. 즉 종래의 구미숭배의 미몽으로부터 깨어 구미주의적 기독교로부터 벗어나고 일본정신에 입각한 일본적 기독교로 갱생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여 변절의 변을 말하더니 [東洋之光} 1939년 2월호에서는 '조선기독교의 국가적 사명'이라는 논설에서 "……조선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일본제국을 사랑하는 것이며 또한 일본제국의 충실한 신민으로서만 가능한 일이다. 금일의 우리들은 종교인이기 전에, 조선인이기 전에, 우선 첫째로 일본인이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된다……천황페하의 충성스러운 적자로 오직 일본을 사랑하라! 그리고 일본을 사랑하기 때문에 제국에 충실히 순응, 협력, 돌진하라. 이것이 우리들 조선 기독교에게 주어진 신의 명령이다. 나는 감히 이렇게 확신하는 바이다."라고 하여 완벽한 전향의 변을 토로하였다.

변절자들의 학력 및 민족운동경력과 부일경력(가나다순)

 

성명 / 학력 / 민족운동경력 / 부일경력

김동원 / 평양일어학교 졸, 일본 메이지 중퇴 / 평양대성학교 교사, 105인사건으로 피체, 동우구락부 결성, 수양동우회원, 동우회사건 피체 / 황도학회(1940.12) 발기, 조선임전보국단 참여(1941.10), 평양지원병훈련소 후원회 학병독려유지간담회(1943.11)

 

김활란 / 이화학당, 미 오하이오 웨슬리언대, 보스턴대 철학과 / 근우회발기총회준비위원, 초대중앙집행위원 / 애국금차회발기인(1937), 조선부인연구회, 국민정신총동원조선동맹, 조선교화단체연합회, 조선임전보국단부인대,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언론보국회

 

김희선 / 일본육군사관학교졸 / 청도회담참가, 안주군수재직중 3.1운동 상해탈출, 대한민국 임시정부군무부차장, 임정산하 육군무관학교 교장, 임시정부의정원의원(1922.1) / 일제밀정혐의(1922초)

 

박순천 / 부산일신여학교졸, 일본여자대학사회학부졸 / 마산3.1운동참가,동경유학회주최 3.1운동기념회참가, 경성가정여숙창설(1940) / 황도학회발기인(1940.12), 조선임전보국단연설, 조선임전보국단부인대지도위원(1942) 

 

박인덕 / 이화학당졸, 미 웨슬리언대 사회학박사, 컬럼비아사범대교육학석사 / 3.1운동참가수감, 뉴욕에서 근화대결성(1928), 조선직업부인협회(1932), 감리교농촌부녀자지도자수양소(1933), 농촌진흥운동 / 녹기연맹일본어강습참여(1939), 덕화여숙 창설, 임전대책협의회 대강연(1941.9.4), 조선임전보국단결전부인회결성(1941.12.27), 조선언론보국회(1945.6.8)

 

박희도 / 연희전문문과중퇴 / Y.M.C.A열심단참여, 3.1운동33인대표,신생활지창간(1922.3.11), 신간회발기인(1927.19) / 시중회참여(1934.8), 시국강연(1937.9), 동양지광창간(1939.7), 협동예술좌창단(1939.8), 국민총력조선연맹참사(1940.10.16), 미.영타도좌담회(1941.12.20),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1941.12)

 

백관수 / 경성법전졸, 일메이지대졸/2.8독립선언학생대표, Y.M.C.A간사(1921), 조선일보취체역 / 경성군사후원연맹 창립위원(1937.7.30), 시국강연반전라북도반참여(1937.8),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참여(1938.6), 조선방공협회 평의원(1938.9.16)

 

서범석 / 양정고보졸,북경대학중퇴 / 3.1운동가담 만주방명, 조선일보기자, 민중운동자대회사건으로 투옥, 동아일보봉천특파원/ 만선일보편집부장,흥아협회사무장(1936), 협화회봉천성대표(1939), 동남지구 특별공작후원회본부상무위원(1941) 

 

서 춘 / 동경고등사범졸, 동경제대철학부, 경도제대경제학부졸 / 2.8독립선언대표, 동아일보경제부장(1927) / 친일논고각종신문, 잡지에 기고, 방송선전협의회강사(1937), 목요회회원(1938), 친일잡지태양창간(1940.1), 매일신보사주필, 국민총력조선연맹(1940.10), 조선임전보국단평의원(1941.9)

 

신흥우/배재학당졸, 미 남가주대 문과졸/배재학당교장(1911), Y.M.C.A 총무(1921), 기독교총회뉴욕대회한국대표로 참석(1924.5), 흥업구락부 결성(1925.3), 적그신안단조직(1933), 물산장려회 참여, 소년척후단조선연맹, 조선교육협회, 조선기독교연합회세계기독교청년회연맹가맹(1924.7)/임전대책대강연회연설(1941. 9), 애국열변대강연회(1941.12), 싱가폴공략대강연회(1942.2), 임전대책협의회 위원,조선임전보국단 상무이사, 동양지광 친일논문 '조선기독교의 국가적 사명'(1939.2월호)

 

양주삼 / 미예일대신학과졸 / 감리교신학과교수(1915), 개성한영서원교편 / 경성교화단체연합회이사(1933.2), 시국강연회 강연(1937.8), 내선감리교회합동문제연합위원회위원장(1939.10),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이사(1940.9), 감리교혁신5조항결의(1940.10), 국민총력조선연맹평의원(1940.10), 대동민우회 상임위원(1941. 8), 흥아보국단준비위원회상임위원(1941.8), 임전대책협의회중앙위원(1941.8), 조선임전보국단(1941.10), 미.영격멸대강연회(1941~1943), 시국인식강연회(1944.3)

 

유억겸 / 동경제대법학부졸 / 연희전문교수, Y.M.C.A활동, 조선사정연구회 조직(1925), 흥업구락부 조직, 신간회참여, 흥업구락부사건으로 피체 / 조선기독청년회 일본기독청년회가맹추진(1938.10),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경성분회 제3분회장(1939.7), 흥아보국단 준비위원(1941.8), 임전대책협의회 참여(1941), 임전보국단이사, 언론보국회 명예회원(1945.6)

 

윤치영 / 동경정측영어학원, 와세다대졸, 미 하와이 프린스턴 컬럼비아 엘리자베스 조지워싱턴대에서 학업 / 동아일보 주미통신원, 구미위원회 이승만보좌, 귀국(1937) / Y.M.C.A총무(1938), 임전대책협의회 참여(1941), 미.영타도대화담회 참여(1941.12.20), 동양지광에 친일논조 기고

 

윤치호 / 상해중서학원입학, 미 벤더빌트, 에모리대 학업 / 독립협회 가담(1897), 대한자강회조직(1906), 개성한영서원설립, 신민회 참여, [105인사건]으로 투옥, 대성학교교장, 민립대학설립운동, 물산장려운동 참여, 흥업구락부 회장, 연농회조직, 농촌계몽운동 / 교풍회 회장, 각도조선인대표자회의, 토요회 참여(1931.9),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상무이사, 국민총력조선연맹이사(1940), 흥아보국단위원장, 조선임전보국단고문, 위원장, 중추원고문, 대화동맹이사장

 

이갑성 / 경신학교졸, 세브란스의전약학과졸 / 3.1운동 33인대표, 민립대학기성회중앙부집행위원, 조선물산장려회 선전부위원, 흥업구락부간사, 봉천피난민동포위문회 집행위원, 신간회발기인 / 상해도피(1929.7.?), 일본 三菱만주신경출장소장 임명, 주식회사 일만산업공사전문취체역, 경성공업사중역 

 

이광수 / 메이지학원보통부졸, 와세다대 고등예과졸 / 오산학교교사, 2.8독립선언대표.선언서 기초, 상해망명, 상해 독립신문편집부장, 임시사료편찬위원회주임, 흥사단원동임시위원부원, 수양동맹회조직(1922), 수양동우회로 개편(1926), 동아일보편집국장, 동우회사건 / 조선문인협회장(1936), 황국위문작가당결성(1939.3), 황도학회발기인(1940.12), 임전대책협의회참여, 대동아문학자대회 조선대표(1942), 대화동맹이사(1945. 2), 조선언론보국회참여(1945.6), 대의당위원(1945.6)

이종린 / 김복한문하에서 경학수학, 성균관박사 / 항일의병참여, 대한협회참여, 제국신문사기자, 천도교교령, 조선독립신문발간, 개벽사사장취임, 6.10만세운동참가, 물산장려회이사장, 신간회경성지회위원장 / 전국순회강연반조직(1937.8),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10.20), 국민정신총동원연맹(1940.10.16), 임전대책협의회 참여, 임전대책연설회, 조선임전보국단 상무이사

 

이종욱 / ? / 월정사講院에서 불교내용강의, 監務,3.1운동만세시위참여, 2.7결사대대원, 한성임시정부 강원도대표(1919.3. 23), 청년외교단, 국내연통제활동, 상해임정의정원의원(강원도대표) / 조선불교중앙교무원서기와 월정사감무 및 주지(1930), 31본사주지대표(1937), 조선불교조계종종무총장(1941), 전국본사, 말사에 일본군승리를 위한 국위선양무운장구기원제 봉행, 전국사찰지시(1937.7), 친일강연회(1937.8), 조선임전보국단상무이사,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장덕수 / 동경 와세다정치경제과졸, 미 오레곤대 신문학과, 컬럼비아대 정치학과수료 / 조선학회 조직(1915.12), 신한청년당결성(1918), 2.8독립선언후 귀국항 피체, 하의도유배, 조선노동공제회 평의원(1920.4), 서울청년회 조직(1921.1), 조선인산업대회위원(1921.9), 조선교육회 평의원, 민립대학 기성준비회 발기위원 / 사상보국동맹 제4분대장(1936.7.5), 임전대책협의회(1941.8), 조선임전보국단 준비위원(1941.12), 동아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참사, 전쟁동원강연회강연

 

정인과 / 숭실전문졸, 미 산엔셀모신학교졸, 프린스턴 신학연구원, 프린스턴 정치사회학과, 컬럼비아대 교육학 / 미주 대한민국민회회원, 안창호수행 상해도착(1919.4), 임시의정원부의장(1919.8), 임시정부외무차장, 조선주일학교연합회협동총무(1925), 유년주일학교 강연내용으로 보안법위반구속, 불기소처분, 동우회사건으로 구속 / 국민정신총동원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결성(1939.9), 장로교총회중앙상치위원회총간사(1940), 헌종독촉(1942.5.11), 영.미타도 좌담회참석, [매일신보], [조광] 친일논설정춘수 / 경성신학교졸, 협성신학교졸 / 3.1운동 33인대표, 개성북부교회, 개성중앙교회 전임, 신간회 본부 간사, 흥업구락부, 적극신앙단참여 / 경성기독교연합회위원장(1938. 5), 조선감리교제4대감독(1939.9), 국민총력연맹문화위원(1941), 국민총력조선기독교감리회연맹주최 혁신요강발표(1941.3), 종교보국 5개항 결의(1941.10), [애국기헌납 및 교화병합실시건]결의(1944.3), 황도문화관설립(1944.9), 조선전시종교보국회 이사(1944)

 

주요한 / 일본메에지보통부졸, 동경제일고등학교수학, 상해호강대학졸 / 3.1운동후 상해망명,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편집, 상해 흥사단원동위원, [독립신문]기자, 귀국(1924), 수양동우회 [동광]지 편집, 광주학생운동에 따른 민중대회발기서명으로 투옥, 기소유예, 동우회사건 / 시국유지원탁회의참석(1938. 10), 조선문인협회간사(1939.10), 임전대책협의회 전형위원(1941), 조선임전보국단 사업부원(1941.10), 미.영타도강연대회 연설, 대화동맹 심의원(1945.2), 대의당 위원(1945.6)

최남선 / 일 와세다 지리역사과중퇴 / 조선광문회설립, 고서적수립간행, 국학연구, 3.1독립선언서 기초, 동명, 시대일보 간행 / 조선사편수회 편수위원(1928), 중추원참의, 망몽일보사 고문(1938), 만주 건국대학교수(1939), 만주 동남지구 특별공작후원회 고문, 조선임전보국단이사(1941.10), 임전대책협의회 위원, 학병권유동경파견(1943), 조선언론보국회 명예위원, 동경메이지대학에서 열린 학도궐기대강연회연사(1943.11)

 

최 린 / 황실유학생으로 동경부립제1중학교중퇴, 일 메이지대 법대졸 / 일심회사건으로 일본망명(1901), 천도교입교(1910), 보성전문강사, 3.1운동 33인대표 / 동경에서 아베와 자치협의(1926), 대동방주의 제창(1933), 중추원칙임참의(1934.4), 시중회 회장(1934.11), 매일신보사장(1937), 조선총독부시국대책조사위원회 참여(1937.8),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발기인(1938. 6), 국민총력조선연맹이사(1940), 임정대책협의회 위원(1941. 8), 조선임전보국단 부위원장, 언론보국회 회장(1945.6)

황신덕 / 평양숭실여학교졸, 일 와세다대수료, 일본여자대학 사회사업부졸 / 송죽회 조직, 시대일보, 중외일보 기자(1925-), 동아일보가자, 오우회 중앙집행위원(1927)/시국강연회 연사(1938. 6),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부위원(1940.10),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1942.1)

끝으로

앞서 살펴보았듯이 민족주의자들의 변절 요인은 내적,외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외적 요인이란 일제의 탄압과 회유이지만 내적 요인은 그러한 외적 요인에 대해 쉽게 변절한 민족주의자들의 속성이다.

 

민족주의자로서 변절했던 자들의 공통점은 대개가 일본 및 미국의 해외유학파들이며 기독교인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여하한 사정이 있겠지만 당시로는 사회적 특혜를 누리고 있었던 계층으로 선교사를 통한 근대교육을 통하여, 또는 유학생활 중에 앞선 근대서구문화와 문명에 접하면서 그 우수성을 체험하고 근대화지상주의에 입각한 문명개화론을 주장한 자들이다. 이들은 일면 후진된 조국을 근대사회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변혁사상을 품고 절대 독립을 주장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들도 있으나 서구문명사회로의 무조건적인 동경은 비주체적 근대화와 서구화의 주장을 낳게 됨으로써 한때 민족운동에 종사하기도 하였지만 그들의 내부에서는 이미 민족적 자부심과 자아를 상실하고 자기 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불신과 조국의 현실과 민족의 미래에 대한 비관적 입장을 갖고 열등감에 빠져버렸다. 그들은 처참한 조국의 현실을 애써 외면하거나 현실순응적이며 기회주의적인 속성을 보여주더니 자신들의 지식정도에 걸맞는 사회의 지도적 위치를 점하는 부르조아층으로 자리를 잡으면서는 제국주의 가치관에 매몰되어 갔고 종속되어 결국은 민족을 부정하고 민족말살을 획책하는 일제의 매판적 주구가 되었던 것이다.

 

민족주의자들 중에는 인테리 지식분자들은 한 때 민족운동을 전개하여 일제의 탄압을 받은 경험이 있는 자들이거나 민족운동에 종사하여 일제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고 있던 자들이다. 그들은 인테리층을 사회개조의 원동력으로 보고 일반 대중은 계몽의 대상으로만 파악하여 사회구조적 모순을 타파하기 보다는 대중의 도덕성,위생,봉건성에 대한 개조를 현실문제로 보았고 이에 대한 운동만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고통을 수반하는 비타협의 길을 택하기 보다는 식민지 통치를 현실로 받아들였으며 실력양성, 혹은 준비론,자치론을 주장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해외에서 활약하던 실력양론자들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해외파들은 민족의 독립을 목표로 하였지만 국내 개량주의적 실력양성론자들은 일제의 민족개량운동과 차별성이 없이 결국 민족분열책에 이용되거나 일제의 관제운동에 흡수되어 민족운동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의 비난을 받았다. 그 결과 운동성을 잃고 민족주의에서 이탈하게 되었으며 일제의 파시즘이 강화되자 외적 조건에 쉽게 좌절되어 갔던 것이다. 그리고 민족 부르조아 계층의 자기 출세주의와 개인주의, 영리추구의 성향은 민족의 현실 외면은 물론 민족주의계열간의 파당을 조성하여 합치된 단결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일제에 이용당하였다. 특히 기독교, 불교, 천도교 등의 종교계에서는 반일성향을 갖고는 절대로 종교지도자가 될 수 없도록 하자 경쟁적으로 일제에 협력하여 황민화,전쟁동원에 협력하여 교권을 장악하고 아울러 개인적 영위를 추구하였다.

 

민족말살기에 민족주의자들 중에 과잉적으로 일제에 충성했던 자들이 많았던 것은 공산주의자들에 비해 민족주의자들은 특별한 사상체계나 조직적 구속력이 적었으며 심정적으로 민족적 양심은 살아있다해도 이미 일제에 정신적으로 굴복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전향자들은 완전한 친일분자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정신적 고뇌가 컸겠지만 그들은 반일감정보다는 열등감에 시달렸고 전향 후에는 일본인들이 자신을 계속 의심하고 적대시하지 않을까 전전긍긍 하면서 이로부터 탈출의 길은 일제에 맹목적 충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확신하였다. 그들의 지식정도로 보아 수탈당하는 식민지민과 배를 채우는 제국주의의 관계를 몰랐다고 볼 수 없다. 다만 힘의 논리에 의하여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식민지민의 질곡에서 광복되는 길은 완전한 종속과 민족의 말살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자위하였다. 그들은 민족을 배신한 댓가로 각 방면의 최고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고 이러한 일제의 배려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하여 더욱 경쟁적으로 충성하였으며 일제는 전향이라는 단어를 광용하여 변절을 시세에 따른, 민족을 위한 올바른 선택인양 호도하여 변절자들의 민족적 양심을 잠재웠다.

 

의문이 남는 것은 그들의 변절이 과연 강압과 위협에 굴복하여 신념과는 관계없이 자신은 물론 민족을 배신한 것인가, 아니면 일제에 굴복하였다해도 내선일체의 이상을 믿으며 신념을 갖고 선택한 전향인가 하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이광수(香山光郞)가 {每日申報}에 기고한 전향의 변은 당시 변절자들의 심적 성향을 일면 보여주고 있다고 보아 끝으로 인용하였다.

"원래 전향(轉向)이란 사실에는 맞지아니하는 용어이다. 진실로 국가에 대하여서 반의(叛意)를 포회(包懷)하였던 자가 새로 애국심에 자각하는 것이 정당한 의미의 전향이어니와 이런 의미의 전향자도 없지는 아니하겠지만은 그것은 아마 屈指할만한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만일 전향이라는 이름으로 일컫어지는 수십만의 조선 지식계급(소위 전향자란 대개 유식에서나 유산계급이라)이 전향전에 진실로 반국가 사상을 가졌었다하면 그것은 과거의 조선통치의 효과를 부인함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어떠한 전향을 하였는가. 소극적 수동적인 피통치자적인 의식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황민화와 아울러 국책에 대한 협력을 하기로 결의한 것이 소위 전향이다……흉중에는 이미 신신념이 성숙하였으면서도 종래의 구각(舊殼) 깨뜨리기가 어려워서 번민하던 자들이 조기적으로 태도를 표명하게 된 것은 전향정책의 일공적(一功績)이다. 그러나 이로부터야말로 진정한 전향시대요 보편적 전향시대다. 자유주의, 개인주의, 이윤주의의 수습에서 천황귀일 멸사봉공(天皇歸一 滅死奉公)의 신체제에의 전향이다(半島民衆의 愛國運動(二),{每日申報} 1941.9.5(1)).